#1. 흘러간 마음

 

 

2012년 하반기 이후 거의 서재 활동을 하지 못했다. 내가 책을 돌아보지 않은 시기는 정확하게 6월 달부터. 그런데 엊그제 서재의 달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덜커덕 한동안의 무심함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이 뭣고. 누가 무엇이 되었는고. 내가 왜.

 

서재 활동을 하지 못하는 시기 다른 활동과 개인적인 공부 등으로 어떻게 한해가 지나갔는지 인식할 수 없었다. 그동안 출판사로부터 몇 차례 책을 무상으로 받고 서평도 쓰지 못한 책이 수두룩하며 아예 들쳐보지도 못한 책도 상당하다. 미안해서 받아 놓고 그렇게 무책임한 시간이 흘러 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심지어는 어떻게 서평을 썼는지 조차 잊어버렸다고 할까. 다시 돌아와 보니 이 낯설음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꼭 옛날 애인과 재회라도 한 듯한 기분. 그동안 나 없이... 잘 살았어?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아무렇지 않았던 것도 아닌 것 같다. 차츰 서재와 멀어져 간 이유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천천히 조금씩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마음은 흘러가 버리는데 무엇을 좇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 사이도 그런 걸까. 어떤 이와 친해지다가도 서로간의 오해로 틈이 벌어지고 한동안 멀어졌다가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반가와 지는 것이. 그러고 보니 왜 헤어졌는지 모르게 헤어져 버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걸까. 그렇담 우리네 이별의 이유란 그 이유 때문이 아니고 그저 헤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인 걸까.

 

이곳에 머무르지 않는 동안 나는 열정에 대해 위험성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너무 열심히 활동하고자 하는 의지가 좋다고 만은 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이든 일이든 그것을 대상삼아 대부분의 일상을 의존하고 기대기 시작하면 반드시 실망과 상처가 따르기 때문이다. 적정한 거리두기. 한발짝 물러서기. 잠시 쉬어가기. 멈춘 것에 조바심 내지 않기. 때로는 멈춘 것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지켜봐주기. 다시 마음이 일 때까지 그 마음 기다려 주기.

 

모든 것은 마음이 하는 일이다. 정작 글을 쓰고 있을 때 나는 글이란 무엇이고 어떤 글을 쓰며 생을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글을 안 쓰는 것도 아니고 안 쓸 것도 아니면서 그랬다. 불안이고 초조였다. 글을 수단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게 남은 마지막 수단이 혹시 글은 아닐까 싶어서 였을 것이다. 글을 안 써도 되고 글로 아무것이 안 되어도 좋다라는 마음이 들 때까지 글이 아닌 것들을 다시 찾아 취해보았다. 예전에 하던 일을 했고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다. 글을 안 써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믿었던 이 역설이 나를 다시 깨웠다.

 

그러다가 신기하게도 작년 말에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내 자신도 내 마음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랐다. 사람에게 마음이 한결 같다는 말은 틀려도 한참 틀린 말은 아닐까. 마음은 환경과 조건에 의해 얼마든지 변화하는데 어떻게 한가지로 묶어 둘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이제 변하지 않는 사람을 믿지 않고 오직 변하는 마음만을 믿는다. 그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변할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이 사실을 믿는 내 마음조차 변할지 모른다. 마음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우리는 때로 좇아가며 때로 머무르며 그렇게 내 하나의 마음이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

 

 

#2. 다시 흘러온 마음

 

 

마음 공부를 하면서 전문적인 서적과 유명한 스님들의 에세이, 혹은 불교 경전서들을 들쳐 보았다. 종교적인 접근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한 의도가 일차적이었다. 그들 중에 실생활에서 도움이 되는 책과 반복해서 읽기 좋은 책을 소개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독성, 탐욕과 화, 무지를 어떻게 정화하고 치유하여 더욱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지 알려준다. 요즘은 힐링 서적도 많고 저마다 건강한 마음을 회복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들을 하고 사는 것 같다. 그런데 단순히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일회성 위로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속세에 살고 있는 우리가 불교에 귀의해 절에 들어가 스님처럼 도를 연마하자는 뜻이 아니다. 어떤 분야 어느 지위에서건 내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치유하는 불교읽기에서는 평가기준을, 마음공부를 통해서 인간이나 자연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그릇된 생각이 잘 치유되어 안정되고 조화로운 정서 상태를 회복했는가에 둔다. 또 자신의 내면과 대인관계에서 얼마나 말과 행동과 생각이 조화롭고 균형있게 드러나는가에 관심을 둔다. ...(중략) 내면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명료해져야 하고, 대인관계에서는 뭔가 그만큼 더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너그러운 말, 행동, 생각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치유하는 불교읽기는 바로 이와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말과 행동과 생각을 치유하는데 일차 목표를 둔다.
- 22p

 

보다 적게 화내고 정서적으로 일관된 인격이란 말처럼 평범하고 쉬운 단계가 아니다. 흔히들 나이가 들면 절로 수행이 된 인격으로 변화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상에 대한 집착이 더 심해져 자아중심적인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고,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나의 가치관은 이것이다는 식의 ‘나’에 대한 온갖 고정관념만 늘어날 뿐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믿다가 그 ‘나’에 속고 그 ‘나’가 진짜 자신인 줄 착각하며 상대에게 ‘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기수인가. 물론 나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불교에서는 자아란 결국 과거 경험의 누적과 그에 대한 집착일뿐 고정된 자아의 실체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학교와 사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아의식을 교육받고 내 생각, 내 주장, 내 방식, 내 견해를 정립하여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 나를 만들고 알리는 길이라 배워왔다. 이러한 과정이 2,30대 치열한 경쟁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하는 성과위주의 세월을 지나온 세대에겐 자아야 말로 조화로운 삶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무엇이 진짜 나인지,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내가 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시원하게... 답을 할 수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전히 자신과 이웃을 끊임없이 비교하고(我慢, self-pride), 자기중심적인 사랑(我愛, self-love)을 하면서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我癡, self-ignorance), 그러면서도 영원하고 독립적인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我見, self-view)를 버리지 못한다. 이것들이 어떻게 인간을 고통에 빠지게 하는지 왜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그 중심에 철저하게 믿어 의심치 않는 자아가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괴로움이 있는 곳에 반드시 ‘나’가 있다. 아무리 ‘너’가 있다 해도 결국 ‘너’를 보고 무언가를 느낀 ‘나’를 피할 수 없다. 그러니까 괴로움의 뿌리를 본다는 것은 그 괴로움 속에서 ‘나’를 본다는 것이다. 이 책은 화나고 섭섭하고 불편한 마음 이면에 ‘나’를 드러내고 세우려는 마음이 손상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에너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한다. 혹시나 요즘 들어 사람들의 마음이 변했다고, 아니면 늙어가는 내 몸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면 괴로움의 화살을 내 마음으로 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 마음 어느 구석이 고장났나 먼저 알아보고 집중적인 치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반야심경이다. 제대로 느리게 읽기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조금은 어렵고 모두 이해하지는 못해 답답할 때가 있다. 중요한 건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안해진다는 것. 마음 공부를 시작하고 나면 자꾸 더 깊고 넓게 마음을 헤쳐 들어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이 책은 지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머리로는 이해하나 제대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는 없는 책이다. 아는 것과 하는 것, 그리고 사는 것이 일체될 때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이루어지는 것 일테고 내 수준에선 그저 ‘알음알이’나 ‘엿보기’에 그치는 듯 하다.

 

 

참고로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사이트를 첨부한다. 내 경우 이동 중에 스마트 폰으로 들으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목소리 톤과 이야기 하는 방식이 자신에 맞는 스님을 택하여(?) 하루 한번 명상하듯 들으면 공부도 되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 종범스님의 향기있는 법문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1&PID=P457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1&PID=P678

 

- 치유하는 불교읽기(서광스님)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1&PID=P741

 

 

물론 머리로는 이렇게 알고 있지만 또 화는 나고 그 화를 참기는 어렵다. 단지 지난 육개월 동안 이곳을 떠나 조금이나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로 화가 나고 그 마음이 곧 떠나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며 그러는 동안 화가 난 나는 화가 나지 않는 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다. 내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노라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 무엇이든 깊고 처절하게 바라볼 수 있다. 언젠가는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 또 불현듯 화가 나고 슬프겠지만 그것을 좇아 머무르지 않아야 함을 아주 조금 깨우쳤다고 할까...

 

자신의 마음구조와 반응행동, 인간관계 패턴에 대한 치열한 이해는 사는 동안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오늘 하루도 마음 편하게 내일도 모레도 사는 날, 아니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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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1-0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는 날'은 생각하지 마시고요,
'살아가는 오늘'만 즐거이 생각하셔요.

반야심경을 읽은 뒤에는 금강경 읽으시겠지요?
한글로 옮겨진 불경은
누가 옮기느냐에 따라 줄거리나 느낌이 달라지는 듯해요.
그래도, 책마다 서린 이야기를 잘 헤아리면서
기쁘게 받아들이시리라 믿어요.

2013년 한 해에
'글 없이 예쁘게 사는 사람들 사랑'을 잘 삭혀서
'글 하나에 담는 웃음꽃' 곱게 나누어 주소서.

마녀고양이 2013-01-09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그동안 뭐하셨습니까... ^^
한사람님, 고운 새해 맞이하고, 새해 초반부에 얼굴 내밀어줘서 감사드려요.. 헤헤.

화를 낸다, 슬픔을 느낀다, 모두 인간이니까 당연한거 아닐까 싶어져요.
열정만큼 화를 내고 분노를 느끼고 슬픔도 삭히고, 한사람님은 부러울 정도로 열정이 많은 멋진 분이예요.. 부비부비.
아하하.... 덧붙여 저두... 그놈의 화가 한몫을 한다눈.. ㅋ
우리 올해 사땡 잡았네요, 우앗....

덧붙임. 헛갈리실까봐, 저는 마녀고양이입니다.
 

 

 

 

 

벗아. 내 생각에,

슬픔을 참는다는 건 말야. 결국 지금보다 더 슬퍼지고 싶다는 뜻이 아닐까 싶어. 슬퍼하는 감정을 더 연장하고 싶다는 말. 이 슬픔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말. 그러니까 슬픔을 참는다는 말은 틀린 거야. 참는다는 게 사실은 참지 않겠다는 것이지. 그건 그 슬픔 속에 흠뻑 빠져서 더 분명하고 강하게 슬픔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는 뜻일 테니까.

 

 

잊으려고 노력한다는 말, 것도 틀린 말 아닐까. 더 생각하고 더 그리워하고 싶다는 말을 잊기 위해 애쓴다고 표현할 뿐 실상은 그 전보다 더 많이 떠올리면서 그 사람을 놓지 못하는 것이지. 정말로 사람을 잊고 싶다면 다른 것에 집중을 하면 되는데. 그럼 어느 순간 다른 게 보이게 되고 자연 그 이전의 것은 무어라도 잊을 수 있거든. 그러니까 잊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어진 상태, 내가 잊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흘러가는 시간. 그게 바로 잊는 거야. 잊어 가고 잊혀 지는 거지. 어둠을 벗어나려면 어둠과 싸울 필요 없이 밝은 곳으로 나오면 돼. 절망을 벗어나려면 절망과 마주하지 말고 희망을 붙들기만 하면 돼.

 

 

그러나, 얼마나

어렵고 서러운 일들일까. 한 사람을 놓아버리고 마침내 그 슬픔을 견디고 그 사람을 지우는 일. 내 생각에 말야. 사람의 흔적은 원한다고 해서 지워지진 않는 것 같아. 그냥 간절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새겨지고 마는 것이지. 살다보면 꼭 나만 서러운 계절에 보란 듯이 이별을 할 때가 있잖아. 저마다 자기가 이별한 계절이 제일 슬프다 뒤돌아 울곤 하지. 봄이면 꽃피어 서럽고 여름엔 모두가 초록이니 눈물 나고 가을엔 뒹구는 낙엽 되어 처량하고... 겨울이면 찬바람에 뼛속까지 시릴 테지. 어느 계절인들 헤어지기 좋은 날들이 있을까. 만나기 좋은 날은 있어도, 그래 그런 날은 없는 거야. 사람은 헤어지고 난후 꼭 그날들을 되돌아 보게 되니까... 그리곤 바로 그날이 가장 춥고 외로웠다 기억할 테니까...

 

 

벗아.

가을에,

이 좋은 가을에 당신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헤어졌나.

어떤 사람을 잊는 방법 하나 알려줄까?

 

 

절대로 소설책을 읽지마. 서점에 가지도 마. 혹시 갔더라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시집에 눈길 주지마. 혼자 영화도 보지마. 커피..는 마시되 마실 수 있는 곳에 가지마. 드라마도 보지마. TV를 켜지마. 괜히 머리 스타일 바꾼다고 돈 쓰지마. 놀아줄 친구 들어줄 지인에게 연락도 하지마. 대신, 근사한 트레이닝복을 사는 거야. 아래 위 아베크롬비가 부담되면 짝퉁이라도 좋아. 아직 살을 빼지 않았다고 낙담하진 마. (그러니까 한 사이즈 작게, 알지?) 모자를 눌러쓰고 운동화를 신고 나가는 거야. 비타민 D, 햇빛을 통해 만들어지는 영양소를 듬뿍 공급해야지. 뼈에 바람 들지 않으려면 나가기 전에 비타민이나 칼슘도 꼭 챙겨먹고. 제발 안녕과 이별 노랠랑 듣지도마. 차라리 클래식을 들어라. 가사가 안 들리는 음악 위주로 다운 받아 놓고 걸을 때 반복해서 듣는 거야. 그래 동네 뒷산이 있으면 더욱 좋고 없더라도 동네 한 바퀴 한 시간만 걷자. 혹시나 내가 놓친 사이 문자나 전화라도 왔을까봐 괜히 전화기 들여다 보지마. 다른 사람들 카톡 사진과 메시지 관찰 하지마. 페이스 북 소식 왔다 해도 들어가지마. 그래봤자 모두 나보다 행복해 보일 뿐이야.

 

 

부족해, 부족해. 아침만으론 턱없이 부족하지. 가능하다면 점심에도 저녁에도 하는 거야. 전도연은 아침 먹고 운동, 점심 먹고 운동, 저녁 먹고 운동하고 뻗어서 잔다잖아. 걸으면서 하늘을 봐. 힘들면 땅도 보고, 심심하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해. 아침밥은 될 수 있으면 많이 먹는 게 좋겠어. 점심은 대충 먹고 저녁은 굶어도 좋아. 배가 고플 것 같으면 잽싸게 잠자리에 드는 거지. 배가 고프면 자연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거든. 내일이 오면 다시... 어제와 같이 반복. 장담하는데 열흘이면 몸에서 청승기운이 빠져나간다. 결국은 상대를 잊기 위한 게 아니고 내 안의 분노, 미련, 아쉬움, 욕심과의 싸움인 거야. 그게 영혼의 노폐물이 아니고 무어겠니. 나를 이길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으니까...

 

 

글쎄.. 그래도 안 되면 다음 방법은 있어. 절을 하는 거야. - 이건 나도 얼마 전에 시작했어 - 나를 괴롭혔던 사람. 내가 미워죽겠는 사람. 내 뜻대로 안 되는 사람. 나를 배신 한 사람, 내가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 그들이 은인이로세. 나의 참 모습을 알게 해주어서 얼마나 감사한가 말이야. 사실 우리 그다지 인격이 높은 사람들이 아니잖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들을 향해 절을 하는 거야. 백팔배를 하면서 참회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우리가 잘 아는 고소영을 생각해보자. 그녀도 억울하고 열 받을 땐 절을 했다 잖아. 스트레칭도 되고 마음이 겸손해지지. 어떤 날은... 정말 내 잘못이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고스란히 느껴져서 눈물이 날 때도 있다잖아. 누군가에게 머리 조아리고 엎드려 절한다는 거. 처음엔 그 잊어야 할, 잊고 싶은 한사람만 떠올리며 절을 했는데 점점 내가 잘못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가더니 나중엔 아무도 생각 안나고 그냥 이 절을 끝내야 겠다는 생각밖에 안들 게 된다잖아. 그렇게 열흘...한 달...백일을 하자. 장담하는데 다른 사람이 되 있을 거야. 어쩌면 운명도 그렇게 바뀌는 건 아닐까. 슬프게도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다행히도 바꿀 수 있다잖아.

 

 

내가 아는 스님 한 분은 지금부터 절을 하라고 하셔. 자꾸 엎드리다 보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고.

 

 

 

기도 가운데 제일 큰 기도가 절이다. 절을 해보면 밑바닥부터 낱낱이 자기가 지은 허물이 드러나 참회가 안 될 수 없다. 그리고 무릎과 머리와 마음이 땅에 닿으면 무한한 힘과 지혜가 생긴다.

 

108배, 1080배, 3천 배, 만 배 모두 고비가 있다. 스님네 다리라고 쇠다리가 아니다. 나와의 약속이고 부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이겨내는 것이다. 만 배를 해보면 3천배는 그냥 지나가고 7천배쯤에서 죽겠다는 소리가 나온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골인 지점에 와 있다.     - 345p

 

 

 

벗아! 다른 사람. 나 역시 그 이전과는 다른 사람, 그게 그렇게 되고 싶었어. 지금의 나, 현재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겠지.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야. 어느 청춘인들 눈부시고 아름답지 않았던 시절이 있을까. 나는 그저 지금부터, 오늘부터 행복 하고 싶다. 그런데 왜 난 당신들이 생각나는 걸까. 이곳에서의 인연도 내겐 소중한 것이었구나를 새삼 깨우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어. 절대.

 

 

벗아,

마음과 몸이 많이 좋아진 지난주 연휴를 앞두고 책을 하나 샀다. 오랜만에 책을 집어 들었다는 느낌이 들었어. 책의 무게가 새삼 새로웠거든. 요즘 스님 책들이 유행이라서 산건 아니야. 그냥 저자의 일생이 궁금했다고 할까. 서점에서 대충 훑어보니 자서전 느낌이 많이 나서 망설이지 않고 택했어. 집에 돌아와서 다음날 오전까지 놓질 못했어. 아껴가면서 읽는다고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 혹시 내가 전생에 스님이었을까? - 를 생각해 보았네 - 마치 언젠가 본 적 있는 내 생애를 다시 훑어보는 것처럼 눈물이 났다. 거짓말처럼, 두어 번.

 

 

웃기지? 무엇을 본 것일까... 불필스님은 내 어머님 세대야.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했을 때 아버지가 출가하시는 바람에 어린 시절 아버지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대. 아버지(성철스님)를 끝까지 큰스님으로 부르더라... 내 소견인데 책을 통해 성철스님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건 역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생각되. 불필스님은 다른 스님들 이야기 할 땐 참 다정하다가도 어머니, 아버지 부분만 나오면 짠할 만큼 냉정하더군. 글로만 보면 지독히도 남 이야기를 하는 듯 했어. 모질게 세속과 인연을 끊어야 했던 마음이 글에서도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앞부분 가족사 이야기 할 땐 꼭 故 박완서 작가 생각이 났어.-문체 느낌이 아주 비슷해- 가족의 죽음, 전쟁과 피난을 몸소 겪으신 소회를 담담하게 적어 내려가는 그 모습이... 말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상대유한으로 되어 있어서 모순에 모순으로서 투쟁의 세계이다. 이 투쟁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 해도 곧 끝이 있고 만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이상 일시적인 행복에만 만족할 수 없으니 당장 한 시간 후에 죽더라도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니, 이것이 영원한 행복의 추구라고 볼 수 있다. 영원한 행복을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이룰 수가 없으니 절대무한의 세계를 구상하고 거기 가서 영원한 행복을 받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뜻이다. - 성철스님 해인사 백일법문 중에서 - 52p

 

 

불필스님은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고 싶어 스님이 되기로 했대. 내용은 주로 어떤 수행과정을 거쳐 왔는지에 대한 기록이야. 마치 내가 스님 될 입장이라면 멘토가 전하는 하나의 총체적인 입문 가이드 같기도 하고. 그런데 불필스님은 유난히도 ‘죽을’ 각오로, ‘죽을’ 힘을 다해, ‘목숨’을 걸고서, 같은 말씀을 많이 해. 출가도 수행도 모두 목숨 걸고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말이야. 이거 못하면 나 죽는다, 안되면 끝내 죽고야 말겠다는 심정이 아니면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말야. 살면서 목숨 걸면서 하는 게, 우리 무엇이 있었더라. 공부? 사랑? 출산? 참으로 몇 마디 떠올리지 못하면서 고개를 숙였네. 무엇 하나라도 목숨을 걸었던 적 있었나 싶어서.

 

 

근데 도대체 도인의 경지란 어떤 것일까. 우리 흔히들 도를 깨쳤다고 말하잖아... 자신의 공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 있는 말씀을 옮겨 볼께.

 

 

공부가 아무리 잘되는 것 같아도 꿈에 되지 않는 공부는 공부라고 말할 수 없다. 꿈에도 공부를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이 된 때 비로소 조금 공부를 하게 되는 때다. 아무리 크게 깨쳐서 법을 다 잘 알아도 잠들어 캄캄하면 죽어 몸을 바꾼 뒤에는 다시 캄캄하여 다 잊어버리고 생사고를 도로 받게 된다. 아무리 잠이 깊이 들어도 밝음과 어둠을 뛰어 벗어난 절대적 광명이 항상 밝아 있는 사람이라야 천 번 만 번 몸을 바꾸어도 영원토록 어두워지지 않고서 생사고를 받지 않고 큰 자유와 활동력이 있는 것이다. 이 절대적 광명은 천만 부처님이 설명할래야 할 수 없으며 가르쳐 줄래야 가르쳐 줄 수 없다. 오직 공부를 해서 실지로 이것을 깨친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참으로 묘하고 깊은 진치(眞致)다. 잠들어도 항상 밝아 있는 절대적 광명을 얻기 전에는 화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니 그 전에 혹 아는 생각이 나더라도 그것은 바로 안 것이 아니니 그런 생각은 속히 버려야 한다. - 성철스님, 158p

 

 

쉽게 말해서 일상, 몽중, 숙면에도 정진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경지라는 거야. 깊게 잠들어 있으면서도 화두를 놓지 않고 있는 상태란 어떤 지경일까. 스님들은 말하지. 모든 꿈은 바로 자신이 잉태해 조작한 것이라고. 잠들어도 밝아 있어야 죽어서도 어둡지 않고 영원토록 자유롭다는 것이지. 자유란 어쩌면 어느 절대적인 한 가지에 대한 절대구속은 아닐까. 다른 세상이 없으니 비로소 자유롭게 느껴지는 게 참 역설이지...

 

 

진주 사범학교를 졸업한 재원이 스무살 출가하여 스님은 이제 일흔 여섯이 되셨어. 불필스님은 하나둘 같이 정진했던 스님들이 입적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마지막을 차분히 준비하시는 듯 했어.


“견성할 때까지 평생 좌복에 앉아 있다 죽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생전의 성철 큰스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다. 심검당에서 살다 조용히 가고 싶다.  - 불필스님

 

 

불필(不必)이란 무슨 뜻일까. 왜 하필 불필이었을까. 성철스님은 ‘세상에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도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어주셨대. 참... 세상뿐 아니라 불법에서도 버림받은 사람,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영원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다고. 순간 숙연해지는 말씀이었어. 속세의 인연에선 우리 얼마나들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몸부림 치는가 얼마나한 확인을 하려고 애쓰는가 해서 말야.

 

 

벗아,

마음 같아선 내 이 책을 당신에게 당장 보내고 싶은데 이번엔 그러지 않기로 했다. 향기가 너무나 은은해서 조금 더 곁에 두어야 겠어. 당신도 이 향기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 안보이는 곳에서도 서로 향기로 마음 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어제 본 보름달은 여전히 밝더구나. 나만 그런 것인가 한가위 보름달은 다른 달보다 더 크고 빛나보여. 아마 더 큰 희망을 품고 바라보아서 그럴거야. 무엇이든 당신의 바램을 응원해. 내가 당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 당신의 꿈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우리 언제라도 반가운 벗이라는 게 감사하다는 것, 이 말하고 싶어서 이리도 서가 길었네. 서운했다면 이 글로 대신할께요, 나의 벗님들.

 

 

 

 

 

 

 

덧)

 

“일체의 불행과 불안도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만 있을 뿐이다.”  - 성철스님

몰스킨 노트에 슬쩍, 이 구절을 적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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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2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10-03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고즈넉한 가을 달밤이에요.
달도 별도 하늘도
모두 우리들을 따숩게 보듬어 주네요.

2012-10-04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4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8 1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10-19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해준 얘기와 마음)는 정말로 고마웠어요.
이 책은 언젠가 읽어볼 거예요.
그동안 잘 지내셔야 돼요^^

루쉰P 2012-11-2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 정말 정말 오랜만에 왔어요. 근데도 여전히 변함없이 좋은 글 올리셨네요.~
전 또다시 시작합니다. ㅋ 한사람님도 화이팅!!

보물선 2012-12-3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2012년 말일이네...

잘 지내지??
요즘은 어디에도 통 안보여서 더욱 궁금하기만 했네!
똑같은 하루지만, 그래도 한해가 가고 한해가 오는 걸 마련한 선조들의 지혜에 감사해.

친구하자 그래놓고 그렇게 꼭꼭 숨어있기 없기~
2013년엔 청승의 기운을 다 떨치고, 비상하는 한해가 될 수 있길 바래. 너두, 나두!
 

 

 

 

언니 뭐해?

 

 

 

역시 답이 없네... 왜 가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카페에서 아침부터 혼자 중요한 일 있다는 듯이 커피 한잔 시켜놓고 앉아 있고 싶을 때 있잖아. 그러니까, 귀에는 이어폰을 낀 채로 옷은 막 운동 끝나고 들어 온 느낌으로 모자도 쓰고 선글라스는 물론이요 나름 메이커 운동화도 신고 말야.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하늘이 진짜 파래서 산책하다가 그러고 말았어. 막상 그러고 앉아 있으니 뭐 생각한 만큼 별다르진 않더라. 이 시간에 한가하게 카페에 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그런 사람이 따로 있는 건 아니더라구.


 

 

 

 

 

 

사실은 24시간 오픈하는 카페에 사람들이 노트북 가져와서 숙제나 자기 할 일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나도 슬쩍 답사 나왔어. 요즘 그 핑계로 여기저기 카페만 기웃거렸지. 은근 카페에서 정해진 시간에 와서 소설 쓰는 작가들이 많다고 하더라. 은희경은 새로 소설 쓸 때면 꼭 집 떠나 새로운 공간을 찾는대. 새 노트도 사고 손톱도 깎는다지. 어떤 작가는 꼭 아침에 운동을 하고 와서 글을 쓴대. 근데 나는 왜 집을 나가면 그대로 어디로 떠나고만 싶지 글 쓸 생각은 나지 않을까... 하하. 운동하고 나면 배만 고프고 말이지.

 

 

 

 

 

 

 

보고싶다. 언니야. 언니도 이 좋은 가을 하늘을 보고는 있는 걸까. 나 오늘부터 다시 글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어. 다시 이 마음이 생길지 나도 궁금했는데, - 사실 그래주길 간절히 바랬지만 말이야 - 세상에 언제 그런 맘이 들었는 줄 알아? 아까 카페에서 심심해서 직원에게 볼펜을 빌렸지 뭐야. 가방을 뒤지는데 하필 은희경 노트가 나오는거야. (사은품으로 받은 그들 노트 채우려면 대체 얼마나 걸릴까) 어쩌다 무심코 펼쳤는데 그만 옛날 일을 보게 될 때 있잖아. 거기 끙끙대는 내가 귀엽게도 앉아 있는 거야. 그런데 빌린 볼펜이 생각외로 너무 잘 써지는 가운데 다시는 돌려주기 싫은거야. 마치 돌려주지 않으면 그대로 뭐라도 마구 쓸 수 있을 것 같은 이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 웃기지? 그때 깨달았어. 바로 지금 이순간이구나. 지금부터 글을 쓰고 책을 들치면 되겠구나. 그 지금을 기다렸고 그 지금이 다시 올 줄은 알았지만 그게 언제인지 많이도 두려웠거든. 아니 그립고 아련했거든.

 

 

 

 

새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에 꼭 하는 일이 두가지 있어요. 집 떠나 새로운 공간을 찾는 일과 손톱깎기. 익숙한 공간에서는 뻔한 생각 밖에 안 떠올라서 떠나는 거구요. 그리고 손톱이 길면 갑갑해서 자판을 치지 못하거든요. 

 

 

 

 

 

 

 

 

덧)

 


근데 어쩌지. 난 반대로 손톱이 없으면 자판을 칠 때 너무 투박하게 느껴져서 싫던데. 손톱을 바짝 깎아 버리면 마치 쌩얼이 된 것처럼 부끄럽단 말이지. 볼펜 돌릴 때도 손톱이 있어야 감각이 예민하고 분명해지거든. 역시 작가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야. - 작가 손톱이 좀 아트 적이면 안되나 -  그나저나 오늘 저녁 반찬은 뭐할거야? 난 집에 오면서 닭한마리 사 왔네. 오랜만에 닭볶음탕이나 해 먹으려구. 가을 하늘 본 김에 소주나 한잔 해야지. 글은 언제 쓸거냐구? 하하, 다이어트와 글의 법칙은 변함없이 매 한가지. 언제나 내일부터. 그럼 오늘은 이만. 소주 생각나면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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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9-1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언니는 오랫만에 알라딘 죽순이 하고 있어요.
덕분에 님의 따끈따끈한 글들도 바로 읽어주시고...괜찮은걸요~^^

우리 동갑내기끼리 무슨 언니냐구여?
그냥 꽃다방에서 언니 찾듯...그냥 무명씨의 호칭 '언니'하자구여~.

어느덧 가을이예요.
시간만큼 좋은 치료약은 없지 싶습니다.

참고로 제 손톱이요?
전 손톱이 생인손에서 벗어날 정도로 고만큼, 살짝 긴게 좋아요, ㅋ~.

숲노래 2012-09-11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좋은 마음 되시기를 빌어요.
좋은 삶은 스스로 빚으니까요.

2012-09-12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9-1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끙끙대며 앉아있는 한사람님 모습이 귀여웠다는 표현, 듣던 중 반가운데요?
제가 페이스북을 안 써서, 죄송해요,,, 대신 카톡은 이제 시작했다눈.. 캬.

한사람님도 참 뜸했지요?
그런 공간이네요... 그래도 이제 글 쓸 맘이 생기셨다니... ^^
아, 저녁 먹으로 가야겠습니다.
 

 

 

#1. 근황

 

 

 

글을 왜 안 올리냐는 질문에 해당하는 안부 인사를 받는다. 근 한 달 이상 아무 책도 안 읽으며 글도 쓰지 않았던 이유를 나 자신도 설명하긴 곤란해 그때마다 그냥요, 서재가 싫어져서요, 좀 노느라구요, 이런 식의 대답을 돌려가며 막았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당분간은 달라지지 않을 듯한 걸 어떻게 하나.

 

매일 서재에 들어와 이웃의 글을 확인하고 새로 나온 책을 검색하고 무슨 새로운 소식이 없나 기웃거리던 일상을 때려 친 지 한 달하고도 보름이 넘었다. 대신 온라인이 아닌 오프의 지인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책을 덮고 사람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시발점이 된 건 아무래도 내 스스로 글에 대한 진정성의 여부에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인 듯. 내가 회의를 느끼니 꼭 나 같은 사람만 보였달까. 사람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를 보면서 통감한지 오래지만 대상이 타인이 될 경우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일치하지 않는 정도가 이해의 범위를 넘어설 때 그리고 그 현장을 똑바로 확인할 때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만큼 나는 내공이 쌓여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더 이상 리뷰를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책과 관련한 어떤 글도 끄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아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더 많았다. 책에 화가 난 것인지 글에 마음이 상한 것인지, 책 읽고 글 쓰는 사람들이 싫어진 것인지 마음은 좀처럼 돌아오질 않았다. 모두 거짓말 쟁이라는 생각과 자기 합리화로 일관하는 위선자, 글이라는 무기로 우아하게 타자를 짓밟는 무서운 사람들, 앞과 뒤, 속과 겉이 다른 서늘한 사람들, 온라인에서 중독과 집착으로 존재감을 이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나 역시 다를 건 하나 없는 비루한 나날들. 이런 시간과 작업들이 더 이상 재미가 없어졌고 따라서 다른 재미난 사람과 그들의 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건 말건 당신의 글을 쓰세요, 이렇게 충고한다면 할 말은 없다. 모든 건 내 탓이다. 무언가 해온 것도 무언가를 느낀 것도 모두 나이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는 한,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력의 여부는 이성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다분 감성의 결과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이곳에서 글로만 비슷한 생김새, 비슷한 생각, 비슷한 이야기에 공감을 하였다고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판단하는 건 대단한 착각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사람은 그저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뿐이지 그 다음 그 사람에 대한 이성적, 합리적인 의견은 좋거나 싫기 때문에 불과한 파생적 나머지, 부연의 사족 일뿐이다. 우리의 이성은 절대 직관을 이기지 못한다.

 

 

#2. 글과 생각 

 

 

 

그나마 이곳을 떠나 최근엔 - 근 보름에 걸쳐 - 거북이 걸음으로 한권의 책을 겨우 읽은 적이 있다. 이곳에서 떠밀리듯 자리를 떠난 이웃분이 글을 계속 써야할지 고민이라는 말에 한번 읽어보라 전해주신 책이다. 제목도 의미심장한 <칼 같은 글쓰기>.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상대에게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그랬다 하여도 상대가 모두 이해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실 어려웠고 보편적이지 않았고 저자의 다른 소설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아 그저 상상만 할 뿐이었다. 나는 어쩌면 나와 비슷한 이유를 찾아보려 했는지 모르겠는데 비슷한 것 같다가도 그 철학적 깊이에 가끔 내 주제를 깨우치곤 했달까... 어떤 일을 왜 하는지 스스로에게 조차 설명, 설득할 수 없다면 타자에게 떠드는 이야긴 모두 그들이 원하고 익숙해 하는 잡담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나의 글쓰기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기억나는 한마디는 다음과 같다.

저는 말이나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 결국 선택과 행동이라고 봅니다.

 

말하고 싶은 욕구, 글을 적어 알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는 뜻은 무언가에게 화가 나 있다는 말과 같다. 마음을 닫으면 입을 답고 손을 접는다. 그래봤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말하고 싶지 않았고 쓰고 싶지 않았다고 또 떠들게 분명하면서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사람의 한계일까. 마치 화해하고 어차피 또 만나게 될 걸 알면서 싸운 연인에게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것처럼. 지금은 방황 중, 지금은 고독 중, 지금은 반성 중, 지금은... 이별 중... 다음은 선택과 행동이 차례인 것이다.

 

하지만 뜻 모를 이야기도 도움은 된 것 같아 책을 덮으며 가슴이 넓어진 느낌은 들었다. 그가 왜 하필 이 책을 읽어보라 했는지 이해할수 있었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일만 글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책으로 마음을 건넨 그는 정작 이곳을 사랑하고 이곳에 의지했기 때문에 다시는 글로써 돌아 올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옛친구 하나는 자존심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건 현재 내 자존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온라인 생활도 십 오년 정도 되었을까. 경험상 글로 받은 상처는 내 생각에 완전 회복은 불가다. 영원한 상흔에 가깝다. 만나서 얼굴보고 욕설을 들은 것보다 오래간다. 마음에 새겨지는 화인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면 아무렇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보면 구경꾼인 사람도 마술을 보고 죽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보고 들은 것, 말하고 뱉은 것은 없었던 일이 되지 못하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시간이 흘러 다른 좋은 일들이 그의 가슴에 우리들 머리에 채워지길 기원한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은 경제 이야기엔 주저하지 않다가도 정치 쪽으로 가면 선뜻 발언하길 주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말부터 신문엔 안철수의 책 출간소식과 의미해석이 이어지고 있다. 문자가 날아온 날 저녁에 주문을 했더니 - 책을 산 이유는 순전 등떠밀려서... 네가 빨리 읽고 전해달라는 압력에 의해서 - 몇 시간 후 새벽에 배송을 했다는 메일을 받았고 다음날 아침에 책을 받았다. 알라딘에서 주문하고 가장 빨리 받아본 듯하다. 더불어 일개 독자로서 안철수의 책이 어떤 국가적으로 전사적인 프로젝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권주자로서의 행보를 예상하기 보다는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태도와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았다. 예를 들면 무슨 일을 결정할 때 나름의 원칙이 있다하면 그건 어떤 기준일까 하고. 누군가에게 충고를 할 때 어디서 주워 들은 말이 아닌 자신의 경험에서 체득된 가르침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런 건 누구도 틀렸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인데, 우린 공감하지 못한다 해서 너무 쉽게들 비판하고 사는 건 아닐까... 단지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저는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의미 있고, 열정을 지속할 수 있고, 잘할 수 있는가' 의 세 가지만 생각했고 성공가능성은 고려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회사를 그만두려고 할 때 존경하던 한 분이 간단한 문제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회사를 그만두려는 이유가 돈 때문인가, 사람 때문인가, 일 때문인가를 냉정하게 돌아보라고 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다른 회사를 선택할 때에도 중요한 문제이며 사람은 월급, 인간관계, 일의 재미중 하나만 만족해도 그런대로 버티며 회사를 다닐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세 가지는 결국 내가 어떤 사항을 가장 중요시 하는지 역으로 알 수 있게 한다. 대부분 나는 일이 재미없어진 이유가 인간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이만큼 했기 때문에 상대에게 원하는 바가 생겼던 것인지 모른다.

 

'의미 있고, 열정을 지속할 수 있고, 잘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 본다.

 

의미부여는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진부한 답을 떠올린다. 그러나 열정의 지속은 관심과 재미가 없다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열정 없이 잘하길 기대한다는 건 명백한 욕심이다. 원래부터 잘할 수 있었다 해도 언젠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잘하고는 결과의 우수성이 아니라 시작에의 자신감일 것이다. 시작이 반인데 그 시작의 발걸음이 매번 무겁다면 언젠가는 지치게 된다.

 

여름까지는 좀 더 더워볼 생각이다. 더 놀아볼 생각이다. 더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다. 혹시나 휴가를 앞둔 이 여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분이 있다면 그분들을 응원하고 싶다. 그분들이 나를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그렇게 생각을 했으면 뭐라도 선택하고,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건 안철수도 김철수도 예외는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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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2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2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7-23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 즐겁게 누리셔요

2012-07-23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공감의 형벌

 

굳이 이웃의 글을 읽을 때 이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먼저 인식하며 글을 읽지는 않는다. 언제 읽어도 얼굴이나 목소리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처음 글을 접할 땐 그저 글투나 자주 사용된 단어, 문장의 형식, 소재의 종류, 결론의 방향등으로 막연히 성별을 느낄 뿐이다. 가끔은 내가 처음에 예상했던 성별과 반대였던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어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이가 많은 분도 있었다. 온라인에선 일단 보이는 조건들을 떠나서 오로지 글로만 만나기 때문에 오해는 내가 보고 느낀 만큼의 이해와 같은 말이다.

 

그런데 글을 읽다보면 아, 이 사람은 결국 한 가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싶을 때가 많다. 어떤 페이퍼를 올려도 어떤 책을 읽어도 결론이 지향하는 지점은 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웃 서재의 글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어떤 글에 반응을 보이는지 최근에 알게 되었다. 주로 자신이 쓴 글에 한계를 느끼면서 문학적 재능이나 노력에 좌절하는 글, 인간이 가지는 한계점을 자신으로부터 발견하고는 아파하는 글, 자신의 실패나 실수, 혹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글... 그러니까 일상에서 섬세하고 치밀하게 자신을 관찰하려는 노력에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듯 하다. 나는 어쩌면 남들의 아픔에서 내 아픔을 발견하려고 이웃의 글을 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떤 글은 바로 이 분이 결혼을 했고 아이가 몇이고 현재 일상에서 어떤 힘겨움이 있는지 드러나는 글이 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진 않았지만 나는 연속극을 보듯 그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에 아픔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지금 어떤 심경일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게 된다. 그럴 땐 조용히 힘내시라 댓글을 남길까 하다가 아는 척이 실례가 될까봐 그냥 애꿎은 추천만 누른다. 그러곤 그가 나의 안 보이는 응원으로 미미하나마 힘을 낼 수 있겠지, 외려 내가 희망을 가지면서 뒤돌아선다. 돌아보면 내게 있어 추천은 응원이고 위로, 자신에 대한 격려였다.

 

글에도 그 사람만이 가진 숨소리와 억양, 체취, 온도가 있어 읽다 보면 이 사람은 이 글을 쓸 때 슬펐구나... 애써 화나는 마음을 억눌렀구나... 들뜬 마음이구나... 허탈하구나...하는 여러 마음의 정보가 읽혀진다. 그리고 왜 이 사람이 이런 페이퍼를 이 시간에 썼는지 이 글을 쓰기 전에 그리고 쓴 다음엔 어떤 마음이었을지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글이라는 게 말과는 달라 일단 적혀진 것은 기록의 의미를 부여하고 확정의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 생각이 달라져 지우고 수정해도 일단 한번 적혀진 (적 있었던)글은 인상이라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일까. 알고 지낸 누군가 아픔을 호소한 글에 나는 필요이상으로 예민하다. 그 사람이 그 글을 쓰고 현실에선 괜찮아 졌다 해도 아니 글을 썼기 때문에 마음이 치유되었다 해도, 내가 받은 인상은 조금이라도 상채기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흘러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상처를 내 기억의 방에 저장하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같은 일이라도 좋은 일은 나 말고도 같이 기뻐해 줄 사람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나쁜 일에 더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믿음. 사람은 자기가 상대에게 받고 싶은 것을 행하게 된다는데 이 심리는 역으로 누가 나를 좀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은폐된 욕망의 투사는 아닐까.

 

가끔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결혼을 한 적이 있고 아이를 낳거나 기른 적이 있었다. 부모이거나 부모님을 여읜 적이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유사하다 느껴지는 이웃들이 같은 책을 읽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광경을 목격할 때 나는 그들이 어떨 때 무엇으로 우울해지는지 더 잘 공감하게 된다.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몇 마디 문장에서 전달되는 삶의 한숨, 아쉬움, 그리움 등이 나를 울리고 웃긴다. 아마 여성으로서 나약한 한 인간에 대한 공감지수가 높아지는 시기는 남편과 시댁이라는 타자의 세상을 견디거나 자신의 몸 안에서 자신과 다른 이물질로서의 생명체를 견딘 후가 아닐까... 특별히 잘나서, 인격이 높아서 혹은 더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생겨먹은 조건을 타고 났기 때문에 고통에의 공감이 수월한 듯하다. 요즘처럼 이러한 내가 원하지 않은 능력이 싫어진 적이 없다. 이것은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2. 보통의 결혼

 

 

알랭 드 보통은 외국인이고 남성이다. 결혼에 대해 글을 썼다면 그건 정이현이었어야 더 공감하지 않았을까, 처음엔 진부한 편견을 가졌다. 놀라웠다. 환경과 문화가 틀리며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남자였지만 결혼에 대한 통찰은 만고진리처럼 보편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특별함을 잃지 않아 읽는 내내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보통은 늘 보통이상이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이름이 한국어로 특별하지 않고 흔히 볼 수 있어 평범하다는 뜻임을 알고 있을까. 희한하게도 그의 문체는 특별해보이지 않는 익숙함, 친근함을 가졌는데 그렇다고 평범해보이지는 않는다. 특별하면서도 편하게 느껴지는 이중성이 그의 매력이라면 매력일지 모르겠다. 정이현은 반대로 겉으로는 특별해 보이는데 은근히 보통 수준의 이해를 제공했다고 할까. 본의 아니게 자꾸 두 작가를 내 기준으로 비교하게 되는데 정이현이 결혼한 한 여자에 대한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번 보통의 <사랑의 기초 - 한 남자>가 과연 소설인지 의아스럽다. 등장인물인 한 남자 벤의 시선으로 고민이 나열되며 끝에는 늘 작가로 느껴지는 시선이 강하게 결론처럼 배치되어 있다. 심리분야 에세이에서 많이 접하는 형식인데 앞에 환자의 사례를 설명하고 뒤에 저자인 의사가 원인과 해법을 통찰하면서 각장이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는 글. 앞의 환자에 해당하는 벤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뒤의 의사 역할이 3인칭 화자 일 것이다. 그런데 결국 두 사람은 모두 보통의 분신으로 느껴졌고 결국 자기 이야기를 서술한 다음 다시 자신이 자신을 평가하는 듯이 보여 이 책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자전적 에세이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책 끝머리에 정이현과 나눈 대담에서도 보통은 자전적인 의미가 많았다고 했는데 그래서였는지 작가가 생각하는 사랑과 결혼관에 대해 아주 자세한 인터뷰를 읽은 기분도 들었다.

 

그렇습니다. 이십대 남녀 사이에선 낭만적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가가 가장 큰 이슈겠지만, 결혼하고 커리어를 쌓고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사십대가 되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지지요. 현대사회는 낭만적 사랑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라는 아이디어를 조장하지만, 원래 결혼은 그 기원에서부터 계급과 제도의 산물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저 ‘안다고 주장되는 것’일 뿐입니다.

 

 

결혼의 곤란한 점은,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도 느낄 수도 경험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는 겁니다. 결혼한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는 기쁘거나 행복한 순간도 가끔은 있지만, 많은 시간 그것은 짐작보다 훨씬 더 씁쓸하고 고달프고 무미건조하고 짐스럽습니다. 결혼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기쁨을 찾아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죠. 저는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부부들을 위한 책, 동지적 연대감을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189p, 정이현 & 알랭 드 보통의 대담 중에서, <사랑의 기초 - 한 남자>

 

보통의 주장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평범한 삶이 사실은 엄청나게 특별하며 대단한 일이라는데 있다. 그리하여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사는 것 자체가 용기이고 영웅답다 말한다. 이 결론을 부연하기 위해 보통은 보통 남자가 겪게 되는 결혼의 실상을 낱낱이 그러나 매우 담담하게 전해준다. 그 보통의 남자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남자가 지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을 설득하는 보통의 시선이 놀랄 만큼 정확하고 깊다. 누구도 태어나 어디에서든 결혼해서 잘 사는 방법 같은 건 공들여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너무나 쉽게 사랑만 믿고 결혼한다는 지적은 참 뼈아프다.

 

결혼을 결심하는 사람들은 대개 상대의 치명적인 단점이나 배우자 집안의 문제점, 혹은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될 여러 갈등들을 하나도 모르면서 결혼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랑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에 만용을 부리는 것이다. 김어준은 연애를 해봐야 자신이 얼마나 찌질한 인간인지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결혼을 해 본 사람은 공통으로 느끼겠지만 결혼 후에라야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는지 비로소 절절히 깨닫게 된다. 배우자에게 실망하는 허탈감 보다는 그 실망을 너무나 자주 느끼는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보았더니 나는 내가 생각한 만큼 그리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고 배운 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사람을 미워할 줄 알게 되는 자신을 제대로 발견하는 일이란 언제나 고통스럽다. 자연 이렇게 내 바닥을 보게 만드는 사람으로 모든 화가 돌려지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괜찮고 싶은 사람이며, 멋지고 능력 있는 아내이며,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닌 인간이고 싶기 때문이다.


 

#3. 서재의 활용

 

결혼을 실패한 경험이 있는 나로선 내 바닥을 처절하게 알려준 상대에 대해 상당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는 동안 그 바닥을 견뎌준 인내심에 고마움도 가지고 있다. 물론 헤어졌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결혼과 출산, 육아는 여성에 있어 - 남성도 마찬가지지만 -그 전보다 더 많이 자기 이외의 것을 견뎌야 하는 자기 버리기의 연속적 과정이다. 특히 여성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자기를 버려야 자기가 포함된 가정의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학교와 가정에서 결혼하기 전에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학습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교에선 공부만 잘하면 일등을 할 수 있고 사회에 나와선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능력에 따라 월급을 받는다. 가정에선 귀한 딸과 아들로 자라 희생의 가치를 배우지 못한다. 결혼은 기능과 역할의 장이지 결코 사랑과 낭만을 동시에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아무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도’와 ‘그러나’를 가격표처럼 달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며 얼마든지 사랑을 유지하며 살수 있다며 자신도 잘 아는 거짓말을 서로들 주고받을 뿐인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보통도 언급했듯이, 그리고 어떤 분야나 아주 이상적으로 꿈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존재하듯 결혼에서도 두 마리,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백년해로하며 부부가 숨을 거둘 때에도 한 침대에서 손을 잡고 세상을 마쳤다는 기사도 있듯 초심을 잃지 않고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아무리 확률이 희박해도 복권당첨자는 있듯이... 그렇다. 당첨이 되는 사람이 있는 한 복권을 사듯, 사람들은 이상향임을 알아도 결혼을 한다.

 

또 하나 이 책에서의 놀라운 통찰 중 하나는 예술가의 결혼이다. 그동안 나는 예술 하는 사람들은 굳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과 맞지 않다고 괜히 예술가가 아닌 상대 배우자에게 피해만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내가 아는 지인들은 대부분 음악 하는 사람, 미술 하는 사람과 결혼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은 반대로 예술에 열정과 낭만을 쏟기 때문에 다른 관심이 없으므로 결혼생활을 더 잘하게 된다고 보았다. 결혼생활에다가 낭만을 쏟으려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점이 대개 화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평범한 결혼생활이 사실은 이상향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온 것은 아닐까. 결혼생활은 원래 갈등과 파탄이 정상적인 것이고 아무 문제없는 것이 비정상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결혼생활을 잘(?)하고 있는 친구들, 이웃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분명 결혼이라는 분야에 있어 능력자들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나는 결혼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모두 현명치 못한 삶, 지혜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외려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한 결과 재능과 가능성을 다른 삶으로 이동시킨 용기 있는 사람이라 믿는다. 사실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내 자신을 합리화할 방법은 없다. 다만 이혼한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치 않기 때문에 헤어짐을 실행한 것인데 밖에서 보기엔 마치 자신의 대단함을 믿기에 이혼을 한다고 생각하는 점은 아쉽다. 얼마나 잘나서, 라는 편견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들이 사실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지 못해서가 아닐까.

 

서재 정리를 하면서 약 150권의 책을 처분했다. 덕지덕지 군데군데 내 욕심만 쌓여지는 느낌이었다. 책이 별 쓸모가 없다는 생각, 글이 참 허망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기한 건 책이 빠져나왔는데도 그다지 공간상의 여유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처분 한 책들은 대부분 신간이면서 오래 곁에 두고 보려고 했던 책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진짜 오래되어 스스로 바래버린 책 -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기 전의 -은 더 이상 읽지 않아도 그냥 꽂힌 대로 놔두고 싶은 마음... 이것도 궁극엔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는 욕심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몇 년간 전화 한통 안했지만 그냥 전화번호부에서 삭제하지 않는다. 삭제하는 순간 그 사람과의 인연이 소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일까. 나이 들어가는 건 어쩌면 오래된 것을 삭제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잊혀질 것들은 알아서 사라지는 것 같다. 아무리 소중한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이 있었나 없었나 싶기 마련인 것. 그래서 그 잊혀짐이 두려워 거기 그대로 방치하는 것인지 모른다.

 

가끔은 내 결혼생활을 돌아보는 것이 끔찍하고 창피하다. 달리 처분할 순 없어 서재 한 구석에 꽂아둔 실없이 두껍기만 한 고서와 다를 게 없다. 그 방치된 책을 보면서 다시는 비슷한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책을 잊기 위해서 그냥 둔다. 사람은 혹 자신이 가장 잊고 싶은 것을 가장 기억하고 싶은 존재는 아닐지. 내게 있어 결혼이 딱 그렇다.

 

 

 

덧붙임)

혹시 이웃분 중에 어디 회원가입할 때

기혼에 체크하시고

자녀수에 체크 하시고

직업란에 주부라고 체크하시는 분...

살짜기 알려주시면

제가 읽은 <사랑의 기초: 연인들>과 <사랑의 기초: 한남자>

보내 드릴께요.

이번엔 줄도 안치고 깨끗하게 읽었거든요.

부담은 하나도 안가지셔도 되요.

처분 차원이니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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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1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그렇게 해요 ㅋㅋㅋ
그래서 사람들이 늘 묻지요.
"아줌마시네요?" 하고.
그러면 저는 늘 대꾸해요.
"아저씨인데요?" 하고.

^^;;;;;

아저씨이지만 어찌 보면 아줌마처럼 살아가느라...-_-;;;;
저는 아저씨가 쓰는 글은 참 재미없다고 느끼고
아줌마가 쓰는 글만 재미있다고 느끼는...
그런 아저씨입니다 @.@

..

보통, 이라 하는 그분은 마음이 열렸기 때문에
그처럼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느껴요.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혼인도 삶도 예술도
옳게 바라보지 못하리라 생각해요.

아이리시스 2012-06-1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기혼도 아니고 자녀도 없고 주부는 아니지만 방금 김치김밥 말았는데 책 못주십니까, 한사람님?(이거 농담)
있죠, 아..이건 비밀로!

2012-06-1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2-06-14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네요.^^
글이 좋아 두 세 번 반복해서 읽었네요.

읽다보니 문득 책 욕심이 생겨서요.
혹시 신청자가 없다면 제가 받아도 될까요?
전 기혼자이고,애도 셋(다른 신청자가 있다면 아이들 수로 우열을 나눠 주세요.ㅋ)이고,주부에요.
모두 다 해당되기에 손을 들어봅니다.^^

2012-06-14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4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