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상문학상, 이상하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내가 읽어본 이상문학상 수상작중에서 가장 웃겼다.(우습다는 것이 아니고 정말 내용이 웃기다) 읽는 동안 자주 킬킬거리다가 설마 이렇게 끝나진 않겠다 싶을 즈음 ‘나는 옥수수가 아니’라니... 물론, 문학상 수상작이 늘 심각하고 어려워야 한다는 건 아니다.(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은 어려울 수도 있다) 이상문학상이 타 문학상보다 실험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고급스럽게 펼친 작품에 돌아간다는 사실도 모르진 않는다. 우수상 수상작이 <옥수수와 나>보다 덜 문학적이어서 수상치 못하였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문학에 감동받는 것 또한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영역이므로 내 느낌이 일반적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어디까지나 내가 읽어 본 문학상 수상작 중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김영하 식으로 말하자면, 문학상 수상작이 어렵든 쉽든 그게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육체적, 물질적 욕망이 삶의 진정성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환상적 기법으로 서사화’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환상적 기법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한 페이지 분량이었고 그것도 ‘기법의 서사화’라 보기엔 너무 큰 확대가 아닐까 싶다. 마치 대단히 예술적인 고견을 가지신 분들이 일반인은 이해하지도 감동받지도 못하는 어느 예술작품을 앞에 놓고 뷰티풀, 원더풀, 환타스틱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유명한 화가가 선을 하나 그리면 예술이고 찌질한 연습생이 선을 그리면 낙서인 것과 같다고 까지 말하면 너무 비약하는 것일까. 늘 익숙하던 김영하식의 블랙유머에 가까운 옥수수 개념이 갑자기 거창한 문학사적 의미로 발견된 것 같아 좀 웃겼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작품을 덮고 이상문학상은 1등을 선정하고 나서 확실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작품을 결정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평론가 장두영의 <옥수수와 나>의 작품세계야 말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문학상이다. 문학상은 작품집필이 아니고 작품해석이다. 훌륭한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즉 문학적 성과가 높다기보다는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문학적 성과라 칭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이 수상작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정말이지 장두영의 해석을 보고서 미처 그렇게까지 심오하게 생각하지 못한 내 자신의 수준을 한심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물론 한국문단을 이끌어 가는 대가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내가 무어라고)일개 독자에 불과한 나와는 퍽이나 의견이 다르실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나와 꼭같은 생각을 하는 분도 있을 것이라는데 감히, 오백원을 건다. 그동안 문학적 성과라 칭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은 박민규나 공지영도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박민규의 <아침의 문>이나 공지영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에서는 웃다가 허탈하진 않았던 것 같다. 평론가의 해석과 심사평을 읽고 어느 정도 내가 엿본 공감의 요소를 발견하고는 했던 것 같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라 하여 불쾌하진 않았던 것 같다.

 

 

   또 하나 올해는 문학사상이 창사 40주년을 맞아 표지와 판본 디자인을 바꾸었다. ‘권위와 전통, 그리고 재미있는 소설책이라는 느낌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고 대상 수상 작가와 그의 작품이 한눈에 들어오게 디자인’하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소설책이라는 느낌은 충분했고 전보다 더 젊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권위와 전통은 멀어졌다. 전에는 수상자의 자선대표작과 해설 등이 25프로 정도였는데 이번엔 <옥수수와 나> 자체 분량이 많은데다가 수상소감을 비롯해 중간에 자서전식의 소설과 염승숙 작가의 김영하 작가론까지 더해져 거뜬히 삼분의 일 분량을 넘어가는 구성이다. (만약 <옥수수와 나> 뒤에 수상소감이나 자선작, 자서전, 작가론, 평론이 더해지지 않았다면 무척 화가 났을 것이긴 하지만) 이른바 김영하 특집이다. 앞의 표지사진까지 역시 이긴 자가 다가지는 건 맞다. (다른 분이어도 그랬을까? 마케팅적 요소에 치중한 덕인지 내가 받은 책은 벌써 1판 8쇄였다. 이상문학상이 뜬 날 바로 문자 받고 주문했으나 그랬다... 더 불쾌했던 건 소개된 19일 날 주문하고도 연휴 전에 택배사정 때문에 받지 못하였다는 것) 전에는 우수상도 수상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번엔 김영하만 수상자고 나머진 후보작의 느낌이다.

 

 

 

   나는 김영하의 작품을 비하하거나 그가 이룬 성과를 폄하하거나 절대 이상문학상의 권위에 먹칠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저 내 느낌을 말하다보니 할 수 없이 이런 글이 되었다. 바로 전에 읽은 책에서 무언가를 비판하는 것은 모두 자기과시의 일환이라는 충언을 따끔하게 받았으면서도 또 내 자신을 이기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그저 이 불편한 마음을 나름 해소할 수 있는 건 소설을 한 번 더 읽고 내가 느낀 김영하와 옥수수를 차분하게 자근자근 씹어 보는 수 밖에 없을 듯하다.

 

 

 

#2. < 옥수수와 나 > 만 씹는다

 

 

 

   먼저 수지라는 출판사 편집자와 이혼한 ‘나’, 박만수는 쫑이라는 호승심 강한 딸아이가 이혼할 때 제 어미를 택한 것을 인생의 행운으로 생각하는 40대 작가이다. 계약금만 먹고 세월만 보내고 있던 나에게 월스트리트 출신의 출판사 사장은 수지를 시켜 원고독촉을 한다. 참,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소주와 삼겹살이 아닌 와인과 치즈를 즐겨, 마신다. 박만수의 딸 쫑이는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아 놓았단다. 그러니까 글이 안되어서 뉴욕으로 날아가는 수준이다. 나는 솔직히 김영하의 작품에서 어떤 주인공이 절망을 한다해도 어떠한 인생의 패배감은 느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찌질하고 돈없어도 수준만은 강남파이다. (나중에 언급할지 모르겠는데 이것이 김숨의 작품이 미끄러진 결과를 더 아프게 한다. 그냥 개인적으로 김숨이 꼭 다음번에 수상하기를...)

 

 

 

1. 킬킬거린 웃음지대

 

 

 

   “비밀이라는 것 보니까 뭔가 괜찮은 거 쓰고 있나봐.”
   “뭐 다 써봐야 알지. 열심히 쓰고 있기는 해.”
   모든 작가는 편집자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한다.
   “뭔데 그래? 나한테만 살짝 알려줘.”
   모든 편집자는 이렇게 작가의 말을 믿는 척한다. 나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일제시대의 유랑 곡마단 얘긴데, 이걸 라틴아메리카 풍의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푸는 거야.”
   구상을 편집자에게 말할 때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초현실주의를 슬쩍 언급해주는 게 좋다. 그러면 편집자는 자기
 마음대로 스토리를 상상하기 시작
하고, 곧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한다.
   “재밌을 것 같은데?”
  전처까지도 이렇게 넘어가는 것을 보라. 이게 마술적 리얼리즘의 마술적이면서도 리얼한 힘이다.   -p19

 

   김영하의 단편은 술술 넘어가는 탓에 쉬운 생각이 들지만 이면에는 늘 아는 사람만 알고 이해하라는 식의 농담이나 대사가 포진되어 있다. 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상상해본다. 모든 심사위원들은 ‘자기 마음대로 스토리를 상상하기 시작하고, 곧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김영하는 서사에 마술적 리얼리즘을 마술적으로 리얼하게 구사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옥수수로 변하는)이것도 마술적 리얼리즘이지 않느냐 반박했을 뿐인데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생각이다. 김영하 작가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마술적이면서도 리얼한 힘’을 믿었고 심사위원은 그 힘을 느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건 독자인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김영하는 절대 일부러 그럴 작가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무엇보다 기획력이 탁월한 듯하다.


 

2. 갸우뚱거린 물음지대

 

이상하게 수지를 만나면 나는 그 옛날의 철없던 시절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응석을 부리고 어깃장을 놓고 위로를 구걸한다. 나는 이제 옥수수가 아닌데, 정말 옥수수가 아닌데, 그런데 수지가 그걸 모르고 있으니, 내가 이제 더 이상 옥수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   -p21

 

   작품 도입부에 ‘나’라고 추정되는 환자는 닭이 아직도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다고 그것이 무서워 죽겠다고 의사에게 말한다. 의사는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이제 아시지 않느냐 반문한다. 그러나 나로 추정되는 환자는 답한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슬라보예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동유럽의 농담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나는 더 이상 옥수수가 아닌 걸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데 저 닭들은 그걸 모르니 아무 의미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건 ‘나’가 아니라 ‘당신’과 ‘닭’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나’로 추정되는 작가를 알고 있는 당신과 나이다. 내 생각에 심사위원 입장에서 ‘닭’은 우리이고 우리 입장에서 ‘닭’은 우리만큼 김영하를 모르는 나머지이다. 이 작품은 옥수수를 말하고 있지만 실은 옥수수가 옥수수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닭을 조롱하고 있다. 누가 되었건 ‘닭’을 상상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짜릿한 쾌락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내가 무엇인지 말하여도 상대가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 무엇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아무리 이렇다 떠들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에겐 글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뜻 아닐까. 상대가 아느냐 모르느냐의 여부가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의 기준이 된다는 건 철저히 내 중심이 아니고 그걸 인지하는 상대에 맞추어져 있다. (작가가) 아무리 혼자 방구석에서 피터지게 떠들어 본들 세상에 글로 나오지 못한 생각은 (작가 독자 모두에게)의미가 없다는 말도 된다. 이 화두는 결국 작품 맨 마지막에 의식의 안개를 뚫고 서서히 드러나는 하나의 문장,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란 뜻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게임으로 귀결된다. 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너는 그걸 아느냐는 최종질문이다. 안다면 내가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안다는 것이므로 퍽이나 다행이라는 말이고 설령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큰 의미는 없다는 뜻이다. 정말 웃다가 기분 묘해지는 의미심장한 결말인 것이다. 내가 모를까봐? 풋. 이정도도 모를까봐? 아니라는 거 안다구. 근데 뭐, 아니면 당신이 뭐가 좋은데? 내가 당신 아닌 거 안다는 거 그게 그리 중요한가? ......, 작가에게, 그것은 가장 중요하구나. 암것도 모른다면 공감은 커녕 반감만 들기 마련이지. 즉 자기가 아는 걸 독자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이구나. 옥수수가 아닌 걸 알아달라는 건 반대로 옥수수였을 때도 이해해달라는 것이구나. 옥수수 아닌 나도 옥수수였던 나도 알아주길 바란 것이구나. 그러니 당신들이 닭이기를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구나...

 

 

   옥수수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도 이 작품을 읽어가는 재미의 하나인데 만약 옥수수를 작가가 제시하는 작품의 총체라고 본다면 어떠할까. 알알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옥수수를 받아든 독자는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옥수수를 깨끗하게 먹어치울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거나 치아가 좋지 않거나 먹다가 맛이 없어진다면? 나는 작가가 의도한 바가 꼭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는 김영하의 고민을 슬쩍 엿보았다. 바로 월 스트리트 출신 출판사 사장이 작가의 데뷔작에서 최근작까지 모두 초판에 사들여 책 갈피마다 빼곡이 메모를 적어 놓은 것이다. 그 초판 책에 사인을 해달라고 내밀었을 때 작가 박만수는 자신의 옥수수가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소화된 것으로 기대한다. 사장은 동시대에 박선생 같은 작가가 있다는 게 삶의 위로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나'는 그 말에 얼마나 감동했던가. (쎄씨봉 윤형주의 팬이 그랬다지, 나와 동시대에 살아주셔서 죽도록 감사하다고...) 여기서 김영하는 옥수수를 알아보고 먹지 못하는 상대(독자)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아니 상대의 태도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사장은 자신이 읽은 내 책에 대해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작가라고 자기가 쓴 책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 역시 잊어버리거나 엉뚱하게 기억한다. 따라서 작가와 독자가 만나서 책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제나 다소 뜨악한 분위기로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어긋나는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사장과의 대화는 유독 많이 엇갈렸다. 내 책의 여백에 자기 나름의 대안적 스토리를 자꾸 적어 넣다 보니 마치 그것이 원래 스토리였던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나는 그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독자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8p

 

 

   내가 옥수수였던 것과 지금은 아닌 것을 알아주길 바라지만 몰라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부르짖는 것은 제발 이 작품을 읽는 사람만은 알아달라는 역설의 호소 인 것이다. 혼자서 대안적 스토리를 만들고 그것에 감동해 놓고 자기 작품에 칭찬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벌이엔 동물적 감각으로 일가견이 있는 월스트리트 출신 출판사 사장같이 굴지 말고.


 

 

3. 육체적 깨달음지대

 

 

   ‘나’에게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시를 쓰는 친구와 시를 쓰며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섹스 파트너가 있다는 것이고 나처럼 문학을 하는 것이다. 철학과 카페사이에 교집합을 시로 정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철학은 관념을 카페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여 지며 ‘나’는 소설을 그들은 더 고결해 보이는 시를 쓴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 모두는 각자 자기 논리대로 불륜을 정당화하는 위선자로 느껴졌다. 철학은 카페의 아내를 만나고 카페는 여군장교를 만나고 ‘나’는 출판사 사장의 아내와 자게 된다. 아내였던 수지도 철학을 만난다. 어찌 보면 가장 부도덕할 줄 알았던 자본가, 출판사 사장만 깨끗하다. 왜? 단순하고 정확하고 효율적이니까. 그에 반해 시쓰는 친구나 평론을 자처하는 수지나 모두 자기 해석을 덧붙이며 자신을 변호하는데 여념이 없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그런 게 아냐. 매우 육체적인 거야. 심장이 움직이며 마음은 복종해. 우리는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른 몸을 갖고 있어. 문학계의 해병대, 육체노동자, 정육점 주인이야.”   -p23

 

   이 대답이 잠시나마 뭉클했던 건 소설가는 머리나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그리고 갸우뚱 했던 건 꽤나 도시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이는 김영하도 같은 것일까 새삼 놀라웠기 때문이다.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육체적, 물질적 욕망이 삶의 진정성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은 환상기법이든 무엇이든 소설이라는 육체적 과정을 거침으로써 더욱 숙연해 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환상과 마술을 앞세워도 결국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지 누구를 가르치거나 평가하는 것은 다른 몸이 한다는 것이다. (육체노동자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후반부에 육체를 엄청나게 운용하는 것이 아닌지...)

 

 

   '나'는 자본가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외려 곤경에 빠트리고자 ‘어지럽고 음란하고 실험적이면서 해체적인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있지도 않은 곡마단 마지막 생존자를 핑계로 뉴욕으로 떠난다. 그러나 월 스트리트는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뉴욕의 아파트를 선뜻 제공한 출판사 사장의 음모 또한 대단히 육체적이었다. 작가 박만수는 뉴욕에서 미모의 출판사사장의 아내와 조우하며 쾌락에 내몰리고 그 열정으로 예술작업에 미친 듯이 몰두하게 된다. 사장이 불시에 침입해 소설이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급한 쓰레기라고 비난하자 나는 반박한다.

 

 

“쓰레기라니요? 이해가 잘 안되네요. 물론 이 소설의 창작동기가 불순, 아니 불명확했던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막상 쓰기 시작하자 신비스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작가들이 어느 정도는 겪는 현상입니다만 작품이 작가 자신을 배반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에는 저 작품이 저 자신을 초월해, 저의 비천한 문재와 사상을 훌쩍 뛰어넘어 저 홀로 놀라운 지경으로 가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 원고는 작가 박만수가 아니라 저의 손을 빌려, 아기 예수가 성모마리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셨듯이, 이 세상에 지금 오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씀드려 기분이 나쁘실 수 있는데, 그렇죠, 선승들 같았다면, 한 소식을 했다, 뭐 그런 식으로 말들 했겠죠“    -p59

 

 

   작품이 작가를 배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초기 구상이 완벽하더라도 글을 이루는 과정상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대단한 구상보다는 일단 써야 한다는 현실을 강조하는 문법이다. 남의 아내와 밤새 뒹굴었건 밤새 잠을 잤건 어쨌든 처절하게 육화된 원고를 써 내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누구도 쓰레기라 할 자격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가들이 소설 쓰는 과정이나 안 써지는 과정을 말하는 작품들을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그 작품이 끝남과 동시에 작가자신도 소설을 끝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워 하는 뉘앙스를 발견하게 된다. 육체의 사력을 다해 힘겹게 써내었으니 더 이상 나는 옥수수가 아닌 것이다. 당신도, 그런 줄 알으란 뜻이다. 아니, 제발 당신만은 좀 알아 달라는 것이다.

 

 

   김영하는 작품 전반에 자기 목소리를 싣는데 있어 조크와 냉소를 이용하는데 능숙했다.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이라는 난해하고 음란하고 해체적인 책의 저자’였다고 문학적 자서전 <나쁜 버릇>에서도 주장하고 있다.(이 소설 골때린다) 실패자들이 골방에 모여 퇴폐적인 글을 전파하여 젊은 영혼들을 타락시킨 죄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작가를 평가하는 집단이 재판하는 나쁜 버릇이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작품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글을 쓰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부연한다. 작품성의 평가에 개의치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 다시 말하면 당연히 고맙긴 하지만 이 상도 크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말은 역으로 이 상이 글쓰는 작가에게는 누구에게나 당연하다는 뜻으로 뒤집힐 수도 있다. 다만 ‘해야만 한다고 믿는 그 일로’ 돌아가는데 이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고 여기는 듯 하다. 작품 말미에 출판사 사장이 권해준 약은 아마도 그 앞으로의 더 지난한 고통과 세월을 이기라는 극약 처방은 아닐까 싶다. 약먹은 후 달라진 세상에서 쓴 첫 문장이 말해준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는 절규는 그것을 깨달은 작가 자신의 믿음은 아니었을지...

 

 

 

 

 

 

 

 

 

 

 

덧붙임)

김영하만으로도 충분히 길어서
나머지 우수상작은 더 줄여서 정리할 생각이다.
김숨이 아깝긴 한데, 뭔지 모르게 언제나 2프로 부족하다.

(독자마저 김영하만 떠드는구나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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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1-27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소설이 '재미있어서' 김영하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
그런데 이번에도 김숨은 우수상인가요? 작년에도 우수상인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도
우수상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군요. 작년에는 공지영이라면, 올해에는 김영하가 이상문학상에서 단언
눈에 띄네요 ^^

한사람 2012-01-28 09: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작년에도 우수상이 김숨말고도 김경욱이 있어요.
그 중에 김숨의 단편 당연히 기억나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게 우수상 타다보면 나중에 대상이 될 확률이 많은 것 같던데요.
이번에도 김영하와 김숨이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던데..
<국수>는 새로움이 없어가지고 , 하하

평소에는 작가에 대한 호감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누가 상을 탔다고 하면, 아쉽거나 좋거나 하잖아요..
그럴때, 내가 이 작가를 좋아했었구나..(반대로 싫어했구나..)
그걸 느낍니다^^


비로그인 2012-01-27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한사람님 글은 길어서 읽기 전에 후~ 숨을 고르고 시작하는데, 읽다보면 어느새 끝이에요. 신기하죠? ^^

김영하의 단편소설은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당당하게(몰래가 아니라 당당하게!) <오빠가 돌아왔다>를 통해 처음 읽었어요. 되게 쉽게 읽히더라구요. 단편집에 실린 소설 중에 '이사'라는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읽을 때는 막힘 없이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까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이야기에요. 지금에서야 이것도 마술적 리얼리즘의 마술적이면서도 리얼한 힘이 아닐까 싶네요.

아참, 문득 궁금해진 게 있는데요. 책은 주로 사서 읽으시나요?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를 고수해왔는데, 이런 신간/인기도서는 빌리기가 너무 힘들어요 ㅠ

한사람 2012-01-28 09:12   좋아요 0 | URL

그렇죠? 길어서..
마음의 다짐? 같은게 살짝 필요하지 싶어요.
요즘엔 너무 구구절절 풀지 말자고 쓸때마다 생각은 하는데...
잘 안되요.. 늘이는 건 자신있는데, 정말로 줄이는건, 하하하

저는 김영하의 <퀴즈쇼>를 처음 읽었구요.
읽은 책 중에는 <빛의 제국>이 제일 좋았어요.
단편들은 말씀대로 읽을때는 짜릿하고 신나는데..덮고 나면
불쾌? 비슷했던 것 같아요.그게 매력이지만요.
이번에도 그 연장선상에 있구요.

저도 신간들은 거의 구매하는 쪽이어요.(기준은 그야말로 그때그때 변덕에 따라서)
책값이 능력에 비해 주제넘게 너무 많이 차지하는 것 같아서..우울합니다 ㅠ
서평 이벤트는 꼭 읽고 싶은 책만 신청하는데
제 기억상으로 이벤트 하는 책 치고 엄청 좋았던 경우는 없었던거 같아요 ㅠ
(중간 정도면 행운이죠, 하하)

마치 명품 브랜드는 세일안하는 거와 같다고 할까..
도서관은 꼭 내가 보고 싶은 책은 항상 대출중이라는^^

비로그인 2012-01-2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글도 마술적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ㅁ'~)

한사람 2012-01-28 09:14   좋아요 0 | URL

길지만 가독력 우수-마술적?
리얼은 왜일까..음..극찬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하하하

가연 2012-02-04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저야 다른 작품들은 읽지는 않았고.. 김영하의 수상작만 읽었는데 재미있었어요. 다만 옥수수가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보이는데, 별로 그 키워드에 집중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특이한 경험이었어요. 뭐라고 부연하면 좋을까, 사실 스토리 자체는 좀.. 확 뭔가 사로잡는 그런 것은 없던데ㅎㅎ 그런 면에서 뭔가 훌륭한 해석을 남기는 작품이 수상된 것 아닌가, 하시는 한사람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한사람 2012-02-04 23:21   좋아요 0 | URL

히히, 그렇죠?
중요한 건 옥수수를 이루는 내용이 아니고 옥수수를 해석하게 한 김영하의 기획력이라니까요 ㅋㅋㅋ

 

 

 

 

 

 

 

#1. 어떻게 이어지는 것인가

 

 

 

   오년 전 부터인가 부모님 모두가 내 곁을 떠나고 난 후 내 명절의 풍경은 결코 평범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의 공백을 견디기 위해 나는 주로 떠나거나 숨거나 책을 쌓아왔다. 이번이 열한 번째의 명절인데 설이 2월로만 되었어도 오랜만에 바람을 쐬어 보려 했으나 날이 너무 추워 한 달 뒤로 미루었다. 마침 부모님의 기일이 명절을 기점으로 사이좋게 한 달 차 밖에 되지 않아 나는 그때그때 내 편의대로 명절과 적절히 믹스하여 떠날 구실을 만들어왔다. 처음 삼년까지는 산소 앞에 가면 눈물이 절로 떨어지곤 했는데 이젠 그 타이밍이 조금씩 늦추어 진다. 슬프다기 보다 담담해지는 심정이 더 많아지는 것 같은데 나는 이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돌아와 혹시 서글퍼질지 모를 심정을 잘 추슬러 줄 것으로 믿게 된다.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건 산소를 도착하기 전까지, 그리고 산소를 다녀오고 나서인 것이다. 어찌 보면 산소여행은 영악하게도 미리 앞당겨 제공받는 한 해의 치유 프로젝트인 셈이다. 나는 이제 언제 가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만으로도 공백의 그리움을 채곡 채곡 저장하며 그 날을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명절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된다는 말을 나를 보며 새삼 깨닫는다.

 

 

 

   오늘은 제 때 떠나지 못한 이번 설을 잘 견디게 해준 기특한 소설을 하나 이야기 하고 싶다. 박경리의 <녹지대>, 두 권 연속 녹지대로 빠져들어 보낸 연휴였다. 지난 2008년도로 기억한다. 한여름 터미널에서 누구와 헤어지고 허전한 마음에 서점에서 작가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당신의 소원은 그냥 힘세고 덩치가 좋아 농사를 잘 짓는 시골 남정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라는 싯구절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나는 엄마를 떠나보낸 지 일 년 밖에 되지 않았기에 모든 죽음을 엄마의 죽음의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일 때였다. 장례를 마치고 난 후 엄마 집에 처음 들어갔을 때 하도 집안 청소가 깔끔하게 되어 있어 나는 엄마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엄마는 지난 일 년 동안 한 번도 손 댄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 확률이 많을 것이므로 가차 없이 버리며 살아라 평소에도 잔소리를 하셨다. 나 역시 워낙 물건에 대한 애착이 없는 편이라 꾸역꾸역 쌓아 놓고 살지를 못하는 편이긴 한데 그렇기 때문에 버리고 남은 것들은 정말로 중요하다 여긴 것이라는 생각에 어떤 것도 쉽게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버리지는 못한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시집을 보면서 거의 매일 울고 울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 박경리 작가의 문학인장 때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박완서 작가도 작년 이맘때 우리 곁을 떠났다. 두 작가만 생각하면 무슨 엄마의 형제나 된 듯이 가슴 한 구석이 헛헛하고 뻥 뚫린 것만 같은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알라딘 서재 오른쪽 상단에 게시되는 북캘린더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흠칫할 때가 많다. 어떤 유명한 작가가 등단한 날 혹은 누가 태어난 날은 또 다른 대가의 작가가 명을 달리한 날이기도 하다. 신경숙과 하루키가 태어난 날은 같은 날이기도 했다. (박경리 등단=고은 출생, 박경리 사망=김훈 출생으로 같은 날이기도 하다) 같은 나라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괜스레 숫자의 인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 우리는 이전 세대의 위대한 예술적 유산이 계속하여 지금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막연한 기대와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2. 무엇으로 사는 것인가

 

 

 

   이 책을 어쩌다 집어 들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도 달력을 넘기며 부모님 기일과 명절을 생각하고 있다가 반사적으로 이 책에 끌렸다는 분석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설명할 수 없이 부모님을 자세하게 그려볼 수 있었고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이 책은 내 부모님 세대의 젊은 날을 그린 소설이다. 물론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내 부모님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을 보면서 그렇다면 당시 내 부모님도 이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가끔 부모님은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떤 미래를 약속했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 정답은 아니더라도 무척 비슷한 장면들이 많았다고 믿는다. 부모님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춘을 보내었고 불같은 사랑을 하셨기에 많은 세월을 같이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증거와도 같은 나는 이 소설이 참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박경리라는 작가도 분명 젊은 날이 있었구나를 실감했다. 삼십대 후반에 쓰여진 이 소설의 문체는 퍽이나 감각적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누구나 시인의 어법으로 대화한다 그들은, 시인이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작가가 그랬기 때문이라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었다.

 

 

 

비가 들면 걸어서라도 가야지. 오늘 녹지대에 가면 무슨 일이 꼭 일어 날 것만 같다. 내 예감은 참 맞아 떨어지거든 .   - p19, <녹지대 1권>

 

 

 

   이 소설은 60년대 중반 부산일보에 연재된 소설이지만 배경은 서울의 명동 뒷골목에 위치한 음악살롱을 그 중심으로 한다. 녹지대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으로 페이지를 넘겨본다. ‘녹지대’가 다방의 이름이었다는 것이 낯설긴 하지만 80년대엔 ‘안전지대’라는 일본그룹이 있었고 90년대만 하더라도 ‘녹색지대’라는 듀엣그룹도 있었으니 녹지대를 정치적, 이념적으로 상상한건 어쩌면 박경리와 그의 문학에 대한 나의 편견일수도 있었다. 어느 시대건 그 시절 젊은 세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 있기 마련인데 60년대는 명동의 ‘녹지대’라고 작가는 말한다. 젊은 문청들과 화가, 음악인, 지식인들이 모여 희망과 절망을 공유하는 장소. 문화예술의 근원지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실상 소설의 분위기는 개인의 연애사가 주를 이룬다. (이 소설은 통속을 박경리 화법으로 말하는 연애소설이다)

 

 

 

   인물은 공평하게 남자 셋, 여자 셋이 등장하고 이들은 서로서로 우정과 사랑이라는 인연속에 촘촘하게 얽혀 들어 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하인애와 양공주를 엄마로 둔 친구 은자, 인애가 얹혀사는 숙부집의 딸 여대생 숙배가 이십대 초반의 여 주인공들이다.(이름이 영낙없이 부모님 세대스럽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억압된 상처를 지닌 조각가 민상건과 합리적인 신문기자 한철, 안개처럼 베일에 쌓인 김정현이 남자 주인공들이다. 여기에 대학교수 집안이면서 사교계에 명망높은 숙배의 부모님 하흥수와 최경순, 그들과 과거사로 얽힌 한박사가 있다. 몇 장면 등장하지 않았지만 끝까지 미스테리한 분위기로 소설의 갈등을 절정으로 몰고 가는 민상건의 아내이면서 김정현의 동거녀가 있다. 그밖에 짝사랑의 역할을 맡은 화가 정인호와 범생이 박광수, 안경잡이, 땅딸보등이 늘 녹지대 주변을 서성인다. 어렸을 적 신성일, 윤정희 주연의 70년대 영화나 80년대 두시의 데이트 김기덕이 테마극장이라며 드라마를 연기하던 ‘강변연가’정도가 내가 상상하는 어르신들의 연애장면이었다. 이 소설은 제대로 멜랑꼴리를 이끌어 가면서 흡사 프랑스 영화처럼 우울하고 회의적인 영상미를 연상케 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프랜시스 레이 (Francis Lai)가 작곡한 같은 60년대 영화인 <남과 여>의 주제음악 정도를 떠올리면 쉬울 듯하다.

 

 

 

   차가 없는 주인공들은 이동할 때 전차나 택시를 이용하거나 늘 거리를 걷는다. 서로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거나 다방에서 조우한다. 약속이건 우연이건 그들은 자연스럽게 차나 한잔 하러 가자 말하고 차를 마신 다음엔 여기를 나가자 하면서 대폿집을 향한다. 대폿집 가는 길에 수예점, 양장점이 있다. 가끔 김장 실은 구루마, 구공탄 구루마, 껌장수, 군밤장수도 보인다. 녹지대에선 ‘미완성 교향곡’이나 ‘소녀의 기도’, ‘진주잡이의 노래’가 흘러나오며 그들은 커피나 우유 혹은 코카콜라를 주문한다. 차를 주문받는 사람은 ‘레지’라 부르고 남자 일 경우 ‘보이’라 칭하며 급사나 식모가 주변인으로 즐비하다. 회사에서 미혼인 직원은 미스터 리이거나 미스 김으로 불리운다. 그들은 집에서 ‘깡통을 꺼내어 커피포트에 가루를 넣고 주전자의 물을 부은 뒤 전기 곤로에 스위치를 넣고 커피를 끓’여서 마신다.(끓인 물을 커피에 붓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끓이다니) 비오는 날이면 자줏빛 레인코트에 감색 양산, 분홍빛 비닐우산을 들고 집을 나선다. 영화구경을 할 땐 당시 대합실에서 남자가 꼭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등장한다.(대합실이라니, 서울역 이후 참 오랜만인 장소 아닌가) 데이트를 할 때엔 남산 라운지에서 분위기를 내며 커피를 마시고 남산 언덕길의 별빛이 아련해질 때 헤어진다. 집에 가면 있는 집일 경우 식모가 저녁을 챙겨주며 어머니는 곱게 양단치마 저고리를 입고서 맞아준다.

 

 

 

   “어떻습니까? 차 한잔 사드리고 싶은데요.”, 이렇게 말하는 모습은 내 아버지와도 겹쳐진다. 아마도 아버지같은 남자와 차를 마신 엄마같은 어르신은 미도파 앞에서 택시를 잡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우체국에서 편지를 쓰고 부치며 녹지대에서 중요한 편지를 전달 받는다. 연락이 닿지 않아도 녹지대에 들를 것을 알고 있으니까 편지를 두고 가는 것이다. 그 시절의 사랑은 기다림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잊혀진 풍경이 되어버린 그 시절의 편지에는 반드시 눈물과 이별이 있다. 그들은 예술가의 고통을 이야기 하고 청춘의 불안을 나누고 사랑의 외로움을 노래한다. 내가 녹지대 1권에서 느낀 것은 그들은 자신의 윗세대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이라고 할까. 그들 여성들의 어머니들은 모두 전쟁세대 이면서 불행의 사연을 피할수 없었던 세대이다. 인애의 어머니는 전쟁이 죽였고 은자의 어머닌 자살을 했고 숙배의 어머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전후 세대이면서 어머니의 다음 세대인 이들은 당장 행복하기를 바라기 보다는 앞으로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꿈’을 가져보길 소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가는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서로 뭔지도 모르고 되지도 않는 말을 주워 삼키며 큰 소리로 한참 떠들어 대다가 갑자기 폭풍이 지나간 듯 조용해지며 흡사 바보가 된 듯 서로 멍하니 바라본다.   -p205, <녹지대 1권>

 

 

   ‘서로 뭔지도 모르고 되지도 않는 말’, 이 부분이 아련하게 슬픈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현실은 잔인하고 비극의 연속인데 예술과 행복은 너무 멀어 보였다는 말로만 들린다. ‘바보가 된 듯 서로 멍하니’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 속에 작가는 누구보다 시대상을 정확하게 투시하려 애를 쓰신 듯하다.

 

 

 

 

#3. 더 좋아질 수는 없는가

 

 

   2권에서는 하인애가 사랑하는 남자 김정현과 그의 영혼을 빼앗아 간 묘령의 여자의 비밀이 밝혀진다. 사실 처음엔 1권만 적당히 읽어 볼 생각이었는데 내용상 후반부 몇 십 페이지를 남겨놓고서야 실타래 같은 비밀이 밝혀지는 구성을 하고 있어 2권을 들쳐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권이 인물 간 대화가 많고 핵심이 잘 잡혀지질 않아 가독력이 떨어질 위험이 있는데 반해 2권은 갑자기 빨라진 서사의 호흡 때문에 앉은 채로 책을 덮게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작가는 1권에서의 산발적인 고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과 괴리를 가지지 않은 채 실제화되어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여전히 의심하고 번뇌한다.

 

좀 더 나아질 수는 없는가. 좀 더 영혼을 흔들어 주고 미소 지을 수 있는 그 무엇은 없는가. 도시는 괴물같이 커지기만 하고 사람의 무리는 보다 더 범람하여 홍수를 일으킬 지경인데. 구두점에는 오렌지 빛깔의 귀여운 세무 구두가 진열되어 있고 어느 누구보다 봄에 민감한 양장점의 주인은 봄옷을 만들어 진열장에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건만 진정 봄은 어디 메에 있는고. 소녀들의 얼굴은 어둡고, 대머리의 중년신사나 구두창이 밖으로만 닳은 청년들의 걸음걸이.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게 호화롭기만 한 흰털 외투 입은 숙녀들, 모두 모두가 생활하는 모습은 아니다. 다만 생존하고 있는 모습들이 아닌가.   -p171, <녹지대 2권>

 

 

   이것은 인애가 종로에서 명동까지 걸어가는 풍경을 묘사한 장면인데 작가는 모두가 ‘생활’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생존’하고 있는 모습이라 결론짓는다. ‘좀 더 영혼을 흔들어 주고 미소 지을 수 있는 그 무엇’은 무엇일까.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없는 것인지 고민하는 방식은 47년 전의 서울이나 지금의 서울이나 결코 다를 수가 없다.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숨쉬는 ‘생존’이 아니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생활’을 꿈꾸는 것은 왜 변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저 단순한 생활이 아니라 영혼을 누군가에게 빼앗길지언정 내 영혼을 흔들어 주고 같이 공감하며 나아갈 그 무엇을 염원하는 것은 왜 끈질기게도 계승되는 것일까.

 

 

   처음으로 문학의 발전이 국가 및 국민의 발전과 그 걸음을 같이 하는 것이었구나를 깨닫는다. 독서하면서 이런 거창한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기로 스스로도 참 낯선 느낌이다. 나는 우리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고민이 박경리 문학의 고민이었고 그것은 곧 우리 문학이 탐구하고 이어나가야 할 고민이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60년대 소설의 정수를 상징하는 김승옥의 작품들도 기억난다. 우울한 도시의 어법으로 감각적인 감수성의 극치를 보여준 그의 단편들에서 주인공은 자주 ‘어디로 갈까’를 되뇌인다. 목적지를 잊은 사람들처럼 두리번거리며 명동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신에게 패배감을 느끼며 엉거주춤 뒤좇아가는 심정으로 거리를 방황한다.

 

 

중국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는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1,000원이 없어졌고 사내는 한쪽 눈으로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 버렸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고, 나는 “악센트 찍는 문제를 모두 틀려 버렸단 말이야. 악센트 말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거리는 영화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고 한산했고, 그러나 여전히 소주광고는 부지런히, 약 광고는 게으름을 피우며 반짝이고 있었고, 전봇대의 아가씨는 ‘글쎄 그래요’라고 웃고 있었다.

 -p57, <서울 1964년 서울> 中, 『무진 기행』, 민음사

 

 

   나는 박경리가 그리는 65년 명동의 녹지대에 모여든 청춘과 김승옥이 전해준 명동 거리의 청춘이 같은 것을 보고 들었을 것으로 어쩌면 그들 속에 내 부모님도 있었을 것으로 여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을 꿈꾸는 인애에게 조각이라는 예술을 하고 있던 민상건은 ‘세상에 남의 일이라는 게 있을까’ 하면서 사람은 남의 운명을 돕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나의 운명은 나의 것이긴 하지만 나만의 것이 아니고 나로써만 끝나는 것도 아님을 환기하는 대목이었다. 60년대를 ‘생활’하지 못하고 ‘생존’하며 살아온 우리 윗 세대 들의 아픔을 가만히 보듬어 본다. 여전히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는 우리들과 당신과 나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그들의 운명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고 우리의 운명을 도움으로써 자신들의 운명을 완성했을 것이다. 녹지대는 누구나 한번쯤 지나온 흑지대나 혹시 지금 지나고 있을지 모를 적지대 아니면 무엇인지 알수 없는 회색지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건한 위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운명은 서로 돕는 것이기 때문에.

 

 

   ‘백화점 화랑에서 녹지대의 동인 시화전’이 개최되던 날 그날 밤 그들은 ‘뒷골목의 인정, 실패한 사람들의 살갗이 닿는 듯한 대폿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지금 살아 있는 것과 앞으로 살아갈 것, 그리고 지금과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을 것을 다정하게 노래했을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언어, 다른 감수성, 다른 소설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기꺼이 권한다. 무언가 지금과는 확실히 다른 반가운 녹지대가 되어 줄 것이다. 그저 ‘생활’이 ‘생존’뿐이라 슬퍼하는 우리 모두의 무망한 밤에 조용하고도 옅은 초록이 되어 줄 것이다. 그건 아마  한밤중도 초록이 되는 신기한 시간임에 틀림없을 듯하다. 잘은 모르지만 박경리나 김승옥이나 혹은 우리 부모님이나 '한쪽 눈으로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있는 얼굴, 그 그리운 얼굴들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초록이었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덧붙임)

 

마침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한국 현대 문화예술의 메카' 명동 반세기를 돌아보는 특별전 '명동 이야기'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60년대 명동거리를 사진과 이야기로 확인할수 있다고 한다. 녹지대 같은 다방과 그곳에서 예술과 문화를 논했던 젊은이들을 만날수 있다고 하니 날이 풀리면 한번 나들이나 가볼까...

기사 참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1/24/20120124012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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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sim 2012-01-24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페이퍼를 읽으면서 아주 오래 전, 영화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를 따라 극장에 가던 기억이 떠올라 잠시 마음 뭉클 했습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마부> <오발탄> <미워도 다시 한 번> 등을 본 기억이 납니다.
<녹지대>의 시대적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에는 부산 영도에 살았드랬습니다.
전후 세대, 영도국민학교엔 1학년이 14반까지 있었고 저는 12반 112이번이었는데 제 뒤로도 열명 가량의 아이들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언덕 위에 자리한 학교에서 보면 오전 열 시, 오후 네 시 영도다리가 들려올라갔습니다.
미군막사로 쓰던 교실, 동네 공중화장실...
살아남느라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어른들의 싸움들...

모처럼 향수에 젖어봅니다.

한사람 2012-01-25 09:26   좋아요 0 | URL

일곱살까지 부산에 살았어요.
당시 부산에선 어른들이 늘 영도다리에서 줏어 왔다고 아이들을 놀렸어요.
당연히 거짓말이라 생각하다가도 한순간 정말?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때 갑자기 두렵다는 생각이 들어 엉엉 울게되곤 하는데, 저는 울지를 않았대요.
심각하게 나를 왜 주어왔냐... 내 모습이 어땠냐... 그런 식이었대요, 하하하

그 영도다리가 들려 올라갔다니 정말 옛날이군요 ㅋ
112명은 너무나 끔찍한데요? 서울와서 학교를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다녔네요.
그때 7,80명 했었죠. 한 반에..

저는 아버지와 단 한번도 영화를 같이 본적이 없어요 ㅠㅠ
말씀하신 영화등은 죄다 어린 시절 명절특집으로 본 기억이 납니다..
중전님 덧글로 아주 어렸을 적 아직도 기억하는 부산친구들 생각에 슬몃 미소지어 봅니다^^
(연휴가 드디어... 끝났습니다 !!!)
 

 

 

 

 

 

 

#1. 추울 때 가지 마시라

 

 

 

 

   겨울에 헤어진 사람이 많다. 우연의 일치인지 만남과 이별의 성적표를 작성해보면 더욱 분명하다. 그러므로 겨울엔 보고 싶은 사람도 많다. 어쩌면 겨울에 이별을 많이 한 사람은 일 년 내내 겨울일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정말로, 추위를 싫어하고 그래서 겨울엔 아무런 시작도 안하고 그저 꼼짝도 안하는 내게 있어 겨울을 난다는 건 죽어도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들을 꼭꼭 눌러 봉한 채 입술 꽉 깨물어 견디고 있으라는 말과 같다. 마늘과 쑥을 먹으며 백일을 견디면 사람이 된다는 곰처럼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그리움을 보고픔을 아낌없이 집어 넣는다. 



   혹시 나는 그동안 그 질긴 겨울을 더 질기게 나고서라도 새로운 봄을 맞고 싶어 이별을 자행해 온 것은 아닐까. 봄이 들이 닥치기 전에 서둘러 헤어지곤 했던 나는 영악한 현실주의자 였던 것은 아닐까... 신문에서 아는 사람의 부인이 죽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아는 사람은 그리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부고 란엔 분명 같은 직장에 다니던 그 아무개 씨의 부인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개 씨가 나보다 몇 살은 더 많을 테니 어쩜 부인은 나만큼 나이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 아무개 씨의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이 다리가 풀려버릴 만큼 왈칵, 슬퍼지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무슨 일로 죽었을까, 암 같은 부인병일까, 재수 없는 교통사고일까, 왜... 그 분은 꼭 이 찬 겨울 더 얼음 같은 땅속으로 들어갔을까... 아이들을 남기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신문을 더 이상 넘기지 못하고 신문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개씨 이름이 곧 찢어질듯 했다. 

 

 

   아버지가 이맘 때 돌아가셨다. 설을 얼마 남기지 않고 가신 그날 얼마나 추웠냐면... 가만히 서 있는데 이빨이 덜덜덜 떨리고 청색병 걸린 환자마냥 입술이 파래지고 그 푸른 입술은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참 매정하기 짝이 없는 날씨였다. 슬퍼서 눈물이 나는 건지 눈이 시려워 눈물이 흐르는 건지 내 부모를 묻는 날에도 나는 왜 하필 이렇게 추운 날 돌아가셨냐고 관을 붙잡고 투정을 부릴 정도였다. 드라마에 보면 꼭 무슨 일 있을 때 주인공이 부모님 산소 앞에서 소주 한 병 놓고 처량하게 우는 장면도 많은데 나는 내 몸 하나 죽지 않을 만큼만 추워서 그 얼음짝 같은 산소 앞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매번 꽃피는 봄으로 제삿날을 변경하고 싶어 죽겠는 자식인 것이다. 아무개 씨도... 나처럼, 아내를 묻으면서 뼛속까지 관통하는 이 겨울 찬바람을 잊지 못하겠구나... 아무개 씨와 그 자식들의 추위가 서러워 계속 울었다. 그 울음 앞에서도 아무 대답 없이 누워 있을 아내가 가여워 울었다. 지금은 변변치가 못해 당연히 찾아가 볼 수 없는 내 처지도 서글퍼 울었다. 십 오년 전 그 눈 오던 겨울 타이어가 펑크 난 내 차를 보고 기꺼이 자동차 밑으로 기어 들어가 타이어를 교체해주던 그 모습이 생각나 미안해서... 울었다.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도종환



 

 

견우직녀도 이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에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갈고 씨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2. 남들도 우리와 같을까요

 

 

 

 

   아내의 죽음을 노래한 시인으로는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이 퍼뜩 떠오른다. 무덤가를 오래 배회하는 듯한 가난한 시인의 이미지는 ‘당신의 무덤 위에 눈물 한 올 던지고 오면 당신은 빗줄기 되어 속살에 젖어’ 온다고 하는 사무친 고백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사랑 이야기를 그리는 글에서도 어느 라디오 사연에서 듣게 된 ‘아내의 편지’를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시대 대표 시인 24인이 첫사랑 혹은 추억속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할 때 도종환은 죽은 아내를 고개 숙여 그리워 했다.

 

 

 

 


   원이 아버지께 사뢰어 올립니다.

   당신이 늘 나에게 말씀하시되 ‘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당신은 먼저 가십니까? 나하고 자식은 누가 거두어 어떻게 살라하고 다 던지고 당신만 먼저 가십니까? 당신이 나를 향해 마음을 어찌 가지며 나는 당신을 향해 마음을 어찌 가졌습니까?

   매양 당신에게 내가 말씀드리기를 한데 누워서 ‘이 보소,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뻐 여겨 사랑할까요? 남도 우리와 같을까요?’ 하며 당신에게 말씀드리더니 어찌 그런 일을 생각지 아니하여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을 여의고 아무래도 내가 살 힘이 없어 수이 당신에게 가고저하니 나를 데리고 가소.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 세상에서는 잊을 수가 없어 아무래도 서러운 뜻이 끝이 없으니, 이 내 마음을 어디에나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며 살까요? 이 내 편지를 보시고 내 꿈에 자세히 와서 말씀하소. 내가 꿈에 이 보신 말씀 자세히 듣고저 하여 이리 써서 넣습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씀하소.

   당신, 내가 밴 자식 나거든 보고 말씀하실 일을 두고 그리 가시되 밴 자식 나거든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 하십니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을까요? 이런 천지 아득한 일이 하늘 아래 또 있을까요? 당신은 한갓 그리 가 계실뿐이거니와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러울까요? 그지그지 가이없어 다 못써서 대강만 적습니다.

   이 나의 편지를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자세히 와서 보이시고 자세히 말씀하소. 나는 꿈에서 당신을 보리라 믿고 있습니다. 몰래 보이소서. 하도 그지그지 없어 이만 적습니다.


 

 

- 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이 애절한 편지를 읽고서 도종환 시인은 아마도 조용히 울지 않았을까. 이 편지는 1998년 안동시 정상동 택지 개발지구내 한 무덤에서 발굴된 ‘이응태공 부인의 언간’ 이라 불리는 편지이다. 아내의 뱃속에 유복자를 남긴 채 서른 한 살 나이에 병들어 죽은 남편에게 아내는 제발 꿈속에 와서 나를 똑똑히 보라고 간청하는 내용이다. 이 편지를 남편의 관속 수의에 집어 넣고 집에 돌아와 아내는 얼마나 울었을까... 4백 년 전 어느 아내가 흘린 눈물의 양과 의미를 시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고백하는 듯하다. 시인은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사랑할 수 없었던 영혼들이 오늘 하루만이라도 은하수 어디쯤에서 만나고 있으면 좋겠’다는 칠석날 밤에 이렇게 적었다.

 

 

 

   이 편지를 미처 못 읽고, 그 마음을 다 전할 수 없던 부부의 영혼이 그 사이에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 아프고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나 사랑하였기를 바랍니다. 언젠가는 다시 부부가 되어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남편이 뒤에 남아 아내에게 눈물로 편지를 쓰고 그렇게 업연을 갚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이 그 아내를 위해 울어 주었기를 바랍니다. 아니 두 사람이 부부가 되기도 하고 가족이 되기도 하여 머리가 세도록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하는 세월이 있었기를 바랍니다.

 

 

- 107, 아내의 편지 中, 도종환 / 『떨림』, 2007

 

 

 

 

  신경림 시인은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에서 도종환을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시인’이라 말한다. 슬픔, 사랑, 눈물의 부드러움이 곧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접시꽃 당신』만 생각하면 과격한 교원노조 활동과 문예활동에의 헌신하는 결단력 같은 모습은 상상할 수 없겠지만 그 부드러움은 타자에 기대는 바가 아닌 직선으로 나아가는 곧고 강함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 시인의 삶의 모습은 연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드럽지만 곧은 것이 아니다. 그 곧음을 안고 있기 때문에 부드러운 것이다. 이 같은 메시지를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담고 있는 시가 <부드러운 직선>이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 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 <부드러운 직선> 부분

 

- 111p,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시인 도종환 中 /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

 

 

   나는 시집보다 시를 해설하고 평을 덧붙여 주는 시읽기 산책(?) 에 속하는 책이 더 좋다. 『떨림, 2007』같이 시인들이 쓴 에세이는 부력이 많아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또 달달한 설레임이 필요할 때 본능적으로 집어 들게 되는 매력이 있다. 조금 더 수준이 높은 시론집도 소설가의 산문과는 또 다른 전문성이 느껴져서 언제나 시보다 나를 유혹하는 책들이다. 도서관에서 이수영 시론집 『횡단, 2011』을 빌려왔는데... 이 책은 덮고서 리뷰를 써볼까 싶기도 하다.

 

 

 

#3. 진실하고 필요하며 친절하게

 

 

    마지막, 시 읽기에 썩 마땅하지 않는 분들에게 이 책을 소개, 추천한다. 시 읽기 좋은 날이 따로 있을까마는 그래도 이 책을 집어 드는 날이 그런 날이 되지 않을까 해서이다. 이 책을 덮고서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았을 눈물 몇 방울을 닦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시 읽기 좋은 날은 우리에게 시가 필요한 날일지 모른다. 시가 필요한 날은 사실 시 읽기 좋은 날은 아니었을 것이나 시가 더 좋아질 수 있는 날인 것은 확실하다. 우연히 끌려서(어쩌면 충동구매에 가깝게)집어 든 책인데 이참의 우울함을 많이 치유해 준 듯해 고마운 마음이다.

 

 

 

   여고에서 국어 선생님을 지낸 동생 같은 분이 쓴 책. 의외로 넘기는 맛이 풍부하다. 정석대로 차려진 한정식 밥상. 그러나 지루하지 않아 기분이 좋아지는 점심 한 나절.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를 공동 집필한 이력 때문인지 이 책은 교과서적인 단아함이 가장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다. 편집도 시원하고 중간에 매치된 사진들도 꼭 여학교 때 주고받던 편지지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이다. 선정된 50편의 시도 교과서와 참고서에 주로 언급되었던, 그러니까 서정윤과 도종환이 베스트셀러 1,2위를 휩쓸던 그 시절 연습장 표지에 주로 등장하던 분위기의 시들이다. (그게 참 반가웠다. 나는 1987년 이후 시집을 거의 모른다...) 곁들여지는 저자의 이야기와 성찰 및 깨달음이 어렵지 않고 지나치게 달달하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핵심을 전달하며 올곧게 끝까지 애를 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 일 년에 책을 열권이하로 읽는 분들에게도 선물로써 유용할 듯하다. 가장 많이 생각난 건 故 장영희 교수의 수필정도를 취미삼아 읽으시던 내 어머니였다. 이런 책 참 좋아라 하실텐데....흑흑흑.... 글자도 크고 여백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보편성과 대중성에서 기획력이 돋보인다.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무리 없이 읽어내는 독자라면 조금 아쉬울지 모르겠지만 어렵다고 모두 기억나고 쉽다고 모두 잊혀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아는 분들은 알고 계실 터이다.

 

 

 

   저자는 詩가 ‘진실하고 필요하며 친절한 말’이라 말한다. 이슬람 원리주의자 들의 경전에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세 가지 관문을 통과 했는가’를 미리 점검해보라는 가르침을 빌어 첫째, 그 말이 진실한가. 둘째, 그 말이 필요한가. 셋째, 그 말이 친절한가를 따져본다고 한다. 시는 그 자체로 진실하고 필요하며 친절한 말이기에 공해처럼 해로운 말들로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저자는 더없이 친절하다.(내 글은 과연 진실하고 필요하며 친절한가를 한참 생각하다가 답을 못 내렸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마지막에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가 소개되어 있다. 미치겠다. 책과 사연과 우연이 꼭 겹쳐지는 이 지겨운 나날들.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어쩔 수 없는 벽’... 이 구절을 읽다가 목이 컥 하고 걸려왔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왔다.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를 끝내고 나니 나 혼자서 나 혼자만이 저 막막한 벽 앞에 서있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한숨이 비어졌다. 시인은 절망을 넘는 방법을 말하고 있었다. 혼자서가 아니라 ‘꼭 여럿이 손을 잡고’ 넘어가야 한다고 희망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시 한수 읽었다고, 소설 한 편 읽었다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웃고 저렇게 울었다고 말하는 것에 나는 늘 갈망하고 희망하고 순간의 절망을 이겨보려 담쟁이처럼 질기게도 벽을 타고 있었을까. 누군가는 나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그 벽을 타다가 반가운 마음에 같이 엉겨 붙어 힘을 보태어 주었을까. 안 보이는 연대와 숨겨진 우정은 얼마나 소중한가... 추위도, 슬픔도, 그리움도, 겨울 모든 시름도 그렇게 함께 올라타고 넘어가는 것이라면 좋겠다. 그렇게 절망이라는 무시무시한 벽을 힘 모아 오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언제나 마지막에 습관처럼 하는 말, 당신도 나와 같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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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1-14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떨림의 두번째 이야기 [설렘]을 읽었었더랬어요. 작가들이 들려줘서 그런지, 원래 재미없어하는 남의 사랑 이야기에도 눈물이 삐질삐질. 시와 사랑에 빠지신 한사람님, 편안한 밤 되세요. 주말이 오고 있어요. 우후^^

한사람 2012-01-15 11:53   좋아요 0 | URL

하하, 재미없어 하는 남의 사랑이야기 ㅋㅋㅋ
이런말 하면 안되지만 ㅋ 시인이 쓰는 사랑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소설가가 쓰는 (소설아닌 자기)사랑이야기도 그저 그렇구요.
작가들은 자기 사랑이야기를 그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 같아요.
그냥 작품으로만 말하는게 가장 멋지고,
실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나 이런거 볼때가 가장 미칠 것 같이 소름이 돋긴 합니다..

그런데 도종환의 이야기는 대단한 절제와 함께 이미 자신을 배경으로 놓고
남의 이야기를 전해주기만 하는데도..눈물이 나더라구요...
저는 그런 남의 눈물과는 참 많이도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다는 ㅠ


숲노래 2012-01-14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로
좋은 하루
언제나 밝히소서..

한사람 2012-01-15 11:54   좋아요 0 | URL

고마운 덧글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너무 늦었군요 ㅋㅋ)

gimssim 2012-01-14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종환을 읽고 계시는군요.
저도 요즘 그분을 보고 있어요.
이 시대, 시인에게 요구하는 것도 많고, 기대수준도 높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겨울이어서 그런지 너무 외진 곳으로만 다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봅니다.

한사람 2012-01-15 12:11   좋아요 0 | URL

어쩌다 그렇게 되었네요. 여러 권 같이 넘기다 보면 꼭 한가지 사연이 발견되더라구요.
시인이 정치활동을 한다는 기사를 여럿 보았습니다.
본인 스스로 아이들 가르칠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하셨으니
교사된 마음 잊지 않으려 평생 거울비추며 살아가시겠죠, 믿습니다^^


꽃도둑 2012-01-18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추울 때 보내고 싶지도,,,가고 싶지도 않네요.
유독 추위를 싫어하는 탓도 있겠죠?,,,,글을 읽고나니 마음이 스산해집니다..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더욱 더하네요.

한사람 2012-01-18 19:40   좋아요 0 | URL

꽃도둑님, 거긴 비가 오나요???
여긴 아직이요~

새해가 되자마자 또 설이네요, 괜스레 마음만 바쁜 나날들 입니다^^
(추운건 정말 싫어욧!)
 

 

 

 

#1. 등이 휠 것 같은

 

 

 

   지난주 나가수에서 거미가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불렀다. 인터뷰 할 때 어머니가 자주 부르는 노래이고 특히 ‘등이 휘어 질 것 같은 삶의 무게여’ 이 부분을 부를 때 울컥했다는 말을 했다. 좋지 않은 목 상태에서 노래를 마친 후 거미는 생각만큼 부르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거미의 실력이야 많은 동료 가수들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어쩐지 그 노래를 부르기에 거미는 아직은 젊어 보였달까... 그 노래는 정말로 등이 휘어 질 것 같은 삶의 무게를 느껴 본 나이 에야만 겨우 터져 나올 수 있는 한숨 같은 노래가 아닐까... 싶었다. 등이 휜다는 것... 굽는 것도 아니고 꺾이는 것도 아니고 휘어 버릴 만큼의 삶의 무게는 도대체 얼마나 질기도록 무겁고 시린 것일까. 혹시 모르는 누군가의 등을 보고도 그 사람이 걸어온 쓸쓸함을 상상하며 뒤에서 기꺼이 아니 자동적으로 눈물을 흘려 줄 수 있는 만큼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우는 한사람의 등은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신의 눈물을 우산처럼 지붕처럼 덮어 주며 살아왔을까...

 

 

 

   오늘은 삶의 무게를 생각한다. 지나온 내 삶과 앞으로 남아 있을 내 삶의 총량과 비례하는 그 만큼을 상상한다. 오늘 넘긴 책은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었다 할 수 있다. 언젠가 병으로 몇 달을 누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힘든 날이 있었다. 그때 나는 방바닥과 천정을 번갈아 보며 아무리 하늘이 넓어도 나는 가벼워 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계속하여 내가 누워 있는 것이라면 내가 바닥에서 일어나는 것만이 내 무게를 이기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도 자기 삶의 무게를 이기는 일은 그렇게 등을 펴고 직립하는 고집스런 인내일지 모른다. 하늘이 보이면 일어나 앉고 등이 굽으면 다시 일어나 허리를 펴고... 사실 인간이 관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자기 등을 의지하는 곳은 모두 준엄한 삶의 무게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인지 나는 오늘 이만큼의 내 등이 기특하다는 생각을 한다.

 

 

 

#2. 무사히 건너가기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아는 그런 책은 아니다. 치사하지만 글로 된 페이지를 세어보았다. 모두 서른 페이지가 되지 않았지만 총 페이지는 250여 페이지 이므로 사진 빼고 약 이백 쪽은 내가 채워야 할 책인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덮었지만 나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니다. 그런 줄 충분히 알고 샀으니 내게 이 책의 구성과 양과 질에 대해 실망할 자격은 없는 듯 하다. 나는 좀 가볍고 싶었고 여백이 필요했고 생각의 지방분을 대폭 줄여야 했으니까... 작가의 이름만 보고 어느 정도 밀도를 기대한다면 이 책은 절대 구입하시면 안된다. 몇몇 유명한 작가를 앞세워 이것도 책이라고 내었는지 출판사의 꼼수를 욕하기 딱 좋은 책이기도 하니까.

 

 

 

   이 책에 글을 적어 넣은 사람은 8명(김인숙, 김훈, 박남준, 백가흠, 안도현, 윤대녕, 전경린, 하성란)이고 일 년은 12개월이다. 김훈과 하성란이 각각 3개월씩을 맡았고 1월 달의 전경린은 달랑 8줄이다. (턱없이 부족한 원고를 편집자가 달수에 맞추느라 애를 썼다 ㅠ) 한 달 마다 작가의 글이 있고 뒤이어 약 열장의 노트가 삽입되어 있다. 당장 달려가 보라색이나 초록색 플러스 펜을 사오고 싶지 말이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분명 이런 책을, 이런 다이어리를 원했다고 무척 좋아 했을지 모르겠다. 아주 옛날 여학교 6년을 붙어 다닌 그 친구라면 표지가 노란색인 것만 빼고는 쓸만하다 말했을지 모르겠다. 지하철 역이름을 모조리 외우고 학교에서 집까지의 최단거리에 집착하던 대학교 단짝은 이런 책은 사기이고 돈 아깝다 비판했을지 모르겠다. 남편 따라 이 나라 저 나라 떠돌고 있는 선도부 부장 그 녀석은 너 아직도 이런 거 사들이냐 핀잔을 줄지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삼백, 사백 페이지 소설 끝에 꼭 이런 헐렁한 페이지를 그리워 한다. 내가 좋다는데 다 시끄럽다, 외친다.

 

 

 

   이 책에서 건진 명언은 역시 또 어쩔 수 없이... 김훈이다. 나는 아직도 <흑산>을 부여잡고 있는데 그 책을 계속 쉬어가며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의 무게가 정말로 눈이 휘어 버릴 것만 같아 가끔 작가의 어깨통증까지 둔중하게 전해져 온다고 하면 뻥친다고 뭐라들 하실까. 글을 아무리 써도 완성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막막한 축성의 세계에 떠도는 가엾은 영혼만 같다. 그런데 김훈은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는 어떤 주제건 꼭 책 읽고 글 쓰는 것의 허망함을 말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다른 작가들은 출판사가 원하는 주제에 맞춰 기획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훈은 산문에서도 이야기 하는 것이 한가지다. 그는 사무치도록 가벼워지는 이 세계와 사물과 현상이 싫어 무겁도록 눌러 앉아 있는 석고상만 같다...

 

 

 

책을 읽기는 어렵지 않지만 책과 책 사이를 건너가기는 어렵고, 나 자신과 책 사이를 건너가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기 전과 책을 읽은 후가 마찬가지이다. 나는 왜 책을 읽는가.

그것을 알면서도, 눈을 치우고 들어와서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었다. 책을 읽어서 나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 그 사적인 새로움으로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내 책 읽기의 지옥이다.  - 28p

 

 

 

   전경린과 김훈 사이에 노트가 있다. 김훈과 하성란 사이를, 하성란과 윤대녕 사이를 무사히 편안하게 건너가기는 어렵다. 이 책은 결코 가벼운 책이 아니었다. 가볍기 때문에 더 무겁다는 걸 매번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구나, 그런 책이다. 그렇다. 가벼운 건 얼마나 견디기 힘든 막중함인가. 존재의 부재가 제공하는 그 모든 하중을 견디느라 우리 등은 비틀리고 휘어지고 마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나이 들어 다 같은 모양의 뒷모습을 이루는지 모른다...


 

 

 

#3. 텅빈 무거움

 

 

 

   나꼼수, 봉주 2회를 들었다. 러닝타임이 세 시간 반이 넘어가는 분량이다. 도저히 한자리에서 집중하며 들을 수 없는 정보였다. 등이 정말로 휠 것 같이 삭신이 쑤셔왔다. '나와라 정봉주 국민본부' http://www.freebongju.net/ 에도 가입했다. 민주 통합당 대표선출 선거인단 신청을 했더니 투표하라고 문자가 와서 가볍게 투표도 했다. 곧 ‘BBK 실소유주 다방’이라는 이름의 카페도 만들 예정이라 들었다. 내 평생 이렇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며 참여를 해본 적이 처음이라 다시금 이씨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달력만이 아니라 동상 세우고 기념주화를 만들어야 할 사람이 맞는 듯 하다. 아침신문에 이제 정봉주가 사라지니 주진우 기자에 더 예리한 칼날 공격이 시작된 것을 확인했다. 책 한권 받으려고 조선일보 블로그를 개설하면서 아... 나도 모르게 물욕에 무너지는 나약한 민심을 엿보았고 알라딘이나 포털 블로그와는 비교가 안 되게 방문자수가 엄청난 것을 확인하고 또 한번 이 나라 권력언론의 파워를 실감했다.


 

 

   내일은 이 허전한 마음을 꾹꾹 채울 다른 책을 집어 들어야 겠다. 쿤데라에 의하면 책을 읽는 행위는 결국 자기 존재를 잊는 효과를 낳는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나 역시 요즘은 책 읽을 때 나는 어디에도 없고 현실의 내 문제와 잡다한 고민들은 그 실체자체가 희뿌예진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어떤 유령과도 같은 존재가 페이지만 넘기면서 앉아 있다는 섬뜩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 도취감이 현실에의 도피로 발전하지 않아야 하는데...책을 읽고 이깟 글을 쓰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바꿀수 있을지, 나를 새롭게 할수 있을지, 나는 글을 쓰는 동안에도 늘 이 지옥 같은 질문에 시달린다. 김훈도 지옥이라는 데 한낱 아무것도 아닌 나라고 별수는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고 서글픔이고, 그렇다. 오늘은 이 가벼움이 가볍게만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아무리 원하고 그리웠다손 치더라도, 오늘은 이 텅빈 무거움이 내 등을 휘게도 만드는 것 같다. 오늘까지만, 가슴을 부여 잡는다. 내일은 내일은 가볍지 않을 것이다. 아니 무거워도 견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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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1-12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어깨통증까지 느낀다는 대목, 격하게 공감합니다. 뻥이라뇨...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성란과 윤대녕의 사이는 제 짐각으로는 정말 아득하군요.

여튼 지옥도 사람에 따라 색색이고 무게도 사무치게 달라 한사람님의 등을 휘게하는 그것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저 내일은 뭐든 견딜 만했으면 좋겠습니다.


한사람 2012-01-13 23:58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하루 종일 저는 몇몇 시를 잡아 먹었어요 ㅋ
격하게 공감해주셔서 어떤 기분인지 안다 해주셔서 기쁩니다.
하성란과 윤대녕의 글은 하나도 기억 안나고 오로지 김훈이 나는 왜 책을 읽는가, 하는 독백만 맴돌아요..

오늘은 그럭저럭 잘 견딘 것 같습니다^^

cyrus 2012-01-1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 저자가 김훈의 소설과 에세이 속에서 발견한 문장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인용한 글귀가 무척 좋았어요, 그런데 중학생 때 김훈의 <칼의 노래>, <자전거 여행>을 읽어봤는데
문장이 좋았는 지도 몰랐어요ㅎㅎㅎ 그래서 이번 기회에 김훈의 글을 읽어보려고 해요.
참고로 <칼의 노래>는 처음 읽었을 때는 좀 지겨운 감이 있는데 지금은 어떻게 읽혀질지 모르겠네요 ^^;;


한사람 2012-01-14 00:00   좋아요 0 | URL

<책은 도끼다>는 읽을만 한가요?

그렇죠..김훈 글이 지루한 느낌이 들때도 있는 건 맞아요. 근데 문체가 지겹게 반복되는 구절이 많아서 서사가 어필을 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어요. 문장만 기억되고 이야기는 잊혀지죠..
저는 김훈표 소설보다는 산문에 한표를 던집니다^^


숲노래 2012-01-13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벼워지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하면서
하루하루 좋은 생각
차곡차곡 빚으시기를 빌어요~

한사람 2012-01-14 00:02   좋아요 0 | URL

예, 오늘 하루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주 무거운 시간을 가졌어요, 하하
된장님도 즐거운 주말을 맞이 하셔야...
(틀에 박힌 인사말이네요 ㅋㅋ)

gimssim 2012-01-13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이 휠 것 같은 사람...여기 또 있어요.
무엇이 문제인가 싶어서 오제은의 <자기 사랑 노트>를 읽고 있네요.
저는 '자기연민'이 내 등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한겨레신문 온라인에 사진을 올리는데 좋은 사진으로 뽑혀도 달랑 책 한권이 선물로 날라옵니다.
사진관 아저씨는 끌끌거리며 '조선일보'로 바꾸라고, '현금'이 날라온답니다.
삼십 년 만에 남편에게 가계부검사까지 맡은 살림살이지만...무식한 소신도 어쩌면 나를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한사람 2012-01-14 00:14   좋아요 0 | URL

무슨 책인지 찾아봤더니..가족상담, 부부치료하는 분이시군요..
저는 자기연민은 몰래몰래 돌아서서 하고 상대에겐 그러지 말라고 잘난척 하는 편입니다 ㅋ
(특히 남자가 연민에 빠져 있는 걸 못보겠더라구요 ㅠ)

조선일보는 현금이 날라오나요??
돈이 많은 언론이군요 ㅠ 안그래도 아까 개설한 블로그에 갔다 왔는데..
세상에 방문자가 600명에 육박해서 놀래서 후다닥 도망왔습니다.
(달랑 글 두개 올려 놓았는데 말이죠..)
아주 오래전부터 조선일보를 봐왔어요. 무슨 거짓말을 어떻게 괴담으로 조성하나
그거 확인하고 고자질 하려고 아직 안 끊었습니다 ㅋ

그런데 가계부검사는 심하신데요??
뭔가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는 말씀인데.. 지혜롭게 긍정적으로 서로 맘 상하지 않게,
미래를 생각하셔야...(이런, 또 진부한 덕담을)

따스한 주말 되시길^^

조선인 2012-01-1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거미가 부르기엔 아직 먼 노래지요. 테이의 '넌 할 수 있어'도 너무 이른 노래였지요. 카니발의 '거위의 꿈'도 좋았지만, 인순이가 불러 불멸이 된 게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한사람 2012-01-14 00:18   좋아요 0 | URL

테이도 거미처럼, 선곡이 적절치 않았던 거 같아요. 음원으로 들으면 좋을까 해서 기웃거려봤지만 서비스도 안되더라구요.(원작자와 협의가 안되서요 ㅠ) 그런데 지난주 처음으로 나가수 음원이 한번도 일위에 오르지 못하고 추락을 했어요. 나름 가수다 쪽이 상위권을 휩쓸었구요. 그러니까 실은 연예대상은 나가수팀이 아니라 무도를 줬어야 하는건데 말이죠 !!!!

딸아이 때문에 음반 가요 시장 실시간으로 꿰고 있거든요, 하하

조선인님도 편안하게 주말을 맞이 하시길^^


재는재로 2012-01-14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정도 삶의 무게를 경험한 사람이 불러으면 좋았을 텐데 좀 아쉬운

한사람 2012-01-15 11:3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삶의 무게라는게..한숨만으로도 느껴지더라구요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신기하죠^^

노이에자이트 2012-01-14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미가 만으로 서른이 넘은 나이죠.예전에 대학생이 드물었던 시절은 그 나이면 사회생활 10년을 넘기면서 결코 어린나이가 아니었죠.그러고 보면 대학졸업한 사람이 많아지면서 서른이라는 나이도 어린 나이가 된 것 같아요.

제 주변에도 고교졸업하자 마자 바로 사회생활한 후배들은 남자든 여자든 서른이면 어른 티가 납니다.그런 사람들은 남진 노래 '인생'을 불러도 별로 어색하지 않죠.하긴 남진도 삼십대 초반에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만...확실히 같은 나이라면 대학생이 사회생활하는 사람에 비해 좀 어린 티가 나죠.

한사람 2012-01-15 11:36   좋아요 0 | URL

예, 지금 서른하고 우리때 서른하고..또 부모님 서른하고는 틀린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학교선생님이 삽십대 초반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사오십 분위기였던거 같아요, 하하

세월과 고생을 겪어야만 묻어나는 깊이가 따로 있기에..

노이에자이트님, 오늘은 날이 따스하고 좋네요^^

노이에자이트 2012-01-15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임희숙 노래는 '진정 난 몰랐네'입니다.한사람 님도 아실듯...왠지 한사람 님이 부르면 어울릴 것 같은 노래입니다.

한사람 2012-01-16 08:54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그 노래 알아요~
한번도 불러보진 않았지만 노이에자이트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도전해 보겠습니다, 하하. 새로운 한주 시작이네요.
올해는 설이 너무 빨리 오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2-01-16 16:27   좋아요 0 | URL
그래요.유명한 노래죠.

눈 많이 오기로 유명한 광주인데 이번 겨울은 큰 눈이 안 오네요.가뭄이 심하긴 심한 모양입니다.
 

 

 

 

 

 

 

#1.

 

 

   나는 내가 가진 성향 중에 스스로 무서워하는 구석이 있다. 결정하면 실행한다는 것이다. 실행하기로 했으면 중간에 패색이 짙어도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나는 늘 과정이 중요하다 노래 부르지만 실은 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 듯하다. 끝내는 의미때문에 과정을 견디는 사람이었나 싶다. 심지어 끝내지 않은 것은 했다고 여기지 않는 경향도 있다. 좋게 보면 소신과 끈기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결과만을 위한 목적 지향주의로 흘러가기 쉬운 꼴이다.

 

 

   과정의 질, 결과의 여부와 상관없이 또 하나 스스로 두려워하는 성향은 과감한 단절에의 결단력(?)이다. 무엇이든 그 전까지 죽을 만큼 열심이었지만 오늘부터 아니라 판단했다면 때려치운다는 것이다. 물론 결정을 하기까지 미련할 만큼 고민을 한다. (열에 한 번 정도 밤새 고민 안 해도 좋았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결론을 낼 때도 있지만...) 여기서는 필연적으로 때려치우기 전에 내가 이루었던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데 버리는 걸 타고난 탓인지 그 부분에서 시간을 오래 끈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헤어지기로 했으면,

     헤어진다.

 

 

     그만두기로 했으면,

     그만둔다.

 

 

     지우기로 했으면,

     잊어버린다.

 

 

   회사 모든 사람이 사직서를 내어도 절대 그만두지 않을 것 같았던 한 사람이 갑자기 짐을 싸고 인사를 한다하면 그건 나였을 것이다. 지구 끝까지라도 같이 갈 것처럼 아니 죽어도 같이 죽을 것처럼 사랑했으면서 뒤도 안돌아보고 집에 돌아와 책을 보는 여자가 있다하면 그건 나 였을 것이다. 몇 날밤을 아니 몇 십 일을 밤새워 만든 작품이었지만 어느 아침 갈기갈기 찢어버린 여학생을 보았다면 그것도 나 였을 것이다.

 

 

   어차피 사는 건 오늘까지 살다 내일 죽는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을 버틸 수 있는 것이지만 ... 그동안 나는 지금까지의 나를 죽여 버려야 내일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날들이 많았다.

 

 

 

#2.

 

 

 

   알라딘 서재도 실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 리뷰나 열심히 올리고 다른 계획을 위해 깨끗이 지워버리자, 이런 생각을 했었다. 리뷰가 쓰기 싫어 질 날을 기다렸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계기를 기다렸다가 맞을 것이다. 그러다가 운좋게(?) 그런 기회가 오긴 왔다. 그때 내가 평소 성격과 같이 서재를 때려치우지 않고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던 이유는 막연하게나마 그 시간이 내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사람은 말로 듣고 눈으로 백날 보아도 자신이 겪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이것이 지난 몇 년간 책 좀 읽고 글 좀 쓴 덕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니다 싶어 그만두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는 생각을, 글쎄 이곳 서재에서 깨닫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아픈 일은 헤어져야 겠다고 제 때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헤어져야 했어도 헤어지지 못하는 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냥 살고 더 견디고 그러다 다시 웃는 것. 이것이 안 살고 안 보고 우는 것보다 더 힘들더라는 것. 결국 나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하기 조금이라도 쉬운 쪽을 택한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것. 그런데,

 

 

   서재의 달인이 될 줄, 미처 몰랐다.

   뭐 대단한 감투라도 쓴 것 마냥 호들갑 떨고 싶진 않지만 그러나 분명 이것은 내게 사건이다.

 

 

   첫째, 여러 통계치를 보았을 때 스스로 자격 미달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둘째, 서재에 의지는 했지만 애정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내 서재 활동이 굉장히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운영을 해온 내 입장에서의 자격지심이므로 평가하는 쪽에서는 그만하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바라고 원하지 않았어도 평가요소를 충족시키는 요소가 있다하면 선정되는 경우이므로 크게 미안해하거나 감사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난 미안하고 감사하고 멋쩍다.

 

 

   달인이란 사전적 의미로 ‘학문이나 기예에 통달하여 남달리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비슷한 말로 ‘명인’이나 ‘고수’를 들 수 있다. 나는 어쩐지 이 어감이 좋게 느껴진다. 온라인 서재에서 유사한 의미로 ‘파워 블로거’, ‘파워 북로거’, 혹은 ‘파워 북피니언’ 이라는 칭호를 붙여주는 것보다 더 기술적(?)으로 다가온다. 김병만도 생각나고 무언가 진정한 희극인의 페이소스처럼 책 읽고 글 쓰는 자의 자세(?) 같은 것이 더불어 떠오른다. 돈 냄새가 덜 난다. TTB 광고나 적립금이라는 제도 하에 속해 있지만 ‘파워’라는 부정적 의미의 권력 냄새가 덜 난다. 잘은 모르지만 이곳이 그래도 떡밥만을 위해 글 쓰는 분들이 다른 곳보다 적다, 아니 그냥 남들 보다 조금 더 책이 좋고 글을 쓰고 싶어 아는 만큼 옮겨 놓는 분들이 더 많은 곳이라 믿어 본다.

 

 

   물론, 고수들이 많아서 그런지 다른 곳 보다 글빨과 말빨이 센 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곳이 아닌 이곳을 둥지로 삼는 분도 많은 것 아닐까. 그래서 서재의 달인 소식이 더 으쓱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3.

 

 

   숫자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새해라고 결심을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어차피 서재활동이라는 것이 의미부여의 기록 및 송수신, 교환의 의미를 가지므로 몇 가지 떠오른 생각을 기록해두고자 한다. 그러니까 달인 된 기념으로 올해엔 이래보자, 이렇게 하겠다(이게 유치해도 또 하는 맛은 있는 법) 이런 의미인 것이다.

 

 

1. 리뷰를 (너무) 길게 쓰지 않는다.

 

 

   작년 초에도 결심한 사항인데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일부러 길게 쓰려고 작정하는 것은 아닌데 쓰다보면 어느새 여서 일곱 장이 되 버린다. 처음엔 어느 정도 분량을 채우지 않으면 리뷰를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이 좀 바뀌었다. 짧고 핵심만 담으면서도 얼마든지 전달해야 할 것을 정리할 수 있다. 리뷰에 한풀이 하지 않는다. 서론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소설을 쓰지 않는다.

 

 

2. 리뷰를 (너무) 잘 쓰려고 하지 않는다.

 

 

   책을 읽었지만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경우 리뷰를 쓰지 않았다. 즉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거나 주장할 것이 없으면 그냥 패스였다. 리뷰는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기 때문이다. 대충 쓰는 리뷰는 한사람과 어울리지 않는다, 뭐 이런 자존심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생각이 바뀌었다. 도대체 왜 나는 리뷰를 잘 써야 하는가, 하하하. 왜 스스로 잘 썼다는 기준에 얽매어 뭣 때문인지도 모를 리뷰를 쓰고 있는가. 작년 한해 작위적인 리뷰는 대폭 줄었지만 아직도 대충쓸 거면 아예 쓰지 말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올해는 대충 쓰더라도 성에 안차더라도 그냥 올리겠다.(물론 이것 또한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리뷰에 쏟는 에너지를 대폭 줄이고 싶어서 이다.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고자 한다.

 

 

3.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끝까지 읽는다.

 

 

   이상하게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대충 읽게 된다. 돈 주고 사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 것인가. 기간 내에 돌려다 주어야 하니 지금이 아니면 다시 들춰 볼 일이 없다는 생각을 놓지 말자.

 

 

 

4. 중간에 아니다 싶은 책은 끝까지 끙끙대지 않는다.

 

 

   읽다 보면 나와 안 맞는 책이 분명 있다. 가끔 평가단 활동할 때 그런 책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런 책도 다 읽고 나서 리뷰까지 작성해 놓고 나면 뭐라도 하나 교훈은 얻게 된다. 하지만 서평 의무가 없다면 아니 꼭 서평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끝을 봐야 책을 읽었다고 여기는 부담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다. 시간을 두고 나중에 다시 집어든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포기한 책은 다시 안 찾게 될 확률이 더 많긴 하지만.

 

 

5. 읽어보지 않은 책은 추천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읽고 좋았던 것만 추천하겠다. 어디서 들었거나 보았거나 신문, 서점에서만 들추어 본 책을 마치 그 책을 아는 사람처럼 읽어볼 만하다는 식으로 포장해 위선 떨지 않겠다. 비슷한 내용으로 이런 책이 좋다고 하더라, 다 같이 읽어보자, 누구 읽어 봤냐, 이런 식의 페이퍼는 될 수 있으면 안 쓰겠다. (가능할까? 평가단 그만 둔 이후로 이 죄책감이 없어지긴 했지만 ㅋ) 한 페이지라도, 하다 못해 서문이라도 읽어 본 후 끄적이겠다. 기타 어떤 책을 말하는데 따라오는 참고 서적은 너그러운 이해를 바란다. 내가 읽은 책이 아니지만 필요에 의해 옮겨오고 싶을 때에도(옮겨와야 할 때)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할 것이다. 비슷한 의미로 TTB 광고도 내가 한 장이라도 들추어 보지 않은 책은 게시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내가 관심이 가서 곧 사들여 읽어 볼 생각인 책들은 매달 부지기수로 쏟아진다. 언젠가 관심 있는 책들을 무작위로 선정해 광고로 올려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 달 광고수익이 거의 이만원이 된 것을 보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내 서재에 들어와 내 글을 읽고 그 책을 구입한 분이 쌩쓰투 적립을 했다치면 나도 그러는 바 얼마든지 이해하고 감사할 만한 수익이지만 그냥 내가 읽어보지도 않은 신간들을 올려 놓았고 그 책들을 클릭해 구입한 사람이 많아지면 내 수익도 많아지는 것이 나는 불로소득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런 것이 기득권이고 파워이고 안보이는 권력이라 생각한다.

 

 

   가진 건 없어도 쌩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기 때문에 그런 클릭은 유도하고 싶지 않다. 혹시나 TTB 광고를 별 생각없이 정보차원에서 장바구니 처럼 활용하는 분들이나 운영측에서 잘 이용하라고 한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 뿐인데 혼자만 깨끗한 척 한다 생각하는 분들은 그냥 이 결벽증을 딱하게만 봐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절대 어떠한 오해도 말아주심 더 좋겠다. 박근혜 말을 빌리자면 그게 정답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진 좀 결벽을 떨고 싶으다.(물론, 나는 변덕을 믿는 사람이다. 어디까지나 아직까지다)

 

 

 

 

 

기타,

 

감동받은 글은 뭐라도 남겨놓고 온다.

좋은 글은 꼭 추천한다.

적은 추천과 많은 추천의 차이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없다고 서운해 하지 않고 쏟아진다고 우쭐하지 않는다)

남을 비판하는 글에 추천하지 않는다.

나를 비판하는 글에 상처받지 않는다.

오해는 빨리 풀어 버린다.

남의 상처를 구경하지 않는다.

아닌 줄 알면서 침묵하거나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보지 않는다.

이웃의 행복에 동참한다.

위선이나 기만에 너그러워 진다.

.

.

.

 

 

 

 

 

 

   모두 어떤 글을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책과 글에 임하는 태도, 형식에 관한 내용들이다. 책과 글의 내용에 대해선 1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어 아직 고민 중이다. 미셸 투르니에는 사람은 누구나 천재성, 재능, 솜씨, 잔재주 이 네 가지 능력을 조금씩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어떤 능력이 얼마만큼의 비율로 섞여 있는 가 차이가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 중에 제일 격이 떨어지는 것은 잔재주이다.

 

 

 

   잔재주를 부리는 예술가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 나머지 자신의 작품을 진짜처럼 보이게 만
  드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무능력과 무지와 모자라는 창의력을 숨기는 것
  이다. 

 

  - p146,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미셸 투르니에.

 

  

 

   며칠 전 덮은 책에서 자꾸 나를 잡아 당기는 구절이다. 이 말이 가슴을 찌른다. 천재성은 전무하고 재능은 조금 있는 것 같고 솜씨는 연마한다고 노력하지만 늘 잔재주로 나의 무지와 무능력을 숨겨온 것은 아닐까... 혹은 모자란 그 나머지를 채우며 달려 온 것은 아닐까... 달인이라는 존재가 ‘널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라 보았을 때 그것은 결코 잔재주로 이루어질 경지는 아니지 않을까. 나는 아직 서재에 통달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달인된 내 스스로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답은 똑 같다.  통達한 달인은 아니시고 더 다그치고 달려야 할 사람으로서 도달하는 과정속에 위치한 미래의 해를 품은 '달인' 이어야 할 것 같다. 해는 매일 뜨지만 달은 어쩌다 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미 뜬 '달인'보다는 아직 뜨지 않았지만 언젠간 꼭 뜨고 말 '달인'이 더 기다려 진다. 누구든 가슴에 품은 해가 달빛에 그윽하게 비추어 오는 날, 그런 날의 주인공인 달인이 되고 싶을 것이다. 내게 달인은 아직 더 달리고 품어야 할 그분인 것이다.

 

 

 

 

 

- 2011년의 한사람 서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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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06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너무 길게 쓰지 않는다. 왠지 기대되는 사항인데요? 쿄쿄.
저도 예전에 비해 긴건 참 많이 길어졌어요. 저도 한사람님 따라쟁이 될꼬예요.ㅋㅋ

왜요, 한사람님은 충분히 달인될 자격있어요.
'해를 품은 달' 괜찮은 것 같아요. 책은 안 사 볼 거구요.
암튼 올해도 좋은 글 기대해요.^^

한사람 2012-01-08 08:48   좋아요 0 | URL

성실한 리뷰에 대한 강박을 줄이고 핵심과 압축, 좋은 정보쪽으로
방향을 틀기로 했어요, 하하 물론 잘 될는지는 몰라요 ㅋ

'해품달'은 지나가다 슬쩍 몇 장면 보았는데
뿌리 깊은 나무 끝나고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겠구나.. 그런 생각은 했어요.
달인은..쫌 제 스스로 아직 어색하네요, 히히

맥거핀 2012-01-0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랬군요. 달인이 되셨군요. 수제자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파란 추리닝 늘 준비되어 있음.

한사람 2012-01-07 12:11   좋아요 0 | URL

예..맥거핀 님 덕에 그때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새삼 고맙네요^^
수제자로 삼기엔 이미 맥거핀님도 달인이죠 ㅋ

가연 2012-01-06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읽어보지 않은 책은 추천하지 않는다, 라는 대목에서 예전에 같이 리뷰했던(이게 벌써 예전이군요!) 코끼리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모 책이 떠오르는구먼요.. 저도 그 책 이후로는 서점에 가서 책을 먼저 휘리릭 훑어보고 있답니다... 구입하거나 어떻게든지 받았을 때 본인 스스로는 만족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심정인데..

그러고보니 서재의 달인이셨군요ㅠ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ㅎ 근데 마지막 사진 직접 편집하신건가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파이프가..ㅋㅋㅋ 탐나는구먼요[심지어 책들보다도..]

한사람 2012-01-07 12:21   좋아요 0 | URL

아하...평가단 아픈 추억이죠 ㅋ
온라인 서점의 한계이기도 하고.. 서점에서는 실물이 다른 책들과 같이 놓여 있기 때문에
상대적 비교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전 꼭 사려고 한 책 말고 그 옆에 책을 들고 온다는 하하하..

밑에 엽서 사진하고 다이어리 사진만 제가 찍은 것이 아니구요.(볼펜과 다이어리가 가장 제 서재와 비슷해서 ㅋㅋ) 다른 사진은 이어 붙이기만했죠. 거기서 파이프를 찾아 내시는 군요, 예리하신 가연님 !
오늘은 주말인데 여유로우신가요??

울보 2012-01-06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꾹 눌렀어요,

한사람 2012-01-07 12:22   좋아요 0 | URL

예, 울보님 !!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ㅋ
좋은 주말이요^^

cyrus 2012-01-0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독서 습관이 비슷하네요. 조금 다른게 있다면 도서관에 빌린 책보다는 집에 구입해놓고 읽지 않은 책들을
좀 읽어보려고 해요. 작년 초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권 세트를 구입했는데 몇 권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거든요 ^^;;

그리고 서재의 달인이 되신거 축하드립니다. 하긴 저도 작년 같은 경우에는 학업에 충실한 탓인지
관리를 소홀히 했어요. 2년 전에 블로그를 처음 했을 때보다 책을 많이 읽지도 못했고 글도 많이
쓰지 못했고요.

그런데 마지막 사진, 한사람님이 직접 편집하신건가요? 서재 배너나 블로그 바탕화면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네요 ^^

한사람 2012-01-07 12:27   좋아요 0 | URL

그게그게..세트로 구입해서 책장까지 들어온 날은 너무나 기분이 좋은데...
그렇게 꽂아 놓고 잘 손이 안간다는 것이죠, 하하하
주로 민음사껀 도서관에서 빌려봅니다. 저도 집에 쌓아두고 있는 책들이나 읽어야 할텐데...말이죠 ㅠ

두장 빼곤 제가 찍은 사진들이구요. 그냥 이어붙인 건데요 ㅋ
(전문용어로 사기친 건데, 하하)
서재가 책들이 많아져서.. 아주 짜증나요. 쓸데없이 책욕심만 많아가지고 ㅋㅋ

2012-01-2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서재는 왠지 실속있게 두툼한 한 권의 책 같아요.

/ 한사람님과 저는 다르군요. 1. 저는 어떤 일이든 시작은 잘 하지만 끝은 잘 못 냅니다. 2. 저는 긴 리뷰를 쓰기가 무척 힘들어요. 3. 집의 책은 마냥 읽다 말다 하지만 도서관의 책은 웬만하면 다 읽고 반납합니다. (그러나 잦은 연체로 대출불가 회원일 때가 많습니다. 지금도..;;)

여튼 뭔가 읽는 쾌감, 그리고 공감을 주는 명쾌한 한사람님의 글들을 올해에도 기대하는 독자 한 명입니다.^^

한사람 2012-01-25 16: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섬님 !!
저도 어렸을땐 용두사미격으로 시작만 창대하고 끝은 늘 흐지부지했습니다.
일하면서 바뀐거 같아요. 긴 리뷰는 작정하고 쓰는건 아닌데 늘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핵심을 요약하고 압축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시인들이 저는 가장 위대해 보여요 ㅋ)

저는 연체하기 싫어서 안 읽고 반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날짜에 쫒기는게 가장 싫더라구요, 하하

읽는 쾌감이라는 말씀이 울컥...ㅋㅋ 하네요~
독자라는 말씀도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