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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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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으로 나가서 문 열면 들어와 !" 

  중학교 1학년 이었다. 우리 반 선생님은 체벌이 비교적 육체적, 물리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주로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않거나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았을 때 교실 밖 복도에 정해진 시간만큼 서있으라는 벌을 내리셨다. 평소에 손바닥 또는 엉덩이를 때린다거나 무식하게 운동장을 몇 바퀴 돌거나 하는 체벌이 아니었던 지라 나는 어떨 때 너무 벌이 약한 거 아냐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날은 다른 과목의 노트를 챙겨오느라 열심히 정리한 숙제를 내지 못했고 하필 그 우아한 체벌의 대상자가 된 것이다.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부르며 '바깥으로 나가서 문 열면 들어와' 이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교실 밖 복도 벽을 향해 뒷짐을 진 채로 십여 분을 서 있었던 것 같다. 애써 정리한 노트에 대한 아쉬움과 숙제를 하고서도 벌을 받게 되었다는 억울함은 둘째치고서라도 서서히 밀려오는 서러움에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이까짓 벌에 눈물을 보이긴 싫어 참고 또 참았다. 복도엔 수업이 시작되어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내가 벌을 받는지 누구하나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우리 반 외에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어쩌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반 친구들도 내가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했으리라-차라리 다른 친구들 속에 섞여 운동장 백 바퀴를 돈다거나 아니면 빡세게 뺨이라도 한 대 맞는 편이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내 자존심은 그야말로 서서히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느낀 서러움은 아마도 저들은 '안' 에 있고 나는 '바깥' 에 있다 는 상대적 좌절감이  아니었을까. 내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때 바깥세상으로 내밀려진 당시의 느낌은 영원히 추억의 '바깥'으로 내던지고 싶은 내'안'의 비교적 선명한 상처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이 참 편하다. 그래서 덮고 나면 무언가 불편한 진실을 건내 줄 것 같은 책들은 서점에서의 만남을 마침표로 찍고 들어올 때가 많은 요즘이다. 성공이나 처세를 위해 한 계단 더 올라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는 책들보다 자신에 대한 성찰, 치유에 관한 책들이 더 대세인 최근 경향에 편승하려는 기미가 엿보인다거나 결국 참신한 정밀화보다는 빤한 추상화를 감상한 듯한 허탈감, 혹은 다양성에 대한 착한 교육적 메시지에 에돌기만 할 것 같은 섣부른 염려로 고백하건대, 이 책을 쉽사리 들고 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끝내 내 발길을 돌려놓은 미련 섞인 그 한마디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의 '바깥' 이었다.  

  신문사 기자가 취재한 인터뷰 연재기사라는 소갯 글을 뒤로 나는 어쩌면 어느 '시' 제목과도 유사한 느낌의 그 한 구절을 통해 시집이나 잠언집을 집어들 때의 문화적 우월감을 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순간 많은 대중들이 선택하는 법정스님이나 하루키, 베르베르의 소설 앞에 몰려있는 독자들의 안마당이 아닌 그들의 '바깥'에 서 있는 내 자신에게 야릇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표지에 뚫려진 조그맣고 네모난 하얀 창 뒤로 빨갛게 드러나는 속살, 이제는 잊었을지 모를 내가 가진 바깥 세상에 대한 첫 추억을 기어이 들추어 살며시 어루만져 주고 싶은 조금은 유치하고 이유 있는 이기심이 더 정확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바깥 세상의 세가지 모임 

 저자도 언급하였지만 '바깥'이 주는 의미를 구태여 분석하지 않아도 우리는 긍정보다 부정의 메시지에 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굳이 큰 흐름의 바깥, 스포트라이트의 바깥, 주류 혹은 집단 가치의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도전적 의미의 아웃사이더, 세勢에 쫒겨 밀려난 주변인, 혹은 사물, 시간, 공간까지 불러오지 않아도, 반대개념의 '안'이 제공하는 안락함과 따스함, 안정감, 선택되어진 기쁨이나 성공의 대열에 안착하는 듯한 느낌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건 어떤 가르침 없이 알게 되는 사계절의 변화나 생노병사의 진리쯤 된다고 말한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서글픈 것일까.

  육개월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가 만난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현재의 인물들, 그리고 동물, 사물, 음식, 공간 이 스물여섯개의 대상들은 바깥세상이라는 위치적인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저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바깥 안에서 자신만의 에너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 운동성의 모습과 행태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깥이라는 개념을 구분 짓는 기준과 근거와 관련이 있는 바, 주제넘지만 기자가 만나본 스물여섯의 대상을 취재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미있는 '동사動詞'의 모임 으로 그들을 다시 무리지어 보았다. 내 나름대로 저마다의 사연을 더 곡진히 존중하고 싶었고, 바깥이라는 결과보다는 그 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더 이해하고 싶었다. 

< 바깥으로 밀려나다 - 바깥에서 피어나는 꽃 >

  첫 번째는 시대의 역사적 흐름이나 자연적인 이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밀려난 경우이다. 10년을 경주마로 살았던 퇴역마 다이와 아라지, 택배기사 된 연극배우 임학순, 40원어치 폐지신세로 절판의 운명을 맞이하는 책들, 은행지점장까지 지낸 IMF 명퇴 1세대 정석희, 한 시대를 상징했던 <광야에서>를 작곡한 '노찾사' 문대현, 아득한 역사의 오브제로 점점 멀어져 가는 우표, 70년대 인기를 누렸던 가수 주정이, 지배적 사회윤리에서 벗어난 유림의 성균관장 최근덕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밀려나다'라는 개념은 다분히 타의적이다. 세월과 나이에 밀려났고, 사건이나 현상에, 혹은 주변의 권유, 아니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떠밀리다보니 어느새 주류와는 멀어지고만 경우이다. 이들은 그래도 한때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박수를 받았으며,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도달해 인정도 받았으며, 세상을 향한 말이나 글에 힘있는 권위를 실을 수 있었다. 경주마는 마음껏 달릴 수 있었고, 책과 우표는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매번 넘기거나 붙여야 했을 것이다.
  바깥세상이라는 구역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분의 추락을 경험한 경우이므로 세월에 대한 야속함이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좌절감이 가장 컸을 것이라 어림짐작해본다. 그들중 가장 현실적인 타협을 통해 개인의 자아에서 사회적 구성원들 이라는 공동체로 그 대상을 감동적으로 넓혀간 명퇴 1세대 정석희님이 나는 가장 뿌듯했고 멋져보였다. 불교사찰을 돌며 버스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그의 겸손한 '하루출가'가 그 어느 유명한 종교인 부럽지 않은 나날들로 다시 꽃피고 있었다. 
 
< 바깥을 택하다 - 똑똑한 클라라 보다는 >

  두 번째는 보다 자의적인 의미에서 이미 바깥임을 알고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강력한 의지를 배경으로 바깥을 선택한 경우이다. 노인들의 2천원 짜리 낙원을 꿈꾸는 허리우드 클래식 사장 김은주, 정통 사회주의자이자 직업혁명가인 이일재, '세계마을 영화축제'를 꿈꾸는 떠돌이 영화감독 신지승, 마음가는 대로 음악을 한다는 홍대 인디밴드 타바코쥬스, 천시와 배척된 30년을 무당으로 살아온 천하대신 할머니,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셋넷학교 박상영 교장, 재주나 묘기가 아닌 소리로 인정받은 풀피리 연주가 오세철, 높은 정신력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성베네딕트 요셉수도원 안 마르코 수사, 민주화된 한국을 모델로 삼은 미얀마 난민 조모아, 호랑이의 정기를 담아내는 다큐 감독 최기순, 한국 출판계의 원칙주의자 개마고원 장의덕 사장이 그에 해당된다.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바깥으로 밀려났다기 보다는 보다 진취적으로 그 바깥세상을 향해 자신의 몸과 정신을 오롯이 던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택한 바깥세상이 주는 의미와 그 현실이 주는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선택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적어도 각자의 바깥세상 안에서는 그들도 리더이거나 어느정도 최고로 인정받고 있었다.

  다만 슈만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끝까지 지키려했던 클라라처럼 자신의 선택을 지나치게 정당화하는 일종의 '과잉 정당화(over-justification)'에 해당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소심한 독자로서 바래본다. 과잉 정당화는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기에 스스로 너무 똑똑한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보다, 슈만을 위대한 작곡가로 만드는 편이 똑똑한 클라라에겐 더 쉬운 선택이었던 것 처럼 바깥을 당당하게 선택한 그들 역시, 자존심 때문에 아닌줄 알면서도 행여나 고집스런 행보를 미련하게 끌고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 바깥에 놓이다 - 영원한 바깥은 없다 >

  마지막으로, 주변이나 세월의 속도에 밀려난 것도 아니고, 또 바깥 세상을 선택한 것도 아닌 어찌하다 보니-타자의 시각에서 바라본-바깥세상에 놓이게 된 경우이다. 박태환의 훈련파트너 수영 국가대표 배준모, 산악계 휴머니스트 넘버 3 한왕용, 서울대 박사출신 시간강사, 이영애와 김연아의 손모델 최현숙, 주역이 아닌 군무 발레리나 안지원, 삶의 상징적인 바깥공간 비부장지대 DMZ, '바깥스러운' 뉘앙스의 우리술 막걸 리가 여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손모델과 막걸리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꿈꾸는 최고의 경지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고, 또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동료 중에는 우연히도 최고 중에 최고가 떡하니 존재한다는 애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재능과 실력, 성실함이 부족하여 2등이나 들러리가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그보다 더 완벽했던 김연아가 있어 2위에 머무른 아사다 마오와 비슷한 그림이라고나 할까.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현재위치에 대한 크나큰 좌절감이나 '안' 세상에 대한 불만은 알고 있는 만큼보다 덜하다는 것이다. 그저 결과적으로 대세의 흐름이나 주류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바깥으로 분류된다는 것이지 여전히 묵묵히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하고 있는 것을 그만둘 생각도 없다는 점에서-이들도 처음부터 인정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므로-그들이 견디었을 시간의 내공이 보다 안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전 다섯 번의 올림픽 도전에도 끝내 메달획득에는 실패한 이규혁 선수를 기억한다. 인기개그맨의 매니져였거나 인기가수의 백댄서였지만 지금은 자신도 어엿한 스타가 된 연예인도 서너명 알고 있다. 막걸리가 지금처럼 주목받기 전에는 특정 여학교의 축제를 지속적으로 훼방놓는 모 대학교를 상징하는 대표성을 띠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바깥이라는 의미를 최고나 1등을 상징하는 수직적 개념으로서 보다 그 하위에 해당되는 것들을 총칭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그 의미를 보다 더 반갑게 받아들여 따스하게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노력하고 꿈꾸는 자들에게 안과 밖을 구분짓지 않고 그저 박수를 쳐주면 되는 것이다.

  며칠전 어느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나왔을 때의 일이다. 첨단 멀티플렉스 극장도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관객을 몇 개의 엘리베이터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 마침 우리의 차는 지하 3층에 위치해 걸어가는 피곤함보다는 기다려서라도 엘리베이터를 탑승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 그런데 우리가 위치한 층에 열려지는 엘리베이터엔 사람이 꽉꽉 차있어 우리가 탑승하면 바로 인원초과 경고음이 가차없이 방송될 순간이었다. 몇 번의 기다림 끝에 겨우 탑승을 했고 각층마다 우리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멈춰 문을 열고 다시 닫느라 너무나 피곤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엘리베이터 '바깥'에 위치한 우리들의 심정과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깥 사람들을 바라본 심정은 화장실 들어가고 나올 때와 같이 너무나 달랐다. 바깥에서의 애졸임과 상실감이나 안에서의 안도감과 성취감을 넘나들 필요 없는 비상계단으로의 속편함과 떳떳함, 이 책은 그런 비상계단을 이용하는 관객들-기자가 대상을 인터뷰하는 심정으로-의 현명한 선택이자 그 결과 누리게 될 자기 존중의 끄덕임, 그것은 아니었을까.   

 뫼비우스의 띠,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

  최윤필 기자는 프로필에 '기자를 하면서 밥을 벌어 먹은 게 아니라 빌어 먹은 것 같다'는 글을 남겼다. 검색을 해보니 기자로 산다는 것이 너무 기생하고 산다는 느낌이 들어 기자직을 그만두었고 목수라는 '딴짓'을 18개월 정도 하다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져서 재입사한 직후 다시 펜을 잡으며 연재를 시작한 것이 바로 '최윤필 기자의 바깥'이었다. 즉, 자신이 조직에서 주류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신문사 기자라는 직업적인 주류세상에서 빠져나와 '목수'라는 바깥세상에서의 노동을 몸소 체험 한 후 비주류의 세상과 사람을 취재한 것이니 어쩌면 책의 제목은 결국 어느 날('안' 세상에서 빠져나와)바깥으로 들어간 자신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느 신문이나 주목을 받는 것들은 따로 있지만 바깥과 안을 그 범주에서 보면 신문에 속하는 이야기들이 안의 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바깥이 자신이 쓰는 대상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내가 귀를 쫑긋한 부분은 바로 그 '범주' 라는 바깥과 안을 구분 짓는 의미에서의 개념적인 울타리 그것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바깥이고, 바깥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적어도 그 기준이 사회통합적 의미에서 관용되고 있는 범위 내라는 전제하에-근거나 필요조건들은 무엇이고 그것이 존재하다면 과연 타당한 논의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개인적인 딴지를 걸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터다.  다행히도 그는 책머리에 자신이 바라본 바깥과 안의 경계는 아주 허술하고 느슨하여 혹자는 '어떻게 이게 바깥이야' 라고 시비일지 모르지만 경계의 경계警戒가 삼엄하지 않아 안과 바깥이 평화롭게 바뀌고 섞이기도 하는 구분이 없는 세상을 바란다고 다소 김빠지긴 하지만 겸손하게 속내를 비추고 있다. 이마저도 아마 기자에서 목수로 다시 목수에서 기자로 유연하게 넘나드는 자신의 행보를 바라보는 주변 혹은 스스로에 대한 조심스런 격려의 시선이자 독자에게 바라는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의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니까 결국 그는 자신이 '안'에서 빠져나왔던 '바깥' 세상을 다시 '안'으로 들어와 세상에 알리고자 하니 잠시만 주목해 달라 한 것 아니겠는가. 마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는 오래된 속담처럼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으니 다시 안으로 들어와 바깥을 소개하는 치밀하고도 정당한 그의 플랜은 정말로 기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까 그의 시선은 자칫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바깥으로 밀려난 갖가지 사연에 섣부른 연민을 자극한다거나 모질게도 지켜낸 비주류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에 의례적인 박수를 치지지도 않을뿐더러 인터뷰 대상에 대한 개인적인 동조나 평가를 미루고 접어둔다.

  어찌보면 그의 문체는 대지에 꽃이 만발하는 화려한 '봄'이 아닌 처연하게 떨어지는 낙엽소리에 가까운 '가을'이다. 계절의 감성에 호소하진 않지만 꽃내음과 낙엽의 습기가 뿌리깊이 스며들어 이미 그의 뇌세포를 거친 외피와 내골이 이루어낸 오랜 약속처럼 그렇게 흘러간다. 유유히 흐르는 절제와 냉정에 가까운 필력들이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강물과도 같아 책을 덮고나니 말없이 가슴이 편안해진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인터뷰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인터뷰 대상을 더 배려한 결과- 대상을 만난 후 써내려간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오연히 들려오는 것도 비슷한 연유 일터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비주류라고 밝히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마흔 세살의 기자, 늦어도 쉰 살쯤에는 수도권 바깥에다 번듯한 작업장을 열고 부끄럼없이 자신을 목수로 소개하고 싶다는 그의 시선을 따라 바깥구경을 아주 알차게 하고 돌아왔다. 굳이 '안'이거나 혹은 '바깥' 이 아니더라도 또는 그 경계선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그 누구라도 그가 바라본 스물여섯마당의 세상 안에서 공존共存과 공생共生의 의미를 진지하게 느껴본 시간들이었다.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고  
그 세상은 '바깥'보다 더 따스해 '안'보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기꺼이 손을 내밀었고 나는 주저없이 그 손을 잡아
우리는 바깥 없는 바깥에서 서로 에게 '안' 이 되었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어 영원히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라도 만들어 진 것일까.  
빨갛게 내비치던
바깥으로 들어 간 내 '안'에 오롯이 새겨진 그대, '바깥'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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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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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내가 흑인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참 다행이구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굳이 CNN의 다큐멘터리 ‘미국의 흑인(Black in America)’에 등장하는 흑인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쉽게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마약 중독 매춘부 혹은 에이즈 환자를 떠올릴 수 있을 것 이다. 비록 인종차별에는 자유로왔으나, 우리도 당신이 딸이든 아들이든 '딸 가진 부모가 죄인'이라는 피해적 입장에서의 자조적인 넋두리는 피할 수 없지 않았던가. 나의 엄마는 할머니의 '딸'이었고, 나는 엄마의 '딸', 그리고 내 아이는 나의 '딸'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야의 세상살이가 주는 울림이 내게로 돌아와 앉은 지금, 나는 과연 어떤 편지를 내 딸에게 건내어야 하는 질문에 답할 차례이다.

 

딸에게 보내는 이유 

  작년이었다. 3학년 딸아이가 '아름다운 편지쓰기 대회'라는 가정통신문을 들고 와 '엄마가 자식에게' 부문에 제출을 해야 하니 빨리 편지를 써달라 연필을 손에 쥐어 주었던 오월의 어느 아침을 기억한다. 등교시간이 코앞이었던 아침에 느닷없이 편지지를 들이대니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울화와 짜증이 앞섰다. 시계를 보며 뭉뚝한 연필로 대충대충 글을 써서 내보낸 몇 주 후에 아이가 상장을 받아왔다. "엄마 상탔어, 내가 아니라 엄마가." 바쁜 아침에 써내려간 내용도 기억나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3등에 해당하는 상을 받아온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분야별로 시상을 하는 것이었고, '자식이 부모님에게' 부문이 아닌 '부모가 자식에게' 부문을 선택하여 어찌보면 숙제를 내게 미룬 것이었으며, 그 부문 제출자가 아주 적었던 모양이다. 좀더 신경썼으면 1등 하는건데 하는 아쉬움으로 편지를 다시 가져와 읽어보니 이건 내안에 있던 내 엄마가 내게 하는 말을 그대로 적어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평소 엄마가 내게 주문처럼 하셨던 말들로 그 편지는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건 아니다 싶어 나중에 정말 내 인생이 대단한 업적을 만들진 못하였어도 딸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편지들을 모아 책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을 한 적있다.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받았을 때도 막연하게 어느 유명인사가 자신의 딸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경험을 통해 전해주는 식의 편지글일거라고 생각을 했다. 국내에서도 연예인이나 교수, 작가 등의 유명인이 자신의 딸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글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책을 접할 때 내 예상을 뒤엎는 경우 읽는 내내 실망감대신 더 진지하게 오기를 가지고 작가의 생각을 읽어보려 더 안간힘을 쏟는 편인데 이 책도 그러했다. 애석하게도 저자에게는 내 예상을 뒤엎고 실제로 아들 한명만이 존재했으며, 글의 형식 역시 제목과 같이 편지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왜 굳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my daughter"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졌던 것일까

  마야 엔젤루는 아마도 자신이 한사람의 '딸'로서 자랑스런 인생을 살아내었다고 그리하여지금의 자신을 돌이켜볼 때 그 길목에는 항상 자신처럼 딸이었던 할머니와 어머니가 있었기에, 많은 여성들을 딸로 생각하며 그들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이 책이 시작하기도 전에 "나의 어머니가 되어준 분들', '나를 딸로 맞아준 분', '내가 딸처럼 생각하는 여인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으로 서문을 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많은 흑인, 백인, 유대교, 이슬람교도, 동양인, 스페니쉬, 아메리카 원주민, 알레우트족, 동성애자, 이성애자, 학력과 외모를 떠난 이땅의 모든 딸들을 부러 언급하며 양해를 구하지 않았나 싶다.
 

그림자에서 지팡이까지 - 할머니의 당당함과 어머니의 유연함을 한몸에

  스물 여덟 개의 챕터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의 에피소드와 자작시로 구성되어 있다. 특이할만한 것은 이야기의 도입부에 '할머니의 그림자' 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던 저자의 어린시절을 시작으로 태양과 달 사이에 신음과 자장가의 중간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서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마치고 있다. 마야는 존경하지만 일로 바빴던 어머니를 대신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르쳐준 할머니의 그림자를 밟으며 성장하고 극적인 순간에도 할머니의 가르침을 지팡이 삼아 위기를 헤쳐왔다고 고백하고있다.  

  또한, 동양적 사고방식과는 다르게 미혼모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의 딸의 고백에도 예쁜 아기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다려주며 손자와 마야를 자랑스러워했다. 마야에게 할머니와 어머니의 태도와 교육은 아주 중요한 시사점 을 함의하고 있는데, 바로 마야 스스로가 자신이라는 존재를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근원적인 밑천을 제공 하였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부딪힐 수 있는 크고 작은 난관들은 나중의 문제였다. 흑인이면서 그것도 여성이라는 인종과 성 두분 모두에서 차별을 안고 태어났던 마야에게 두사람의 존재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던져준다. 마야의 어머니는 호텔사장으로서도 지역의 존경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딸의 성폭행, 고교재학중 낳은 아들, 또 다양한 직업을 가지며 활발하게 여러지역을 돌아다녔던 마야에게 긍정적 사고방식과 지혜, 무엇보다 독립심을 뼛속까지 깨우쳐준 장본인이 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선 엄마와 할머니의 세대간 교육방식의 차이로 인해 딸은 물론 실제부모와 양육자간의 많은 갈등이 가족간 불화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기에 저자가 품위있고 부지런했던 할머니와 외향적이고 세련되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두사람의 장점을 훌륭하게 수렴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긍정적인 열린 가슴이 참으로 부럽고 배울만하다. 또 우리로선 유난히 부/자 보다는 모/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가족상처들을 소재로한 영화나 소설이 많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보다 더 피해자적 입장(여성이면서 흑인이기까지한)일수도 있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분노를 견디고 미소짓기까지

  마야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를 통해 실수했다면 사과하는 법, 미소짓기 만해도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흑인이지만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는 법, 덮어놓고 무례한 사람들에 대한 자기방어 방법 등을 배웠다고 한다. 대부분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글을 읽으면서 내내 전해져 오는 신호 하나는 바로 그녀의 '분노'였다. 단순히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결과에 대한 지적과 비난(사회적 차별)이 아니라 자신이 바꿀 수 없었던 흑인(인종차별)이라는 운명, 사회적 약자인 여성(성차별)이라는 신분, 즉 엎친데 덮친격으로 두가지 멍에를 짊어지고 부당하게 당해야 했던 차별에 대한-그것을 쌓아왔건 혹은 극복했건간에-저자만의 분노와 결국에는 미소를 짓기까지의 견딤 그것이었다.
  저자는 어느 유명한 영화감독을 기념하는 자리에 당대 유명한 백인배우들-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팩, 헨리 폰다, 찰턴 헤스턴 등-과 나란히 초청되어 추모와 함께 소갯글을 낭독할 차례가 다가왔는데 막상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올라서니 자신이 어린시절 오빠와 다니던 흑백분리영화관이 떠올라 그만 혀가 굳어지고 만다. 매표소부터 백인과는 분리되어 관객석까지 닭장같은 별도의 장소에서 영화를 관람하였던 그때 그 영화 속의 하얗고 훌륭한 어른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에 그만 '유명하고 돈 많고 인정받는 하얀 당신들을 증오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한참동안이나 멍해졌었다는 고백을 한다. 당당하게 배우들 앞에서 자신만이 아는 멋진 복수를 하기엔 분노만큼이나 쌓여진 미소가 더 많았던 모양이다

  그저 그녀가 방문했던 나라와 또 수많은 사람들 만큼이나 그녀의 가슴속에 고여 있었을 눈물과 그것이 미소로 되기까지의 그 견딤의 세월에 고개를 숙일뿐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았던 마야
                                              자신을 자랑 스러워 했던 마야
                                                자신을 믿을 줄 알았던 마야

 

작은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지혜

  여기서 나는 그녀가 세상의 모든 딸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한번 더 짚고 가고자 한다. 모든 이야기들은 그녀의 업적과 결과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우연 또는 필연적으로 일어난 일상의 순간이거나 당시의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로 일관하며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는 특히 여자로서 사회인으로서 나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왔으니 너만은 이렇게 살지 말아라 혹은 너도 이렇게 살아라 식의 두부류로 나누어지는 한국식 딸에게 보내는 편지와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미국은 가족간 소소한 에피소드를 소중하게 여기려는 노력 으로 나중에 순간을 기억했을 때-그것이 억지였건 간에-웃을 수 있는 일이 많은 반면 우리는 막상 작은 에피소드에는 냉정하다가 꼭 세월지난 후에 그래도 속으로는 너만을 사랑했다는 식의 고백으로 결론지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마야가 어린 시절이었던 1940년대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결손가정이나 성폭행, 워킹맘 같이 저자가 겪었던 시련들을 똑같이 겪어내고 있다. 희미하게나마 비록 서양의 저 멀리서 우리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인종이 다른 한 여성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가벼운 쪽지처럼 치부하지는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녀는 가족이건, 초면이건, 무례하건, 고맙건 간에 언제 어디서든 매순간을 소중히 여겼고 진실했으며 최선을 다했다는 것.
 


                    일흔여덟 살의 마야가 열일곱 살의 미혼모 마야에게 용기를 건내듯,
                      “다시 돌아가게 되더라도 너 혼자 내딛는 그 첫 걸음이 중요해.”

                                마야의 어머니가 지친 마야에게 용기를 건내듯,
                     "생각해보았는데 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대단해.
           마음씨가 착하면서도 아주 똑똑해,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드문데 말이야."

 

마지막으로, 책에서처럼 멋지진 않지만 나만의 언어로 '딸에게 보내는 편지' 리뷰의 인사로 대신하고자 한다. 

 소중하고도 아련한 나의 딸아!

  너는 아마도 살면서 여자이어서 행복할 때도 있겠지만, 반대로 여자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낄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가 지금보다 더 훌륭한 일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지 못해도 너는 엄마가 네 할머니를 존경하고 훌륭한 점을 본받으며 생활했듯이 너 역시 도 엄마와 같을 거라고 믿고 싶다.
  다만, 세상은 그렇게 배워온 모든 것들이 오히려 너에게 칼이 되어 상처를 주고 배신을 알게 하고 절망을 던져줄지도 몰라. 
  <아름다운 삶> 이란 무엇일까?
  진부하지만 엄마가 살면서 느낀 정답노트를 살짝 공개할께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아름다운 삶'이란 결국 그 어떤 것도 얼마나 견디었나의 문제라고 생각해. 네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향한 쉼 없는 단근질과, 실패나 이별 같은 경험에도 또 일어서려는 의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너의 노력, 때론 억울하고 마음속 분노로 세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 그 모든 것에 대한 '견딤'의 선물이 아닐까 
  올봄에도 약속한대로 꼭 꽃구경을 가자.
  꽃처럼 활짝 핀 네 얼굴을 또 한번 봄 속에 엄마 가슴에 담고 싶어.  

< 2010. 4. 꽃보다 더 봄같은 우리딸에게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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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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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정원을 가진 2층짜리 주택앞마당 파라솔이 펼쳐진 야외테이블엔
세련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앉아계셔 앞치마를 두른 엄마는 음료와 과일을 내어오고,
그때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는 007가방을 들고 있으며,
조금 있다 현관에선 남자, 여자 아이 두 명이 뛰어나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안기고
때마침 강아지도 꼬리를 흔들어 대면 푸른 하늘 위에 무지개가 뜨고
모두 활짝 웃고있는 우리는 행복한 가족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행복한 가족'에 대한 모범답안을 아파트, 음료수, 보험, 자동차등의 수많은 광고와 드라마, 영화 속에서 지겹도록 교육받아온 덕에 어쩌면 가족이라는 의미자체에 필요이상으로 강요된 집단적 알레르기 를 무의식중에 키워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가족이란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어딘가로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시원한 말처럼 2010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고령화가족'은(사실 제목에도 줄거리 이상의 시의성이 반영된)가끔은 내다 버리고픈 내 엄마의 가족이자, 내 오빠, 내 언니, 내 동생의 가족 그러므로 나의 가족 이기도한 불편하긴 해도 익히 알고 있었던 우리 모두의 가족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착잡한 심정이 들었었다.

 워낙 불륜 및 엽기, 출생의 비밀 등의 막장 드라마에 익숙해진 탓인걸까. 집안에 한명쯤은 있을법한 인물들을 한집안에 몰아 넣었기에 막장이 된 것이지 사실 예술한다고 집안경제와는 도통 거리가 먼 오빠나, 남자 때문에 그렇게 데이고도 또 결혼을 한다는 언니나, 학교자퇴하고 뒷골목을 전전하는 조카나, 그 옛날 다시 들춰낸다고 해서 별반 달라질 것도 없는 부모님 스캔들... 주인공 오감독의 표현처럼 '평생 달고 사는 오래된 지병' 과도 같은 우리네 가족의 치부를 오랜만에 미안함 없이 들춰보았다.

 이런 막장 패밀리의 등장에도 눈살 찌푸리지 않고 슬며시 박수를 건내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 형, 언니 또는 남동생이 그 집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을까 하는알량한 우월감까.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엄마와 아부지 합쳐 딱 두 명밖에 안된다는 태생적인 자부심때문일까.

 천명관 작가의 시나리오집필 및 영화판 경력때문인지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도중 자연스레 영화<가족의 탄생>류의 궁극적으로 가족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몇몇 장면들이 오버랩되어 왔다. 또한 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전통적인 가족관계에서 주로 희생의 역할을 담당해온 여성측인지라 5년 만에 나타나 스무살 연상의 여자(고두심)를 데려온 남동생(엄태웅)을 맞이하는 누나(문소리)도 생각나고, <우울한 세계>에서 자신은 비록 생계형 조폭이지만 물 건너간 아내와 아이들이 보내준 비디오를 보며 라면을 먹다가 그릇을 엎어버리는 슬픈 기러기 아빠(송강호)도 떠올라 내 머릿속은 같이 살거나 살지 않거나, 피가 섞였거나 그렇지 않은 다양한 식구들로 넘쳐나 읽는 내내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의 어깨만큼이나 피곤했다고 말하고 싶다. 

  

- 피보다 진한 동거, 식구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家族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부부, 부모, 자식으로 이루어진 혈연집단 혹은, 법적으로 동일한 호적 내에 있는 친족을 의미한다. 그런데 요즘은 이혼증가, 국제결혼, 입양의 증가로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많아졌다.

   이 책의 주인공인 오감독과 형인 오함마, 미연 삼남매의 부모는 두 분이 아니다. 오감독과 미연을 낳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형인 오함모는 두 살 때 생모를 잃었고, 중간에 오감독의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 불륜으로 탄생한 미연의 아버지는 오함모와 오감독의 아버지와 다른 인물이다. 고로 삼남매에게는 엄마 두 명, 아버지도 두 명 인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공 오감독을 중심으로 형과는 배가 다르고, 동생 미연과는 씨가 다른 복잡한 가족구성인 것이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수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家族보다 일상 속에서 부대끼는 식구食口의 개념이 우리에겐 더 실질적인 가족의 의미를 부여 한다고 피부로 마음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식구는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다. 한 조직에 속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을 칭할 때도 '한때 한솥밥을 먹었다'라는 표현을 하듯 우리문화에서 '밥', '끼니', '한솥'이 전해주는 반복과 일상의 파워는 굳이 혈연이 아닌 관계에서도 어색함을 뛰어넘는 끈끈한 '정'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어려울수록 잘 먹어야 한다'는 주인공 어머니 말씀에 위로를 받고, 뛰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오감독이 이십년만에 어릴 적 맛을 느껴본 닭죽 두 그릇에 고개를 끄덕이고, 삼남매의 욕지거리를 쓰기다시 삼아 둘러앉아 구워먹는 삼겹살에 입맛을 다시고, 비록 전처소생이지만 어릴 적부터 아무거나 넙죽넙죽 잘 받아 먹었다는 오함마가 제일 편하다는 어머니의 솔직함이 어쩐지 더 짠해보이는 그래서 매일매일 같이 밥을 먹는 사이들로 이루어진 우리식구, 우리 밥상의 모습이 나도 모르게 오버랩되고 결국은 내가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자동적으로 떠올랐던 식구들의 얼굴이 기억 나는 것이다. 
 


- 아무리 그래도 식구
  오감독이나 미연이 집에서 밥만 축내는 밥값 못하는 오함마를 비난할 때 어머니는 '그래도 한식군데...'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는 옹호성 멘트를 자주 하신다.
  아직도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이 존재하는 우리들에게 가족이란 개인위주의 서구문명보다 '함께 살고 함께 죽어야 한다는 공동체 운명의식'이 더 많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나한테 한치의 득이 될 리 없는 가족의 스캔들이나 누가 되었건 가족구성원들의 사업, 학업, 결혼의 실패 혹은 형제들 간의 경쟁이나 질투, 열등감으로 인한 불화 등등 수많은 사연들로 우리의 가족은 오늘도 각자의 상처를 서로주고 받고 묻고 파헤쳐가며 서로를 견디고 있다.

  하지만 팔순의 치매 노모를 모시는 아버지의 주저앉은 어깨나, 공단에 다니며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벌어야 했던 우리들의 고모와 이모, 새벽부터 도시락을 몇 개나 싸셨던 우리들의 어머니를 보아온 우리이기에 생활고에 시달려 어린 두 아이를 먼저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가족의 뉴스보다는 사고로 부모를 잃은 열여섯 여학생이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와 희망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는 기사에 더 응원을 보내고 싶다.

  비록 부모님이 안계실 땐 동생을 부려먹고 꿀밤도 쥐어놓고 동생이 가진 물건도 빼앗는 형이지만 나한테 밉상인 그 동생이 동네 어디서 누구한테 맞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땐 오함마처럼 벽돌을 들고 쫓아가 시원하게 복수를 해주고 싶은 우리이기도 하다. 아무리 그래도 식구인데 평소에 인식을 못하여서 그렇지 다 같이 한상에서 밥을 먹을 때가 인간이 가장 행복 하다고 느낀다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은 이렇게 한많은 고령화가족을 견디고 이겨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 헤밍웨이 따라하지 않기
   ...낡은 전집을 묶는 동안 나는 지난 여름을 함께했던 헤밍웨이와 긴 작별인사 를 나누었다

  주인공은 엄마 집에 처음 들어올 때 분리수거장에서 가져온 몇 권의 헤밍웨이 전집 을 읽으면서 더부살이를 시작했고, 엄마 집을 나오면서 비로소 낡은 전집을 다시 분리수거장에 갖다 놓는다. 때로는 <무기여 잘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영화 장면과 스토리를 떠올리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의 해답을 찾기도 하고, 영화 속 등장인물의 심리를 지금의 자신과 비교하며 상상해보기도 한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와 <노인과 바다> 에 등장하는 주인공, 인물, 배경을 언급하며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암시 하기도 한다.  

  즉, 헤밍웨이와 그의 작품은 고령화가족의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헤밍웨이의 작품과 파란만장한 인생은 주인공인 오감독의 해석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고 결국 작가가 전달하고자 한 이 작품의 주제를 암시하게 된다. 이것은 인생막장 끝의 삼류 드라마 같은 콩가루 패밀리의 이야기 속에서도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위대한 작품 속 주제를 끌어내는 인생의 묘미이자 보이지 않는 반전장치 인 것이다.

  또하나 오감독(작가의 대변인으로서의)은 작품의 마지막에 그렇다 하더라도 헤밍웨이처럼 자살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어쩌면 가족 구성원의 희생에 대한 수혜자였기에 헤밍웨이처럼 멋지게 살고는 싶지만 헤밍웨이처럼 인생을 끝내고 싶지는 않은 그래서 사실은 남부끄럽지 않은 자신 속에서 우리는 일상의 희망 을 엿본다. 초라하면 초라한대로 지질하면 지질한대로 자신의 삶을 피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그 역시 가족의 힘을 바탕으로 생겨난 생존방식 은 아니었을까.

  그 보이지 않던 가족의 힘 을 소름돋게 느끼게 해준 가족들의 대사이다
오함마의 자랑 - 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양아치지만 그래도 언제나 네 형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잘있어라 오감독 나는 간다.
미연의 상처- 그 더러운 돈 벌어가지고 엄마 생활비 주고 아버지 약값댔어.  
                    오빠 양복도 해주고 근데 어떻게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어 ? 
엄마의 의리 - 느이 아버지하고 나 사이에 사랑은 없었어도 인간적인 정리는 있었다.
                     아무리 죽은지 십년이 넘었다지만 그 사람이 평생 나한테 모질게 한 적이 없는데 
                     말도 없이 가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마지막 하나 ,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엄마를 그리워 했을지 모를 전파사 의붓아버지가 자신의 빛바랜 청춘처럼 낡아 버린 전축을 고쳐놓고 흘러나오는 패티김의 초우와 그 음악을 들으며 비로소 가족의 화해와 평화 를 느꼈던 오감독의 아침에 조용한 공감을 전한다.

                          일상은 가족보다 더 지독하고 고래힘줄보다 더 질기다.
          
고령화가족은 지독하지만 그래서 더 질겼었던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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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너무 좋아요~ 올해 읽은 소설이 거의 없는데 어쩌면 유일한 수확일지 모르겠어요
 
젊음의 탄생 (반양장) - 대학 2.0 시대, 내 젊음 업그레이드 프로젝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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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저급이긴 하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속어들 중 말빨, 글빨, 필빨, 끝발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이어령님을 말하고자 한다면.

작년 여름, 일 때문에 우연히 저자의 강연을 들은 적 있다.
그는 칠순이 넘은 노학자였지만 넘치는 에너지와 정확한 발음,
청중을 단숨에 휘어잡는 카리스마, 적확하고도 적절한 유머..
그 어느하나 빠지는 것은 없었다. 두 시간을 꼼짝 않고 귀 기울이며
고3 이후 근래 내가 이렇게 잡 생각없이 오랜 시간 펜들고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나 나 스스로 대견했다.

꼭 그 시절 서한샘의 '밑줄 쫘악'이라도 듣는 심정이었을까.
새벽에 일어나면 서재에 꽂힌 책들 중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른다며
기립박수를 받은 저자의 새로운 책은 하루배송 인터넷서점을 뒤로하고
언제나 단숨에 달려가 싸들고 안고 오고 싶은 책이다.
젊음이 가버린 것도 한참인 저자가 어딜 가나 당부하는 말들은
'젊은 사람들, 젊은이, 젊다면, 젊으니까'에 대한 강력한 조언이자 충고,  

필사의 가르침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리 되는지 아무리 답이 뻔해도 물어보고픈 그의 신간은 '주어진 답은 하나'라고 배워왔던 우리들에게 창조적 지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절대절명의 시기인 젊음에 부탁하는 창조교과서라 말하고 싶다. 
 

물론 아주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는 젊음을 진화시키는 매직카드를 9개로 소개하고 있다.

up_1 뜨고 날고 / 天外有天 / Take off
Magic card_1 카니자 삼각형(Kanizsa Triangle)


up_2 묻고 느끼고 / 疑問驚歎 / Interrobang
Magic card_2 물음느낌표(Interrobang)


up_3 헤매고 찾고 / 暗中摸索 / Serendipity
Magic card_3 개미의 동선(Ant's Trace)


up_4 <나나>에서 <도도> / 端不落 / Win-Win
Magic card_4 오리-토끼(Duck-Rabbit Illusion)


up_5 섞고 버무리고 / 圓融會通 / Mash up
Magic card_5 매시 업(Mash up)


up_6 연필에서 벌집 / 圓-方-角 / Honeycomb core
Magic card_6 연필의 단면도(Hexagon)


up_7 <따로따로><서로서로> / 獨創性 / Only one
Magic card_7 빈칸 메우기(Blank)


up_8 앎에서 삶으로 / 知•好• / DIKW
Magic card_8 지(知)의 피라미드(Knowledge Pyramid)


up_9 고향살이 타향살이 / 世域化 / Glocalization
Magic card_9 둥근 별, 뿔난 별(Form of stars)


저자는 집필후기에서 바다야 말로 거대한 불멸의 초록색 지우개라 표현한다.  

'바다는 많은 파도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소멸시킨다'
'바다는 파도가 묻히는 거대한 무덤이고 침묵이다.'
'여름이 지나면 또 다시 시작하는 나의 작은 파도들을 달래기 위해 텅 빈 공간을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 빈자리에 높은음자리표로 바람이 불면 어리고 싱싱한 초록색 파도들이 다시 생겨날 것이다.
젊음은 그렇게 탄생한다'

모든 알려진 정보와 이론들이 지난 50년 동안 쉼 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쏟아낸 그의 지적 편력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통찰력, 거미줄과도 같은 상상력을 통해
전혀 새롭고도 의미있는  창조 지침서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즐겨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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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전에 저도 이 책 읽었어요. 명성에 비해서는 별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몇년전 어떤 분이 칼의 노래를 읽어보라며 책을 주셨다
원래 책이란 것이 내 의지로 선택해 내 손으로 잡지 않은 책은
숙제아니고선 여간해 손에 들기 힘든법 - 나름의 논리대로 그저 사무실 책꽃이 한켠에
꽃혀지기만 했던 소설이었다

그후론 어떤가
현의 노래는 물론이요, 남한산성 역시
서점에서 쉽게 들추며 다시 덮었었지
그랬었다

소설은 에세이보다 좀더 집중을 요한다 생각하기에
그리고 줄거리가 책덮은 후 생각나지 않을지 모르기에
바쁜 세상사에 그저 내몫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은 쉬워보였던 '바다의 기별'로
사과를 대신할까한다

김훈작가의 필력에는 범접할 수 없는 기자 출신의 논리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어쩌면 공지영이나 김형경류의 글에 익숙한 멜랑꼴리 감성독자들은
헤어드라이기로 몇번이나 바짝 말린 물기 하나 없는 머릿결처럼
그렇게 서운할지 모르겠다

작가는 2004년 이상문학상을 받고는,
" 중생으로 살기 위하여, 생로병사에 밟히기 위하여,
시간이 몰고 오는 온갖수모를 견디기 위하여, 목마름을 목말라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간에게 허용된 말의 범위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저는 기어이 한줄한줄의 글을 쓰겠습니다
그래서 저의 글은 아마도 좁고 가난한 영역안에 갇히게 될터인데,
저는 그 부자유를 수락할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겨우 글쓰기를 시작한 신인이라 자칭한 작가의 겸손과
남은 생애를 아껴서 두어편의 글을 더 쓰다 가겠다는
하지만 소설가로서 당대나 후대에
기억될 수 있을지는 내 알바 아니라는 늘 신인으로 살아가겠다는 그의 다짐이
뭐라말할까 한번도 뽑지 않은 크리넥스 화장지같았다고나 할까 

책을 읽으면서 알게된 몇가지 사실과 그에 대한 의견을 첨부한다
-작가는 사실과 의견을 구분해 말하라 외친다.

- 부모님
김훈의 아버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수발을 들면서 한 생애를 보낸
한국현대사의 황무지를 상징하는 울분의 인물로 생업은 신문기자 혹은 소설가였으며,
평생 억겁의 술을 마셨다고 함
어머닌, 서울토박이로 가난했지만 경우 바르고 깔끔한 여자
자, 됫박, 저울같은 도량형기를 존중하고 신성시함
어머니의 고향은 향토가 아니라 언어와 척도였다고 함 

 ...우리 아버지들은 왜 울분과 열정만이 그들을 지배했을까

...우리 어머니 들은 왜 늘 가난해도 바르고 깔끔했을까

...그리고 우리들은 왜 울분도, 열정도, 깔끔도 아닌,

...냉소로 가득차 있는지.. 



- 어린시절
부산 대신동 미군 병참부대에서의 미군이 던진 허쉬초코렛을
심청 아버지가 눈뜨듯 세상을 알게된 맛이라 기억함 

...크리스마스인지 생일인지 어린이날인지는 알수 없는 아주 어린 내 기억속 앨범엔,

...이른바 양과자라 칭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진한 생크림 조각케잌과도 같은

...달디단 과자들을 선물상자에 사오시곤 곤히 잠든 나를 부러 깨워

...잠결에 먹여주던, 70년대 대신동 내 출생지 그때가 그립다

 
- 계기
영문학과 66학번인 작가는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영시를 배우고 외우고,
영국 낭만주의를 꿈꾸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난중일기를 접하곤
희망이나 행복이나 미래가 전혀 없는
절망만이 가득찬 현실을 기록한 이순신을 느끼며 영문학이 싫어졌다고 함
그렇게 스물둘에 읽었던 난중일기는 그후로 몇십년간 그를 지배하며
이순신에 대해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말할수 밖에 없겠구나
그렇게 37년이 지난 어느날 돌연 연필을 들어 칼의 노래를 두달만에 집필했다고 함 

 
...젊은 시절 영혼을 지배하게된 문학은 반드시 생을 살아내면서

...한번은 그과 섞이고 물러져 다시

...꽃피워 질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 또한, 그또한 그랬으면 좋겠다...

...이 글이 절망속 희망을 과학적으로, 내게 전달해준것에

...이성적인 감사를 덧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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