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의 산문을 읽는 일은 언제나 숙연하다. 그것은 아마도 글이 곧 작가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제와 같은 하늘이고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고 똑같이 생긴 달이지만 그것을 보고 말하는 모습은 사뭇 우리와는 한참이나 떨어져있다. 이 괴리감을 좁혀주는 것이 작가의 산문이라 여긴다. 나는, 가까와 지고 싶은 작가와 조금이라도 거리감을 좁히고 싶어 소설 아닌 산문을 열어 젖힌다. 

   그러나 지난 연말과 연초에 미셀 트루니에를 읽는 일은 그다지 즐겁지가 않았다. 독서가 즐겁지 않았던 이유는 생각보다 훨씬 더한 사색을 요구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 들떠 있는 내 심리상태를 차분히 눌러줄 것을 기대했지만 되려 그렇지 못한 내 자신에게 스트레스만 감지하는 꼴이었달까. 잡념은 잡념대로 책은 책대로 마치 물과 기름처럼 독서는 내 자신과 잘 섞이지 못한 시간이었다. 과욕이 부른 참사였다. 몇 권을 가지고 이 작가를 알아보자며 덤벼드는 행위가 의욕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깨달음이라는 것은 깨닫고자 달려들면 결코 깨달아질 수가 없는 산물이어서 그런 것일까. 그나마 최근에 출간된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은 그런대로 편안했는데 <외면일기>와 <예찬>은 며칠 만에 깨우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특히 <예찬>은 거의 고전, 철학서를 읽는 기분이었고 반 이상 알아듣지 못하고 가슴으로만 이해하는 단락이 많았다. (어려워서 라기 보다는 뭐랄까 생각하는 방법, 표현하는 방식이 낯설었다. 그리고 끝까지 친해지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이 분이 (송구스럽지만)살아있다는 생각이 안 들고 자꾸만 사르트르나 들뢰즈처럼 이미 시대의 역사가 된 분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요즘 이렇게 깊이 있는 산문을 읽어 본적이 없어서 그럴까도 싶다. 하지만 같은 작가의 글을 동시에 몇 권 번갈아 가며 읽는 것은 힘들긴 해도 확실히 좋은 방법인 것 같긴 하다. 뭐랄까, 이 사람이 오랜동안 생각하는 과정과 생각이 이동하는 자연스런 흐름이 눈과 귀에 점차 반갑게 들려왔달까...저 멀리, 저어 멀리서 무지개 타고 오네~ 이런 노래가사가 떠오르는데, 이 방법이 앞으로의 독서에 좋은 습관이 되었으면 한다.



#1. 묵은 포도주처럼 서서히 취하는

 


 

 

   먼저 내가 집어든 책은 < 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 > 이다. 가만히 앉아서 자기 내면을 투시하여 그것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여행 중에 혹은 일상 중에 겪은 에피소드, 계절과 풍경에 대한 소회를 적어 놓은 것이라 ‘외면일기’라고 말한다. 단락구분이 월별로 되어 있어 나무와 바람, 꽃, 시간의 변화를 느끼며 의미를 부여하는 글들이 가장 많은 편인데 어차피 자기시선으로 해독한 문장들이므로 읽는 내 입장에선 그의 내면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 많았다. (작가에겐 외면이겠지만 독자에겐 내면이었다) 이 정도가 외면이면 내면일기는 얼마나 깊을 것이란 말인가. 이 수준이 메모라면 작정한 수준은 도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작가들 때문에 이제 ‘잡문’이나 ‘일기’라는 제목도 붙이기가 부끄럽다) 본인은 가벼운 마음으로 끄적이듯 아무런 원칙없이 편안하게 서술하였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거의 도를 닦은 수준의 성찰적 경지가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그저 내 수준에서만 보자면 문장상으로는 이문열이 가장 많이 생각났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시간의 파괴력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시간의 파괴력에 저항할 수 없을뿐더러, 어쩌다 벌어지는 부질없는 저항은 오히려 웃음거리나 빈정거림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체념한 사람들은 그런 우리의 운명을 허무라 이름 하여 슬퍼하고 한탄해왔다. 세상에 흘러넘치는 염세와 비관의 노래는 대개가 그런 시간의 파괴력에 대한 속절없는 표현이다."   

 

“모든 변화는 그때껏 진행된 파괴과정의 한 단락이다.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보는 일이 언제나 우리에게 쓸쓸함을 자아내는 것은 그때까지의 변화 속에 스며있는 사멸과 종말의 예감이다. 오랜 세월 뒤에, 한때 머물렀던 땅 또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찾는 일은 시간의 파괴력을 확인하는 일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 ‘살이’의 부질없음이나 허망함을 다시 한 번 곱씹는 일이기도 하다.” 

-111p, <리투아니아 여인>, 이문열

 

   이것은 이문열의 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속 한 단락이다. 소설 같지 않은, 서사와는 상관없이 보이는 산문 투의 글을 빌어 왔다. 감히, 비교해본다. (이런 단순 무식한 비교를 서슴치 않고 하는 이유는 그저 내가 이 두 책을 읽었기 때문임을 용서하시라. 어차피 독서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행위라 내가 읽은 작품이 내가 아는 모든 책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러나 시간은 또한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들, 우리를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또 고동, 심지어 죽음까지도 파괴하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결국 시간은 우리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상喪과 모든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19p, <외면일기>, 미셸 트루니에

 

   (변역이지만)정확하게 이문열과 첫 문장이 일치하는 이 문단은 미셀 투르니에의 생각이다. 두 사람 다 시간의 장점, 단점을 언급하며 그 특성을 자기 문장 안에서 끌어안고 있다. 이문열이 결론내린 시간의 파괴는 연민에 가깝고 투르니에는 고통의 소멸, 즉 새로운 희망에 가깝다. 나이 상으로 보았을 때 이 작가는 분명 죽음을 차분히 준비하고 있다는 주제넘은 예상을 해본다. 시간이 ‘우리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상喪과 모든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라 한 걸 보면 파괴하는 속성자체보다는 파괴대상이 무엇이냐에 중점을 둔 결론이다. 그러므로 파괴는 파괴만이 아니고 파괴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1924년 당시 8개월의 태아였던 자신을 임신한 어머니가 프랑스 소설가 아나톨의 국장에 참여해 조사와 조가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작가가 되었다고 믿는 사람. (내 어머니도 70년에 죽은 아무개 작가를 애도하는 태교시간을 가지셨다면 나도 작가는 되었을 텐데 ㅠ) 그가 말하는 시간과 과거를 찬찬히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오래된 글로 이루어진 어느 심연의 숲에 들어와 있다는 착각이 든다. 피톤치드가 뿜어 내는 숲 고유의 향기에 취해 마치 나 자신조차도 나무가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그의 글을 유려한 은유로 표현했지만 그 중에 일개 독자인 나와 가장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은 평론가 남진우였다. (그렇다고 그가 내 수준이라는 건 절대 아니고 ㅋ) 그는 ‘투르니에의 산문은 묵은 포도주처럼 읽는 사람의 내면으로 조용히 스며들어와 서서히 취기를 불러일으키는 글’이라 한 바 있다.(『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남진우, 2010. 문학동네) ‘고독한 은둔자의 사색’을 목격하며 이렇게 아름답게 늙을 수만 있다면 나이 드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것이다. 트루니에는 이 책에서, 당신의 나이가 되면 ‘과거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심연인데 그 속으로 흐물흐물 미끄러져 들어가는 기분이 얼마나 달콤한지’ 모른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 마흔 줄이면서도 그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나보다 먼저 근사하게 ‘묵은 포도주’라고 말해 준 남진우 평론가의 표현에 심히 동의하면서 더불어 바디감 굵직한 맛은 아니고 은은한 피노누와쯤이 맞을 거라고 사족처럼 덧붙여 볼까 한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촉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두는 것이다.
그러면 멀지 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1월 달에 쓴 일기이다. 여기저기 오가며 쓴 글 중에 이 두 줄의 문장이 가장 뇌리에 남았던 건 아마도 내가 그 주도권을 친구들에게 완전히 일임했기 때문인 듯하다. 책을 넘기는 중간에도 자주 ‘주도권’이라는 죽비같은 책임을 깨우치게 했다. 무심코 따라가다 큰 코 다치는 기분으로 이 책을 덮었다.

 

 

 

#2. 우리가 잊고 사는 생의 신비란

 

 

 

   우연인지 그 역시 < 예찬 -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0 >의 마지막에 친구를 언급한다. 미셀 푸코, 질 들뢰즈, 칼 프렝커 같이 먼저 떠난 친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곧 갈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자기 하나만 빼놓고 강 건너편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선해 너무나 그립다 고백한다. 이상하게 ‘강 건너편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부분에서 목이 메었다. 이런 구절은 문장을 위한 수식이 아니라 평소 떠올리던 장면임이 분명하다. 아직 나는 친구들 중에 부음소식을 접한 사람이 없다. 같이 일하던 동료 중에서도 없다.


이 사람이 떠나고 또 저 사람이 떠나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사라지면서 우리들의 젊은 시절의 영상은 와르르 와르르 무너진다...그들이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친구들이여, 잠깐만 기다려라, 곧 간다. 곧 간다니까 ! 

- 427p , <예찬>, 미셸 트루니에


   ‘젊은 시절의 영상’이라 하여 비교적 젊은 시절의 작가 모습을 찾아 보았다.(왼편 사진)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흡사 외모가 여느 프랑스 배우와도 같은 이미지에 흠칫 했다. (독신인 이유가 정말 궁금했다 ㅋ) 더불어 나이든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항상 털모자를 쓰고 계신데 최근의 사진은 그만 돌아가신지 이십년도 더 된 내 외할머니와도 비슷해 마음이 따스해진다.

 


 

 

예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떤 아름다운 음악가. 한 마리 우아한 말, 어떤 장엄한 풍경, 심지어 지옥처럼 웅장한 공포 앞에서 완전히 손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다. 그와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정은 함께 예찬하는 가운데에서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한계, 모자람, 왜소함은 눈앞으로 밀어닥치는 숭고함 속에서 치유될 수 있다. - 서문 中 , <예찬>, 미셸 트루니에

 

   사실 나는 굉장히 칭찬에 인색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완벽주의 어머니와 무뚝뚝한 아버지는 다른 조카들에겐 그토록 칭찬을 남발하셨으면서도 유독 내 앞에선 성에 찰만큼 칭찬해주시지 않았다. 들리는 이야기론 뒤에선 친구, 친척들에게 내 칭찬뿐이라 하셨지만 내가 느끼는 칭찬의 체감온도는 늘 영하의 한 겨울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가 내 칭찬을 하는 것도 썩 우쭐하지 않았고 또 나 역시도 남에게 쉽게 칭찬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칭찬과 예찬은 물론 다른 개념이지만 나는 두 가지 모두 감사라는 근본적 마음이 없으면 행해지지 않는 행위라 여긴다. 어린 시절 제대로 된 칭찬을 받고 그런 만큼 상대를 칭찬해온 사람은 비교적 어떤 현상이나 본질에의 예찬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이 책에서 그가 언급하는 것들이 꼭 우리가 생각하는 예찬의 범주에 들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또한 그가 사물과 현상을 예찬하는 과정에서 기록된 과정이라고도 생각지는 않는다. 그는 사물과 현상을 그리고 사람을 예찬하기보다 어떤 경우 더 비판하고 관찰한 결과를 정리하려 본질을 정확히 파악해 새로운 논리를 만드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예찬‘해온 것’ 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예찬‘해야 할 것’들에 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예찬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정보가 아니라 생각해보았더니 비로소 예찬할 만하지 않은가에 대한 설득이자 질문인 것이다. 글쎄, 작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어줍짢게 작가의 소명 같은 걸 느껴버렸다.

   예를 들어 내가 감탄하고 소름이 끼치는 부분은 이런 것이다. 그는 작가라는 직업이 출근도 없고 퇴근도 없고 휴가도 없으므로 일 년 내내 바캉스나 마찬가지겠다는 동네 정육점 주인의 질문을 시작으로 ‘바캉스’에 대한 단상을 정리해간다. 그가 사색하는 과정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가 예찬해야 할 것이 발견되는데 그것에 동의할지 말지는 당연히 우리의 몫이다. 동의 하는 독자들은 대개 그가 예찬하는 그것이 아니라 예찬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그를 예찬하고 싶어진다. 그 놀라울만한 사고의 깊이와 지적임, 사유의 폭과 박식함, 그리고 번득이는 지혜, 눈부심, 이런 것들을 그저 예찬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내 조악한 표현력, 이런 순간에 절망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는 내 아이러니라도 끄적여 놓고 싶다는 욕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옛날 수공업자들, 농사꾼들은 계절과 동시에 자기 능력에 맞추어 나름의 리듬대로 노동을 했기 때문에 ‘바캉스’는 필요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업화, 도시화속에서 노동자들은 자기 리듬대로가 아닌 생산성에 맞춘 리듬으로 인해 노동에 구속 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다 보니 ‘바캉스’가 마치 이상적인 해결책인 것처럼 부각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의심없이 떠남과 도피가 휴식이라 믿는다는 것이다. 그는 ‘바캉스’야 말로 모든 습관들의 갑작스러운 단절이며 정상적인 환경을 파괴하는 낯설음이라 말한다. ‘바캉스’를 즐기는 것이 ‘해독’이라고 하지만 해독 앞에 우선 무엇에 ‘중독’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다음 문장을 정독해보자.

 

우리는 꿈을 꾸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니 꿈을 꿔보아야 한다. 어쩌면 바캉스는 우리들의 풍속 진화의 한 단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단계 -필요하고 유익한- 를 우리는 언젠가 넘어서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심장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항상 심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몸의 근육들은 휴식하기 위하여 하루 평균 여덟 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된다. 그중 단 한 가지 근육만이 불연속의 법칙에서 제외되는데 그것이 바로 심장근이다. 이 근육은 일생 동안 쉬지 않고 박동한다. 그렇다면 이 근육이 절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근육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휴식할 것이다. 심장의 비밀은 그것이 두 번의 박동 사이의 아주 짧은 한 순간 동안 휴식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서 심장의 휴식, 잠, 바캉스는 분산되어 가지고 그것의 노동과 긴밀하게 뒤섞여 있는 것이다.

 

 

심장처럼 노동하라. 너무나도 재미있고 창조적이며 다양한. 그리고 특히 일상생활에 너무나도 잘 편입되어 있고, 노력과 성숙의 국면들이 너무나도 리드미컬하게 교차하는 지라 그 자체 속에 휴식과 바캉스를 내포하는 그런 노동을 하라.

-p299, 300 <예찬>, 미셸 투르니에

 

   미칠 것 같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다. 보통 바캉스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글은 어디서도 접할 수 있는 시작이지만 대개 끝은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식의 틀에 박힌 결론을 자신의 문장력으로 수사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은 심장을 말한다. 별도의 물리적인 바캉스가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심장이 노동하는 과정에 다 포함 된 것이므로 심장이 휴식하는 것 처럼 노동하다보면 그게 바캉스고 또 그렇기에 바캉스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심장이 노동하는 것처럼 자신은 글을 쓴다는 말이 아니고 도대체 어떤 자랑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캉스가 아닌 이미 바캉스인 심장과 그 심장을 가진 자신과 그 심장과 가장 유사한 직업인 작가를 예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3. 쌍으로 생각하는 것의 즐거움

 

 

 

  이와 같은 심장에 관한 주장은 <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예담 / 2011 >에도 재차 등장한다. 물론 심장의 놀라운 본질을 예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프로펠러와 지느러미’를 비교하면서 언급되는 실마리로 작동한다. 가만 보면 <외면일기>에서 관찰한 나무와 숲의 속성이 <예찬>에서 밝혀지는 숲의 비밀이기도 하고 <예찬>에서 발견된 생의 아름다움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에 다시 재구성되어 펼쳐지는 식이다. 그래서 한 작가의 책을 여러 권 동시에 읽는 효과는 예상외로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뭔 말씀인지 어떤 게 중요한지, 그 막연했던 느낌이 구체적으로 달려오는 것 같다고 할까. 하늘에서 눈이 내려와 그동안 그 눈송이가 녹는 것만 목격하다가 어느 날 집 앞 나무 밑에 얼어붙어 있길래 만져 보았더니 그만 눈의 결정체가 한눈에 보이는 순간과도 같은 감격. 눈인지는 알았지만 내 눈으로 눈 속을 바라보고 눈을 눈만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던 그 순간이 우리 모두에겐 있었다.

 

심장은 두 번의 박동 사이에 잠깐 동안 쉰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심장의 휴식, 심장의 잠, 심장의 휴가는 잘게 나뉘어져 있고, 자신의 활동에 내밀하게 뒤섞여 있다. 이 매우 특별한 심장의 휴식은 어떤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어 있는 이상적인 삶의 형태이다. 일상생활에 매우 잘 통합되어 있고, 일상적 노력과 성숙의 여러 과정들 안에서 매우 부드럽게 리듬을 타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 안에서 휴식과 휴가를 포함하고 있는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가나 또는 적어도 장인 같은 일의 귀족이 누리는 특권이다. 심장이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융합을 통하여 이루어 낸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 P62,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미셸 트루니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은 절판된 책 <생각의 거울, Le Miroir Des Idees, 2003>의 개정판 인 듯하다. 원제를 상상력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을 의식하지 않을 수 가 없는데 이 책은 상상력을 자극 한다기 보다는 하나의 생각을 거울에 비쳐 보는 사색의 훈련에 가깝다. 무엇보다 작가가 이 책을 쓴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이기도 한 바슐라르의 대칭감각에 영향을 받았기도 하지만 이 책은 대칭, 대립의 쌍을 이루는 사고체계를 그 형식으로 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에서부터 ‘존재와 무’에 이르기까지 읽다보면 상상력이 자극되기는 하겠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된 책은 아니다. 밑줄에의 유혹을 차마 떨치기 어려운데 그러다 보면 아마 밑줄을 긋지 않는 구절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도 같다. <상상력 사전>이 소장용의 성격이 강하다면 이 책은 실용서에도 가깝다. 비슷한 톤으로 이어령 전 장관의 서적들이 눈에 밟히는데 전직 컨셉트 플래너로서 광고나 영화 , 디자인등 개념 작업하는 분들에게 아주 유용하다 추천하고 싶다.(그러니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꼭 틀리다고는 할 수가 없구나 !!!)

 

 

 

 

"선생님은 늘 쌍으로 된 대칭, 대립관계의 틀로 세계와 현상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쪽을 선호하시는 것 같아요. 물과 불, 동물과 식물... 하는 대칭된 개념을 마주 놓고 사고하고 설명하시잖아요. 특히 선생님의 에세이 <사상의 거울>은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봐요. 제목의 ‘거울’이 이미 그 대립이나 쌍을 이루는 인식의 틀을 가리켜 보이고 있잖아요. 생각이 거울 속에 비추어져서 두 가지의 쌍을 이루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정확하게 지적해 주었어요. 나는 쌍으로 놓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 발상은 많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해줘요. 우리가 두발로 걷듯이 나는 두 가지 쌍으로 놓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번역판을 낼 때 <사상의 거울>대신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101가지>라든가, 뭐 그런 제목을 붙였더군요.”

 

“이해 못할 번역은 세상에 많으니까요.”

 

 

- 미셀 투르니에, 김화영 인터뷰 中 / 2002. 3.28. 슈와젤의 사제관에서

 

 

   미셀 트루니에는 파리 교외의 슈와젤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3층짜리 사제관에서 사십년 째 살고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남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화적인 이해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도시적인 삶과 얼마나 격리되어 살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의 행간에선 금욕주의적이거나 종교적 관념, 혹은 시골에의 향수, 성에 대한 편견, 문명에 대한 냉소 같은 은둔자적인 뉘앙스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해마다 노벨상 후보에만 오르고 수상하지 못한 것이 너무 오래되어 스웨덴 한림원에선 이미 상을 줬다고 착각한다는 농담이 떠돈다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 미셸 트루니에를 만나며 새롭게 궁금해진 한 분은 그의 글을 번역한 김화영 선생이다.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 번역가인 김화영 선생은 국내에서 카뮈연구로도 잘 알려진 분인데 산문도 기가 막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대부분의 한국 소설은 다 읽어 보았다는 선생이 11년 만에 낸 평론집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 2009 >라는 책에서 지적한 저질 소설에 대해 옮겨 놓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할까 한다. 다시금 기본적 역량, 기본적 역량, 기본적, 기본, 기본을 되뇌이며 도서관에나 가야 쓰겠다. 심장처럼 독서하고 심장처럼 글을 쓰기 위해 오늘도 심장을 움직인다. 미셸 트루니에는 적어도 우리가 심장을 작동하는 방법 하나는 알려준 셈이다.

 


'서둘러 쓴 문장과 거침없는 줄 바꾸기,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모든 잡념을 여과 없이 속기한 컴퓨터 시대의 안이한 수다. 태를 부린 깨달음의 제스처, 요란하게 물들인 감정의 전시. 소설가로서의 기본적 역량 부족을 '실험정신'으로 포장해 놓은 난해한 산문.'

p173~174,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 김화영, 2009 / 문학동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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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1-04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셸 투르니에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한사람님의 글이 반갑기만 합니다 ^__^
<외면일기>와 <예찬>은 지금도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는 책이에요.
처음 읽었을 때, 꽤 많은 시간이 흘렀군요, 막연하기만 했던 어떤 문장들이, 어떤 시간과 사건을 겪고 다시 읽으면
선명해질 때가 있어요. 가끔은 이렇게 곁에 오래 머물고 천천히 빛을 드러내는 책과 작가가 고맙기만 하더라구요.

한사람님이 글을 준비하시는 것 같아 <외면일기> 100쪽에 있는 문장을 여기에 옮겨요. 제 나름 응원입니다!!!

"어서 작품을 한 편 써라. 우리는 갈리옹 광장에 있는 식당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아카데미 콩쿠르 회원 열 명이 돌아가며 서명을 했다.

한사람 2012-01-05 09:21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덕에 미셸 투르니에를 알게되어서 뭐라 인사를 ㅋㅋㅋ 해야할지^^
말씀하신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아도 좋고 또 시간이 흐른 다음에 보아도 더 좋은 책인 듯 합니다.

저도 외면일기 100쪽을 흠칫 하면서 넘겼어요.
'나는 장차 작가가 되어 공쿠르상 심사위원이 되겠다'..작가가 되는 것도 힘든데
미셸 투르니에처럼 심사위원이 되겠다고 한 꿈이 어이없기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해보였어요, 하하.

처음에 미셸 투르니에 같은 글을 쓸 것 같다고 하셔서
어떤 칭찬일까..가 궁금해서 보았지만
제 나름대로 턱없이 부족한 사색의 깊이를 말하는 걸까..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앞이 막막하더라구요 ㅋ

좋은 교훈을 얻었고, 또 응원에 힘입어 오늘도 심장을 달리러 가겠습니다^^

숲노래 2012-01-04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도 심장을 따뜻하게 잘 움직여 주셔요~

한사람 2012-01-05 09:23   좋아요 0 | URL

오늘은 된장찌개를 해먹을까 생각합니다^^
심장이 두근거리네요~

stella.K 2012-01-04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평가단에서 미셀 투르니에를 선정했는데 기대를 하고 있어요.
예전에 그의 단편동화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후 이분을 좋하게 됐죠.
그런데 사실은 그때 이후 이분에 대한 책을 읽어 본적이 없어요.
만일 이번에 어려워서 재대로된 독서를 못하면 어쩌죠?ㅋ
그래도 변함없이 좋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사람 2012-01-05 09:25   좋아요 0 | URL

에세이 평가단 좋겠다!!!
아주 잘 갈아타신거 같아요~
책이 어렵진 않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넘기기 좋더라구요.
(저는 위의 세권 중에 상상력...을 마지막에 읽었는데
두권을 요약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스텔라님 리뷰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정말로요, 다 작성하시면 득달같이 달려가 읽을께요^^)

gimssim 2012-01-04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장처럼 노동하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미셀 트루니에의 <예찬>을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즈음에 다시 읽는다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메모를 합니다.
새해, 좋은 출발 되십시오.

한사람 2012-01-05 09:28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심장처럼 노동하라', 이 구절에서 멈칫 제 심장이 주춤하더라구요.
처음엔, 죽을 때까지 쉬지않고 일하란 뜻인줄 알았죠, 하하.

저는 말로만 듣고 이번에 처음 작가의 책을 집어 들었는데
말씀하신대로 세월이 좀 흐른후에 읽어도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 책을 써야 할텐데 말이죠 ㅠ



반딧불이 2012-01-05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문열과 투르니에의 시간에 관한 견해는 <시간의 이빨>이라는 책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태양아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경구절도 생각나구요.
저는 김정란의 번역보다 김화영의 번역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었어요. 제가 알고 있는 최고의 궁합이죠. 한사람님께서는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제가 읽을 땐 <생각의 거울>도 이름을 바꾸어서 출간된 것이었는데 또다른 이름으로 출간되었나보네요. 투르니에 산문의 결정판 같은 글과 늘 정성이 느껴지는 페이퍼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2-01-05 21:5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딧불이님 !
나는 왜 쓰는가 이후 일년 만인가요? ㅋ
<시간의 이빨>은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ㅠ

일차적인 느낌은 김정란은 더 다듬었고 김화영은 더 가깝게 전달하려 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읽는 입장에선 김정란의 번역이 더 이해가 쉽지만,
아무래도 감정적인 뉘앙스와 작가의 의도는 김화영 쪽이 아닐까...나름 비교 해봅니다
(아마 제가 김정란 번역을 나중에 읽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철학이 문학화되고 문학이 철학화되는 과정을 조금이라도 엿본 것 같아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반딧불이님 새해이므로 ㅋ 복 마니 행운가득~ 하하 건강한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두사람 2012-04-29 0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잼업어
 

 

 

 

#1.

 

 

눈이 오면 십년도 더 된 카딜러에게 운전 조심하라는 문자가 옵니다.

이번엔 용띠라고 을 그렸어요.

돈 빌린 걸 다 알고 있는 은행에선 신규 적금을 들라고 해요.

결혼기념일 일주일 전부터 홈쇼핑에서 쿠폰이 도착하죠.

스마트폰도 신상으로 바꾸라고 전화가 옵니다.

집 앞에 새로 생긴 마트에선 귤 한 상자에 만원이라고

그 옆 아울렛에선 아이들 겨울 의류 대폭할인이라고

문자 받은 고객에게만... 혜택 준다고 하네요...

오늘은 동네 치킨집도 휴일인지 할인문자 안 오네요.

카톡에 프로필 메시지를 바꿨습니다.

운좋게 손으로 쓴 연하장을 받았거든요.

떡국을 끓여 먹으려고 양지머리 만원어치 샀습니다.

왕만두도 덤으로요. 아... 이렇게 나이를 먹는 것이죠.

 

 

 

#2.

 

 

사실 언제부턴가 나이 먹는 것이 그리 슬프지도 또 특별히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더라구요. 서른 살까지 숫자를 세어보았던가 서른 다섯 이후부터 안 세어 보기로 다짐 했던가 마흔부터는 숫자를 지워 버렸던가...그랬나 봅니다. 가끔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인간이 유독 욕심이 많아 개, 돼지, 닭, 쥐...들의 생명을 몇 년씩 빌어와 살고 있다고 신경숙의 소설에 나와 있잖아요. 가끔 죽는 것이 무섭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오래 사는 건 더 무섭습니다.

 

 

그런데 한 해가 간 것이 신기하긴 합니다.

 

 

그전까지 그러려니 했는데 어제 11시59분 55초부터 약 십 초간 그런 마음이 불현듯 들었어요. 프랑스 어느 마을에선 그해의 마지막 날 다들 모여 축제를 벌이다 새해가 되는 순간 서로 껴안고 키스도 하고 기뻐서 죽겠다는 듯 그렇게 브라보를 외친다고 하던데요. 이번엔 이상하게도 잠시, 눈물이 핑 돌더군요. 아... 잘 견뎠구나... 지겹게도 살아 있구나... 빈혈처럼 어지럽고 아스라했어요. 피...철분...나는 삶의 어떤 영양소가 실조되었는가...

 

 

그렇다고 절망으로 새해를 맞이했다는 건 아니구요. 처음으로 새해보다 지나간 해에 내가 견뎌온 시간에 경의를 표해 봤다는 것. 무사히 한 해를 걸어 나왔다는 것이 기특하더라는 것이죠. 몇 년간 나는 나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으니까요.

 

 

 

할 수 없이

아버지가 생각나요.

나를 만들어준 어머니가 보입니다.

사연 하나 쯤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헤어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만나지도 못하는 한 남자도 많이 생각나요.

 

 

 

 

#3.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

이제... 독고진은 좀 지겨웠어요. 눈물은 김병만만 인정해 줄 거예요. 유재석이 아내에게 고백하는데 왜 내가 떨리는 것이죠. 모두 턱시도인데 혼자서 비예복 차림 한석규는 어쩐지 고독해 보였어요. 시상식 불참이야 어제 오늘일이 아닌데... 수애 불참은 속까지 상하더군요... 호동씨 다시 보고 싶어요(운동선수가 원래 고집이 세니까...이해는 해줄 거예요) 핑크 드레스 고현정은 사과라...그래도 무례는 해보였어요.(하지만 그래야 견딜수 있다는거..알아요) 글쎄, 아이유도 피곤하니까 음이탈은 하더라구요, 하하. 그런데...당신은 잘 있지요? 나는 아직 여기 그대로 있어요. 괜찮다고는 못해줘요...

 

 

어쩌면 원대한 꿈이 사라졌어요. 정확히는 나도 모르는 내 미래를 생각하기 싫어졌어요. 아무것도 되지 않음을 같이 참아낸 당신이 오늘은 그립군요. 아무것도 이기지 않아도 되니 그냥 올해도 계속 살아만 있어주길.(이것이 의외로 쉬운 일 아닌 거 나이 들고서 깨우칩니다만)

 

 

그런데 여러분은

헤어진 남자와의 반지를 어떻게 하셨나요. 새해 아침인데 떡국 먹다가 생각이 나서요.

(올해도 계속 끼고 계실건지...물어 보는 겁니다 ㅋ)

 

 

 

 

#4.

 

 

  올해부터라도 한달에 며칠 시 읽는 날을 정해놓을까...또 신년계획의 유혹에 빠지고 싶어 죽겠어요. 많은 거장들이 글이 안써진다고 문장 고민하지 말고 그럴때 시나 읽어라 충고를 하지만 네네 그래놓고 다시 소설만 읽었어요. 공부한답시고 철학, 사회과학에만 눈독 들였어요...

 

 

그런데 정확히는 외우지 못하지만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이 시가 아침부터 생각이 났었는데....하하하, 최영미 시집에서 드디어 찾았어요.

최영미는 천상병 시인의 새를 읽고 두어번이나 울었다고 해요..글쎄.. 그 마음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은데 어쩌죠...이벤트 같은 거 수줍어서 못해요. 그러니 이웃님들에게 시로 마음 대신합니다...

 

 

산다는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 같이 생각할수 있다는 거 정말 고마운 일이거든요.

 

 

 

 

 

 

 

천상병(1930-1993)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가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최영미, <내가 사랑하는 시> 中에서

 

 

 

 

 

 

 

 

 

 

  덧붙임)

 

혹시 이런 아르바이트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ㅋ  저는 같이 울어 드리는 거 정말 자신있어요.
남의 이야기 듣고 슬픈 부분이 아니어도  엉뚱한 부분에서 잘 울거든요. 다 이야기 하면 별 여자를 다봤네 하실걸요 ㅋㅋㅋ

올해는 산다는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 같이 느끼게 될 모든 분들..

더 많이 듣고 그래서 마치 내 일 같이 마음으로 울어 드릴께요...

(물론 몰래 혼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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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0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애가 안 나와서 저도 좀 떨떠름하더군요.
김래원하고 연기하는 게 힘들어었나?ㅋ
1월이 되었으니 이제 봄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

한사람 2012-01-01 15:0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건강하셔야 해요 !!

예상하신 대로 한석규가 대상을 탔죠??
(소감을 꼭 교수님처럼 말하더군요 ㅋ)
저도 수애, 안나온 이유가 궁금한데.. 정말로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 생각되요 ㅠ
(갠적으로 박신양을 버린거...슬퍼요)

대문 그림이 바뀌었어요~


stella.K 2012-01-01 15:42   좋아요 0 | URL
이건 좀 다른 얘긴데, 일본엔 애도하는 사람이 있다잖아요.
죽은 사람의 집을 방문해서 함께 울어주는. 물론 소설 이야기지만.ㅋㅋ
어제 잠깐 보다 졸려서 잤어요.
어차피 끝까지 볼 수도 없고 해서.
그런데 sbs는 어쩌면 그렇게 벙한지 모르겠어요.
딱히 재미도 없고, 최강희는 어쩌면 그리도 사회를 못 보는지...
수애 김래원 베스트 커플상에도 떨어지고.ㅜ
역시 이제 김수현은 알아봐 주는 사람만 알아보나 보다 싶기도 했어요.

대문 그림 예쁘죠?히히

한사람 2012-01-02 09:38   좋아요 0 | URL

텐도 아라타 소설 <애도하는 사람> 말씀이시죠..?
저도 그 책 읽었는데..많이 슬펐던 기억이 있어요. 그 책 읽는 동안에 우연히
배삼룡씨가 병환으로 별세했는데 벌써 이년이나 지난 거 같습니다.

김수현 드라마는 아주 어렸을때부터 봤어요
(이덕화, 정애리의 <안녕하세요>부터요 ㅋㅋ)
그래서 그분 결말이 지향하는 바를 꽤 오래 학습해온 시청자라고 자부해왔죠, 하하
이건 제 사견인데 그분은 남자에 대한 절절한 배신감때문에 온갖 드라마에서 여성에게 순애보 바치는 남성상을 결론맺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그러니까 역으로 그런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ㅋㅋ)

수애불참으로 그 수혜자가 어쩐지 최강희가 된 듯했죠... ㅋ
영화나 드라마에선 팬이지만 MC는 그로써 다시 안했으면 하하하..



마노아 2012-01-0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분하고 촉촉하게 읽혀요. 어제의 들뜨고 조금은 초조했던 마음이 이제야 조금 가라앉아요.
한사람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한사람 2012-01-01 15: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기억났어요, 제가 부모님을 언급하면(그러니까 징징거리면 ㅋㅋ)
마노아님이 덧글을 달아 주셨던거 같아요, 하하

나이 들어서 하나도 흥분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마노아님도 새해엔 더욱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신있게 ~~
고마워요!

카스피 2012-01-0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분하신 글이시네요.
한사람님 2011 서재의 달인 등극을 축하드립니다.
2012년 흑룡의 해,좋은일만 계시길 바라며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그리고 신년 새해 용꿈 꾸시라고 용 한마리 선물로 보냅니다
\▲▲/
( ^^ )
<(..)>
<(▶◀)>
<( = )>
<( = )>

━┛┗━

한사람 2012-01-02 09:41   좋아요 0 | URL

하하, 감사합니다.
서재의 달인 같은 게 되는 분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거기 끼어(?) 있어서 사실 무척 놀라고 떨리고..ㅋㅋ 그랬어요^^
저는 이모티콘 쓰는거 ^^ 밖에 없는데 ..몇개 안가지고 ㅋ 예쁜 용 만드셨어요 !!!
(카피 안하고 도전해 볼만한걸요~)

카스피님 대문 그림이 항상 포근하고 달달해서 좋아요~~
벌써 월욜인데 찬 겨울 맘만은 꽁꽁 얼지 마세요^^



mira 2012-01-01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다는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 같이 생각할수 있다는 거, 구절이 참좋네요. 시를 읽으면서 한해를 시작하는 기분도 좋구요. 이글을 읽으니 웬지 가슴이 아련하니 .... 저도 때론 같이 울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하곤 했는데 자주 와야겠네요.

한사람 2012-01-02 09:45   좋아요 0 | URL

아..저도 천상병 시인이 그 구절을 강조한 이유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시인에게 그 세가지가 살아가는 목표이자 결실이 아니었을까...싶어요.

나이들면서 같이 웃어줄 사람보다 같이 울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절실히 느낍니다.
그래서인지 말없이 같이 울어 주는 사람이 괜한 밥사주고 선물 사주는 사람보다 더 고맙다는 걸
실감합니다. 또 좋은 소식 알려서 축하 받는 것도 기쁘지만 내가 상처받고 힘들때 그 마음 알아주는 사람이
실은 더 고맙다는거.. 변변치 못한 서재질하면서 깨우칩니다

고맙습니다^^

울보 2012-01-0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는것 참 잘하는데 신년부터 울수는 없지만 올해 마음은 그런마음으로 저도 시작을 했답니다,
올해는 우울함보다는 즐거운 생각 즐거운 마음을 더 가지려고 노력하려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한사람 2012-01-02 09:50   좋아요 0 | URL

예, 저도 늘 우울한게 속편하고 익숙한 쪽입니다 ㅋ
울보님도 벌써 닉이 울보이니 눈물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올해는 나를 위해 혹은 나때문에 울기 보다 남을 위해 울어보자..뭐 이런
건방진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다 보면 내 울일도 줄어들고 같이 울게 한 그 사람도 덜 울지 않을까...

어제보다 많이 추워진거 같아요~ 감기 조심하세요!
(요즘은 감기 환자가 줄었죠 ㅋ, 아이들 사진 보니 방학인데 바쁘시겠습니다 ㅠ)

가연 2012-01-0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새해네요. 잘지내셨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ㅎ 저는 좀 더 어렸을때는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하여 울어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ㅠ 요즘은 잘 안되더라구요. 여러 일들도 있고.. 음.. 이영도씨가 눈물을 마시는 새, 라는 책을 썼었는데, 이건 판타지 소설이에요, 풋. 어쨌든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빨리 죽는다지요. 눈물은 안좋은 거니깐 몸밖으로 내보내려고 하는데.. 그렇게 안좋은 것을 마시는 새가 일찍 살 수는 없을거라고.

한사람 2012-01-02 09:55   좋아요 0 | URL

그 소설 장르소설이죠...? 들어는 봤는데 가연님의 취향인지는 몰랐네요 ㅋ
눈물을 마시는 새가 일찍 죽는다...흑흑..의미심장. 허를 찌르는 진리 같습니다.

하지만 대신 울어주지 않고(희생이 아니라) 손잡고 같이 울어주면 좀 다르지 않을까요.
그렇게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는 새는 같이 오래 살지 않을까요??

평가단 손 놓았더니 자연 인문서에 관심이 덜 가고 있어요, 하하
(그래서 잘 못갔습니다. 못 읽었어요 ㅠ )

새해에도 변함없는 리뷰 부탁해요!!!(내 대신요 ㅋㅋㅋ)

gimssim 2012-01-0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의 단상들의 메모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저도 해볼까봐요.
무슨 증상인지 앉아서 오분을 진중하지 못합니다.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요.

행복한 새해 되세요.

한사람 2012-01-02 09:59   좋아요 0 | URL

아..그와 비슷한 증상 저도 겪고 있는것 같아요.
책 읽을때 가장 방해되는 증상이기도 한데..
요즘은 책에 빠지기가 쉽지가 않아요.
(언젠가 다 덮고 누워서 이어폰끼고 명상음악 같은 뉴에이지만 듣다가 잠든 적도 있어요 ㅠ)

여름에도 단락을 끊어서 마음을 정리한 글이 읽기 좋다고 해주셨어요 ㅋ
단상이라는 단어와 개념, 참 좋아합니다.
(감히 '사랑의 단상'때문에 잘 쓰지는 못하지만요)

건강하시고 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hnine 2012-01-0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글이 왜 이리 슬프고 쓸쓸한가요.
전 이 글 읽으면서도 마음이 울렁거리네요.
글이 있고 책이 있잖아요.
외롭지 않은 순간도 생각해보면 많지 않을까...그렇게 생각을 돌려봅니다.
일해야 하는데 워밍업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밤입니다.

한사람 2012-01-02 10:04   좋아요 0 | URL

음.. 닉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가르쳐 주세요^^)

저는 리뷰말고는 이런 글을 좀 슬플때 작성하는 습관이 있어요.
부끄럽지만 어떤 글, 어떤 구절은 정말 울면서 쓰는 경우도 있어서
그런 분위기가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글을 쓰고 일어나면서 그 마음을 털어 버리기 때문에 이제는 괜찮아요.
글을 썼다는 건 이젠 그렇지 않다는 뜻이기도 한거예요, 하하
안쓰고 안 올리고 담아 놓고 있을때가...더 슬픈 것이죠 실은.
(고마와요, 알아 주셔서요)

글이 있고 책이 있다는 말씀이.. 참 위로가 되네요.
그리고 하나더 이렇게 이웃님들도 있네요, 하하

혹시 직장을 다니시나요?
저는 전업주부가 된지 이제 삼년째군요 ㅠ
다음엔 즐거운 글쓸게요..이래야 되는데 그건 약속 못드리겠어요, 하하하


조선인 2012-01-02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헤어진 남자가 없어요. 철푸덕... 처음 연애한 남자와 그대로 결혼해 지금껏 살고 있어... 그런 반지로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이런 것도 대신 울어주실 수 있는지요. 헤헤.
새해 좋은 꿈 꾸셨길 바라며, 그 꿈을 이루는 한 해가 되시길.

한사람 2012-01-02 10:08   좋아요 0 | URL

어머나.. 그 꽃다운 나이에 첫사랑과 결혼해 다른 남자를 하나도 겪어(?)보지 못한 그 드라마 같은 주인공이, 그러니까 조선인이셨군요, 으하하하.
(대단한 인연인 거예요) 울어드리기 보다 실컷 웃어 드려야 ㅋㅋㅋ 할 거 같습니다, 히히

지난 연말에 며칠을 부모님 꿈을 꾸더니 이제야 안나타나세요 ㅋ
숫자만 바뀌었을 뿐인데 새해는 새해인가봐요!!

아이들 사진 보니까 마음이 따스하고 편안해집니다.
방학에는 주부들이 은근 시간이 없죠(밥해대느라구요)
자주 들러 슬쩍 울고 갈께요^^ 고마워요

無爲自然 2012-01-02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다 보면 속에 든 뭔가가 쏟아져나오는 거 같아요 그래서 펫북을 못 끊고 있나 봅니다 같이 울어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나봐요 세월이 흐르고 사는게 지겨워지는 순간순간 나를 잡아당겨줄 누군가가 필요했나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같이 울어줄수 있다는 말만으로도 안도가 되네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이 가득한 한해가 되시길 빕니다

한사람 2012-01-02 12:19   좋아요 0 | URL

펫북이..뭐냐고 물으면....싫어하실까요?? ㅋㅋ(페이스북??)

예..저는 사실 내가 울때 누가 옆에 있으면 나오던 눈물도 들어가려 하더라구요.
혼자 있을때 많이 우는 편이라..(그러곤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ㅋ)
저처럼 그런 분들에게 아주 작고 보잘것 없지만 그런 마음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맛난 점심드시고 웃는 하루 되시길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1-02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핸 살아있다는 게 아름답다는 걸 말이 아닌,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해가 되었음 해요 정말 절절하게 느껴보고 싶어요 :)

한사람 2012-01-02 12:21   좋아요 0 | URL

아하,
저는 살아 있는 것, 아름다운 것을 별개로 보았는데...
살아있다는게 아름답다고 할수도 있겠어요!!!! 음... 훌륭하십니다 ㅋ

그럴려면 우선 살아있다는 걸 실감해야 하는데 우리는 살고 있으면서도 그걸 못 느끼고
심지어는 잊어먹고 뭐하러 ㅋ 사나 싶을때가 많군요..

좋은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01-0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엉뚱한데서 잘 우는데,,, 그리고
한사람님이랑 저랑 동갑이니, 제가 확실하게 나이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궁금할때마다 물어보세요. ㅋㅋ

저는 이제 중년에 맞는 감성으로 가는데, 한사람님은 아직도 사춘기 소녀군요.. 예뻐랑, ^^

저는 떡국에 굴이랑 매생이를 넣었답니다. 고기 국물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사실
정성은 훨씬 덜하지요, 양지머리보다. 그래도 우리 식구들 맛있게 잘 먹더군요. 얼마 전에 팥죽도 먹었으니
우리 집은 제대로 한살 먹은 셈이지요.

한사람님,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 가득한 새해되세요.

한사람 2012-01-02 17:50   좋아요 0 | URL

떡국에 굴이랑 매생이를 넣을수도 있구나!!!
저는 예전에 엄마가 멸치국물로 떡국 해주시던게 제일 맛났던거 같아요
팥죽도 부모님 안계시고 나니까.. 동지에 먹는 건지 ㅠ 잊어 버렸어요.
정월 대보름 같은 중간 명절도 의미없어졌구요, 으앙.

저는 작심삼일까지만 해보려고 줄넘기를 시작했어요.
처음에 스무번 하고 나서 핑 돌더니 이제 70개까지 했어요, 하하하

마고님도 새해엔 이곳에서 봉변 당하지 않고, 히히 그렇더라도 여전히 씩씩하게
그리고 더 신나게 살아봐요, 함께^^

이진 2012-01-02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최영미 시인 참 좋아하는 시인인데 그녀가 읽으며 울었다고 생각하니
저도 왠지 훑어보는데도 코가 찡했어요...
어려워보이는데 가슴을 파고드는 시네요.. 아, 좋다

저는 김영애나 염정아가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봐요.
독고진 주는 건 연기대상이 아니라 인기대상이잖아요!!
연기는 로열패밀리 여자들이 올해최고엿는데 ㅠㅠ

한사람 2012-01-03 09:2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인기대상이었죠, 독고진!
로열 패밀리와 싸인이 작품은 좋았는데 물먹었다는 기사 보았어요.
갠적으로 염정아를 별로 안 좋아하고 싸인은 어쩌다가 못보았는데
우리 딸아이가 박신양이 제일 잘했는데 김래원 줬다고 울기까지 했어요, 하하하

어려워 보이는데 가슴을 파고든다....음..정확하네요,
실은 나도 그랬거든요 ㅋㅋ

인사가 늦었는데 새해의 계획이 모두 이루어 지길 바라요^^, 고맙구요~

2012-01-03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3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2-01-03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너무 오랜만이죠 ^^ 죄송해요. 그 좋아한다고 말한 글들도 와서 많이 보지를 못하고 새해 진짜 진찌 복 많이 받으셔요. 한사람님이 서서히 그리고 줄기차게 소설을 쓰고 계시다는 사실이 참으로 좋습니다. 전 여전히 어둠을 헤매고 우울과 마주 앉아 스스로를 보며 크게 웃고 있습니다.
서재에 들어 오지도 않고 그림자처럼 그냥 있다가 가곤 하는데 항상 한사람님의 글은 한 번씩 보고 가요. ^^ 제가 한사람님 글 되게 좋아하고 팬인 거 아시죠?
새해에는 더 많이 그리고 줄기차게 쓰셔야 합니다! 그리고 소설가가 되시는 거에요! 야압! 제가 밀어 드릴테니!! ㅋ

한사람 2012-01-03 09:43   좋아요 0 | URL

흑..뭐가 죄송해요..
나야말로 루쉰님 글 읽고도 쓰윽 몰래 울컥만 하고 온 걸요 ㅠ
생활이 바쁘고 고단하고 마음에 찬 바람이 불어도 책 읽고 글쓰는 루쉰님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철저하게 저는 조직과 야망에만 올인했거든요..

마지막에..
그리고 소설가가 되시는 거에요, 이 부분이 저를 뭉클하게 하네요.
루쉰님의 덧글에서 이상한 희망의 에너지를 받는다고 언젠가 답한 적 있죠.
저도 이곳에서 맘으로 팬인 분 만들고 싶네요.
(저는 제 글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아주 부족한 그릇이라.. 사실 남의 글을 루쉰님처럼
진심으로 성의있게 잘 못 읽어 드려요..ㅠ 날 잡아서 정독하거나 그러죠..그래서 이런 글을 쓰기도 했구요, 히히)

소설을 쓰고는 있지만 소설가가 되고싶지는 않다는 이상한 자존심도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고 절실하게 매달려야 하는데 저는 아직 왜 소설인지, 사실
아직 영글지 않은 열매인 듯합니다. 줄기차게 쓰다보면 알아지는 날이 있겠죠??

오늘 루쉰님의 일상에 행운과 편안함이 자리하길요(새해인사 포함입니다)


비로그인 2012-01-0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신가요.... 한사람님? ^ㅡ^
오랜만에 멋쩍은 발걸음 해보네요.

음, 하고 싶은 나머지 이야기는 2012년 한 해 동안 차차 해봐요 ㅎㅎ

한사람 2012-01-04 08:19   좋아요 0 | URL

앗, 수다쟁이님 !
대문 사진 교체됬네요 ㅋ
저는 잘 있어요, 잘 있다고 말해줄수 있나요?
올해는 설이 1월말이라 어쩐지 본격적인 설날을 그때로 미루는 분위기입니다

날이 많이 추워요, 하지만 1월만 견디면
늘 그렇듯 겨울도 가요.. 함께 견뎌봐요^^

 

 

 

 

 

 

 

#1. 익명의 해답


 

 

   이런 생각을 했다. 연애는 서른이 되면 시들해지고 그러다 마흔이 되면 추억이 곧 사랑일 것이고 어느덧 오십이 되면 연애도 사랑도 추억도 사라져 그리움만 남게 되는 것. 어렸을 때 나는 대충 나이 먹는다는 걸 열정의 소멸로 인식했던 것 같다. 스무 살 땐 도저히 마흔을 상상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나는 마흔을 넘겨버렸고 다시 내 나이 육십을 떠올리기 힘들어 한다. 육십이 되어도 똑같이 그보다 더 늙어진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질까. 생각해보니 나는 얼추 서른 살까지는 연도별로 일어난 일과 내가 겪은 일들을 아주 세세히 기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 명석한 기억의 두뇌는 결혼과 출산, 육아, 기타 삶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급격히 퇴락의 길을 따랐고 이제 머리를 한번 감으면 방바닥에 머리가 한 움큼 쥐어지는 딱 그만큼씩 한해마다 세포가 죽어 감을 실감한다. 최근이라고 생각하는 시점은 대개 한 계절 전이고 얼마 전은 일이년, 좀 되었다 싶으면 삼년에서 오년, 손으로 햇수를 따져본다 싶으면 칠팔 년, 옛날이야기라 시작해보면 거뜬히 십년 전... 내가 어렸을 때 TV에서 이산가족 찾기 프로를 보았을 땐 삼십 여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나 멀고 긴 시간이었는데... 이제 나는 삼십 년 전의 나를 삼년 전의 나보다 더 자세히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올해 느낀 깨달음을 정리하게 되는 건 이 깨달음이 언젠가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내 인생에 대한 해답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올해 알라딘에서 무엇을 이루었을까. 대단한 것을 이루고자 서재를 운영해 오진 않았지만 반복되는 서재활동에서 분명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존재했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떠올리니 결국 잃은 것도 얻은 것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곳이 좋아서 이곳에 일상을 의지하다가 어느 순간 마음이 상해 다시는 안 본다 다짐하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서재를 기웃거리게 되는 시간이 나에게도 있었다. 이곳의 익명성이 편하고 부담이 없어서였지만 내가 가장 괴로워했던 것 역시 익명의 이중성이었다. 익명이 변주하는 이중주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고 나 역시도 행사의 주체가 되어 본적 있는 이곳의 본성이자 거부할 수 없는 본연이었다. 다른 곳을 활발히 하지 않고 이곳에서 얻은 댓가란 바로 그 익명성을 대처하는 나름의 자세가 아니었을까.

 

 

    연예인을 예로 들면 우리는 많은 사랑을 주고 대단하다 칭했던 사람이 실수를 하거나 구설수에 휘말릴 경우 여과 없이 솔직한 의견을 실시간으로 비판하는 창구가 마련된 세상에 살고 있다. 앞뒤 따져 보지 않고 전후 상황을 모두 들어보지 않고 드러난 현상과 몇 가지 공개된 사안만으로 호불호를 표명하고 신랄하고 원색적인 비난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떠들 수 있다. 그것을 의식한 누군가는 비난의 대상 편에 서서 유려한 논리를 펴기도 하고 당사자는 그걸 못 견뎌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거나 성급히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외치곤 한다. 마지막에 가서 그들 모두를 다 이해한다는 누군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만 전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고 그것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우리의 임무가 아니겠느냐 충고하고 그 모든 걸 다 지켜본 또 다른 누군가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조롱하거나 자신을 포함해 모두 다 웃기는 사람들이라며 시대의 우울증과 편집증에 대해 쓸쓸한 냉소를 남긴다. 시간이 지나면 앞서 벌어진 상황은 거짓말처럼 잊혀지고 새로운 상황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똑같은 패턴의 시나리오는 지칠 줄 모르고 반복된다. 어떤 익명은 열렬한 공감을 또 어떤 익명은 마땅한 손가락질을, 또 다른 익명의 친구는 냉소를 그 친구의 모르는 이웃은 연민을...

 

 

 

 

#2. 익명의 대가

 

 

 

   알라딘 서재라고 다를 것이 없었던 지난, 일 년이었다. 이곳은 다른 온라인 서점과 달리 공개게시판의 성격을 띠고 있어 의도와는 다르게 얼마든지 집단축하의 분위기도 마녀사냥의 분위기도 만들 수도 있고 정치 관련 여론을 형성할 수도 있고 특정인에 대한 음해 및 명예훼손도 가능하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글을 쓰진 않았더라도 충분히 이해받기보다는 뜻밖의 오해를 받기가 더 쉬운 경향이 분명히 있다. 익명은...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엊그제 나를 포함한 이곳 여성 알라디너에게 무차별적으로 특정인을 비방하는 댓글이 달린 적이 있었다. 처음엔 황당하고 기가 막혀 그리고 가슴이 떨려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이웃과 교류가 별로 없는 나를 타겟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중에 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똑같은 메시지가 타전 된 것을 보고 그 사람의 계획을 대충 파악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알라딘 서재를 이용하는 분일 것이며 그 특정인으로부터 직접, 간접적으로 어떠한 피해를 받았거나 혹은 목격했거나 그도 아니면 확실한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들었는데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자 댓글의 내용은 또 다른 알라디너와 출판사를 언급하며 자신이 쌩쑈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정중하게 방법이 의도를 넘지 못하고 있음을 답하며 이런 식의 방법은 결국 당신에게만 상처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말로 억울하거나 세상에 알려야 할 일이라 생각되면 합리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따르는 게 어떻겠냐는 어줍 짢은 충고와 함께. 사람들은 사건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이슈 자체에만 관음증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므로 당신의 방법은 생각만큼 효과가 없다는 말도 함께... 물론, 내 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잠시 후 그는 자신의 댓글을 지우고 서재에서도 사라졌다. 그렇게 쉽게 사라지고 말 것을 잠시라도 그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을까 싶어 나는, 갑자기 그 사라진 익명이 서글펐더랬다. 태연히 지우고 사라지고 나면 당신이 한 일이, 당신이 쓴 글이, 당신을 느껴버린 내 기억이 없어지는 일일까... 그것은 당신에게도 마찬가지 일일 터인데... 아마도 나는 잊어버려도 그래야만 했던 당신은 죽어도 잊지 못할 추한 실수가 될텐데...

 

 

   그랬다. 나는 올 한해 이곳에서, 혹은 알라딘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여러 번 익명의 공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ㅠ) 이번 일처럼 누군가를 비난하려고 나를 타겟으로 삼은 적은 물론이고 나를 지켜본 누군가가 때가 되면 여러 방법으로 교묘하게 나를 자극했다. 동일인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떨 땐 도무지 모를 것 같기도 하고. 한때는 그 익명을 추적해 모아진 단서들로 대충 내 나름대로 집히는 사람을 분석해보기도 했다. 그들 중에 어떤 익명은 소름끼치게도 나를 알고 내 글을 읽었고 심지어는 나를 대단하다고까지 칭찬한 사람이라는 것도 어슴푸레 알게 된 적도 있었다. 그 아는 익명아닌 익명이 왜 그러는지 잘 알았기 때문에 나는 돌아앉아 그 사람이 잘되기를 먼 훗날이라도 나보다 훨씬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각종 리뷰대회에 발길을 끊은 다음부터 나는 익명의 비난에서 자유로와 질 수가...있었다. 그 익명이 이쪽에서 상탄 글을 또 다른 저쪽에 접수하여 뭐라도 어떻게 떡밥을 챙겨먹는다는 식의 또 다른 익명의 빈번한 고자질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었다. 내가 떡밥을 받아먹는 양과 횟수가 줄어들수록 익명의 공격도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다른 것에 마음 둘 일을 자동적으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댓글에 대한 상처들은 쉽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사실 내 이웃 분들의 서재에 가서도 댓글을 잘 남기지 않는 편인데 변명을 하자면... 가까워 지면 반드시 멀어지기 때문이라...말씀 드리고 싶다. 온라인에서 좋은 글을 보고 나도 모르게 울컥한 적이 많았다. 그런 글에는 뭐라도 살짝 한줌 남기고 오고 싶었지만 세 개 할 거 하나만 하고 오늘 할 거 내일로 미루는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다. 남겨진 내 댓글을 좇아가며 저장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것들도 공격으로 치환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어떤 분은 온라인에서 소통하지 않고 자기 잘난 맛에 혼자서 우아한 척 글을 올리는 것은 커뮤니티에서 왕따가 되는 길이라고 유머스럽게 충고도 해주셨는데 그래서... 자주 가는 분에게 글도 남기고 하다가 또 여지없이 익명을 불러 들인 꼴이 되길래 그것 마저도 접었다. 소싯적에 토론이나 논쟁으로 상대를 밀어붙이고 승리감에 도취된 적이 왜 없었겠는가. 남을 아프게 하는 말은 부메랑처럼 반드시 내게 돌아온다. 갑자기 발길을 끊은 것처럼 보여서 오해할까봐 뭐라도 글을 남겨드리고 싶었지만... 그것도 내 경우에 절실한 것이지 보는 입장에선 웃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책을 보내주겠다는 고마운 분들의 성의에도 인사만하고 끝내 허락을 해드리지 못한 적도 있었다. (죄송했다) 모두가... 그러다가 다시 멀어질 것이 두려웠노라 그런 후에 감당해야 할 내 쓸쓸함이 사무치게 싫었노라 고백한다.

 

 

 

#3. 익명으로의 치유

 

 

 

 

   소설집을 공부하다가 바로 어제 천운영의 ‘알리의 줄넘기’라는 단편을 읽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소설을 읽었다는 걸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공교롭게도 각종 포털에선 ‘알리 나영이’가 검색어 1위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영화적인 독서의 순간이 거짓말처럼 빈번한 사람에 속하는데 그래서 아마도 그에 대한 내 상념을 글로 남길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나, 이런 거창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어제 보니 알리는 자신이 성폭행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직접 가사를 쓰면서 피해자가 느끼는 진심이 세상에 전달되기를 바랐다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고 알려졌다. 기자회견을 보면서 느낀 건 알리가 무엇보다 자신의 신중치 못한 실수로 앞으로 노래를 하지 못하게 될까봐를 극심하게 두려워 하는 것으로 보였다. 알리는 용서도 용서지만 제발 노래를 하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알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댓글들로부터 무엇을 예감한 것일까... 그동안의 숱한 사례들을 보면서 자신이 유일하게 세상에 떠들 수 있는 노래라는 희망이 사라질 순간을 상상하진 않았을까. 노래하지 못하게 되는 공포심은 여자로서 밝히기 수치스러운 사실을 공개해야 하는 결단의 순간을 종용한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유명인이 실수하면 그가 하고 있던 일을 그만두라는 식의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사랑해주고 당신을 응원해 왔는데 이렇게 배신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라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전과 같은 사랑은 추호도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를 서슴치 않고 한다는 것이다. 대중이라는 익명은 무언과 침묵으로 연예인의 유배를 도모하고 그를 기꺼이 은둔이라는 감옥으로 보내 버리는데 익숙하다. 만약 알리가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자신의 진심을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울면서 말했더라면... 백지영, 오현경, 이승연, 이경실, 이영자, 최진실, 정선희... 9시 뉴스에 등장한 숱한 여자 연예인, 이들이 자신들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명예를 회복 하는 데는 십년이상이 걸리거나 혹은 영원히 기회가 없어진 사실을 알리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다음 사건에 참고가 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영리한 방송과 그에 타협하는 연예인 다수는 미리부터 자신의 가족사나, 과거 가난했던 시절, 아버지 사업이 망한 이야기,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키워준 할머니, 투병중인 가족, 학창시절의 방황, 연습생시절 굴욕 같은 사연을 내보이며 눈물로 호소한다. 대중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상처를 구경하며 그들의 에피소드와 거래를 하는 것과 같다. 남의 상처를 구경하는 것만큼 내 상처에 위로가 되는 일도 없기 때문에.

 

 

꿈속에서도 알리와 포먼은 여전히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혈전이라기보다는 포먼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알리는 그 멋진 라이트 스트레이트 한방 날리지 못하고 로프에만 기댄 채 몸을 숙이고 있었다. 거대한 체구의 포먼은 해머펀치를 날렸다. 나는 어서 시간이 흘러 알리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알리의 위대한 승리를 세상에 알리기만을 바랐다. 나는 링밖에 서서 끊임없이 알리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알리는 로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알리의 상체가 로프 밖으로 젖혀지며 고개가 꺾였다. 그 순간 알리의 몸을 버티고 있던 로프가 늘어지면서 알리의 몸뚱이를 감기 시작했다. 알리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다. 줄에 둘둘 말린 알리는 꼭 나방고치 같았다. 나는 링 밖에 서서 계속해서 알리의 이름을 불렀다. 어서 일어나. 알리, 어서 나비처럼 춤을 춰야지, 알리

 

 

-90p, <알리의 줄넘기> 中에서 / 『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다시 소설 이야기를 해야겠다. 천운영의 소설 <알리의 줄넘기>의 주인공 이름은, 김알리이다. (가수 알리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셨는지는 알수 없으나 무하마드 알리를 떠올리고 예명을 알리라 한것이라 들었다) 혼혈인 아버지가 평생 권투선수의 스파링 파트너였기에 아이가 태어나면 알리라 이름짓기를 원했다. 혼혈 아버지에게서 다시 혼혈로 태어난 알리는 또래 친구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받으며 치매 할머니와 살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열세 살 소녀이다. 사라진 아버지가 ‘유머 있는 알리가 될 순 없어도 슬퍼하는 알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씀 하셨기에 슬퍼하는 것을 패배로 알고 살아가는 기특한 친구이다. 그러니 알리가 연습하는 줄넘기는 세상이라는 링 안에서 인생이라는 싸움을 준비하는 자기만의 시간인 것이다. 누구나 타고난 콤플렉스와 살면서 자라나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투자한다. 나는 알리를 알기 전에도 알리 노래를 잘 알지 못했고 그녀에게 특별한 호감을 느낌 대중이 아니기 때문에 새삼 이번 사건으로 그녀를 위로하며 응원 한다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알리를 통해 알리의 모습에서 알리로 반응하는 익명의 본성을 엿보았다 말하고 싶다. 그 익명이 당신이고 나였다고 그래서 우리를 보았다고 자백하고 싶다. 소설에서 알리는 혼자서만 연습해온 아버지와 달리 줄넘기를 같이 할 누군가를 찾아서 줄넘기를 사러가는 것으로 마지막을 인사한다. 글을 쓰는 행위는 철저히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독단적인 과정이지만 글을 올리고 누군가에게 내보이고 같이 진심을 나누는 것은 혼자서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나이가 들어서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그 어떠한 기가 막힌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알리를 보면서 조그만 실수나 배려치 못한 행동, 또는 전혀 다르게 해석된 글 등으로 이곳 서재에서도 얼마든지 알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굳이 이곳이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익명의 부메랑은 내가 무심코 날렸던 만큼 나에게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 익명이 나쁘다 비난하는 것도 사실은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다른 일은 아니라는 생각... 그 속에 속한 적 있었던 나 역시 크게 다를 것 없는 대중이었고 다른 이의 익명에 불과했다는 자각. 이런 일이 있을때마다 보수신문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생각모자란 네티즌의 악행을 비난하고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다. 내 생각에 익명을 치유하는 방법은 역시 같은 위치의 익명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내가 모르는 익명의 손길로 내가 위로를 받았던 것을 떠올리며 상처받는 누군가에게 말없는 위로의 익명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결국은 익명이었던 나를 치유하고 나아가 내게 위로받은 익명을 치유하는 길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글쎄, 나는 당신과 나의 이 질기고도 서러운 모두의 익명을 견디는 것이 서재를 아프지 않게, 그리고 조금은 편하고 어떨땐 유쾌하게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알리가 하는 줄넘기를 내 나름의 글쓰기로 슬쩍 바꿔버리고 싶다. 참 추운 날이다. 나를 아는 익명의 이웃 누군가가 동네에서 혼자 줄넘기 하는 광경을 혹시 보시거든 내가 넘고 있는 줄넘기에 더블 더치할 누군가의 우리를 기다려 보고 있는 중이라 받아들이시라. 이 추운 날 거기 혼자서 뭐하는 짓이야 하지 않고 그렇게 뛰면 뭐가 좋으냐 따져 묻지 않고 나도 같이 뛰어 보니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아지더라는 그래서 말없이 눈으로 만으로도 웃어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믿어주시라. 내게 그런 익명의 이웃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는데, 오늘은 그분들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드리고 싶다고 고백한다. 부족하지만, 그것이 올 일 년 이곳에서 깨달은 마음이라고 살짜기 속삭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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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1-12-17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도 좋은 마음으로 마무리하소서..

한사람 2011-12-18 09:13   좋아요 0 | URL

하하, 된장님도 맘편한 일요일 되세요^^
같이 줄넘기 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ㅋㅋ

stella.K 2011-12-18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생각에 동감은 해요.
저도 이상하게 예전에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 멀어지더라구요.
왜 그런가를 생각해 봤더니, 결국 한계더라구요.
서로가 글로 통하는 사이니 그 사람이 어떤 패턴으로 글을 쓰고, 말하고, 사고하는지
어느 만큼은 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조금씩 댓글을 안 달기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을 알아봤자 이전의 사람들처럼 될테니 관심이 없는 거죠.
그래서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하는 사람과 교류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도 넓은 의미에서 순환이라고 보는 게 마음 편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어렸을 때 사귄 친구도 나이 먹어서까지 친구로 남는 경우 별로 없잖아요.
나만 그런가?ㅋ
익명을 견디시겠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저는 만나고 있는 동안은 뜨겁게 만나자는 쪽이예요.
그러다 안 만나게 되더라도 아쉬움은 갖지 않으려구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언제까지 한사람님과 대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날이 오게되더라도 섭섭해 마시길.
댓글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우.ㅋ

한사람 2011-12-19 08:57   좋아요 0 | URL

저는 어느 정도 친해지는데 까지는 문제가 없는데..언제나 그 다음이 어려운 것 같아요 ㅠ
이걸 예로 들어서 될지 모르겠는데요.. 오프라인에서도 동네 이웃과 친해지는 과정이 여기서도
반복되는 걸 느낄때가 많아요. 예를 들면 같은 관심사로 시작된 친분이 점점 서로의 일상으로 파고 들어오다가 사소한 오해로(아무래도 가까우면 모두 이해보다는 뜻밖의 오해도 발생 ㅋ)맘이 상하게 되는 것. 그런데 오프는 얼굴보며 풀릴 기회가 있는 반면 온라인은 그냥 그 기회를 서로 방치하고 미루고 그러다가..
멀어지는 것...

말로 빚어지는 상처보다 글로 유발되는 상처가 더 깊고 오래가더라는 것..

저는 이것이 여러번 되다 보니 좋은 마음 생기는 이웃분들에겐 더 다가가지 못하는 트라우마가 되더군요 ㅠ
넓은 의미에서 인간관계의 순환이라는 말씀 참 고맙고 와닿네요.
댓글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하하
찔립니다 ㅋㅋㅋ


비로그인 2011-12-1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느낀 것은 요, 한사람님. 그 사람도 상처 받은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처받고 여기와서 하소연 한거겠죠? 그게 2년전의 일이라더군요. 상처가 깊었겠죠. 그러니 이제와서 그러는거 아니겠어요? 혹시 우리가 같은 사람의 케이스를 말한다면 말이죠. 남한테 상처를 주는 일을 한사람은 어쨌든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익명이라 서로 편하게 만나서 쿨하게 헤어지는 경우가 허다해서요. 그런것에 상처받은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그것을 시크하게 대처하지 못한. 그러니 어느 한쪽만 머라 할 수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그냥..생각입니다.

한사람 2011-12-19 09:02   좋아요 0 | URL

예..저도 첫날에는 화가 많이 났었는데..곰곰 생각해보고 이틀째부터는 넋두리, 하소연같은 느낌도 많이 들더군요. 없는 일을 시간 낭비하며 지어내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해야 할 사연은 있었겠지...싶었어요.
상처라는게 받을땐 같은 방식이더라도 나중에 자기 속을 거쳐 표출되는 방식은 여러가지니까요.
비슷한 예가 될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악성 댓글로 남을 비난하는 쪽도 아마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상처를 받아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요.

파랑새님이 오늘은 어부..신거여요? ㅋㅋ

2011-12-19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0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2-1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킹피셔가 새이름입니다. ^^

한사람 2011-12-20 08:52   좋아요 0 | URL

예, 킹피셔를 찾아봤네요 ㅋㅋ

비로그인 2011-12-20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왜 이렇게 좋을까요? 처음 서재 브리핑에 이 글이 올라왔을 때, 너무 길어서 넘어갔는데(죄송 ㅎㅎ) 지금 천천히 읽으려니 마음에 팍 다가오네요. 그리고 저의 서재 활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사실 저는 익명성이나 알라딘 서재 활동에 대해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거든요. 아직 오래되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진중하게 생각하시는 한사람님을 보니 저도 새로운 결심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내년에도 좋은 글 부탁드려요, 한사람님 :)

한사람 2011-12-20 14:22   좋아요 0 | URL

수다쟁이님, 저 여기 있어요~
어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날이었어요. 글을 잘쓰고 어떻고를 떠나 그냥 좋은 글이라는 말씀이 어떤 건지 알아요. 그런 마음이 수다쟁이님에게도 조금은 통한 것 같아 졸다가 다시 번쩍 뜨이네요 ㅋㅋ

진중한 생각...히히..언제나 생각이 지나쳐서 탈이죠^^
알라딘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해요... 고마워요~

아이리시스 2011-12-2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놀러와요, 한사람님. 제 서재에ㅋㅋㅋㅋㅋ
아, 저는 정말 분위기 파악이.. 안되는 사람인가 봐요.orz
 

 

 

 

 

 

#1. 나, 울지 않아요.

 

 

 

   "제가, 요리를 좀 하거든요.."

   3년 전 초여름 어느 주말, 친척언니 집에 초대를 받았다. 나이는 오십이 조금 넘었으니 큰 언니벌에 해당하고 엄마와 같은 수영장에 다니셨고 수영이 끝나면 같은 사우나에서 한사코 싫다하는 엄마의 등을 밀어주었단다. 엄마는 나를 늦게 낳으시는 바람에 외가의 조카들을 많이 키우셨는데 그러니까 이 언니는 엄마의 외조카의 부인으로서 나에게는 외삼촌의 셋째 아들의 부인, 즉 내 외사촌 오빠의 아내, 새언니에 해당되는 다시 말해 그다지 가까운 친척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오빠와 함께 여의도에서 고깃집을 오래 운영해 왔다.

   “아가씨,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이 우리 언니라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우리 언니는 형부가 일찍 가셨는데요... 형부가
   시고 얼마 있다가 급성 백혈병으로 한 달 만에 갔어요... 그 언니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서, 사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어
   요. 언니 가고 10년이 흘렀는데요... 정말로 하루하루를 이를 악물고 살았어요... 언니 몫까지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저도 이거
   밖에는 안 되었어요.”

    울어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 새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서론도 없이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셨다. 

   “누구에게 이야기 할 수도 없고, 한다고 한들 나만큼도 아니고, 이사람에게 이야기 하면 저 사람이 걸리고 저 사람에게 말하자니
   이 사람에게 미안하고 결국은 나만이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 거구나... 그렇더라구요.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누구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어요.”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을 때, 잠도 안 오고 밥도 먹을 수 없고 이 순간 내가 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겪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 때, 세상은 결국 더 많이 가진 자의 것이구나 싶을 때, 저는요 계속해서 내 이름 석 자만 소리
   내어 불렀어요.”

   그날은 엄마의 사십구재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우는 것도 어지간히 지쳤을 법 한데 나는 언니의 입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계셔 보세요.”

   언니는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었고 음식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나를 위해 갖가지 찬을 마련해 상을 차려 주셨지만 나는 목이 메어 음식을 많이 먹지 못했다. 효자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더니 지나간 청승은 잘도 짝이 맞아 때마침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바깥 풍경은 꼭 엄마를 잃은 나를 알아봐주는 것만 같아 서럽기까지 했다. 나는 ‘아가씨 전복죽 해드릴께요, 드시고 가세요’ 하는 손을 뿌리치며 ‘이제 가봐야죠, 쉬셔야죠’ 하며 나오려는데 아직 멀었다는 언니는 자꾸 ‘잠깐만요, 잠깐만요’하며 한 시간을 넘게 음식을 싸주셨다.

    “이건 그대로 이렇게 섞어서 밥에 넣으면 되요. 흑미랑 검은콩이랑, 제가 다 다듬어  놓은 밤이랑, 그리고 이건 말린 표고버섯, 이
   건 제가 만든 딸기잼, 이건 잠 안 올 때 한잔 씩 드시라고 복분자술.. 그리고 이건 우거지랑 다시마, 멸치가루를 섞어 놓은 건데 한
   개 씩 냉동시킨 거니까 그냥 물에 끓이면 되요.. 이건 고모님이 우리 손주는 냉동 곶감 좋아한다 하셔서 제가 진공포장 해놓았어
   요..그리고 이건 갓김치, 이건 며칠 전 담아놓은 열무김치여요...”
   “잠시만요, 아가씨, 이건 우리 친정아버님이 그린 그림인데..이것도 가져가세요..장미그림 인데... 아가씨와 잘 어울려요.. 담 주에
   도 꼭 오세요... 이제, 울지 마요..아가씨.."

   두 손 가득 그림과 음식을 싸가지고 가면서 얼마나 울었던가.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내게 차려준 진수성찬과도 같은 밥상이 선해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선물로 기억된다. 실감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날 엄마가 해주신 음식 말고도 맛있는 반찬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들을 내가 맛나게 먹고서 한참이나 배가 불렀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있다.

 

 

#2. 우리, 밥 같이 먹어요.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보면 주인공인 윤과 명서, 미루 세 사람이 윤의 옥탑방에 모여 아욱국과 깻잎김치를 서로의 밥에 얹어주며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윤은 처음으로 그 밥상머리에서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자신의 상처를 담담하게 알리고 미루는 그 말을 듣고 깻잎을 떼어 밥숟가락에 얹어준다. 깻잎은 바로 작가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면서 고향과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할 때 떠올리게 되는 음식이라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엄마가 없는 빈자리에서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반찬을 권하며 엄마의 죽음을 말하는 윤의 어깨를 말없이 안아주고 싶었고 엄마만큼은 아니겠지만 향이 진한 깻잎을 담아 그녀에게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그런 마음이 생기자 바로 책을 덮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큰소리로 울고 말았다. 바보같이 나 역시 딱 한번만 어머니가 해주시는 찌개와 깻잎, 나물들을 먹어 볼 수 있다면...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딸아이가 할머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이마트 주차장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이제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대성통곡을 한 날, 그때도 나는 아이를 달래느라 아이의 현실적인 절망에 아이만큼 공감하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신경숙의 소설을 읽고는 엄마가 간절히 그리워서가 아니라 엄마가 만들어주던 음식을 못 먹게 된 것이 그렇게 절망스럽고 억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그리운 심정을 뼛속깊이 알고 있기에 그들이 같이 둘러 앉아 밥을 먹을때 마치 내가 밥상을 받은 것처럼 또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신경숙은 누군가에게 손수 음식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고 소중히 대접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치유의 행위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녀가 차려 놓은 각종 소설속의 밥상에 매번 울고 또 항상 위로를 받는 것 같다.

 

 

 

#3. 당신, 손을 잡아요.

 

 

 

 

   이 책 <모르는 여인들>을 덮고 나니 삼년 전 내게 밥상을 차려준 새언니와 작년에 나를 울린 윤과 미루, 그리고 살면서 나와 같이 식사를 한 모든 사람들이 벅차게 다가온다. 이 마음이 약간 뻐근하기까지 한 이유는 내가 좀 신경숙의 작품으로부터 청승을 그만 떨어야지, 하는 쓸데없는 다짐 같은 게 있어서 였나 싶다. 더 이상 애도하거나 위로받고 싶지 않은 독자로서의 이상한 자존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누구보다 우리들의 서럽고 누추한 마음 깊은 한 구석을 훤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논리로 이해하고 옳다고 동의하고 속상하다 슬퍼했다손 치더라도 어딘가 남아있는 불신과 서운함, 쓸쓸함, 먹먹함, 이런 감정의 찌꺼기들이 모여진 분해되지 않는 쓰레기 창고 같은 마음 그곳을 정확하게 두드리기 때문은 아닐까.

 

 

 

7편이 모두 나의 맨발이고 나의 맨손, 나의 맨몸을 향하는 듯하다. 그 벌거벗은 내 초라한 몸뚱아리에 무언가 엄마의 손길 같은 삶의 보자기 하나를 덧씌워주는 듯하다. 신경숙의 소설은 우리들 각자가 드러내고 싶지 않는 서러운 누추함을 지나치지 않고 따스한 체온으로 감싸주는 고마운 담요와도 같다. 거리의 노숙자는 신문지 한 장으로도 겨울밤을 견딜 수 있다고 하는데 마음이 춥고 가슴이 시려워 도저히 내일이라는 아침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기꺼이 내 살 같은 온기를 선사한다. 달리 거창하게 빗댈 것 없이 소설의 힘이고 신경숙의 힘인 것 같다. 하필 한 해를 정리하고 모두가 따스한 온기로 서로가 살아온 한 해를 격려해야 할 이때 분노와 상처로 눈물 흘리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부디 권한다. 살면서 먹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 순간들이 누구에게도 닥쳐온다. 그렇게 야속하게 눈 내리는 길바닥에 스스로 버림을 당하는 날이 내게만 오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지금 이 찬 겨울 어디에서, 왜, 얼마나,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반드시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 소설을 믿고 그녀를 믿고 우리의 연결을 믿기 때문에. 나 또한 그 내민 손을 잡아 보았기에, 감히 전해드린다. 당신도 곧 따스해 질 것이라고. 얼굴도 이름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모르는 당신이지만 나처럼 다시 웃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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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12-1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종교는 믿지 않으나 크리스트교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사람이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시련만 준다, 라는 말을 한다고 들었었습니다. 저야 가치판단을 하기가 힘들지만,(종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터라)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그토록 한 사람에게 가혹하다면 가혹하게 보일 것만 같은 시련을 안겨주는 이유는 주위 사람들과의 따뜻한 식사 한 끼들을 모두 포함시켜서 그런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이 페이퍼를 보면서 해봅니다.

오랜만입니다ㅎ 겨울이 깊어가는데 말이지요.. 요즘은 거의 알라딘을 (밀려든 숙제 하듯이ㅜㅜ) 리뷰쓸때나 들어오니깐... 아, 물론 신간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좀 힘이 빠진 건 사실이네요, 풋.

한사람 2011-12-15 09:1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어요, 가연님^^

공지영의 소설에 보면 왜 착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만 그러한 모진 시련이 닥치는지 하는 질문에
작가 스스로가 착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써있더군요..

개인의 운명과 그 운명의 다양함에 대해 진지한 사색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 소설이라면,
신경숙의 소설은 늘 훼손된 운명이지만 그것도 운명이라 생각하는 시간을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힘이 빠진건, 제 나름대로 생각해보아도 되겠죠?? ㅋㅋ


mira 2011-12-15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빠담빠담" 드라마에서 정우성이 간암에 걸려서 한대사중 " 왜나야 왜나냐구" 에서 옆에서 김범이 " 왜 형이면 안돼 , 그럼 평생 매맞고 산 엄마였으면 좋겠어 아님 이혼하고 힘들어 하면서 죄수를 위해 봉사하는 교도관, 아님 나였으면 돼냐고 " 라는 대사가 있었요. 모든 일에서 우리는 항상 왜냐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나쁜든, 착하든이 아니라 그냥 일어나는 일중에 하나인데 말이죠 저또한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에게 시런이 닥치면 왜냐고 물을것 같아요.
엄마의 음식,손길, 마음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느끼면서 신경숙님의 소설속에서 나오는 운명들이 서럽고 힘들지만 그래도 자꾸 읽게 되는것은 우리의 운명또한 그런 이야기들과 멀지 않음에 그분의 글로 위안을 받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잘읽고 갑니다.

한사람 2011-12-15 15:46   좋아요 0 | URL

예..저도 지난주에 빠담빠담을 보긴 했는데..
오며가며 보아서 아직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내 주변에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자연스럽게 현실로 여겨지고 반대로
늘 변함없던 현실이 자꾸 낯설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인데
그러고 보면 아무일 없이 평생 평범하게 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특별케이스나
기적같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경숙의 소설은 어디서 무엇하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엔 나보다 잘난 사람들만 있다고 여기는 분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1. 정리 할 수 있다



   지난주에 큰 맘을 먹고 서재를 정리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눈앞에 쌓여있는 책과 뒤에 옆에 꽂혀진 책과 바로 읽어야 할 책, 가끔 들추어 보아야 할 책, 지금 읽고 있는 책, 그리고 오늘 도착한 책까지... 그때그때 마음속에서만 희미하게 분류된 책들을 다시 내가 정해놓은 위치에 잘 정리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책이 많아지면 자연 그 책에 대한 처분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러다보면 그만 어느 순간 큰 맘을 먹어야 하는 방대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는 읽어야지 했다가 그만 다음 책에 밀려 기회를 놓친 책들을 발견하고 그 책들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다는 것에 놀람을 너머 어떤 죄책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신간에 눈이 멀어 자꾸 책을 사들이는 것이 결코 질적인 독서를 향하는 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바로 한 달 전의 신간도 미처 다 덮지 못하고 또 다른 책을 기웃거리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분간 신간구입을 지양하고 눈앞에 쌓여진 책들만 읽어도 되겠다, 아니 이 책을 들추어는 보고서 다른 책에 눈을 돌리자, 그런 마음을 먹기가 무섭게 오늘 또 다른 신간이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책을 읽으려면 책을 사지 말아야 한다는 역설을 오늘도 깨닫는 중이다.

   책을 읽었다고 모두 리뷰를 쓰는 것은 아닌데 어쩌다가 좋았으면서도 리뷰를 쓰지 못한 책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앞으로 점점 더 작위적인, 의무적인 리뷰를 남기지 않을 작정이기에 올해 내 리뷰결심에서 이탈된 책들은 어쩐지 인연의 아쉬움이 더해지는 느낌이다. 리뷰를 작성해야 독서에 방점을 찍는 것은 아니지만 내 나름의 형평성에서 그렇지 못한 책들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리뷰를 남기지 못한다는 것이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 보았지만 그 이유도 여러 가지인 것 같아 오늘은 그 책들을 위한 변명을 정리하려 한다. 그렇게 책은 읽었다는 생색을 내고 또 책 읽었다는 말을 다 하지 못한 미안함과 퉁치고자 한다. 내 마음속의 서재엔 분명 ‘리뷰를 쓰고 싶었으나 다양한 이유로 쓰지 못한 책’이라는 칸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변명의 책꽂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2. 쓸 수 없었다


1. 풍경의 깊이 사람의 깊이 (최일남 / 문학의 문학)


...너무 오래 끌었다

이 책의 리뷰를 쓰지 못한 이유는 너무 오랫동안 붙잡았기 때문이다. 최일남 작가는 내 아버님 세대이시며 일제시대의 한국문학을 증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학원로이시다. 구사하는 글투자체가 요즘 작가들의 그것과 많이 달라 분명 찾아보면 한글인데 뜻을 알듯 말듯 한 단어가 부지기수였다. 나는 이 책의 두어 꼭지를 남겨두고 지난 몇 개월간 늘 간이 책꽂이에 꽂아 두었었는데 얼마 전 일독을 마쳤다. 그러면서 나는 완독하지 않았으면서 마음으로 이 책을 다 읽은 척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이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2. 방황의 기술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생각보다 어려웠다


툴툴거리며 황급히 40자 평으로 마무리한 책. 뭐니 뭐니 해도 생각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커피한잔을 마시며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딴에는 우아하게 고독을 즐기며 방황이라는 사치를 누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솔직히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진 처음 생각보다 어려우면 최초 선택을 향해 괜한 짜증이 밀려온다. 아마 이 책이 리뷰에 의무가 있는 책이었다면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책이 확실한데 나는 그냥 무수한 밑줄로만 이 책을 덮어 버렸다. 방황하는데 도움은 되지 못하지만 방황의 의미를 정리 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던가. 방황을 마치고 싶다면 썩 적절할 책이라 주장하고 싶다. 



3. 아이콘 (진중권 / 씨네21)

...기대가 너무 컸다

너무 큰 기대를 했기 때문에 그냥 비판하는 페이퍼로 대신했다. 내가 무슨 파워 블로거처럼 책의 판매상황에 영향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책의 출간초기 시점에 이런 비판용 페이퍼를 날리는 것은 초기 흥미유발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는 것은 실감한다. 진중권 고정 독자들은 상관없겠지만 적어도 정보가 없었던 두 세 명은 이 책에 혹시 했다가 마음을 접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리뷰를 써볼까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마음이 좀처럼 생기질 않았다. 혼자서 괜히 무언가 빚졌다는 느낌 때문인지 다시 좋은 말로 책을 포장할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고 부담으로 시작하는 글이 어떻게 끝이 날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리뷰까지 이어지는 것도 인연이 닿아야 가능한 것 같다.  



4.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박진.김남혁.장성규 / 자음과모음)

...끼어들 수가 없었다

띄엄띄엄 내가 읽고 싶은 부분을 먼저 골라서 읽다가 나중에 순서를 잃어버렸다. 이 책을 덮으면서 다시 한번 책은 목차대로 읽어야지 읽고 싶은 마음의 순서대로 넘겨서는 안 되겠구나는 생각을 했다. 여느 평론집보다 쉽고 젊은 평론가들이라 생각들이 진보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평론모음은 도대체 내가 덧붙일 말이 없더라는 것이다. 이런 류의 책을 한 번도 의무적으로 써본 적이 없는데 리뷰를 작성하기 곤란한 책 중에 당당히 추가하고 싶은 분야로 평론집을 들 수 있겠다. 그들이 대화 나누는 소재들 중 내가 읽은 책 정도가 끼어들 수 있는 여지인데 그냥 내가 이해하는 수준의 바닥만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5. 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 문학동네) 


...혼자 간직하고 싶었다

권여선이라는 작가에게 많은 감동을 받았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내가 느낀 것이 많을수록 리뷰를 잘 쓰지 않는 성향이 있다. 나는 내가 느끼지 않은 책, 내 결론이 없는 책은 리뷰를 쓰고 싶지도 않고 또 쓸 수도 없다고 여긴다. 그런데 너무 느낀(?) 책은 그걸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을 때도 있더라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 혼자 느끼고 세상에 떠들고 싶지 않다가 정확하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리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꼭 그 책이 감동적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여간, 이 소설집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 한다. 



6. 2011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박형서, 편혜영 외 / 작가)
 

...에너지가 딸렸다

이 책 역시 내가 관심 있는 작가의 소설을 먼저 읽어보다가 그만 초심을 놓쳐버린 책이다. 제일먼저 편혜영의 <서쪽으로 4센티미터>를 읽고는 섣부르게 이 책을 다 읽었다는 판단을 해버린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이 소설집은 현직 작가들이 선정하기 때문에 여느 문학상 수상집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어떤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소설을 엿보고 싶을 때 적절하다는 생각. 그래서 어떤 소설은 이게 뭐야, 이렇게 욕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보통 단편 모음인 소설집의 리뷰가 장편소설보다 에너지가 많이 투사되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이 책은 정리하기가 꽤 난해한 소설집이었다.

 

7.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 (박찬일 외 엮음, 박진호 사진 / 문학동네)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옛날 춘천을 기억하고 싶을 때 한 장 한 장 들추어 보려고 샀다가 리뷰를 쓰면 괜히 내 가슴만 더 아플 것 같아 그만 둔 책이다. 어떤 책의 리뷰를 쓰게 될 때 (책과 관련하여)필히 말할 수밖에 없는 사연들이 떠오르기 마련이고 또 그 사연을 말하지 않는다면 리뷰가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 막연히 예상하는 책들이 있다. 이 책의 리뷰를 쓴다하면 나는 필히 내가 체험한 춘천의 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아, 나는 리뷰를 포기했다. 대신, 소설에 한풀이 하듯 그 사연을 잘 포장해 사기를 쳤다. 아직도 나는 어디서 춘천이라는 소리가 들리면 이 책을 넘겨보며 사진 몇 장에 혼자 청승을 떨 때가 있다.


8.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최성일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능력이 되지 않았다
 
이런 책의 리뷰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임엔 틀림없다. 언젠가 그 방대함에 대한 존경만으로 페이퍼를 작성하고 한 달 동안 보기 좋게 거실에 비치했다가 그 막중한 무게감 때문에 자연스레 이 책이 서재로 밀려났다는 걸 얼마 전에 깨달았다. 가끔 인문학 리뷰를 쓸때 故최성일 작가가 정리해준 사상가들에 대한 견해를 컨닝하듯 먼저 읽어보고 생각을 정리한 적이 많았다. 혹시 있을까 해서 뒤져보면 역시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반갑고 위로가 되었는지. 리뷰어들에겐 하나의 사전 같은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소장의 목적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리뷰를 쓰지 못할 듯하다. 그래서 나는 평생 그에게 미안할 듯 하다.   

  

9. 중용, 인간의 맛 ( 도올 김용옥 / 통나무)

...겁을 먹었다 

나꼼수에 출연한 도올 선생의 항변에 설득당해 그만 덥썩 주문해 놓고선 근 한 달간을 잡고 있었다. 처음부터 리뷰를 써야겠다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은근한 깨우침은 여느 리뷰를 써놓은 인문학 책 보다 훨씬 컸다고 기억한다. 그때 가장 좋았던(?) 건 고어의 해설틈바구니 속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하던 '지랄한다', '환장한다' 같은 선생의 육두문자였다. 아무리 잊어보려 하여도 각장의 끄트머리엔 늘 귀결되던 한사람이 생각나 때마침 완공되던 4대강 사업은 더욱 이 책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유도했다고 본다. 하필 이 책을 덮었을 때 선생이 비판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사상에 대해 보수신문에서 인문학 강좌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플라톤은 이것과 저것의 '중간 상태'란 말을 쓴 적이 없고 '알맞은 정도'란 표현을 썼을 뿐이라며 그렇다면 '適度'(적도)란 말이 가장 적당하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나는 심적으로 거의 공황상태나 다름없었는데 이 책은 그러한 극단을 물리치는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3. 믿을 수 있다 


12월달은 읽으려 했다가 잊어먹거나 미루다가 놓친 책들을 집중적으로 재고처리 해야 할 듯하다. 물리학 전공한 지인이 <신의 궤도>를 읽고는 아는 사람만 이해하도록 썼더군, 하며 재미나다고 자랑을 했는데 나는 최근 <신의 궤도>를 읽다가 포기했다. 서사는 흥미로왔지만 과학의 틀은 할수 없이 나를 옥죄는 감옥이었다. 그런 식으로 포기한 책에 윤성희의 <구경꾼들>도 있다. 나도 어지간히 만연체의 문장을 사용하는 편인데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이 나에겐 사고의 확장이 아닌 어떤 환란으로 다가왔다. <신의 궤도>, <구경꾼들> 모두 그 책을 읽지도 않고서 미리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 말에 책임을 지려고 펼쳤다가 과감히 덮었다. 이 책을 다 읽지 않아 놓고는 나는 어쩌면 읽은 척을 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나는 그들을 해독하지 못했노라 기록한다.

   대신, 올 초 받은 천운영의 소설집 두 권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단편들이 소설을 공부하기 좋다는 누군가의 말대로 나는 지금 소설을 공부중이다. 소설을 쓰려면 소설 읽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 자신이 없다. 이 놈의 자신은 언제쯤 자신다와 질까. 자신이 있다는 말은 자기를 믿는 마음인데 나는 나를 믿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의심한다. 의심없이 그것은 나를 믿게하는 방법일 것이라 믿어본다. 그런 것을 대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말하는데, 나는 나를 믿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만 그러하다. 믿을수 있어야 한다에서 믿을수 있다로 이동하기 까지 몇년이 걸릴지... 그래도 그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끊임없이 집어들고 그러다가 포기하고 어쩌다가 운좋으면 느낌까지 정리하고. 다른 수를 좀 알아보고 싶은 12월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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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12-0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 없음은 그냥 그대로 두시고, 글은 계속 쓰세요.
그러다 보면 내가 글을 썼다는 사실이 자신없음을 좀먹어 버릴 때가 올겁니다.ㅋ
저 배명훈의 소설은 확실히 그럴 것 같아 사 볼 생각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요즘 젊은 작가들 포기했습니다.
따라갈 수도 없거니와
그들은 왠지 소통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들 같아서 말입니다.
이것도 편견이라면 편견일 수도 있는데
아무튼 요즘 젊은 작가들 소설 읽기가 겁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저에겐 옛날 작가나 고전이 더 빛나보이는가 봅니다.ㅋ

한사람 2011-12-06 11:52   좋아요 0 | URL

흑..제 맘을 잘 아시는군요 ㅠ
자신없으면 그냥 그대로 두라는 말씀에 가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신의 궤도>는 나중에 흥미가 다시 생길때를 기약했고,,
못읽었다고 자책하지 않으려구요.

쓰던 글이 있었는데..그냥 시작할까봐요.

고맙습니다^^ 늘~

맥거핀 2011-12-06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결산의 계절 12월이군요. (저도 한사람님 따라서 쓰고 싶었으나 못쓴 영화리뷰 결산이나 해볼까요;;) 개인적으로 위에 얘기하신 '작가'에서 나오는 저 시리즈를 좋아해요. 소설편도 그렇고, 영화도 나오는 걸로 아는데, 그것도 좋아하구요. 말씀하신대로 다른 수상작 시리즈들과는 다르게 나름의 똘끼(?)도 좀 있는 것 같고...아무튼 '쓸 수 없었다'는 사실은 하나인데, 이유는 제각각이군요.^^

한사람 2011-12-06 21:24   좋아요 0 | URL

예, 그렇게 따로 모아서 누락(?)된 것들을 정리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홀가분해지네요 ㅋㅋ
뒤늦게 한권 추가하기까지 했습니다..

언급하신 작가에서 나오는 책중에 영화시리즈 본 기억이 납니다.
전문가들끼리 선정하는 작품들이라 문제작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 걸 똘끼라고 하는 군요 ㅋ)

저도 이상하게 그런 책이 끌리더라구요, 하하

아이리시스 2011-12-0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똘끼,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는 소설비평인가요? 소설읽는 이유인가요? 요즘은 이런 책들에 끌려요. <신의 궤도>의 무엇이 아는 사람만 이해하도록! 인지 궁금해요. 과학?! 으흐흥. 과학. 그래도 전 반 정도 모르는 것들이 든 책은 오히려 지식의 갈구가 작동해서 더 좋더라고요. 내가 아는 뻔한 것만 이야기하는 인문서적이나 매번 같은 주제에 대해 말하는, 이를테면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귀결시키는, 문학보다도요. 다 못 본 책만 있어서 저야말로 불끈!

한사람 2011-12-07 08:39   좋아요 0 | URL

히히, 평론가들의 대담을 모은 책이어요. 같은 책인데도 평가는 상반되는 경우도 많고
각자 논리도 지극히 개인적일때도 있고 공감히 많이 가는 책이었는데..다 덮고 할말은 없더라는 것 ㅋ
어제도 소설에 관한 책을 하나 주문했는데 저 역시 소설이 아니라 소설을 말하는 책들이 더 눈에 가요
<신의 궤도>가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식으로 약간 불친절한 구석은 있어요.
이야기 자체는 지극히 소설적인데 배경이 거슬려요(신선해야 하는데.. 그냥 본능적으로 거부하나봐요 ㅠ)
<내 정원의 붉은 열매>와 <중용, 인간의 맛>은 적극 추천입니다^^


가연 2011-12-14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ㅎㅎ 쓸 수 없었다, 파트의 이유들이 너무 와닿네요. 특히나 너무 오래 끌었다.... 너무 오래 끌면 안되는 것 같아요. 책갈피처럼 끼워둔 생각은 그 페이지와 함께 이윽고 영영 빛이 바래버리더군요. 어떨 때는 거기에 끼워두었다는 것마저 잊어버리게 되니. 혼자 간직하고 싶은 것도 있구ㅋㅋ

한사람 2011-12-15 09:23   좋아요 0 | URL

하하, 또 오래 끄는 책이 몇권 더 있어요..
잡고 있는 시간이 길면 확실히 리뷰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요.
또 좋다고 생각되는 책은 리뷰를 잘써야지 하는 생각때문에 더 못쓰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구요.
마치 리뷰 남기는 책이 더 감명적으로 보여도 속으론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