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들, 하시죠?

나의 책동무, 글친구 님들...

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무더위와 장마가 오는군요.

빗소리를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촤르르 자동차 한대가 지나가면서 물소리를 뿌리고 가네요.

 

 

저는 요즘 좋은 문장에 대한 압박, 의미 있는 서평, 감동 주는 사연, 적절한 보상과 기쁨,

이런 것들과 아주 멀어진 채, 책과 글과 되도록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몸으로 하는 일에 익숙해진지 꽤 시간이 흐른 듯 합니다. 그래서 각 잡고 글을 쓰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책이라는 집안에 박혀 나오고 싶지 않았던 세월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것들이 있다면 세상에는 내가 읽는 책을 읽었거나 읽는 중이거나 앞으로 읽겠다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땐 1년에 단 한권의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살까 생각이 있는 사람들인가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심하다 여긴 사람들 중 한사람이 되어 일 년에 거의 손 꼽을 정도의 책을 사서 그중 또 기억나지 않을 만큼의 책만 읽으며

책 같은 건 개나줘라면서 스스로 책과의 이별을 지속시키곤 했습니다.

(다음의 책에 의하면 바빠서 책을 읽지 못하는게 아니라, 책을 읽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바쁘다 말하는거죠)

 

 

그러던 중 사람의 마음은 영원할 수 없으므로

갑자기 다시 서점을 기웃거리고 알라딘을 접속하다가 나도 모르게 장바구니를 클릭하고

몇시간 만에 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이 좋다며 지인에게 전달하는 제 모습을 보았어요.

누가 그랬던가. 어떤 여자 집에 갔는데 서재에 책 한권 없는 여자와는 섹스를 하지 말라고 유명한 작가가 그랬다죠.

집안에 책이 너무 많아 이사할 때 알라딘 중고 서점에 한 트럭 갖다주고 엿바꿔 먹듯 룰루랄라 한 게 다시 후회되네요.

 

 

그렇게 전달해준 책이 바로

<미움받을 용기>예요.

 

전에 같으면 밑줄 그은 구절들을 열심히 적어가며

그 문장들을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하고

나만의 또 다른 결론을 내고 하겠지만

글쎄, 이젠 그러고 싶지가 않네요. 그렇게 하고 싶어도 현재 제 수중엔 책이 없습니다.

이 책을 건네 받은 사람과 아까 통화를 했는데

다행히도 읽을 만하다(일년에 책 한권 안보는 사람입니다)는 군요.

 

이 책에서 가장 와 닿았던 내용은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 경험에 부여한 자신만의 의미가 결국 지금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자연스레 불교를 떠올렸어요.

 

 

우리가 인생을 심각하게 사는 이유는 바로 내 자신, 내 인생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잖아요.

토끼나 고양이처럼,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에 불과한데 인간만이 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왜 사나, 어떻게 사나, 죽을 때까지 고민하는 것. 일은 되도 하는 것이고 안 되면 다른 일을 하면 되는 것인데, 꼭 잘되어야 한다고 집착하는 것.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집착하고 앞으로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망상으로 오늘을 망치는 일상. 그런 오늘의 반복으로 뭣 때문에 일을 하고 허겁지겁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니는지도 모르는 채 일주일, 한 달, 한 계절, 일 년을 보내고 다음해에 나이 먹었다 한탄하는 습식.

 

 

늘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고 그때 거기나 다음 저기에 사는 우리들, 어쩌면 당신과 나를,

아주 아주 짜릿하게 돌아보게 하더군요.

저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스님의 책도 한권 주문했습니다.

그건 오늘 아침에 문자로 전달되어 온 법문 한 구절 때문이었어요.

 

평온한가요?

지금 마음이 평온한가요?

불편한 마음은 어디서 올까요?

관계에서 불편한 마음이 온다면 내려놓으세요.

나로 말미암아 마음이 불편하다면 미안하다 말하세요.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편안해집니다.

넓은 바다를 생각하세요.

나는 강물에 불과합니다.   <마음꽃을 줍다> 중에서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내 마음.

생겨났다 사라지는 그 어떠한 감정도 통과시켜버리면 그만인 것을.

 

 

공교롭게도 두 책이 인간관계를 말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역으로 우리가 인간이고 나 아닌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로인한 불편함과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할테죠.

 

 

비오는 금요일, 주말을 앞두고 지금 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책들이네요.

 

 

어느 드라마에선 더 미안한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하던데

그건 잘못된 거 아닐까요. 미안하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미안해서 보지 않는 것보다는

미안하니까 얼굴보며 그 미안함 전하는거,

 

 

그 쪽이 더 마음 편한 일이 아닐까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5-07-2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에 책이 없어도 열심히 읽은 사람은 다 알죠.
그런데 뉘앙스가 묘해요. 그렇다면 서재에 책이 그득하면
그 방면에 탁월한 건가요? 나 같은 사람은 어쩌라고...ㅋㅋ
저도 더위만 가시면 한 박스 정도 추려서 중고샵에 팔아버리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책읽는나무 2015-07-24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랑님!!
잘지내셨어요?^^
한 번씩 어찌 지내시나?궁금했었어요
책을 읽진 않았으되 그만큼 님의 마음을 빼앗는 즐거운일?이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님을 뵙게 되니 반갑네요
자주 뵈어요
무더위도 같이 이겨내자구요~~~♡
 

 

 

 

#1. 혼자 웃고 혼자 울기

 

 

스마트폰의 아침은 좋은 글귀의 향연이다.

 

언제부턴가 누군가 보내주는 명언과 책에서 인용된 글귀, 유명인사 및 멘토들의 충고, 부처님 말씀과 성경구절들이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고 멈출 수 없이 전달되고 있다. 사십대 이상 카톡 사용자들이 부지런히 퍼다 나르기 때문인지 어떤 날은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내용의 좋은 말을 여러 사람에게서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이 동영상이 될 때도 있고 찌라시가 될 때도 있고 대자보가 되는 날도 있다. 광고 메일로 날라든 문구나 컨텐츠가 다음 카페나 네이버 블로그로 옮겨진 후 유투브나 밴드게시판에 확산되고 한명의 링크가 그의 지인들로 확산되면서 대충 이삼일이면 우리 모두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지난 연말에 똑같은 크리스마스용 동영상과 좋은 말을 몇 개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서로 전혀 모르는 두 사람한테서 같은 내용을 받는 기분이 신기하면서도 한편 씁쓸했달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얼추 같은 하늘 아래서 거의 동시간대에 같은 내용을 공유하면서 살아가고 있기는 하는 것 같다. 문제는 같은 것을 보고 들었다고 그 공감의 양과 질이 같지는 않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부터 불특정 다수가 대상인 글과 그림들에 의지하게 된 과정이 새삼 쓸쓸하게 느껴진다. 나를 아는 누군가의 지적질과 충고는 불쾌하고 나를 모르는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는 공허하다. 대신 꼭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것 같은 법륜스님의 희망편지는 혼자서 웃고 울을 수 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안 좋아지려 할 무렵 날아든 이름 모를 시인의 넋두리는 조용한 명상이 된다. 나이 들면서 무조건 내 사연을 다 털어놓는다고 상대가 이해해주고 또 무언가 답해준다고 마냥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가기 때문일까.

 

어느덧 혼자 웃고 떠들고 우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해지는 것 같다. 안보는 것 같아도 다 돌려보고 안 읽는 것 같아도 다 챙겨 읽는, 혹시 좋은 말 중독자…… 는 아닐까. 아는 사람의 말과 목소리보다는 세상 누구에든 다 해당되는 더 큰 소리와 더 넓은 마음에 끄덕이고 눈감아주는 요즘을 살고 있다.

 

 

#2.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든

 

 

혼자서 웃고 울기 좋은 소설이다. 김연수의 이야기는.

 

이번 소설집엔 2008년부터 2013년까지의 단편 11개의 작품이 실려 있다. 소설집치고 많은 분량이다. 이중에는 2009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을 비롯해 전에 읽었던 작품도 더러 있었다. 그들 중 표제작이 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가장 감성적인 제목으로 읽혀서인지 행간에 흐르는 낭만성에 한참동안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다. 여전히 그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제목을 참 잘 짓는 작가이다. (이 칭찬이 소설 내용보다는 제목이 더 그럴싸하다 쯤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위해 또 얼마나 제목에 고민을 할 것인가, 작가는.)

 

작가의 단편엔 유난히도 한 사람의 인생을 화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자연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어온 사람들이 - 친척, 부모님, 오랜 친구, 스승 - 그 주인공으로 선택된다. 한 사람의 인생을 기억하고 들려주면서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그 시절의 역사와 에피소드를 불러올 수밖에 없고 나같이 동시대를 살았던 독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때의 시간과 공간에서 얼마간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읽은 김연수는 갖가지 아픈 사연들이 많았던 어르신들을 가까이서 듣고 보고 살아온 시간과 공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소설가로 살게 한 원천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작가의 동심은 순수와 순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당시 알수 없었던 곡절, 회한, 순정들에 대한 첫인상은 아니었을까.

 

 

맞아, 사랑의 줄행랑이었던 거지. 요즘 같으면 어디 파타고니아나 마케도니아 같은 곳으로 도망쳤을 텐데, 그때는 외국으로 나갈 수가 없었던 시절이니까 나름 갈수 있는 한 가장 먼 곳까지 간 셈이지. 그렇게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에서 바다 보면서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 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81p,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중에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화자의 이모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품안에서 들었던 빗소리이다. 이모는 병들어 남은 생을 자신과 함께해준 감독과 같이 들었던 빗소리를 평생 잊지 못했다. 작가는 ‘바로 어제 내린 비처럼 아직도 생생한, 하지만 이제는 영영 다시 들을 수 없는 그 빗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이모의 사연을 끌어들여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과 이별에의 보편적 낭만을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얼마나 들었는지, 그리고 왜 아직도 잊지 못하는지 작가는 누구에게나 그런 소리 하나쯤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듯보였다.

 

어찌 보면 청승맞아 보이는 엄마의 사연을 우리가 늘 별 생각 없이 지나치는 고속도로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나누는 누나와의 대화로 통과시켜버린 이야기,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쓸쓸한 샹송을 듣고 싶어지는 작품이었다.

 

그날, 차량이 거의 없던 일요일 새벽의 고속도로에서 큰누나가 끝내 내게 들려주지 못한 엄마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인생을 한 번만 더 살 수 있다면, 자기도 그 언니처럼, 마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사람처럼, 불어 노래도 부르고, 대학교 공부도 하고, 여러 번 연애도 하고, 멀리 외국도 마음껏 여행하고 싶다는 말, 그 말.        

-151p,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 중에서

 

 

'주쌩뚜디피니'는 ‘모든 게 끝났다는 걸 나는 안다’라는 노래 가사이다. 사랑은 떠나갔지만 한 번 더 사랑할 수 없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의 독백인 것이다. 인생도 두 번은 살수가 없어 살고나면 그걸로 끝이다. 작가가 두 번 살지 못한 엄마를 노래할 때 우리 역시도 두 번 살지 못할 걸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보다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한 세상 모든 엄마의 한번 뿐이었던 인생에 깊은 애도와 연민을 드리게 된다. 그러니까 모든게 끝난 것 같아도, 실은 끝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닌 것이다. 설령 끝났다해도 이렇게 끝났음을 나누고 퍼뜨리는 한 우리네 인생은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은 예상한 만큼 우울하고 예외없이 속절없다. 주인공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걸 보고 들은 나는 변함없이 이 자리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야기를 따라갔다 돌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할까. 그 시절과 그 사람과 그 장소는 이제 지나긴 한 시대의 슬픔, 혹은 그리움으로만 간직된다. 어쩌면 공허하고 텅 빈 심장을 채워주는 것들이 결국은 더 슬프고 아련한 기억 속 그리움들은 아닐까. 실제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든 자신은 아름다운 소설을 써야겠다는 작가의 말이 다시금 울려 퍼지는 시간이었다.

 

 

#3.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되었을 때

 

 

김연수의 감성에 이어 근래 대단히 인상 깊었던 소설을 하나 더 소개하려한다. <제 13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권여선의 <봄밤>이다. 수상작은 하성란의 <카레 온 더 보더>인데 나는 최종후보작인 권여선의 작품이 잊혀지질 않는다.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여름비처럼 청량했다면 권여선의 <봄밤>은 봄비처럼 처연하고 따스하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말하라 하면 신파나 통속의 범주에서 벗어날 여지가 하나도 없다. 각자 불치병에 걸린 남녀의 목숨보다 더 절절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밖에. 그런데 상투적인 신파와 진부한 통속을 뛰어넘은 세련된 문장과 예리한 시선, 삶의 이치를 통찰하는 작가의 넓은 포용력이(다른 근사한 말을 하고 싶지만 떠오르지 않음이 안타깝다) 그것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같은 병원에 있었던 사람들을 빌어 불치병 연인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리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영경은 여전히 수환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서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되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영경은 계속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다른 환자들의 병실 문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녔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140p, 권여선의 <봄밤> 중에서

 

두 권의 소설집을 덮으며 소설가는 사람들의 인생에서 증발된 어떤 것들을 끈질기게 찾고 발견해 낸 후 그 씨앗을 악착같이 품고 꽃과 열매를 가꾸어 어떻게든 다시 되돌려주고자 하는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 채우려 욕망할수록 채워지긴 커녕 비워지기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한편으론 끊임없이 무언가 사라지기 때문에 이야기는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어엿한 기쁨이 될 수 있는 듯하다. 인간의 영혼에도 질량불변의 법칙이 적용된다면 소설은 삶에서 빠져버린 무언가가 똑같은 무게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영원불멸의 물질, 혹은 그 이상은 아닐까.

 

비워진 만큼 다시 채우고 싶어질 때, 본능에 가까운 아깝기만 한 이 이야기들을 아낌없이 추천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이별의 계절

 

 

여름이 끝나갈 즈음 어떤 인간관계가 멀어질 때가 있다. 어느 날인가부터 더 이상 서로 열대야를 안주 삼을 필요가 없어질 때, 아침이면 제철을 맞아 떼 창을 해대던 매미들이 슬그머니 조용해질 때, 한 시간씩 해가 짧아지더니 마침내 하루가 짧아진 기분이 들 때, 바로 그때 여름 내내 연락하고 시시콜콜 안부를 묻던 누군가와 시들해지는 중은 아닐까.

 

지난 이십년 간 여름에 특히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여름을 사람에 기대며 여름을 견디는 사람은 아닐까, 청소를 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름과 가을이 뭐가 틀린 줄 알아?”

이렇게 묻고 나는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빛의 무게야.”

이렇게 답했다.

“더 단단해지고 건조해진 빛들이 내 눈엔 여름보다 선명하게 보여.”

“사람 눈이 여름보다 한 곳을 더 오래 응시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사람은 계절이 변하려고 할 때, 그때야 비로소 내가 지나온 계절을 곱씹어보거든.”

 

우리는 여름과 가을 사이를 이야기 했고 아직 가을이 오기 전에 서둘러 멀어졌다. 어떤 이와는 전화를 끊을 때 다시는 전화 할 일이 없겠구나 예감하듯, 또 어떤 이는 ‘잘가’ 라고 인사할 때 다시 볼일은 아주 멀겠구나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다시 볼 것 같지 않아도 문득 마주치게 되는 이가 있으니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야 말로 내 뜻과는 무관한 일이 아닐까. 이런 저런 경험에 의한 삶의 법칙들이 하나둘 쌓여 - 아니 쌓이는 줄도 모르던 그 어느 날 - 자신만의 패턴이 되었음을 발견하는 날이 있다. 오늘 아침 비로소 빈번하게 반복되는 여름마감 이별의 법칙을 발견하곤 그것에 순응하기로 결정했다. 공식을 알고 있으면 문제를 풀 수 없어도 두렵지 않은 것처럼 여름 이별은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2. 이별의 약속

 

 

<마지막 4중주>라는 영화를 보았다. 사람들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슬프지 않은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옴을 스스로 이해시키느라 오랜 시간 마음정리가 필요했다.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서 전혀 상관없는 영화를 보았지만 전에 일어난 일이 마음의 박동에 관여한 것이라 누군가 내게 이야기했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을 것이다. 나는 온전히 이 영화에 몰입했고 영화는 내가 잊고 있었던 슬픔을 가동시켰고 그것들은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아마도 이렇게 우겼을 것이다.

 

요즘 나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나이드는 것, 늙어가는 것, 그래서 잘 늙고 그것에도 만족하는 것이다. 은퇴라는 것은 저렇게 - 지금까지 행복하게 해왔습니다. 이제는 이 자리와 이 역할을 나보다 건강하고 총명한 젊은 사람에게 양보합니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 하는 것이 아름다움을 알고 있기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는 것이리. <설국열차>나 <감기>도 <숨바꼭질>도 좋았지만 어느 순간 자극적인 소재는 마치 음료수처럼 갈증만 유발하는 것 같다면 이 영화를 꼭 추천한다. 돌아와 OST를 찾아서 다시 들었다. 바로 지난주에 하루키책을 덮고 다자키 스쿠루가 들었던 라자르 베르만의 연주 리스트의 순례의 해를 하루 종일 들었는데 갑자기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을 듣고 또 들었다. 그들이 연주한 건 자신들의 인생이라기 보다는 모두의 인생에 기여하는 자기 역할은 아니었을까.

 

 

마지막 4중주  A Late Quartet, 2012 -

 

 

#3. 이별의 방식

 

 

 

“......거기서 벗어나 뭔가를 한다는 건 거의 생각할 수 없었어.”

“거기에 멋진 조화가 있었으니까?”

“거기 있으면 어쩐지 나 자신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부분이 된 듯한 느낌이 있었거든, 그건 다른 어떤 장소에서도 얻을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감각이었어.”

 

 

- p259,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영화 <마지막 4중주>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화가 등장하는데 한 개인이 전체의 일부분에 속해있다는 소속감, 일체감, 조화감이 주는 안정과 평화는 적어도 그 하나가 깨어지기 전까지는 아니 어쩌면 언젠간 깨어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소설을 덮고 한 참 지나 - 막상 그땐 별 감흥이 없었지만 - 나는 여름 내내 그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면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관계가 일방적으로 단절되었을 때 - 주로 내가 아닌 상대 혹은 타의 및 환경에 의해 - 그것을 견디는 힘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보다 잘 헤어지는 다시 말해 이별이 더 익숙한 그러니까 이별 후 상처에 덜 민감한 종류의 사람이 있다면 그의 내적자아는 어디서부터 단단해진 것일까.

 

제대로 이별하지 못하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가정 하에 나는 이 소설이 좋지 못한 이별을 한 주인공이 뒤늦게라도 좋은 이별을 하고 돌아와 비로소 단단해진 자신과 마주하는 여정으로 읽었다. 나는 이별의 방식도 습관이 된다고 믿는데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이별법은 하루라도 빨리 교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4. 이별의 대처

 

 

사람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거나 떠나버리곤 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일터이다. 모든 일상이 잠시 정지되고 더 이상 삶이라는 그릇에 아무것도 담으려 하지 않는다.

 

꼭 물리적인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아야 자폐공간에 숨어든 건 아닐테다. 어떤 사람은 방에서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집과 회사만으로 최소한의 동선을 유지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취미삼는 특정 모임 혹은 장소를 자폐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다니는 장소만 다니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것도 비슷한 심리에서 파생되는 증상이다. 불안하거나 위험요소를 피할 수 있는 사람, 해당 장소에서만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거의 24시간 잠을 잔다. 최소한의 기초대사량만 소모하겠다는 절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걸음걸이도 느려지고 말수가 줄어들며 행동반경은 최소화한다. 잠들지 않아도 누워서 눈을 감고 잠들고자 더 정확히는 깨어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슬픔을 감당하려면 일정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나는 그 슬픔의 무게에 압도되어 얼마간 항복해버린다. 그러니 이별한 후 내 자폐공간은 침대인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몸을 움직임으로써 마음을 조절한다고 하는데 나는 내 마음과 몸이 가장 일치하는 장소를 찾게 된다. 고통을 인식하고 슬픔, 분노, 원망과 화해할 용기가 일어 날 때 비로소 한발짝 내밀어 걷기라도 가능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오래 걸으면서 무언가를 떨쳐버리는 것도 가능했는데 이도 나이 들어서 그런 건지 일단은 드러눕는다.

 

어떤 방법이 되었건 좋게, 이해할 수 있게 이별하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 인연따라 만났다가 인연따라 헤어지는 것이니 슬퍼할 일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슬픔을 슬픔이 아니라 말할 수는 없다. 여러 번 이별을 겪었고 그때마다 슬픔을 잘 극복했다고 해서 다시 슬퍼질때 덜 슬퍼지지는 않는다. 외려 어떻게 슬프고 얼마나 견뎌야 할지를 알기 때문에 그 경험치 만큼의 플러스 알파가 더해지기까지 하는 게 나이듦의 서러움일 것이다. 다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렇게 죽을 것 같던 모든 이별도 결국은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 나는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모든 이별들이 새로운 이별들을 견디고 보내게 하는 아주 고마운 시간들. 그래서 여름과 이별하는 것도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닌 것이다.

 

 

애도 과정에서 내면에 통합되어야 할 것은 떠난 사람이나 그와의 추억만은 아니다. 애도과정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들도 의식속으로 통합해야 한다. 고통을 조절하고 슬픔과 화해해야 한다. 애도작업을 이행한 사람은 바로 그 과정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거나 사망한 후 훨씬 의미가 풍부해지고 역량이 커진다. 내면화, 통합이 영원한 성장법임을 알고 적극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 <좋은 이별>, 김형경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3-08-25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도록 사랑스레 사귄 이들과 즐겁게 놀고 나면
즐겁게 헤어지고, 다시 즐겁게 만날 날을 기다릴 수 있어요.
가을이 다가오는 소리도 즐거이 누리시기를 빌어요.

2013-08-25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물선 2013-08-30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다른 곳에 살았지만, 같은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군^^*
다자끼 스꾸루와 마지막 4중주.

당신에게 여름과 함께 이별한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가을과 함께 다시 만난 사람으로 해주라~

각자의 자리겠지만,
잘 지내자, 우리~
 

 

 

 

 

가끔 대책 없이 오랜 세월 한 사람만을 사랑해온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데 주변에서 보기엔 그 대상이 그렇게까지 인생 전체를 걸만큼은 아닌 것으로 보일 때가 있다. 외려 그 한 사람에게 인생 전체를 걸었던 사람이 더 아까울 정도로 능력 있고 모자랄 것이 없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어도 좋을 대상이 너무나 훌륭하고 완벽해서 라기 보다는 목숨 거는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다른 무엇과 바꾸지 않겠다는 아집의 문제인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집착과 갈망은 곧 그 사람을 바라보는 자신에 대한 욕망이라 생각한다. 내가 느낀 내 사랑을 얻어내고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의지는 실은 대상의 소중함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세월이 지나면 환경과 조건이 변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변하게 될 수밖에 없다. 변한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까닭이다. 어느 시절이건 왜 그래야 했는지 이유를 먼저 따지고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그저 세상이 사람이 원래 이런 것이라 받아들이는 편이 더 지혜로와 보인다.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세월 지나면 절대 머물러 있지 않는다. 단지 소중하게 여긴 내 마음을 기억하고 오래 저장해 두었기에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흐르는 강물을 손에 움켜쥐어 봤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과거를 거슬러 시간과 공간, 상황을 그때 수준으로 복원하면 사람과 사랑까지 다시 되찾을 줄 착각하고 사는 사람이 간혹 있다. ‘되찾고 싶다’와 ‘되찾아야 한다’가 목숨만큼 절실하다고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아마 지난 5월말 <위대한 개츠비>를 영화로 보고 난 후였던 것 같다. 그런데 글은 두어 달이 지난 다음에야 쓰는구나...

 

 

 

책만 읽고 글만 쓰던 생활패턴이 바뀐 지 오래다.

 

 

독서와 글쓰기에도 근력이라는 게 있어 매일 습관붙이지 않으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 나는 책과 글을 멀리 하면서 매우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온라인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다보니 온라인에서의 관심사에서 자연스레 멀어져 갔다. 알라딘을 알고 여기서 희노애락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이 ‘이름이 뭐예요?’ 하듯 모르는 사람에겐 전혀 몰라도 될 일이라는 당연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하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다들 더 바쁘고 더 소통하고 현명하게 사는 것 같아도 들여다보면 더 멍청하고 더 외롭고 정신없이 산다는 걸 깨닫고 있다. 소통의 홍수는 반드시 불통의 씨앗이 된다. 즉각적인 반응은 잦은 실수와 무례를 부른다. 하루하루 누구와 무엇을 주고받는지 모르게 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이것이 쌓이다 보니 요즘은 어딜 가도 누구를 만나도 다들 서로가 아닌 전화기 화면만 쳐다본다. 서로가 다들 문제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그렇게 살아간다. 궁금한 건 바로 해결되고 처리도 빨라 참 편리한 세상인데 사람 마음, 그 마음 하나는 어쩐지 더 허무해지고 텅 비어간다.

 

 

채울수록 허탈해지고 비울수록 마음이 채워짐을 잘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또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 하루를 나선다. 벌써 주문한지 몇 주가 지났는데도 아직 반도 못 읽은 책들이다. 아무런 편견이나 어떠한 부담없이 그저 소설 읽는 재미를 느끼기 위해 재미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중이다. 처음엔 제목이 웃기다 생각했는데... 그 의미 역시 알아가는 중이다.

 

이번 주말엔 꼭...

 

장마가 지나고 한 여름이 시작되려한다. 매미가 우렁차게 울어대는 걸 보니 여름은 여름인가보다. 모두 저마다 자기 갈 길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 뿐이므로 왜 그러냐 묻지 말기로.

 

 

 

 

 

 

 

 

 

 

 

 

 

 

 

천천히 답하고

좀 시간을 두었다가 결정해도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3-07-26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읽은 두권이라 반갑네요^^
더 멍청하고, 더 외롭고, 더 정신없이 살게하는 스마트폰!
최소한 휴가때는 스마트폰을 멀리하려고 생각중입니다.

숲노래 2013-07-2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남 깊은 시골에서는 한창 한여름이었지만
서울 경기 강원 수도권은 이제 좀
장마가 걷히면서
후끈후끈 한여름이 되는구나 싶어요.

땀 뻘뻘 즐겁게 흘리면서
시원하고 재미난 하루하루 누리셔요

2013-07-26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그러냐 묻지 말기로~" ㅎ
 

 

 

글쎄,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저는 정치인 유시민은 별로였지만 글쟁이 유시민은 좋아졌습니다.

 

 

사실 유시민은 변한 게 없지만 제 마음이 변한 것이겠죠. 제 마음이 변하게 만든 것은 바로 유시민의 개인적인 고백, 말하지 않았던 가족사,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심경 등입니다. 저는 몰랐던 유시민의 한 부분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한 것이고 그것들은 현재 유사한 고민을 하고 있던 제 마음에 천천히 밀착되어 앞으로 이 사람이 정말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아가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였습니다.

 

 

저는 유난히도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화두에 자석처럼 끌립니다. 누군가 지금 하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이 무어냐 물으면 늘 습관처럼 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언제부터 머리와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는지 헤아려 보면 대충 6,7년 정도는 된 듯합니다. 이런 질문에 심각하게 봉착하게 되는 계기는 아마도 그동안의 삶에 대해 깊은 성찰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일 테고 그러한 시간은 무엇이 계기가 되었든 언젠가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지금까지 혹시 잘못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자괴감에 빠지는 순간일 것입니다. 다시는 지금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 뼈저리게 자각하는 순간 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는 어쩔 수 없이 또 그렇다면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와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름대로 마음속 유언을 차분히 정리하게 되어 있죠. ‘어떻게 살 것인가’는 결국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음으로써 남은 삶을 마감할 것인가의 준말인 것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저는 왜 이리 허무하고 서글픈지 모르겠습니다. 그 추운 겨울을 잘도 견디었는데 막상 기다렸던 봄이 오자 변한 건 아무것도 없으며 꽃은 피었다가 다시 질 것이라는 자연의 이치만 분명해질 뿐입니다. 지금, 여기 오늘 내가 사는 이곳에서 감사와 기쁨을 느끼며 내가 마주한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고 내가 당면한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스님이든 교수든 이제는 멘토식 멘트의 정석이 되어버린 말들이 왜 이리 진부하고 지루해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참.

 

 

어쩌면 이미 답도 잘 알면서 그새 다른 말들, 다른 생각, 다른 글들이 그리워 여기 기웃, 저기 들락거리는 건 아니었을까요. 어디 공허하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지적이고, 너무 잘난 척 하지 않으면서 감동도 있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가끔은 이상을 염원하는, 그래서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는 않아 마지막 한 장을 덮고 나면 뭐야? 가 아닌, 음... 하며 천천히 무언가 채워지는 듯한 그런 책이 없을까... 하던 차에 이 책을 만났네요. 책도 인연이 되어야 펼칠 수 있고 덮을 수 있습니다.

 

 

요즘 출판계에는 오십대가 쓴 오십대 이야기가 주목을 받고 있다죠. 주변에 오십대가 많아서 그런지 유시민도 오십대 중반이라서 그런지 이 책 역시 오십대가 전하는 깨달음의 메시지로 읽혔습니다. 저자는 시종일관 원래의 나, 내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다가가는 삶, 궁극에 내가 원하는 삶을 나답게 살고 싶다고 외칩니다. 그런 생각이 지금 가장 화두인 이유는 그동안 그렇게 살지 못했기 때문은...아닐까요. 그는 왜 원하지도 않는 삶을 그토록 치열하게 살은 것인지... 그런데 가만 보면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왔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 ‘운동movement'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학생운동에 청년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 정치운동까지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때가 없었다.

 

 

그는 말합니다. '하고 싶다’는 욕망보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이끌려 사는 인생으로 살았고 그러면서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고요. 결국 자신은 ‘중요한 인물’이니까 ‘훌륭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겠죠. 얄밉게도 저 위에 올라간 본 사람들은 내려온 후 꼭 그렇게 말하더군요.

 

 

- 나는 정치의 일상이 요구하는 비루함을 참고 견디는 삶에서 벗어나 일상이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 ...나는 직업정치를 떠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해방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또 다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이 이제 다시는 정치인으로 살지 않겠다로 들리진 않았어요. 정치인이 되기는 싫었지만 국민의 염원 때문에 그 거대한 바램을 거스를 수 없어 정치인을 하기로 결심한 안철수를 보면은요. 중요한 건 그가 정치를 다시 하건 안하건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진심은 물씬 전해진 게 아닐까, 저는 그러네요.

 

 

 

- 그런데 아무리 잘 살아도 죽지 않을 도리는 없다. 사형 집행일과 집행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살아 있는 인간은 모두 사형수라고 할 수 있다.

 

 

나이 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자살을 제외하면) 누구든 죽음의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얼마든지 좋은 죽음, 바라는 죽음은 상상하고 염원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글 속에서 유난히도 인격적 존엄, 인생의 품격을 주장합니다. 왜 자살하지 않는지 카뮈의 질문을 빌어 여러 번 묻고 답해보자 부추깁니다. 알고 보면 이 풍진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도 자살할 이유가 없어 자살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죽을 만큼의 이유는 곧 살만큼의 이유와 같다고 느낍니다.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살아갈 것인가는 개인의 의지이고 선택입니다. 만약 십 분후 추락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면 그 남은 십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정치말고 더 좋은 일을 하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 참 많은 사람을 사랑했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물이 조금 났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만약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마지막 십 분을 허락받는다면 나는 그 십 분을 그렇게 눈을 감은 채 보낼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사랑의 감정을 되살리면서, 그것이 주는 행복한 느낌을 음미하면서 마지막 순간을 맞는 것이다.

 

 

이 책에서 모르는 뜻, 이해 안 되는 문장, 난해한 표현 같은 건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정치인 유시민의 삶에 대해 많은 회의감을 가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처음엔 세간의 평가를 의식하면서 정치적 행보를 이어 온 분이라 이 책 역시 이제 이런 글을 쓸 만한 적당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의 글을 책으로 펼쳤구나, 이런 편견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진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글이면서 또 가장 크게 감동 느끼는 것도 글이잖아요. 독자가 원하는 글을 원하는 방식대로 세상에 내놓는 것은 어려운 일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책 덮은 후엔 제 선입견이 부끄러워 졌어요.

 

 

저자는 정치로 마모된 인간성, 소모된 인격을 채우는 일은 역시 글쓰기였고 앞으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나 글 쓰는 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소설같은 문학작품에도 도전한다면 어떨까...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이 책은 독자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많은 위로와 힘이 되었을 듯 합니다.

 

 

꽃구경 가려던 마음을 비 때문이라며 핑계를 실컷 할 수 있는 주말입니다. 통계적으로 3,4월에 가장 많은 자살 시도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우울증이 활발해지는 계절인가 봅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고 하는데 봄비를 느끼며 죽음을 준비해 보는 시간은 어떨까요. 애통함을 덜 남기고 마지막 순간 자기 인생에 후회가 없으려면 제대로 삶을 살아야 할테니까요. 왜 자살하지 않는지, 남 몰래 목록을 적어보는 건 어떨까요. 아주 옛날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를 수첩에 적어보다 그 수가 터무니 없이 적은 것에 한숨을 쉰 적이 있답니다. 지금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아마도 우리를 더 살게 하는 삶의 기쁨이자 행복일 거예요. 사실 따져보면 여러 좋은 장점 때문에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이 기쁜 요소들이 많아서 행복이 큰 것은 아니지요. 남들이 보기엔 너무나 하찮고 별 볼일 없는 이유일지라도 내가 행복해 하는 그 하나만 있다면 우린 오늘도 내일도 행복할 수 있는 거니까요.

 

 

 

유시민의 텍스트가 빡빡하게 느껴진다면 이런 책도 있더군요. 요즘 스님들의 서적이 어엿한 장르가 된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부터 스님 책들에 마음이 끌립니다. 삶과 수행이 일치하는 분들의 가르침은 언제고 환영입니다.

 

이 책의 화두 역시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거든요. 밤에 잠들기 전 차분한 마음으로 몇 페이지 읽고 덮기에 좋습니다.

 

이 분의 말씀 중에 '생각이나 말이나 글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사실과 진실, 실재의 내용과 모습을 확인하는 삶'이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며칠전 친구와 아무일도 없었는데 그저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말과 문자로 언쟁이 오간 적이 있었기에... 저로선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것 같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느낌을 전하는 것도 글이므로 글의 필요성이나 효용성에 의문을 가지자는 건 아니구요. 다만 자신이 내뱉은 말이라고 자기가 쓴 글, 자기 머리에서 든 생각이라고 그것이 내것이며 마치 내 자아를 대변하는 양 그것에 끄달리며 살아가는 것의 어리석음을 의미한다고 여깁니다..불교에선 무아와 무상만이 깨달음의 지혜라 주장하니까요.

 

 

며칠 전 ‘지아이조 2’- 이병헌이 주연이던걸요? -를 보고 나오면서 시집 모음집을 하나 샀는데 온라인에서 봤으면 구입하지 않았겠지만 시집들 속에서 상대적 경쟁력을 가지고 제 손에 들어와 잡혀버린 책입니다.

 

저는 요즘 시들이 너무 어려워서... 이렇게 한편 씩 해설이 깃들여진 글들이 좋더군요.. 시 선택의 기준은 완전히 저자의 마음입니다. 제가 어떤 기준을 가질 수준이 안되기 때문에 그냥 믿어보고 의지하는 것이죠.

 

 

 

 

 

 

 

 

 

오랜만에 주말에 글을 써 봅니다. 예상대로 비가 많아 머리도 가슴도 촉촉함을 유지하기 그만이네요. 이렇게 촉촉할 수 있는 봄이 아직도 충분히 남았는데 어찌, 자살할 수 있겠어요. 모든 자살을 떠올리는 젊은이들이 이 봄은 화려한 색색의 꽃들만 사는 게 아니라 색도 향도 없는 바람도 비도 가끔은 눈까지도 삶을 기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는 모든 당신들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3-04-0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촉촉한 비가 오며 이제 사월 꽃들 깨어나라고 재촉하는구나 싶어요.
이제부터 모과꽃도 뽕꽃도 감꽃도 피어나겠구나 싶어요.
고운 삼월 지나
어여쁜 사월 다가옵니다.

채소가몸에좋아 2013-04-0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실성 있고 좋은 글 너무도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