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 Ⅱ
돈 드릴로 지음, 유정완 옮김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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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에 서다

솔직히, 책을 덮었을 때 돈 드릴로라는 작가가 미국문학을 대표한다는 천편일률적인 평가에 절대수긍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설의 의미와 작가의 역할을 시종일관 집요하게 질문하는 소설이다. 대량생산된 군중과 대량복제된 이미지속에서 개인의 미래를 끝내 탐색하게 하는 소설이다. 가장 신랄하게 미국이 잘 소화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누군가 해야 한다면 꼭 미국이 제기해야 할 안건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더 집단적인 대중을 확보하고 있는 미국의 성찰은 같은 모델을 적용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대중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의 미래가 꼭 미국이라 말할 순 없을 지라도 미국의 과거는 우리의 오늘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소재상으로 한국이 등장하고 중국이 주요 매개가 되고 있어 우린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객관성을 배제하기 힘든 이러한 미국소설을 진지하게 스캐닝해야 할 필요성에 절대 외면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하여, 상당부분 나는 이 작품을 더 많은 독자들이 집어 들어야 할 이유를 말하고 설득하는데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 그것은 책을 덮고 나서 더 분명해진 깨달음이기도 했는데 다가올 삶을 준비하는 방식이 분명 책이라는 매체와 소설이라는 서사와 무관하지 않은 독자는 이렇듯 논쟁의 주제가 분명한 작품이 퍽이나 반가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소설쓰는 작가가 군중속으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똑똑히 목격하고 난 후여야 한다는 충고를 드리고 싶다. 더불어, 나는 이 작품이 20년 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들릴 정도로 전혀 시간적 괴리를 느낄 수 없었던 시간에 스스로 대견함도 알리고자 한다. 미국이라면 분명 이런 문제를 직시해야 할 것이고 미국작가라면 당연 이런 소설을 써야 할 것이기에 본연의 숙명적인 임무를 잘 수행해 낸 작가에게도 위대함의 박수를 전한다. 비록 독자인 나는 이 작품에서 테러집단에 버금가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는 군중의 나라의 개인일지라도.

내 경우, 먼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앤디 워홀(1928-1987)과 '마오 시리즈'를 짚고 넘어 가야했다. 작가는 책에서 이미지에 지배당하는 군중의 자화상을 '마오Ⅱ'라는 앤디 워홀의 작품으로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은 중국인들에게 신앙과도 같았던 마오 쩌뚱의 초상화를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였다. 지난해 화제를 뿌리며 종영한 어느 드라마에서도 한류가수의 대형 초상화를 앤디 워홀 풍으로 제작하여 화이트 벽에 전시해 놓은 장면을 기억한다. 이제 유명인을 시각적으로 광고, 홍보하는데 앤디 워홀의 그림은 하나의 공식처럼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앤디 워홀은 마를린 먼로, 마이클 잭슨과 같은 유명인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철저하게 그들의 내면과 개성은 배제하면서 오로지 이미지의 강렬함으로서만 대중을 장악하는 예술가였다. 오늘날 워홀이 유포시킨 독창적인 방식의 복제는 어디에든 만연된 이유로 그 신선함은 잃었지만 독자적인 상징성만은 고유한 상품성의 가치로 남아 하나의 대중예술이 되었다. 물론 이 작품이 출간된 후 이십년 동안 한국에선 시간의 양만큼 워홀이 대량으로 복제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테러의 빈도도 워홀의 작품과 정확하게 비례하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테러가 증가한다고 해서 작가들이 사라지지 않았고 소설이 의미를 잃지 않았다는 것,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신하는 시대가 왔다 해도 디지털이 필름을 앞지르는 시대가 왔다 해도 누군가는 변함없이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시절 작가는 매체의 발달이 컨텐츠의 질적 저하를 가져온다고 대중과의 소통이 작가의 의식을 파괴한다고 시대를 통탄했을지 모르지만 그 후로 이십년, 작가들이 울고 있을 많은 시간동안 독자들도 의식있는 군중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십년 전 작가는 무한히 복제되는 워홀의 미술세계를 미국의 자본주의 상업주의, 대중예술을 반사하는 상징적 거울로 보았던 듯하다. 워홀은 바로 자신의 예술을 '세상의 거울'이라고도 말했는데 돈 드릴로의 소설은 당시 '미국의 거울'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마침 지금 이 작품을 마주한 한국의 독자들은 작가가 생산한 특수한 거울에 보다 복잡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비추어 보느라 어쩐지 힘겹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먼저, 소설의 제목이 된 『마오Ⅱ』는 마오 쩌뚱의 얼굴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작품이면서 스콧이 캐런에게 준 그림이기도 하다. 스콧은 물론 뉴욕의 어느 미술관에서 연필 데생 그림 복제품을 구입하고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캐런에게 큰 의미없이 가볍게 건넨 상품에 불과했을 것이다. 즉, 이때 스콧이 선물한 것은 예술품으로서의 미술작품이 아니라 캐런이 가진 믿음(통일교)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그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심볼로서의 악세사리였을 터이다. 책에선 이렇게 '마오Ⅱ'를 비롯해 심심찮게 미술작품이 등장한다. 한창 미국출장을 많이 다닐 때 나는 뮤지엄 샵에서 현란한 기념품을 구경하느라 정작 본 전시보다 시간을 많이 빼앗기곤 했는데 기념품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지 않았던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워싱턴은 주로 미국의 대통령을, LA는 영화배우를 프린팅하여 기념품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샌프란시스코 모마(MOMA)에서는 특이하게도 '체 게바라'의 우산과 달력이 대세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뉴욕에선 어딜가나 줄기차게 복제된 '자유의 여신상' 아니면 전 제품에 로고처럼 새겨진 'I ♥ NY'가 전부였다. 뉴욕은 고집스럽게도 누구의 뉴욕이거나 무엇의 뉴욕이 아니라 뉴욕 그 자체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뉴욕에선 기념품을 사오지 않았던 것일까. 대신, 비록 쌍둥이 빌딩이 사라지고 난 후였지만 엠파이어 빌딩 꼭대기에서 바라본 뉴욕의 야경은 미치도록 압도적이었고 미국의 살아있는 심장을 현미경으로 투시해 보는 듯 소름끼치도록 공포스러웠던 기억, 그것은 아마도 마오나 고르비, 케네디를 추종하는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포괄하고 담아내는 이데올로기와 예술을 초월한 일종의 메타 스페이스로서의 잔상(殘像)이었다. 중요한건 하늘높이 솟아오른 빌딩들의 화려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것들이 한데모여 총체적인 권력으로 남겨진 개념이었다. 그러한 뉴욕의 야경위엔 분명 세뇌된 '자유의 여신상'과 문자로 인식된 'I ♥ NY'의 구호도 오버랩되어 대중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은연중에 유포했던 것은 아닐까. 작가는 아마도 이미지 생산자에 의해 이데올로기를 지배 당하는 군중의 입장을 쉽게 예로 들기 위해 마오를 선택한 듯하다. 여기서 제목이 굳이 『마오』나『마오Ⅰ』이 아닌『마오Ⅱ』인 것은 이 작품이 시리즈 연작인 것을 상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오라고 모드가 하나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에 말이다. 바로 이렇게 여러 형태로 변형된 다양한 모드의 결과물들 중 순서에 상관없이(랜덤하게) 하나에 불과하다는 이 대안성(alternative)이 가지는 의미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작품이 아니라 기계로 대량 찍어낸 복제품으로서의 이미지를 재차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만의 것이 아닌 누구나의 것인 그러므로 개인이 아닌 군중의 것인.

또 하나, 표면적인 이미지로서의 마오는 분명 시각적 장르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소설가와 극명하게 대치되는 테러집단이 다름아닌 마오주의를 신봉하는 조직으로 등장함에 있어 작가는 마오의 의미를 다층화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테러집단은 모든 역사를 초월한 모델, 절대적 존재의 형상으로서 마오의 사상을 추종하는 조직이므로 '마오Ⅱ'는 수많은 마오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조직들 중 하나의 이름일 수도 강령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책에서 '마오Ⅱ'라는 작품은 마오의 얼굴을 담은 것일 뿐 담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마오의 사진인지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인지 그림을 다시 인쇄한 것인지 인쇄물을 복사한 것인지 심지어는 마오의 어록인지 그 경계를 구분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으로 느껴졌다. 결과로서의 이미지만 중요한 것이지 그를 만들어 내는 제작과정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로 작가를 찍는다는 브리타에겐 그녀가 찍어 왔고 찍고 있고 앞으로 찍을 유명인의 사진이 곧 '마오Ⅱ'라는 작품명으로 환유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즉, 그녀가 어렵사리 찍은 은둔작가 빌의 사진도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메시아처럼 다시 나타나서 권능을 재생시키는 위대한 지도자 마오쩌뚱'의 사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기에 '마오Ⅱ'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오가 자신의 복귀를 알리고 활력을 과시하고 혁명을 고양시키기 위해 사진을 이용했다면 빌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부고의 매체로 사진을 이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본다면 '마오Ⅱ'는 빌의 생전 마지막을 담은 사진의 가칭 제목임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이는 소설속 인물들이 모두 마오의 초상화와 무관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림 한 장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서사의 지배력이 새삼 놀라웠다. 결국 이 작품에서 '마오Ⅱ'는 하나의 미술품으로 시작해 일상의 상품으로 조직의 이데올로기로서 소식을 알리는 매체로서 다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작가가 새롭게 제시한 개념예술의 정당한 작품의 하나로 '마오Ⅱ'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거울, 속에 비추다

내게 이 작품은 시종일관 '이미지'에 대한 연상 작업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상에 존재하던 생명체가 차차 기형적인 외상과 기능을 획득한 후 사람들에게 자주 포착되기 시작,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 '이미지'라는 괴물에 대한 탐사 다큐멘타리를 일절의 나레이션없이 영상으로만 관람한 기분이었달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일은 한적한 갤러리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그림을 혼자서 관람하는 발걸음과도 같았고 때론 흡사 뉴요커라도 되어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진 전시회를 많은 인파속에서 흘끗흘끗 둘러보고 빠져나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혼자이든 함께이든 어느 경우에나 텍스트를 만나며 떠올려지는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나서는 이토록 혼란스런 잔상들로 머리가 개운하지 않았던 기억을 찾기 어려웠다. 아마도 소설의 서사는 이미지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사유와 통찰을 이끄는 것이었기에 무겁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나의 잔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서 다음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는 식으로 이어져 끝까지 잔상효과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건 살면서 한번쯤은 내가 보아온 이미지이거나 보게 될 이미지라는 생각이 많았기 때문일까. 이러한 잔상효과는 줄거리가 시간상으로 얽혀서 전개된다기 보다 작가가 생산하는 이미지에 사람들이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점묘효과의 연출로 이해되었다. 이야기는 어느 시점, 특정 공간에서 밀도를 이루다가 불현듯 이동하여 다른 시점, 다른 공간에서 집중되는 구성상 반복의 특징은 자칫 서사에 클라이막스가 없어보일 수도 있었지만 같은 이유로 종결부가 절정에 이르며 감정을 터뜨리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의 마지막은 반전이자 환희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릎을 탁 치며 한숨소리를 내었던 건 바로 마지막 카메라의 플래시(flash)였다. 잔잔한 작품만 확인하다 출구직전에 걸음을 멈춘 나는 오래도록 눈을 감았다. 작가는 '이미지'라는 괴물에 대한 서사를 잔상효과로 마무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괴물에 대한 반응은 물론 내몫 이었지만 그 순간 리액션이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내 스스로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절망도 희망도 아닌 잠시멈춤의 표지판 앞에서 나는 당황스럽기 까지 했다. 교수님의 강의는 줄곧 들어왔지만 시험문제지 앞에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심정이었달까. 소설속 인물들은 이 마지막 반전을 위해 끊임없이 이미지를 바통 터치해온 듯했고 마침내 바통은 내게로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제 바통을 손에 쥔 채 어디로 향할 지는 순전 내 판단이 기준이 되는 것이었다. 작가가 원한 것은 방향성을 잃고 흠칫 놀란 이런 내 모습이었을까. 그동안 군중이었던 나는 개인으로 돌아와 있었고 자신의 작품에 비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라는 그의 메시지는 어쩌면 독자를 향한 소설속 테러였는지도 모르겠다.

테러가 두려운 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그 대상이 정작 정치 종교와는 무고한 시민이자 무작위로 선출된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갓난아이를 포함한 여성, 노약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버스나 지하철, 비행기 등의 교통수단, 관청이나 백화점, 호텔, 관광지등의 불특정 장소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속된 말로 재수 없으면 여름휴가지 나이트 클럽에서도 목적지를 향하던 버스 안에서도 폭탄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다소 운명적인 자조성의 두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너무 막대하여 오히려 무감해지는 경향이 있으며 노력과는 상관없다는 무력감을 유발한다.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하여도 상대방이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 온다면 재수없게 충돌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운명은 내게 해당된 것만은 아니라는 안일함에 나머지 희망을 걸 수 밖에 없는 것이 테러의 본질인 것이다. 즉, 테러는 군중을 향하지만 오히려 군중속에 있을 때라야 안전을 느끼는 모순은 이 작품을 덮으며 서글프게 깨닫게 된 진실이기도 했다. 이 군중속 평화는 이번 소설을 대하는 그것과도 다르지 않았다. 책을 펼쳐들고 페이지를 넘겨갈 땐 일반대중으로서 엇비슷한 감성의 연대를 이루다가도 책을 덮고 돌아와 앉아보니 문득 외로운 것이다. 독자 개인의 위치로 돌아오니 작가의 질문에 선뜻 답하기 두려워지는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혹시 어쩌다가 '나' 일 수도 있겠지만 설마 '나' 이지는 않길 바라는 그 유약하고도 소극적인 비겁함을 자신이 생산한 거울에 비추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것은 운좋게 ‘나’ 이지 않을 때 무심히 외면하는 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지 하고 말이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마지막 순간 이미지로 찍힌 건 바로 군중에서 개인으로 귀환한 우리네 두려움과 무관심의 두 얼굴은 아니었을까. 그의 마지막 플래시(조명)는 일순 플래시효과(잔상)를 유도하며 독자들을 플래시(반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돈 드릴로식의 뉴스이자 속보로서의 플래시(섬광)가 아니었을지.

거울, 그가 삼킨 것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군중을 바라보고 군중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이지만 개인으로 돌아온 후 끊임없이 독자를 개인이라는 같은 입장으로 소환하고 있다. 뉴욕이라는 거대 군중의 장소에 모인 캐런, 스콧, 빌, 브리타 이들이 제시한 소환용 미끼는 물론, ‘이미지’라는 괴물이었다.

제일 처음 등장한 캐런은 ‘이미지’에 신앙을 부여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외양상으로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집단결혼식을 하며 스펙타클한 군중으로 등장하지만 실은 50개국에서 모인 젊은이 6,500쌍의 군중들 중 한명으로 스쳐가는 이미지의 파편에 불과하다. 13,000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장난감 세계의 조직원이 된 것 일뿐이기에. 그녀는 인종, 성별, 이름이 문제가 되지 않는 우주나 달에서 조망하는 통일적인 시각을 추종하며 통일교의 교주인 문선명을 ‘문(moon, 月)’이라는 이미지로 숭배한다. 이 때 결혼은 공동체(군중)로 살아남는 것이 미래라 여기는 그녀에게 자신의 生을 던져 영속할 수 있는 의식적 행사이자 구원의 자격일 것이다. 작가가 제시한 이미지로서의 교주가 한국의 인물이었다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작품 초반엔 외국인이며 백인이 아닌 인물을 아버지로 삼는 현장에 내심 우쭐하기도 했었다. 물론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땐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대표적 인물과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한 서사구조가 非미국인으로서 불만스럽기도 했다. 가만 보면 중국(마오)은 전체주의를 설파했고 중동(호메이니)은 테러를 일삼았고 서구(영국, 독일등)는 언론만 무성했고 한국(통일교)은 집단을 신봉했지만 미국(소설가, 사진작가, 예술가)은 이 모든 걸 의식있게 고발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출간된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대표성의 문제로 파고들면 우리로선 공평하지 않은 처사라며 작가의 한계를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향력의 문제로 본다면 마오의 중국과 테러의 중동, 서구의 언론, 미국의 대중문화와 소니와 기린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경제와 나란히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멘탈 파워에선 우리도 분명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약에 빠져 불운한 소년시절을 보낸 스콧은 빌의 최초 소설을 읽고 자아를 발견한 케이스였다. 스콧은 자발적으로 빌의 비서가 된 인물로 빌의 출간을 물리적, 영적으로 반대한 사람이기도 했다. 책이 출간되는 순간 신화로서의 빌, 하나의 힘으로서의 빌은 사라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을 보자면 빌이 부재한 동안에도 끊임없이 빌이 남긴 서류의 목록을 분류, 정리하는데 집착하여 오히려 출판을 위한 작업을 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스콧은 빌에게 유일한 독자이길 바랬고 빌은 자신만의 작가가 되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작가는 스콧이 빌의 죽음으로 얻게 된 것은 마오주석의 사진을 소지하는데 관한 노래한줄과도 같다고 말한다. 스콧은 아마도 빌이 남긴 사진과 소설, 그리고 자신만이 아는 비밀(권투선수 이름)을 이용해 군중이 아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작업을 하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스콧은 빌이라는 신화적 인물의 이미지를 소유하려 했던 사람이 아닐까. 그는 이미지를 소비함으로써(워홀의 작품을 구매) 일차 소유를 한 후 그것을 캐런에게 전달하는 선심을 보여주었다. 군중을 대상으로 하는 작가와 작품을 소유하는 방법은 그가 책을 출간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을지 모른다. 스콧의 이미지 소유욕망은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오늘날 군중의 윤리의식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했다. 개인의 욕구는 이제 ‘가진다’는 구속보다 ‘연결한다’는 관계로 대체된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에 스콧은 시대착오적인 인물의 표상이겠지만 그는 빌의 소설을 가졌기로 生의 기회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아날로그 시절의 책을 향한 순수와 열망을 전파하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캐런과 스콧이 빌의 비서격으로 이미지에 지배받고 동시에 이미지를 소유하려 했던 인물들이라면 빌은 이미지에 지배받지 않으려 항거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작가(빌)도 인간이었기에 삶의 두려움을 방지하고 혼란에 대비하기 위해 약물에 의지하는 나약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진정제나 각성제, 수면제 등의 알약을 쪼개며 분리된 색깔(푸른색, 흰색, 핑크색) 들 속에서 生의 변화를 감지하고자 한 자폐증 환자에 가까웠다. 그는 변명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지만 자신의 딸은 슬픔이나 고통도 변명에 불과했으며 결국 변명하기 위해 글쓰기를 일삼았다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을 비난한다. 빌은 군중으로부터 공격받고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미디어로부터 억압받고 급기야는 테러집단으로 희생되는 불행한 작가의 최극단을 대신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사라졌지만 타의적으로도 사라진 ‘완벽한 실종’의 주인공, 비운의 작가를 표상한다.

빌은 작품속에서 영원히 퇴고만 하고 출간을 하지 않은 작가로 그려졌는데 특이한 점은 그가 타자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문장을 수정하면서 생각을 조직할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수정을 하고 가다듬은 문장만을 기록할 수 있는 수동타자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레바논의 테러 조직과 찰리의 단체를 이어주는 그리스의 정치학자 조지 하다드는 빌에게 워드프로세서의 유용성을 알려주며 사용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걸 하나의 메시지로 일축해버리는 자동응답기를 불신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집에 존재하는지 부재하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기계를 집어 들 것인지 말 것인지 만이 중요한 머신의 지배를 문명의 폭력이라 여긴 것이다. 그가 타자기를 고집한 것은 생각의 수정을 기계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자존심이자 작가 의지가 아니었을까. 빌은 문명의 발달로 출현한 기계들이 촉발하는 새로운 종류의 획일화된 폭력과 그로인한 군중의 고독을 표상하는 인물이었기에 타자기로 친 원고의 산더미 속에서 은둔을 자처한 그의 소리없는 아우성은 끝내 민주적 함성이 되지 못했다. 타자기에 쌓여진 머리카락만이 기계속으로 흘러들어 그의 생물학적 노화를 증명할뿐 더 이상 소설이 공포를 흡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빌은 소설이 민주적 함성이라 믿었기에 자기 목소리를 파괴하려는 테러리스트들을 본능적으로 가장 두려워 하지 않았을까. 그는 방안에서 스스로에게 가상의 야구경기를 중계하던 순수한 순간이 가장 좋았다고 회상한다. 선수(참여자)이자 아나운서(중계자)이자 군중(관람자)이자 청취자(정보 수용자)이자 라디오(정보 제공자)였던 그 순간은 자기 목소리의 최대발현으로서 역할에 구속되지 않고 책임에 자유로왔던 추억인 것이다. 1인 다역이 역할을 짊어지는 구속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를 자기의지로 표현한다는 긍정의 의미로 기억된 것이 흥미로왔다. 이는 소설가가 소설을 써가는 방법과도 흡사한데 작가는 이를 '민주적 함성'이라 여긴 것이다. 이렇듯 소설가의 투쟁이 자유를 찾기위한 이미지 항거를 의미하긴 했지만 그런 그도 마지막엔 이미지를 차용하려 했다. 은둔자가 은신처에서 나오는 방법은 단 하나 죽음뿐이었으며 그것이 부활이 되기 위해선 사진이라는 장치가 필요했다고 판단한 듯하다. 결과적으로 빌의 이미지 노출은 극적인 영정사진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는 한 번의 찬스를 잘 활용한 셈이 된다. 그리고 작가의 탄생은 군중의 것이지만 작가의 죽음은 독자 개인에게 영입되는 기회이므로 빌은 죽음으로 독자 개개인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빌도 이미지에 항거하지 못하고 이미지에 순응함으로써 비로소 박수받게 되는 죽음을 택한 것인데 그의 선택은 서글픈 논리를 부추긴다. 비약이긴 하지만 결국 작가의 이미지 순응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경고로도 들려 나는  안보이는 그의 사진이 가장 섬칫하기도 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소설은 이미지 때문에 살고 이미지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인데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데 기여하는 인물로 뉴욕에 온지 15년 된 사진작가 브리타를 앞세우고 있다. 브리타는 사라졌거나 사라지려 하는 작가들을 찾아가 그들이 사라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진작가였다는 점에서 작가가 제시한 일종의 구원의 통로로 느껴졌다. 그녀의 시각을 관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도시 문명이 흡수된 이미지는 어떻게 군중을 컨트롤 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로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공개적 질문이었다. 화려하게 드리워진 교각, 선상의 거대한 기중기,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하늘에 벽화를 그리고 줄지어선 빌딩과 도로표지판, 대형광고판, 비상안내문은 공포의 데이터로 사진과 그림, 뉴스와 신문에 입력된다. 그녀는 '고르비 Ⅰ'의 워홀 작품에서 마를린 먼로의 잔상을 확인하고 '코크 Ⅱ' 라는 음료수 광고에서 마오주의를 연상하고 소용돌이치듯 벽에 그려진 낙서에서 경고와 협박, 자아비판 요구와 같은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의 대자보를 떠올린다. 이미지의 연쇄는 명백한 부재를 막강한 실재로 둔갑시키고 이미지의 융합은 사실을 왜곡, 재가공하며 진실을 조작한다. 그 결과 잔상으로 남게 된 최후의 이미지는 군중의 마음을 움직일 컨트롤 파워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빌은 브리타와의 만남을 계기로, 은둔과 유배의 시간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오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베이루트에서 테러조직의 지도자 사진을 찍은 후 더 이상 작가들의 사진을 찍지 않게 된다. 그녀는 테러조직의 우두머리 라시드의 이미지를 담았지만 그 이미지가 아이들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담고 있는 아이들의 눈동자는 가슴에 담는다. 그녀는 무상대여한 탱크의 행렬과 나란히 동행하는 결혼식 장면을 이미지에 담진 않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카메라 플래시에 노출되어 죽은 도시가 재생되는 현장은 가슴에 담는다. 최초 이미지 생산자로서의 죄책감과 자신의 작업이 긍정의 역사에 조력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 때문에 렌즈를 닫아 버린 것은 군중과 미디어의 폭력으로 책을 출간하지 않겠다는 빌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이들 미국의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해오던 작업들은 불행히도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캐런, 스콧, 빌과 브리타가 좇아가던 모든 이미지들은 작가의 거울에 흡수되었다는 아니 거울이 이 모두를 삼켜버렸다는 생각, 그것이 이 작품에 대한 내 총체적 '이미지'가 되고 말았다.

거울, 소설가  VS 테러리스트

프롤로그에서 비교적 덤덤하게 관람한 집단결혼식은 에필로그에서 '이래도?' 하고 되묻는다. 처음 야구장 관람석에 있던 나는 에필로그에서 갑자기 중요 사건의 목격자라도 된 듯 허를 찔리고 만다. 구경꾼인 제 3자의 시각에서 사건의 현장에 놓여진 기자가 된 기분, 이제 앞서 촬영한 브리타와 기자들은 이미지를 남겨놓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도시는 위대하고 사람은 아름답고 결혼은 신성한 것인가. 탱크도 축제의 무대가 될 수 있는 것이 전쟁의 현실인 것인가. 야구장에서 사태를 관망한 군중은 뉴욕의 갤러리에서 전시를 조망했듯이 이제 전쟁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라 격려한다. 이미지에 지배당해온 군중속에 실은 당신도 포함되고 있었음을 자각하라는 뜻이었을까. 마지막 순간 작가는 지금까지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한 독자에게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 항변하는 듯 했다.

이 책에선 영문없이 잡혀온 인질도 우리에게 남겨진 최후는 보잘것 없는 이미지의 편린이라 주장한다. 인질은 자신을 감시하던 소년이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 상황을 1차적인 사망선고로 받아 들이는데 그 후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전쟁이며 그것을 담은 비디오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거리의 음향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자신이 죽으면 이름이나 직업, 국적은 의미없이 컴퓨터 정보처리 장치속의 디지털 모자이크 화면으로 남게 되거나 마이크로 필름에 새겨진 유령처럼 생긴 활자에 불과할 것이라 예상한다. 쓸쓸히 죽어간 빌 역시 베이루트 민병대에게 팔 만한 것들, 여권과 신분증, 이름과 숫자가 적힌 것들만 최후의 잔상으로 남겨진다. 이는 재난의 희생자와 생존자가 뉴스속 활자로 대신되는 이미지의 무책임, 처음 접한 테러현장의 충격에서 점점 교통사고와 유의미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우리네 일상과 많이 닮았다. 이미지를 무시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테러집단은 '심할수록 더 좋다'는 구호를 고안해낸 서방언론을 보란 듯이 응징하는 보복의 코드로 읽혀졌다. 작가들의 최후 이미지를 지우려는 테러집단에서 인질의 석방여부가 석방에 대한 공개발표에 달려있다는, 석방 발표 없이는 석방도 있을 수 없다는 서구 언론의 횡포를 배운 그대로 조롱하는 그들로부터 서구 언론을 향한 작가의 속내를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자본주의 대표국가의 작가로서 소설과 작가의 임무를 망각해선 안된다고 나지막히 읊조린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는 모두 사라진다. 소설가 빌과 스위스 시인은 테러라는 폭력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목숨을 잃는다. 표면적으로 테러가 소설을 대체한 세기적 사건이라 할 것이다. 인질로 잡혀온 시인은 글쓰기만이 외로움과 고통을 흡수할 수 있으며 글로 쓰인 단어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기에 세상속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쓰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는 단어와 문장을 생성해 내는 정신이 파괴되었으므로 절망에 질식된 채 사라지는 운명이었다. 빌은 베이루트에 억류된 스위스의 무명 시인을 석방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고, 런던에서 그 시인의 시를 낭송하려 했지만 낭송회와 기자회견은 끝내 뉴스로 전파되지 못했다. 아니 뉴스 이전에 사건으로 발생되지 않았다. 저명한 소설가가 이름없는 시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영어로 글을 쓰는 나이든 작가가 프랑스어로 시를 씨는 젊은 문학동인에게 손을 내미는 사건을 미국이 유럽에 내미는 범세계적 온정으로 공식화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이 계획이 공공화될 장소는 런던이라는 서구언론의 대표 장소였지만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테러리스트가 사람을 죽이며 혼란을 야기한 탓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서구사회가 언론으로 소집한 군중의 언어때문이라말한다. 끝없이 쇄도하는 이미지의 물결을 지배하는 서구사회의 방식이야 말로 현실에 대한 입장표명을 하려는 작가를 가장 불온하게 취급하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또 말한다. 작가들이 권력에 대응하고 공포를 물리치는 방식은 의식의 한계와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인물을 창조하는 일이며 그러한 인물들은 마약에 빠진 스콧을 구출하듯 타자의 삶을 바꾸는 계기도 된다는 것. 소설가는 테러리스트에 밀려나고 서사는 테러뉴스에 밀려나고 책은 녹음기과 카메라에 밀려나고 군중은 재난이라는 장르에 지배당할지라도 끝까지 폭탄과 총알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만은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라고. 사진을 찍는 것이 수십 년 후를 위한 과거, 역사를 만드는 일이라면 책을 출판하는 것은 그러한 과거와 역사를 사유하고 통찰하는 것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함이라고. 이것은 불명료하고 과포화된 사회에서 테러가 유일하게 의미있는 행위라 할지라도 혹시 광적인 군중들이 책을 흔들고 역사를 왜곡할지라도 계속하여 작가가 글을 쓰고 책을 내어야 하는 이유임에 틀림없다고.

소설가와 테러리스트는 똑같이 분노의 에너지로 군중을 컨트롤한다. 하지만 지배당한 군중의 의식은 삶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보여준다. 개인이면서도 군중이기도 한 우리에겐 정체성의 회복이냐 상실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 소설은 바로 개인과 군중사이의 균형잡힌 정체성을 함수관계로 보았을 때 나타나는 그 역학적 결과를 고민해보자고 유도한다. 군중의 균열이 꼭 개인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며 개인의 회복이 곧 군중의 균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하지만 개인의 상실로 이루어진 군중은 과연 미래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인지, 자본주의를 확산할 가치로서 그 의미가 있는 것인지 말이다. 개인의 회복을 위해 소설이 존재한다면 작가야말로 테러리스트들의 가장 확실한 표적이 되지 않을까. 역으로 추적해 들어갈수록 작가의 사회적 위치와 책무를 신적으로 격상시켜놓는 작가의 은둔적 서사는 가히 놀라웠다. 스콧이 이미지를 소비하고 캐런은 이미지에 신앙을 부여하는 사람이었다면, 브리타는 이미지 생산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빌은 이미지에 지배 받지 않기 위해 항거하는 사람으로 그려졌음에 다시한번 끄덕인다. 이제 테러리스트는 이미지의 폭력성을 최대치로 이용하고 거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며 군중은 이 모든 이미지를 흡수한 채로 무의식의 공포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거울, 보고 모자쓰다

많은 상념(想念)들로 머리가 무거워지던 독서였다. 몇 년 전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위치한 광고타워에 삼성과 LG의 로고가 선명하게 휘감기던 순간이 떠오른다. 수많은 군중과 거대한 이미지속에서도 그들이 유독 반갑고도 흥분되던 그 현장감은 단순히 애국심때문 이었을까. 그 순간 나는 분명 어떠한 이미지에 압도되었고 무엇에 지배당한 것이라, 생각하자니 같은 순간 소명되었을지 모를 한편의 시와 소설의 주인공이 다 그리워진다. 이제 나는 통일교 집단결혼식의 신랑신부들과 천안문광장의 시위 참여자들, 호메이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파들, 톰킨스 스퀘어의 노숙자들을 압축화된 기호로 데이터 처리하지 않고 다시 生의 생생한 현장으로 복귀시키고자 한다. '마천루 Ⅲ'에서 본 관람 뷰와 똑같이 세계무역센터를 바라본 내안의 캐런을 극복하고자 한다. 굶주림과 화재와 전쟁과 폭동이 하나의 뉴스로 일반화되는 작금의 시절에 우린 어떤 개인으로 군중이 되어야 할까 다시 거울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콩나물 시루같이 하루를 시작하는 도심의 군중들, 그 속의 당신과 나는 결코 스페인어로 빛나는 길이라는 '썬데로 루미노쏘'를 향하고 있지는 않아 보이는 건 나만의 걱정일까.

작품속에서 빌, 스콧, 브리타, 캐런이 뉴욕이라는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면서 각자 믿음과 소설의 의미에 대해 격식없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생각난다. 이 작품이 출간 된 시기에 작가 지망생이었고, 사진을 전공했고, 결혼을 하지 않았던 친구들과 모여 주고받던 이야기가 마침 그리웁다. 돌이켜보니 당시였다면 이 작품은 꽤 시의적이면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는 생각이다. 이미지의 시대는 흘렀고 사회는 네트워크화 되었다. 아날로그 이미지는 디지털 컨텐츠로 대체되었으며 우리의 다음 세대인 청소년들은 유튜브등 글로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약진으로 페루산골에서까지 소녀시대의 신곡을 듣는 시대를 살고 있다. 대량복제와 확산의 속도로 본다면 가히 이십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가는 건재하고 우리는 여전히 소설에서 진리를 찾고 있다. 마찬가지로 테러 역시 더욱 활성화되어 이제 소설속에 등장했던 세계무역센터는 사라진 테러의 역사가 되었다. 이쯤에서 폭력과 테러를 향한 경계와 함께 소설과 작가의 의미및 역할을 되짚어 보는 시간은 독자인 개인을 떠나 사회인 군중에게도 꽤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늘 이미지 조작에 노출된 군중이지만 이제 그러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정보생산의 역할까지 수렴하게 된 어엿한 개인이 되버린 오늘 우리가 끄적이고 합성하고 창조하는 이미지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고민이야말로 이처럼 의미있는 작품을 써야 할 의식있는 작가를 요구할 수 있는, 멋드러진 독자의 필수적인 자격이 되지 않을까.

이미지(image) 바로 보기는 이미지(理美知)를 바로 행하는 일이었다. 주어진 이미지를 제대로 보고 바르게 인식하는 일은 결국 세상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지성을 다스리는 일이 아닐까.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만큼 느끼는  일은 아름다운 이미지 이전에 그것을 리터러시하는 능력일 것이다.  이 책에서 선문답처럼 제시해준 '모자를 주문하기 전에 머리 크기부터 잰다'면 맞지 않는 모자를 사들곤 후회하거나 남이 쓴 모자를 따라하거나 어이없는 디자인에 비난을 할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이다. 각자가 자신의 머리에 맞도록 주문한 모자를 거울앞에서 제대로 확인하며 착용한다면 아름다운 이미지를 스스로 생산해 내는 크리에이티브한 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순간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에 책임지는 지혜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표현의 자유에 관한 고결한 어떤 위원회의 위원장'까지는 되지 못할 지라도 역사앞에 당당하고 미래앞에 자신있는 군중의 일원이 되기에 기꺼이 수행해야 할 동시대 우리 개인의 의무일지도 모를 일이다. 미래의 바이러스는 이렇게 아름답고 지혜로운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진 군중으로부터 하나씩 둘씩 세상에 확산, 유포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차근히 퍼진 바이러스야 말로 자본주의의 이미지라는 '괴물'에 감염되지 않을 가장 안전한 항체가 아닐까. 뉴욕 맨하튼의 빌딩숲을 헤치고 피어오르는 하얀 수증기 기둥, 이를테면 대지의 예술의 한 장면, 그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이미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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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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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를 떠올리다

책을 덮고 제일 먼저 내 인생에서 가장 허기로왔던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生의 한 지점,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 일년 쯤 지나 아이와 마트를 가게 되었다. 일정기간 엄마와 같이 하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살았던 듯하다. 엄마는 내가 직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아이를 돌봐주고 살림을 해주시던 生의 영원한 매니저였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내 일상의 동선은 철저하게도 엄마의 동선과 일치했다는 것을 매 발걸음마다 깨닫는 일이었는데 그 반복되는 자각의 고통이 싫어 나는 오랜 기간 생활의 동선을 최소화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 중에 마트를 가는 것이 가장 두렵고도 미어지는 일이었는데 물건을 고르고 집어 들면 귓전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아이와 함께일 땐 그렇게 고른 재료들로 최고로 맛나던 식탁을 차려주시던 뒷모습이 떠올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엄마를 의식하지 않고 아이와 함께 마트를 가게 된 그날, 아이는 전에 없이 지하 주차장에서 갑자기 고개를 떨구더니 차문을 열지 않았다. 당신의 새끼의 새끼에게 모든 정을 쏟아온 할머니를 잃었을 아이는 당시 그것이 자신의 生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었다. 일년 후 학교를 다니다가 엄마와 함께 마트에 도착하니 비로소 할머니의 상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이는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 할머니가 해주시는 고기랑 나물은 못 먹는 거잖아. 여기서 사가도 못 해먹는 거잖아. 할머니..." 아이는 차안에서 끝내 오열하며 소리를 질렀고 나는 아이를 달래느라 제대로 울 수도 없었다. 우리는 장을 보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아이를 재우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간사하게 밀려드는 배고픔이 내 허전함을 더 부추기며 스멀스멀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나는 정말로 배가 고픈 것이 고통스러웠고 누구보다 허해진 마음까지 어쩔 줄 몰라 했다. 육(肉)허기와 영(靈)허기에 대책없이 내몰린 내가 한 일은 밥통에 며칠 눌러앉은 밥을 반찬없이 꾸역꾸역 집어 넣는 일이었고 다시 살기 위해 내일을 위해 이불을 덮어 쓰는 것이었다. 그래야 다시 아이의 허기라도 채워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극심한 허기의 파도를 뚫고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다시 허기를 채우려 마트를 가지 못했을지 모르겠다. 아니 그토록 허기의 정점에 다다랐기에 다시 무언가를 채울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니 내 존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극도로 공허한 상태에선 생물학적인 허기와 정신학적인 허기를 구분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즉, 몸이 고픈 것과 마음이 고픈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점엔 어느 쪽이든 쉽게 취할 수 있는 것을 얻게 되면 일단은 본능적으로 재생의 힘을 마련하게 되는 게 인간의 생존방식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는 죽을 만큼 굶어 본 자만이 죽지 않고 살아낼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과도 같은데 삶이 내장한 이 아이러니, 세월속에서 잊혀져가던 허기의 순간을 나는 다행히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르 클레지오는 바로 인간이 감지하는 이 두 가지 '허기'에 대한 기억을 세심하게도 들추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허기(虛氣)라는 '죽은 듯이 없어 보이는 기운'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살아있어 느껴지는 기운', 생기(生氣)로 변주하는 데 주저없이 음악적 기운(音氣)을 빌어 오셨다. 서사 전반에 걸쳐 작품의 제목처럼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자신만의 곡(曲, 음악)을 때론 노래로, 때론 연주로, 때론 지휘로 들려주는 수사를 연출하였다. 자연 나는 글의 흐름에 전적으로 몸을 내맡기게 되었고 돌아와 보니 짧지만 굵은 음악여행이라도 마치고 귀가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을 어떤 문학적 충격이라고 표현한다면 나는 몸과 의식이 한 곡의 문학에 관류된 꽤 운 좋은 독자가 아닐까. 그가 엮어낸 음악의 곡이 정녕 간주곡(間奏曲)이라 한다면 나는 그 장르를 몸과 마음으로 오래 기억하고 싶고 나와 같은 기억을 가진 청자들과 이 기분을 한껏 공유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먼저 이 작품의 제목 「허기의 간주곡」에서의 '간주곡'은 책을 덮고 나니 더욱 다층적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오페라나 드라마의 막간음악을 의미하는 '간주곡'으로서 불어인 entracte(남성명사)나 intermezzo(남성명사)를 쓰지 않고 이탈리아어인 ritornello (리토르넬로)에서 파생된 ritournelle(리토르넬르, 여성명사)를 택하였다. 표면적으로는 17, 8세기 오페라 아리아의 도입부나 중간부에서 반복되는 짧은 기악곡을 의미하지만 그 후 리토르넬로는 협주곡에서의 특정한 '형식'을 의미하기도 하며 반복되는 후렴구를 지칭하는 것으로도 확장되었다. 리토르넬로는 그 어원도 '회기', '복귀'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ritorno에서 시작되었는데 우리가 흔히 복고풍의 패션을 '레트로'라고 일컫을 때 같은 의미를 연상하면 될 듯하다. 또 불어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명사인 단어를 사용하여 이 작품이 스무살의 젊은 나이에 시련을 겪은 자신의 어머니에 헌사하는 글임을 상징하고 싶었던 것으로도 생각된다. 비슷한 의미로서 작품의 주인공인 에텔이 부르는 곡이거나 에텔을 위한 곡일 수도 있기에 '간주곡'은 총체적으로 '어머니의 허기로의 회귀'를 그리워 하는 작가의 자작곡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리토르넬로, 독주와 합주의 하모니

소설의 시작은 어린 내가 느껴본 육체적 허기의 체험이었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은 내 어머니의 인생을 바꿔놓은 볼레로 공연, 어머니의 정신적 허기를 관통하고 남겨진 자유와 생존의 기운을 부연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작가가 자식으로서의 배가 고픔을 어머니 된 마음의 채움으로 끝맺은 것이다. 자신의 허기와 어머니의 허기를 공평하게 일직선상에 놓고 허구의 허기를 관통시키려 한 듯하다. 시점과 내용상 작가의 실체로 보이는 짧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양끝에서 허구로서 흐릿한 기억들을 단단히 동여매주는 지지대 역할을 했다. 두 실제된 체험사이 구성된 허기의 존재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배회하거나 표류했고 분명하지 않은 소음들과 인지되지 않는 색채들로 가득했는데 이 기억들이 옆으로 새거나 사라지지 않도록 해주었달까. 행여 번지거나 흩어질 수 있는 본 작품의 서사를 고급스럽고도 우아한 프레임에 잘 안착시켰다는 느낌, 안전하게 표구된 그림을 받아들고 이제 우린 집안 어디에 걸어야 할지 고민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은 전쟁이라는 역사와 성장을 해가는 개인이 나란히 병행하는 구조였는데 이는 꼭 역사와 개인이 어우러져 연주되는 협주곡(콘체르토ㆍconcerto)을 연상시켰다. 협주곡은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 두 개의 음향체가 서로 대립하면서 대결을 벌이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는 개인이라는 솔로(독주)와 역사라는 투티(합주)를 교대로 번갈아 등장시키며 리토르넬로 형식을 선보였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처음엔 개인과 거리를 두고 저 만치서 관조된 전쟁이 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의 삶속으로 침투하여 마침내 관통하고 지나는 것으로 느껴져 독주와 합주가 하나가 된 듯한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게 이 작품은 지난시절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훗날 회상해보는 그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간 이야기로도 읽혀졌다. 아주 느린 화면으로 총알이 가슴을 뚫고 휘이 지나가는 그 순간을 스스로 목도하고 쓰러진 뒤 한참 후 의식이 돌아왔을 때 다시 그 순간을 기억해내는 일. 그러니까 전쟁이라는 성장통을 헤쳐나온 한 여인의 성장기는 그것으로 끝은 아니라 여기기에도 충분했다. 그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예언이자 약속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전쟁'으로 파괴된 삶의 현장과 마음의 파편들은 외려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도시의 풍경과 일상을 포착하고 담아내는 작가의 미학적 습관에 기인했다고 생각된다. 시종일관 작가는 도시의 색채와 소리, 냄새, 촉감들을 자신만의 필터에 통과시켜 그려내었고 그 결과 우린 언어가 주는 미혹에 빠져들어 어떤 인간 본성의 머나먼 고향에 가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깨달은 악기로 개인의 삶을 연주했으며 자신이 보고 들은 악기로 역사의 현장을 공연했다. 이 책은 집요하게도 근원적인 인간의식을 두드리는 고집이 있었다. 그곳이 순수를 갈망하는 유년의 나라인지 모국을 그리워 하는 탄생지인지 친구와 우정을 쌓았던 호숫가인지 연인과 사랑을 나누었던 바닷가인지 부성을 확인하고픈 피난처인지는 정확히 답할 순 없으나 아마도 현재의 허기를 달래고 채울 수 있는 누적된 기억의 장소인 것만은 확실했다. 작가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동되는 장소에서도 똑같이 허기를 이동시키며 대상인물이 바뀌어도 허기가 사라지지 않는 것에 집중했다. 에텔과 주변 인물들은 모두 그들만의 창의적인 장소를 주장했지만 그들을 지배하던 허기만큼은 변함없었던 것이다. 물론, 훗날 이 모든 허기의 기억들이야 말로 다시 차곡차곡 허기를 메우는 기억이 되었겠지만.

자신의 허기에서 어머니의 허기를 기억해내고 자신을 통과하고 남겨진 허기의 잔재에서 어머니의 그것을 중첩시키며 生의 기운을 찾고자 한 작가의 의지는 역사라는 과거와 개인이라는 현실을 잘 조율하며 세계를 받아들이려고 한 문학의 리토르넬로는 아니었을까.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절망의 끝에 내몰린 한 개인이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조국을 외면하지 않는 합리적이고도 지적인 방편은 아니었을지.

...리토르넬로, 순수로의 회귀

소설초반에 등장하는 에텔의 종조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유년시절의 연보랏빛 꿈이었다. 검은 중절모를 눌러쓴 채 은지팡이를 들고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를 내며 걸음을 걷는 할아버지는 팔순 고령에도 불구하고 에텔을 목말 태워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 거구의 인물이었다. 실제로 군의관 아버지와 떨어져 어머니와만 생활한 작가에게 부성의 부재는 모성의 절대성을 키우게 한 원인이었을 터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에텔도 부모끼리 사이가 좋지 않아 정부를 두고 있는 아버지 밑에서 生의 최초로 느낀 허기는 바로 부성의 결핍이었다. 그녀는 가족, 친구, 연인 할 것 없이 상대가 가진 남성성에서 기운을 발견하고 그것을 우상시하며 자신을 의지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외동딸로 분한 에텔에게 첫 번째 우상은 바로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에텔은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 땐 '거인과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는 '이 세상 어떤 무질서 속에서도 길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솔리망 할아버지는 동화같은 숲속에서 에텔에게 연보라색 빛의 돔을 보여주며 그 별장을 선물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대신한다. 유일한 상속자가 된 에텔(ether, éther)의 이름은 영어, 불어 모두 '하늘'을 의미한다. 할아버지는 연보라색 별장에 오염되지 않은 맑은 대기를 의미하는 에텔(하늘)이 비치는 거울연못엔 아무것도 심지 않고 항상 하늘(에텔)이 비치도록 접시처럼 반들거리게 깨끗한 상태로 놓아두고 싶어 했다. 에텔은 솔리망이 죽은 후 대부분 잿빛 하늘밑에서 숨을 쉬게 되지만 그것을 비추는 거울연못을 마음에 심어두었기에 오랫동안 자신의 하늘을 비추게 하는 정체성의 시원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연보라색 집의 거울 연못은 에텔(하늘)의 색채(정체성)를 비춤으로써 에텔이 당면한 허기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 수 있도록 한 소설속 블랙박스였던 것은 아닐까. 연보라색 집은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블랙박스만은 저 먼 곳, 이 곳이 아닌 세상 반대편 어딘 가에서 살아남아 당시의 행복과 환희를 고스란히 저장해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할아버지가 연보라 빛의 우상이었다면 제니아는 금빛의 우상이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리셔스 섬 출신의 에텔에게 러시아에서 망명온 제니아는 같은 이방인이지만 우유부단하지 않고 더 빛나는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부러움, 동경의 대상이었다. 에텔의 가족이 모리셔스 섬을 순수의 귀향지로 두고 파리에서 각자 그리움의 허기를 느끼는 것은 아마도 작가 자신이 에텔과 같은 식민지 출신 프랑스 이방인 집단에서 성장했던 이유로 더 세밀하고 서정적인 표현이 가능했던 가보다. 에텔은 비극적 가정사를 안고 있던 제니아에게 빈곤과 슬픔을 자양분으로 한 방어기제들과 부딪히면서 상처와 행복을 동시에 느낀다. 인간관계에서 상대를 지배하고 적절히 모욕을 주면서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는 제니아로부터 우정과 질투심, 동성애 감정들을 발견하고 자신을 조종하는 그녀에게 집착, 몰두하는 소녀시절을 보낸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여학교 시절에도 남성 지배계급이나 권력층, 군대의 정서를 지니고 행사하는 여학생이 있는 반면 그 학생에게 단순한 호감을 넘어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쪽도 많았던 듯하다. 전자가 자신의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과잉반응이었다면 후자는 부성의 부재에서 오는 결핍이 투사된 심리가 아닐까. 내 경운 에텔과 같은 외동딸이었지만 여성적 취향, 여성의 정서를 폄하하면서 중성적 캐릭터로 친구들 위에서 군림하는데 많은 위안(?)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제니아도 자신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에텔에게 엄마가 일하는 봉제공장에서 남자보다 여자를 더 좋아하는 여성을 예로 들며 에텔의 감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나는 무엇보다 여학생끼리의 이런 밀도높은 심리적 에피소드를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통찰이 참 여성적으로 느껴졌고 내심 놀라웠다. 여학생끼리의 추억으로 잘 포장된 센느 강의 백조 산책길이나 정원에서 보내는 오후의 시간, 그 시절 친구와의 콩쿠르 참가계획들을 넘겨가면서 나는 내 여학생시절 친구관계를 떠올리며 가장 친한 친구를 향한 그리움과 서운함을 다시금 복원해 낼 수 있었다. 기억한다는 것은 지나와 버렸기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과 사람, 사건들로 생겨난 허기를 신기하게도 추억이라는 생기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실은 목메이는 그리움을 메우기 위해 누군가를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잊으려고 하는 모든 행위는 잊음으로 생겨날 허기를 채우는 일이므로 실은 더 잊지 않는 기운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그리움을 떨쳐내기 위한 모든 행위는 더 그리워 하고 싶어 행하는 일이었음을 다시금 깨우친다.

에텔은 결국 전쟁을 겪고 나서 제니아가 가고 싶어 한 소설속의 '눈과 숲의 나라' 캐나다로 生의 닻을 내리게 될 것을 암시하며 우리에게 안도감을 준다. 에텔이 가고 싶어한 곳은 할아버지가 늘 그리워하던 세상 저편의 유년의 고향이면서 제니아가 꿈꾼 소년과의 사랑의 장소이면서 부모의 건조한 사랑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찾을 수 있는 곳, 바로 맑은 에텔(하늘) 아래 였을 것이다. 그곳엔 노란 물보라와 초록색 강물과 연보랏빛 태양이 숨쉬는 순수의 귀향지로서 그녀만의 허기의 고향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유년의 순수가 되돌아갈 회귀의 장소로서 그곳은 우리 모두의 그리운 리토르넬로는 아니었을지.

...리토르넬로, 되풀이 되는 감각장치

한편, 코탕탱가의 살롱에서 오가던 사교모임에서  에텔이 듣고 기록한 모든 대화들은 일종의 연극무대를 연상케 했다. 그들에게 살롱모임은 일요일 오후마다 반복되는 일상의 도돌이표, 친밀한 후렴구는 아니었을까. 길거리에서도 토론하기를 즐기는 프랑스 문화를 떠올리면 하나도 어색할 건 없었지만 신기한건 그들이 뿌려대던 대사들은 어떤 운율을 가진 음어(音語)이거나 반복되는 화풍을 가진 화어(畵語)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청각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또 모인 사람들은 출신지역과 직업이 다양하고 파리지엔느에서 이방인까지 고루 섞여 있어 시사, 종교, 이데올로기에 관한 중구난방식의 대화를 연출해내는 일등공신이었다. 에텔의 아버지 알렉상드르, 어머니 쥐스틴을 비롯해 고모들, 훗날 사기꾼이 되어 아버지를 파산시킨 변절자들, 연인이 된 로랑 펠드까지 대사를 통해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연기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시를 읊고 노래하고 연주하고 혹은 웃거나 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전쟁이라는 두려움을 잊고 그로인한 허기를 채우는 프랑스적 광기에 해당하는 그들만의 방식은 아니었을까. 이 장면은 에텔이 그들로부터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 시기인 어린 시절을 장식하던 중요한 배경이었는데 살롱에서의 반복되는 일요일 연극이야말로 참가한 배우들에겐 '허기의 간주곡'이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에선 살롱에서의 비현실적인 분위기, 그들의 허영심 가득한 가식적인 대화를 혐오하는 에텔의 회상중간에 아버지의 연주와 노래에 반주를 담당한 기억도 애틋하게 묘사되었다. 그때 흘렀던 슈만과 슈베르트의 음악은 모리셔스 섬을 그리는 '허기의 기억'을 상징하기에 이야기 속에서 막간을 이용해 연주를 담당한 에텔에겐 더 분명한 '허기의 간주곡'이 되지 않았을까. 에텔은 그들이 나눈 대화들(재미난 표현, 시적인 문장, 험담과 독설등)을 마치 연극의 대본처럼 수첩에 적기도 했는데 이렇듯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간주곡을 연주하고 듣고 적으며 마음에 난 구멍을 메꾸어 보려했던 것이다.

또, 이 작품에서는 유난히도 언어를 시각화하는 작가만의 장치가 빈번했다. 지명으로 표기되는 외래어들, 인명으로 인식되는 가상의 성, 이중의 의미를 지니는 단어들, 전시(戰時)의 법령, 유대인 명단 , 여행 허가 증명서등, 이러한 언어의 나열과 배치는 솔직히 번역문학을 대하는 독자인 내 입장에서는 그 의미와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긴 어려웠지만 대체로 비슷한 마디와 음절을 가져와 다른 곡을 작곡해 나가는 창작의 과정으로 보였다고 할까. 각 단어의 철자들은 문학으로 음악을 변주하는 그 연장선 상에서 흡사 작가가 그려놓은 음표들로 나열된 단어들은 하나의 악보로 이해되었다. 작가는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양국어를 할 줄 알았기에 특별히 모국어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지만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작가 언어를 프랑스어로 택한 경우였다. 즉, 그가 선택하고 표현하는 언어는 자신의 실제 모국어보다 더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개념어로서 하나의 단어를 선택하고 그것의 의미를 전달하는 일은 모국어와 별개로 작가언어를 택하지 않아도 되는 작가들보다 복합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택자체가 이미 특정 의미를 함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방인 어머니의 언어를 예술언어로 택한 작가의 이러한 배경은 단순히 프랑스어로 줄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국와의 불편한 관계, 독일을 바라보던 시각, 이탈리아인에게 느끼는 동질감, 같은 언어를 쓰지만 세상 반대편 나라(캐나다)에 대한 선망, 유럽내에서의 예술적 우월감등이 반영된 억양과 문법을 펼치게 한 밑거름이었을 것이다. 나는 에텔의 수첩에 발음할 때 들리는 표음과 원래 단어의 뜻을 이용해 반복되는 농담들 ('재채기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슈바르첸트루버'를 마찰음이 많아 '시원하시겠습니다'로 지문처리하는 등의)이 기록된 것을 보며 헤르타 뮐러를 떠올리기도 했다. 조국 루마니아를 버리고 독일로 망명해 이방인으로서 작가생활을 한 그녀는 루마니아의 속담이나 노래에서 연상되는 낱말(의미)과 독일어로 쓰거나 읽을 때 나타나는 낱말(표음)을 결합해 독특한 조어를 잉태해낸 작가였다. 비슷한 기법으로 언어유희를 일삼는 작가의 반복되는 장치들은 혹시 부족할 수 있는 작가만의 문학적 허기를 해소하는 언어 자유의 능력은 아닐까 싶었다.

헤르타 뮐러가 경계인의 아픔을 언어유희로 치유했다면 르 클레지오는 제 3자로서 말들의 축제가 절정을 향할 때 오히려 현기증을 느꼈던 경우였다. 에텔은 살롱에서의 현기증이 심해진 어느 날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악몽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림자는 눈 위에 검은 구멍 두개가 뚫린 가면을 쓴 잿빛 외투의 남자였고 그는 앞으로 펼쳐질 잔인한 현실을 예고하는 전령사로서 '허기의 전주곡'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검은 구멍으로 자신을 직시하던 허기는 꿈을 잃은 정원의 폐허에 드러난 시커먼 구덩이로 확대되고 마침내 커다래진 구멍은 에텔의 몸속을 뚫고 들어와 영원한 공허의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이는 공허한 말들에서 시작된 현기증이 쌓이고 모여 끝내 마음의 구멍을 내버린 결과였다. 에텔은 이 공허의 구멍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아픔이 잊혀졌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구멍이 난 채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자각이 곧 절망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녀는 아르모리크 가의 공사현장에 새롭게 지을 건물에 철저한 시공, 감리자 역할을 하면서 처음으로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의 의미를 알아간다. 피난민 시절엔 아예 부모님을 이끌고 이주상황을 진두지휘할 줄도 알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가 비행선의 모형을 만들며 클론다이크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꿈꾸며 비현실적인 사회혁명이 실현될 '바로 그날'을 앉아서 기다렸던 것과는 달리 비록 연보라빛 꿈의 집은 사라졌지만 같은 장소에서 올려질 건물에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고 일의 진행과정을 꼼꼼히 검토함으로써 현실에서의 일상속에서 자신이라는 보물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허기를 통과하다

이렇듯 에텔과 관계된 인물들은 모두 부성이 부재된 에텔에게 가족의 허기를 메워주는 역할을 했고 그녀가 기억하는 말들의 음악, 언어의 그림들은 상실된 꿈의 자리에 공백을 메워주는 추억이 되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러한 에텔의 유년기를 벗어나게 해주는 인물은 영국출신 로랑 펠드였다. 로랑은 수줍고 여성적인 태도를 가진 우아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에텔은 로랑에 의해 기존에 남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상대에게 지배당하며 판단을 의지하던 소녀시절의 패턴에서 벗어나게 된다. 로랑과의 기억은 할아버지의 '연보라빛 집'과 제니아와의 '백조 산책길'에 이어 브르타뉴의 휴양지 '르 폴뒤의 모래언덕'으로 이어진다. 에텔은 제니아와는 정반대 성향의 로랑을 사귀면서 제니아로부터의 상처의 공백을 메우게 되며 분노의 에너지를 치유하게 된다. 이는 혹시 영국인 아버지를 둔 작가의 공평하고도 중립적인 서사는 아니었을까. 에텔은 로랑이 영국으로 떠난 후 파산된 집에서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하며 연보랏빛 유년의 꿈과 초록의 우정, 금빛 모래밭에서의 사랑과 작별하고 이주하는 순간에도 마차위에서 오페라 세리아를 부르며 패전의 공허를 견뎌낸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에텔의 음악적 여정은 피난하면서 '자기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발전해 눈앞에 닥친 상황에 빠른 적응을 이끄는 자기정화 기제이기도 했다. 작품 후반부 그녀는 니스에 피신하여 시장과 공원에 남겨진 전쟁의 잔상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포탄에 죽는 것이 아니라 막지 못하고, 꿈꾸지 못하고 숨 쉬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해 그 허기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라는 치명적인 깨달음을 얻는다. 이 깨달음은 생명을 위협하는 허기를 극복하기 위해 에텔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역으로 깨닫게 하는 인상적인 대목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그녀는 마녀처럼 거지가 된 아버지의 정부 모드를 만나게 되고 에텔은 모드의 빌라이름으로부터 제니아의 삶의 방식, 자존심을 잃지 않고 현실에 거리낌 없었던 당당함을 회상하고 여덟 살에 모드와 함께 본 볼레로의 공연까지 연속적으로 떠올린다. 자신의 유년기에 선망하던 친구의 자존심과 공연장에서의 함성과 환호, 열정에 대한 기억은 어쩌면 허기에 죽지 않기 위해 자동 재생된 본능이었을 것이며 에텔은 마음의 구멍에 이 기억을 통과시킴으로써 다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텔은 저도 모르게 발현된 기억의 힘으로 모드의 허기를 채워주기까지 하며 그야말로 원수를 사랑으로 갚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나는 모드를 안아주던 에텔의 어깨를 살며시 안아주고 싶었다. 내 부모와 가정을 파멸시킨 주범인 모드였지만 그녀가 당면한 고독과 두려움, 공허감 앞에서 같은 시절을 공유했던 기억의 연대를 통해 자신 역시 같은 괴로움을 위로받고 싶었던 것일까. 모드는 지난 시절 식민지 이주민들을 위해 오페레타를 부르던 가수였다는 점에서 작가는 그녀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주었고 그에 대한 화답으로 에텔의 배려를 택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텔은 모드를 만난 후 더욱 음악에 대한 욕구가 육체적 욕구로 다가왔다고 느끼는데 우연히 거주하게 된 농부의 집에서 강물의 음악소리에 위안을 받고 군인들이 던지는 통조림, 음식물 소음을 볼레로의 한구절로 느끼기도 한다. 기억의 연대가 허기를 관통하며 작가가 선사한 음악은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배고픔에 대한 본능마저도 자신을 지탱해주고 자신을 표현하였던 음악으로 대신하고자 했던 것은 그녀가 대단히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라기 보다는 어린 시절 삶의 허기를 메우던 방식이 연장된 효과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에텔은 작품 마지막에 결국 흰눈과 숲이 끝없이 펼쳐지는 캐나다 토론토로 향하기로 결정하며 떠나기 전 자신을 허기로부터 지켜내 준 추억의 장소를 방문하여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이 과정에서 에텔은 여기저기 표류하던 자신의 허기를 그러모아 새로운 자아에 편입하는데 성공하며 스스로 창출한 정체성에 주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아르모리크 가에 지어진 건물에서는 최소한의 장식이 배제된 것을 확인하고는 삶의 승리감을 느끼고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추억한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묘비에 관용적인 문구들을 넣지 않고 이름과 탄생일, 사망일, 마침표만 기록하길 원했던 가식과 허례의식을 혐오하던 에텔이었다.에텔과 재회한 제니아는 캐나다로 가게 된 에텔에게 명품 의류 브랜드와 아파트를 이야기 할 뿐이었고 이에 에텔은 비로소 헛된 우상과 작별할 수 있게 되어 자신을 찾게 된다. 에텔의 구멍난 가슴을 통과한 사람들은 에텔을 더 성장하게 하였을까? 그러고 보니 에텔의 허기를 채워주었던 사람들은 다시 에텔의 허기를 관통하며 여전히 구멍을 확인해 준 것은 아닐까.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남겨진 기억은 영원했다. 그것은 내가 이 작품을 통해 가징 명징하게 실감한 허기이기도 했다.

작가는 에텔의 가슴에 난 구멍을 마지막에 파리의 도심지대에 패인 구덩이와 동일시하며 개인과 역사의 변주곡을 마무리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밸디브 경기장이 있던 자리를 찾았을 때 그녀는 그곳이 로랑의 고모가 끌려간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장소와 같은 장소임을 기억하는 애도의 시간을 가진다. 자전거 트랙으로 생겨난 커다란 구멍은 파리 한복판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전쟁이라는 역사의 흉터였지만 그곳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침묵으로 소리치는 오늘의 현실임을 에텔은 조용히 깨닫는다. 흘러가버린 시간, 지나쳐온 도시, 통과하던 허기의 기억앞에서 에텔은 지금의 기억마저 강물속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며 다시 허기를 잠재운다. 하염없이 아름답고도 푸르게 멍울지는 강물이었다. 나는 에텔의 강물 속으로 내 生의 허기를 얼마간은 같이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연초에 여간해서 일어서지 않던 마음의 바닥상태가 조금 반응을 보인 시간이었다. 허기를 느낀 다는 것은 다시 살고 싶다는 생존본능의 다른 말임을 깨닫는 독서였다. 그것은 일종의 구호신호일 것이며 생존전략이기도 할 것이다. 지독한 허기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다시 끈질긴 허기를 견뎌내는 유일한 전술일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그가 느끼고 겪은 모든 허기의 총합은 아닐까. 이번 독서는 어쩐지 눈으로만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귀로 듣고도 손으로 어루만진, 마음을 열어 교감을 이루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가 펼쳐 보인 언어의 지도는 슬프게도 아름다웠지만 그가 연주한 음악은 어쩐지 쓸쓸하지만은 않았다. 산다는 게 점점 허해지는 자신과의 지난한 싸움이라는 생각이 많은 요즘이다. 물질과 권력에 힘을 잃고 인간으로부터 기운을 잃고 계절과 날씨에조차 마음을 빼앗겨 마치 허허로운 벌판을 여행하듯 그렇게 헛헛한 마음을 발견할 때가 얼마나들 많은지. 그런데 허기의 증세가 심해질수록 무엇으로도 구멍 난 가슴을 채우기 힘들다는 사실을, 애석하게도 무언가 채우려는 행위를 하고 난 후 느낄 때도 많다. 허기는 애써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허기로 구멍난 가슴에 무엇이든 흘려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채워진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채웠다고 느낄수록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매순간 그 구멍을 메울 줄 알았던 무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멍을 메우려는 의지로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생각, 이 책을 덮으며 다시금 시리도록 깨우친다.  

한순간 극심한 허기로 죽을 것만 같았던 그 순간을 회상하며 그 기억을 부여잡고 다시 살아가는 모습이 내게도 있었다는 사실이 참 고맙고 벅찬 오늘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가슴에 생겨버린 구멍을 인정한 채로 자유롭게 나대로 존재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숨쉬기 힘든 허기는 정작 내 존재의 실체를 실감할 수 없도록 하기에 이대로 사라진다는 것조차도 두려움을 느낄 수 없는 무(無)감각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허기를 슬기롭게 잘 통과해낸 사람은 비록 부족할 지라도 얼마간의 유(有)감각으로 반드시 다시 찾아오는 生의 허기를 제대로 느끼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다. 그렇게 발견해 낸 자신이야 말로 누구보다 자신을 인정하며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또 타인의 허기도 채워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느껴지는  내 오래된 허기가 썩 괜찮고도 대견하다는 생각,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다. 나는 내 허기를 생기삼아 얼마든지 삶의 에너지를 창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기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 그것이 새삼 감격스럽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내 안의 허기여, 얼마든지 나를 흔들고 부수고 쓰러뜨려 주길. 부딪히고 찢겨지고 넘어지는 허기의 파도속에 내 삶의 신비를 내 유년의 꿈을 내 그리움의 고향을 찾을테니 허기여 그대 영원하라. 나 살기위해 사는 동안 그대를 잊지 않으리. 당신도 나를 잊지 말기를, 얼마나 내가 당신을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살았는지 꼭 기억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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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4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2-1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에 대한 그런 기억이 있으시군요.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기억 납니다.
별 일이 없으시면 아버진 7시 반 무렵이면 자동으로 열리는 지하 차고의 문을 열고
들어 오셨죠. 들어 오실 때의 계단들.
아침이면 마당에 라디오를 켜 두시고, 밤새 싸 질러놓았을 개의 배설물 치우시고,
때되면 밥주고 하던...
무엇보다 1년쯤 지났을 때던가요? 어렸을 때 꼭 아버지 차 타고
여의도에 있는 교회를 다녔거든요. 근데 아는 친구놈의 차를 타고 그 도로를 지나가는데
어찌나 아버지 생각이 나던지 그만 울고 말았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벌써 20년된 일이긴 하지만...
댓글 쓰려니 눈물이 핑 도네요.ㅋ

근데 한 사람님 남자 분이세요? 여자 분이세요?
책방 아저씨라고 해서 남자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글 쓰신 거 보면 여자 분 같고.
평소 글 쓰시는 것도 세심한 남자 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보통은 여자가 글을 꼼꼼하게 씁니다만,
이렇게 세심하게 길게 쓰지 않거든요. 아, 저를 이렇게 헷갈리게 하시다니...ㅠㅠ

stella.K 2011-02-14 15:1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군요. 저도 한사람님 글 읽고 댓글 주고 받을 때마다
약간 설레었는데...거 참...ㅠ
한 가지 남자분이라고 생각했던 건,
한사람님은 마실을 잘 안 다니신다는 거죠.
아주 극소수로만 다니시잖아요.
여자들은 수다 떨고 호기심이 많아서 여기 저기 다니거든요.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사실, 예스24에서 첨 뵜을 때 여자분이라고 생각은 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자주(?)뵈니까 저도 모르게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거죠.
제가 참 드문 분을 알게된 거네요. 왠지 더 가까워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느껴지는데요?ㅋ
전 배신 같은 거 안해요.ㅎㅎ

stella.K 2011-02-15 11:13   좋아요 0 | URL
근데 궁금하네요. 왜 한사람님 은사님께선
여성적 글쓰기가 안 좋다고 하시는 걸까요?
너무 감정이나 쓸데없는 말을 많이하게 되설까요?
아님 가부장적인 분은 아니신가요?

아무튼, 그렇다면 한사람님은 일단 성공하신 거네요.
혹독하게 배우셨겠는데요?
아, 은사님 누구신지 저도 뵙고 싶네요.^^
 
코끼리에게 날개 달아주기 - 이외수의 감성산책
이외수 지음, 박경진 그림 / 해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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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침에

정말이지, 가끔은 사는 게 의미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누가 사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만이 살아가는 이유라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어쩌자고 매번 실종된 生의 의미에 절망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가만 보면 이런 기분은 들끓던 무엇이 한차례 휙 지나가고 난 후 일 때가 많다.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극심한 슬픔에 빠져있을 때보다는 그것을 겨우 극복하여 막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려 할 그 무렵에 문득 자살의 유혹에 빠진다는 충고를 하고 있다. 그토록 지겹고 막막했던 어두운 터널을 막 빠져 나오려고 하는 그 순간 그동안 부여잡았던 절망도 나름 제 살같은 정을 키워온 것일까. 점차 다가오는 한줄기 빛이 순간 두려워질 때가 있다는 걸 이대로 어둠을 벗삼는 것도 견딜만하다는 걸, 온몸으로 체감한 그때 주춤하는 발걸음에 당황한 적 나 뿐일까. 내 경운 어떤 일에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 낸 경우 짧은 보람 후 긴 슬픔이 찾아오는 만성병을 앓아왔다. 지난 시절 기계처럼 도전과 성과지향적인 삶을 살아온 生의 이력이 고약한 습관을 창출한 것이다. 때마침 요즘처럼 환절기가 찾아 온다거나 졸업과 입학 시즌을 맞아 새출발을 다짐하는 계절이 닥치게 되면 내 生의 사는 의미는 여지없이 실종되는 국면을 맞이한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시 피는 꽃을 거부하고 겨울외투를 벗지 못한다. 지난 겨울 유래없는 혹독한 추위에 얼마나 기다려온 봄이었나. 기다릴 땐 모든 바램이 봄 하나이더니 막상 오신다 하니 고개들어 사는 의미를 따져든다. 이런 나를 비웃자니, 왜 이리 눈물이 맺히는 걸까.

신년을 맞아 지난 한달 간 나는 좀처럼 책을 집어 들지 못했다. 타의가 아닌 자발적 의지로부터 내 마음을 당기던 책도 없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 글도 쓰기 싫었다. 억지로라도 글을 쓰자니 그런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인가 이깟 글이 무엇을 바꿀 수 있나 하는 반감이 몇 차례나 밀려들었다. 애초부터 책 읽고 글쓰는 것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에까지 이르렀다. 그럴 무렵 어느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요절소식을 접했다. 막 바닥을 치고 올라올 무렵 두려움에 주춤거릴 때 다시 바닥으로 치닫기에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사연일랑 월세 20만원 짜리 지하 단칸방에서 지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단다. 부끄럽지만 남은 밥과 김치가 있으면 부탁한다는 그녀의 쪽지를 보고 나는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죽도록 가난해야 살아있는 글이 나온다고 누가 그랬던가. 죽을 만큼 절박해야 죽여 주는 감동을 줄 수 있다 누가 말했던가. 모두 성공하고 인정받아 한번쯤 부와 명예를 한껏 쥐어본 사람들이 아니었나. 일이 없어 누가 알아주지 않아 자살한 게 아니라 밥이 없어 병들어 굶어 죽었다는 사실이 빌어먹을 만큼 눈물이 났다. 뒤늦게 관할 지역 공무원은 사정을 알았다면 쌀과 보조금을 6개월은 지원받을 수 있었다고 아쉬워 했고 뉴스에선 영화산업 전반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관심을 받지는 못하였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애꿎게도 성공한 작가들이 미워졌다. 늘상 가난에 익숙하라고 나또한 그랬다고 떠들어댄 작가들에 신물이 나 욕지기가 끓어 올랐다. 젊어서 한 고생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조언에 피를 튀기고 살을 태우고 싶었다. 굶어 죽기 싫어 꿈을 버리거나 직업을 바꾼 사람들에게 모종의 우월감을 느꼈을지 모를 그들에게 화가 나서 나는 한 이틀 방황했다. 나이값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오랜만에 화가 나다니, 마침 그런 나와는 일절 상관없다는 듯 봄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실컷 욕하기 위해 집어든 책이었다. 알려졌듯이, 이 책은 완전 신간이 아니다. 옛날의 글과 이야기에 요즘의 글과 그림이 더해져 리메이크 된 책이다. 완전 에세이라 하기엔 형식이 걸리고 잠언집이라 하기엔 그의 독창이 아깝다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출간이 『아불류 시불류』(2010)가 마지막이길 바랐다. 몇 년 전부터 등장하던 그가 제시한 소통법, 생존법, 소생법의 언어들을 나는 이미 청춘의 시절에 미치도록 만나왔기 때문이다.(물론, 그게 다 그거 아니냐 말하면 발끈하실 작가를 모르지 않지만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도 하셨다, 바로 그 작가님이) 그의 주옥같은 초창기 에세이 『말더듬이의 겨울수첩』(1986)이나 『감성사전』(1994)에 무릎을 탁탁치며 보라색 펜으로 옮겨 적던 시절을 굳이 생색내고 싶지는 않다. 에세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설들, 이를테면『황금비늘』(1997), 『벽오금학도』(1992)등을 훨씬 뒤에 읽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유희, 역설과 모순의 문법에 내 이십대 감성의 시원始原을 고히 보관하고 있는 경우였다고, 만 밝힌다. 내 청춘은 분명 그의 언어로 전율한 한 시기가 있었으며 그의 글투와 닮고 싶어 문장을 외우기도 그의 사인과 유사한 사인을 그려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글과 어우러지는 꽃그림에서 정말 꽃향기가 나는 요즘의 책들을 문학성과 작품성이라는 잣대로 행여나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것도 그냥 좋았다. 그만큼 위로받았고 소장용으로서도 가치는 충분했기 때문에. 그런데 얼추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부터 시작된 이 감성여행이 몇 차례 시리즈로 반복되면서 나는 책꽂이에 꽂힌 그에게 더 이상 불시에 찾아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어쩐 일인지 그는 서점보다 TV에서 더 자주 뵐 수 있었는데 그것도 독자와의 세상과의 진보된 소통이라 말하시면 나는 목이 메일 테다. 트위터에 몇 마디 하시면 금새 포털 메인에 기사화되는 그의 여론장악력(?)은 이미 대중일반에게 언어권력이 되고도 남았다. 그렇게 몇 마디 하신 기록으로만 엮어진 촌철살인집이 작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나는 감히, 그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가 시도하는 대중과의 소통여행을 중단하길 바랐다. 감성마을이 아닌 고독한 외딴섬에 정박해 칩거하시길 바랐다. 출간의도와 목적이야 출판의지를 가진 사람들과 다를 수 있겠지만 최종적인 책임은 언제나 이외수의 도장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때 외수마니아층에 속한 적(?) 있었던 내가 이젠 좀 다른 방식의 위로를 원한다 고백하면 이기적인 것일까.

그랬다. 일단은 반가운 마음에 손에 넣었지만 내심 이런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책을 펼쳤던 나는 신기하게도 앉은 자리에서 다음날을 맞이했다. 시나리오 작가의 부고 소식에 화가나 그 화를 이기지 못하고 성의없는 손길로 들쳐본 책이었다. 그런데 덮고 나니 사뭇 비겁하게도 나는 달라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괜스레 누군가에게 미안했고 변심을 확인한 내 스스로 면목이 없었다. 태양은 어제 그대로의 태양이지만 당신은 어제 그대로의 당신이 아니라는, 새롭고 아름답고 행복하라는 그의 마지막 인사에 그만 울컥 한 것이다. 가만 꼬리를 내렸다. 설명하고 싶다. 그러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 한잔 걸치고 연락도 없이 어느 은사님을 찾아 갔다고 하자. 앞뒤도 없고 맥락도 없이 왜 살아야 하느냐 선생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 가시냐 물었다 치자. 그걸 알기 위해 나도 살아간다거나 그건 죽을 때가 되나야 알아진다거나 그런 답은 하지 마시라 무례를 떨었다 치자. 선생님 왈,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물어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이 오면 해주었고 해주고 싶은 말들을 다행히 책으로 엮었으니 심심하면 읽어보게. 실은, 나도 잘 모른다네. 결국 당신 책이나 읽어보라는 뜻이군, 하며 돌아와 한잠 실컷 자고 난 후 어느 봄날, 변덕같은 꽃향기에 맑은 정신으로 책을 펼쳤다 치자. 그래, 정확한 답은 모르겠는데 여튼 살.아.가.야.지. 다시 또 아침이 되었으니 하고 수줍게 책을 덮었단 말인가. 이제, 실은 커피한잔 하며 도사 자격증이라도 따셨을까 갸우뚱거렸다 말하자. 내 지금 이 기분을 간지러운 희망이라거나 급작스런 새출발이라고는 둘러대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살아가야지, 그것만은 확실하지 않겠나. 왜 사는 지 물었다고 콕 집어 답을 주신 건 아니지만 그래, 다시 살아가야 겠다 일어서는 아침이면 된 것 아니겠나.

어떤 비밀을

이 책은 뜬금없는 질문과 쉬운 예시, 그리고 짧은 해답으로 구성된 일종의 인생상담집이다. 누가 물어본다 해도 답이 없을 것 같은 질문과 옛 선인들의 에피소드, 미국과 유럽의 유명인사들의 지혜, 작가의 칼같은 결론으로 이어지는 간결한 구성의 반복은 익숙하고도 친근한 리듬을 제공한다. 연애로 치면 밀고 당기는 기술이 한 수 위라는 말씀이시다. 막간을 이용해 여간해서 볼 수 없는 감성시 십 여편이 소개되어 있는데 청승맞게도 나는 몰래 소리내어 낭독도 해보았다. 알고들 있을까. 80년대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과 서정윤의 '홀로서기' 이후 시집을 사지 않았던 나는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선 절대 이런 시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지난 시절 바람에 으스러지던 '갈비뼈'와 눈물로 송송히 맺히던 '피망울'과, 지겹게도 앓아온 문학의 '폐병'을 반갑게 재회한 기분이 들었다. 이 책에서 어느 부분보다 설레었던 건 내 한 시절을 시리게 저장한 가슴속 시어들이었기 때문일까. 또 무엇보다 '태산같은 지식은 티끌같은 깨달음만 못하다'는 그의 조언대로 광대한 지식이 아닌 속깊은 지혜로 무엇이든 답하는 선문답의 묘미는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것이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삶의 '의미'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전하는 에피소드는 '정직'과 '진실'의 실례가 많았고, 그가 답하는 결론은 내가 가진 '마음' 하나, 내가 만들 수 있는 '사랑' 하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번 리메이크 작품은 어찌 보면 윤리 교과서의 목차처럼 모범적이고 세계문학의 목차처럼 고전적이다. 문체와 문장은 가벼워 보이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느 때보다 묵직하고 일방적이다. 하늘을 날아갈 날개는 더없이 가벼워야 하겠지만 그것이 날아가게 할 대상은 코끼리처럼 막중했기 때문일까.

흡사, 진주를 탄생케 할 生의 비법이라도 꼭 전수하고 싶었던 것일까. 페이지를 넘기며 엄마의 잔소리처럼 반복되는 작가의 끈질긴 의지를 느끼고 말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자신에게 온 모든 젊은이에게 다 주고 싶어 애쓰는 그 마음 하나, 말이다. 하여, 내게 이 책은 진주속에 들어 있는 생명과 아픔을 다시금 상기하고 깨우치는 일이기도 했다. 진주는 어떤 보석보다도 영롱하지만 그것이 잉태되는 환경은 병들고 썩은 조개나 굴인 것이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기생충이나 모래가 조개의 체내로 침입하게 되면 조개는 그 방어기제로 분비물을 배출하지만 바로 이 진주질이 모래를 에워싸면서 제 살속에서 생기는 것이 진주인 것이다. 격심한 부패의 결정으로 탄생된 것이 진주의 생명이고 아픈만큼 빛나는 것이 진주의 광채이다. 뜻하지 않은 이물(異物)을 품어 이상(理想)을 직조하는 삶. 작가는 이 한 알의 신비스런 진주가 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삶의 부패와 투쟁을 견뎌내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설득하고 있었다. 나는 책을 덮고 불현듯 온갖 버러지같은 고뇌와 고통스런 불운속에서도 빛나는 생명이 창조된다는 진주의 기적을 떠올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내 이야기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의 중요성은 고통속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라던 그의 대답은 생명을 침입해 오는 통증과 그로 인한 고통없이는 生의 진주를 얻을 수 없다는 뜻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곧 '혹독한 추위가 없으면 뿌리가 강인해질 수 없고 찌는 듯한 더위가 없으면 열매가 여물 수 없다'는 진리와도 같았고 '예술가는 작품이라는 진주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라도 자기 자신의 생활에 상처를 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와도 상통했다.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고뇌에 찬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색깔을 혼합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는 걸 그 살과 뼈가 깍이는 아픔으로 축적된 것이 소설이고 시라는 걸 그제서야 통감하며 끄덕였다.

그는 이렇듯 삶의 의미에 '고통'이라는 화두를 던져놓고 구체적인 실천이념으로 '그릇'론을 펼치셨다. 상대가 아무리 사랑을 주려해도 그릇이 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바로 자신이 가진 그릇의 크기만큼만 받고 나머지는 그릇 밖으로 흘려보내게 된다고 말이다. 그는 마음 속의 그릇으로 간장종지를 키울 것인지 김칫독을 키울 것인지 또박또박 묻고 있었다. 미처 내 그릇을 가늠하지 못한 채로 사랑은 적고 세상은 야속하다 늘 주는 쪽의 모자람에 투덜댄 내가 부끄러웠다. 이 책은 그러한 각자의 그릇을 키우기 위해 가져야 할 자세를 설파하는 교본이었다. 만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만물로부터 자신을 사랑받게 만드는 일이며, 내 마음 밖에 있는 것들을 모두 내 마음 안으로 불러 들여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는 것이 그릇을 키우는 기초 비법이라 전한다. 허영이라는 이불, 사치라는 꿈, 위선이라는 배우자, 방황이라는 자식에 그만 불치병이 걸린 자들의 병인은 육신과 재물에 대한 소유욕때문이라고 일러준다. 죽는 날까지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어딜 가도 내 것인 것은 마음 하나 뿐이라고 가르친다. 돈이 많으면 자유가 얻어 질 것 같아도 오히려 그의 노예만 될 뿐이며, 구름이 무한히 자유로운 것은 자신을 무한한 허공에다 내버렸기 때문이라 일갈한다. 만사 살기 편한 환경은 바로 죽기도 편한 환경이기에 고통이야 말로 生의 의지를 존속케 하는 촉매제라고. 정말 오래 살고 싶거든 더 오래 고통을 가지고 있으라고. 글을 쓰는 일은 도를 닦는 일이므로 머릿속에 있던 사실이 가슴속에 들어와 발효된 진실로 적은 내 글 한 줄이 죽어가는 누군가의 영혼을 구할 수도 있다고. 어두운 과거를 뒤에 두고 밝은 빛을 향해 한 걸음 걷다보면 마침내 여명이 빛나는 것이라고. 아무리 길었던 밤도 아침을 맞이하며 한평생 어둠만 지속되는 인생은 없기에 다만 지금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라고. 이렇듯 누구나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선 더 큰 '고통'을 껴안아야 하며 그러한 고통으로 연주한 침묵의 소나타야 말로 빛나는 '진주'의 결실을 약속하는 生의 비밀이라고.

어떤 눈물로

이 책을 읽기 바로 직전까지 나는 '당신은 배가 고파도 당신이 추구하는 일을 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할 수 없이 막 변절코자 한 독자였음을 고백한다. 어찌 내 속마음을 알고 그럴줄 알았다 신기하게 나타난 것일까. 굶어 죽느니 차라리 다른 일을 찾아보고 싶었던 마음 한 구석을 들킨 기분이 한참 동안 서운하고 쓸쓸했다. 딱 일년 전이었다. 작년 이맘때 쯤 기왕 이렇게(?) 된 거 책이나 실컷 보고 글이나 써보자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던 기억...새삼 책으로 사는 의미를 다시 발견해 보자고 다짐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야심차게 시도한 사업의 실패로 실은 무엇을 다시 시작하기 두려워 시간을 벌고 싶었던 것이다. 직장다닐 땐 하루 종일 책만 보고 또 다음날은 하루 종일 글만 써보는 것이 소원일 때도 있었다. 소원풀이 하듯 지난 일년 간 나는 책속으로 들어가느라 세상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어이없게도 친했던 사람들과 등을 지게 되었다. 그럴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책은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주었고 글은 그럴싸한 위안소가 되었다. 어쩌면 그러는 동안 사는 의미를 잊고 살았는지 아니 잊고도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루키는 예를 들어, 면도같은 일상의 행위도 매일이 반복되면 하나의 철학을 가진다고 했다.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내 일상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되려 삶의 의미를 잊게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중단하기 위한 좋은 방편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삶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슬쩍 누군가에게 다른 것에 토스하여 순간을 모면하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반복되는 내 일상에 스스로 철학을 발견하지 못하고 시간과 계절에 지배당하면서 나는 틈틈이 균열을 감지해야 했고 어느 정도 나만의 방식과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상이 공식처럼 반복되는 것에 슬몃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래..도피와 위로의 반복만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인 것인지. 삶에서 도망치려고 상처만 위로 받고 말려고 책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인지. 이제 그만 멈추어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닌지. 내 철학을 찾지 못한 나였기에 오늘처럼 누군가의 죽음에도 지나치게 쓰러질듯 흔들리고 괴로워 한 것은 아닌지.

물론, 나는 내 무겁던 엉덩이에 잘 버티고 있던 어깨위로 사뿐한 날개를 달았다고 급작스레 책을 덮고 세상을 향해 뛰쳐나가 사람들 속으로 몸을 던지겠다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이번 독서가 독서에만 빠져 허우적거리던 내 자신을 거짓없이 자각하는 계기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세상을 등지고 책속에 들어 갈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세상을 느끼며 사람을 견디며 책을 곁에 둘 수 있을 듯하다. 굳게 닫혔던 마음이 한번에 열리진 않겠지만 그 마음 하나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꿈도 회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처럼 하루의 반을 책만 읽고 글 쓰는 것에 어떤 자폐적 열패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나아가 生에 대한 죄책감과 부질없음에 숨쉬기 어렵다면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 무성의하게라도 이 책을 몇장 넘겨보길 권하고 싶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어느 날, 어느 오후 많은 것을 기대하라고는 하지 않겠다. 곁에 커피가 있다면 한 모금, 캔맥주 한개라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가끔 너무 진부한 이야기라면 남몰래 비웃어도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알고 있던 이야기는 다시 확인하고 어디 써먹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오후 늦게 비가 내린다고 옷깃이 젖지 않고 그만 가슴이 젖어 주책맞게 눈물이라도 흐른다면 그 가슴을 탓할 자 누구인가. 나는 여전히 투덜거리며 책을 펼칠 것이고, 책을 서재에 꽂기도 전에 또 글을 쓰고 있을 거라는 걸 알게 됨이 조금 창피하긴 해도 다시 기쁜 걸 어쩌겠나. 수면제에 길들여진 어느 독일작가가 우연히 잠들고 나서도 수면제를 먹는 것을 깜빡했다며 다시 일어나 약을 먹고 잠들었다는 일화의 주인공처럼 어쩌면 서평을 써놓고도 또 책 읽는 것을 책 사는 것을 잊었다고 할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어쩔 것인가. 매일 먹는 밥이 지긋지긋하고 싫증이 나다가도 밥처럼 중요한 건 세상없듯이 당신은 나처럼 정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어느새 책이 되어 버린 스스로를 발견하고 돌아 올 뿐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밥을 먹고 피와 살이 만들어 질 때도 있지만 또 밥 때문에 피와 살이 고통받을 수 있듯이 책으로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절망할 수도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도 당연지사 아니겠나. 과학과 물질문명의 진보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시대가 온다 해도 책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을 믿으며 한명의 작가를 기다릴 당신과 내가 이 순간 잘못하며 살아온 것 같지 않다는 생각, 우리 그렇게 같은 마음으로 책을 덮어내지 않을까.

또 한권의 책으로 변덕많고 의심스런 이 계절을 견디고 허전한 마음을 다시 채운다. 이 책은 지금 막 새출발을 하려는 청춘에게만 적절한 선물은 아닌 듯하다. 청춘을 지나온 나는 불혹에도 오히려 더 절망의 유혹에 가슴이 달뜨고 생의 포기에 번민의 출사표를 던지곤 한다. 실패와 좌절을 겪어 보았기에 더욱 시작이 두렵고 사람이 무섭다.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만나온 사람만큼이나 모든 앙금이 쌓여 코끼리처럼 거대해졌고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목메도록 서러울 때가 얼마나 많단 말인가. 아마 내게도 살면서 한번은 고통으로 잉태된 진주를 손에 쥘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그건 눈물방울로 빚어낸 그것일 것이다. 애통하고도 저며드는 시나리오 작가처럼 허망하게 죽지 않고 살아남아 고통의 분비물로 환희의 보석을 빚어낸다면 그건 필시 오늘로부터의 약속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서양의 신화나 동양의 전설에서 '진주는 눈물'이라 배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자식을 잃고 흘린 어미의 눈물이거나 혹은 죽은 영혼을 부활하고자 흘리는 여신의 눈물이 진주가 되어 돌아온다는 비극의 결정, 고통의 절정에서 떨어지고말  순수의 바다, 그 바닷속에서 숨쉬는 영혼이 되고 싶은 오늘, 나 오늘만은 진주가 되지 못한 그녀를 위해 돌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꿈앞에 머리 조아려 울어 드리고 싶다. 당신은 갔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 염치없이 소리도 쳐보고 싶다. 내 삶의 진짜 주인인 진주(眞主)가 되기 위해 나는 진주(珍珠)를 기다린다 고백하고 싶다.

무엇보다 값진 진주, 누구보다 아름다운 진주는 이토록 아프고 고통스러운 비탄의 파도와 통곡의 바다속에서 영롱한 빛을 얻는 다는 사실을 내 마음의 그릇에 새기겠다. 그러한 生의 진주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내 모든 눈물이 원료가 될 것이기에 내 앞에 닥친 모든 비극에 도망치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내가 흘린 눈물로 씻어낼 수 밖에 없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진주의 조개를 거세게 몰아치던 파도여, 여린 속살을 뚫고 상처를 긁어대던 바닷물아, 내 눈물이 진주알이 되는 날 그 진주알이 내 핏속으로 맺히는 날 그 혈액이 나만의 생명으로 꽃피는 그 날, 내 안의 뜨거운 빛을 똑똑히 보아다오. 절망하지 않고 아침을 기다린 내 눈물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해 낸 내 미련을 기억해다오. 언젠가 내 살이 문드러져 생명이 부패한다 해도 그 어둠이 진주처럼 오롯될 그날 그 한방울의 진주가 당신의 혈액속에 흘러들어 다시 희망의 액체로 부활할 그날을 위해 나는 희망을 약속한다. 진주의 신비여, 생명의 아름다움이여, 내가 썩어도 그로인한 당신의 푸른 바다는 영원하시길. 내 살 속에서 생겨나온 딱딱한 덩어리, 돌이 아닌 그 한방울의 눈물일랑 오래오래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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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전략에 성공한 작품이다. 문학상 수상작으로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대상에 어울리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특이하게도 공동수상작을 내었다는 것은 절대감에서 반절만 차지했다는 뜻인데 나머지 한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주제넘는 말이지만 그것도 이해가 갔다. 안전하게 너무 잘 계획되었다고 할까. 조직에서 꼼뻬(competition)를 많이 참가해 온 이력덕에 나는 1등을 찝어 내는 직관이 좀 발달했다. 문학에서 1등은 언제나 2등보다 월등해서가 아니라 1등이 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선정되는 것.(내 생각이다) 이 작품은 누가 봐도 1등이 될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그런데 난 아쉽게도 그 점이 책에 대한 감동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책을 덮고 놀라움에 박수는 쳤지만 어쩐 일인지 가슴이 데워지거나 머리가 시원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아무래도 전략과 전술이 완벽했기에 감지되는 치밀함, 잔여감의 상실에 대한 아쉬움, 감성보다는 이성이 탁월했다는 지적인 공감에서 비롯되었을까. 다년간에 걸친 어떤 기획 프로젝트의 성과물과 같이 이 책은 잘 연구되어 있었다.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그다지 기대했던 만큼 재미있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내 멋대로 굉장히 재미(?)있을 줄 알았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작품을 들쳐보기도 전에 제목만 보고 기대를 한 내 잘못일지 모른다. 어쩌면 내가 떠올리던 '책 사냥꾼'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토리에 대한 단순한 취향의 문제를 작품성의 문제로 보고 싶지는 않다. 알려졌듯이 이 작품은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해서 본의 아니게 이번 리뷰는 나를 아쉽게 한 나머지에 대해 마음을 정리하는 글이 될 듯하다. 그것은 썩 유쾌한 시작은 아니다. 남들은 다 좋다고 문제없다고 하는데 유독 딴지를 거는 독자의 느낌도 들고 굳이 그 기분을 서평으로까지 남길 때 나는 어떤 죄책감마저도 느끼는, 적어도 서평자로서는 늘 작가에 마음이 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오수완이라는 작가는 나와도 갑장이고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이 책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인데 아무리 내 의견이 소중하다 해도 좋은 말을 해드리고 싶은 쪽이지 행여 작품을 폄하하거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이렇게 배수진 치면서 결국 비판하는 안 좋은 습관을 버리고 싶지만 거짓말하고 싶지도 않은 진심을 알아주기를.)

결국 이 책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래된 어떤 연민을 자극하는 어둠의 미학을 가졌기 때문일까. 공교롭게도 지난주에 불혹이 넘은 어느 '책 도둑'의 사연을 뉴스에서 접했다. 대형마트 서점에서 160여권의 책이 없어진 후 범인을 잡았는데 그는 놀랍게도 그 많은 책을 다 읽었다는(?) 것이 뉴스였다. 단순절도가 아니라 정말 책이 읽고 싶어 훔쳤다는 것이고 그 모든 책을 다 읽은 것이 믿기지 않는 다는 것. 삼십대에 직장을 잃고 좀처럼 재기의 기회를 잡지 못한 그는 집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책을 읽는 것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독신으로 오후 세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 이불속에서 책만 읽었다. 늙은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그는 자신의 방 한 칸 책꽃이 가득 헌 책과 새 책을 모아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었는데 80년대 중반의 어느 시인의 절판된 시집을 보여주며 이 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느냐, 우리 쪽에선 국보급의 가치가 있다며 기자에게 장난끼 섞인 목소리로 넌지시 질문하기까지 했다. 그때 슬쩍 클로즈업 되는 그의 표정과 생기가 넘치던 그 미소, 는 참 행복해보였다. 그 순간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이 귀한 시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내가 유일하다는 그의 우쭐함이 얼마나 서글프게 느껴졌는지 도둑은 알고 있을까. 그가 마트에서 한 권씩 훔쳐간 책은 거의 두꺼운 고전들이었고 '**평전', '**비판'같은 인문서적들도 있었다. 제작진에게 추천할 만한 책으로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권했고 자신이 꼽은 인생의 책으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주저없이 언급했다. 컨텐츠로만 보자면 최고의 지식인으로 자격을 갖추었겠지만 그가 너무도 무능력해보여 얼마나 화가 나던지. 별로 충격적인 뉴스도 아니었는데 며칠 동안 나는 적잖이 우울했고 이상하게도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날 그 '책 도둑'에게서 얼핏 책에 빠진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저렇게 우습게도 보일 수 있구나, 책만 읽는 다는 것이. 책만 읽는 다는 것이 저렇게 아무 소용없을 수도 있구나. 아무 소용없으니까 또 책을 읽는 것이겠지... 하며 나는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내 심리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세상과 담쌓고 철저히 비현실속에서 은둔을 택한 자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바로 본 나는 혹시 나도 저렇게 늙어가는 건 아닐까 싶어 아침에 거울을 보는 것도 두려웠다. 하필, 그 시점에 이 책을 읽게 되어 더욱 불쾌하고 난감한 심정으로 책을 덮었음을 밝혀둔다.(나는 한권의 책을 집어든 특정 시기와 때마침 읽게 되는 책의 내용과는 어떤 운명적인 상관관계가 있음을 믿는 사람이기에)

나는 우선, 책의 내용보다 외향적인 특성을 언급하고 싶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이 바로 작가만의 방식으로 서사를 밀고 나가는 문체의 습관이었기 때문에. 이 개성있는 작법이 이 작품에서만 의도된 것인지 자신만의 굳어진 특기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경우의 수와 함수관계를 끝간데까지 나열하는 문장의 배열은 분명 서사의 진행에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다. 초반부엔 환상과 현실을 모호하게 하는데 중요한 장치로 보였고 사유의 정점에서 느끼는 오르가즘이 꽤 인상깊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매순간 반복되는 '~일지도 모른다'는 꼭지마다의 결론은 지루함을 유도했기 때문에 내 경우 가독성에 있어 피로감을 가중시켰다. 어떤 부분 필력이 과했다고까지 느껴졌다. 이야기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추리장르의 수사를 연상시켰는데 이러한 과다필력이 스토리 긴장감과 박진감에 부담을 주지 않았나 싶다. 아마도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결코 추리 소설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려고 끝까지 'A는 B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는 결론 유추의 방식을 고집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사고과정이 점점 슬프게 다가왔던 건 전형적인 책벌레들이 결론을 마무리 짓는 멘트와 유사해 보였기 때문일까. '사는 건 죽어가는 일일지 모르고 죽는 것 또한 삶의 일부이다'라는 틀에 박히고도 진부한 이 결론을 자신이 찢을 수 있는데 까지 분해하고 붙일 수 있는데 까지 붙여 울궈먹는 것이 서평자들의 습관이기도 하기에 나는 그의 문체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적어도 사고의 서술이 아닌 사건의 전개부분에선 과감히 지양해야했을 작법이었다고, 감히 적어본다. 그런데 또 한편 이해가 가는 것은 본인이 토해낼 수 있는 만큼은 모두 끌어내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이루었다는 생각에 아마도 다음 작품부터는(?) 이러한 남김없음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음, 이야기로 본다면 서사는 완벽의 구조아래 그 소재와 주제, 에피소드가 아주 흥미롭다. 주인공 '책 사냥꾼'은 말더듬이에다가 도형이라는 실명을 가지고 있다. 이름의 끝자리에 벌레(蟲)와 불꽃(火)이 어우러진 반딧불 형(螢)을 택해주신 바람에 그쪽 세계에선 '반디'라 불리운다. 이는 '내가 만약 빛을 낼 수 있다면 딱 한권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는 그의 바램을 상징하기도 하며 서사에선 대결구조였지만 사라지고 만 '검은 별'과 상반되는 닉네임이었다. 작가는 실질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세상에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책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다행히도, 세상에는 밤하늘의 별만큼 많은 책이 있다.'는 문장으로 끝을 내고 있다. 밤은 검지만 별은 빛나므로 '검은 별'은 빛나지 못할 것이고 비록 반딧불만큼 이지만 그만큼의 빛이라도 존재한다면 '반디'는 영원히 빛날 것이라는 자기희망적인 의미를 모르진 않는다. 그런데 이 '반디'가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형설지공, 螢雪之功)을 상징하기 보다 어두운 동네 한 귀퉁이에서 이슬을 먹고 별똥별처럼 흩날리다가 처량하게 죽어버린 구슬픈 존재로 다가오는 건 왜일까.

우리가 무엇을 훔친다고 했을 때 그 대상이 책일 경우 주어지는 면죄부는 아마도 탐욕의 본거지에 대한 똘레랑스일 것이다. 음식이나 귀중품에 대한 탐욕과 지식에 대한 탐욕이 다를 것이라는 기대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다른 것이 아닌 책을 빌려간 후 돌려주지 않아도 도둑놈이라 비난하지 않는 건 지식에 대한 욕심을 눈감아주고픈 인정(人情)일 것이다. 마트의 책 도둑과 책 사냥꾼 반디에게 절도와 강도의 형벌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건 '책을 향한 욕망'만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싶은 자신의 욕심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책도둑들은 책을 팔거나 소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미치도록 읽고 싶어 읽기 위해서가 많다고 한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서울의 초대형 서점 한 곳에서 1년에 도난당하는 책은 7만~8만권이며 잡히는 사람으로는 번듯하게 생긴 회사원이 가장 많다고 한다.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용기를 선동하는 힘은 음식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수치심을 억제하는 힘보다 큰 것인가 보다. 그런데 이 책에선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책 도둑의 욕망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비즈니스로서의 고서추적에 대한 책 탐정의 능력을 책 사냥꾼의 자질로 언급하고있다. 즉,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찾기 위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책을 찾는 이유는 내가 좋아서라기 보다는 내가 남들보다 잘 찾는 능력이 있으니 누군가가 의뢰를 한다는 것이고, 책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책에 관한 환타지가 곁들여 졌다는 것이다. 책을 찾기 위해 그만한 가상의 책이 등장할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즉, 그 많은 책을 모르고 있었어도 책은 그럭저럭 찾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책을 그토록 목숨 걸고 찾는 이유가 자신이 죽을만한 이유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면 그 개연성은 정당화, 논리화, 감동화되고도 남았을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두에 내가 생각한 책 사냥꾼이 아니었다는 뜻은 사냥의 목적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책 사냥꾼의 긍정적인 역할이 있었다면 '사라진 책을 찾아내 책에 또 다른 삶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곧 이 작품의 주인공이 '책 사냥꾼'이 아니고 책 사냥꾼이 '찾아 왔고 찾고 있고 찾을 책'이었다는 말과도 같다. 이것은 끝에 가서 책 찾아 목숨건진 책 사냥꾼의 이야기가 묻혀 지고 개연성없이 허공에 떠돌던 무수한 책들만 투명의 책꽂이에 꽂혀진 느낌으로 남게 되는 치명적인 원인이었다. 정말로 이 책에 등장하는 가상의 책들은 본 서사와 상관없이 흥미진진하고도 남았기에.

그 결과, 모든 책의 참고문헌이라는 <세계의 책>, 미도당의 윤 선생으로부터 의뢰받은 <베니의 모험>, 책 사냥꾼이 되기로 마음을 먹게 한 <찰리 이야기>, 모든 고문 기술서의 고전이 된 <마르세유>, 작중화자가 마지막에 자신의 이야기에 이름붙인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등 거의 모든 가상의 책들은 내게 변별력없이 다가왔다. 제목과 내용이 달랐지만 어쩐지 하나의 이야기, 한권의 책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한 책에 관련된 정보보다 그곳이 책들의 무덤인지 요람인지 지옥인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이 작품은 책에 담긴 내용만큼이나 책이 존재하는 장소도 중요한 복선이라 생각했다. 기왕에 환타지를 도입할 거 마지막 노인의 미로뿐 아니라 아홉 개의 책을 발견한 모든 장소가 좀 더 해당책과 관련해 입체적으로 시공을 넘나들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 책은 책 사냥꾼이 활동하는 시대를 출판의 자유가 몰락한 시대로 설정하여 비록 가상이긴 하나 '책 파동'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미래적으로 투시하는 뼈있는 농담도 노련하게 배치하고 있었다. 출판강국의 미명하에 출판 비리와 관련된 당국의 조사가 진행되고 출판사는 통폐합되고 인쇄및 배본소, 출판사, 인터넷서점은 줄줄이 문을 닫는다는 사회적 현상을 예견해 본다는 점에서 책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출판업의 윤리에 대해서도 나름 신선한 발상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 책을 사랑해온 사람으로서 책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정체성의 문제도 마지막 귀결부에 편안하게 안착시켰다는 점은 가장 큰 성취로 보아야 할 듯하다. 작년에 김영하 작가의 여지껏 자신이 써온 모든 책이 자신보다 더 자신같다는 생각을 한다는 인터뷰를 기억한다. 이 책에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책들의 총합. 어쩌면 내가 읽은 책들이 바로 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작가의 고백이 가장 깊게 울려오는 것은 나 역시도 아마 '책이 죽기 전에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다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라 믿는' 책을 사랑하는 대다수의 독자들 중 한사람이기 때문일까. 책은 사람이 태어나듯 태어나고, 사람이 살듯 살아가고, 사람이 죽듯 죽어갈 것이라는 그의 목소리가 짐짓 숙연하게 들리는 것은 그가 여지껏 그토록 매달려온 것도 책일 것이고 죽을만큼 미워하기도 똑같을 만큼 사랑하기도 한 누구보다 책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독서광들은 많이 보았지만 정작 내 자신이 독서를 광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책에서 위안을 얻게 된 것도 채 일 년이 되지 않았다. 사실 책으로 죽고 못사는 사람들을 애써 이해한 쪽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이러다 지금까지 써온 서평이 나라고 하는 때가 오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책, 모르긴 해도 덮고 나면 작가는 너무나 책을 사랑해 이런 작품을 쓸 수 밖에 없었겠다는 깨달음이 절로 들 것이라 확신한다. 분명한 건 이 책은 세상에 없는 책이었으며 앞으로도 세상에 없을 책이라는 것이다. 그의 독창(獨唱)은 사실, 무섭게 독창적(獨創的)이었다. 몰래, 기립박수를 치고 싶을 다음의 노래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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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1-28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위안을 얻게 된 게 일년이 채 안 되신다면서
리뷰는 왤케 잘 쓰시는 겁니까?
이 책 칭찬은 많이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별 세 개십니다.
이걸 어케 해석을 해얄지...ㅎ
저도 능력만 되면 책에 대한 책을 써 보고 싶긴해요.
물론 안 쓰는 것이 여러 독자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에 안 쓰지만.ㅋㅋ
어쨌든 오랜만이십니다.^^

stella.K 2011-01-28 15:28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전 요즘 작가들 작품 재미없어요.
이 책도 딱히 끌리진 않는데 너무 광고가 요란하죠? 히~

cyrus 2011-01-28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어요. 이 책에 별 다섯개준 저로써는 민망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
나름 책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추리적 요소나 긴장감이 감돌게 하는 서술을
기대했는데,, 정작 읽고나서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제 글에서도 말했지만,
종이책이 태워지고 출판사가 통폐합하는 장면만 인상깊었어요..^^;;

감은빛 2011-02-12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책도둑 얘기 듣고 참 재밌다고 생각했습니다.
늦은 밤 택시기사님께서 말씀해주시더라구요.
함께 동승했던 친구와 책 얘기를 하고나니, 기사님이 책 하니까 생각난다고 하시면서.

글 참 잘 쓰시네요! 것도 그닥 재미없었던 책에 대해서 이정도로 쓰시다니요!
감탄하고 갑니다! ^^
 
염소의 축제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그대 이름은 노스탤지어(鄕愁)

이상하게 들릴까. 나 이 작품이 너무나 감미로왔다. 독재도 그리움이나 향수(鄕愁)가 될 수 있을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책을 덮고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마치 장안에 화제가 된 어느 드라마라도 종영한 그 순간처럼 아쉬움의 탄식이 비어졌다. 지난 시절 독재장르의 소설을 울분이나 연민으로 만나왔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면 분명 진일보한 변화가 아닐까 싶었다. 작품이 달랐던지 내가 변했던지 어느 한쪽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더불어 나는 이 작품이 좀 더 계속되어야 한다고 자꾸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같은 독재지만 바르사가 요사 이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의 작품에선 피해자로서의 상처가 더 오롯되 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루마니아라는 동유럽보다 도미니카라는 라틴아메리카가 더 멀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과 남미에 대한 경제적 우월감, 여성작가로서의 증언자 대 남성작가로서의 정치가, 그것도 아니면 내 무의식속에 오랜 세월 저장된 동유럽의 가녀린 체조선수와 남미의 육체파 야구선수 정도로 비교되는 기존의 편견들 때문이었는지 나는 이 작품에서 독재를 예전처럼 상처로만 인식하지 못했다. 대신 신기하게도 약간의 거리감 덕에 제대로 독재를 즐겼다고 할까. 미안한 말이지만 흡사 남미의 삼바축제라도 관람하듯 그들이 연출하던 화려한 독재의 축제를 보기좋게 음미했다는 만족감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역사라는 기록과 증언보다는 소설이라는 허구와 비현실에 그야말로 취해들었던 시간이었다. 이는 우리 역시 비슷한 시절을 겪고 민주화를 이루어낸 같은 경험자로서 상당히 부끄러운 반응임을 먼저 고백한다. 하지만 이 책이 역사서적이 아닌만큼 나는 적어도 문학적, 예술적 수치감을 느끼진 않는다. 독재장르로서의 보편적 주제, 독재자와 독재피해자에 온전히 통감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아니라 독재에 대한 정반대의 시각을 얻게 되었다는 신선함, 나는 지금 그 새로운 자극에 들떠 있는 것이다. 극명한 현실을 소재로 더 자명한 이야기를 창조했으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망각하고 이야기 속에 완전히 빠지도록 이끄는 작가의 마력이 놀라웠다. 작가야 말로 자신이 만든 허구 안에서 한 치의 반역도 허락치 않는 절대 독재자가 아니었을까. 나 역시 그러한 독재의 마법에 일정시간 마취당한 순수한(?) 독자가 아니었을까. 그는 이미 이 작품을 집필하기 30여 년 전에 “소설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장르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침략적, 제국주의적 장르이자 문학의 최상의 형태” (La novela, 9 / 1974)라 주장한 바 있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아마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독재자 한두 명쯤은 별 수 없이 자주 중첩되는 순간이 많을 듯하다. 그런데 그 한사람은 세대별로 다르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운 아버지 세대의 자부동 각하 한명과 내 청소년 시절의 9시 '땡'뉴스 한 분이 떠오른다. 이 책에서 독재자는 트루히요라는 실명외에 '수령님', '총통', '각하', '대통령'이라는 직위로 혹은 '검둥이'라는 인종으로 아니면 '자선가'나 '조국의 아버지', '재정 복구자'로 불리워지며 호칭에 일관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말하는 화자에 따라 대화하는 상황에 따라 그 수식은 대체로 자유로와 보였다. 독재자 역시 의상이나 외모에 상당한 강박을 보인 것에 비하면 호칭에는 별다른 구속없이 민주화를 이루었달까. 실제로도 그에겐 총통(Generalismo), 조국의 수호자(Benefactor de la Patria), 신조국의 아버지(Padre de la Patria Nueva) 등의 칭호가 붙었고 추가로 교회 수호자(Benefactor de la Iglesia) 칭호를 부여받기를 원했으나 교회로부터 거절당했다고 한다. 결국 그 모든 호칭은 대중이 부르고(도미니카인들이 즐겨 부르던 메렝게에서 트루히요를 chivo로 지칭) 작가가 붙여준 '염소'라는 심볼하나에 취합되는 형국이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독재자의 획일적이고도 독보적인 대명사로서의 절대적 존재감은 유명무실해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의 다양함이 되려 독재자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연출하는데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이는 한명의 독재자였지만 사람들에겐 여러 의미의 마법사로 존재하던 다양한 악마의 애칭들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브랜드 이미지를 다각화한, 다분 작가의 의도적 장치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듯 독재자는 자신의 호칭에는 일절의 강요가 없었지만 바로 작가가 계획한 축제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부단히도 염소와 부합하는 기질이나 외모, 성격을 더 중요시 하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중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체질적 특성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염소라는 동물의 본질에 가까웠다. 어렸을 때 나는 하도 물을 안 먹어 어머니로부터 '네가 염소**니'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염소가 물을 안먹는 것이 아니라 습한 곳을 싫어하고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특성 때문에 수분이 많이 필요치 않은 생태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물을 안 먹으면 염소같다는 놀림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독재자는 자신의 체온을 조절하기위해 작동되는 땀이라는 시스템은 가동하지 않으면서 가장 치밀하게 제어해야 할 방광은 통제하지 못해 그만 소변을 흘리고 다니는 신세로 그려진다.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건강한 땀으로 노폐물이 배설되지 못했으므로 다른 기관에서 질질 새어나오는 것이 당연해보이기 까지 했다. 그것은 일흔에도 손녀뻘의 소녀와 회춘을 갈망한 독재자의 탐욕에 작가가 내린 치명적인 벌이었을까. 여하튼 나는 소변으로 땀을 흘리는 그의 질병이 마치 염소의 축제에 주인공으로 선택될만한 매력이자 마땅한 자격이라는 생각에 작가의 농담이 얼마나 유쾌했는지 모른다. 반사적으로 같은 병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네 두 명의 前 대통령도 떠올랐다. 이렇듯 호칭이 여러 가지로 분열될수록 독재자의 소변이 새어나올수록 '염소'를 향한 끄덕임은 점차 설득력있게 다가오기도 했는데 유독 우리의 군사독재시절을 총정리하듯 호명하는 호칭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 작품을 번역하신 스페인 중남미문학의 전문가 송병선 교수의 유머로도 느껴졌음이다. 번역에서 독재자의 측근에 위치한 사람들을 굳이 '첩보부대장'이나 '합동참모부사령관'으로 명명하는 덕에 나는 우리시절 독재자의 마지막 날이 생각나기도 하였기에 말이다.

작가의 풍자적이고도 독재적인 마법덕에 이 책의 독재자를 만나보고 돌아오는 길은 그 시절의 아픔을 되새기고 상심하기 보다는 같은 시절을 그럭저럭 잘 헤쳐 나왔다는 대견함에 이르는 일이었다. 독재로 신음하던 그 시절 우리는 어쩌면 그들보다 한참 못한 상황이었지만 지금 우린 바로 그들의 옆 나라, 한때 그들을 지배하기도 했던 지진으로 폐허가 된 아이티를 당당하게 원조하는 나라가 되지 않았던가. 엊그제 1986년 민주화혁명으로 쫒겨 났던 아이티의 독재자, 트루히요와 나란히 둘째가라면 서러울 뒤발리에가 25년간의 프랑스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이 책에서 가장 잔인한 정보원으로 등장하는 조니 아베스가 말년에 아이티로 망명해 그의 자문관으로 일하지 않았던가. 작품 후반부에 조니 아베스는 반란을 지지 하다가 그로부터 전가족이 몰살당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기에 책을 덮은 시점에 거짓말처럼 등장한 뒤발리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독재의 악령처럼 내 가슴을 서늘하게도 하였음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30년간 아이티를 공포와 억압으로 몰아 넣었던 뒤발리에지만 혼란한 정국을 틈타 민심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정치본능도 다시금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부 아이티 국민들은 지난날의 상처보다는 눈앞에 닥친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독재자의 카리스마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니 한편 씁쓸해지는 이 실망감은 순간 묘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위기상황에서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어쩐지 그리 낯선 감정은 아니라는 생각. 한편으론 그 심정을 이해할 것 같기도 한 마음 한구석에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의 장소라도 발각된 기분이랄까. 내게 있어 그 곳은 우리 스스로 피눈물로 이루어낸 민주화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군사독재의 지휘아래 일사불란하게 앞을 보고만 달리던 유년시절의 향수가 대치하는 갈등의 접점지대일지도 몰랐다. 어느덧 나는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느끼는 세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권이 '이제 독재자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2권은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라 말하기 위한 책이었다. 실제로 작가는 생물학적으로는 분명 '死'했지만 심리적으로는 결코 '死'라지지 않았던 독재라는 마법이 라틴아메리카에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일종의 애도를 표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학으로 독재자가 되어 그 자율성하에서 거대한 반란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 같다. 작가는 우리에게 강압이 아닌 자의에 의해 맹목적인 것에 휘둘리고픈 인간의 욕망, 절대자에 의지하고 싶은 나약함이 독재라는 통치와 얼마나 조화를 이루어왔는지 그것을 확인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타도해야 할 것은 독재자가 아니라 독재라는 마약이었음을, 그 마약을 끊지 못하는 인간의 두려움이었음을 증명하려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도 자유롭지 못한 生의 유혹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나라, 도미니카를 알지 못했다. 유명한 인물을 떠올려 보아도 메이저 리그 시절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박찬호가 가끔씩 삼진 처리하던 강타자 새미 소사정도만,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항상 우승후보였던 육체파 흑인들만이 기억날 뿐 심지어는 카리브해 연안의 관광지 지명하나 떠오르지 않았던 터이다. 이 책을 덮고 세계지도를 다시 펼쳐보았다. 독재의 잔재보다는 그저 작열하는 태양과 눈부신 해변이 아름다워 관광지 사진에만 눈이 휘둥그레 졌었다. 신기하게도 매력적인 카리브해의 태양처럼, 섣부를지 몰라도 이 작품을 통해 개인적으론 독재와 독재자에 대한 나름의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시절을 잊어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도 그 시절의 상처를 교훈삼아 당당히 독재에 신음하던 바다건너 피해자들을 공감으로 격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아이를 먼저 낳고 나온 산모가 아이를 밴 산모 앞에서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듯. 그땐 죽을만큼 아팠지만 이렇게 아이가 컸다고 자랑하고 싶은 그 마음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질식시키던 독가스로서의 향수(香水)가 아닌 그 하나만이 정답이고 진실이라 믿어온 그시절 그들 열정의 향수(鄕愁)만은 오래 기억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독재와 독재자가 고향처럼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지독히도 아픈 기억도 추억이 될 수 있었음에 뒤늦은 감사를 드린다.

Background

-사람들은 과거의 지독한 상처도 지나고 나면 좋았던 순간을 추억하는 심리가 있다.

-독재자는 용서할 수 없지만 독재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자극함으로써 향수를 달래게 한다면.












우라니아로 날아든 나비들

여학교만 십 오년을 다녀서 그런지 나는 사회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페미니스트로서 목소리를 많이 드러내었던 것 같다. 나는 결혼과 육아, 직장을 병행하면서 논문을 진행하기도 했기에 직장에서의 차별적 대우나 일과 가정을 동시에 꾸려나가기 힘든 사회구조에 굉장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그러한 시기를 헤쳐 나온 덕에 같은 여성후배들에게 솔직한 충고도 해줄 수 있고 그 시절 내 논리에 슬몃 미소지을 수 있지만 그땐 참 온몸으로 분신하여 울고 싶을 때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내게 있어 결혼과 학업, 조직생활은 여성임을 자각하고 살아온 시간들이었고 결국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라니아를 따라가는 일은 곧 트루히요가 마땅히 죽어야 할 이유를 확실히 매듭짓는 일이기도 했다. 책에선 독재의 피해자로서 가장 약자층인 어린 소녀를 무참히도 짓밟는 가해자가 그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라니아와 겹쳐지는 우리시절 희생자들이 떠올랐던 건 바로 내 피해의식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여성으로서 아무런 피해를 겪어보지 않았던 시점, 그 시절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였다고 친구들과 떳떳이 성인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섰고 하필 처음 본 영화는 <서울무지개, 1989, 김호선 감독>라는 영화였다. 꿈많은 미모의 모델 지망생이 그 시절 지도자 '어른'의 탐욕과 무력에 짓밟혀 폐인이 되고 결국 옛 남자친구와 함께 절벽에서 불도저로 밀리게 되는 충격적인 영화였다. 우라니아의 고백 끝에 나는 국가최고 통치권자의 성노리개로 이용되다가 무참히 살해되는 이십년도 더 된 여자주인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서울무지개>의 흥행으로 이른바 '어른'에 인권을 유린당하고 성적으로 착취당한 후 영부인이나 측근들에 의해 처참하게 버려지는 꿈많은 처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마치 70년대 호스티스 영화처럼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작가는 이 작품을 2006년도에 출간했지만 만약 내가 그 시절에 우라니아를 만났다면 과연 몇 날 몇 일 밤을 울분으로 힘겨워 했을까? 오로지 대학입학만을 목표로 화초처럼 자란 나는 영화속 그들과 같은 나이였지만 그런 건 그저 말 그대로 영화같은 과장된 허구에 지나지 않을 거라 믿었듯이 소설 역시 별다른 자극을 주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여성으로 살아가는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영화같은 일들이 허구가 아닌 현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세계여성 폭력추방의 날'을 탄생케 한 주인공인 미라발 자매를 알게 된 그 시절이 대략 십년쯤 되었을까. 그땐 그녀들이 도미니카 여성인지 몰랐었고 그저 반독재운동을 하다가 맞아 죽은 라틴계 미녀들 정도로 이해되었다. 이 책에 소개되는 트루히요의 골칫거리 '6월 14일' 운동과 조직의 핵심주동자들인지도 몰랐었다. 책에선 미라발 자매들의 활약이나 사연이 자세히 언급되진 않았지만 트루히요의 암살자들은 자신이 암살을 결심하게 된 계기로 하나같이 미라발 자매의 죽음을 설파하고 있었다. 실제로 도미니카의 트루히요 정권이 사실상 최후를 맞게한 도화선이 미라발 자매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평가와 이 작품이 트루히요의 암살당시를 기점으로 암살전후의 정세변화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야기의 주인공 우라니아를 결코 미라발 자매와 분리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우라니아와 같은 법학을 공부했으며 미모가 출중해 트루히요에게 초대받은 경험이 있는 미라발가의 미네르바에게 헌정집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미네르바는 죽었지만 우라니아는 죽지 않았다. 작품속 등장인물이 대부분 실존인물이었지만 우라니아만 가공의 처녀였다는 사실이 그래서 착찹하기도 했다. 미네르바와 같은 시기 같은 독재자로부터의 피해자였지만 소설속에서 부활한 우라니아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작가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라 생각했다. 이 막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질문은 직접적으로 라틴계 여성들을 향하고 있겠지만 미라발 자매가 가지는 범세계적 상징성을 떠올려보면 이는 결국 보편적인 인권문제로 확대되는 아젠다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작품을 처음엔 성폭력에 희생되지 않고 끝내 상처를 극복해낸 어느 여성의 장한 고백으로 받아들였다가 차츰 독재(獨裁)라는 권력에 패배하지 않고 여성이 아닌 그것을 뛰어넘은 초성(超性)적 존재로서 스스로 자립해 독재(獨在)한 인간투쟁의 역사로 넓혀보기로 했다.

열네 살에 조국을 떠난 한 소녀가 처녀성은 잃었지만 다시 인간性과 국민性을 되찾기까지 지내온 35년에 헌화하는 글... 미라발 자매는 반독재운동의 반역자로서 곤봉에 맞아 죽은 후 바다에 버려졌다. 하지만 우라니아는 트루히요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은 남성의 상실감을 안겨주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보란듯이 미국에서 성공해 곤봉과도 같은 손가락을 극복해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미라발 자매나 우라니아나 모두 트루히요로부터 성적인 정복을 당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은 트루히요의 욕망에 승리한 인물로 상징화 될 수 있었다. 작가는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재의 제물이 되었던 여성을 앞세워 끝까지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는 인간상을 보여줌으로써 진일보한 여성상에 희망을 걸고 싶었던 것일까. 책에선 트루히요 암살 당시 체제의 전복에 가장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권력을 쥐고 있었던 로만장군이 지레 겁을 먹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남성성을 구현하지 못한 벌로 자신의 고환을 삼킨 채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역할수행의 상과 벌이 성적(性的)으로 주어지는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사회적 시각으로 본다면 우라니아는 상을 받은 것일까, 벌을 받은 것일까. 남성의 입장에서 우라니아는 독재자를 즐겁게 해주지 못하였으므로 그후 순결 트라우마로 어떤 남성과도 관계 맺지 못하는 벌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의 입장에선 비록 손가락으로 처녀성을 잃었지만 그 후 사랑이나 가족의 도움없이도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상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라니아는 남성이 아닌 폭력으로 처녀성을 잃었다는 점(남성에게 당당), 실제로도 처녀인 채로 살아왔다는 점(여성에게 당당), 그리고 아버지가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평생 순결을 지키겠다고한 약속을 지킨 점(가족에게 당당)으로 보아 상과 벌로부터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타의로부터 주어진 상과 벌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우라니아에게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야말로 라틴계 인권을 대표할 자격을 얻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미라발 자매의 죽음이 트루히요의 암살에 도화선이 되었듯이 우라니아의 귀국이야말로 트루히요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된 원년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그것은 여성이면서 아이였던 우라니아가 도미니카 독재정권에서 가장 취약한 인권유린 대상이었다면 결국 온 국민이 그토록 몸서리쳐지던 독재에서 벗어나기까지 35년이 걸렸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그녀가, 35년 동안 트루히요 증후군을 이겨내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가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시인'이었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가난할지라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순수만큼은 얼마든지 꿈꾸고 노래한다고 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산토도밍고 여학생시절 어머니의 날에 우라니아는 자신이 쓴 시 <어머니와 선생님, 최고의 여성>을 아버지와 수녀들, 여학생들, 도미니카 정권의 여성들 앞에서 낭독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떨려서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 큰 박수를 받았던 기억은 어머니가 부재한 이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된 어린 시절이었다. 이 장면은 작가가 의도한 가장 최선의 치유장치가 아니었을까. 인간은 자신에게 소중하고 의미있는 그 한 장면으로 평생을 견디는 존재일지 모른다. 나에게서 '어머니는 떠났지만 수녀들이 있고 당신들이 있으니 나는 앞으로 최고의 여성이 될 것이다'는 자기선언문은 아버지이면서 어머니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배신과 부재라는 시련속에서도 자신을 독재(獨在)시킬 수 있었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한편의 시로서 만인에게 자신의 꿈을 공표한 우라니아의 어린시절은 결국 그녀와 비슷한 나이에 조국 페루에서 독재를 경험한 라틴계 작가로서 전 세계에 자신의 포부를 알리게 된 바르사가 요사의 문학적 행보와 닮았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 미라발 자매는 지하조직에서 '나비들(Butterflies)'이라는 암호로 불리었다. 미국으로 망명한 도미니카의 작가 훌리아 알바레스는 미라발 자매의 이야기를 ‘나비들의 시절(In the Time of the Butterflies)’이라는 소설로 출간한 바 있으며 이를 각색한 영화는 우리에게 엉뚱하게도 <도미니카의 붉은 장미, 2001>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들 사후 ‘나비들’은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용감한 저항과 희생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들의 꿈이 도미니카의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면 세상은 너무나 야속하다 말할지 모른다. 이에 반해 작가는 미라발 자매의 꿈이 날아가 버렸을지 모르나 그 하늘이 곧 우라니아였다고 주장한 듯 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우라니아(Urania)는 ‘하늘의’ 라는 뜻으로,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뮤즈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우라니아는 천문(天文)을 관장하며 지구의와 나침반으로 별의 위치를 통해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가진 여신과 이름이 같다는 점에서 나비처럼 날아가 버린 미라발 자매의 꿈이 다시 우라니아라는 하늘에서 부활해 라틴아메리카의 미래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내가 성인영화라고 처음 본 <서울무지개>의 모델 지망생을 비롯해 세상의 모든 독재자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해온 꽃다운 여성들도 결국 나비처럼 날아간 것이라면 우라니아는 독재에 희생된 전 세계 여성을 추모하는 그토록 아픈 하늘이었던 것이다.

끝내 부활한 우라니아는 도미니카의 기억을 좇아 내기 위해 도미니카의 역사를 좇았고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 도미니카의 기록을 저장했다. 그녀는 전 세계 기업들의 재정상태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도덕적 지식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최소한의 도덕을 상실한 아버지의 위선적 편지엔 답장하지 않았지만 이제 사촌의 진심어린 안부엔 답장할 여유를 얻었다. 그렇다면 전설적인 존재 미네르바를 계승한 우라니아에게서 피어나는 인권의 향기는 아마도 억압에도 결코 죽지 않은 자유의 나비, 장미보다 붉은 용기의 향수가 아니었을지. 그것은 오늘날 나라와 지도자와 부모의 부재속에서도 꿋꿋이 독재하려는 누군가에게 날아든 희망의 선물은 아니었을지.

-그녀는 언젠가 도미니카 공화국이 이룩하게 될 젊고 아름다우며 열정적이고 이상적인 국가의 서곡이었다. 1권 244p

Design Con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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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의 팩키지나 로고 디자인에 미라발 자매의 암호, 버터플라이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적용.

-독재시절 향수에 대한 반감을 상쇄시키고 비록 억압당했지만 꿈만은 잃지 않았던 순수를 기억하도록.














지식인의 짐승교향곡, 향수(響獸)

이 책에서 트루히요는 유난히도 시를 읊조리거나 외우는 사람들을 대체로 싸잡아 신경질적으로 폄하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에게 시인은 한마디로 웃기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짓궂게도 그의 측근에 문학을 그중에서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배치시키고 있다. 우선 그의 부인 마리아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여류작가로서 도덕적인 시를 좋아하며 그의 핵심측근인 '걸어다니는 오물' 헨리 치리노스 의원은 자칭시인으로서 시를 달달 외우고 다닌다. 비록 허수아비 대통령이었지만 연설문에도 시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던 발라게르는 박식하고도 소심한 시인이었다. 심지어 타고난 정보원으로서 독재정권의 각종 음모수행자였던 조니 아베스마저도 청년시절 시를 썼다고 하며 그의 유일한 취미는 비교서적 읽기였다. 이들 측근들의 문학적 취향은 참 詩답지 않은 반전이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트루히요가 그토록 조롱하는 모든 '시'의 주인공은 어쩐지 최고의 여성이 되겠다고 '시'를 낭독한 우라니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속에서 트루히요는 우라니아를 향해 직접적 비난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래봤자 결국 당신들(여성) 운명은 내 손안에 있다는 무언의 질'시'가 아니었을까.

트루히요는 앞에선 아부하는 지식인에게 조롱을 일삼았지만 그나마 아부라도 하지 않는 지식인에겐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스페인 내전 후 망명 온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이자 기자였던 지식인 갈린데스(Jesús Galíndez)의 저서『트루히요의 치세 La Era de Trujillo』에 격분해 그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지식인을 뉴욕에서부터 비행기로 납치해 도미니카에서 처형한 이 사건은 트루히요 정권에서 가장 반인권적인 폭력행위로 기억되고 있으며 작품속에서 암살집단의 핵심인 안토니오는 갈린데스를 공항에서 납치한 동생 타비토를 정권에서 죽여버리자 그 복수심으로 암살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예술안에서도 특히 문학이라는 창작까지도 오로지 자신을 찬양하기 위해 독재하는 장르이길 바랬던 애정결핍의 사나이였다.  

한편 트루히요가 '시'를 조롱하고 노골적인 비난을 서슴치 않았던 것은 어찌보면 뼈아프긴 해도 작가의 입바른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식인이며 성직자들, 대학교수들이 마리아의 <도덕적 명상>과 <거짓우정>에 극찬을 하는 것에 심사가 뒤틀리던 트루히요의 시선은 꼭 도덕주의자와 위선자를 동일시하는 작가의 시선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측근 중에 대놓고 지식인이라 불린 우라니아의 아버지 카브랄 의원의 경우도 집에는 누구보다 책이 가득했지만 딸을 독재의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려했던 대표적인 위선자로 그려진다. 군부독재의 억압하에서 대표적인 저항시인의 길을 걸어온 우리네 김지하, 고은 시인같은 문인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는 다분 지식인이야 말로 문학으로 도덕의 가면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냐는 작가 스스로의 비판으로도 여겨졌다. 우라니아의 시점을 대변하는 화자는 최고위층이 참석한 리셉션 자리를 회상하며 아버지를 포한한 지식인집단에 뼈아픈 질문을 한다. 트루히요의 입으로 고위관계자의 아내를 탐하였노라 당당하게 떠벌리는 현장에서 어찌하여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이 나라의 지식인들은 독재자의 학대를 용인하고 되려 우상화하였는지에 반문을 제기한 것이다. 만약 카브랄이 건강한 상태였다면 '그때 아빠는 어디에 있었느냐'는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우라니아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을까. 지식인으로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카브랄은 말을 할 수 있었어도 답은 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차라리 입을 다문 벙어리가 되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카브랄은 트루히요의 독재를 용인하고 협력한 대다수의 지식인을 표상하는 것이기에 그 결과 두 번 다시 말을 할 수 없게 된 그의 질병은 그들이 결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설사 말하고 싶거나 말해야 할지라도 말할 자격은 없다는 벌로도 느껴졌다.

하지만 작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명한 정치가 출신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작가는 지식인의 책무를 상기시키기 위해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반신불수의 백만장자에게 <전쟁과 평화>같은 19세기 소설을 읽어주며 학비를 마련한 우라니아를 반론으로 제기하며 문학으로 도덕성을 지켜낸 긍정의 서사를 이끌었다. 우라니아는 자신이 떠날 당시 마흔 아홉이었던 아버지와 꼭 같은 나이가 되어 조국에 돌아왔지만 결코 아버지와 같은 지식인이 되진 않았다. 그녀는 기나긴 시간동안 도미니카 관련서적, 증언과 에세이, 회고록을 읽으며 조국과 트루히요 전문가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소설속에서 아버지 카브랄은 끝내 명예회복을 못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존했던 카브랄 의원은 1941년 석방되어 1942년 상원의원으로 복귀한다. 이는 혹시 작품속에서 지식인을 대표하던 카브랄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함에 분노한 작가의 형벌은 아니었을까. 더 아이러니 한 것은 그토록 문학을 조롱하던 트루히요도 <쿠오바디스>를 항상 마음에 간직하며 작품속에 로마의 귀족으로 등장하는 시인 페트로니우스를 동경한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페트로니우스의 쾌락적 습관을 부러워 한 것이며 이 동경에는 자신의 모계가 아이티 흑인이라는 열등감과 검은색 피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이 자리하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시인의 서정성, 문학의 감성에 무의식적인 의지를 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그래서 자신의 측근 정치인들을 그토록 문학적인(?) 닉네임으로 호명하였을까? ) 그날밤, 우라니아의 귀에 대고 네루다의 시를 읊은 그가 아니던가.

결국 그것은 통찰하는 작가나 수용하는 독자의 문제인 것이지 창조된 문학의 잘못은 아니라는 주장이 아닐까. 통치자와 국민의 문제인 것이지 정치의 잘못은 아닌 것처럼. 이는 혹시 위선을 특기로 하는 정치와 도덕을 무기로 둔 문학을 병행하는 작가의 이중적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서사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식인이라면 작가라면 특히 정치와 관계된 사람이라면 위선이야말로 독재에 협력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믿음직한 수단임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작가가 정치와 관련있는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 지에 대해 고민한 조지 오웰(1903-1950)은 그의 에세이 <민족주의 비망록, 1945>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작가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태도를 가지고 정치행동 이전에 제일먼저 자신의 사고과정을 오염시키지 말라고 충고한 바 있다. 그러한 도덕적 노력이야 말로 정치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소양이라 재차 주장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작가로서 문학적 기교가 정점에 다다른 시점에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려 했으므로 지식인이면서 당시 독재에 동조한 꼴이된 많은 카브랄의 빚을 갚아내는 의미가 있다할 것이다.

가만 보면 지식인은 위선적이고 문학은 도덕을 은폐하며 시인은 비현실적이라는 트루히요의 주장은 비록 비도덕적 삶을 살았지만 그러했기에 가장 자신있게 알아챌 수 있는 그만의 능력이자 직관이기도 했다. 책에서 트루히요는 아이티의 부적을 지니고 다니기도 하고 우상화된 자신을 신격화하는 나르시시즘에 도취되기도 한다. 흡사 무당의 우두머리로서 그는 향수(鄕首)였던 것이다. 신적인 입장에서 트루히요가 보기엔 지식인들의 위선이야말로 자신이 제창하던 독재보다 더 사악한 짐승들의 노래가 아니냐며 보기좋은 한방을 선사했다. 그들이 걸핏하면 자신앞에서 연주하던 교향곡이야말로 가장 웅장하고도 야만적인 향수(響獸, 짐승의 연주)가 아니었을까. 트루히요 시절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었던 카니발 무곡, 메렝게도 울고 갈 범세계적인 클래식이 아니었을지.

Target Area

-주요고객은 기득권 세력과 위선적인 지식인에 반감을 가진 남성사회계층에 주력

-젊은 층과 자유분방한 예술인, 에너지가 충만한 스포츠인에 적극적 소구 















오래 사는 복, 영원불멸의 향수(享壽)

이 작품은 트루히요가 죽기 전 까지는 세 개의 시점이 분명하게 번갈아가며 공존하다가 2권으로 넘어오면서는 우라니아의 시점은 약화되고 사후 암살자들의 행보에 초점이 맞추어 지면서 그야말로 화자가 갈수록 증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2권에서 우라니아 시점의 공백과 암살자, 트루히요, 주변인물들의 어지러운 양상은 더욱 대비되어 보였다. 마치 독재자의 죽음을 확인한 후 일정시간 피해자의 침묵으로도 느껴졌다. 시점에 따라 각자 말하는 방식도 다채로왔는데 우라니아가 주로 자신 내면과 함께 '사고'하였다면 트루히요는 주로 혼자서 '독백'하였고 암살자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그들끼리 '대화'하는 식이었다. 이들 모두는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번민을 멈추지 않았고 책을 덮고나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사라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 현상을 결국 축제의 목격자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 중 인상적이었던 화자는 단연 우라니아에게 '너'라고 호칭하며 그녀의 심경을 변호하듯 울려퍼진 목소리였다. 처음엔 말할 수 없었던 아버지이거나 먼발치에서 모든 걸 지켜본 작가라 생각했지만 결국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돌아온 또 다른 우라니아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가공된 우라니아만이 주관과 객관을 조율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1권에서 이미 총맞아 죽은 트루히요가 다시 2권에서 플래시백으로 출현해 암살의 순간까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다만 죽었지만 불사조처럼 끝내 죽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식과 구성은 독재자는 죽었지만 독재자의 영혼은 결코 죽지 않았음을 더욱 방증하는 훌륭한 구속장치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는 생각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좀처럼 그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독재자의 목소리는 생생했고 역으로 암살자들의 목소리는 어렴풋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과연 '염소의 축제'의 행사주체는 어디였으며, 그날의 주인공은 누구였는지 축제기간은 언제까지 였는지 축제로 얻어진 것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거대혼란을 야기시켰다고 할까.

'염소'는 암살자들이 호칭한 트루히요의 별명이었다. 아시아에선 염소에 길조와 화목, 행복, 원만, 기쁨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지만 서양에서는 성적인 의미가 내포된 동물이다. 영어에서 '호색한'을 뜻하는 Satyric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의 시종 사티로스에서 파생된 말이기 때문이다. 이 사티로스는 얼굴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머리에 작은 뿔이 났으며,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트루히요는 누구보다도 과도한 성욕과 성적 능력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죽기직전까지 최고위층 각료의 부인과 딸을 비롯해, 소녀와 유부녀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매력적인 여성을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절대권력이 무소불위함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러한 트루히요를 악마적 본성을 지닌 호색한의 상징, '염소'라 지칭한 것은 어찌보면 소박하다고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이 책에선 염소가 축제를 벌일 땐 재미나게도 그 염소가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이냐, 제물로서 이냐 구경꾼이나 들러리로서 이냐를 따져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이중, 삼중의 의미로서 <염소의 축제>를 연출하기 위해 그토록 혼란스런 화자들을 등장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을 통해 진정한 축제의 주인공을 찾아보시오, 하고서 말이다.

먼저, 우라니아는 표면적으로 육욕에 눈먼 트루히요가 벌인 축제의 희생양, 제물로서 축제에 초대받은 손님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행사주체는 트루히요이고 행사 장소는 아마도 '마호가니의 집'이거나 푼다시온 농장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라니아는 이 신성한 축제를 망치는 당사자이면서 자신이 사실상 그 축제의 종결자로서 종지부를 찍은 연출자가 된다. 우라니아 이후 더 이상 축제는 개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예로운 폐막식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남성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염소를 절망에 빠뜨린 우라니아는 한순간에 제물에서 승리자가 된다. 축제는 승리자의 것이라고 보았을 때 염소의 축제는 얼떨결에 이겨버린 우라니아의 축제가 아니었을까. 미네르바가 파티에서 트루히요의 뺨을 때리며 저항했다는 전설은 이렇게도 소설에서의 특보로 계승 된다. 이제 축제의 수혜자는 고백할 수 있으며 패자는 아무 말이 없는 것이기에.

이 책에서 암살자들은 염소인 트루히요를 죽임으로써 자신들이 벌인 축제를 제대로 만끽하고자 한 페스티발의 제안자일 것이다. 이때 행사주체는 반독재조직이며 집행위원회는 군부와 비호세력, 스폰서는 미국이요, 행사장소는 고속도로변이 되겠다. 그리고 트루히요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시민들을 환호하는 다수의 구경꾼으로 계획했을 터이다. 그들은 거사직전 현장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대화로만 리허설을 진행했다. 실제 리허설의 공백때문이었을까. 암살자들은 전반적으로 행사진행이 너무나 미숙한 아마추어들이었다. 주체집단은 지휘체계를 상실했고 그 결과 운영요원들은 다잡은 염소로도 축제를 연출할 수 없었다. 특급가수는 어렵사리 무대로 모셔왔지만 음향 시스템도 고장나고 관객도 없어 콘서트는 진행되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제안 의도는 기가 막혔으나 축제는 실패했기에 다만 구상으로만 남은 우발적 행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행사실패의 책임은 누구의 몫일까. 이 작품에서 트루히요든 암살자든 모두 염소의 축제를 제대로 성공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윗선의 배신은 제쳐두고서 라도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할 관중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상처로 남은 듯하다. 요즘 TV를 장식하는 튀니지 시민들의 독재타도 반정부 시위를 떠올리면 그들의 리액션은 차라리 반전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마지막 트루히요의 아들 람피스는 암살의 주인공들을 잇다라 처형하면서 복수의 축제를 즐기기도 했다. 암살자들을 소품삼아 람피스 혼자서 극본, 연출, 주연, 관객을 떠맡은 광란의 행사였다. 이렇듯 이 책에서 염소의 축제는 모든 화자의 축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광경은 대체로 씁쓸하고도 허탈했다. 원래 염소의 축제는 시민들의 자발적 의지에서 시작되는 민중의 축제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책을 덮고 찾아본 도미니카의 전통축제 장면에는 유난히도 염소괴물을 상징하는 가면이 많이 등장했다. 작가는 말한다. 축제란 어느 한사람만의 독점이거나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행사가 아니라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참여의지를 가진 모든 시민이 주체가 되어 교감할 수 있어야 함을. 그 자유의지야 말로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용기이자 독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임을. 그러므로 그때 자유의지를 상실한 도미니카의 관람객은 불행히도 축제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음을.

하지만 분명한건 모든 염소의 축제의 시발점은 트루히요 그였다는 것. 그가 만들었고 그 때문에 시작되었고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실행되었으니 그는 진정으로 축제의 오리지날 창안자였던 것. 아마도 그 땅에서 축제가 계속되는 한 그는 천수이상으로 오래 사는 향수(享壽)를 누린 영광의 얼굴이 아닐지. 그렇게 본다면 그 모든 축제를 지켜본(보았을 것 같은) 트루히요는 이 작품이 자신을 위한 영생(永生)잔치의 한마당쯤으로 기억될 만하지 않을까.

Brand Concept

-독재에 대한 상흔과 기억이 오래 남아있었던 것과 독재자로서 통치기간이 길었던 것에 착안 

-오래남는 잔향을 강조하고 당당히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자신만의 향기를 가지도록 유도.














자유마취제 오데코롱

무엇보다 이 책에서 암살자들의 최후를 묵묵히 따라가는 일은 어이없고도 쓸쓸한 일이었다. 속된말로 운좋으면 목숨을 건져 훗날 영웅이 되기도 하고 재수없으면 바다에 버려져 상어밥이 되는 꼴이었다. 열사이냐 사형수이냐는 정작 그들이 저지른 일과는 무관해보였다. 명분도 순서도 목적도 없는 이들의 최후는 일관성이 없었던 관계로 그만큼 오래 기억되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독재정권의 보호아래서 요직을 맡고 있거나 최소한 트루히요 신봉주의자들과 친인척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영원한 구원자가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기까지 이들은 각자가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아마디토는 반란군의 누나와 결혼을 허락지 않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자신이 사랑한 사람의 동생을 죽여 버린 과거로 암살을 계획하는 인물이었다. 안토니오는 동생이 음모에 이용된 후 헌신짝처럼 살해되었음에도 정권이 살인자로 만들어 진실을 은폐하자 복수심으로 음모에 가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죽는 것보다 용기와 배짱이 필요한 일'임을 조언했던 조니 아베스의 의미심장한 한마디는 왜 자꾸 우리의 용기를 시험하듯 들리는 걸까. 1권에서 활약이 두드러진 '사악한 지성' 첩보부대장 조니 아베스는 모든 희생의 행사를 추진하고 실행하는 주범이었는데 흡사 군사독재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우리네 중앙정보부장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었다. 실종과 처형, 중상모략, 여론조작및 은폐가 주전공인 그는 특이하게도 빨간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인물이기도 했는데 이는 미신적인 의미보다는 트루히요 대신 피를 손에 묻혀야하는 자의 자기방어적 소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국 피 묻은 손을 닦은 그것으로 땀도 닦아야 하는 그에게 빨간 손수건은 일종의 마취제가 아니었을까. 잔인한 피와 야비한 땀이 섞여 자아내는 사악한 체액은 가장 자신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향기일 것이기에 그는 빨간 손수건에 의지 한 것이리.

비단 첩보부장 뿐이었을까. 암살자들은 하나같이 독재가 두렵다기 보다는 어느 순간 이성의 마비 상태를 초래해 스스로 무감각한 시민으로 살게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들 실존인물 일곱 명에게 트루히요를 암살하는 일은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맞물려 있었다. 즉, 그들은 자신이 살기위해 트루히요를 죽여야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이들 모두는 염소가 살아있는 한 자신들은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거사를 도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생존투쟁에 다름아니었다. 그런데 그러한 비장하고 숙연한 삶의 욕구에 비해 이들의 행동은 민첩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하였다. 작가는 꽤 상당한 분량을 정작 독재자를 죽여 놓고서도 사후처리를 감당하지 못해 우왕좌앙는 그들의 행보와 불안한 심리상태에 할당하면서 천천히 독자의 가슴을 옥죄고 있었다. 그나마 암살자들 중 가장 인상적인 최후는 신앙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터키인 살바도르였고 가장 외면하고 싶던 최후는 국군총수이며 제 2인자 로만장군이었다.

특히 매순간 세심하게 묘사된 로만장군의 심리와 치밀하고도 침착하게 대처한 발라게르 대통령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교체되면서 같은 순간을 비교할 수 있게 한 작가의 노련함은 우라니아의 수미쌍관적 고백에 이은 이 작품에서 또하나의 둔중한 백미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파악하여 적절한 시기에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 결국 한 사람의 운명을 나아가 한 가족과 국가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일임을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유독 트루히요가 미스터리한 인물로 결론내린 허수아비 대통령 발라게르. 그의 대처는 국가통치권을 인수하지 못하고 군과 시민, 암살자들, 트루히요 가족 그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한 로만과 더욱 비교되는 재미가 있었다. 그는 암살자들이 로만의 배신에 갈팡질팡 할 때 로만이 결정적인 기회를 흘려버리고 있을 때 트루히요의 가족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때 마치 이 때를 기다려왔다는 듯 침착하고도 슬기롭게 위기상황을 모면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름을 바꾸는 현명한 지식인이었다. 이 지식인이 트루히요에 마취되었을 땐 하느님을 대신해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공화국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고 그를 위한 시를 헌사하던 분이었다. 시인으로서의 감성마저 마비된 채 합리적이면서도 문학적으로 아부를 지속해왔던 분이었다. 하지만 트루히요 아들의 불안과 영부인의 탐욕을 이용해 그들과 친화관계를 만들고 공적을 돌림으로써 위기상황을 통제한 실리주의자이기도 했다. 이 평정과 차분함은 끝내 조니 아베스까지 몰아내며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내고 시민연대의 움직임을 통해 국민의 정서를 바꾸어 놓는다. 그는 마취된 척 자신을 위장했거나 간혹 마취약이 듣지 않는 특이체질이 아니었을지.

문득 트루히요의 모든 냄새를 증오한 우라니아가 떠오른다. 트루히요는 혼혈이라는 열등감을 숨기면서 자신의 외모를 관리하는 수단으로 향수를 이용하는 사람이었고 유난히도 냄새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나 역시 냄새에 민감한 쪽인데 이런 사람들은 유별난 감각때문에 타인을 피곤하게 만든다. 트루히요는 자신의 냄새만으로도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물론 아예 정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공군기지의 망가진 하수관에서 새어나온 냄새때문에 군수 총책임자인 로만에게 심한 모욕을 준다. 로만은 트루히요 가족의 일원이었으면서도 그간의 증오심 때문에 음모를 지지하게 된 인물이었다.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님을 보여주려 음모에 가담했지만 결과적으로 쓸모있는 인간으로 남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로만은 하수구와도 같았던 트루히요의 악취에 제대로 마비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암살자들과 시민들, 로만장군과 발라게르를 보면서 트루히요가 아침마다 뿌렸다는 오데 코롱이야말로 독재를 강화하는 마취제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이티의 풀내음이든 마호가니 나무의 향이든 랑콤의 장미향이든 그것은 사람들의 이성과 근육을 마비시키고 심할 경우 복종심과 존경심까지 유발하는 향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마이클 스토다드(Michael Stoddard)에 의하면, '비록 사람에게 향이 일으키는 반응이 규칙적,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향에 의한 지배를 받는다' 고 하였다. 그 향이 비록 썩어 들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악취일지라도. 실제로 우리의 뇌는 고통이라는 자극을 쾌락으로 왜곡, 착각하는 신비의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악취라는 고통도 최고의 향수라는 쾌락으로 저장해 버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트루히요의 독재는 독자적인 향으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 최고의 최면술은 아니었을지.

USP(Unique Selling Proposition)

-이성(理性)이 마비되는 독재자의 마법(Chivo's Magic)을 긍정적으로 유도

-상대 이성(異性)을 꼼짝 못하게 할 만큼의 감성 유도성분을 차별화전략으로.















넘버 32.(TRUJILLO No.32, 1961)를 론칭하다

이 작품은 트루히요시가 산토도밍고라는 이름을 되찾기까지의 도시수복의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실존인물 카브랄이 공교롭게도 1935년 수도 이름을 트루히요로 개명할 것을 제안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작중 딸로 분한 우라니아는 조국을 떠난 후 우라니아가 아닌 카브랄 박사라는 이름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도시이름을 트루히요로 바꾸어버린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한것은 트루히요시가 다시 산토도밍고로 번복되고도 한참 후 귀국해서였다.  트루히요가 살아있을 때까지 바뀌지 않았던 도시이름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 다시 찾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이름과 동일시된다. 그 이름은 아마도 조국의 하늘이 아닌 트루히요의 하늘이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즉, 카브랄 박사가 우라니아라는 이름을 다시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은 아버지를 용서하기까지의 시간과 중첩되고 있었던것. 도시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의미는 곧 고향(산토 도밍고)을 되찾고 자신의 하늘(우라니아)을 바라본 것과 같았다. 먼곳으로 떠난 사람들은 대체로 고향에 돌아오기 까지 그곳의 하늘을 향수하는 힘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우라니아는 결국 기나긴 독재의 세월로부터 결국 자신만의 향기를 찾은 벅찬 반역자에 다름아니었다. 또한 그 반역의 세월은 육군 사령관신분으로 쿠데타에 의해 대통령이 된 후 32년간 독재자로 살았던 트루히요 시절을 향한 향수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독재는 향수(鄕愁)가 될 수도 있으며 독재자는 오래오래 향수(享壽)했으며 독재자 측근들은 향수(響獸)를 연주했으며 독재자는 마취의 향수(香水)를 뿌려왔지만 그 모든 향수에 굴하지 않고 꿋꿋히 자신만의 향기를 개발해온 우라니아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제 우린 무슨 향수를 뿌려야 할까, 아니 어떤 향수를 만들어야 할까.  우라니아를 보면서 어떠한 악취에 대항하거나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뿌려대는 향수가 아니라 영혼으로부터 오랜기간 우러나온 나만의 향기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그래도 지식인의 대명사라 불린 그녀의 아버지 카브랄의 서재를 다시 방문해볼까. 그의 서재에는 '펼쳐진 책은 말하는 머리이며, 닫힌 책은 기다리는 친구이고, 잊힌 책은 용서하는 영혼이며, 망가진 책은 우는 가슴이다.' 라는 타고르의 명언이 새겨있었다. 그냥 스치고 말 명언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무례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왜일까.  이러한 책을 접한 독자로서 이 책은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당신은 무엇을 기다려야 하며, 무엇을 용서하고 무엇에 울어야 할지 질문하는 것만 같았기에 말이다. 힌트라도 얻을 요량으로 슬그머니 의원의 수첩이라도 들쳐볼까. 그의 수첩엔 '한사람이 이루었고 이루고 있으며 이룰 그 어떤 것도 이루었던 상태나 이루고 있는 상태 혹은 이룰 상태로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젠가 그렇게 되었다가 이후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문구가 또렷하다. 지식인으로서 독재자에 순응하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문구였겠지만 오늘 나는 지식인의 이 문구가 어떠한 고통도 결코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없다는 위로의 한마디로 들린다. 엊그제 타계한 박완서 작가의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어느 인터뷰와도 말없이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헤쳐나온 자만이 자신의 향기를 가질 수 있다는 충고였을까. 책을 덮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비로소 다시 시작하는 나만의 새로운 향기를 만들고 싶다는 야무진 생각을 해본다. 불가능할까?

이번 노벨문학상은 어쩐지 문학하는 지식인 작가의 독재에 좀처럼 저항하고 반역할 수 없었다. 그동안 독재장르의 소설을 대할때면 늘 무력감으로 며칠이 우울했었는데 독재를 향기의 유희로 만나본 덕분인지 이번 독서에선 유난히도 생생한 문학의 현장을 여기저기 투어하고 온 느낌이다. 아직은 살아있고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生 날 것의 향기를 맡으며 지긋이 눈을 감아본다. 생각해보면 살아있다는 것은 좋든 싫든 모두 냄새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냄새와 향기의 기억을 그 인물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책을 덮고 찾아본 트루히요의 인상은 왕성한 권력가의 풍체를 지니고 있었고 쇼맨쉽이 강해보이며 무엇보다 눈빛이 강렬했다. 작품속에서도 그와 대면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뚫어보는 듯한 맹렬한 시선이 제일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바로 이 느낌은 어딘지 모르게 얄궂게도 허를 찌르는 작가의 시선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독재처럼 익숙하고도 편안(?)했고 그만의 독특한 색깔과 향기의 발산에 자발적 복종을 할 수 있었다. 어렵기만한 사유를 늘어놓고 통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이야기가 흘러가도록 유도했으며 인물들의 내적외적 갈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다원화된 독재의 참맛을 알게 해주었다. 작가의 준비된 치밀함이 흡사 국민의 심리를 꿰뚫는 노련한 독재자의 통치술과도 같았던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처음에 눈이 잘 뭉쳐지지 않아서 그렇지 한번 원형을 만든 후엔 제 몸뚱이 자체가 스스로 굴러감을 유도하는 가공할 추진력은 파워풀, 원더풀 아니었던가. 매 장면 시시각각 섬세하고도 디테일한 묘사역시 역사적인 고증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고로, 그가 창조한 독재의 향수는 압도적이었다. 그가 창조한 문학은 아마도 넘버.32의 트루히요 향수가 되고도 남을지어다. 대체로 독재자는 향수와 잘 어울리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히틀러시절 독일군은 그의 악취 때문에 향수를 뿌려야 했었고 김정일은 여심을 잡기 위해 향수 뿌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조향사 자격증을 딸 정도의 향수 마니아로 알려진 바 있다. 독재자의 향수란 문학으로 저항과 반역을 추구해온 작가만이 제조할 수 있는 비법일 것이므로 그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시대 문학의 조향사일 것이다. 문득 우라니아와 작가에 이어 나만의 향기는 어떤 색깔일까 궁금해진다. 우린 저마다 자신만의 향기를 찾기 위해 이렇듯 독재적 작가에게 기꺼이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닐까. 웅장한 독재의 향기에 취한 이밤, 그가 뿜어낸 향수의 아우라 속에서 부디 지나간 상처는 마취되고 흉터는 사라지고 새살이 피어나길 기원하듯이.

한 병의 향수가 탄생하듯 한 사람의 향기가 형성되기까지 이토록 수많은 일이 있었으며 그토록 극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하나의 향기가 태어나고 그것이 자신만의 향기가 되는 일은  누구에게도 마취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의 향기를 자각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生의 축복임도 조용히 깨닫는다. 통렬한 자각으로 탄생된 그 향기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나만의 향기일 것. 그리고 나만이 독재(獨在)하는 生의 고독한 비밀일 것. 그러나 죽어서도 잊히지 않을 오래된 그리움일 것. 나는 오늘도 나만의 향기를 얻기 위해 독특한 나만의 향수를 만나는 그날을 위해 탐욕과 허영과 자만과 분노와 시기의 마취에서 깨어나고자 정신을 가다듬는다. 누군가는 그렇게 탄생한 내 향기에 흠뻑 취해 나만의 독재에 가득 안겨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나처럼 生의 신비함에 감사하길 감히 고대한다. 서로 서로 독재(獨在)하는 당신과 모여 앉아 한번쯤 자유롭게 우리 남은 生의 행복을 이야기 하고 싶어진다. 나만의 향기가 곧 나를 말해주는 그날, 당신만의 향기가 누구보다 기쁠 우리 축제의 그날 나는 비로소 외칠 것이다. 독재(獨在), 죽지 않고 영원히 퍼지는 그 향기를 위하여, 눈물로 건배 ! 

■ Image Making 

-과거에 대한 향수 + 미라발 자매의 꿈 + 지식인의 연주 + 오랜 통치기간 + 염소의 마법 = 트루히요, 오래퍼지다

- 넘버 32는 통치기간을, 1961은 트루히요가 암살된 해를 의미

 


 

 

 

 

 

 

 

<덧붙임>

많은 도미니카 관련, 트루히요, <염소의 축제>관련 사진들을 모아 제 나름대로 패러디, 합성했습니다. 
아쉬운건 7인의 열사들 관련 사진이 제일 드물었습니다. 라틴어이고 시점도 정확하지 않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제안(Proposal)이라는 컨셉으로 구성하다보니 이미지가 많이 필요했고 출처를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점,
상업적 사용이 아니니 너그러운 이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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