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 Ⅱ
돈 드릴로 지음, 유정완 옮김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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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에 서다

솔직히, 책을 덮었을 때 돈 드릴로라는 작가가 미국문학을 대표한다는 천편일률적인 평가에 절대수긍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설의 의미와 작가의 역할을 시종일관 집요하게 질문하는 소설이다. 대량생산된 군중과 대량복제된 이미지속에서 개인의 미래를 끝내 탐색하게 하는 소설이다. 가장 신랄하게 미국이 잘 소화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누군가 해야 한다면 꼭 미국이 제기해야 할 안건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더 집단적인 대중을 확보하고 있는 미국의 성찰은 같은 모델을 적용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대중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의 미래가 꼭 미국이라 말할 순 없을 지라도 미국의 과거는 우리의 오늘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소재상으로 한국이 등장하고 중국이 주요 매개가 되고 있어 우린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객관성을 배제하기 힘든 이러한 미국소설을 진지하게 스캐닝해야 할 필요성에 절대 외면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하여, 상당부분 나는 이 작품을 더 많은 독자들이 집어 들어야 할 이유를 말하고 설득하는데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 그것은 책을 덮고 나서 더 분명해진 깨달음이기도 했는데 다가올 삶을 준비하는 방식이 분명 책이라는 매체와 소설이라는 서사와 무관하지 않은 독자는 이렇듯 논쟁의 주제가 분명한 작품이 퍽이나 반가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소설쓰는 작가가 군중속으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똑똑히 목격하고 난 후여야 한다는 충고를 드리고 싶다. 더불어, 나는 이 작품이 20년 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들릴 정도로 전혀 시간적 괴리를 느낄 수 없었던 시간에 스스로 대견함도 알리고자 한다. 미국이라면 분명 이런 문제를 직시해야 할 것이고 미국작가라면 당연 이런 소설을 써야 할 것이기에 본연의 숙명적인 임무를 잘 수행해 낸 작가에게도 위대함의 박수를 전한다. 비록 독자인 나는 이 작품에서 테러집단에 버금가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는 군중의 나라의 개인일지라도.

내 경우, 먼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앤디 워홀(1928-1987)과 '마오 시리즈'를 짚고 넘어 가야했다. 작가는 책에서 이미지에 지배당하는 군중의 자화상을 '마오Ⅱ'라는 앤디 워홀의 작품으로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은 중국인들에게 신앙과도 같았던 마오 쩌뚱의 초상화를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였다. 지난해 화제를 뿌리며 종영한 어느 드라마에서도 한류가수의 대형 초상화를 앤디 워홀 풍으로 제작하여 화이트 벽에 전시해 놓은 장면을 기억한다. 이제 유명인을 시각적으로 광고, 홍보하는데 앤디 워홀의 그림은 하나의 공식처럼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앤디 워홀은 마를린 먼로, 마이클 잭슨과 같은 유명인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철저하게 그들의 내면과 개성은 배제하면서 오로지 이미지의 강렬함으로서만 대중을 장악하는 예술가였다. 오늘날 워홀이 유포시킨 독창적인 방식의 복제는 어디에든 만연된 이유로 그 신선함은 잃었지만 독자적인 상징성만은 고유한 상품성의 가치로 남아 하나의 대중예술이 되었다. 물론 이 작품이 출간된 후 이십년 동안 한국에선 시간의 양만큼 워홀이 대량으로 복제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테러의 빈도도 워홀의 작품과 정확하게 비례하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테러가 증가한다고 해서 작가들이 사라지지 않았고 소설이 의미를 잃지 않았다는 것,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신하는 시대가 왔다 해도 디지털이 필름을 앞지르는 시대가 왔다 해도 누군가는 변함없이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시절 작가는 매체의 발달이 컨텐츠의 질적 저하를 가져온다고 대중과의 소통이 작가의 의식을 파괴한다고 시대를 통탄했을지 모르지만 그 후로 이십년, 작가들이 울고 있을 많은 시간동안 독자들도 의식있는 군중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십년 전 작가는 무한히 복제되는 워홀의 미술세계를 미국의 자본주의 상업주의, 대중예술을 반사하는 상징적 거울로 보았던 듯하다. 워홀은 바로 자신의 예술을 '세상의 거울'이라고도 말했는데 돈 드릴로의 소설은 당시 '미국의 거울'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마침 지금 이 작품을 마주한 한국의 독자들은 작가가 생산한 특수한 거울에 보다 복잡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비추어 보느라 어쩐지 힘겹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먼저, 소설의 제목이 된 『마오Ⅱ』는 마오 쩌뚱의 얼굴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작품이면서 스콧이 캐런에게 준 그림이기도 하다. 스콧은 물론 뉴욕의 어느 미술관에서 연필 데생 그림 복제품을 구입하고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캐런에게 큰 의미없이 가볍게 건넨 상품에 불과했을 것이다. 즉, 이때 스콧이 선물한 것은 예술품으로서의 미술작품이 아니라 캐런이 가진 믿음(통일교)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그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심볼로서의 악세사리였을 터이다. 책에선 이렇게 '마오Ⅱ'를 비롯해 심심찮게 미술작품이 등장한다. 한창 미국출장을 많이 다닐 때 나는 뮤지엄 샵에서 현란한 기념품을 구경하느라 정작 본 전시보다 시간을 많이 빼앗기곤 했는데 기념품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지 않았던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워싱턴은 주로 미국의 대통령을, LA는 영화배우를 프린팅하여 기념품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샌프란시스코 모마(MOMA)에서는 특이하게도 '체 게바라'의 우산과 달력이 대세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뉴욕에선 어딜가나 줄기차게 복제된 '자유의 여신상' 아니면 전 제품에 로고처럼 새겨진 'I ♥ NY'가 전부였다. 뉴욕은 고집스럽게도 누구의 뉴욕이거나 무엇의 뉴욕이 아니라 뉴욕 그 자체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뉴욕에선 기념품을 사오지 않았던 것일까. 대신, 비록 쌍둥이 빌딩이 사라지고 난 후였지만 엠파이어 빌딩 꼭대기에서 바라본 뉴욕의 야경은 미치도록 압도적이었고 미국의 살아있는 심장을 현미경으로 투시해 보는 듯 소름끼치도록 공포스러웠던 기억, 그것은 아마도 마오나 고르비, 케네디를 추종하는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포괄하고 담아내는 이데올로기와 예술을 초월한 일종의 메타 스페이스로서의 잔상(殘像)이었다. 중요한건 하늘높이 솟아오른 빌딩들의 화려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것들이 한데모여 총체적인 권력으로 남겨진 개념이었다. 그러한 뉴욕의 야경위엔 분명 세뇌된 '자유의 여신상'과 문자로 인식된 'I ♥ NY'의 구호도 오버랩되어 대중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은연중에 유포했던 것은 아닐까. 작가는 아마도 이미지 생산자에 의해 이데올로기를 지배 당하는 군중의 입장을 쉽게 예로 들기 위해 마오를 선택한 듯하다. 여기서 제목이 굳이 『마오』나『마오Ⅰ』이 아닌『마오Ⅱ』인 것은 이 작품이 시리즈 연작인 것을 상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오라고 모드가 하나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에 말이다. 바로 이렇게 여러 형태로 변형된 다양한 모드의 결과물들 중 순서에 상관없이(랜덤하게) 하나에 불과하다는 이 대안성(alternative)이 가지는 의미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작품이 아니라 기계로 대량 찍어낸 복제품으로서의 이미지를 재차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만의 것이 아닌 누구나의 것인 그러므로 개인이 아닌 군중의 것인.

또 하나, 표면적인 이미지로서의 마오는 분명 시각적 장르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소설가와 극명하게 대치되는 테러집단이 다름아닌 마오주의를 신봉하는 조직으로 등장함에 있어 작가는 마오의 의미를 다층화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테러집단은 모든 역사를 초월한 모델, 절대적 존재의 형상으로서 마오의 사상을 추종하는 조직이므로 '마오Ⅱ'는 수많은 마오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조직들 중 하나의 이름일 수도 강령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책에서 '마오Ⅱ'라는 작품은 마오의 얼굴을 담은 것일 뿐 담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마오의 사진인지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인지 그림을 다시 인쇄한 것인지 인쇄물을 복사한 것인지 심지어는 마오의 어록인지 그 경계를 구분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으로 느껴졌다. 결과로서의 이미지만 중요한 것이지 그를 만들어 내는 제작과정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로 작가를 찍는다는 브리타에겐 그녀가 찍어 왔고 찍고 있고 앞으로 찍을 유명인의 사진이 곧 '마오Ⅱ'라는 작품명으로 환유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즉, 그녀가 어렵사리 찍은 은둔작가 빌의 사진도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메시아처럼 다시 나타나서 권능을 재생시키는 위대한 지도자 마오쩌뚱'의 사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기에 '마오Ⅱ'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오가 자신의 복귀를 알리고 활력을 과시하고 혁명을 고양시키기 위해 사진을 이용했다면 빌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부고의 매체로 사진을 이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본다면 '마오Ⅱ'는 빌의 생전 마지막을 담은 사진의 가칭 제목임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이는 소설속 인물들이 모두 마오의 초상화와 무관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림 한 장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서사의 지배력이 새삼 놀라웠다. 결국 이 작품에서 '마오Ⅱ'는 하나의 미술품으로 시작해 일상의 상품으로 조직의 이데올로기로서 소식을 알리는 매체로서 다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작가가 새롭게 제시한 개념예술의 정당한 작품의 하나로 '마오Ⅱ'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거울, 속에 비추다

내게 이 작품은 시종일관 '이미지'에 대한 연상 작업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상에 존재하던 생명체가 차차 기형적인 외상과 기능을 획득한 후 사람들에게 자주 포착되기 시작,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 '이미지'라는 괴물에 대한 탐사 다큐멘타리를 일절의 나레이션없이 영상으로만 관람한 기분이었달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일은 한적한 갤러리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그림을 혼자서 관람하는 발걸음과도 같았고 때론 흡사 뉴요커라도 되어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진 전시회를 많은 인파속에서 흘끗흘끗 둘러보고 빠져나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혼자이든 함께이든 어느 경우에나 텍스트를 만나며 떠올려지는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나서는 이토록 혼란스런 잔상들로 머리가 개운하지 않았던 기억을 찾기 어려웠다. 아마도 소설의 서사는 이미지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사유와 통찰을 이끄는 것이었기에 무겁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나의 잔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서 다음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는 식으로 이어져 끝까지 잔상효과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건 살면서 한번쯤은 내가 보아온 이미지이거나 보게 될 이미지라는 생각이 많았기 때문일까. 이러한 잔상효과는 줄거리가 시간상으로 얽혀서 전개된다기 보다 작가가 생산하는 이미지에 사람들이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점묘효과의 연출로 이해되었다. 이야기는 어느 시점, 특정 공간에서 밀도를 이루다가 불현듯 이동하여 다른 시점, 다른 공간에서 집중되는 구성상 반복의 특징은 자칫 서사에 클라이막스가 없어보일 수도 있었지만 같은 이유로 종결부가 절정에 이르며 감정을 터뜨리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의 마지막은 반전이자 환희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릎을 탁 치며 한숨소리를 내었던 건 바로 마지막 카메라의 플래시(flash)였다. 잔잔한 작품만 확인하다 출구직전에 걸음을 멈춘 나는 오래도록 눈을 감았다. 작가는 '이미지'라는 괴물에 대한 서사를 잔상효과로 마무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괴물에 대한 반응은 물론 내몫 이었지만 그 순간 리액션이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내 스스로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절망도 희망도 아닌 잠시멈춤의 표지판 앞에서 나는 당황스럽기 까지 했다. 교수님의 강의는 줄곧 들어왔지만 시험문제지 앞에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심정이었달까. 소설속 인물들은 이 마지막 반전을 위해 끊임없이 이미지를 바통 터치해온 듯했고 마침내 바통은 내게로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제 바통을 손에 쥔 채 어디로 향할 지는 순전 내 판단이 기준이 되는 것이었다. 작가가 원한 것은 방향성을 잃고 흠칫 놀란 이런 내 모습이었을까. 그동안 군중이었던 나는 개인으로 돌아와 있었고 자신의 작품에 비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라는 그의 메시지는 어쩌면 독자를 향한 소설속 테러였는지도 모르겠다.

테러가 두려운 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그 대상이 정작 정치 종교와는 무고한 시민이자 무작위로 선출된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갓난아이를 포함한 여성, 노약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버스나 지하철, 비행기 등의 교통수단, 관청이나 백화점, 호텔, 관광지등의 불특정 장소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속된 말로 재수 없으면 여름휴가지 나이트 클럽에서도 목적지를 향하던 버스 안에서도 폭탄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다소 운명적인 자조성의 두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너무 막대하여 오히려 무감해지는 경향이 있으며 노력과는 상관없다는 무력감을 유발한다.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하여도 상대방이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 온다면 재수없게 충돌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운명은 내게 해당된 것만은 아니라는 안일함에 나머지 희망을 걸 수 밖에 없는 것이 테러의 본질인 것이다. 즉, 테러는 군중을 향하지만 오히려 군중속에 있을 때라야 안전을 느끼는 모순은 이 작품을 덮으며 서글프게 깨닫게 된 진실이기도 했다. 이 군중속 평화는 이번 소설을 대하는 그것과도 다르지 않았다. 책을 펼쳐들고 페이지를 넘겨갈 땐 일반대중으로서 엇비슷한 감성의 연대를 이루다가도 책을 덮고 돌아와 앉아보니 문득 외로운 것이다. 독자 개인의 위치로 돌아오니 작가의 질문에 선뜻 답하기 두려워지는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혹시 어쩌다가 '나' 일 수도 있겠지만 설마 '나' 이지는 않길 바라는 그 유약하고도 소극적인 비겁함을 자신이 생산한 거울에 비추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것은 운좋게 ‘나’ 이지 않을 때 무심히 외면하는 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지 하고 말이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마지막 순간 이미지로 찍힌 건 바로 군중에서 개인으로 귀환한 우리네 두려움과 무관심의 두 얼굴은 아니었을까. 그의 마지막 플래시(조명)는 일순 플래시효과(잔상)를 유도하며 독자들을 플래시(반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돈 드릴로식의 뉴스이자 속보로서의 플래시(섬광)가 아니었을지.

거울, 그가 삼킨 것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군중을 바라보고 군중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이지만 개인으로 돌아온 후 끊임없이 독자를 개인이라는 같은 입장으로 소환하고 있다. 뉴욕이라는 거대 군중의 장소에 모인 캐런, 스콧, 빌, 브리타 이들이 제시한 소환용 미끼는 물론, ‘이미지’라는 괴물이었다.

제일 처음 등장한 캐런은 ‘이미지’에 신앙을 부여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외양상으로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집단결혼식을 하며 스펙타클한 군중으로 등장하지만 실은 50개국에서 모인 젊은이 6,500쌍의 군중들 중 한명으로 스쳐가는 이미지의 파편에 불과하다. 13,000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장난감 세계의 조직원이 된 것 일뿐이기에. 그녀는 인종, 성별, 이름이 문제가 되지 않는 우주나 달에서 조망하는 통일적인 시각을 추종하며 통일교의 교주인 문선명을 ‘문(moon, 月)’이라는 이미지로 숭배한다. 이 때 결혼은 공동체(군중)로 살아남는 것이 미래라 여기는 그녀에게 자신의 生을 던져 영속할 수 있는 의식적 행사이자 구원의 자격일 것이다. 작가가 제시한 이미지로서의 교주가 한국의 인물이었다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작품 초반엔 외국인이며 백인이 아닌 인물을 아버지로 삼는 현장에 내심 우쭐하기도 했었다. 물론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땐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대표적 인물과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한 서사구조가 非미국인으로서 불만스럽기도 했다. 가만 보면 중국(마오)은 전체주의를 설파했고 중동(호메이니)은 테러를 일삼았고 서구(영국, 독일등)는 언론만 무성했고 한국(통일교)은 집단을 신봉했지만 미국(소설가, 사진작가, 예술가)은 이 모든 걸 의식있게 고발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출간된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대표성의 문제로 파고들면 우리로선 공평하지 않은 처사라며 작가의 한계를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향력의 문제로 본다면 마오의 중국과 테러의 중동, 서구의 언론, 미국의 대중문화와 소니와 기린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경제와 나란히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멘탈 파워에선 우리도 분명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약에 빠져 불운한 소년시절을 보낸 스콧은 빌의 최초 소설을 읽고 자아를 발견한 케이스였다. 스콧은 자발적으로 빌의 비서가 된 인물로 빌의 출간을 물리적, 영적으로 반대한 사람이기도 했다. 책이 출간되는 순간 신화로서의 빌, 하나의 힘으로서의 빌은 사라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을 보자면 빌이 부재한 동안에도 끊임없이 빌이 남긴 서류의 목록을 분류, 정리하는데 집착하여 오히려 출판을 위한 작업을 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스콧은 빌에게 유일한 독자이길 바랬고 빌은 자신만의 작가가 되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작가는 스콧이 빌의 죽음으로 얻게 된 것은 마오주석의 사진을 소지하는데 관한 노래한줄과도 같다고 말한다. 스콧은 아마도 빌이 남긴 사진과 소설, 그리고 자신만이 아는 비밀(권투선수 이름)을 이용해 군중이 아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작업을 하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스콧은 빌이라는 신화적 인물의 이미지를 소유하려 했던 사람이 아닐까. 그는 이미지를 소비함으로써(워홀의 작품을 구매) 일차 소유를 한 후 그것을 캐런에게 전달하는 선심을 보여주었다. 군중을 대상으로 하는 작가와 작품을 소유하는 방법은 그가 책을 출간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을지 모른다. 스콧의 이미지 소유욕망은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오늘날 군중의 윤리의식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했다. 개인의 욕구는 이제 ‘가진다’는 구속보다 ‘연결한다’는 관계로 대체된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에 스콧은 시대착오적인 인물의 표상이겠지만 그는 빌의 소설을 가졌기로 生의 기회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아날로그 시절의 책을 향한 순수와 열망을 전파하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캐런과 스콧이 빌의 비서격으로 이미지에 지배받고 동시에 이미지를 소유하려 했던 인물들이라면 빌은 이미지에 지배받지 않으려 항거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작가(빌)도 인간이었기에 삶의 두려움을 방지하고 혼란에 대비하기 위해 약물에 의지하는 나약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진정제나 각성제, 수면제 등의 알약을 쪼개며 분리된 색깔(푸른색, 흰색, 핑크색) 들 속에서 生의 변화를 감지하고자 한 자폐증 환자에 가까웠다. 그는 변명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지만 자신의 딸은 슬픔이나 고통도 변명에 불과했으며 결국 변명하기 위해 글쓰기를 일삼았다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을 비난한다. 빌은 군중으로부터 공격받고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미디어로부터 억압받고 급기야는 테러집단으로 희생되는 불행한 작가의 최극단을 대신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사라졌지만 타의적으로도 사라진 ‘완벽한 실종’의 주인공, 비운의 작가를 표상한다.

빌은 작품속에서 영원히 퇴고만 하고 출간을 하지 않은 작가로 그려졌는데 특이한 점은 그가 타자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문장을 수정하면서 생각을 조직할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수정을 하고 가다듬은 문장만을 기록할 수 있는 수동타자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레바논의 테러 조직과 찰리의 단체를 이어주는 그리스의 정치학자 조지 하다드는 빌에게 워드프로세서의 유용성을 알려주며 사용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걸 하나의 메시지로 일축해버리는 자동응답기를 불신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집에 존재하는지 부재하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기계를 집어 들 것인지 말 것인지 만이 중요한 머신의 지배를 문명의 폭력이라 여긴 것이다. 그가 타자기를 고집한 것은 생각의 수정을 기계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자존심이자 작가 의지가 아니었을까. 빌은 문명의 발달로 출현한 기계들이 촉발하는 새로운 종류의 획일화된 폭력과 그로인한 군중의 고독을 표상하는 인물이었기에 타자기로 친 원고의 산더미 속에서 은둔을 자처한 그의 소리없는 아우성은 끝내 민주적 함성이 되지 못했다. 타자기에 쌓여진 머리카락만이 기계속으로 흘러들어 그의 생물학적 노화를 증명할뿐 더 이상 소설이 공포를 흡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빌은 소설이 민주적 함성이라 믿었기에 자기 목소리를 파괴하려는 테러리스트들을 본능적으로 가장 두려워 하지 않았을까. 그는 방안에서 스스로에게 가상의 야구경기를 중계하던 순수한 순간이 가장 좋았다고 회상한다. 선수(참여자)이자 아나운서(중계자)이자 군중(관람자)이자 청취자(정보 수용자)이자 라디오(정보 제공자)였던 그 순간은 자기 목소리의 최대발현으로서 역할에 구속되지 않고 책임에 자유로왔던 추억인 것이다. 1인 다역이 역할을 짊어지는 구속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를 자기의지로 표현한다는 긍정의 의미로 기억된 것이 흥미로왔다. 이는 소설가가 소설을 써가는 방법과도 흡사한데 작가는 이를 '민주적 함성'이라 여긴 것이다. 이렇듯 소설가의 투쟁이 자유를 찾기위한 이미지 항거를 의미하긴 했지만 그런 그도 마지막엔 이미지를 차용하려 했다. 은둔자가 은신처에서 나오는 방법은 단 하나 죽음뿐이었으며 그것이 부활이 되기 위해선 사진이라는 장치가 필요했다고 판단한 듯하다. 결과적으로 빌의 이미지 노출은 극적인 영정사진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는 한 번의 찬스를 잘 활용한 셈이 된다. 그리고 작가의 탄생은 군중의 것이지만 작가의 죽음은 독자 개인에게 영입되는 기회이므로 빌은 죽음으로 독자 개개인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빌도 이미지에 항거하지 못하고 이미지에 순응함으로써 비로소 박수받게 되는 죽음을 택한 것인데 그의 선택은 서글픈 논리를 부추긴다. 비약이긴 하지만 결국 작가의 이미지 순응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경고로도 들려 나는  안보이는 그의 사진이 가장 섬칫하기도 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소설은 이미지 때문에 살고 이미지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인데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데 기여하는 인물로 뉴욕에 온지 15년 된 사진작가 브리타를 앞세우고 있다. 브리타는 사라졌거나 사라지려 하는 작가들을 찾아가 그들이 사라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진작가였다는 점에서 작가가 제시한 일종의 구원의 통로로 느껴졌다. 그녀의 시각을 관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도시 문명이 흡수된 이미지는 어떻게 군중을 컨트롤 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로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공개적 질문이었다. 화려하게 드리워진 교각, 선상의 거대한 기중기,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하늘에 벽화를 그리고 줄지어선 빌딩과 도로표지판, 대형광고판, 비상안내문은 공포의 데이터로 사진과 그림, 뉴스와 신문에 입력된다. 그녀는 '고르비 Ⅰ'의 워홀 작품에서 마를린 먼로의 잔상을 확인하고 '코크 Ⅱ' 라는 음료수 광고에서 마오주의를 연상하고 소용돌이치듯 벽에 그려진 낙서에서 경고와 협박, 자아비판 요구와 같은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의 대자보를 떠올린다. 이미지의 연쇄는 명백한 부재를 막강한 실재로 둔갑시키고 이미지의 융합은 사실을 왜곡, 재가공하며 진실을 조작한다. 그 결과 잔상으로 남게 된 최후의 이미지는 군중의 마음을 움직일 컨트롤 파워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빌은 브리타와의 만남을 계기로, 은둔과 유배의 시간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오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베이루트에서 테러조직의 지도자 사진을 찍은 후 더 이상 작가들의 사진을 찍지 않게 된다. 그녀는 테러조직의 우두머리 라시드의 이미지를 담았지만 그 이미지가 아이들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담고 있는 아이들의 눈동자는 가슴에 담는다. 그녀는 무상대여한 탱크의 행렬과 나란히 동행하는 결혼식 장면을 이미지에 담진 않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카메라 플래시에 노출되어 죽은 도시가 재생되는 현장은 가슴에 담는다. 최초 이미지 생산자로서의 죄책감과 자신의 작업이 긍정의 역사에 조력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 때문에 렌즈를 닫아 버린 것은 군중과 미디어의 폭력으로 책을 출간하지 않겠다는 빌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이들 미국의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해오던 작업들은 불행히도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캐런, 스콧, 빌과 브리타가 좇아가던 모든 이미지들은 작가의 거울에 흡수되었다는 아니 거울이 이 모두를 삼켜버렸다는 생각, 그것이 이 작품에 대한 내 총체적 '이미지'가 되고 말았다.

거울, 소설가  VS 테러리스트

프롤로그에서 비교적 덤덤하게 관람한 집단결혼식은 에필로그에서 '이래도?' 하고 되묻는다. 처음 야구장 관람석에 있던 나는 에필로그에서 갑자기 중요 사건의 목격자라도 된 듯 허를 찔리고 만다. 구경꾼인 제 3자의 시각에서 사건의 현장에 놓여진 기자가 된 기분, 이제 앞서 촬영한 브리타와 기자들은 이미지를 남겨놓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도시는 위대하고 사람은 아름답고 결혼은 신성한 것인가. 탱크도 축제의 무대가 될 수 있는 것이 전쟁의 현실인 것인가. 야구장에서 사태를 관망한 군중은 뉴욕의 갤러리에서 전시를 조망했듯이 이제 전쟁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라 격려한다. 이미지에 지배당해온 군중속에 실은 당신도 포함되고 있었음을 자각하라는 뜻이었을까. 마지막 순간 작가는 지금까지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한 독자에게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 항변하는 듯 했다.

이 책에선 영문없이 잡혀온 인질도 우리에게 남겨진 최후는 보잘것 없는 이미지의 편린이라 주장한다. 인질은 자신을 감시하던 소년이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 상황을 1차적인 사망선고로 받아 들이는데 그 후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전쟁이며 그것을 담은 비디오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거리의 음향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자신이 죽으면 이름이나 직업, 국적은 의미없이 컴퓨터 정보처리 장치속의 디지털 모자이크 화면으로 남게 되거나 마이크로 필름에 새겨진 유령처럼 생긴 활자에 불과할 것이라 예상한다. 쓸쓸히 죽어간 빌 역시 베이루트 민병대에게 팔 만한 것들, 여권과 신분증, 이름과 숫자가 적힌 것들만 최후의 잔상으로 남겨진다. 이는 재난의 희생자와 생존자가 뉴스속 활자로 대신되는 이미지의 무책임, 처음 접한 테러현장의 충격에서 점점 교통사고와 유의미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우리네 일상과 많이 닮았다. 이미지를 무시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테러집단은 '심할수록 더 좋다'는 구호를 고안해낸 서방언론을 보란 듯이 응징하는 보복의 코드로 읽혀졌다. 작가들의 최후 이미지를 지우려는 테러집단에서 인질의 석방여부가 석방에 대한 공개발표에 달려있다는, 석방 발표 없이는 석방도 있을 수 없다는 서구 언론의 횡포를 배운 그대로 조롱하는 그들로부터 서구 언론을 향한 작가의 속내를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자본주의 대표국가의 작가로서 소설과 작가의 임무를 망각해선 안된다고 나지막히 읊조린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는 모두 사라진다. 소설가 빌과 스위스 시인은 테러라는 폭력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목숨을 잃는다. 표면적으로 테러가 소설을 대체한 세기적 사건이라 할 것이다. 인질로 잡혀온 시인은 글쓰기만이 외로움과 고통을 흡수할 수 있으며 글로 쓰인 단어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기에 세상속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쓰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는 단어와 문장을 생성해 내는 정신이 파괴되었으므로 절망에 질식된 채 사라지는 운명이었다. 빌은 베이루트에 억류된 스위스의 무명 시인을 석방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고, 런던에서 그 시인의 시를 낭송하려 했지만 낭송회와 기자회견은 끝내 뉴스로 전파되지 못했다. 아니 뉴스 이전에 사건으로 발생되지 않았다. 저명한 소설가가 이름없는 시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영어로 글을 쓰는 나이든 작가가 프랑스어로 시를 씨는 젊은 문학동인에게 손을 내미는 사건을 미국이 유럽에 내미는 범세계적 온정으로 공식화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이 계획이 공공화될 장소는 런던이라는 서구언론의 대표 장소였지만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테러리스트가 사람을 죽이며 혼란을 야기한 탓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서구사회가 언론으로 소집한 군중의 언어때문이라말한다. 끝없이 쇄도하는 이미지의 물결을 지배하는 서구사회의 방식이야 말로 현실에 대한 입장표명을 하려는 작가를 가장 불온하게 취급하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또 말한다. 작가들이 권력에 대응하고 공포를 물리치는 방식은 의식의 한계와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인물을 창조하는 일이며 그러한 인물들은 마약에 빠진 스콧을 구출하듯 타자의 삶을 바꾸는 계기도 된다는 것. 소설가는 테러리스트에 밀려나고 서사는 테러뉴스에 밀려나고 책은 녹음기과 카메라에 밀려나고 군중은 재난이라는 장르에 지배당할지라도 끝까지 폭탄과 총알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만은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라고. 사진을 찍는 것이 수십 년 후를 위한 과거, 역사를 만드는 일이라면 책을 출판하는 것은 그러한 과거와 역사를 사유하고 통찰하는 것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함이라고. 이것은 불명료하고 과포화된 사회에서 테러가 유일하게 의미있는 행위라 할지라도 혹시 광적인 군중들이 책을 흔들고 역사를 왜곡할지라도 계속하여 작가가 글을 쓰고 책을 내어야 하는 이유임에 틀림없다고.

소설가와 테러리스트는 똑같이 분노의 에너지로 군중을 컨트롤한다. 하지만 지배당한 군중의 의식은 삶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보여준다. 개인이면서도 군중이기도 한 우리에겐 정체성의 회복이냐 상실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 소설은 바로 개인과 군중사이의 균형잡힌 정체성을 함수관계로 보았을 때 나타나는 그 역학적 결과를 고민해보자고 유도한다. 군중의 균열이 꼭 개인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며 개인의 회복이 곧 군중의 균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하지만 개인의 상실로 이루어진 군중은 과연 미래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인지, 자본주의를 확산할 가치로서 그 의미가 있는 것인지 말이다. 개인의 회복을 위해 소설이 존재한다면 작가야말로 테러리스트들의 가장 확실한 표적이 되지 않을까. 역으로 추적해 들어갈수록 작가의 사회적 위치와 책무를 신적으로 격상시켜놓는 작가의 은둔적 서사는 가히 놀라웠다. 스콧이 이미지를 소비하고 캐런은 이미지에 신앙을 부여하는 사람이었다면, 브리타는 이미지 생산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빌은 이미지에 지배 받지 않기 위해 항거하는 사람으로 그려졌음에 다시한번 끄덕인다. 이제 테러리스트는 이미지의 폭력성을 최대치로 이용하고 거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며 군중은 이 모든 이미지를 흡수한 채로 무의식의 공포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거울, 보고 모자쓰다

많은 상념(想念)들로 머리가 무거워지던 독서였다. 몇 년 전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위치한 광고타워에 삼성과 LG의 로고가 선명하게 휘감기던 순간이 떠오른다. 수많은 군중과 거대한 이미지속에서도 그들이 유독 반갑고도 흥분되던 그 현장감은 단순히 애국심때문 이었을까. 그 순간 나는 분명 어떠한 이미지에 압도되었고 무엇에 지배당한 것이라, 생각하자니 같은 순간 소명되었을지 모를 한편의 시와 소설의 주인공이 다 그리워진다. 이제 나는 통일교 집단결혼식의 신랑신부들과 천안문광장의 시위 참여자들, 호메이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파들, 톰킨스 스퀘어의 노숙자들을 압축화된 기호로 데이터 처리하지 않고 다시 生의 생생한 현장으로 복귀시키고자 한다. '마천루 Ⅲ'에서 본 관람 뷰와 똑같이 세계무역센터를 바라본 내안의 캐런을 극복하고자 한다. 굶주림과 화재와 전쟁과 폭동이 하나의 뉴스로 일반화되는 작금의 시절에 우린 어떤 개인으로 군중이 되어야 할까 다시 거울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콩나물 시루같이 하루를 시작하는 도심의 군중들, 그 속의 당신과 나는 결코 스페인어로 빛나는 길이라는 '썬데로 루미노쏘'를 향하고 있지는 않아 보이는 건 나만의 걱정일까.

작품속에서 빌, 스콧, 브리타, 캐런이 뉴욕이라는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면서 각자 믿음과 소설의 의미에 대해 격식없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생각난다. 이 작품이 출간 된 시기에 작가 지망생이었고, 사진을 전공했고, 결혼을 하지 않았던 친구들과 모여 주고받던 이야기가 마침 그리웁다. 돌이켜보니 당시였다면 이 작품은 꽤 시의적이면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는 생각이다. 이미지의 시대는 흘렀고 사회는 네트워크화 되었다. 아날로그 이미지는 디지털 컨텐츠로 대체되었으며 우리의 다음 세대인 청소년들은 유튜브등 글로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약진으로 페루산골에서까지 소녀시대의 신곡을 듣는 시대를 살고 있다. 대량복제와 확산의 속도로 본다면 가히 이십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가는 건재하고 우리는 여전히 소설에서 진리를 찾고 있다. 마찬가지로 테러 역시 더욱 활성화되어 이제 소설속에 등장했던 세계무역센터는 사라진 테러의 역사가 되었다. 이쯤에서 폭력과 테러를 향한 경계와 함께 소설과 작가의 의미및 역할을 되짚어 보는 시간은 독자인 개인을 떠나 사회인 군중에게도 꽤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늘 이미지 조작에 노출된 군중이지만 이제 그러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정보생산의 역할까지 수렴하게 된 어엿한 개인이 되버린 오늘 우리가 끄적이고 합성하고 창조하는 이미지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고민이야말로 이처럼 의미있는 작품을 써야 할 의식있는 작가를 요구할 수 있는, 멋드러진 독자의 필수적인 자격이 되지 않을까.

이미지(image) 바로 보기는 이미지(理美知)를 바로 행하는 일이었다. 주어진 이미지를 제대로 보고 바르게 인식하는 일은 결국 세상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지성을 다스리는 일이 아닐까.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만큼 느끼는  일은 아름다운 이미지 이전에 그것을 리터러시하는 능력일 것이다.  이 책에서 선문답처럼 제시해준 '모자를 주문하기 전에 머리 크기부터 잰다'면 맞지 않는 모자를 사들곤 후회하거나 남이 쓴 모자를 따라하거나 어이없는 디자인에 비난을 할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이다. 각자가 자신의 머리에 맞도록 주문한 모자를 거울앞에서 제대로 확인하며 착용한다면 아름다운 이미지를 스스로 생산해 내는 크리에이티브한 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순간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에 책임지는 지혜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표현의 자유에 관한 고결한 어떤 위원회의 위원장'까지는 되지 못할 지라도 역사앞에 당당하고 미래앞에 자신있는 군중의 일원이 되기에 기꺼이 수행해야 할 동시대 우리 개인의 의무일지도 모를 일이다. 미래의 바이러스는 이렇게 아름답고 지혜로운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진 군중으로부터 하나씩 둘씩 세상에 확산, 유포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차근히 퍼진 바이러스야 말로 자본주의의 이미지라는 '괴물'에 감염되지 않을 가장 안전한 항체가 아닐까. 뉴욕 맨하튼의 빌딩숲을 헤치고 피어오르는 하얀 수증기 기둥, 이를테면 대지의 예술의 한 장면, 그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이미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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