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그대 이름은 노스탤지어(鄕愁)

이상하게 들릴까. 나 이 작품이 너무나 감미로왔다. 독재도 그리움이나 향수(鄕愁)가 될 수 있을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책을 덮고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마치 장안에 화제가 된 어느 드라마라도 종영한 그 순간처럼 아쉬움의 탄식이 비어졌다. 지난 시절 독재장르의 소설을 울분이나 연민으로 만나왔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면 분명 진일보한 변화가 아닐까 싶었다. 작품이 달랐던지 내가 변했던지 어느 한쪽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더불어 나는 이 작품이 좀 더 계속되어야 한다고 자꾸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같은 독재지만 바르사가 요사 이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의 작품에선 피해자로서의 상처가 더 오롯되 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루마니아라는 동유럽보다 도미니카라는 라틴아메리카가 더 멀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과 남미에 대한 경제적 우월감, 여성작가로서의 증언자 대 남성작가로서의 정치가, 그것도 아니면 내 무의식속에 오랜 세월 저장된 동유럽의 가녀린 체조선수와 남미의 육체파 야구선수 정도로 비교되는 기존의 편견들 때문이었는지 나는 이 작품에서 독재를 예전처럼 상처로만 인식하지 못했다. 대신 신기하게도 약간의 거리감 덕에 제대로 독재를 즐겼다고 할까. 미안한 말이지만 흡사 남미의 삼바축제라도 관람하듯 그들이 연출하던 화려한 독재의 축제를 보기좋게 음미했다는 만족감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역사라는 기록과 증언보다는 소설이라는 허구와 비현실에 그야말로 취해들었던 시간이었다. 이는 우리 역시 비슷한 시절을 겪고 민주화를 이루어낸 같은 경험자로서 상당히 부끄러운 반응임을 먼저 고백한다. 하지만 이 책이 역사서적이 아닌만큼 나는 적어도 문학적, 예술적 수치감을 느끼진 않는다. 독재장르로서의 보편적 주제, 독재자와 독재피해자에 온전히 통감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아니라 독재에 대한 정반대의 시각을 얻게 되었다는 신선함, 나는 지금 그 새로운 자극에 들떠 있는 것이다. 극명한 현실을 소재로 더 자명한 이야기를 창조했으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망각하고 이야기 속에 완전히 빠지도록 이끄는 작가의 마력이 놀라웠다. 작가야 말로 자신이 만든 허구 안에서 한 치의 반역도 허락치 않는 절대 독재자가 아니었을까. 나 역시 그러한 독재의 마법에 일정시간 마취당한 순수한(?) 독자가 아니었을까. 그는 이미 이 작품을 집필하기 30여 년 전에 “소설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장르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침략적, 제국주의적 장르이자 문학의 최상의 형태” (La novela, 9 / 1974)라 주장한 바 있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아마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독재자 한두 명쯤은 별 수 없이 자주 중첩되는 순간이 많을 듯하다. 그런데 그 한사람은 세대별로 다르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운 아버지 세대의 자부동 각하 한명과 내 청소년 시절의 9시 '땡'뉴스 한 분이 떠오른다. 이 책에서 독재자는 트루히요라는 실명외에 '수령님', '총통', '각하', '대통령'이라는 직위로 혹은 '검둥이'라는 인종으로 아니면 '자선가'나 '조국의 아버지', '재정 복구자'로 불리워지며 호칭에 일관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말하는 화자에 따라 대화하는 상황에 따라 그 수식은 대체로 자유로와 보였다. 독재자 역시 의상이나 외모에 상당한 강박을 보인 것에 비하면 호칭에는 별다른 구속없이 민주화를 이루었달까. 실제로도 그에겐 총통(Generalismo), 조국의 수호자(Benefactor de la Patria), 신조국의 아버지(Padre de la Patria Nueva) 등의 칭호가 붙었고 추가로 교회 수호자(Benefactor de la Iglesia) 칭호를 부여받기를 원했으나 교회로부터 거절당했다고 한다. 결국 그 모든 호칭은 대중이 부르고(도미니카인들이 즐겨 부르던 메렝게에서 트루히요를 chivo로 지칭) 작가가 붙여준 '염소'라는 심볼하나에 취합되는 형국이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독재자의 획일적이고도 독보적인 대명사로서의 절대적 존재감은 유명무실해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의 다양함이 되려 독재자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연출하는데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이는 한명의 독재자였지만 사람들에겐 여러 의미의 마법사로 존재하던 다양한 악마의 애칭들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브랜드 이미지를 다각화한, 다분 작가의 의도적 장치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듯 독재자는 자신의 호칭에는 일절의 강요가 없었지만 바로 작가가 계획한 축제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부단히도 염소와 부합하는 기질이나 외모, 성격을 더 중요시 하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중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체질적 특성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염소라는 동물의 본질에 가까웠다. 어렸을 때 나는 하도 물을 안 먹어 어머니로부터 '네가 염소**니'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염소가 물을 안먹는 것이 아니라 습한 곳을 싫어하고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특성 때문에 수분이 많이 필요치 않은 생태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물을 안 먹으면 염소같다는 놀림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독재자는 자신의 체온을 조절하기위해 작동되는 땀이라는 시스템은 가동하지 않으면서 가장 치밀하게 제어해야 할 방광은 통제하지 못해 그만 소변을 흘리고 다니는 신세로 그려진다.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건강한 땀으로 노폐물이 배설되지 못했으므로 다른 기관에서 질질 새어나오는 것이 당연해보이기 까지 했다. 그것은 일흔에도 손녀뻘의 소녀와 회춘을 갈망한 독재자의 탐욕에 작가가 내린 치명적인 벌이었을까. 여하튼 나는 소변으로 땀을 흘리는 그의 질병이 마치 염소의 축제에 주인공으로 선택될만한 매력이자 마땅한 자격이라는 생각에 작가의 농담이 얼마나 유쾌했는지 모른다. 반사적으로 같은 병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네 두 명의 前 대통령도 떠올랐다. 이렇듯 호칭이 여러 가지로 분열될수록 독재자의 소변이 새어나올수록 '염소'를 향한 끄덕임은 점차 설득력있게 다가오기도 했는데 유독 우리의 군사독재시절을 총정리하듯 호명하는 호칭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 작품을 번역하신 스페인 중남미문학의 전문가 송병선 교수의 유머로도 느껴졌음이다. 번역에서 독재자의 측근에 위치한 사람들을 굳이 '첩보부대장'이나 '합동참모부사령관'으로 명명하는 덕에 나는 우리시절 독재자의 마지막 날이 생각나기도 하였기에 말이다.

작가의 풍자적이고도 독재적인 마법덕에 이 책의 독재자를 만나보고 돌아오는 길은 그 시절의 아픔을 되새기고 상심하기 보다는 같은 시절을 그럭저럭 잘 헤쳐 나왔다는 대견함에 이르는 일이었다. 독재로 신음하던 그 시절 우리는 어쩌면 그들보다 한참 못한 상황이었지만 지금 우린 바로 그들의 옆 나라, 한때 그들을 지배하기도 했던 지진으로 폐허가 된 아이티를 당당하게 원조하는 나라가 되지 않았던가. 엊그제 1986년 민주화혁명으로 쫒겨 났던 아이티의 독재자, 트루히요와 나란히 둘째가라면 서러울 뒤발리에가 25년간의 프랑스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이 책에서 가장 잔인한 정보원으로 등장하는 조니 아베스가 말년에 아이티로 망명해 그의 자문관으로 일하지 않았던가. 작품 후반부에 조니 아베스는 반란을 지지 하다가 그로부터 전가족이 몰살당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기에 책을 덮은 시점에 거짓말처럼 등장한 뒤발리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독재의 악령처럼 내 가슴을 서늘하게도 하였음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30년간 아이티를 공포와 억압으로 몰아 넣었던 뒤발리에지만 혼란한 정국을 틈타 민심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정치본능도 다시금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부 아이티 국민들은 지난날의 상처보다는 눈앞에 닥친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독재자의 카리스마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니 한편 씁쓸해지는 이 실망감은 순간 묘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위기상황에서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어쩐지 그리 낯선 감정은 아니라는 생각. 한편으론 그 심정을 이해할 것 같기도 한 마음 한구석에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의 장소라도 발각된 기분이랄까. 내게 있어 그 곳은 우리 스스로 피눈물로 이루어낸 민주화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군사독재의 지휘아래 일사불란하게 앞을 보고만 달리던 유년시절의 향수가 대치하는 갈등의 접점지대일지도 몰랐다. 어느덧 나는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느끼는 세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권이 '이제 독재자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2권은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라 말하기 위한 책이었다. 실제로 작가는 생물학적으로는 분명 '死'했지만 심리적으로는 결코 '死'라지지 않았던 독재라는 마법이 라틴아메리카에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일종의 애도를 표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학으로 독재자가 되어 그 자율성하에서 거대한 반란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 같다. 작가는 우리에게 강압이 아닌 자의에 의해 맹목적인 것에 휘둘리고픈 인간의 욕망, 절대자에 의지하고 싶은 나약함이 독재라는 통치와 얼마나 조화를 이루어왔는지 그것을 확인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타도해야 할 것은 독재자가 아니라 독재라는 마약이었음을, 그 마약을 끊지 못하는 인간의 두려움이었음을 증명하려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도 자유롭지 못한 生의 유혹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나라, 도미니카를 알지 못했다. 유명한 인물을 떠올려 보아도 메이저 리그 시절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박찬호가 가끔씩 삼진 처리하던 강타자 새미 소사정도만,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항상 우승후보였던 육체파 흑인들만이 기억날 뿐 심지어는 카리브해 연안의 관광지 지명하나 떠오르지 않았던 터이다. 이 책을 덮고 세계지도를 다시 펼쳐보았다. 독재의 잔재보다는 그저 작열하는 태양과 눈부신 해변이 아름다워 관광지 사진에만 눈이 휘둥그레 졌었다. 신기하게도 매력적인 카리브해의 태양처럼, 섣부를지 몰라도 이 작품을 통해 개인적으론 독재와 독재자에 대한 나름의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시절을 잊어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도 그 시절의 상처를 교훈삼아 당당히 독재에 신음하던 바다건너 피해자들을 공감으로 격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아이를 먼저 낳고 나온 산모가 아이를 밴 산모 앞에서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듯. 그땐 죽을만큼 아팠지만 이렇게 아이가 컸다고 자랑하고 싶은 그 마음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질식시키던 독가스로서의 향수(香水)가 아닌 그 하나만이 정답이고 진실이라 믿어온 그시절 그들 열정의 향수(鄕愁)만은 오래 기억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독재와 독재자가 고향처럼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지독히도 아픈 기억도 추억이 될 수 있었음에 뒤늦은 감사를 드린다.

Background

-사람들은 과거의 지독한 상처도 지나고 나면 좋았던 순간을 추억하는 심리가 있다.

-독재자는 용서할 수 없지만 독재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자극함으로써 향수를 달래게 한다면.












우라니아로 날아든 나비들

여학교만 십 오년을 다녀서 그런지 나는 사회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페미니스트로서 목소리를 많이 드러내었던 것 같다. 나는 결혼과 육아, 직장을 병행하면서 논문을 진행하기도 했기에 직장에서의 차별적 대우나 일과 가정을 동시에 꾸려나가기 힘든 사회구조에 굉장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그러한 시기를 헤쳐 나온 덕에 같은 여성후배들에게 솔직한 충고도 해줄 수 있고 그 시절 내 논리에 슬몃 미소지을 수 있지만 그땐 참 온몸으로 분신하여 울고 싶을 때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내게 있어 결혼과 학업, 조직생활은 여성임을 자각하고 살아온 시간들이었고 결국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라니아를 따라가는 일은 곧 트루히요가 마땅히 죽어야 할 이유를 확실히 매듭짓는 일이기도 했다. 책에선 독재의 피해자로서 가장 약자층인 어린 소녀를 무참히도 짓밟는 가해자가 그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라니아와 겹쳐지는 우리시절 희생자들이 떠올랐던 건 바로 내 피해의식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여성으로서 아무런 피해를 겪어보지 않았던 시점, 그 시절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였다고 친구들과 떳떳이 성인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섰고 하필 처음 본 영화는 <서울무지개, 1989, 김호선 감독>라는 영화였다. 꿈많은 미모의 모델 지망생이 그 시절 지도자 '어른'의 탐욕과 무력에 짓밟혀 폐인이 되고 결국 옛 남자친구와 함께 절벽에서 불도저로 밀리게 되는 충격적인 영화였다. 우라니아의 고백 끝에 나는 국가최고 통치권자의 성노리개로 이용되다가 무참히 살해되는 이십년도 더 된 여자주인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서울무지개>의 흥행으로 이른바 '어른'에 인권을 유린당하고 성적으로 착취당한 후 영부인이나 측근들에 의해 처참하게 버려지는 꿈많은 처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마치 70년대 호스티스 영화처럼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작가는 이 작품을 2006년도에 출간했지만 만약 내가 그 시절에 우라니아를 만났다면 과연 몇 날 몇 일 밤을 울분으로 힘겨워 했을까? 오로지 대학입학만을 목표로 화초처럼 자란 나는 영화속 그들과 같은 나이였지만 그런 건 그저 말 그대로 영화같은 과장된 허구에 지나지 않을 거라 믿었듯이 소설 역시 별다른 자극을 주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여성으로 살아가는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영화같은 일들이 허구가 아닌 현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세계여성 폭력추방의 날'을 탄생케 한 주인공인 미라발 자매를 알게 된 그 시절이 대략 십년쯤 되었을까. 그땐 그녀들이 도미니카 여성인지 몰랐었고 그저 반독재운동을 하다가 맞아 죽은 라틴계 미녀들 정도로 이해되었다. 이 책에 소개되는 트루히요의 골칫거리 '6월 14일' 운동과 조직의 핵심주동자들인지도 몰랐었다. 책에선 미라발 자매들의 활약이나 사연이 자세히 언급되진 않았지만 트루히요의 암살자들은 자신이 암살을 결심하게 된 계기로 하나같이 미라발 자매의 죽음을 설파하고 있었다. 실제로 도미니카의 트루히요 정권이 사실상 최후를 맞게한 도화선이 미라발 자매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평가와 이 작품이 트루히요의 암살당시를 기점으로 암살전후의 정세변화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야기의 주인공 우라니아를 결코 미라발 자매와 분리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우라니아와 같은 법학을 공부했으며 미모가 출중해 트루히요에게 초대받은 경험이 있는 미라발가의 미네르바에게 헌정집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미네르바는 죽었지만 우라니아는 죽지 않았다. 작품속 등장인물이 대부분 실존인물이었지만 우라니아만 가공의 처녀였다는 사실이 그래서 착찹하기도 했다. 미네르바와 같은 시기 같은 독재자로부터의 피해자였지만 소설속에서 부활한 우라니아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작가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라 생각했다. 이 막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질문은 직접적으로 라틴계 여성들을 향하고 있겠지만 미라발 자매가 가지는 범세계적 상징성을 떠올려보면 이는 결국 보편적인 인권문제로 확대되는 아젠다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작품을 처음엔 성폭력에 희생되지 않고 끝내 상처를 극복해낸 어느 여성의 장한 고백으로 받아들였다가 차츰 독재(獨裁)라는 권력에 패배하지 않고 여성이 아닌 그것을 뛰어넘은 초성(超性)적 존재로서 스스로 자립해 독재(獨在)한 인간투쟁의 역사로 넓혀보기로 했다.

열네 살에 조국을 떠난 한 소녀가 처녀성은 잃었지만 다시 인간性과 국민性을 되찾기까지 지내온 35년에 헌화하는 글... 미라발 자매는 반독재운동의 반역자로서 곤봉에 맞아 죽은 후 바다에 버려졌다. 하지만 우라니아는 트루히요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은 남성의 상실감을 안겨주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보란듯이 미국에서 성공해 곤봉과도 같은 손가락을 극복해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미라발 자매나 우라니아나 모두 트루히요로부터 성적인 정복을 당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은 트루히요의 욕망에 승리한 인물로 상징화 될 수 있었다. 작가는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재의 제물이 되었던 여성을 앞세워 끝까지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는 인간상을 보여줌으로써 진일보한 여성상에 희망을 걸고 싶었던 것일까. 책에선 트루히요 암살 당시 체제의 전복에 가장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권력을 쥐고 있었던 로만장군이 지레 겁을 먹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남성성을 구현하지 못한 벌로 자신의 고환을 삼킨 채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역할수행의 상과 벌이 성적(性的)으로 주어지는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사회적 시각으로 본다면 우라니아는 상을 받은 것일까, 벌을 받은 것일까. 남성의 입장에서 우라니아는 독재자를 즐겁게 해주지 못하였으므로 그후 순결 트라우마로 어떤 남성과도 관계 맺지 못하는 벌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의 입장에선 비록 손가락으로 처녀성을 잃었지만 그 후 사랑이나 가족의 도움없이도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상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라니아는 남성이 아닌 폭력으로 처녀성을 잃었다는 점(남성에게 당당), 실제로도 처녀인 채로 살아왔다는 점(여성에게 당당), 그리고 아버지가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평생 순결을 지키겠다고한 약속을 지킨 점(가족에게 당당)으로 보아 상과 벌로부터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타의로부터 주어진 상과 벌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우라니아에게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야말로 라틴계 인권을 대표할 자격을 얻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미라발 자매의 죽음이 트루히요의 암살에 도화선이 되었듯이 우라니아의 귀국이야말로 트루히요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된 원년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그것은 여성이면서 아이였던 우라니아가 도미니카 독재정권에서 가장 취약한 인권유린 대상이었다면 결국 온 국민이 그토록 몸서리쳐지던 독재에서 벗어나기까지 35년이 걸렸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그녀가, 35년 동안 트루히요 증후군을 이겨내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가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시인'이었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가난할지라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순수만큼은 얼마든지 꿈꾸고 노래한다고 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산토도밍고 여학생시절 어머니의 날에 우라니아는 자신이 쓴 시 <어머니와 선생님, 최고의 여성>을 아버지와 수녀들, 여학생들, 도미니카 정권의 여성들 앞에서 낭독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떨려서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 큰 박수를 받았던 기억은 어머니가 부재한 이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된 어린 시절이었다. 이 장면은 작가가 의도한 가장 최선의 치유장치가 아니었을까. 인간은 자신에게 소중하고 의미있는 그 한 장면으로 평생을 견디는 존재일지 모른다. 나에게서 '어머니는 떠났지만 수녀들이 있고 당신들이 있으니 나는 앞으로 최고의 여성이 될 것이다'는 자기선언문은 아버지이면서 어머니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배신과 부재라는 시련속에서도 자신을 독재(獨在)시킬 수 있었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한편의 시로서 만인에게 자신의 꿈을 공표한 우라니아의 어린시절은 결국 그녀와 비슷한 나이에 조국 페루에서 독재를 경험한 라틴계 작가로서 전 세계에 자신의 포부를 알리게 된 바르사가 요사의 문학적 행보와 닮았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 미라발 자매는 지하조직에서 '나비들(Butterflies)'이라는 암호로 불리었다. 미국으로 망명한 도미니카의 작가 훌리아 알바레스는 미라발 자매의 이야기를 ‘나비들의 시절(In the Time of the Butterflies)’이라는 소설로 출간한 바 있으며 이를 각색한 영화는 우리에게 엉뚱하게도 <도미니카의 붉은 장미, 2001>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들 사후 ‘나비들’은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용감한 저항과 희생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들의 꿈이 도미니카의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면 세상은 너무나 야속하다 말할지 모른다. 이에 반해 작가는 미라발 자매의 꿈이 날아가 버렸을지 모르나 그 하늘이 곧 우라니아였다고 주장한 듯 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우라니아(Urania)는 ‘하늘의’ 라는 뜻으로,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뮤즈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우라니아는 천문(天文)을 관장하며 지구의와 나침반으로 별의 위치를 통해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가진 여신과 이름이 같다는 점에서 나비처럼 날아가 버린 미라발 자매의 꿈이 다시 우라니아라는 하늘에서 부활해 라틴아메리카의 미래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내가 성인영화라고 처음 본 <서울무지개>의 모델 지망생을 비롯해 세상의 모든 독재자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해온 꽃다운 여성들도 결국 나비처럼 날아간 것이라면 우라니아는 독재에 희생된 전 세계 여성을 추모하는 그토록 아픈 하늘이었던 것이다.

끝내 부활한 우라니아는 도미니카의 기억을 좇아 내기 위해 도미니카의 역사를 좇았고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 도미니카의 기록을 저장했다. 그녀는 전 세계 기업들의 재정상태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도덕적 지식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최소한의 도덕을 상실한 아버지의 위선적 편지엔 답장하지 않았지만 이제 사촌의 진심어린 안부엔 답장할 여유를 얻었다. 그렇다면 전설적인 존재 미네르바를 계승한 우라니아에게서 피어나는 인권의 향기는 아마도 억압에도 결코 죽지 않은 자유의 나비, 장미보다 붉은 용기의 향수가 아니었을지. 그것은 오늘날 나라와 지도자와 부모의 부재속에서도 꿋꿋이 독재하려는 누군가에게 날아든 희망의 선물은 아니었을지.

-그녀는 언젠가 도미니카 공화국이 이룩하게 될 젊고 아름다우며 열정적이고 이상적인 국가의 서곡이었다. 1권 244p

Design Con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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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의 팩키지나 로고 디자인에 미라발 자매의 암호, 버터플라이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적용.

-독재시절 향수에 대한 반감을 상쇄시키고 비록 억압당했지만 꿈만은 잃지 않았던 순수를 기억하도록.














지식인의 짐승교향곡, 향수(響獸)

이 책에서 트루히요는 유난히도 시를 읊조리거나 외우는 사람들을 대체로 싸잡아 신경질적으로 폄하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에게 시인은 한마디로 웃기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짓궂게도 그의 측근에 문학을 그중에서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배치시키고 있다. 우선 그의 부인 마리아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여류작가로서 도덕적인 시를 좋아하며 그의 핵심측근인 '걸어다니는 오물' 헨리 치리노스 의원은 자칭시인으로서 시를 달달 외우고 다닌다. 비록 허수아비 대통령이었지만 연설문에도 시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던 발라게르는 박식하고도 소심한 시인이었다. 심지어 타고난 정보원으로서 독재정권의 각종 음모수행자였던 조니 아베스마저도 청년시절 시를 썼다고 하며 그의 유일한 취미는 비교서적 읽기였다. 이들 측근들의 문학적 취향은 참 詩답지 않은 반전이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트루히요가 그토록 조롱하는 모든 '시'의 주인공은 어쩐지 최고의 여성이 되겠다고 '시'를 낭독한 우라니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속에서 트루히요는 우라니아를 향해 직접적 비난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래봤자 결국 당신들(여성) 운명은 내 손안에 있다는 무언의 질'시'가 아니었을까.

트루히요는 앞에선 아부하는 지식인에게 조롱을 일삼았지만 그나마 아부라도 하지 않는 지식인에겐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스페인 내전 후 망명 온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이자 기자였던 지식인 갈린데스(Jesús Galíndez)의 저서『트루히요의 치세 La Era de Trujillo』에 격분해 그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지식인을 뉴욕에서부터 비행기로 납치해 도미니카에서 처형한 이 사건은 트루히요 정권에서 가장 반인권적인 폭력행위로 기억되고 있으며 작품속에서 암살집단의 핵심인 안토니오는 갈린데스를 공항에서 납치한 동생 타비토를 정권에서 죽여버리자 그 복수심으로 암살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예술안에서도 특히 문학이라는 창작까지도 오로지 자신을 찬양하기 위해 독재하는 장르이길 바랬던 애정결핍의 사나이였다.  

한편 트루히요가 '시'를 조롱하고 노골적인 비난을 서슴치 않았던 것은 어찌보면 뼈아프긴 해도 작가의 입바른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식인이며 성직자들, 대학교수들이 마리아의 <도덕적 명상>과 <거짓우정>에 극찬을 하는 것에 심사가 뒤틀리던 트루히요의 시선은 꼭 도덕주의자와 위선자를 동일시하는 작가의 시선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측근 중에 대놓고 지식인이라 불린 우라니아의 아버지 카브랄 의원의 경우도 집에는 누구보다 책이 가득했지만 딸을 독재의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려했던 대표적인 위선자로 그려진다. 군부독재의 억압하에서 대표적인 저항시인의 길을 걸어온 우리네 김지하, 고은 시인같은 문인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는 다분 지식인이야 말로 문학으로 도덕의 가면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냐는 작가 스스로의 비판으로도 여겨졌다. 우라니아의 시점을 대변하는 화자는 최고위층이 참석한 리셉션 자리를 회상하며 아버지를 포한한 지식인집단에 뼈아픈 질문을 한다. 트루히요의 입으로 고위관계자의 아내를 탐하였노라 당당하게 떠벌리는 현장에서 어찌하여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이 나라의 지식인들은 독재자의 학대를 용인하고 되려 우상화하였는지에 반문을 제기한 것이다. 만약 카브랄이 건강한 상태였다면 '그때 아빠는 어디에 있었느냐'는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우라니아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을까. 지식인으로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카브랄은 말을 할 수 있었어도 답은 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차라리 입을 다문 벙어리가 되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카브랄은 트루히요의 독재를 용인하고 협력한 대다수의 지식인을 표상하는 것이기에 그 결과 두 번 다시 말을 할 수 없게 된 그의 질병은 그들이 결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설사 말하고 싶거나 말해야 할지라도 말할 자격은 없다는 벌로도 느껴졌다.

하지만 작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명한 정치가 출신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작가는 지식인의 책무를 상기시키기 위해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반신불수의 백만장자에게 <전쟁과 평화>같은 19세기 소설을 읽어주며 학비를 마련한 우라니아를 반론으로 제기하며 문학으로 도덕성을 지켜낸 긍정의 서사를 이끌었다. 우라니아는 자신이 떠날 당시 마흔 아홉이었던 아버지와 꼭 같은 나이가 되어 조국에 돌아왔지만 결코 아버지와 같은 지식인이 되진 않았다. 그녀는 기나긴 시간동안 도미니카 관련서적, 증언과 에세이, 회고록을 읽으며 조국과 트루히요 전문가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소설속에서 아버지 카브랄은 끝내 명예회복을 못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존했던 카브랄 의원은 1941년 석방되어 1942년 상원의원으로 복귀한다. 이는 혹시 작품속에서 지식인을 대표하던 카브랄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함에 분노한 작가의 형벌은 아니었을까. 더 아이러니 한 것은 그토록 문학을 조롱하던 트루히요도 <쿠오바디스>를 항상 마음에 간직하며 작품속에 로마의 귀족으로 등장하는 시인 페트로니우스를 동경한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페트로니우스의 쾌락적 습관을 부러워 한 것이며 이 동경에는 자신의 모계가 아이티 흑인이라는 열등감과 검은색 피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이 자리하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시인의 서정성, 문학의 감성에 무의식적인 의지를 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그래서 자신의 측근 정치인들을 그토록 문학적인(?) 닉네임으로 호명하였을까? ) 그날밤, 우라니아의 귀에 대고 네루다의 시를 읊은 그가 아니던가.

결국 그것은 통찰하는 작가나 수용하는 독자의 문제인 것이지 창조된 문학의 잘못은 아니라는 주장이 아닐까. 통치자와 국민의 문제인 것이지 정치의 잘못은 아닌 것처럼. 이는 혹시 위선을 특기로 하는 정치와 도덕을 무기로 둔 문학을 병행하는 작가의 이중적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서사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식인이라면 작가라면 특히 정치와 관계된 사람이라면 위선이야말로 독재에 협력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믿음직한 수단임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작가가 정치와 관련있는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 지에 대해 고민한 조지 오웰(1903-1950)은 그의 에세이 <민족주의 비망록, 1945>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작가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태도를 가지고 정치행동 이전에 제일먼저 자신의 사고과정을 오염시키지 말라고 충고한 바 있다. 그러한 도덕적 노력이야 말로 정치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소양이라 재차 주장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작가로서 문학적 기교가 정점에 다다른 시점에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려 했으므로 지식인이면서 당시 독재에 동조한 꼴이된 많은 카브랄의 빚을 갚아내는 의미가 있다할 것이다.

가만 보면 지식인은 위선적이고 문학은 도덕을 은폐하며 시인은 비현실적이라는 트루히요의 주장은 비록 비도덕적 삶을 살았지만 그러했기에 가장 자신있게 알아챌 수 있는 그만의 능력이자 직관이기도 했다. 책에서 트루히요는 아이티의 부적을 지니고 다니기도 하고 우상화된 자신을 신격화하는 나르시시즘에 도취되기도 한다. 흡사 무당의 우두머리로서 그는 향수(鄕首)였던 것이다. 신적인 입장에서 트루히요가 보기엔 지식인들의 위선이야말로 자신이 제창하던 독재보다 더 사악한 짐승들의 노래가 아니냐며 보기좋은 한방을 선사했다. 그들이 걸핏하면 자신앞에서 연주하던 교향곡이야말로 가장 웅장하고도 야만적인 향수(響獸, 짐승의 연주)가 아니었을까. 트루히요 시절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었던 카니발 무곡, 메렝게도 울고 갈 범세계적인 클래식이 아니었을지.

Target Area

-주요고객은 기득권 세력과 위선적인 지식인에 반감을 가진 남성사회계층에 주력

-젊은 층과 자유분방한 예술인, 에너지가 충만한 스포츠인에 적극적 소구 















오래 사는 복, 영원불멸의 향수(享壽)

이 작품은 트루히요가 죽기 전 까지는 세 개의 시점이 분명하게 번갈아가며 공존하다가 2권으로 넘어오면서는 우라니아의 시점은 약화되고 사후 암살자들의 행보에 초점이 맞추어 지면서 그야말로 화자가 갈수록 증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2권에서 우라니아 시점의 공백과 암살자, 트루히요, 주변인물들의 어지러운 양상은 더욱 대비되어 보였다. 마치 독재자의 죽음을 확인한 후 일정시간 피해자의 침묵으로도 느껴졌다. 시점에 따라 각자 말하는 방식도 다채로왔는데 우라니아가 주로 자신 내면과 함께 '사고'하였다면 트루히요는 주로 혼자서 '독백'하였고 암살자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그들끼리 '대화'하는 식이었다. 이들 모두는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번민을 멈추지 않았고 책을 덮고나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사라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 현상을 결국 축제의 목격자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 중 인상적이었던 화자는 단연 우라니아에게 '너'라고 호칭하며 그녀의 심경을 변호하듯 울려퍼진 목소리였다. 처음엔 말할 수 없었던 아버지이거나 먼발치에서 모든 걸 지켜본 작가라 생각했지만 결국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돌아온 또 다른 우라니아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가공된 우라니아만이 주관과 객관을 조율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1권에서 이미 총맞아 죽은 트루히요가 다시 2권에서 플래시백으로 출현해 암살의 순간까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다만 죽었지만 불사조처럼 끝내 죽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식과 구성은 독재자는 죽었지만 독재자의 영혼은 결코 죽지 않았음을 더욱 방증하는 훌륭한 구속장치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는 생각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좀처럼 그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독재자의 목소리는 생생했고 역으로 암살자들의 목소리는 어렴풋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과연 '염소의 축제'의 행사주체는 어디였으며, 그날의 주인공은 누구였는지 축제기간은 언제까지 였는지 축제로 얻어진 것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거대혼란을 야기시켰다고 할까.

'염소'는 암살자들이 호칭한 트루히요의 별명이었다. 아시아에선 염소에 길조와 화목, 행복, 원만, 기쁨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지만 서양에서는 성적인 의미가 내포된 동물이다. 영어에서 '호색한'을 뜻하는 Satyric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의 시종 사티로스에서 파생된 말이기 때문이다. 이 사티로스는 얼굴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머리에 작은 뿔이 났으며,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트루히요는 누구보다도 과도한 성욕과 성적 능력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죽기직전까지 최고위층 각료의 부인과 딸을 비롯해, 소녀와 유부녀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매력적인 여성을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절대권력이 무소불위함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러한 트루히요를 악마적 본성을 지닌 호색한의 상징, '염소'라 지칭한 것은 어찌보면 소박하다고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이 책에선 염소가 축제를 벌일 땐 재미나게도 그 염소가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이냐, 제물로서 이냐 구경꾼이나 들러리로서 이냐를 따져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이중, 삼중의 의미로서 <염소의 축제>를 연출하기 위해 그토록 혼란스런 화자들을 등장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을 통해 진정한 축제의 주인공을 찾아보시오, 하고서 말이다.

먼저, 우라니아는 표면적으로 육욕에 눈먼 트루히요가 벌인 축제의 희생양, 제물로서 축제에 초대받은 손님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행사주체는 트루히요이고 행사 장소는 아마도 '마호가니의 집'이거나 푼다시온 농장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라니아는 이 신성한 축제를 망치는 당사자이면서 자신이 사실상 그 축제의 종결자로서 종지부를 찍은 연출자가 된다. 우라니아 이후 더 이상 축제는 개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예로운 폐막식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남성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염소를 절망에 빠뜨린 우라니아는 한순간에 제물에서 승리자가 된다. 축제는 승리자의 것이라고 보았을 때 염소의 축제는 얼떨결에 이겨버린 우라니아의 축제가 아니었을까. 미네르바가 파티에서 트루히요의 뺨을 때리며 저항했다는 전설은 이렇게도 소설에서의 특보로 계승 된다. 이제 축제의 수혜자는 고백할 수 있으며 패자는 아무 말이 없는 것이기에.

이 책에서 암살자들은 염소인 트루히요를 죽임으로써 자신들이 벌인 축제를 제대로 만끽하고자 한 페스티발의 제안자일 것이다. 이때 행사주체는 반독재조직이며 집행위원회는 군부와 비호세력, 스폰서는 미국이요, 행사장소는 고속도로변이 되겠다. 그리고 트루히요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시민들을 환호하는 다수의 구경꾼으로 계획했을 터이다. 그들은 거사직전 현장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대화로만 리허설을 진행했다. 실제 리허설의 공백때문이었을까. 암살자들은 전반적으로 행사진행이 너무나 미숙한 아마추어들이었다. 주체집단은 지휘체계를 상실했고 그 결과 운영요원들은 다잡은 염소로도 축제를 연출할 수 없었다. 특급가수는 어렵사리 무대로 모셔왔지만 음향 시스템도 고장나고 관객도 없어 콘서트는 진행되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제안 의도는 기가 막혔으나 축제는 실패했기에 다만 구상으로만 남은 우발적 행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행사실패의 책임은 누구의 몫일까. 이 작품에서 트루히요든 암살자든 모두 염소의 축제를 제대로 성공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윗선의 배신은 제쳐두고서 라도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할 관중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상처로 남은 듯하다. 요즘 TV를 장식하는 튀니지 시민들의 독재타도 반정부 시위를 떠올리면 그들의 리액션은 차라리 반전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마지막 트루히요의 아들 람피스는 암살의 주인공들을 잇다라 처형하면서 복수의 축제를 즐기기도 했다. 암살자들을 소품삼아 람피스 혼자서 극본, 연출, 주연, 관객을 떠맡은 광란의 행사였다. 이렇듯 이 책에서 염소의 축제는 모든 화자의 축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광경은 대체로 씁쓸하고도 허탈했다. 원래 염소의 축제는 시민들의 자발적 의지에서 시작되는 민중의 축제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책을 덮고 찾아본 도미니카의 전통축제 장면에는 유난히도 염소괴물을 상징하는 가면이 많이 등장했다. 작가는 말한다. 축제란 어느 한사람만의 독점이거나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행사가 아니라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참여의지를 가진 모든 시민이 주체가 되어 교감할 수 있어야 함을. 그 자유의지야 말로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용기이자 독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임을. 그러므로 그때 자유의지를 상실한 도미니카의 관람객은 불행히도 축제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음을.

하지만 분명한건 모든 염소의 축제의 시발점은 트루히요 그였다는 것. 그가 만들었고 그 때문에 시작되었고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실행되었으니 그는 진정으로 축제의 오리지날 창안자였던 것. 아마도 그 땅에서 축제가 계속되는 한 그는 천수이상으로 오래 사는 향수(享壽)를 누린 영광의 얼굴이 아닐지. 그렇게 본다면 그 모든 축제를 지켜본(보았을 것 같은) 트루히요는 이 작품이 자신을 위한 영생(永生)잔치의 한마당쯤으로 기억될 만하지 않을까.

Brand Concept

-독재에 대한 상흔과 기억이 오래 남아있었던 것과 독재자로서 통치기간이 길었던 것에 착안 

-오래남는 잔향을 강조하고 당당히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자신만의 향기를 가지도록 유도.














자유마취제 오데코롱

무엇보다 이 책에서 암살자들의 최후를 묵묵히 따라가는 일은 어이없고도 쓸쓸한 일이었다. 속된말로 운좋으면 목숨을 건져 훗날 영웅이 되기도 하고 재수없으면 바다에 버려져 상어밥이 되는 꼴이었다. 열사이냐 사형수이냐는 정작 그들이 저지른 일과는 무관해보였다. 명분도 순서도 목적도 없는 이들의 최후는 일관성이 없었던 관계로 그만큼 오래 기억되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독재정권의 보호아래서 요직을 맡고 있거나 최소한 트루히요 신봉주의자들과 친인척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영원한 구원자가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기까지 이들은 각자가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아마디토는 반란군의 누나와 결혼을 허락지 않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자신이 사랑한 사람의 동생을 죽여 버린 과거로 암살을 계획하는 인물이었다. 안토니오는 동생이 음모에 이용된 후 헌신짝처럼 살해되었음에도 정권이 살인자로 만들어 진실을 은폐하자 복수심으로 음모에 가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죽는 것보다 용기와 배짱이 필요한 일'임을 조언했던 조니 아베스의 의미심장한 한마디는 왜 자꾸 우리의 용기를 시험하듯 들리는 걸까. 1권에서 활약이 두드러진 '사악한 지성' 첩보부대장 조니 아베스는 모든 희생의 행사를 추진하고 실행하는 주범이었는데 흡사 군사독재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우리네 중앙정보부장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었다. 실종과 처형, 중상모략, 여론조작및 은폐가 주전공인 그는 특이하게도 빨간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인물이기도 했는데 이는 미신적인 의미보다는 트루히요 대신 피를 손에 묻혀야하는 자의 자기방어적 소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국 피 묻은 손을 닦은 그것으로 땀도 닦아야 하는 그에게 빨간 손수건은 일종의 마취제가 아니었을까. 잔인한 피와 야비한 땀이 섞여 자아내는 사악한 체액은 가장 자신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향기일 것이기에 그는 빨간 손수건에 의지 한 것이리.

비단 첩보부장 뿐이었을까. 암살자들은 하나같이 독재가 두렵다기 보다는 어느 순간 이성의 마비 상태를 초래해 스스로 무감각한 시민으로 살게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들 실존인물 일곱 명에게 트루히요를 암살하는 일은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맞물려 있었다. 즉, 그들은 자신이 살기위해 트루히요를 죽여야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이들 모두는 염소가 살아있는 한 자신들은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거사를 도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생존투쟁에 다름아니었다. 그런데 그러한 비장하고 숙연한 삶의 욕구에 비해 이들의 행동은 민첩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하였다. 작가는 꽤 상당한 분량을 정작 독재자를 죽여 놓고서도 사후처리를 감당하지 못해 우왕좌앙는 그들의 행보와 불안한 심리상태에 할당하면서 천천히 독자의 가슴을 옥죄고 있었다. 그나마 암살자들 중 가장 인상적인 최후는 신앙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터키인 살바도르였고 가장 외면하고 싶던 최후는 국군총수이며 제 2인자 로만장군이었다.

특히 매순간 세심하게 묘사된 로만장군의 심리와 치밀하고도 침착하게 대처한 발라게르 대통령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교체되면서 같은 순간을 비교할 수 있게 한 작가의 노련함은 우라니아의 수미쌍관적 고백에 이은 이 작품에서 또하나의 둔중한 백미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파악하여 적절한 시기에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 결국 한 사람의 운명을 나아가 한 가족과 국가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일임을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유독 트루히요가 미스터리한 인물로 결론내린 허수아비 대통령 발라게르. 그의 대처는 국가통치권을 인수하지 못하고 군과 시민, 암살자들, 트루히요 가족 그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한 로만과 더욱 비교되는 재미가 있었다. 그는 암살자들이 로만의 배신에 갈팡질팡 할 때 로만이 결정적인 기회를 흘려버리고 있을 때 트루히요의 가족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때 마치 이 때를 기다려왔다는 듯 침착하고도 슬기롭게 위기상황을 모면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름을 바꾸는 현명한 지식인이었다. 이 지식인이 트루히요에 마취되었을 땐 하느님을 대신해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공화국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고 그를 위한 시를 헌사하던 분이었다. 시인으로서의 감성마저 마비된 채 합리적이면서도 문학적으로 아부를 지속해왔던 분이었다. 하지만 트루히요 아들의 불안과 영부인의 탐욕을 이용해 그들과 친화관계를 만들고 공적을 돌림으로써 위기상황을 통제한 실리주의자이기도 했다. 이 평정과 차분함은 끝내 조니 아베스까지 몰아내며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내고 시민연대의 움직임을 통해 국민의 정서를 바꾸어 놓는다. 그는 마취된 척 자신을 위장했거나 간혹 마취약이 듣지 않는 특이체질이 아니었을지.

문득 트루히요의 모든 냄새를 증오한 우라니아가 떠오른다. 트루히요는 혼혈이라는 열등감을 숨기면서 자신의 외모를 관리하는 수단으로 향수를 이용하는 사람이었고 유난히도 냄새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나 역시 냄새에 민감한 쪽인데 이런 사람들은 유별난 감각때문에 타인을 피곤하게 만든다. 트루히요는 자신의 냄새만으로도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물론 아예 정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공군기지의 망가진 하수관에서 새어나온 냄새때문에 군수 총책임자인 로만에게 심한 모욕을 준다. 로만은 트루히요 가족의 일원이었으면서도 그간의 증오심 때문에 음모를 지지하게 된 인물이었다.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님을 보여주려 음모에 가담했지만 결과적으로 쓸모있는 인간으로 남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로만은 하수구와도 같았던 트루히요의 악취에 제대로 마비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암살자들과 시민들, 로만장군과 발라게르를 보면서 트루히요가 아침마다 뿌렸다는 오데 코롱이야말로 독재를 강화하는 마취제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이티의 풀내음이든 마호가니 나무의 향이든 랑콤의 장미향이든 그것은 사람들의 이성과 근육을 마비시키고 심할 경우 복종심과 존경심까지 유발하는 향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마이클 스토다드(Michael Stoddard)에 의하면, '비록 사람에게 향이 일으키는 반응이 규칙적,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향에 의한 지배를 받는다' 고 하였다. 그 향이 비록 썩어 들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악취일지라도. 실제로 우리의 뇌는 고통이라는 자극을 쾌락으로 왜곡, 착각하는 신비의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악취라는 고통도 최고의 향수라는 쾌락으로 저장해 버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트루히요의 독재는 독자적인 향으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 최고의 최면술은 아니었을지.

USP(Unique Selling Proposition)

-이성(理性)이 마비되는 독재자의 마법(Chivo's Magic)을 긍정적으로 유도

-상대 이성(異性)을 꼼짝 못하게 할 만큼의 감성 유도성분을 차별화전략으로.















넘버 32.(TRUJILLO No.32, 1961)를 론칭하다

이 작품은 트루히요시가 산토도밍고라는 이름을 되찾기까지의 도시수복의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실존인물 카브랄이 공교롭게도 1935년 수도 이름을 트루히요로 개명할 것을 제안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작중 딸로 분한 우라니아는 조국을 떠난 후 우라니아가 아닌 카브랄 박사라는 이름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도시이름을 트루히요로 바꾸어버린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한것은 트루히요시가 다시 산토도밍고로 번복되고도 한참 후 귀국해서였다.  트루히요가 살아있을 때까지 바뀌지 않았던 도시이름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 다시 찾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이름과 동일시된다. 그 이름은 아마도 조국의 하늘이 아닌 트루히요의 하늘이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즉, 카브랄 박사가 우라니아라는 이름을 다시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은 아버지를 용서하기까지의 시간과 중첩되고 있었던것. 도시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의미는 곧 고향(산토 도밍고)을 되찾고 자신의 하늘(우라니아)을 바라본 것과 같았다. 먼곳으로 떠난 사람들은 대체로 고향에 돌아오기 까지 그곳의 하늘을 향수하는 힘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우라니아는 결국 기나긴 독재의 세월로부터 결국 자신만의 향기를 찾은 벅찬 반역자에 다름아니었다. 또한 그 반역의 세월은 육군 사령관신분으로 쿠데타에 의해 대통령이 된 후 32년간 독재자로 살았던 트루히요 시절을 향한 향수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독재는 향수(鄕愁)가 될 수도 있으며 독재자는 오래오래 향수(享壽)했으며 독재자 측근들은 향수(響獸)를 연주했으며 독재자는 마취의 향수(香水)를 뿌려왔지만 그 모든 향수에 굴하지 않고 꿋꿋히 자신만의 향기를 개발해온 우라니아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제 우린 무슨 향수를 뿌려야 할까, 아니 어떤 향수를 만들어야 할까.  우라니아를 보면서 어떠한 악취에 대항하거나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뿌려대는 향수가 아니라 영혼으로부터 오랜기간 우러나온 나만의 향기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그래도 지식인의 대명사라 불린 그녀의 아버지 카브랄의 서재를 다시 방문해볼까. 그의 서재에는 '펼쳐진 책은 말하는 머리이며, 닫힌 책은 기다리는 친구이고, 잊힌 책은 용서하는 영혼이며, 망가진 책은 우는 가슴이다.' 라는 타고르의 명언이 새겨있었다. 그냥 스치고 말 명언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무례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왜일까.  이러한 책을 접한 독자로서 이 책은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당신은 무엇을 기다려야 하며, 무엇을 용서하고 무엇에 울어야 할지 질문하는 것만 같았기에 말이다. 힌트라도 얻을 요량으로 슬그머니 의원의 수첩이라도 들쳐볼까. 그의 수첩엔 '한사람이 이루었고 이루고 있으며 이룰 그 어떤 것도 이루었던 상태나 이루고 있는 상태 혹은 이룰 상태로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젠가 그렇게 되었다가 이후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문구가 또렷하다. 지식인으로서 독재자에 순응하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문구였겠지만 오늘 나는 지식인의 이 문구가 어떠한 고통도 결코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없다는 위로의 한마디로 들린다. 엊그제 타계한 박완서 작가의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어느 인터뷰와도 말없이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헤쳐나온 자만이 자신의 향기를 가질 수 있다는 충고였을까. 책을 덮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비로소 다시 시작하는 나만의 새로운 향기를 만들고 싶다는 야무진 생각을 해본다. 불가능할까?

이번 노벨문학상은 어쩐지 문학하는 지식인 작가의 독재에 좀처럼 저항하고 반역할 수 없었다. 그동안 독재장르의 소설을 대할때면 늘 무력감으로 며칠이 우울했었는데 독재를 향기의 유희로 만나본 덕분인지 이번 독서에선 유난히도 생생한 문학의 현장을 여기저기 투어하고 온 느낌이다. 아직은 살아있고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生 날 것의 향기를 맡으며 지긋이 눈을 감아본다. 생각해보면 살아있다는 것은 좋든 싫든 모두 냄새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냄새와 향기의 기억을 그 인물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책을 덮고 찾아본 트루히요의 인상은 왕성한 권력가의 풍체를 지니고 있었고 쇼맨쉽이 강해보이며 무엇보다 눈빛이 강렬했다. 작품속에서도 그와 대면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뚫어보는 듯한 맹렬한 시선이 제일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바로 이 느낌은 어딘지 모르게 얄궂게도 허를 찌르는 작가의 시선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독재처럼 익숙하고도 편안(?)했고 그만의 독특한 색깔과 향기의 발산에 자발적 복종을 할 수 있었다. 어렵기만한 사유를 늘어놓고 통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이야기가 흘러가도록 유도했으며 인물들의 내적외적 갈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다원화된 독재의 참맛을 알게 해주었다. 작가의 준비된 치밀함이 흡사 국민의 심리를 꿰뚫는 노련한 독재자의 통치술과도 같았던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처음에 눈이 잘 뭉쳐지지 않아서 그렇지 한번 원형을 만든 후엔 제 몸뚱이 자체가 스스로 굴러감을 유도하는 가공할 추진력은 파워풀, 원더풀 아니었던가. 매 장면 시시각각 섬세하고도 디테일한 묘사역시 역사적인 고증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고로, 그가 창조한 독재의 향수는 압도적이었다. 그가 창조한 문학은 아마도 넘버.32의 트루히요 향수가 되고도 남을지어다. 대체로 독재자는 향수와 잘 어울리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히틀러시절 독일군은 그의 악취 때문에 향수를 뿌려야 했었고 김정일은 여심을 잡기 위해 향수 뿌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조향사 자격증을 딸 정도의 향수 마니아로 알려진 바 있다. 독재자의 향수란 문학으로 저항과 반역을 추구해온 작가만이 제조할 수 있는 비법일 것이므로 그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시대 문학의 조향사일 것이다. 문득 우라니아와 작가에 이어 나만의 향기는 어떤 색깔일까 궁금해진다. 우린 저마다 자신만의 향기를 찾기 위해 이렇듯 독재적 작가에게 기꺼이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닐까. 웅장한 독재의 향기에 취한 이밤, 그가 뿜어낸 향수의 아우라 속에서 부디 지나간 상처는 마취되고 흉터는 사라지고 새살이 피어나길 기원하듯이.

한 병의 향수가 탄생하듯 한 사람의 향기가 형성되기까지 이토록 수많은 일이 있었으며 그토록 극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하나의 향기가 태어나고 그것이 자신만의 향기가 되는 일은  누구에게도 마취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의 향기를 자각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生의 축복임도 조용히 깨닫는다. 통렬한 자각으로 탄생된 그 향기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나만의 향기일 것. 그리고 나만이 독재(獨在)하는 生의 고독한 비밀일 것. 그러나 죽어서도 잊히지 않을 오래된 그리움일 것. 나는 오늘도 나만의 향기를 얻기 위해 독특한 나만의 향수를 만나는 그날을 위해 탐욕과 허영과 자만과 분노와 시기의 마취에서 깨어나고자 정신을 가다듬는다. 누군가는 그렇게 탄생한 내 향기에 흠뻑 취해 나만의 독재에 가득 안겨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나처럼 生의 신비함에 감사하길 감히 고대한다. 서로 서로 독재(獨在)하는 당신과 모여 앉아 한번쯤 자유롭게 우리 남은 生의 행복을 이야기 하고 싶어진다. 나만의 향기가 곧 나를 말해주는 그날, 당신만의 향기가 누구보다 기쁠 우리 축제의 그날 나는 비로소 외칠 것이다. 독재(獨在), 죽지 않고 영원히 퍼지는 그 향기를 위하여, 눈물로 건배 ! 

■ Image Making 

-과거에 대한 향수 + 미라발 자매의 꿈 + 지식인의 연주 + 오랜 통치기간 + 염소의 마법 = 트루히요, 오래퍼지다

- 넘버 32는 통치기간을, 1961은 트루히요가 암살된 해를 의미

 


 

 

 

 

 

 

 

<덧붙임>

많은 도미니카 관련, 트루히요, <염소의 축제>관련 사진들을 모아 제 나름대로 패러디, 합성했습니다. 
아쉬운건 7인의 열사들 관련 사진이 제일 드물었습니다. 라틴어이고 시점도 정확하지 않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제안(Proposal)이라는 컨셉으로 구성하다보니 이미지가 많이 필요했고 출처를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점,
상업적 사용이 아니니 너그러운 이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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