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린 교수님의 행복한 도덕학교
문용린.길해연 지음, 추덕영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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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어른을 바라보다

어른들 말씀이 하나도 그른 게 없어 올 한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달력을 보면서 새삼 놀라고 있는 요즈음이다. 아이도 벌써 겨울방학을 앞두고 크리스마스 선물 타령을 하고 있다. 이제 이 맘 때가 되면 학생이나 학부모 할 거 없이 이번 방학엔 어디로 보내야 하나를 고민하게 된다. 처음엔 대한민국 학부모로 사는 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싶었는데 그것도 습관이 되버렸고 습관도 경력인 지 여기저기 방학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를 향해 열심히 안테나를 작동중이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맞벌이 할 땐 늘 정신없이 아이가 무슨 책을 보는지 요즘 어떤 일이 화제인지 도무지 몰랐는데 요즘은 대화시간이 늘어 아이와 눈을 맞출 수 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아이가 조울증세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을 땐 춤이라도 출 듯 흥분상태라 너무 좋고 사소한 일이라도 기분이 나쁠 땐 머리가 아파 토할 정도로 안 좋아 지는 것이다. 대부분 학교에 갔다 오는 처음 얼굴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는데 요즘 들어 친구보다 선생님에 대한 비평을 자주 하는 추세다. 즉, 자신 또는 친구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잘 알지도 못하고 꾸중을 한다든지, 선생님이 아이들과 한 약속을 잊어버렸다든지, 정해진 기준없이 누군가를 선별한다든지 하는 것에 심각하게 반응한다. 친구들이 아닌 선생님의 '도덕'에 시선이 향해 있었다. 아이가 커버린 것이다.

아이는 가끔 선생님이 이러이러 한데 이것은 나쁜 행동이 아니냐 묻는다. 친구간에 벌어진 일을 물어올 땐 자신있게 답하다가 선생님으로 주인공이 바뀌다 보니 상당히 당황스럽다. 자꾸 선생님도 이유는 있었을 것이라는 어른 된 입장으로 같은 편이 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 학년이 올라갈수록 선생님이나 어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아이들에게 나처럼 허를 찔리는 기분이 드는 학부모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분명 어려운 단어를 써가면서 적당히 넘어가기 곤란한 경우도 생긴다. 아이가 끝까지 선생님의 잘못을 인정받고 싶어 할때, 그럴 때가 있다. 어른들 사이에서 요즘 한창 '정의'와 '도덕', '공정'이라는 개념이 유행인데 이 책은 아이들 입장에서의 도덕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선생님도 얼마든지 아이들 기준에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를 비판하기 전에 항상 나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우린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 선생님에게도 유용한 기준이 될 듯하다.

승부, 정면으로 하다

먼저, 이 책은 참 착하다. 솔직히 제목에 '도덕학교'라는 말이 들어 있어 아이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누군가 재밌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입소문은 이렇게 중요하다. 사실 아이들이 문용린 교수를 알리는 만무하고 이 책은 바로 학부모를 타겟으로 한 책이라 느껴진다. 엄마(혹은 교육계)가 선택해서 아이한테 권하는 루트를 꾀했다고 보여지는 제목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이 초등 3학년만 넘어가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출판사도 좀 알았으면 한다.(다음부터는...고학년 대상이라면 더욱더) 그래서 나는 책을 사줄 때 '이건 너무 지루하지 않겠어?', '이 이야긴 너무 빤한 거 아냐?' 이렇게 말하곤 한다. 특히 『문용린 교수님의(아이들 입장에서 누구인 지 알게 무언가) 행복한(너무 진부하지 않나?, 도덕해야 행복하다는 말? 도덕을 배우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 도덕학교(뭔가 교훈을 주입할 것 같은 분위기 아닌가?)』라는 제목은 너무 정직한 편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오히려 이 정공법이 제대로 먹힌 듯 하다. 책 제목에서부터 저자의 어떤 의지와 자신감을 감지했는데 에두르지 않고 바로 정면으로 승부한 마케팅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에는 문용린 교수의 분신인 스마일 선생님과 여섯 명의 아이들, 그리고 한명의 엄마가 등장한다. 공통의 커다란 줄거리 안에 다시 한명씩 고민이 담겨지는 따로 또같이의 이야기 구성이다. 공동의 목표는 합창대회라는 하모니에 있으며 개인의 목표는 도덕에 관한 개념이해라 할 수 있다. 스마일 선생님은 행복교실의 담임선생님이자 학교 운동장에 설치한 행복우체통의 비밀 관리인이다. 아이들은 각 편의 이야기에서 저마다의 고민을 편지로 적어 우체통에 질문하고 마지막에 선생님이 답변을 해준다는(물론, 아이들은 누군지 모르고) 형식이다. 합창단을 지휘하는 엄마는 애석하게도 큰 역할은 없다. 같은 엄마인 입장에서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엄마는 늘 우스꽝스럽거나 다그치는 캐릭터로 출연하는 것이 서운하고 불만스럽다. '남자의 자격' 합창단을 지휘했던 박칼린 선생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들과 관련된 소정의 역할이 있었으면 했는데(특히 선표의 목소리를 배려하는 음악과 관련있는 부분의 경우는 충분히 엄마의 역할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책을 덮고 나서도 생각나는 건 과장된 몸짓과 우스운 말투가 전부다. 이 시대의 학생들에게 엄마란 성적관리 혹은 학원감독, 아니면 사생활 감시자로서만 인식되는 것 같아 좀 맥빠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화음, 여섯 개로 울리다

여섯 가지의 이야기는 정직, 약속, 용서, 책임, 배려, 소유 즉 '정.약.용.책.배.소.'를 구성으로 하는 도덕원칙을 주제로 하고 있다. 진부한 듯 해도 도덕이란 아주 기본적인 인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우리는 주제를 끌어내는 아이들의 에피소드에 주목해야 한다. 여섯 가지 이야기를 들어가는 이야기는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한 팀이 되어 합창대회에 나가게 되었다는 조건으로 시작한다. 문제는 이나무, 강웅, 김선표, 김병희, 이다미, 오필이가 같이 모여 노래를 하는 것인지는 몰랐다는 것이고 이들은 각자 따로 대회에 나가는 줄 알았던 것이다. 문용린 교수는 결국 여섯 가지 도덕원칙을 각자가 내는 목소리로 여기고 다같이 조화롭게 화음을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이들은 할 수 없이 오필이네 집에 모여 연습을 하게 되는데 바로 오필이의 엄마는 지휘자로서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이끌어야 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의 중심은 합창대회를 위한 노래연습 과정이라기 보다는 아이들이 공부하고 모이고 대화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이들간의 사소한 그렇지만 예민한 갈등에 있었다. 그리고 그 갈등 유발 요인에는 여섯 가지 도덕원칙이 불편하게 자리한다.

정직을 이야기 할 땐 내가 하지 않은 것을 내가 행한 것으로 하는 거짓을 예로 들었다. 합창대회 출전곡의 노래가사를 각자 써오는 숙제에서 다미는 이미 언니가 발표한 가사를 가지고 왔는데 그만 다미의 것이 만장일치로 채택된 것. 웅이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다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알면서도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한집안 식구인 언니가 지은 가사를 가져와 급한 대로 제출하는 다미의 행동이 대수롭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친구의 속임수를 보고 가만히 있는 것도 이해할만한 마음이지만 문용린 교수는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한번 생각해보라 한다. 그리고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습관이야 말로 우정을 더 단단히 해준다 답해준다. 아이들은 다미가 우체통에 써낸 편지와 의문의 천사로부터 돌아온 답장을 통해 자신만의 비밀과도 같은 고민이 해결되는 느낌을 받으며 타의가 아닌 스스로에 의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이 우체통이라는 고민해결사가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체통에 쓰레기를 넣지 않고 누군가 편지를 넣었더니 신기하게도 답장을 받았다는 소식에서부터 아이들은 우체통에 자신의 고민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엄마에게도 친구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말못 할 사연을 띄우면 '그래 네 고민을 잘 알고 있으니 이렇게 해보렴' 하는 위로성의 답장이 배달되는 것이다. 우체통이 운영될수록 아이들은 공정한 누군가가 친구들끼리의 민감한 잘못도 판가름할 수 있다는 기대와 해결에의 신뢰를 가지게 된다. 아이도 이 책에서 편지를 쓰고 누군가 답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편지는 질문의 역할도 하면서 동시에 반성문의 역할도 하고 있는데 일어난 일을 돌이켜보면서 비로소 상대친구를 이해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약속을 이야기 할 땐 '선약'의 중요성을 실감하도록 하였다. 치과를 혼자 가기 싫어하는 병희를 위해 같이 가주겠노라 약속한 선표가 그만 병희가 청소를 하는 사이 다른 친구의 생일초대에 가버린 것이다. 선표는 병희와의 약속을 잊은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번인 친구 생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병희는 자신이 먼저 제안한 선표가 걱정이 되어 치과예약 시간도 놓치고 노래연습을 하러 갔는데 선표는 태연하게 피자한판을 들고 나타난다. 선표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

용서를 말하는 이야기는 가장 감동적인 화해장면을 연출해 내었다. 유치원때부터 친구사이인 나무와 웅이가 서로를 미워하게 된 것은 과학실에서의 실험기구파손을 선생님에게 일러바쳐 웅이가 망신을 당하게 된 이후 부터였다. 나무는 반장이었고 웅이가 가장 믿었던 친구였기에 웅이의 상처는 클 수밖에 없었다. 나무의 반장된 책임과 웅이의 친구로서의 우정이 맞서게 된 서로의 미움은 어느 비오는 날 웅이를 바쳐 준 나무의 우산으로 전환을 맞는다. 이들은 서로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책임 이야기에선 반장인 나무의 고민이 설득력있게 전개된다. 과학실 사건으로 웅이와 불편한 관계가 된 뒤로 나무는 모범생으로서 아이들의 잘못을 잡아내고 선생님에게 전달하는 역할이 짐처럼 부담스러워진다. 웅이에겐 반을 대표하는 공적인 책임이 중요한 것일까. 친한 친구와의 사적인 책임이 중요한 것일까.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면 친구를 버리고 반을 선택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배려를 말할 땐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아이들의 지혜를 예쁘게 모아 놓은 이야기였다. 목이 아파 소리가 나오지 않는 선표를 위해 친구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선표를 위한다고 목에 좋다는 음식을 가져온다. 하지만 이것은 친구의 아픔을 걱정하기 보다 친구로 인해 대회가 걱정된 마음은 아니었을까? 선표는 오히려 이들의 배려가 더욱 속사정을 시원히 말 못하게 하는 부담으로 작용할 뿐이었던 것. 생각하긴 쉬워도 진정으로 상대의 어려운 입장을 위해 실행해내긴 힘든 것인데 아이들은 어떻게 양보와 희생을 배우고 선표를 배려할 수 있었을까.

마지막 이야기인 소유는 내 물건이 소중하듯 남의 물건도 소중함을 알게 하는 이야기였다. 다미는 죽은 엄마가 남겨주신 '따또(따로 또 같이)'라는 인형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본 친구들은 낡고 더러운 인형이었기에 누군가 버린 것인 줄 알고 쓰레기 취급을 한다. 나에게 필요도 의미도 없고 외양이 형편없기라도 하다면 누군가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일까? 길거리에 떨어져 너덜너덜한 빛바랜 사진 한 장이지만 사진의 주인에겐 고이접어 지갑속에 간직하던 가장 소중한 유품일 수 있지 않을까.

다미의 정직, 선표의 약속, 웅이의 용서, 나무의 책임, 병희의 배려, 오필이의 소유는 훌륭한 화음을 이루며 합창대회의 성공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문용린 교수는 교육심리 전공자 답게 아이들의 사소한 감정변화와 그 원인을 잘 잡아내어 아기자기한 일상의 에피소드로 배치하였다. 거짓말하지 마라, 약속 잘 지켜라, 모범을 보여라, 친구 입장을 생각해라, 남의 물건도 소중히 하라는 틀에 박힌 주입을 하지 않기 위해 부러 아이들이 먼저 잘못을 하게 만들고 스스로들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죄책감과 동시에 난국을 해결하도록 자연스레 편지와 우체통이라는 매개체를 활용하여 교육적인 답안을 전달해주는 영리한 방식을 시도하였다. 반갑고도 지혜로운 교육이 아닐 수 없다.

도덕, 영원히 배우다

정직을 비롯한 여섯 가지 도덕원칙은 살아가면서도 매일 부딪치는 일상의 원칙과도 같다. 거짓을 안 하고 살기 얼마나 힘든가. 약속을 어기지 않기란 또 얼마나 힘든가. 밉기만 한 누군가를 용서하기란, 내 책임을 다하기란, 상대입장을 먼저 생각하기란, 상대 물건도 내 것처럼 여기기란 도덕교과서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의 동화를 읽다보면 정말 세상의 분진이 많이 묻었구나...그런 생각이 든다. 아이는 어짜피 이 동화를 읽고는 나름대로 교훈을 얻었을 것이고 이젠 내 삶의 원칙을 돌아봐야 할 시간이 아닐까 싶다.

여섯 가지 도덕원칙을 갈고 닦은 아이들이라도 결국 우리처럼 변변찮은 어른이 될지 모른다. 남의 생각을 슬쩍 가져다 써놓고선 태연하게 모른 척 하고, 핑계를 대어 약속을 파기하고, 형식적인 용서만을 하고 살아가는 우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행해놓고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것과 자신이 한 잘못이라도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를 바란다. 잘못했음을 알았기에 이제 반복하지만 않으면 되는 아주 쉽고도 어려운, 그 일만이 남았으니 말이다. 언젠가 아이들은 반드시 이 원칙의 잣대로 우리에게 질문 할 것이다. 거짓과 약속위반과 원망과 태만과 이기와 무관심을 지적하며 의아해 할 것이다. 아이로부터 배운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지만 아이가 더 깨끗하고 훌륭할 땐 그들로부터 다시 배워서라도 깨우쳐야 하는 것이 인생이지 싶다. 다만, 아이들이 우리처럼 더 많은 시행착오 없이 정확한 잣대를 가진 도덕원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잃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 역시 언제라도 허물어진 잣대를 다시 바로 세워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랜만에 선생님이 떠오르는 독서를 했다. 하지만 도덕이란 지식이거나 학문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야무지게 알면서도 야속하게 마음을 접지 않는가. 다분히 의지의 문제인 것이다. 우린 또 늘 흔들릴 터이니 고맙게도 이러한 책들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린다. 아이들의 행복한 도덕학교에 슬며시 숨어들어 이야기 몇 개 훔쳐들은 기분, 나쁘지 않다. 도강의 재미란 원래 학점도 신청하지 않아 자격이 안되는 학생이지만 수업이 듣고 싶어 찾아든 용기있는 의지의 실현에 있다. 끝까지 들키지 말자. 학부모들이여, 실은 도덕은 우리의 문제인 것을, 당신도 나도 잘 알고는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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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의 글을 읽으면 참 좋을거 같은데,, 대부분의 책이 어린이실에 있어서
안타깝기만 하네요. 그 책을 읽은건 아니지만 한사람님의 글 덕분에 간접적으로 책 내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0-12-01 19:39   좋아요 0 | URL

좀 교과서적이긴 하나 정성이 담겨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대중 자서전 - 전2권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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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후회 없도록


#1. 나는 197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경남 남해가 고향인 내 부모님은 부산에서 이십년 적을 두다 외동딸인 내 교육 문제로 1976년, 서울로 이사하셨다. 나는 강남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여대를 입학한 후 다시 강남에서 사회생활을 했다. 경남 진해가 본적인 부모님을 둔 남자와 결혼 후 분당에 살림을 차리고 그곳에서 아이를 길렀다. 부모님은 분당과 용인에서 사셨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조선일보를 구독해왔다. 올해 41세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이 여성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네 번의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고, 모두 투표를 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도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킬 기회는 두번이나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녀는 김대중을 찍을 수 있었을까.

많이 울었다. 왜 그렇게 울었는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시작부터 끝까지 자주 훌쩍 거리곤 했다. 어떨 땐 눈두덩이 뜨거워져 얼굴에 열감으로 종일을 보내었고, 울컥하며 목이 메어 울분에 그만 눈을 감아 버리기도 했고, 어떨 땐 가슴이 저미는 설움으로 온 폐부가 돌덩이처럼 가라앉는 듯 했다. 또 어떨 땐 쿵쾅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해 벅찬 눈물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곤 했다. 살면서 그동안 책이라는 존재를 대하며 이토록 여러 가지의 감정으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던가. 『김대중 자서전』은 내 눈물의 모든 것이었다. 이 가을, 나는 울고 있었다. 그것도 제대로 마음껏, 후회 없도록 이었다.

왜 울었는지 참참히 따져 물어야 했다. 내 눈물의 진정성을 밝히는 것이 곧 그를 알아가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그 과정과 의미를 정리정돈하고 싶어졌다. 감정을 정리하자 이성이 찾아왔고 이성은 다시 마음을 살찌웠다. 독서란 문학이란 그런 것일까. 책 한권 읽었다고 갑자기 가치관이 바뀔 나이는 지나온 지 오래지만 나는 지금 그동안의 내 무지와 무심, 무정함을 적절한 시기에 운좋게 보완했다는 충만감에 들떠있다. 이토록 달뜬 설레임은 나를 적잖이 애타게 만들며 연인들이 늘 '사랑'이라는 진부한 말 대신 그보다 더한 말을 찾아 헤매듯 '존경'이라는 말로는 영, 성이 차지 않는 심정이다. 부족하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종교인이나 학자, 혹은 기업인까지도 존경한다 말해 보았지만 정치인을 존경한다고 말해본 적이 있던가. 그것도 한국의 정치인을. 물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존경할 수는 있겠지만 종교는 달라도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스님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주변에 '정치적'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더라도 그 '정치적'이라는 관용된 의미를 고운 시선으로 봐주기 힘들지 않았던가. 요즘 유행하는 TV드라마의 주연격인 국회의원도 '정치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논리가 아니다. 49%의 악속에 피어나는 51%의 선의 꽃이 정치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김대중 대통령도 정치란 심산유곡에 핀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라 비유했다. 좋은 말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유기적인 존재인 것이지 상황에 따라 늘 변수를 안고 있는 유동성 존재인 것이다. '정치적'인 사람은 곧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음모에 능한 사람이라는 것이 하나의 공식처럼 사용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이처럼 변화와 변수, 변모를 정체성으로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존경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정치'란 단어만 억울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한 인간으로서 정치인을 존경하기란 어렵기도 할뿐더러 또 우리 근현대사에 존경할만한 정치인이 없었다는 현실을 보더라도, 평생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그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익히 존경받아 마땅한 정치인일지 모른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나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굳이 그래프를 그려보자면 비호감의 좌표에 가까웠다. 아니, 솔직하자. 나는 그를 거의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태생부터 뼛속부터 오랜기간 거부해왔노라, 고백하겠다. 그런데, 살면서 이렇게 그 사실에 대한 변명의 기회가 제대로 생길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토록 처연하게 마음이 시퍼렇게 멍울지고 난 후 일지도 몰랐다.


나는 왜 !

#2. 내 아버지는 뚝심의 경상도 사나이였다. 어머니는 전라도 사람을 공산당과 버금 갈 정도로 싫어하셨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당시 부모님을 이해하거나 오해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나로서는 지겹도록 '전라도 사람과 결혼만은 안 된다'는 정언을 밥먹듯이 듣고 자랐다. 초등학교 다니면서는 더 지겹도록 반공교육을 받았다. 그때 북한은 '괴뢰군' 혹은 '괴수'로 통일, 지칭되었으며 '박살내자', '때려잡자' 같은 단어로 표어를 짓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네에서 고무줄 놀이를 할 때까지 무심코 불러대던 세 곡의 노래도 우렁찼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을 읊조리다 결국 마지막엔 ’무찌르자 공산당’으로 마무리했다. 어쩌다 삐라를 주워 온 친구가 있으면 그날은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공포에 떨었던 기억...내게 있어 공산당은 민방위 훈련날 귀를 찢으며 교실에 울려 퍼지던 싸이렌 소리만큼 가까웠음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TV에 자주 나오던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빨치산 출신이라 하셨다. 그러니까, 김대중은 내게 처음부터 확실히 결혼만은 안 된다던 '전라도' 사람이면서 괴수라 불리던 '공산당'이었던 것이다. 나는 달리 의심없이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두 가지를 믿고 살아왔다. 그 두 가지는 훗날 내가 나이들어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좀처럼 의식의 심연 저 밑바닥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잘못은 하지 않았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따라야 했던 그 시절 우리가 아니던가. 그는 정부의 탄압보다 국민의 오해가 미치도록 무서웠다 고백했다. 나와 같이 경상도에서 자라 모범생이라는 역할을 맡아온 학생들이라면 그들의 가슴에 김대중 이름 석자는 역적의 낙인이 되고도 남았을 진대.

만만치 않았던 두 권의 책을 덮고 나서 실로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역대 대통령들 중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거나 자서전으로 출간하면 가장 흥행에 성공하겠다는 세속적인 예감은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인생이라는 원재료의 충실함도 있었겠지만 대통령들 중에서는 가장 문화, 예술에 근접한 분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중에서 특히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나는 흡사 오바마 대통령이나 반기문 UN 사무총장 정도의 자서전을 떠올리며 가볍지 않은 책의 무게를 나름대로 이겨보려 했었다, 처음부터. 그런데 그것은 너무도 정치적인 내 소견이었다. 무겁고 진중한 것은 그대로 진지하고 엄숙하게 받아 들여야 했다. 진실이란 그런 것일까. 머리로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가슴으로 진실을 느끼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으니 말이다.

이 책은 우리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한 인물의 자서전이라고만 하기에는 아쉽고 안타깝다. 나는 그것이 못내 미안하고 서운하다. 역사를 따라가는 서사를 기본으로 소설이나 시가 가지는 문학적 장악력과 에세이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진솔함, 인문학이 발산하는 교양의 향기, 종교나 고전에서 발견하는 삶의 진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살아있는 문학 예술품'에 근접하다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진실을 확인하고 진심을 느끼고 진리를 깨달았다', 상투적이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그가 마지막 까지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역사속에 위치하던 국민의 한 사람임을 이제야 알겠다. 문학의 테두리 안에 이 모든 것이 앉혀져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보고 그 안에 서 있는 내 인생을 돌아보고 마침내 오늘의 가슴에 뭉클한 심지를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목이 메인다. 나는 덜컹대며 내 목이 울렁거리던 이유를, 내 눈이 내 입술이 붉어짐에 그리하여 가슴마져 홧홧하게 뜨거워지던 마지막에 머리 숙인다. 나는 왜 !... 이것을 말하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다. 어찌하면 성이 찰 것인가. 한없이 모자라기만 한 존경을 넘고 싶은 한사람의 이야기를 그는 지금 알고나 계실지.


우리집 김대중

#3. 나는 학창시절엔 집에서 '우리집 김대중'으로 불리었다. 두 가지 생각이 세뇌처럼 박혀있던 나에게 그 말은 어떤 욕보다도 끔찍했다. 부모님의 이유인 즉슨 자신이 잘못을 해 놓고도 미안하다는 말을 받아내는 적반하장 격의 논리를 고집스럽게 주장하여 사람을 무안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나와 말싸움이 벌어질 때 '우리집 김대중인데 어련하겠어', 이렇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를 비난하셨다. 나는 학교에서도 반장선거에 나가 연설(까지는 아니지만)을 하면 선생님에게 김대중처럼 사람의 마음을 선동한다는 칭찬인지 질책인지 모를 야릇한 이야기를 곧잘 듣곤 했다. 그러고 보니 고2 때(내가 반장일 때), 우연히 학교앞 서점과의 고착된 비리와 함께 보충수업 교재의 성의없는 선정을 목격하곤 아이들과 함께 교재와 그 교재를 선정한 선생님을 바꾸어주지 않으면 수업을 받지 않겠다는 당돌한 항의를 한 적이 있긴 했다. 나는 국회의원을 아버지로 둔 반 친구를 설득해 위로부터의 압력을 뒤에서 조종하는 놀라운 정치적 술수를 발휘하며 결국 교재를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바꾸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 그러고 보니 사회생활하면서 나는 업체 공개 프리젠테이션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는데 공모에서 누가보아도 대결구도가 불리한 국면에 오로지 열정과 마지막 심정적인 호소로 결과를 역전시키는 경우도 더럿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누군가 'PT 한'이 아니라 'DJ 한'이라고 놀리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김대중 같다는 말이 욕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 말은 개인적으로도 영광스러운 칭찬으로서 내심 저릿해 지기까지 결국 나는 내 온 생애가 걸린 것이 아닌가.

두 권의 자서전을 덮고 나는 마음을 깊게 쓸고 지나가던 단어들을 적어보았다. 용기, 평화, 화해, 존경...그리곤 그들 밑에 '설득'이라 적고 마침표를 찍었다. 돌이켜보니 자서전은 1권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2권에서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의 시간 순 글들이었지만 결국 모두 한평생 설득하는 인생을 살아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마지막까지 이렇게 책으로 그렇게 살아야 했던 자신과 나를 설득하는구나...사람들은 늘 그의 설득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뒤돌아 주저하였겠구나 싶었다. 그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 늘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설득하고 있었다. 실은 그렇게 긴 세월 변함없이 세상과 자신을 설득하고 나서야 대통령이 된 것이었다. 그는 가정, 학교, 회사, 단체, 정치권, 해외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그 시기와 대상마다 적절한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기상황일수록 그를 찾았고 그는 죽기직전까지 해외에 초청을 받아 세상을 향해 의견을 내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의견은 또 늘 기존의 현실과 고정관념들을 깨우치는 새롭고 혁신적인 의견들이 많았다. 누구나 다 자신이 맞다고 생각한 것을 남에게 펼쳐 보이기도 힘들며 내보였다고 해서 상대의 생각을 바꾸기는 더 어렵다. 그리고 의견이 매번 새롭게 느껴지기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는 늘 한결같이 새롭고 늘 자신이 옳다고 당당히 말하며 그런 자신과 그 앞에 선 역사와 그를 지켜보는 국민을 믿었다. 같은 말을 해도 한번에 귀담아 듣지 못했으니 매번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알아주지도 않아 가슴을 치며 울부짖기도 했지만 그는 왜 한 번도 멈추지 않았을까. 어쩌면 멈추려는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아버지의 목소리로

#4. 다시 선거철은 돌아와 1997년 그해 말, 아버지는 전에 없이 나를 불러 앉혀다 놓고 김대중만은 찍지 말라고 진지한 한 표를 호소하셨다. 나는 한창 직장생활로 삼일이 멀다하고 철야를 강행할 때였고, 투표에 대한 생각조차 없을 시기였다. 당시 보수세력의 유력한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불안해진다는 것이 아버지 의견이셨다. 아버진 한국전쟁때 18살의 나이로 군대에 자원입대 하신 참전용사였다. 중학교 교육을 일본에서 받은 지라 일어에 유창하셨고 일본에 대한 향수가 남다른 분이셨다. 훗날 특유의 언변을 장기삼아 일본을 대상으로 수산무역업에 종사하셨다. 그날 아버지의 논리는 유려하면서도 아주 인상깊었기에 십년도 더 된 아버지의 목소리가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당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은 모두 'DJ 컴플렉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마력이 있기 때문에 역대 그분들은 모두 그를 죽이려 했고 어떻게든 그의 정치인생을 매장하기 위해 온 전력을 다해왔다고 하셨다. 아버진 부산시절 대통령 선거에서 DJ의 명연설을 들은 일이 있다 하셨다. 누구라도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열광할 수 밖에 없다고 회상하셨다. DJ와 경쟁구도였던 역대 집권자들은 한마디로 그가 눈에 가시였기 때문에 끝에 가선 전라도 촌사람에다가 학력도 변변찮고 용공이라고 몰아 부치는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하셨다. 너무 긴 세월 억눌려 있었기에 차라리 처음에 박정희를 이겼다면 몰라도 그의 지지기반인 호남세력이 갑자기 폭발 할 것이고 그동안 집권하였던 권력자 집단과의 충돌로 나라가 시끄러울 것이며, 그것은 곧 북한이 원하는 바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즉,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대통령감인 것은 확실하나 이 나라의 정권과 국민은 아직 그를 대통령으로 맞이할 수준이 안 된다는 것이 아버지 결론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경험한 국민적 패배감은 같은 나라의 국민에 대한 뿌리깊은 실망감으로 자리잡은 듯했다. 아버지의 '국민수준론'은 충격이었다. 전쟁에 대한 상처가 자신의 피해와 동일했던 아버지 세대들은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자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기운을 동일시 하셨다. 오랜 기간 반공을 독재의 밑거름으로 활용해온 정부하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버지가 김대중을 '대통령을 할 만한' 인물로 인정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해 DJ의 당선이 확실시 되던 그날 밤, 아버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시며 오래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국민들이 갑자기 수준이 높아 진 것일까. 사람들은 왜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을까. 왜 그를 겁내하였던 것일까.

자서전을 써내려간 문체를 기억한다. 책에는 재임시절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수많은 연설문이 구어체로 소개되어 있다. 담담하면서도 치우치지 않았고 진실을 전하려고 하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첫 번째 아내를 잃었을 때, 재혼을 하게 되었을 때, 동생과 누이,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 자식이 감옥에 갔을 때, 오랜 지인의 부음을 들었을 때 등 개인적인 슬픔을 술회할 땐 짧고 강하면서도 문학적인 표현으로 마음을 저 멀리 하의도 고향 앞바다에 띄워 보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늘 시국의 현장 속에 있으면서도 중간 중간 견딜 수 없는 슬픔을 토로할 땐 외로움의 진액이 유난히 오롯해 보였다. 그렇게 홀로된 고독에의 허기를 민중을 향한 열정으로 다시 삶의 윤기를 빚어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인지 그의 목소리는 때론 허기지고 때론 윤기가 났다. 나는 그 목소리의 울림에서 어떤 오래된 '진정성(眞正性)'을 느낄 수 있었다. 거짓이 아닌 정성된 목소리. 이것은 그의 업적과 대통령으로서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한사람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가 내뿜는 음역(音域)은 높고 낮음을 초월한 인간의 슬픔과 외로움, 기쁨과 환희 모두를 끌어안는 무한대 주파수의 영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음파가 가닿는 곳은 정확하게도 우리들 가슴 한 가운데 였던 것이다. 때론 난파되고 때론 침몰되면서 거친 生의 파도를 헤쳐 나온 독특한 그만의 음률이 전해주는 목소리였다. 정치인의 목소리가 아름답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가. 진실 자체는 고통스럽고 추할 수도 있으며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전하는 마음만큼은 아름답게 느껴졌다. 진정성의 선물이었다.

그는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보다 해외에서 더 인격적으로 존경받았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좋은 더 밝은 귀를 가졌던 것일까. 그들이 우리보다 더 열린 마음이었던 것일까. 나는 그가 국내 국외의 장소 및 남녀노소, 사회계층을 불문하고 연설장에서 답이 곤란한 질문을 받거나 화가 날만한 항의를 받을 때 보여주었던 기지와 재치, 혜안이 그때마다 무릎을 탁 칠정도로 대단해 보였고 내심 짜릿하고 통쾌할 때가 많았다. 상대를 기분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자신의 논지를 분명히 하면서 감동까지 선사하기란 토론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 실정에서 누구나 본받을 만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수많은 세계 정상들은 하나같이 그의 연설에 감동하며 정상회담에서 그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물론 자서전에 다소 좋은 결과의 내용만 언급되었을 수도 있고 결국 제3자가 아닌 자신이 집필한다는 주관성의 한계가 있음을 모르지 않으나 많은 객관적인 자료들에서도 사람들은 그의 말에 결국 설득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늘 이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감성적인 공감과 인간적인 감동이 수반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상들이 화답한 문건과 그들과의 대화들을 살펴보면 단순히 한나라 정상끼리의 외교적인 대화가 아니라 지면과 사진을 통해서도 서로의 인격을 깊이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정책과 전략이 탁월할 만큼 우수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정책을 피력하는 진심어린 진정성에 정상들은 먼저 마음이 동화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상대 정상과 국가에 존경을 표시할 때도 틀에 박힌 교과서적 인사가 아닌 자신 스스로가 공부해 발견한 깨우침을 역사적인 의미를 부각해 상대국에 자긍심을 세워주는 모습, 진심으로 상대에게 공을 돌리는 겸허한 자세, 상대의 무례나 오해까지도 포용하려던 성심, 한 번의 만남이라도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따스한 태도등이 비록 그의 정책에는 동의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마음에는 흠뻑 동감하도록 만드는 그만의 능력이었다. 부시대통령도 한참 연장자인 그를 처음엔 변방의 촌놈처럼 무시하는 결례를 범했다가 훗날 다시 여러 방법으로 사죄하는 에피소드를 보고 무례하기로 유례없던 미국의 대통령도 그를 향한 존경과 진심은 있었구나 싶었다. 왜 사람들은 그의 연설을 들으면 가슴이 뛰고, 그와의 대화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진심에 마음으로 감동했을까.

그는 어떻게 '자기 진정성'(authenticity)을 구축해 온 것일까. 아니 어떻게 해서 그렇게 변함없이 진정할 수 있었을까. 어릴 적부터 막연히 임금님이 되겠다는 큰 뜻을 품어온 그이기에 타고난 기질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의 진정성을 이루는 몇 가지 가슴아픈 피와 눈물의 흔적을 책을 읽어가며 찾아내어야 했다. 그는 사람을 마주할 때 자신이 그때까지 이루어온 온몸을 다 쓰면서 상대를 설득해 온 것은 아닐까. 즉, 머리로는 스스로 깨우친 지식을 전달하고 몸으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적용하고 가슴으로는 우러나온 태도를 전함으로써 그때그때 마다 상대를 최선으로 배려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난항이 예상되는 정상간의 회담이나 연설이 끝난 후엔 그야말로 '젖먹던 힘을 다해' 애를 썼고 쏟아 부었다는 표현을 자주 했다. 실제로 그는 어머님의 젖을 풍부하게 먹고 자랐을까...마는 매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는 대통령이 어디 있을까마는, 유독 아주 힘들 때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짜내어 그가 다해마지 않은 사력은 늘 진실과 정성의 극대치였다는 점에서 더 애닯고 끈질겨 보인다.

자기진정성의 밑바탕에 분명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자기 철학이 있었다. 이 점은 정세에 따라 정책을 제안하고 시행과정에서 또 시류에 휘말려 뒤집기를 반복하는 오늘날 철학이 없는 수많은 정치인을 떠올려 보면 그 중요성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인류가 철학자가 아닌 정치인에게 세상을 맡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철학을 행동에 옮겨야 하는 대통령이 철학자와는 달리 특정한 시기, 특정한 사회에서, 특정한 권한을 가지고,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자서전 1권을 덮으면서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 대통령이 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한반도의 가장 특정한 시기에 최고 난이도의 특정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결국 대통령이 되지 못한 시기 동안 그 특정한 임무를 위해 철학과 종교와 사회와 인간을 끊임없이 준비하며 마침내 목표를 성취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앞엔 언제나 발전을 요구하는 국민이 있었다. 대통령의 자기 철학은 언제나 국민이 요구하는 바와 사회발전 방향과 부합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한국전쟁, 군부독재, 민주화투쟁이라는 근현대사의 모든 상처를 직접 겪으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방향성과 통일정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된다. 그가 자주 설득하던 '아시아인의 민주주의 자질'은 내 학창시절 이십년 동안 어떤 선생님도 제시하지 못했던 신선한 이론이었다. 수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사람을 겪고 일본인 교사로부터 배운 것들, 전쟁의 상황에서 겪은 부조리, 지도자의 선택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독재가 불러온 폐해등을 몸소 체험하며 현장에서 익힌 실물경제 감각을 더해 익혀진 자기진정성의 탄탄한 밑거름이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한사람의 정책을 모방했다거나 선진국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닌 그 모든 것을 수용해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었다. 자신 안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生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방식을 선택하는 근원적 기준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가, 역사와 국민앞에 당당한가였기 때문에 그는 누구를 만나도 어디를 가든지 '자기진정성'을 최대의 무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그를 말할 때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수식을 하고는 한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그는 대인관계에 있어 그 어떤 대통령보다 대화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출신의 고졸학력을 가진 그가 세계 지도자들을 만나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품위를 지키면서 소신을 펼 수 있었던 배경엔 지독할 정도로 쌓아올린 풍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6년간의 감옥이라는 학교에 있을 때에도 독서의 자유와 사색의 즐거움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 자신도 오십 줄에 영어를 독학으로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은 감옥에 간 덕분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감옥에서 만난 앨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은 IT 강국이라는 자랑스런 결실로 돌아왔다. 선거 패배이후 망명길에 올랐을 때에도 휴식이나 단절등의 비교적 쉬운 삶을 택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준비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유명한 정치인에게 수여하는 형식적인 명예박사가 아니라 정식논문으로 인정받은 박사학위를 따고 마는 그의 정열을 그저 개인의 욕심으로 치부하기엔 사람된 죄스러움이 먼저 마음을 가로 막는다.


운명의 상련相憐으로

#5. 아버진 만성신부전증으로 15년을 고생하시다 2004년 폐렴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내 어머닌 동창회에서 여흥중 우연히 누군가에게 뒷 발목을 걷어차인 후 치료를 제때 받지 않아 말년에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셨다. 아버진 일주일에 세 번 신장투석을 하셨는데 가장 힘든 것은 투석할 때마다 찔러대는 대바늘도 아니고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음식도 아니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죽는 그날까지 투석을 해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라 말씀 하셨다. 투석이 있는 날엔 하루 종일 우울하고 예민하셨다. 어머닌 내 결혼식 때 곱게 차려입고도 실수로 넘어지게 될까봐 어머님이 입장하는 순서에 온 신경을 쏟으셨다.

언젠가 그가 퇴임 후 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받는 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병으로 고생하신 아버지가 떠올라 가슴팍이 저며들던 기억이 있다. 서재 뒷켠에 간이 침대를 마련해 놓고 집에서 투석을 받았다하니 그 병의 징후를 너무나도 잘 아는 가족으로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까닭이다. 또한 그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으로서 재임기간 중 지팡이를 짚고 다녔기에 화면을 통해서 그러한 신체적 불편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도 많았다고 기억된다. 어머닌 유난히도 그렇게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를 목격할 땐 한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저게 뭐냐며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곤 하셨는데 아마도 같은 불편을 겪고 있는 장애인으로서 늘 타인의 시선이 야속하고 두려웠던 마음이 그를 향해 투사 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책에는 재임중 다리가 너무 아파 중요한 행사에 혹시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늘 온 신경을 쓰고는 했다는 고백도, 신장투석도 너무 두렵고 힘들었다는 투정도 있었다. 자신의 신체장애에 대한 솔직한 글을 접할 때 마다 나는 거짓말처럼 같은 병치례를 하셨던 부모님이 자꾸 불쑥 튀어나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그래서인지, 자꾸 미안하고 더 없이 감사했다. 투석환자이면서도 퇴임 후에 그렇게 전 세계의 초청을 마다 않고 운명하기 두달 전까지 강행군을 해왔다는 것이 국민으로서 감사했고, 그의 불편한 걸음걸이를 국민으로서 창피해 한 마음이 고개들 수 없을 정도로 죄송했다. 어느 날인가 TV에 유난히도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심하게 절룩거리는 모습을 보고 그의 건강을 걱정하기 보다는 우리는 언제쯤 외모도 말투도 남부끄럽지 않은 젊은 대통령을 맞이해보나, 하는 식의 하소연을 직장동료와 나눈 기억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감옥에선 다리가 아파 제대로 무릎을 펴기도 힘들어서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는 고백에 목이 메어 한참을 숨 넘기기 힘들 때도 있었다. 아마도 평생을 사악하고 불순한 것들만 남들보다 몇 백 배로 걸러 오느라 신장이 망가 진 것이고 이미 인격적으로 흠이 없었던 그가 전 세계를 누비며 만인의 존경을 받게 될까봐 그러한 그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의 다리는 지팡이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대통령쯤이 되면 훌륭한 전담의사도 있고 집에서 치료를 받으며 일반 환자들보다 비교적 편하게 투병생활을 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실은 대외적으로 대통령이라는 위치와 역할때문에 마음놓고 자신의 고통을 어디다 호소하지도 못하였고 의지만으로는 불가한 신체적 장애까지 정신력으로 극복하며 모든 의전행사를 치루어야 했던 심적인 고통과 고독이 일반인은 상상하지 못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는 얄궂게도 내 아버지와 똑같이 급작스런 폐렴과 이어지는 패혈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운명했기에 끝내 아버지의 마지막을 생각케 하며 나를 복받치게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더욱 앞서 운명을 선택한 노무현 대통령이 야속했다고 한다면 그가 서운해 할런가.


형님된 심정으로

#6. 사람의 일이란 한치 앞을 알 수 없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때 나는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될 운명이었다면 그것은 곧 대통령으로 죽을 운명이었다는 말인가. 그날 나는 가게 테라스에 노란 풍선과 검은 리본을 장식했다. 바로 건너편엔 호프집이 오픈을 해 행사도우미들이 반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그날 밤 태어나 처음으로 동사무소에 민원 신고를 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우리가게 손님들은 노무현이 생전에 좋아하던 노래를 들려주니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둘씩 울기 시작했다. 생전 목소리로 부르는 '상록수'가 울려 퍼지자 어떤 사람은 테이블에 엎드려 목을 놓아 통곡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날 가게 매상은 평소의 세배였다. 그의 장례식 때 한명의 노구가 휠체어를 탄 채로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살면서 나는 저 사람의 저 가식없는 울음을 몇 번이나 더 TV에서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모두들 예감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이번이 마지막이길 감히 바라지도 못했다. 어떤 슬픔은 자신이 겪었어도 여전히 믿겨지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그때 사람들의 울음을 보면서 슬픈 건 그의 죽음이 아니라 한때 대통령이었던 사람도 자살하는 나라에서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슬플 것이라는 자신들의 현실이었다는 걸 느꼈다. 그날, 우리는 모처럼 같은 마음으로 슬퍼했고 아무도 서로를 질책하지 않았으며 서로 다른 의견이 없음에 기꺼이 안도하며 가게 문을 닫았다.

만약 그들이 아직 생존해 올 초 있었던 천안함 사건이나 얼마전 시행된 북한의 3대 세습과정, 연이어 터진 연평도 도발을 지켜보았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밤새도록 자신의 가슴을 쥐어 뜯으며 세계적인 시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상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올들어 심심찮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의 글들을 접할 때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표적인 사설로는 햇볕정책으로 인해 김정일 정권의 수명이 연장되었고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초래했다는 강도 높은 비난도 있었다. 천안함 사태에 대한 불신 역시 그가 남긴 친북주의에 기인한다는 결론도 많았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유권자가 아니었기에 이러한 정치적인 주장들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는 당시 상황만 비일비재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아왔다. 그런데 이번 자서전을 읽고 그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점이 있다. 그것은 대화를 누가 하느냐, 즉 일생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가장 짧은 대화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과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그가 6.15 공동 선언 당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대화를 끌어나간 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당시 2000년 TV에서 두 정상이 손을 붙들고 감격에 웃음짓던 장면을 또렷이 기억한다. 당장 통일이라도 눈앞에 다가온 듯했던 흥분에 나도 모르게 소름끼치던 순간...화면을 통해 전해지던 김정일의 화통한 목소리와 웃음소리,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그해 여름을 앞두고 우린 분명 IMF 를 단기간에 극복했다는 자부심과 벤쳐기업들의 신화와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다시 한번 해보자'는 열정만은 최고치였던 멋진 추억이 있었다. 책에서는 그가 햇볕정책의 정통성과 철학적 배경,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전 세계 정상들을 만나며 자신 있게 그들을 설득하는 장면들이 잇달아 소개된다. 김정일 위원장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대중을 존경해 왔다고 마음 한켠으로부터 인간된 정리를 강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꼭 연장자여서가 아니라 그때는 김정일도 한국이 아닌 외국인의 시각으로서 그의 인품과 인생에 동지적 연민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김정일이 대화중 왜 '우리'끼리 대화해서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자주적인 통일을 훼방놓느냐는 말이 무척이나 인상깊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모로 국제적인 시각이 부족했던 그에게 세계정세와 흐름을 알려주고 가르친다는 우월감보다는 자존심 상하지 않게 호소하며 김정일의 입장에서 어려운 점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했던 그의 노력이 결국 그의 마음을 열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남북정상회담이 끝나고 세계언론은 김정일이 '대화할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전까지는 전혀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김정일이 세계에 당당히 대화가 가능한 지도자로 인식된 것은 바로 그가 대화한 상대에서 연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김정일은 김대중과 대화했기에 대화가능한 인물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이지 아버지나 큰 형된 심정으로 같은 민족을 염려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라 믿는다. 나는 비록 지면이지만 다시보는 남북 정상회담의 일련과정을 지켜보면서 김정일 위원장의 열린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러한 노력은 아무래도 정작 당사자였기에 객관적이기 힘든 우리가 아닌, 세계가 더 먼저 그리고 더 많이 더 오래 이해했다는 생각이다.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의 행보가 단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한 무리한 전략이었다고는 그때도 지금도 전혀 느끼지 않음이다. 세계가 인정한 것은 그의 민주화투쟁, 통일정책과 세계평화에 드러난 공적으로서의 결과와 기여도가 아니라 바로 변함없이 '자기진정성'을 버리지 않은 끈질긴 고집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가 김정일 뿐 아니라 각국의 정상들과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도 새삼 '만남'과 '대화'라는 것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통감하고는 했다. 그는 애정을 가지고 추진한 정상과의 회담이 결렬되거나 국제 정세에 밀려 취소되고 난 후 항시 가정법을 사용해 '만일 그때 김정일이 클린턴을 만났더라면', '야당총재가 김정일을 만났더라면' 하는 식으로 훗날 역사의 전환점에 방점을 찍지 못한 그 순간을 땅을 치며 애통해했다.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명이라도 단 한 나라라도 그 하나의 절대성과 인연은 나라와 나라사이 역사를 전환하는 대단한 계기가 되는 것이었고 그러했기에 그 당사자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는 결국 사안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절대적 요인이라는 다소 운명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상들은 왜 그를 존경했을까. 왜 다른 사람이 아닌 그와 대화하고 싶어 했을까.


고통이 소통으로

#7. 얼마전 평소 호감을 가졌던 한 유명인사가 뜻밖에 자살을 했다. 그는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신체적 고통이라 유언했다. 연예인, 일반인, 청소년 할 것 없이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적 수치를 보면서 '그렇게 죽어야 할 이유가 많은 것일까' 다시금 생각했다. 누가 보아도 죽을 만큼 죽고 싶은 순간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한사람이 떠올랐다. 노무현 대통령도 자살을 선택했는데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그보다 죽을 이유가 적었던 것일까. 2010년 현재 어느 기관에서 우리시대 위대한 영웅을 조사하였더니 1위는 노무현, 2위는 김대중이었다. 만약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어도 노무현이 1위가 되었을까. 나는 다분히 자살 프리미엄 효과의 수혜를 받은 1위라 생각하기에 어쩐지 순위가 뒤바뀌었으면 싶었다. 죽고싶어도 살아낸 사람이 영웅이 되는 세상이면 좋겠다 싶었다. 죽어야 마땅할 이유로 친다면 그보다 더 한 사람도 얼마든지 살고 있는 세상이고, 죽을 만큼의 고통으로 견주어 본다면 마찬가지로 삶보다는 죽음을 선택할 사람이 적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유나 고통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자발적 의지 때문에 살거나 죽는 것이 아닐까.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공통의 의지는 함의하고 있었음이다. 문제는 의지의 향방이었던 것이다. 죽도록 죽고 싶은 의지가 죽도록 살고 싶은 의지로 선회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는 대통령을 비롯한 이상적 롤 모델이나 유명스타에 대해선 유독 절대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조그만 실수나 잘못, 약점과 단점을 발견하면 굉장히 너그럽지 못한 국민적 성향이 있다. 최근 연예인과 유명인사들의 잇다른 자살을 겪으면서 정신과 의사들은 교과서적 얘기지만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진 롤 모델일 경우 스스로 ‘내적 힘’(Self-Strength)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 힘은 절대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힘들 때 힘들다고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성공’의 경험을 했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결과물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공감을 획득한 그들이기에 바로 그들의 입장에서 고통을 들어주는 ‘지지그룹’의 형성이라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누구보다 '내적 힘'이 강했던 그는 '지지그룹'이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정치인의 태생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돌이켜보면 국민들 중에서도 오랜 세월 그의 정책이나 정치노선은 지지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인격에 대한 지지만은 중단된 적이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것은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가 끝까지 국민을 믿었기 때문에 역으로 얻어낸 고귀한 '지지'였다는 점에서 결국 그 지지의 모태 역시 그것을 끌어낸 당사자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본보기라 할 것이다. 그에게 표면적인 '지지그룹'도 노동자에서부터 지도자까지 속 깊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가족에서부터 여성, 지역사회, 인권단체,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까지 폭넓었기에 수직수평의 꽤 탄탄한 스펙트럼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납치, 망명, 연금등의 수차례 억압과 연이은 선거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심리적 소통장치가 되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또한 지지그룹에게 정치활동 외에도 학업이 되었건 연구가 되었건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내보임으로써 어쩌면 자신의 두려움, 나약함을 더욱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했기에 마땅히 죽고 싶었을 많은 순간에도 죽음을 향한 의지를 선회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용기를 최대의 미덕으로 알고 진실에 근거한 웅변을 무기로 삼아 항상 설득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가 실패할수록 그를 지지하는 그룹은 증가했고 그룹이 증가할수록 그는 실패를 실패로 여기지 않을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그도 92년 선거 패배후엔 용공조작에 좌우되는 국민을 원망하며 한없이 실망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에게는 병실이라는 위선적 감옥과 독방이라는 고독의 감옥과 함께 국민이라는 양심의 감옥이 있었다. 그는 끝내 국민을 버리지 않았고 훗날 대통력 수칙엔 '국민의 양심과 애국심을 믿자'고 적을 수 있었다. 그가 빛을 발한 자기 진정성은 혼자만의 종교적 수행이 아닌 국민이라는 양심과 역사라는 진실을 향해 있었고 포기하지 않게 해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새삼 더 크고 위대해 보였던 것은 아닐지.


국민의 이름으로

그는 '역사를 신앙으로 섬기고 정의를 믿었으며 진실이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추운 겨울동안에도 죽지 않는 인동(忍冬)의 세월을 이기고 꽃을 피웠다. 한참 유세중에 케네디의 피격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억울하다 했던가. 나는 무엇을 견디었던가. 돌이켜보니 나는 김대중이라는 역사를 견디기는 커녕 늘 외면하려고만 하였던가. 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뜻과 같았으니, 그것은 제대로 된 국민이 아니었음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오늘 그가 없음이 억울하고 원통한 내게도 어제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그러했기에 대통령과 국민으로 헤어지고 이렇게 저자와 독자로 만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만나자 헤어지는 내 오늘에 이제라도 뒤늦은 국민의 이름을 갖고 싶다. 그는 떠났지만 나는 아직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고 그곳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그가 믿었던 국민이고 싶기 때문이다.

정치를 떠나서도 내 삶의 '자기진정성'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대답을 떠올리게 하는 장중한 독서였다. 역사와 국민앞에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했던 그는 내게 붉은 진정의 꽃을 선사했다. 우리네 삶이 진실을 우선가치로 삼기는 쉬워도 생활에서조차 우선순위로 두기는 얼마나 어려운 현실인가. 어쩌면 정치인으로서 유일하게 사회나 역사가 아닌 도덕교과서에 등장할지 모를 일이며 그 또한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다. 더불어 이제와 생각하니 누가 보면 창피 할 정도로 눈물을 쏟아낸 그 마음은 그동안의 내 인생에 대한 위로와 격려였던 것 같다. 나는 김대중이라는 한국의 제 15대 대통령의 인생과 업적을 돌아 본 것이 아니라 그의 진정한 손에 이끌려 우리가 살아낸 지난 시간과 공간속에서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촘촘히 들여다 본 것이었다.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이야기에 내 인생과 내 가족이 거기 있었다. 그 시간과 공간은 한국의 역사이었고 결국 우리들 인생과 가족의 이야기가 모여 국민이라는 역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제, 책상위 문신처럼 걸려있는 내 부모님의 사진을 올려다 본다. 그들도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신 애국자이었다. 반공과 독재와 지역감정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였던 그들, 나는 이제야 국민이었던 그들에게 인사한다. 부모님의 빈자리 만큼이나 그의 빈자리가 그리웁다. 무엇을 해도 무조건 내편이었던 부모님처럼 어떤 나랏일도 가장 뜨거울 그가 보고 싶다. 잠 못드는 그 새벽 어머니의 잔소리처럼 큰일 앞둔 그의 한마디를 듣고 싶다. 넘어지고 그 다음이 더 두려운 절망의 아침에도 우리는 너를 믿어왔다 그 눈빛이 부시고 시리웁다. 가을 코스모스 벌판을 뒤로 그의 웃는 얼굴이 사무친다. 그래도 눈물이 난다. 어디선가 캠브리지의 짝사랑 로빈이 날아든다. 로빈은 내게 말한다. 가슴에 새긴 붉은 털이 우리 모두의 진정이라고. 당신의 가슴에도 뜨거운 깃털 하나 오롯이 자라나 그 붉은 이름으로 국민이라 새겨졌다고.

나는 국민이다. 역사는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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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2010-11-25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사람 2010-12-01 19: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Bopper 2010-11-30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을 뜨겁게 달구었던 자서전의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은 지금 저자의 뜨거운 가슴을 느끼며
한여름에 마주했던 그 시간이 떠오르네요! 어쩌면 정치적으로 감성적으로 반대편에 위치 했기 때문에
더욱 입체적인 조명이 가능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후광선생도 독서는 반드시 창조적인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님의 독서가 그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고 무엇인가 끄적여야 겠다는 생각이 너무많아 결국 한자도 쓰지 못했는데 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한번 독서의 기억을 더듬어야 할것 같습니다.

책과 사유에 관한 님의 열정과 창조적 해석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했던 국민이 되심을 축하합니다.


한사람 2010-12-01 19:38   좋아요 0 | URL

정성스런 덧글, 감사합니다
맨뒤에 두분의 사진보고 많이 울었더랬습니다^^*

김정일은, 그렇게 보아주었더니 이렇게 등을 치네요...
외람된 것일지 모르나 차라리 이런 꼴 안보고 가시는게 낫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로그인 2012-05-2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살 프리미엄이라는 표현을 어디서 봤나 했는데
이 리뷰에서 본 거였네요
이런 표현 생각해내시는 센스에 감탄합니다

'죽어야 마땅할 이유로 친다면 그보다 더 한 사람도 얼마든지 살고 있는 세상이고..'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어도 노무현이 1위가 되었을까. 다분히 자살 프리미엄 효과의 수혜를 받은 1위'

네. 그렇죠. 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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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는 불행

사실 이 책은 많이 힘겨웠다. 서른 편 가까운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이십년 넘는 작가생활 전반에 걸친 자서전의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 강렬히 끌렸던 이유는 아마도 '그는 왜 쓰는 지'를 통해 '나는 왜 쓰는 지'를 한번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많은 분들이 나와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 지) 그런데 책을 덮고 난 지금 오히려 정리가 안되는 심정이 퍽이나 당혹스럽다. 결코 한눈에 요약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비록 동네수준의 서평자지만 글(서평)을 쓰면서도 왜 쓰는 지를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가 맞을 것이다. 심지어는 서평도 (그가 말하는)글인가? 하는 오만한 생각도 했었다. 물론, 이 질문도 그동안의 서평생활(?)을 통해 나름의 성취와 발전이 있었기에 도대체 '나는 왜 서평을 쓰는가'에 이제야 봉착하게 된 새로운 난국으로서의 자기검열의 한 단계임을 모르지 않는다. 즉, 왜 처음에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 지가 아니라 하다 보니 왜 계속 그러는 것 같으냐에 대한 사건이 아닌 현상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니 그 이유를 말하기 쉽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질문은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는 왜 사는지' 적어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문제였다. 이는 결국 '그동안 왜 살았는 지'와 '앞으로 어떻게 살 지'에 관한 질문과 무관하지 않지 않은가.

대부분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리는 지, 왜 노래하는 지를 물어보면 당연히 그림을 잘 그렸고 노래를 잘했을 거라는 전제를 공유한 상태에서 답을 바라게 된다. 답을 들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기에 예술을 향한 욕구때문이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의심없이 순차적으로 당연해 보인다.(노래와 그림에 소질도 없으면서 노래하고 그림그리는 사람은 글에 소질도 없으면서 글 쓰는 사람보다 적지 않을까) 예술가로서 성공여부를 떠나 타고난 재능과 필연적인 욕구는 바로 자신이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는 가장 일차적인 요인이 될 지어다. 그런데 글쓰는 사람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다. 당신은 왜 쓰는지 물어보면 재능과 욕구라는 답으로는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다. 질문을 던진 자나 대답하는 자 모두 무언가 진짜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무언가 더 구체적이고 더 감동적인 사연이 있을 것 같은...그것은 아마도 글을 쓴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결코 근사하거나 편하고 즐거운 방법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보통사람들의 궁금증 일 것이다. 확실히 글을 안 쓰는 것은 글을 쓰는 것보다 편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안 쓰는게 더 불편해서 덜 불편한 쪽을 택하는 사람들 아닐까.

노래를 잘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재능이듯 글을 잘 쓰는 것도 분명 재능인데 사람들은 노래나 그림의 재능보다 글의 재능을 가진 자가 무언가 생각이 올바를 것이라 여기고 거짓이 덜할 것이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글이 곧 그의 생각이라 믿고 글로 표현된 생각은 적어도 작가의 순연한 진심이라 믿고 싶은 까닭이다. 노래하는 자와 그림을 그리는 자는 뒤에서 욕을 하며 거짓을 일삼아도 작품이 훌륭하면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여기지만 글쓰는 자는 자신의 마음을 속여 가며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용서받지 못할 배신이자 죄악인 것이다. 작가들에게 요구하는 이 시대의 책무는 언제나 동시대의 화가와 가수에게보다 높고 막중했다. 일상에선 웃고 술마시고 춤추다가도 노래를 할 땐 세상 모든 이별을 다 겪어낸 것처럼 노래하는 가수는 이해하지만 해외의 트렌드를 빌려 표절의 수위를 넘나드는 작곡가도 이해해주려 하지만 남의 생각을 자신의 것처럼 꾸미거나 자신의 견해도 아니면서 거짓으로 결론을 주장하는 작가들에겐 절대 용서하고 싶지 않음이다. 가수와 화가는 몇 번의 결혼과 이혼, 재혼도 사생활이라는 똘레랑스를 우아하게 적용해주고 싶지만 몇해 전에 죽은 아내를 그리는 절절한 시로 유명세를 타 놓고선 돈 좀 벌었다고 바로 재혼하는 시인은 온 마음으로 질책한다. 등따숩고 배부르면 글이 안나오느니 우리는 광고에 출연해 유명해진 작가에겐 더 이상의 피같은 소설을 기대하지 않는다. 상처한 시인은 재혼하면 안되고 가난했던 소설가는 부자가 되면 안된다. 애절한 시와 고통스런 소설에의 감동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독자된 이기심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작가들의 부와 작품에 대한 감동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문학은 상처와 슬픔의 축적이지 영광과 기쁨의 축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선과 추악한 욕심과 세상 모든 거짓을 노래하고 그림그리는 예술가가 있듯 작가도 자신의 재능인 글을 가지고 위선하고 거짓하면 안되는 일일까. 절대, 안된다. 작가는 예술과 윤리의 영역이 분리되도록 허락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는? 경제는? 과학과 사회는? 작가는 윤리든 정치든 경제든 과학이든 사회든 그것들을 글쓰는 예술로 말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것도 아주 진심으로 진실되게.

그래서 나는 문학하는 사람들을 싫어했고 문학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작가들이란 인생에 패배해놓고선 어떻게든 문학으로 이것도 승리라 말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져놓고 이겼다 말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래놓고선 자신들은 세상에서 굉장히도 진실한 사람들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적어도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서) 현실에선 거짓을 일삼아 놓고선 글로는 거짓했음을 고백하여 마치 진실한 삶을 추구해온 것처럼 자신을 미화하는 습관도 있다. 평일 내내 욕하다가 주일에 교회가서 참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실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지 진실한 것과는 다른 문제인데 작가에 대한 기대치를 곧 자신이 추구하는 인격치와 동일시하여 고매한 인격자로 살아가는 척을 하는 작가들도 있다는 이야기다. 살면서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웃기고 힘든 일인지 알게 될수록 작가를 희망할 자신이 없었다. 재능에 대한 열등감보다는 작가로서의 책임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고 차라리 내 돈내고 산 책 한권과 그 작가를 비판하는 쪽이 더 속편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작품으로서의 성공과 인격으로서의 성공이 합체된 작가는 언제나 경외감의 대상이었다. 그는 작가라는 예술을 했다기 보다 인간이라는 수행을 한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문학하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진실하고자하는 노력을 문학하지 않는 사람들 보다 많이 한다는 점에 있어서 다른 예술분야보다 더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생각한다.

조지 오웰은 바로 이 두 가지를 누구보다도 동일시한 작가로서 그 최대치에 근접하려 노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본인도 말했듯이 위선을 발견해 내는 재능을 일찌감치 타고난 덕에 일상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자신이 마주한 세상의 온갖 위선이라 하면 이미 오래전 죽은 작가라 할 지라도 발견할 수밖에 없었고 알게 된 이상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선에 둔감해지는 것이 살아가는 방편이 됨을 모르지 않는 나이기에 그의 인생은 누구보다 피곤하고 외로왔을 것이라는 연민이 떠나질 않았다. 어떤 작가가 안 피곤하고 안 외로울까마는 그의 글은 적어도 위선에 대해선 연구와 성과의 깊이가 상당히 전문적이다. 환자입장에서 밝혀내는 논리가 간편한 X레이 수준은 아닌 것. 각 부위별 CT단층 촬영및 MRI촬영이 반복되는 정밀검사의 영역인 것이다. 나도 대충 X레이 사진까지는 그동안 들어온 지식으로 이해, 판독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정밀검사는 설명을 듣고 있으면서도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아니 시간을 들여 꼼꼼히 확인하고 싶다. 나는 그의 소설을 한편도 읽지 않았던 것이 살면서 한번도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소설도 안 읽어 놓고 에세이집을 가지고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은 상당히 부끄럽다. 고개를 들 수 없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일개 서평자이고 서평자를 택한 나로선 작가와 작품을 말할 수 있는 권리에 편승한 것이니 다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로 감동의 문장을 남발하는 글만은 쓰지 않겠다는 초보수준의 다짐을 앞세우기로 하겠다.

양심과 죄의식의 축적

아마도 책을 읽으며 근자에 이렇게 밑줄을 그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그만큼 한줄 한줄이 내 가슴을 찌르기도 했고 머리가 번쩍하고 정신이 들기도 했다. 우선 그의 문장은 절대 감성과 이성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 자로잰 듯 공평한 느낌이다. 물론 이 느낌은 굳이 분류하자면 이성에 가깝기는 하다. 저널리스트로서의 날카롭고 지적인 면모가 그의 특성이자 매력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학이 '상처와 슬픔'의 축적이라 한다면(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라 찾아보니 문학이 슬픔의 축적이라 한 사람은 최승자 시인이다) 조지 오웰의 글은 '양심과 죄의식'의 축적이라 느껴진다. 그런데 이 축적된 글을 마주한 나로서는 그의 양심과 죄의식이 억울하게만 느껴진다. 즉, 그다지 작가로서 혹은 선진국이라는 영국시민으로서 크게 잘못하며 살아온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독일이나 일본 작가였다면 모를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 내 수준이었던 것이다. 우리시대에도 그랬고 작가들은 유난히도 폐병으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은데 숨쉬기 힘들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많은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였기 때문에 숨쉬기 힘든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전 및 환경적 요인이나 생활수준, 작가의 생활방식등이 폐병과 쉽게 연결되곤 하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옥죄는 무엇이 병을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조지 오웰의 글은 거의 전편이 자신을 옥죄던 세상의 무엇인가에 저항하는 방편으로 느껴진다. 그 거대한 세상의 중심엔 영국이라는 위선과 전쟁이라는 과실과 작가라는 책임이 사이좋게 연대를 이루고 있었다.

1. 영국에서 작가하기

스물아홉편의 글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세편의 글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신이 태어난 조국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신랄한 분석과 비난이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 물론 미국이나 독일 심지어는 일본보다도 위선적이라는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뼛속까지 자국의 국체(國體)를 꼬집는 글은 만나보지 못했던 터라 같은 시기 동양의 일본으로부터 그가 죄책감을 느꼈다는 식민지처지였던 우리로선 오히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국, 당신의 영국>, <민족주의 비망록>, <정말, 정말 좋았지> 이 세편을 읽다보면 영국은 참 형편없는 나라였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데 특히 오웰이 여덟살 때부터 다녔다는 사립학교 시절의 경험을 그려낸 <정말, 정말 좋았지>는 한때 아이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서 교육을 시킬까도 진지하게 고민했던 학부모였기에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 글은 오웰이 어떻게 해서 최초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쓰여진 연도로 보면 그의 작가생활 후반부에(1947) 속하지만 내용상(1911-1916) 전기로 본다면 맨 앞부분에 위치해야 할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비로소 오웰의 대책없는 죄의식의 뿌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귀족이나 백만장자, 혹은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과 같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철저한 속물근성의 교장과 그의 부인에게 생의 패배감을 부당하게 세뇌당하게 되는데 겉으로는 고마워해야 하지만 오웰의 마음에 싹튼 증오는 평생을 떨쳐버릴 수 없는 죄의식으로 발전한다. 결국 그 시기에 지식인이 얼마나 지적으로 속물적일 수 있는지 몸소 배우고 체험한 오웰은 영국 상류층과 중산층 특유의 결함을 이 기숙학교에서의 뿌리깊고도 잘못된 관행에서 시작한다고 결론짓는다. 이 글은 자신의 어린 시절 내면의 상처를 가장 감성적으로 표현했지만 또 가장 지적으로 길게 반항한 글이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강자와 약자, 가진 자와 못가진 자에 대한 기준이 늘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으로부터 자신도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살아남는 생존본능도 범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그는 자의식이 형성될 시기부터 죄의식 때문에 자신을 떳떳한 사람으로 성공할 사람으로 생각지 않은 것이다. 비록 실패 할 것이 뻔하고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이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행복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름의 도덕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글을 쓴 것이었다.

그가 애국과 민족, 그리고 영국인의 국민성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언제나 히틀러를 말할 때보다 더 날카롭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 듯하다. 영국국민은 누구보다도 애국적인데 이 심성을 예술적 재능은 없으면서 꽃에는 열렬히 반응하는 이중적태도로 비유해 설명한다. 전쟁과 군국주의를 가장 혐오하는 것 같아도 실은 한때 지구상의 1/4의 영토를 점령한 식민지 지배국가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렇게 위선이 가장 강력한 안전장치가 되어온 영국에서 문학을 대표하는 세익스피어를 비난하는 톨스토이를 반박하는 그 역시도 객관을 앞세운 애국자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과 영국인은 사악하지만 또 완전히 사악하지만은 않아서 더 사악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러한 영국에서 자라온 자신 역시 좌파 지식인과 작가를 분리 할 수 없듯이 자신의 글에 정치성이 결여될 수 없음을 불가분의 모순처럼 역설하고 있다.

작가가 정치와 관련있는 글을 어떻게 쓰는지에 관한 본보기는 <민족주의 비망록>이 대변해주는데 여기서 그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다름을, 관념의 실체가 아닌 부정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습성으로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개념을 설파하며 영국이 이 개념을 어떻게 이용해왔는지 차근차근 짚어본다. 영국은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이 민족주의적 충심을 개입시켜 그때그때 애국을 발휘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오웰은 민족주의자가 자기편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반대하지 않으며 뻔히 일어난 객관적 사실을 무시할 수 있으며 사실이 알려져 괴로운 것 보다는 모름으로써 인정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는 것이다. 인종차별이나 평화주의, 종교분쟁, 공산주의 까지도 민족주의가 전이된 것이며 이것은 모두 도덕을 앞서는 기질 혹은 습성이라는 것이다. 오웰은 이 습성을 적나라하게 꼬집으면서도 지식인으로서의 작가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태도를 가지고 정치행동 이전에 자신의 사고과정을 오염시키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한 도덕적 노력이야 말로 정치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소양이고 오웰은 이러한 글을 쓰면서 오히려 흔들릴수 있었던 자신의 의지를 다지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2. 전쟁에도 작가하기

오웰은 47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에 이십여 년의 작가생활을 하면서 시대가 가진 운명인 전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그 어렵다는 사립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반감으로 '인도 제국경찰'에 지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학이라는 성공을 향하지 않고 인도라는 동양을 택한 것은 일종의 양심돌파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막연한 양심의 가책을 해결하려다 되려 더 지독하고 구체적인 양심만 짊어지고 온 경우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작가활동을 하고 있던 중에도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달려간 스페인 전장은 마찬가지로 둥그런 양심을 보상받기 보다는 더욱 전체주의에 맞서는 네모진 양심을 길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스페인 내전 후에도 그는 계속되는 경제불안과 2차 대전의 발발로 정신적인 무력감과 육체적인 병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양심을 털어내려 할수록 얄궂게도 더욱 그 배로 들러 붙는 것, 오웰에게 있어 양심은 혹 떼려다 더 붙이는 결과가 반복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작가된 운명으로 벗어날 수 없는 시지프스의 형벌과도 같지 않았을까 싶다.

오웰은 인도경찰 근무시 바로 앞에 걸어가는 사형수의 갈색등을 보고 양팔이 결박된 그 와중에도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껴가는 그를 보고 건강하고 의식있는 한 사람의 목숨줄을 끊어버리는 일의 부당함에 새삼 전율한다. 제국주의자를 증오하는 인도사람들의 눈빛에 못 이겨 마을에 뛰어든 코끼리를 어쩔 수 없이 죽여버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몸부린 친다. 그는 인도경찰 시절 백인의 동양지배가 부질없음을 폭력을 휘두르는 건 백인이지만 결국 폭력적이미지에 걸맞게 예상하는 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가식적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깨우침을 얻게 된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진실보도를 하지 않는 자국에 대해 파시스트 선전에 이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지식인들의 속내를 비난하며 영국은 진상보도를 하지 않았기에 파시즘을 제대로 알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으며 결국 자신도 그 때문에 내전에서 파시스트를 반대하는 적들에게 총상을 입었다는 논리를 끌어 낸다. 파시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명분으로 참가했던 혁명군 전사로서의 기억이라곤 동물적 허기와 온갖 악취, 수면부족, 얼음과 찬바람이 전부라고 말한다. 파시스트를 쏘러간 오웰은 눈앞에서 바지를 추스르는 인간을 보고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그를 쏘지 못했으며 남루하다는 이유로 도둑으로 몰린 인도병의 눈빛도 쉽게 잊지 못한다. 위병소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준 유럽노동계층 이탈리아 민병대원의 인간다움 삶을 성취하고자 했던 온기도 잊지 못한다.

전쟁이 반복되는 시대에 그는 인간다운 삶과 진실로서의 역사를 증언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희망이 아닌 절망을 말함으로써 희망을 찾으려는 욕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변절자로서의 지식인과 역사를 진실로 기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절망을 이겨보려 글을 써온 것은 아닐까. 그 자신도 변절하지 않기 위해 진실로서의 역사만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의 정치와 과학과 예술과 전쟁을 기록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결과로서 작가의 삶을 살게 한 것은 아닐까.

3. 글쓰며 작가하기

오웰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으며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듀서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다. 문학잡지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오랜 세월 서평을 써 온 것으로 보아 언론인이나 자신을 비롯해 주변에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이른바 지식인들에 대한 견해를 표명할 기회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늘 세상을 향해 떠들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행태와 심리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작가된 양심이라는 것은 과거를 밝히는 의미도 있지만 애초부터 잘못도 하지 않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향후를 대비한 우리시대 일종의 보험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흡사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가해지는 사회적 역할과도 비슷한데 작가는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도 죄가 되는게 아닐까. 나이드니 들추는 게 꼭 지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때로는 묻어버리는 것이 누이좋고 매부좋은 거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다. 오웰은 들추면서 묻어버리는 이 절묘한 테크닉을 타고난 듯 하다. 자신도 작가이면서 세상 모든 작가에게 요구하는 그의 글들이 나는 왜 그런지 철저히 작가된 슬픔이자 뼈아픈 고독으로 느껴졌다.

서평은 오웰의 생업인 동시에 작가로서의 소양을 쌓는데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 편은 어쩌면 모든 서평자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짜릿함이 컸다고 본다. 평하는 대상이 '책'이라는 문화적 무게 때문에 글을 쓴 사람이 '작가'라는 지식인이기에 감동은 커녕 욕이 나오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의 작품일지라도 어떤 다른 이유들로 솔직할 수 없는 서평자의 비애를 까발린 글이라고 할까.

실제로 전혀 그 작품과 작가에게 감흥을 느끼지 않았지만 출판사 홍보차원의 리뷰대회의 목적성에 확실히 부합해주기 위해 거짓감동을 나열하여 영예의 수상을 한 지인도 있다. 이 부분은 나 역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입장이라 이른바 떡밥이 걸려있거나 보상이 주어지는 서평에는 함부로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어짜피 그들의 홍보목적에 이용되는 내 글에다가 솔직한 비난을 해놓고서 그들이 주는 떡밥을 기대하는 건 오히려 위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느끼지 않은 것은 느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기본적인 양심은 있어 비록 아마추어 글쟁이지만 진실됨을 잃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 느낀 것만 이야기하자는 최소한의 원칙이 나와 꼭 같지는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느끼지도 않은 것을 지어내거나 느낀 것을 과장하거나 남이 느낀 것을 자신이 느낀 것에 덧대는 작자들이 그들이다. 딱 동네수준의 서평자들에게 어울릴만한 작태가 아닐까 싶은 이 광경을 지난 몇 개월, 그러니까 서평이라는 것을 써보자고 마음먹은 후 잊어먹을만 하면 보아왔다. 정식 작가들도 아니고 서평 한편으로 떼 돈버는 글쟁이도 아닌데 꼭 그렇게 까지 해야하는 가에 대한 자괴감은 서평을 쓰고 싶지 않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다. 오웰은 아무리 양심적으로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서평은 본질적으로 사기라 지적한다. 불멸의 영혼을 하수구에 한 번에 한파인트씩 흘려 보내는 작업이라고 말이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서평을 쓰기 시작한 내 불쌍한 영혼을 하수구에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어떤 책도 가볍게 혹은 쉽게 혹은 막연하게,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을 향한 원망의 불똥이 우습게도 그러나 당연하게 나에게로 튄 꼴이다. 오웰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 지독하게 파헤치고 빠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서평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고 내 리뷰는 내가 써놓고 보아도 심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성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는지 나는 글 한 편당 떡밥이 걸리는 확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데 응모를 했나 언제 당첨이 되었는지 모르고 넘어가는 일도 생겨 급기야 당신은 리뷰대회 수상만을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은 바이다. 아니라고 증명할 길은 별로 없어 보였고 나로선 더욱 서평을 진실하고도 성의있게 쓰는 것 외엔 달리 탈출구가 없었다. 그런 말을 들을 줄 알았다면 그동안 운좋게 리뷰대회 수상을 했을 때 좋아라도 해볼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그렇게 좋지 않았던 이유는 계속해서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느껴졌기에 서두에도 밝혔지만 나는 어떤 형태로도 문학을 좋아는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으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들 그렇게 많이 내 글을 읽는 지도 몰랐던 나는 어느덧 서평자로서의 책임이 드리우는 걸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이런 책까지 집어들게 된 것이다.

어쨋거나 나는 오늘도 서평을 쓰고 있으며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괴롭긴 해도 스스로 꽤 즐겼던 분야로서 글쓰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강도 높은 비하가 어떤 의미에서 자신감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어떤 서평자의 고백>은 최고치의 비하를 통해 최상의 자신감을 표현한 역설의 고백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자신이 영화평론가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생각하는 그 서평을 써왔으며 그로 인해 인정받았으며 내가 보기엔 서평쓰는 방식이 곧 오웰의 글쓰는 패턴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자신감도 자괴스런 슬픔으로 밖에 표현할 줄 몰랐기에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그렇게 쓴 것뿐. 그는 최고의 서평자였음에 틀림없다.

그 외 영어권에서 언어의 타락을 부추기는 타성에 젖은 관습을 지적하는 <정치와 영어>편도 무릎을 탁탁치며 읽었다. 그가 타락한 글쓰기의 하나로 지적한 죽어가는 비유, 이른바 상투적인 관용어에 의지하는 비유와 젠 체하는 용어는 피해갈 수 없는 글쟁이들의 필요악에 가깝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쓰는 사람들의 산문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어쩌면 내가 시를 못 씀에 있어 시를 쓰지 않으니 시 쓰는 사람들도 산문을 넘보지 말라는 억지도 포함한다) 그래서인지 지나친 은유자체로 문장을 완성하는 습관을 가진 류의 작가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산문에 있어 감성과 이성을 모든 은유로 포장하는 행위는 시적부력을 이용한 반칙에 가깝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젠 체하는 용어 역시 괜스레 라틴어, 그리스어원을 찾아 집어 넣고 심리학 용어를 가져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맘대로 합성어를 만들어 내는 행위를...나는 곧잘 시행해왔다. 변명을 하자면 꼭 유식해보이고자 함보다는 내 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중부정으로 멋부리기, 쓸데없는 수동태의 사용, 모호한 결론내기등등 국문과 교수의 강의와도 같은 그의 글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 문득 그의 글을 읽으니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기만 하라는 뜻으로 여겨지는 많은 평론가들의 문학비평글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오웰은 이렇게 포현된 언어가 결국은 생각을 타락시킨다고 실패자라는 기분에 마신 술이 결국 실패자를 만드는 꼴은 되지 말자고 신신 당부한다.

서평자의 입장에서 평생가도 이런 서평은 쓸 수 없겠다 싶은 절망을 안겨준 글도 있었다. <정치 대 문학: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와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이 두편은 걸리버 여행기를 집필한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와 세익스피어를 힐난한 톨스토이에 대한 평론이다. 공정한 비판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은 글이었고 작가의 성격및 심리와 작품간의 관계를 끌어내는 그의 통찰력은 내가 읽어본 그 어떤 평론보다도 독창적이면서 치밀하고 타당했다. 위대한 작품을 써낸 작가가 꼭 위대하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왜 그러한지 조목조목 밝혀내는 것도 놀라웠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장 좋아하며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고 마는 그의 결론도 뿌듯했다. 엊그제 톨스토이 100주년을 맞이한 러시아의 쓸쓸한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를 보았는데 가장 영국을 대표하는 세익스피어를 폄하하며 특히 <리어왕>을 혹평하는 톨스토이를 심리적으로 공격하는 오웰의 반격은 2010년을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선 어짜피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작가들의 영국대 러시아의 문학자존심 대결로 읽혀지기도 했다. 얼추 세익스피어의 폭넓은 사고력 대 톨스토이의 성인되고자 함으로 요약되는 이 재미를 나는 두어 번 읽어내려 가며 박수를 쳤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까레리나>라도 썼으니 언급이라도 해준다는 마지막 결론은 그야말로 짜릿한 독설이었다. 나 역시 오웰이니 박수친다 아니었을까.

반가운 검열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서평을 계속 써야 하는가, 쓴다면 어떻게 써야 하는가, 문학의 길을 희망해야 하는가, 작가의 꿈을 버리지 말아야 하는가, 작가가 된다면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잠시 미루어둔 의제들을 다시 꺼내어 차근차근 되돌아 보게 하였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로 밝힌 것들과 나의 이유와 일치되는 것이 아무리 다시 보아도 그다지 없어 보인 다는 것이 영 서운하고 다소 충격적이기 까지 하지만 분명한건 앞으로도 글을 쓰는 행위에 자유로울 것 같지는 않다는 것. 위의 모든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도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거나 쓰려고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내가 얼마간 작가로서의 소질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작가의 길을 향해야 하는 가엔 늘 동의하지 못하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도전을 유보하는 내 심리엔 재능에 대한 불신, 자신감의 결여도 있겠지만 만에 하나 작가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행복할 것인가, 나는 그 고난마저도 작가로서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미래를 내 던질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자기검열이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탓이라 생각한다. 실은 그 중간 단계로서 안전해 보이는 서평작업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이번에 보기 좋게 제대로 자기검열을 당했다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조지 오웰은 내게 있어 앞으로도 훌륭한 검열관이 되어 줄 것 같다.

아직은 턱없이 부족함을 안다. 그래도 나는 글쓰기가 좋고 글을 쓰고 나면 많은 것을 토해내었다는 원초적인 기쁨이 반갑다. 이제는 말하는 것보다 글로써 전달하는 것이 더 편할 때도 있다. 글을 쓰면서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탓일 게다. 아주 먼 훗날 내가 만약 '나는 왜 쓰는가'를 제목으로 책을 낼 수 있을(아니면 내가 죽어서라도 누가 내줄만큼)까. 혹시 그 정도가 된다면 여러 꼭지들 중 꼭 조지오웰의 작품과 그의 죄의식을 신랄하게 비평해 보고 싶다. 걸리버 여행기를 여섯 번 읽었다고 하니 나 또한 그의 작품을 그만큼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때가 된다면 지금의 나처럼 글을 계속 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어떤 서평자에게도 번득이는 자기검열의 시간을 마련해줄 수 있을까. 나는 불행히도 부디 누군가가 나를 비평하고 내 책을 서평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나는 얼마든지 톨스토이가 되어 내 이상을 분석당할테니 당신은 오웰처럼 내 허구를 꼬집으라. 원하시면 세익스피어가 되어 드릴테니 내 언어를 마음껏 조롱하시라. 꽁꽁 숨겨진 내 열등감과 위선을 찾아내어 달라. 십년이든 백년이든 그대앞에 끝까지 살아남아 작품으로 그 생존을 증명하고 그리하여 내 이름 하나 기억되고 싶다. 그것은 내 인생 최대의 불행이겠지만 그렇기에 작가 최상의 행복일 것이다. 나는 끝내 불행으로 행복하고 싶다. 오웰 그가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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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2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간혹 몇 몇 글은 쉽게 잘 안 읽혀지더라고요. 배경지식이 좀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있었고요,
그래고 이번 에세이들을 통해서 오웰의 문학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은거 같아요.
소설을 읽기 전에 진작에 에세이들을 먼저 읽었으면 좋았을것 같다는 아쉬움도 들기도 했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0-11-26 09:32   좋아요 0 | URL

전 이 책이 힘겨워도..읽는 내내 좋았어요
오래전 사람이라는 생각도 안들고..
영국인이라는 생각도 안들었죠^^

september 2010-11-25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어째서 써야만 하는가?"

반딧불이 2011-03-13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잠자리는 행복하면서도 부끄럽겠습니다.
 
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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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쥐와 재회하다

어쩔 수 없이 잊고 싶었던 순간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작년 이맘 때, 나는 술장사를 하는 어떤 가게의 안주인이었다. 주방장이 그만두고 잠시 공백이 생겨 할 수 없이 주방일을 보게 되었는데 당시 내게 주방은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 아닌 지친 몸을 잠시 휴식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손님이 없을 때 잠시 눈을 붙이거나 책을 보기도 했던. 가끔 한기가 느껴질 땐 오븐이나 밥통을 끌어안고 몸을 녹이기도 했다. 그날 아침은 막 첫추위가 시작되는 겨울의 초입이었는데 나는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 주방문을 열자마자 미친듯이 다시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고양이만한 쥐가 전날 밤 내가 끌어안았던 밥통옆에 얌전히 앉아서 똑바로 내 눈과 마주친 것이다. 살면서 그렇게 큰 쥐를 본 적도 처음인지라 놀라기도 했지만 더 소름끼치는 건 내가 그 자리에서 도망쳐도 될 사람이 아니라 다시 문을 열어 어떻게든 그 쥐를 쫓아내어야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문을 열기 전에 잠시 생각했다. 쥐가 아직 있을까... 분명 쥐는 움직임 없이 휴식중이었고 내 눈을 쳐다보았다. 있어도 문제고 없어도 문제였다. 내 손으로 닫은 주방문을 다시 열어야 했던 그 순간의 공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쥐가 제발 알아서 도망가도록 충분히 시간을 준 다음 문을 열었다. 내가 연 문말고 창문, 뒷문 모든 문은 닫혀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 나간 것일까. 통로를 쥐잡듯이 찾아보았지만 그 덩치가 통과할만한 구멍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나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와서 그제서야 여기저기 쑤셔대었다. 삼십분을 들쑤셔도 쥐는 온데 간데 없었고 쥐하나 잡자고 경비업체를 부르기도 뭐해 그렇게 하루 일과는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쥐가 사라진 것을 알았지만 나는 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싱크대, 냉장고, 선반 할 거 없이 질책이라도 하듯 그들을 닦고 문질렀다. 저녁에도 쥐가 나타날까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던 나... 그 다음날은 도저히 내가 먼저 주방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아 옆지기에게 부탁했고 쥐가 없는지 확인하고도 한참 있다가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가 먼저 주방문을 열지 못했다. 그 후로 한번 더 옆지기가 그 끔찍한 쥐를 발견했지만 우리는 끝내 쥐를 찾지도 잡지도 못했다. 쥐라고 그때 나를 발견할 줄 알았겠는가. 그러니까 쥐와 나는 같은 공간에서 동거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서로들 몰랐을 뿐이었다. 그날 마주친 쥐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때 쥐의 안부가 궁금해 시종일관 소름돋은 채로 독서를 하다가 주방문을 닫아 버리듯 책을 덮었다. 꼭 다시 그날의 쥐와 재회하는 기분이었달까. 희미한 빛을 받아 더 부각되던 그녀석의 볼륨있는 몸체와 미동도 없던 태연한 자세는 여지껏 내가 알던 쥐와는 많이 달랐음이다. 그쪽 세계에서 어떤 황태자와도 같은 아우라가 느껴졌는데 우습지만 쥐도 고민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미처 여기가 당신네 공간인지 몰랐다는 당황함이나 사람이 나타남에 있어 본능적인 경계, 민첩함은 전혀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훗날에도 그 쥐의 당당한 눈빛을 잊을 수 없어 도대체 '뭣하러 왔나'가 아닌 '뭐하던 중이었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추위를 맞아 살 궁리를 하는 아빠쥐의 고유한 사색의 시간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쥐도 그 공간이 나름 마음에 들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쥐는 우리에게 피해를 주려고 그 곳에 도달했다기 보다 그냥 자신이 하던 일을 좀 새로운 공간에서 수행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나의 공간을 두고 쥐와 경쟁을 했었다니... 사람이 쥐의 공간을 탐하지 아니하니 쥐도 사람의 공간은 넘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중심의 편파적 입장인 게 아니었을까.

쥐와 공존하다

쥐를 발견했을 때 말처럼 때려잡기는 정말 어렵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토록 두려웠던 건 '쥐'라는 생물학적 동물이었다기 보다는 내가 발디디고 있고 내가 숨쉬는 공간에 '쥐'라는 최악의 불결한 덩어리가 나타났다는 사실, 저나 나나 같은 생명체이긴 하지만 나름 고상하고 청결한 생활을 해왔다는 믿음에 위배되는 증거로서 내 자존감의 훼손이었던 건 아닐까. 쥐는 시각적 정보가 아닌 위생적 정보이기에 쥐를 보았다는 사실은 쥐와 같이 있다는 공존감에 대한 인식이었고 그것은 곧 인간의 위치에서 심각한 추락을 의미하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쥐가 나타나면 악착같이 때려잡으려 하는 것도 실은 무의식적인 인간성의 추락에 육감적인 공포를 감지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 작품은 쥐와 동격이 되 버린 한남자의 인간성의 추락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추락을 유도하는 매개체로 '쥐'와 '쓰레기'를 사용한 듯 하다. 쓰레기 환경에서 서식하는 동물로 대표적인 것이 쥐이지만 쓰레기는 인간이 생산했고 쥐는 인간이 창조하지 않았다. 쥐는 쓰레기 때문에 생겨난 생명체도 아니다. 즉, 애초부터 쥐는 쓰레기와 원인상관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쥐는 인간에서 기인한 쓰레기 세상에서도 잘 살아 나가지만 인간은 자신이 만든 그 곳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첫 번째 아이러니의 시작이다. 한 가지 잘 사는 방법은 쥐처럼 살면 되는 것. 다만, 어쩔 수 없이 죽어도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필 쥐를 박멸하는 연구를 하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 보다 조금은 더 쥐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던 사람이 틀림없다. 쥐를 살리거나 죽이는 방법도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아이러니이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우연히 남들이 두려워하던 쥐 한 마리를 시원하게 때려잡은 후로 쥐와 같거나 쥐보다 못한 생활을 하게 되는 고통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또 쥐와의 인연은 운명이었던 것인지 바로 쥐를 잘 잡을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쥐를 잡는 일을 맡게 된다. 세 번째 아이러니이다. 쥐를 때려 잡아야 쥐와 같은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이다 보니 쥐를 잡아야 했었던 것인데 자신이 인간이 되는 길은 쥐를 잡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쥐가 인간을 먹여 살리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쥐가 없어져 버리면 그는 무엇으로 살아가나. 쥐를 잡는 일은 곧 자신을 잡는 일은 아닐까. 마지막 아이러니는...우리의 몫이었다.

쥐잡기처럼 이어지는 아이러니, 쥐와 인간의 이 오래된 역학관계를 끝도 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쥐를 잡는 것에서 시작해 쥐를 잡는 것으로 끝나는 이 작품에서 한인간의 몰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편혜영의 소설은 인간의 불행에 동감토록 하지 않고 불편하고 불쾌하여 불가할 정도의 불만을 조장한다. 우연의 연속인 것 같아도 실은 우연으로 생각하고 싶은 인간의 선택이었음을 깨우치게 한다. 처절한 불행앞에 연민의 눈물대신 그러한 불행을 야기한 스스로를 자각하게 한다. 그동안 그녀의 단편에서 끝내 동감할 수밖에 없었던 심각한 수준의 불쾌감은 이번 작품에서 더욱 총체적, 강박적으로 집결된 느낌이다. 조금 더 길고 자세한 단편을 읽은 느낌덕분에 다행히 마지막에 허탈하진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불가한 상황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해가능하다는 사실자체가 계속하여 씁쓸한 여운을 선사하며 각자가 짊어지고 가는 인생의 무게를 실감토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무게 역시 내가 선택해온 인생의 대가라는 알고는 있었지만 듣고는 싶지 않았던 목소리와 정면에서 마주치게 했다. 그 목소리는 어쩌면 쓰레기더미에서 타고남은 재처럼 뿌옇기도 하겠지만 우리들 가슴에 벌겋게 각인될 것이 틀림없었다.

빨강의 예언

소설의 처음은 공항에서의 검역으로 시작된다. 위험의 경고인 것이다. 주인공 그는 C국으로 파견된 방역업체의 약품개발원이다. 나는 C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이나 유럽등의 선진국이 아닌 전염병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는 개발도상국 혹은 후진국임을 상상할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내용을 알 수 없는 붉은 색 도장'을 받아온다. 마치 앞으로 펼쳐질 불행한 미래에 대한 예언장처럼. 붉은 색 도장이라면 나도 뒤지지 않을 선명한 추억이 있다. 바로 9.11 테러 이후 미국 방문시 이루어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의 참변(?)이다. 나는 공항 입국심사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하고 어느 덩치 큰 흑인의 뒤를 따라 미국입국검사대 바로 뒤편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사무실로 인솔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내 인상착의였는데 테러용의자로 지목된 중국인 여성과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삼십 여분 동안 되지도 않는 영어로 내 자신을 변호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공항 내 한국직원 덕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다른 외국인들과는 다른 출구에서 생화학적 세균을 제거하는 방역가스를 한차례 확실하게 살포한 후에야 보내주었다. 그리곤 여권엔 주홍글씨의 낙인처럼 secondary도장을 빨갛게 찍어 주었다. 한순간에 미국입국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서 조사를 받은 기록이 새겨진 것이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당시엔 얼마나 공포스럽고 굴욕적인 순간이었는지... 2005년 이후 나는 미국을 다시는 가기 싫어졌는데 그것은 내 여권에 빨갛게 표시된 도장의 역할이 크다. 검역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 기록으로서의 빨강은 현재의 불안이자 미래에 대한 경고이다. 이미 돌아온 나야 미국을 다시 안가면 그만이지만 그는 그길로 모국을 다시 밟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의 붉은색 도장은 영원한 출국금지의 낙인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위험의 경고로 받아온 도장은 기어이 위력을 행사해 그를 나락으로 내모는 붉은 주술을 발휘한다. 그가 공항을 빠져나와 도착한 주거지는 C국의 수도인 Y시의 중심부 외곽지역을 재개발해 조성한 제 4구의 어느 독신자 아파트였다. 그런데 그곳은 지독한 악취와 검은 쓰레기라는 다리를 통과해야 어른거리던 쓰레기더미 위에 건축된 난개발의 장소였다. 그는 제 4구의 6번지 아파트 4층에서 형사와 대치하던 중 투신하여 스스로 쓰레기 더미로 추락한다. 절박한 순간에 이루어진 최후의 결정이었을까. 그런데 추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맨홀 아래 하수도, 진짜 쥐의 서식지로 이어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재수없게 닥쳐진 불운의 연속이었던 것일까. 작가는 지상의 아파트에서 부랑자가 떠도는 공원, 쓰레기 소각장으로 다시 지하의 하수도로 점점 인간의 세계와 멀어지는 주인공 그의 추락에 한 가지 의문점으로 그가 본국에서 수행한 일을 끝까지 추궁하는 서사를 고집한다. 즉 C국에 운좋게(?) 파견된 서사까지는 그런대로 우연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바로 C국에 파견결정이 내려진 직후 그가 보여준 행보를 그의 추락과 연결지은 것이다. 그것은 C국에 누구보다도 출국하고 싶었던 그의 심리를 설명해주며 C국에서 쓰레기장으로 투신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을 이해시키는 중요한 소설적 장치이자 이 작품의 실마리이기도 했다. 그는 과연 전처를 살해한 사람일까.

검정의 선택

그가 제 4지구 아파트 4층에서 전처와 재혼한 남편 유진과의 통화에 의해 자신이 전처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그가 내린 결정과 당시상황을 우리는 다시금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그는 아파트에 도착해 본사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몰이라는 인물과 통화를 하지만 자신의 출근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무작정 연기되었음을 알게된다. 이것이 C국의 특수한 사정때문이지 본사의 오류때문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와 그것이 들어있는 트렁크마저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약을 사러나간 거리에는 검은 쓰레기 봉지만 나뒹굴며 어렵사리 구한 약은 살충제와 쥐약이 전부였다. 살충제와 쥐약마저 약탈당할 뻔 한 그는 쓰레기 더미에 쓰러진 자신이 어느덧 스스로 냄새를 풍기는 세계가 되었음을, 마침내 노략질과 폭력이 정당한 세계로 진입했음을 처연히 깨닫는다. 집단감염에 대한 우려로 아파트는 격리되고 계속되는 불안과 두려움속에서 그는 전처와의 소소한 일상이 그리워지며 연이어 전처의 개, 전처의 남편이자 자신의 친구인 유진등이 차례로 생각나지만 그것은 그들과는 다른 세상에 놓이게 된 자신을 더 뚜렷이 인식하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그는 타지에서의 외로움, 불확실한 상황의 연속에 따른 막다른 두려움에서 탈피하기위해 마침내 자신을 쓰레기로 폐기처분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또렷하게 남아있는 그의 기억이라곤 익숙하게 칼을 쥐던 손의 느낌뿐이었다. 형사를 피해 투신한 그는 이후에 17명의 부랑자가 생활하던 공원과 쓰레기 소각장을 떠돌게 되고 그곳에서 보디백에 담겨져 하수구로 내던져 진다. 일련의 과정으로만 판단컨대 서사속에서 그가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것은 없어 보인다. 모든 건 정해져 있던 것일까.

작가는 꼭 그렇지 만은 않다고 말하기 위해 그와 전처와의 과거의 추억인 '원숭이숲'을 근거로 내세우는 전략을 시도한다. 바로 그가 아내와 마지막 관계회복을 위해 떠났던 T국으로의 여행에서 고집을 피워 방문한 장소, '원숭이 숲'이었다. 둘만의 조용한 대화를 원했던 그는 위험을 무시하고 그곳을 방문했지만 원숭이 숲을 지나 사원을 향해 가는 길은 그들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과정과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모자나 선글라스를 빼앗아 가던 원숭이와 뒤엉켜 육탄전을 벌이던 그의 모습은 '아내와의 관계회복'이나 '조용한 대화'와는 거리가 먼 원숭이 보다 못한 무모한 폭력에 불과했다. 원숭이의 꼬리뼈까지 씹어가며 아내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그는 원숭이에게 여권과 지갑이든 가방을 빼앗겨 아내와 돌이킬 수 없는 파탄으로의 여행이 되고 만 것이다. 원숭이숲에선 원숭이의 방식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의 이기심이 담긴 여행도 무리수를 둔 원숭이숲도 모두 그가 선택한 결정이었다는 점에서 그로 인해 발생한 과정상의 사건 역시 지혜롭지 못한 대처를 이미 예고하는 에피소드였다.

그렇다면 그는 우발적으로 전처를 죽이고 도망치듯 C국에 입국한 것일까. 칼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만큼이나 우린 서사를 통한 이 의문점에서 끝까지 자유롭지 못했다. 그 역시도 자신이 왜 파견근무를 순조롭게 시작할 수 없게 된 것인지 끝까지 의문을 버리지 못한다. 독자의 의문과 주인공 그의 의문이 두 개의 축을 유지하며 서사를 밀고나가는 작가의 집중력과 압박감이 어쩌면 쓰레기 현실에 놓인 주인공의 쓰레기만 못한 처지를 자꾸만 잊도록 만들었다. 우리로선 전처를 살해했을지 모를 당신이 선택한 길이니 마땅한 벌이 아니겠는가하는 공공연한 암묵적 냉담을 감추기 어려웠고 그로서는 하루아침에 자신을 허공에 뜨게 한 모기업의 무책임을 사회적으로 고발하고 싶은 분노를 억누르기 힘겨웠을 것이다. 즉, 독자인 우리가 계속해서 불편을 느끼고 불쾌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는 개인적 가해자이기도 했지만 사회적 피해자이기도 했기에 가해자로서 비난하기엔 피해자된 그가 우리의 자화상인 듯 했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매번 합법적, 도적적 테두리 안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잘못은 없는 것 같은데 누구도 잘하지는 않았다는 생각, 현실은 외롭게도 Mall로 상징되는 거대공중에서 빈 트렁크를 짊어지고 칼을 한손에 쥔 슬픈 당신과 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몰Mall과 몰沒의 공평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이 무작정 3인칭 '그'로 서술된다. 등장하는 인물중 가장 상징적인 명칭은 본사의 인사담당 '몰'로 생각된다. 어렵지 않게 대형쇼핑몰의 mall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사회와 沒落(몰락)한 인생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몰은 주인공 그가 C국에 입국하여 자신에게 최초로 전화를 한 인물로 그가 추락을 거듭하면서 계속하여 애타게 만나고자 했던 인물이지만 끝내 그의 실체와 만나지 못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더 의미심장한건 그가 우연히 주워 입은 티셔츠에 새겨진 이름 몰 그대로 부르기 쉽고 익숙한 이름 몰로 불려지며 살아가길 원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몰을 강조하며 그가 경비원에게 내민 명함에는 그가 찾던 몰의 이름이 박혀있었다. 이름을 보고 웃었던 경비원은 '이사람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나' 하는 우스운 사람에 대한 페이소스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는 진짜로 자기 자신을 찾고 싶었을테니 말이다.

그가 몰이 되기전에 이미 몰沒의 운명은 예정되 있었다. 그는 쓰레기 더미에서 기적적으로(?) 항공사 마크가 그려진 그을린 칼과 자신이 잃어버린 트렁크를 찾게 된다. 그 무딘 칼로 억지로 열어본 트렁크의 주머니엔 죽은 지 오래되어 화석처럼 굳은 쥐가 있을 뿐이었다. 마치 칼을 사용하고 돌아와 처참한 신세가 된 자신의 모습처럼. 그는 무딘 칼이나마 자신을 보호해줄 마지막 무기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칼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에 대한 기억은 다시 칼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확인하라는 마지막 경고였는지 모른다. 그는 하수구에서 쥐를 잡는 능력을 인정받아 우연히 근무하게 된 방역일을 하며서 마침내 그 무딘 칼을 사용할 기회를 얻게 된다. 불성실과 요령을 알게 된 주인여자에게 그가 느낀 감정은 쥐잡이 생계에 대한 위협이었으며 그것은 곧 생존을 결정해야 할 기회이기도 했던 것. 여기서 우리는 그가 칼에 대한 구체적 감각을 행위로 복원하는 장면을 확인하며 그가 느낀 안도감만큼이나 어떤 카타르시스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사람은 얼마나 자신이 한 잘못을 인정하기 힘든 존재인가. 때때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 우리의 기억체계는 의도적 망각이나 불의의 상실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모국을 그리워하지 않고 전처를 기억하지 않고 C국에서 남은 평생을 그런대로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 인생이 꼭 불행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전염병이 창궐하고 대지진이 일어날지 모르는 도시에서도 사람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쥐도 자신의 살길을 찾아 가끔은 인간의 공간에 침입하는 것처럼.

그는 칼을 버리고 공중전화를 택했다. 불을 밝힐 수 있고, 전적으로 혼자 있을 수 있고, 자신의 부재를 확인 할 수 있는 곳. 그는 회사로 전화를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확인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기대하며 과거를 추억하고 싶었을까. 혹시 앞으로 영원히 자신을 모른다고 해주길, 자신은 그 세계에서 사라진 사람으로 인식되길 원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 잊혀지는 것이 이곳 쓰레기 더미를 헤쳐 나온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실수로 약품이 얼굴에 흘러내려 역겨운 순간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코를 풀며 다시 일상을 준비한다. 자신이 투신했던 제 4지구 쓰레기 더미를 재개발해 만든 마트에 들러 먹거리를 구할 생각을 한다. Mall에 몰락하지 않고 그것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쥐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다시 인간으로서 살아가길 원했던 것이다. 쥐에게도 인간에게도 공평한 결말이었다. 잔인하도록 공평한 이 섬칫함이 이 책의 가장 불쾌한 미덕이었지만.

다시 피는 빨강

『재와 빨강』은 피가 넘치고 냄새가 역겨운 쓰레기의 외피 속에서 그러한 쓰레기를 조장하고 또 쓰레기를 헤쳐 나온 쥐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본성을 집요하게 쪼아대는 작품이었다. 거대한 시스템과 자본 앞에서 우리는 항상 무력하고 소심하다. 거리에 나가면 하루에 교통사고로 몇 십명이 죽는 다는 것을 알지만 자동차를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보행자라는 피해자도 될 수 있지만 운전자라는 가해자도 될 수 있는 것이 언제나 우리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린 누가 누굴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어쩌면 쥐의 삶까지도 비난할 자격은 없지 않을까. 쥐 역시 인간 때문에 못살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다만 우리가 쥐가 아니고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쥐가 아닌 인간만이 아름답게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염병과 환경오염, 난개발에 시달리는 거대 다국적 기업의 시대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는 존재들은 인간들 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비록 쥐보다 못한 쓰레기를 천연덕스럽게 생산할지 몰라도 그 쓰레기를 수거해 다시 인간의 영혼을 살찌게 할 꽃을 피울 수 있는 존재들일 것이다.

부랑자를 태우고 남겨진 검은 재가 바람을 타고 꽃잎처럼 허공에 흩어지던 인간같지 않음을 떠올린다. 한줌의 쓰레기 보다 못한 그의 영혼처럼 쓸쓸히 가벼운 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지독한 바이러스가 공기중에 꽃가루처럼 퍼져가던 벌건 불신과 두려움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태워야 할 것은 폐수와 오물로 넘치는 인간의 쓰레기 말고도 우리 안에 스며든 무심한 마음의 쓰레기가 아니었을지. 인간쓰레기가 아닌 쓰레기인간 이야말로 우리가 각자 태워야 할 마음의 부산물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태운 그 곳에 분명 검은 재가 아닌 붉은 꽃이 다시 필 것이라 믿고 싶다. 그것은 이토록 붉은 피의 댓가로 이루어진 인간들의 붉은 심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곳에 흐르는 피는 분명 인간을 아름답게 할 빨강의 꽃과도 같은 색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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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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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 비상구 (The eight points of the emergency exit)
- 스테레오 타입을 탈출하기 위한 방향을 중심으로 -


가끔 책을 덮고 나면 이 사람이 원래 뭐하던 작자(?)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른바 전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 처음부터 걸어온 길이 꼭 문학이라는 가시밭길 같지는 않아 보이는 사람들, 그런데 타고난 운명은 거부할 수 없어 자석에 이끌리듯 그만 방향을 바꾼 사람들. 최제훈이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지만 어쩐지 이 분도 그런 느낌이 든다. 나는 문학 평론가는 아니지만 독자라는 책값만큼의 권리로 서평분량만큼만 그의 뒷조사를 하고 싶었다. 허나 세상에 알려진 그의 이력은 두어 줄에 불과했기에 심플한 그 두 줄을 바탕으로 빈약한 상상의 문어발을 뻗을 수 밖에 없었다.

예전 직장생활에 한참 목을 메고 있을 그때 그 시절, 우리 팀에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다시 디자인이 하고 싶어 그 분야 이름있는 전문대에 늦깍이 학생으로 졸업 후 교수추천으로 입사한 친구가 있었다. 나이는 나와 같았지만 나는 이미 사회생활의 쓴맛 단맛 신맛을 골고루 섞어 마신 꽤 깐깐한 팀장이었고 그 친구는 이제 막 신입으로 합류했으니 그 친구나 나나 사이가 매끄러울 리가 없었다. 한번은 신입 여러 명에게 A3용지를 열장씩 나누어 주고 주어진 목차대로 페이지를 채워오라 숙제를 내준 적이 있는데 어쩐 일인지 꼬박 하루가 걸릴 분량을 혼자 반 나절만에 해결해서 내 앞에 들이민 신입이 있었으니 그치가 그치였던 것이다. 이 친구는 다른 친구들이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대충 해치우고 그걸 가지고 자신의 디자인 의도를 설명하는 식의 페이퍼를 작성하지 않고 종이와 자, 계산기를 가지고 남다른 시작을 한 것이다. 즉 최종으로 제작될 제안서 A3 용지의 레이아웃에 딱 들어 맞게 상하좌우 여백을 제하고 거기서 또 목적, 배경, 의도, 연출등의 칸을 정확하게 자로 잰 후 그렇게 나누어진 공간 안에서 한 항목당 10포인트의 글자가 몇 개가 들어갈 지 계산을 한 다음 다른 제안서에서 딱 그 항목에 부합하는 문단을 낱말 수에 맞추어 복사한 후 다시 그 위에다 몇 개의 단어만 바꾸어 페이지를 완성 한 것이었다. 물론 그림은 그 나머지 공간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일단 찾아서 붙여놓고 자신은 이렇게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이다. 하나의 틀을 만드는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 후 10페이지를 똑같은 방법으로 복제하니 제일 빠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페이지당 소요시간을 재어본 후 10페이지 구성의 총 시간을 예상, 아예 목표시간을 맞추어 놓고 그 시간안에 작업을 하였다. 그 친구가 주장한 것은 일의 '효율성' 이었다. 그렇게 일을 진행하면 한페이지 때문에 다음이 막히는 일이 줄어들고 전체 분량을 알 수 있으니 일이 되어가는 큰 그림이 한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항상 제일 먼저 퇴근했다.

물론, 그 친구의 아이디어가 항상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는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반복되는 일에 있어 항상 (시간이 걸리더라도)자신만의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다 내용을 삽입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결과의 퀄리티는 매번 보장할 수 없었지만 속도면에서는 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우리사이에서 그는 '퀵 페이퍼'라 불리었고 대세에 지장없이 빨리 제출해야 하는 문서는 그가 맡았다. 즉, 그는 동종업계에서 다소 늦게 출발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차별화로 업무의 효율성을 특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소설쓰기에 있어 자신만의 차별화를 확실히 구축한 작가의 마음 한 구석을 엿보는 기분이었달까.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라 그런지 이야기를 아주 효율적으로 경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 MBA 출신의 빈틈없는 CEO가 구조조정은 물론 M&A, 양자간 MOU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창의적인 비즈니스맨을 연상케 했다. 준비도 철저히 한 것 같았다. 8편의 이야기가 우연히 나왔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아주 잘 계산된 치밀한 계획에 의해 탄생된 프로젝트라는 생각, 늦깍이 신인작가의 이 계획성에 나는 감동받았다. 바로 지난주에 베르나르 키리니라는 벨기에 작가의 <육식이야기>를 읽고 올해 건진 최고의 수확이라고 떠들었는데 '장님코끼리 만지기'라고 어디까지나 지난주까지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첫 소설집이라고 하니 아마 목을 빼고 장편을 기대하는 독자들이 한창 많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우선, 내가 감지한 이 작가의 차별화 전략은 스테레오타입(Stereotype:고정관념)에의 탈피에 있는 듯하다. 이 부분에선 그가 기존의 소설 장르와 형식, 소재, 작법을 거부하고 애초부터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부러 찾아 그 부분을 집중공략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 다름의 완성도가 소름끼칠만큼 완벽하다. 어느 인터뷰를 보니 자신이 글쓰고 싶은 이유를 알고 싶어서 글을 쓴다는 대답을 하더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내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를 오래 생각해 온 사람으로서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소설가로서 소설행위가 되어 자신의 (작가로서의)정체성을 차별화하는 것이 역으로 글을 쓰는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다시 여지껏 억눌려온 많은 사람들이 행해온 방식에서 벗어나 이야기로서 자신의 무한대를 밝혀보고 싶은 욕구로 발전하지 않았을 지.

스테레오 타입이라 함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집단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는 비교적 고정된 견해와 사고'(네이버 백과사전)를 말하는 것으로 흔히들 고정관념이라 말한다. 이 스테레오 타입이 없다면 새로운 방식은 존재 하지 않는다. 대중들이 스테레오 타입을 의심없이 인지하는 이유는 일상의 질서가 더 평화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정관념 바깥에 위치하는 어떤 신개념은 일상의 바깥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로선 일상의 안쪽, 즉 기존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 효율성을 궁극의 골라인에 위치시킨 학문,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찌보면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분야로 눈을 돌려 자신의 전공인 효율성을 적용한 지점은 바로, 소설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었다. 기가 막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무기를 가지고 자신의 한계를 넘는 방법이 소설의 효율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그것도 아주 최대한 효율적으로 진행한 후 결과적으로 전에 없이 효율적인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고로 이 작가는 자신을 무너뜨리면서 자신을 쌓아나가는 흡사 자신의 작품들과 아주 일치하는 일을 한 것이다. 이 책의 구성 메카니즘이 곧 이 작가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는 총 8편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는데 마지막 이야기는 앞의 일곱 편의 후기처럼 정교하게 짜맞춘 작법을 휘날레로 장식하였다. 책을 덮고 나면 마치 희대의 사기극 완결편처럼 읽는 자의 카타르시스를 충분히 만족시켜주며 뇌리속엔 모든 작품이 '기존의 모든 것에 대한 탈피'로서 기분좋은 이야기 현상으로 남는다. 굳건히 닫혀있던 8개의 비상구가 하나씩 열리더니 마침내 동시에 열어 젖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비상구라는 것이 모두 동시에 열리면 그건 이미 탈출이라기 보다는 개방이나 환영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팔방(여러 방향: in all directions)향의 탈출구가 오픈되는 이 현상을 무어라 해야하나. 이야기의 해방? 서사의 자유? 구조의 혁명? .... 탈출을 이룬 그의 방향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Gate 1 ... 출발, 릴레이 여행 ! 「퀴르발 남작의 성」

첫 번째 이야기는 1697년부터 2005년까지 대략 3백년간의 이야기 발전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 '이어달리기'라 할 수 있다. 한 주자가 다음주자에게 바톤을 넘겨주는 형식이다. 6월 9일에 일어난 총 12개의 에피소드들이 이야기 조각으로서 나열되며 각각의 조각은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모아 놓으면 하나의 그림이 된다. 이야기의 원 순서는 최초 발생한 하나의 사실이 시발점이고 그 사실은 구전설화가 되더니 나중엔 소설로 발전하고 소설은 영화로 영화는 리메이크되는 식이다. 그 영화들은 강의실로 리포트로 모방범죄로 기자의 비평으로 관객의 감상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그때그때 전달자와 수신자간의 상호합의 혹은 일방통신에 의해 변형, 확대, 왜곡, 재생산되는 과정을 쉽고도 편하게 확인할 수 있음이 이 작품의 안 보이는 미덕이라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미국, 일본, 한국으로 건너오는 이야기 릴레이의 바톤에 해당하는 재료(source)는 '퀴르발 남작의 성'에 살고 있는 퀴르발 남작에 관한 믿을 수 없는 소문이다.

형식도 소재도 모두 신선했고 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도 분명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6과 9라는 숫자는 이야기를 뒤집어 보거나 역추적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 있는 듯하고 서사의 전개가 시간순이 아닌 것은 이토록 이야기는 순리대로 체계를 가지고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우발적인 사건에 의해 곳곳에서 진행되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변형에는 항상 이야기를 전달받아 그것을 재생하는 인간들의 이기심이 핵심에 자리하고 있어 각자 자신들에게 유리한 편으로 뼈대와 살점을 재구성하여 이야기 자체의 진심을 무시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작가는 이야기의 진심이 곧 우리 사는 현실에 진실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가 해체되고 축적되는 과정에서 지금 우리 앞에 도달한 이야기의 결과만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곡된 진심이지만 현실에 용인되는 가치만이 진실이라고, 이야기가 거짓말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원래 이야기한텐 미안하지만 영원히 살지 않는 우리로선 뼈아픈 진실이자 이해될만한 진심이었다. Originality 보단 Utility에 기우는 것이 퍼져가는 이야기의 속성인 것일까. 문득 우리 사는 오늘날, 진짜라고 믿는 진실이라는 것이 오늘까지의 이야기에 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Gate 2 ... 미스터리 다시짜기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올해의 문제작으로도 알려진 이 작품이 미치도록 반가웠다. 나는 이 작품이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내 맘대로 내 기준에서 완성도다. 읽는 내내 이 작가 머리가 너무 좋은 거 아닐까...감탄해 마지 않았다. 우선 문체는 홈즈가 왓슨이라는 옛조수에게 보내는 편지글이었다. 고전적인 우아함이 인상적인 말투와 끝까지 지적인 면모를 유지하는 홈즈의 캐릭터가 서사속에서 막대한 집중을 발휘하며 이야기가 끝남이 아쉽도록 만들었다. 서사의 줄기는 셜록 홈즈가 권태로운 일상에서 흥미롭게 발생한 살인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과정을 고백하는 것인데 피해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창조주인 아서 코넌 도일이었다. 소설속에선 홈즈가 전혀 코넌 도일을 모르는 것으로 등장하며 결국 홈즈는 자신을 탄생시킨 작가의 죽음을 추리하는, 우리로선 꽤 당황스런 농담의 시작인 것이다. 게임은 이제부터 인데 처음엔 타살로 추정했다가 여러 가지 추리에 의해 코넌 도일이 자살했음을 밝혀내는 과정이 곧 홈즈로선 이 사건을 묻어야 할 사유가 된다. 작가는 도일경이 설치한 함정을 밝혀내는 홈즈의 논리를 똑같이 셜록 홈즈라는 소설의 기법을 사용해 서사를 밀고 나가며 이미 알려진 소설과 작가, 주인공을 가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뻔뻔하게 창조해 낸다. 여기서 더 소름끼치게 아이러니한 것은 사람들이 허구 속 탐정(실제소설에서 자신)에 열광할수록 창조자(도일경)의 실존적 자아는 위태로와져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 방법은 자살밖에 없다고 결론내린 부분이다. 결국 도일경의 죽음은 실제 셜록 홈즈라는 소설의 주인공, 즉 자신(도일경)이 만든 인물 때문에 죽은 것인데 소설바깥 우리가 보기엔 자기(실제 소설속 홈즈)가 죽여 놓고 자기(이야기속의 홈즈)가 이유를 찾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소설화하는 이 작가의 고뇌가 그대로 반영된 듯한 홈즈의 독백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만든 환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침몰한 도일경과 자신을 매혹시킬 현실에 목말라 환각제에 의지한 나'는 곧 이야기속 홈즈와 작가를 말한 것은 아닐까. '덕분에 인간의 상상력이 감히 미치지 못하는 속도로 무한히 재창조 되는 현실 속에서 다시금 느끼는 자유'는 작가의 권태로운 현실에 다시금 피가 돌게 해주는 활력제와도 같은 소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미스터리를 다시 자신의 의도대로 조작하고 유용한 홈즈와 이야기를 다시 짜맞춘 그가 중첩되면서 홈즈의 숨겨진 진실이 곧 작가의 무기가 되었음을 서늘하게 자각하게 된 작품이었다.

Gate 3 ... 기억의 숨바꼭질 「그녀의 매듭」

이 작품은 이야기로서의 통속성은 가장 강하면서도 서사의 연결고리가 탄탄해 어떤 이야기보다도 작위적이고 거짓말 같으나 그 드라마틱한 내구성으로 가장 진실된 메시지를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자기보호를 위한 선택적 방어기제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분명 가족 모두가 같은 공간에서 주고 받은 대화인데 그 중 한사람만 당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모두들 그가 한 말을 기억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전혀 그 순간을 자신의 일생에 있었던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은 아버지의 부도로 가족 모두가 길거리에 나앉게 되자 모두 모여 다같이 죽자고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는데 그만이 '나는 죽지 않겠다' 말하며 뛰쳐 나갔고, 그는 그때의 충격으로 아예 그 순간을 기억에서 삭제해 버린 것이다.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순간의 충격과 상처는 남아 언젠가는 다른 형태로 표출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이처럼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기억, 선택하지 않은 삶이 꽁꽁 묶여진 매듭으로 뇌 속에 숨어 있다가 미래의 어느 순간 무의식의 변형된 형태로 부활하며 원치 않는 곳에서 그 매듭이 풀려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 어느 정도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과거의 어느 시기, 어느 장소에서의 기억이 마치 케? 한 조각처럼 잘려졌다가 모든 성분이 허물어진 원형질의 파편이 전혀 최초의 물질을 알 수 없도록 어느날 갑자기 기억체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야기는 차화연이라는 디자이너가 오랜 친구였던 성호라는 남자에게서 우정이 아닌 사랑을 느끼게 되기까지의 과정속에 그녀의 어두운 기억의 매듭이 풀어 헤쳐지는 구성이다. 화연은 성호의 여자친구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어느날 인터넷에 떠도는 이현정이라는 이름의 여자 사진과 성호의 사진을 합성해 그의 여자친구를 떨어뜨리는데 성공하지만 사진속 주인공 이현정이 실제 현실에 나타나 진짜 성호의 애인이 되버리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비밀은 화연이 복수의 용도로 선택한 이현정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실제 자신의 기억속에서 서로 치명적인 비밀을 공유한 친구사이라는 것에 있었다. 현정과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화연은 과거의 인생대본에서 선택적 삭제에 의해 상처를 최소화하며 살았던 것. 그리고 기억의 그림자는 끈질기게 오늘 살아가는 현실에 투사되며 피할 수 없는 새 대본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며 자신이 아닌 자신을 자신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또한 기억의 이야기를 첨가하고 삭제하는 이야기 재구성의 기본원칙에 기초한 진지한 이야기 였음이다.

Gate 4 ... 1인 4역 모노드라마 「그림자 박제」

화자의 1인칭 고백이 진술서처럼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병력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의 전모를 술회하는 듯하고 병력이라 말하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정신병이 의심되는 사람일 것이다. 내안의 또 다른 나가 부지런히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이야기. 그런데 또 다른 나는 한명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현재 회계사이며 기러기 아빠로 지내고 있는 강철수라는 남자가 왜 자신안에 거칠고 제멋대로인 한량 '톰'과 소심한 자폐증 예술가 '제리'와 배관공이자 목수인 아버지를 둔 친구 '강우빈'을 키우게 되었는지 알게되며 중요한 건 살인사건이 아니라 한사람의 과거에 숨어있던 그림자의 존재였음을 알게된다. 흔히들 파란만장한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쓴다면 한트럭일 것이라 농담을 하는데 이 작품은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오늘의 살인자로 살아가게 되었는지 마치 녹취록을 듣는듯 주인공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작가는 누구나 한번쯤 자신이어야 하는 자기,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 외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은밀한 욕구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기 역시 어느날 갑자기 뜬금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슬픔과 충격, 상처와 상실속에서 자라난 자신의 그림자일뿐이라 말한다. 이 분열된 자아가 미스테리를 유발하고 이야기를 조장한다. 주인공이 절대 과장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장을 읖조리는 것에 상당한 설득력이 감지되며 독자가 이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자신을 향한 거울같은 연민이 아닐까. 마치 어느 유명한 연극배우가 몇 시간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허물고 쌓는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어떠한 살인범도 이 주인공처럼만 이야기 한다면 달리 유능한 변호사가 필요 없어 보일 정도로 연출이 감동적이었다. 소설가의 법적인 능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Gate 5 ... 반성문의 업그레이드「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

이 작품은 마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이야기다. 기자가 월간 '마녀스타킹'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기사형식의 글로 흡사 인문학 교양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있는 사실을 소설로 뻥치기 하여 교양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작가의 유머와 재치가 경이롭기만 했다. 고찰이 소설을 진행하는 키워드이니 사유의 힘이 매우 강박적이다. 기자는 사회현상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시선이 매력이자 특기인 사람들이므로 마지막에 궁극의 질문도 회피하지 않는다. 마녀패션의 유행에서 시작된 마녀의 출현배경,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마녀의 본령 및 역할, 그들이 인간세계로 넘어와서 본모습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서술하는 과정이 서사의 핵심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들이 '마녀사냥'을 자행해온 집단이었음을 꼬집는다. 그러니 실은 마녀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마녀사냥을 일삼아온 인간의 심리 고찰이 맞을 것이다.

작가는 신화나 구전된 이야기에서 스토리의 허점을 예리하게 발굴해 내어 그 지점에 자신의 상상력을 불어 넣는 틈새전략을 구사하는데 그 결과 대박의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마녀를 배신한 인간과 마녀의 개념을 훼손하여 자신들의 욕망에 투사한 인간들의 심리에는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할 혐의를 무조건 뒤집어 씌우는 대상으로서의 희생양이 필요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형벌까지 즐기던 인간의 그릇된 이기심도 함께 질문한다. 그럼으로 마녀외에도 우리가 고유의 전통으로 착각하고 있는 스테레오타입의 개념들은 그 왜곡을 본질로 하고 있으며 왜곡의 중심에 인간이 자리잡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차분한 목소리가 서늘하게 다가왔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마녀처럼 우리의 고전들속에서 스테레오 타입으로 정형화된 '계모'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장화홍련전'과 같은 악독한 계모와 불쌍한 본처자식 구도에 익숙한 많은 고전들이 실은 철저한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힘없는 후처들을 앞세워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한 폭압장치였으며 결국 '사악한 계모의 스테레오타입화' 작업의 일환이었다는 시각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마녀나 계모나 인간의 탐욕과 모순에 의해 본질이 왜곡되기는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아...우리는 왜 우리 자신의 잘못을 누군가에게 전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일까. 마녀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내가 그동안의 오해를 반성하게끔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물론, 이 사실도 오해일 수 있겠지만.

Gate 6 ... 이야기로 용서하기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가장 공감가는 이야기였다. 마리아 탄생설화에서부터 백미인 러브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우리들 대다수의 이야기라해도 무방했다. 자아의 그림자가 투사된 또 다른 자아가 마리아라는 정체불명의 인물로 묘사된 것이므로 앞선 이야기인 「그림자 박제」와 이야기 계보가 같다 할 것이다. 우리는 학교, 직장생활에서 자신이 본 사람, 겪은 사람 할 거 없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달할 때 사실을 그대로 전하기보다 과장과 첨삭이 자신도 모르게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술 더 떠 그 친구의 행동에 슬며시 내가 바라는 말, 내가 해보고 싶었던 행동을 추가하다보니 그 친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중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던 적은 없을까. 더 나중엔 있지도 않은 누군가를 자신의 아바타로 만들어 아바타의 일거수일투족을 내 맘대로 구성해 대화 속에 존립, 유지시킨 적은 없었을까.

드라마 촬영감독이며 이혼남인 성민과 결혼을 앞둔 대학후배 수연이 자신들의 아바타를 가공한 주인공들이다. 대화의 공통분모가 없어 수연이 가공한 마리아는 우리들 온갖 욕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며 질투와 비난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짜피 없는 인물이므로 한명의 캐릭터로 존재치 않으며 연출자의 작위적 센스에 따라 급변하는 성향이 있다. 어짜피 뻔한 드라마를 찍는 성민의 현실도 드라마 못지않게 드라마틱했지만 마리아는 수연이 연출한 드라마 주인공이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주는 센스아닌 센스는 혹 뻔해도 다음이 궁금해지는 시청자의 심리가 아니었을까.

우린 가끔 가짜에 의지하며 진짜를 유지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그 진짜가 자신도 느끼지 못한 가짜임을 알았을 그때, 자신을 용서하듯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어진다. 마리아를 용서하는 것은 마리아를 앞세운 수연을 용서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그녀에 의지한 자신을, 나아가 자신을 속인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일테다. 그러고 보면 가짜가 유용할 때가 있다. 인간은 모두 떠나야만 혼자임을 깨닫는 존재들이기에. 거짓을 확인해야 진실을 깨닫는 습관이 있기에.

Gate 7 ... 오해는 설득의 배경 「괴물을 위한 변명」

나는 이 작품을 <현장 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이라는 소설집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은 단연 많은 작품들중 가장 참신함으로 남았다. 달랐기에 선뜻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이렇게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이야기라는 것이 자체 생명성을 가지고 진화한다는 생각을 갖게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실제소설과 소설의 작가를 주인공으로 한다. 앞선 작품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에서도 보았듯이 작가는 한 가지 고착된 생각을 추적해 그 허점을 자신의 소설 실마리로 끌어들이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듯 하다. 작가는 메리 셰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분석, 재해석하는 과정을 서사로 이끌어 가면서 마녀처럼 프랑켄슈타인이 괴물로 인식되기까지의 그 변질된 진실을 허구로 구성해낸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괴물에 대한 오해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사이 중요한 인간의 역할이 있었다. 즉, 괴물이라는 환상에 대한 개념 사용여부와 그 목적및 이용행태는 모두 인간의 몫이었다는 것.

첫 번째는 이야기의 전승과정에서의 진실의 누락및 수정 여부를 추적, 질문한다. 이른바 '카더라'통신으로 서술된 괴물이 빅터에게, 빅터가 월턴 선장에게, 선장이 사빌부인에게, 사빌부인이 메리  셀리에게, 셀리여사가 우리에게....그리고 마지막 작가가 나에게... 그리고 두 번째는 허구의 절정에 빅터의 동생 에르네스트를 내세운다. 작가의 분신으로 여겨지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동생은 형의 괴물창조 동기에 대해 신이 부여한 정체성 외에 또다른 자아, 즉 형의 광기와 죄의식, 공포와 분노, 절망의 총체가 투사되었음을 주장한다. 박사의 괴물적 자아가 괴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주장은 곧 인간들, 우리의 괴물은 무엇이냐고 묻는 의미심장한 설득장치로 여겨진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프랑켄 슈타인이라는 괴물이 결국 우리안의 온갖 추악한 욕망과 허영, 광기의 조각들을 한데 묶어놓은 또 다른 나의 집합체였음을 환기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작품을 덮으면서 문득 작가의 괴물은 소설이라는 문학으로 포장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소름끼치게 전해졌다. 그의 변명은 결국 괴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아니었을지

Gate 8 ... 예술로 사기치기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

분리수거된 쓰레기의 재활용장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총출동해 갑론을박을 펼치는 이야기는 어느 이벤트 행사장에서 해외유명 영화나 광고, 다큐에서 뽑은 명장면들로 다시 재구성된 편집영상물과도 같았다.

퀴르발 남작의 성에 모인 주인공들은 자신의 캐릭터를 십분 살려 의미심장한 대사를 쏟아내고 그와중에 시체조각들을 발견해 한데 모아놓는다. 여기서 작가는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 조각을 꿰매어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보따리로 만들어 내는 자신이 소설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내비친다. 사체의 조각들이 짜맞추어 온전한 사람의 형태가 이루어질수록 이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괴이한 형태가 되지만 그것들은 또 직소퍼즐처럼 아구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소설들처럼. 홈즈는 발견된 사체조각의 숫자에서 자연계의 일반법칙을 설명하는 피보나치 수열을 발견해내는데 이것은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황금비율이라 극찬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자신의 소설이 완벽하다는 이야기?) 더불어 발견되지 못한 제 8항(21)에서 제외된 두조각, 즉 머리와 성기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탐정의 센스까지 발휘한다. 퀴르발 남작이 오픈하라고 한 자신의 책장 너머엔 아마도 중성이 아닌 여성, 남성의 독자들이 우르르 모여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허구라는 안전그물안에서 자신의 의문점을 마음껏 풀어헤쳤듯이 독자인 우리도 자신이 조작한 허구안에서 무한한 호기심을 펼쳐보라는 메시지로 생각된다. 독자인 우리들중 누군가는 이 작품을 이야기 조각삼아 자신처럼 이야기를 재생산할지 모를 일이다. 영특하고도 재치있는 미덕이 아닐 수 없다. 희대의 사기꾼의 기술력이 전수되는 순간임에 틀림없다. 한국문학에서 역사적 순간이라 해야 할까.


비상구로 돌아오다

이야기를 추론해 내는 과정 자체가 소설인 작품을 신나게 독파했다. 읽는 즐거움은 물론 생각의 재미를 선사하는 독특한 독서였다. 창의적 영재만들기 프로젝트에 출품된 발명품을 만난 듯하다. 새롭지 않다면 신인의 의미가 없고 신인이라면 새롭지 않고서는 주목받기 힘들 것이다. 이 작가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생산자 입장에서의 소설 말고도 다른 형태로 인간에게 전달되어온 수많은 이야기에 투사된 인간의 욕망을 파헤치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이 곳 자신이 알고 싶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원작은 인간의 편의와 욕심이 투사되어 변형되었다. 하지만 진심은 왜곡되어도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오늘을 사는 것은 옛날 이야기의 교훈을 얻고자 함이 아니다. 변형되어 도착한 이야기에서 조차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의문을 나누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서로 인간됨을 고찰하고 그럼으로 위로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야말로 또 다른 내일에 도착하여 내일의 진실이 되지 않을까. 진실을 변형하면서도 진실은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스테레오 타입은 인간의 편의와 질서를 위해 고안된 장치이다. 그러나 스테레오 타입이 인간을 옥죄고 불편하게 할 때 일상의 그림자는 이야기로 탈출을 시도한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스테레오 타입이 힘겨워 이야기를 생산하고 그속에서 비상구를 찾는다. 작가가 개방한 여덟 개의 비상구는 다시 우리 삶의 스테레오로 돌아오는 소중한 환송로였다. 다시 비상구가 열릴 날을 기대해 보겠다. 그땐 출구와 입구가 동일한 한 개의 게이트이길 바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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