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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에게 날개 달아주기 - 이외수의 감성산책
이외수 지음, 박경진 그림 / 해냄 / 2011년 1월
평점 :
어느 아침에
정말이지, 가끔은 사는 게 의미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누가 사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만이 살아가는 이유라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어쩌자고 매번 실종된 生의 의미에 절망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가만 보면 이런 기분은 들끓던 무엇이 한차례 휙 지나가고 난 후 일 때가 많다.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극심한 슬픔에 빠져있을 때보다는 그것을 겨우 극복하여 막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려 할 그 무렵에 문득 자살의 유혹에 빠진다는 충고를 하고 있다. 그토록 지겹고 막막했던 어두운 터널을 막 빠져 나오려고 하는 그 순간 그동안 부여잡았던 절망도 나름 제 살같은 정을 키워온 것일까. 점차 다가오는 한줄기 빛이 순간 두려워질 때가 있다는 걸 이대로 어둠을 벗삼는 것도 견딜만하다는 걸, 온몸으로 체감한 그때 주춤하는 발걸음에 당황한 적 나 뿐일까. 내 경운 어떤 일에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 낸 경우 짧은 보람 후 긴 슬픔이 찾아오는 만성병을 앓아왔다. 지난 시절 기계처럼 도전과 성과지향적인 삶을 살아온 生의 이력이 고약한 습관을 창출한 것이다. 때마침 요즘처럼 환절기가 찾아 온다거나 졸업과 입학 시즌을 맞아 새출발을 다짐하는 계절이 닥치게 되면 내 生의 사는 의미는 여지없이 실종되는 국면을 맞이한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시 피는 꽃을 거부하고 겨울외투를 벗지 못한다. 지난 겨울 유래없는 혹독한 추위에 얼마나 기다려온 봄이었나. 기다릴 땐 모든 바램이 봄 하나이더니 막상 오신다 하니 고개들어 사는 의미를 따져든다. 이런 나를 비웃자니, 왜 이리 눈물이 맺히는 걸까.
신년을 맞아 지난 한달 간 나는 좀처럼 책을 집어 들지 못했다. 타의가 아닌 자발적 의지로부터 내 마음을 당기던 책도 없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 글도 쓰기 싫었다. 억지로라도 글을 쓰자니 그런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인가 이깟 글이 무엇을 바꿀 수 있나 하는 반감이 몇 차례나 밀려들었다. 애초부터 책 읽고 글쓰는 것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에까지 이르렀다. 그럴 무렵 어느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요절소식을 접했다. 막 바닥을 치고 올라올 무렵 두려움에 주춤거릴 때 다시 바닥으로 치닫기에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사연일랑 월세 20만원 짜리 지하 단칸방에서 지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단다. 부끄럽지만 남은 밥과 김치가 있으면 부탁한다는 그녀의 쪽지를 보고 나는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죽도록 가난해야 살아있는 글이 나온다고 누가 그랬던가. 죽을 만큼 절박해야 죽여 주는 감동을 줄 수 있다 누가 말했던가. 모두 성공하고 인정받아 한번쯤 부와 명예를 한껏 쥐어본 사람들이 아니었나. 일이 없어 누가 알아주지 않아 자살한 게 아니라 밥이 없어 병들어 굶어 죽었다는 사실이 빌어먹을 만큼 눈물이 났다. 뒤늦게 관할 지역 공무원은 사정을 알았다면 쌀과 보조금을 6개월은 지원받을 수 있었다고 아쉬워 했고 뉴스에선 영화산업 전반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관심을 받지는 못하였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애꿎게도 성공한 작가들이 미워졌다. 늘상 가난에 익숙하라고 나또한 그랬다고 떠들어댄 작가들에 신물이 나 욕지기가 끓어 올랐다. 젊어서 한 고생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조언에 피를 튀기고 살을 태우고 싶었다. 굶어 죽기 싫어 꿈을 버리거나 직업을 바꾼 사람들에게 모종의 우월감을 느꼈을지 모를 그들에게 화가 나서 나는 한 이틀 방황했다. 나이값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오랜만에 화가 나다니, 마침 그런 나와는 일절 상관없다는 듯 봄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실컷 욕하기 위해 집어든 책이었다. 알려졌듯이, 이 책은 완전 신간이 아니다. 옛날의 글과 이야기에 요즘의 글과 그림이 더해져 리메이크 된 책이다. 완전 에세이라 하기엔 형식이 걸리고 잠언집이라 하기엔 그의 독창이 아깝다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출간이 『아불류 시불류』(2010)가 마지막이길 바랐다. 몇 년 전부터 등장하던 그가 제시한 소통법, 생존법, 소생법의 언어들을 나는 이미 청춘의 시절에 미치도록 만나왔기 때문이다.(물론, 그게 다 그거 아니냐 말하면 발끈하실 작가를 모르지 않지만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도 하셨다, 바로 그 작가님이) 그의 주옥같은 초창기 에세이 『말더듬이의 겨울수첩』(1986)이나 『감성사전』(1994)에 무릎을 탁탁치며 보라색 펜으로 옮겨 적던 시절을 굳이 생색내고 싶지는 않다. 에세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설들, 이를테면『황금비늘』(1997), 『벽오금학도』(1992)등을 훨씬 뒤에 읽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유희, 역설과 모순의 문법에 내 이십대 감성의 시원始原을 고히 보관하고 있는 경우였다고, 만 밝힌다. 내 청춘은 분명 그의 언어로 전율한 한 시기가 있었으며 그의 글투와 닮고 싶어 문장을 외우기도 그의 사인과 유사한 사인을 그려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글과 어우러지는 꽃그림에서 정말 꽃향기가 나는 요즘의 책들을 문학성과 작품성이라는 잣대로 행여나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것도 그냥 좋았다. 그만큼 위로받았고 소장용으로서도 가치는 충분했기 때문에. 그런데 얼추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부터 시작된 이 감성여행이 몇 차례 시리즈로 반복되면서 나는 책꽂이에 꽂힌 그에게 더 이상 불시에 찾아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어쩐 일인지 그는 서점보다 TV에서 더 자주 뵐 수 있었는데 그것도 독자와의 세상과의 진보된 소통이라 말하시면 나는 목이 메일 테다. 트위터에 몇 마디 하시면 금새 포털 메인에 기사화되는 그의 여론장악력(?)은 이미 대중일반에게 언어권력이 되고도 남았다. 그렇게 몇 마디 하신 기록으로만 엮어진 촌철살인집이 작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나는 감히, 그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가 시도하는 대중과의 소통여행을 중단하길 바랐다. 감성마을이 아닌 고독한 외딴섬에 정박해 칩거하시길 바랐다. 출간의도와 목적이야 출판의지를 가진 사람들과 다를 수 있겠지만 최종적인 책임은 언제나 이외수의 도장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때 외수마니아층에 속한 적(?) 있었던 내가 이젠 좀 다른 방식의 위로를 원한다 고백하면 이기적인 것일까.
그랬다. 일단은 반가운 마음에 손에 넣었지만 내심 이런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책을 펼쳤던 나는 신기하게도 앉은 자리에서 다음날을 맞이했다. 시나리오 작가의 부고 소식에 화가나 그 화를 이기지 못하고 성의없는 손길로 들쳐본 책이었다. 그런데 덮고 나니 사뭇 비겁하게도 나는 달라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괜스레 누군가에게 미안했고 변심을 확인한 내 스스로 면목이 없었다. 태양은 어제 그대로의 태양이지만 당신은 어제 그대로의 당신이 아니라는, 새롭고 아름답고 행복하라는 그의 마지막 인사에 그만 울컥 한 것이다. 가만 꼬리를 내렸다. 설명하고 싶다. 그러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 한잔 걸치고 연락도 없이 어느 은사님을 찾아 갔다고 하자. 앞뒤도 없고 맥락도 없이 왜 살아야 하느냐 선생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 가시냐 물었다 치자. 그걸 알기 위해 나도 살아간다거나 그건 죽을 때가 되나야 알아진다거나 그런 답은 하지 마시라 무례를 떨었다 치자. 선생님 왈,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물어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이 오면 해주었고 해주고 싶은 말들을 다행히 책으로 엮었으니 심심하면 읽어보게. 실은, 나도 잘 모른다네. 결국 당신 책이나 읽어보라는 뜻이군, 하며 돌아와 한잠 실컷 자고 난 후 어느 봄날, 변덕같은 꽃향기에 맑은 정신으로 책을 펼쳤다 치자. 그래, 정확한 답은 모르겠는데 여튼 살.아.가.야.지. 다시 또 아침이 되었으니 하고 수줍게 책을 덮었단 말인가. 이제, 실은 커피한잔 하며 도사 자격증이라도 따셨을까 갸우뚱거렸다 말하자. 내 지금 이 기분을 간지러운 희망이라거나 급작스런 새출발이라고는 둘러대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살아가야지, 그것만은 확실하지 않겠나. 왜 사는 지 물었다고 콕 집어 답을 주신 건 아니지만 그래, 다시 살아가야 겠다 일어서는 아침이면 된 것 아니겠나.
어떤 비밀을
이 책은 뜬금없는 질문과 쉬운 예시, 그리고 짧은 해답으로 구성된 일종의 인생상담집이다. 누가 물어본다 해도 답이 없을 것 같은 질문과 옛 선인들의 에피소드, 미국과 유럽의 유명인사들의 지혜, 작가의 칼같은 결론으로 이어지는 간결한 구성의 반복은 익숙하고도 친근한 리듬을 제공한다. 연애로 치면 밀고 당기는 기술이 한 수 위라는 말씀이시다. 막간을 이용해 여간해서 볼 수 없는 감성시 십 여편이 소개되어 있는데 청승맞게도 나는 몰래 소리내어 낭독도 해보았다. 알고들 있을까. 80년대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과 서정윤의 '홀로서기' 이후 시집을 사지 않았던 나는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선 절대 이런 시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지난 시절 바람에 으스러지던 '갈비뼈'와 눈물로 송송히 맺히던 '피망울'과, 지겹게도 앓아온 문학의 '폐병'을 반갑게 재회한 기분이 들었다. 이 책에서 어느 부분보다 설레었던 건 내 한 시절을 시리게 저장한 가슴속 시어들이었기 때문일까. 또 무엇보다 '태산같은 지식은 티끌같은 깨달음만 못하다'는 그의 조언대로 광대한 지식이 아닌 속깊은 지혜로 무엇이든 답하는 선문답의 묘미는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것이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삶의 '의미'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전하는 에피소드는 '정직'과 '진실'의 실례가 많았고, 그가 답하는 결론은 내가 가진 '마음' 하나, 내가 만들 수 있는 '사랑' 하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번 리메이크 작품은 어찌 보면 윤리 교과서의 목차처럼 모범적이고 세계문학의 목차처럼 고전적이다. 문체와 문장은 가벼워 보이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느 때보다 묵직하고 일방적이다. 하늘을 날아갈 날개는 더없이 가벼워야 하겠지만 그것이 날아가게 할 대상은 코끼리처럼 막중했기 때문일까.
흡사, 진주를 탄생케 할 生의 비법이라도 꼭 전수하고 싶었던 것일까. 페이지를 넘기며 엄마의 잔소리처럼 반복되는 작가의 끈질긴 의지를 느끼고 말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자신에게 온 모든 젊은이에게 다 주고 싶어 애쓰는 그 마음 하나, 말이다. 하여, 내게 이 책은 진주속에 들어 있는 생명과 아픔을 다시금 상기하고 깨우치는 일이기도 했다. 진주는 어떤 보석보다도 영롱하지만 그것이 잉태되는 환경은 병들고 썩은 조개나 굴인 것이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기생충이나 모래가 조개의 체내로 침입하게 되면 조개는 그 방어기제로 분비물을 배출하지만 바로 이 진주질이 모래를 에워싸면서 제 살속에서 생기는 것이 진주인 것이다. 격심한 부패의 결정으로 탄생된 것이 진주의 생명이고 아픈만큼 빛나는 것이 진주의 광채이다. 뜻하지 않은 이물(異物)을 품어 이상(理想)을 직조하는 삶. 작가는 이 한 알의 신비스런 진주가 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삶의 부패와 투쟁을 견뎌내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설득하고 있었다. 나는 책을 덮고 불현듯 온갖 버러지같은 고뇌와 고통스런 불운속에서도 빛나는 생명이 창조된다는 진주의 기적을 떠올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내 이야기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의 중요성은 고통속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라던 그의 대답은 생명을 침입해 오는 통증과 그로 인한 고통없이는 生의 진주를 얻을 수 없다는 뜻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곧 '혹독한 추위가 없으면 뿌리가 강인해질 수 없고 찌는 듯한 더위가 없으면 열매가 여물 수 없다'는 진리와도 같았고 '예술가는 작품이라는 진주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라도 자기 자신의 생활에 상처를 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와도 상통했다.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고뇌에 찬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색깔을 혼합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는 걸 그 살과 뼈가 깍이는 아픔으로 축적된 것이 소설이고 시라는 걸 그제서야 통감하며 끄덕였다.
그는 이렇듯 삶의 의미에 '고통'이라는 화두를 던져놓고 구체적인 실천이념으로 '그릇'론을 펼치셨다. 상대가 아무리 사랑을 주려해도 그릇이 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바로 자신이 가진 그릇의 크기만큼만 받고 나머지는 그릇 밖으로 흘려보내게 된다고 말이다. 그는 마음 속의 그릇으로 간장종지를 키울 것인지 김칫독을 키울 것인지 또박또박 묻고 있었다. 미처 내 그릇을 가늠하지 못한 채로 사랑은 적고 세상은 야속하다 늘 주는 쪽의 모자람에 투덜댄 내가 부끄러웠다. 이 책은 그러한 각자의 그릇을 키우기 위해 가져야 할 자세를 설파하는 교본이었다. 만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만물로부터 자신을 사랑받게 만드는 일이며, 내 마음 밖에 있는 것들을 모두 내 마음 안으로 불러 들여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는 것이 그릇을 키우는 기초 비법이라 전한다. 허영이라는 이불, 사치라는 꿈, 위선이라는 배우자, 방황이라는 자식에 그만 불치병이 걸린 자들의 병인은 육신과 재물에 대한 소유욕때문이라고 일러준다. 죽는 날까지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어딜 가도 내 것인 것은 마음 하나 뿐이라고 가르친다. 돈이 많으면 자유가 얻어 질 것 같아도 오히려 그의 노예만 될 뿐이며, 구름이 무한히 자유로운 것은 자신을 무한한 허공에다 내버렸기 때문이라 일갈한다. 만사 살기 편한 환경은 바로 죽기도 편한 환경이기에 고통이야 말로 生의 의지를 존속케 하는 촉매제라고. 정말 오래 살고 싶거든 더 오래 고통을 가지고 있으라고. 글을 쓰는 일은 도를 닦는 일이므로 머릿속에 있던 사실이 가슴속에 들어와 발효된 진실로 적은 내 글 한 줄이 죽어가는 누군가의 영혼을 구할 수도 있다고. 어두운 과거를 뒤에 두고 밝은 빛을 향해 한 걸음 걷다보면 마침내 여명이 빛나는 것이라고. 아무리 길었던 밤도 아침을 맞이하며 한평생 어둠만 지속되는 인생은 없기에 다만 지금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라고. 이렇듯 누구나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선 더 큰 '고통'을 껴안아야 하며 그러한 고통으로 연주한 침묵의 소나타야 말로 빛나는 '진주'의 결실을 약속하는 生의 비밀이라고.
어떤 눈물로
이 책을 읽기 바로 직전까지 나는 '당신은 배가 고파도 당신이 추구하는 일을 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할 수 없이 막 변절코자 한 독자였음을 고백한다. 어찌 내 속마음을 알고 그럴줄 알았다 신기하게 나타난 것일까. 굶어 죽느니 차라리 다른 일을 찾아보고 싶었던 마음 한 구석을 들킨 기분이 한참 동안 서운하고 쓸쓸했다. 딱 일년 전이었다. 작년 이맘때 쯤 기왕 이렇게(?) 된 거 책이나 실컷 보고 글이나 써보자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던 기억...새삼 책으로 사는 의미를 다시 발견해 보자고 다짐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야심차게 시도한 사업의 실패로 실은 무엇을 다시 시작하기 두려워 시간을 벌고 싶었던 것이다. 직장다닐 땐 하루 종일 책만 보고 또 다음날은 하루 종일 글만 써보는 것이 소원일 때도 있었다. 소원풀이 하듯 지난 일년 간 나는 책속으로 들어가느라 세상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어이없게도 친했던 사람들과 등을 지게 되었다. 그럴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책은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주었고 글은 그럴싸한 위안소가 되었다. 어쩌면 그러는 동안 사는 의미를 잊고 살았는지 아니 잊고도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루키는 예를 들어, 면도같은 일상의 행위도 매일이 반복되면 하나의 철학을 가진다고 했다.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내 일상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되려 삶의 의미를 잊게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중단하기 위한 좋은 방편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삶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슬쩍 누군가에게 다른 것에 토스하여 순간을 모면하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반복되는 내 일상에 스스로 철학을 발견하지 못하고 시간과 계절에 지배당하면서 나는 틈틈이 균열을 감지해야 했고 어느 정도 나만의 방식과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상이 공식처럼 반복되는 것에 슬몃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래..도피와 위로의 반복만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인 것인지. 삶에서 도망치려고 상처만 위로 받고 말려고 책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인지. 이제 그만 멈추어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닌지. 내 철학을 찾지 못한 나였기에 오늘처럼 누군가의 죽음에도 지나치게 쓰러질듯 흔들리고 괴로워 한 것은 아닌지.
물론, 나는 내 무겁던 엉덩이에 잘 버티고 있던 어깨위로 사뿐한 날개를 달았다고 급작스레 책을 덮고 세상을 향해 뛰쳐나가 사람들 속으로 몸을 던지겠다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이번 독서가 독서에만 빠져 허우적거리던 내 자신을 거짓없이 자각하는 계기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세상을 등지고 책속에 들어 갈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세상을 느끼며 사람을 견디며 책을 곁에 둘 수 있을 듯하다. 굳게 닫혔던 마음이 한번에 열리진 않겠지만 그 마음 하나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꿈도 회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처럼 하루의 반을 책만 읽고 글 쓰는 것에 어떤 자폐적 열패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나아가 生에 대한 죄책감과 부질없음에 숨쉬기 어렵다면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 무성의하게라도 이 책을 몇장 넘겨보길 권하고 싶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어느 날, 어느 오후 많은 것을 기대하라고는 하지 않겠다. 곁에 커피가 있다면 한 모금, 캔맥주 한개라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가끔 너무 진부한 이야기라면 남몰래 비웃어도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알고 있던 이야기는 다시 확인하고 어디 써먹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오후 늦게 비가 내린다고 옷깃이 젖지 않고 그만 가슴이 젖어 주책맞게 눈물이라도 흐른다면 그 가슴을 탓할 자 누구인가. 나는 여전히 투덜거리며 책을 펼칠 것이고, 책을 서재에 꽂기도 전에 또 글을 쓰고 있을 거라는 걸 알게 됨이 조금 창피하긴 해도 다시 기쁜 걸 어쩌겠나. 수면제에 길들여진 어느 독일작가가 우연히 잠들고 나서도 수면제를 먹는 것을 깜빡했다며 다시 일어나 약을 먹고 잠들었다는 일화의 주인공처럼 어쩌면 서평을 써놓고도 또 책 읽는 것을 책 사는 것을 잊었다고 할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어쩔 것인가. 매일 먹는 밥이 지긋지긋하고 싫증이 나다가도 밥처럼 중요한 건 세상없듯이 당신은 나처럼 정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어느새 책이 되어 버린 스스로를 발견하고 돌아 올 뿐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밥을 먹고 피와 살이 만들어 질 때도 있지만 또 밥 때문에 피와 살이 고통받을 수 있듯이 책으로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절망할 수도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도 당연지사 아니겠나. 과학과 물질문명의 진보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시대가 온다 해도 책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을 믿으며 한명의 작가를 기다릴 당신과 내가 이 순간 잘못하며 살아온 것 같지 않다는 생각, 우리 그렇게 같은 마음으로 책을 덮어내지 않을까.
또 한권의 책으로 변덕많고 의심스런 이 계절을 견디고 허전한 마음을 다시 채운다. 이 책은 지금 막 새출발을 하려는 청춘에게만 적절한 선물은 아닌 듯하다. 청춘을 지나온 나는 불혹에도 오히려 더 절망의 유혹에 가슴이 달뜨고 생의 포기에 번민의 출사표를 던지곤 한다. 실패와 좌절을 겪어 보았기에 더욱 시작이 두렵고 사람이 무섭다.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만나온 사람만큼이나 모든 앙금이 쌓여 코끼리처럼 거대해졌고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목메도록 서러울 때가 얼마나 많단 말인가. 아마 내게도 살면서 한번은 고통으로 잉태된 진주를 손에 쥘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그건 눈물방울로 빚어낸 그것일 것이다. 애통하고도 저며드는 시나리오 작가처럼 허망하게 죽지 않고 살아남아 고통의 분비물로 환희의 보석을 빚어낸다면 그건 필시 오늘로부터의 약속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서양의 신화나 동양의 전설에서 '진주는 눈물'이라 배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자식을 잃고 흘린 어미의 눈물이거나 혹은 죽은 영혼을 부활하고자 흘리는 여신의 눈물이 진주가 되어 돌아온다는 비극의 결정, 고통의 절정에서 떨어지고말 순수의 바다, 그 바닷속에서 숨쉬는 영혼이 되고 싶은 오늘, 나 오늘만은 진주가 되지 못한 그녀를 위해 돌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꿈앞에 머리 조아려 울어 드리고 싶다. 당신은 갔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 염치없이 소리도 쳐보고 싶다. 내 삶의 진짜 주인인 진주(眞主)가 되기 위해 나는 진주(珍珠)를 기다린다 고백하고 싶다.
무엇보다 값진 진주, 누구보다 아름다운 진주는 이토록 아프고 고통스러운 비탄의 파도와 통곡의 바다속에서 영롱한 빛을 얻는 다는 사실을 내 마음의 그릇에 새기겠다. 그러한 生의 진주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내 모든 눈물이 원료가 될 것이기에 내 앞에 닥친 모든 비극에 도망치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내가 흘린 눈물로 씻어낼 수 밖에 없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진주의 조개를 거세게 몰아치던 파도여, 여린 속살을 뚫고 상처를 긁어대던 바닷물아, 내 눈물이 진주알이 되는 날 그 진주알이 내 핏속으로 맺히는 날 그 혈액이 나만의 생명으로 꽃피는 그 날, 내 안의 뜨거운 빛을 똑똑히 보아다오. 절망하지 않고 아침을 기다린 내 눈물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해 낸 내 미련을 기억해다오. 언젠가 내 살이 문드러져 생명이 부패한다 해도 그 어둠이 진주처럼 오롯될 그날 그 한방울의 진주가 당신의 혈액속에 흘러들어 다시 희망의 액체로 부활할 그날을 위해 나는 희망을 약속한다. 진주의 신비여, 생명의 아름다움이여, 내가 썩어도 그로인한 당신의 푸른 바다는 영원하시길. 내 살 속에서 생겨나온 딱딱한 덩어리, 돌이 아닌 그 한방울의 눈물일랑 오래오래 잊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