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어준다면
게일 포먼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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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봄이 오시려는지 날씨가 친절하다. 그날도 그랬다. 완연한 봄은 아직이었지만 겨울외투를 입고도 봄이라 우기고 싶을 날씨였다. 봄을 유난히도 못 견디던 두 여자, 어머니와 이모는 예전처럼 여행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날 이후 세상엔 교통사고로 가족이 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된다고 편을 가르기 시작했다. 의외로 내 편은 별로 없었다. 뉴스엔 하루가 멀다 하고 교통사고 희생자가 발생하건만 그 희생자의 가족들은 나처럼 사고 후 숨어버리기라도 하는 걸까. 그날을 생각하자니 봄날 아침 그 몽글한 안개가 떠오르고 전화너머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목소리도 들려온다. 참, 꿈만 같다. 잔인한 현실은 때때로 한낮의 낮잠과도 같지 않을까. 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나절 아련한 꿈을 꾼듯 나는 자꾸만 애꿎은 시계를 보게 된다. 얼마나 흘렀을까. 책을 읽고 처음으로, 이 소설도 꿈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나는 이미 그렇게 믿어 버렸는지 모른다.

나는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고 꽤 방황한 사람이었기에 이 책을 쉽게 손에 들진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에 끌렸다. 이젠 좀 이런 이야기에 울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울지 않고도 그리워만 할 수 있다면 좀 덜 힘들 것 같았기에. 억지로 거리를 두고 소설을 읽어내자니 마음을 많이 쓰게 되었다. 거리감을 둔다는 것이 소설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사랑에 빠질려면 ‘완전히’ 라야 아름다운 것이지 ‘적당히’는 사랑도 뭣도 아닌 게다. 이러다 어쩌면 리뷰를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 작품에서 소설적 구성과 독특한 서사, 인물의 배치등에 전혀 분석, 혹은 비평을 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날 이후 내가 지내온 시간들에 묵묵히 격려를 보낼 수 밖에 없었고 그날 이전에 엄마가 살아오신 시간들에 묵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소설을 따라가는 일은 그날 깊게 패여진 내 가슴구덕을 더듬어 당시 맞은 총탄의 경위와 탄흔을 추적해 나가는 일이었다. 사람에게 어떤 기억은 이 소설의 시간단위처럼 단락별로 자세하고 오래도록 분명하다. 그나마 다행인건 소설의 주인공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건 불행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그날 딱 하루 불행했다고 그 사람의 인생이 불행한 삶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보다 눈부시던 주인공의 행복이 죽었기 때문에 비극이요, 소용없는 것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해서, 나는 이 소설을 굳이 ‘행복한 삶을 살다간 사람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관한 이야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 길이 그들 인생의 마지막 가는 길이 된 사람들의 가족은 대체로 그들이 죽었다고 여기질 못한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떠나는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인데 이미 떠날 줄 알았고 떠나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그들이 꼭 죽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어머니와 이모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바로 장기 미국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이 아주 오랜기간 미국으로 동반여행을 간 것이라 여기고 살고 있다. 헌데 아무래도 여행을 자주 가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보다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많은 가보다. 이 책에서도 주인공의 가족과 주변 지인들은 하나같이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으며 미아의 엄마는 여행사 직원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느 눈이 많이 오는 날 아침 눈길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학교와 회사일정을 포기하고 일상의 일탈이라는 가족여행을 떠난 것이지만 그것은 그들 인생의 이탈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미아가 죽은 것만 아니라면, 이야기는 마치 유학이나 졸업, 아니면 이사를 앞두고 그곳에서 지난 소녀시절을 회상해보는 자기추억의 여행과도 같았다. 죽은 것만 아니라면.

이 작품을 덮으면서 소설은 아무리 길고 아무리 짧아도 결국 어느 시점에서 어느 시점 까지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이번 이야기는 주인공이 사고를 당하게 되는 날 아침에서 부터 사고 후 사경을 헤매다가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의 시간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만 하루라는 주어진 시간을 시간단위, 분단위로 쪼개어 참 알차게 이용, 배분하셨다. 소설은 7:09 a.m.에서 시작해 7:16 a.m에 막을 내린다. 날짜도 연도도 없고 오로지 오전인지 오후인지만 표시된 채 거의 한 시간 단위로 시간은 흘러갔다. 그런데, 과연 시간이 흘렀을까. 이상하게도 숫자가 변했다고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긴 어려웠고 오히려 시간은 정지한 듯 느껴졌다. 내게는 단락이 구분되던 이 숫자가 생명이 위중해 촌각을 다투는 시각(時刻)의 의미라기 보다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신(sene)번호의 시각(視角)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도 작가는 생각이 전개되는 곳이 미아가 입원한 병원의 중환자실임을 인식시키려 의도적인 시각(視角)장치로서 시계를 상징하는 시각(時刻)을 사용한 듯하다. 그곳, 중환자실은 정말 숫자만 바뀌어질 뿐 시간의 흐름을 감지 할 수 없지 않은가. 미아의 시간표는 내게 있어 일시정지의 계획표에 다름아니었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거리를 두고 싶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미아가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은 눈길 운행시 마주 오는 트럭과의 충돌로 인한 교통사고였지만 대부분의 시간, 미아는 중환자실에서 혼자만이 시간을 의식하며 자신의 의식을 유지하려 한다. 그 곳은 이상하게도 시간이 꼼짝을 않고 흐르지 않는 것 같으면서 또 신기하게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 마법의 장소이다. 같은 숫자인데 오전인지 오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로지 가족만 하루에 두 번(내 기억으로 오후 2시와 8시) 면회가 되는 그곳에서 나 역시 삼일 동안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아이를 낳으면서 분만 유도 촉진제를 세통이나 맞았는데 그 과정에서 폐에 물이 찬 채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 직후 깨어난 나는 ‘숨이 안쉬어 진다’는 말을 하고 다시 의식을 잃었고, 죽지 않고 살아난 걸 깨달았을 땐 중환자실이었다. 병원은 의료사고를 무마하려 오히려 자신들이 나를 살려내었다고 생색을 내었다. 나는 당시 아이를 낳은 여자이기도 했는데 폐에 남아있는 물을 빼내는 것이 더 시급했기에 아이를 일주일 후에나 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내가 중환자실에서 보고 들은 것은 대부분이 간호사의 발걸음과 기도에 삽관된 장치에 석션(suction)을 시도하는 기계소리, 그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들의 신음소리, 각종 의료기기들의 규칙적인 전자음이 다였다. 그때 난 삽관된 입에 석션장치를 넣으면 배에 있는 힘껏 힘을 주고 가래를 자력으로 뱉어내라는 간호사가 죽도록 미웠는데 그녀는 내가 방금 배를 째고 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 한 환자인지는 알 바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가끔 의식이 돌아올 때 내 귀에 간호사들끼리의 의학용어가 섞인 몇 마디를 스쳐들었고 면회하러 들어온 가족들의 목소리와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와 숨소리로부터 내가 어떤 상태인지 언제쯤 중환자실을 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죽지는 않겠다는 걸,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수술 직후 깨어나 숨이 안 쉬어진다 말하고 다시 의식을 잃던 그 순간, 짧지만 ‘내가 이대로 다시 안깨어나면 그게 죽는 것 이겠구나’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다. 설마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것은 아닐거라고 그 찰나의 순간에도 나는 그렇게 느끼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나서 한참 후 나는 죽는 다면 그렇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내가 죽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런데 이번 책을 읽고 그만 마음이 바뀌려한다.

만약, 내가 의식을 잃고 하루 혹은 몇 시간이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다 끝내 생을 마친 것이라면 나는 미아처럼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아니 미아처럼 아름다운 기억들을 다시 찾아가 아름답게 인사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죽을지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죽어야 했다면 꼭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이제 죽는 다면 미아처럼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삼일 동안의 중환자실에서도 의식이 있건 없건 무조건 그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하루 반이 지났을 때라야 나는 사람을 알아보았는데 병석에 계신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오진 못하고 대기실에 계신다고 간호사들이 알려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실질적인 육체적 아픔이 찾아왔다. 정신이 든 것이다. 아버지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니 어린 시절 해수욕장에서 같이 물놀이를 하던 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얕은 물이었는데 발이 닿지 않아 놀란 나는 순간 겁을 먹고 물에 빠지게 되었고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던 기억, 왜 하필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우리식군 그 이후로 물놀이를 가지 않았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라 모든 건 어렴풋했지만 어쩐지 밖에 아버지가 든든하게 앉아 계신다는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볼펜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시점에 삽관한 장치 때문에 목이 너무 아파 제발 기계를 제거해 달라 애원했다. 같은 날 아버진 그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병원측에 거세게 항의하여 드디어 삽관장치를 떼어내게 하셨고 일반병실로 가도록 압력을 넣으셨다. 아버진 그 병원의 오래된 투석환자셨다. 책을 읽으며 내내 미아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미아에겐 그런 부모님이 곁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진 내가 일반 병실로 옮겨졌을 땐 정작 나타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난 그때 아버지의 사랑을 얼마나 느꼈는지 말로 다 할 수는 없다. 중환자실에선 들어와 나를 보고 있는 그들을 통해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로부터 나를 보게 된다. 아마도 미아를 보게 된 많은 사람들은 미아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한 채 였을 터이다. 그건 미아가 삶을 죽음으로 택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시점부터 간호사들은 미아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누워있는 환자가 생명을 다투는 상황이 아니라면 '꼭 살아야 한다', '죽으면 안된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그말은 어쩌면 내가 곧 죽게 될 거라는 말과도 같다. 가만 미아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넌 살 수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격려때문에 '난 살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 경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죽다가 살아온 내 이야기기도 했다. 그녀가 죽지만 않았다면.

어짜피 죽게 될 거 그럼 현장에서 바로 즉사할 것이지 왜 죽지 않고 살아나 다시 죽은 것인지 처음엔 작가를 원망하였다. 겨우 하루 더 살려고 그렇게 사투를 벌인 것인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책을 모두 읽어낸 후 나는 바로 그 시간을 가지려고 미아는 마지막을 견뎌낸 것이고 그것을 시시각각 기록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이 작품의 존재이유이자 내가 이 책을 읽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는 사실, 참 다행이었다. 미아에겐, 우리에겐, 그리고 미아의 남은 가족, 친구들에게 그 시간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사실, 소설 때문에 나는 목숨이 연장된 시간이 미아에게 불운이 아닌 행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머리를 다친 것이기 때문에 살아나는 것이 더 불행이라고. 반신불수나 의식불명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느니 깨끗하게 가시는 게 가족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 하신 거라고. 그때 난 그말을 흘려들었고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 동의를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하루만이라도 아니 몇 시간만이라도 살아서 나와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면 나는 지금보다는 덜 억울하게 엄마를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엄마도 미아처럼 자신의 인생과 잘 이별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나는 대부분 엄마를 편안하게 가시도록 어른스럽게 굴지 못하였겠지만 엄마와 나에게 그 시간은 우리가 같이 한 평생 중 가장 소중하고 따스한 추억이 될 수 있었을 것이기에.

그랬다. 미아는 자신의 짧은 인생을 되돌아보며 그 소중한 사진들을 앨범에 담아 우리에게 선사했다. 이 작품은 이제 미아가 다시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기 보다 그동안 해왔던 일을 말하는 책이었다. 이제 친구들과 가족을 다시 못보고, 꿈에 그리던 줄리아드에 입학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와 근사한 미래를 약속하지 못한다고 절망에 빠져 슬픈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가족들에게 사랑받았고 친구와 우정을 쌓았고 남자친구를 사귀기까지, 첼로가 자신의 꿈이 되기까지 자신이 지녔던 모든 사랑과 희망을 떠올려보는 거꾸로 쓰는 일기장이었던 것이다.

첼로를 시작하고 첫 연주회 때 못하겠다고 울먹이는 미아에게 아빠는 자신도 드럼칠 때 똑같았다며 '이겨내기 어려우면 그냥 떨면서 버티라' 말한다. 세상에...나는 미아 아빠의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너는 잘 할 수 있다. 용기를 내라’같이 은근 부담을 주는 진부한 말이 아니고 누구나 그러하니 떨리면 떨리는 대로 그 순간을 견뎌내면 된다는 참신하고 솔직한 대답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 나는 꼭 그 말을 내 아이에게 해주고 싶어졌다. 평소에 늘 가족과 닮은 점이 없다고 의기소침해 있던 미아에게 엄마는 할로윈 날 빨갛게 화장을 해주었다. 그날 미아는 청바지와 스웨터를 벗고 나시옷에 금발의 가발을 쓰고 가장무도회에 나타났다. 미아는 거울을 보고 처음으로 가족과 닮은 자신의 얼굴을 느껴본다. 줄리아드 입학과 애덤과의 사랑으로 열일곱의 고민에 힘겨워 할 때 엄마는 ‘어떤 선택을 해도 이기는 거고 어떤 선택을 해도 지는 것’이라고 어느 쪽이든 미아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조언을 한다. 부모란 자신의 답을 말하지 않고 세상의 답을 말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을 보며 나는 과연 내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싶어 미아의 엄마가 얼마나 멋져보이던지.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테디는 미아가 첼로로 자장가를 연주하면 울음을 그치던 동생이었다. 미아는 엄마가 테디를 출산할 때에도 곁을 지켰는데 마침 테디가 제일먼저 본 얼굴은 미아였고 미아는 테디의 탯줄을 잘랐다. 아빠는 이런 가족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을 그냥 취미로 남겨두고 교사가 되는 길을 택하였고 음악을 버린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미아에게 ‘살다보면 때로는 내가 선택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 선택이 나를 만들기도’ 한다며 그 선택으로 얻은 가족의 안녕에 누구보다 행복함을 강조했다. 어떻게 이보다 더 단란한 가족이 있을 수 있을까. 미아의 회상이 가족에 머무를 때면 난 그날 아침 그들이 같이 탄 자동차와 음악을 들으며 눈길을 달리던 여행길이 꼭 중간에 한사람이라도 이탈하면 안되는 길이었다고 여겨진다. 설사 죽음도 그들을 갈라놓지 못할 여행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 어머닌 어떤 형제들보다 같이 떠난 이모와 제일 친하셨고 실제로 농담으로 우리 실컷 달리다가 차 사고로 죽는게 어떨까 하며, 피곤하게 병으로 죽지 말고 깨끗하게 죽자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사람은 자신이 죽는 시점을 모르므로 자신이 제일 자주하던, 제일 잘하던 일을 할 때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걸 이 책을 보며 다시 상기하게 된다. 내 어머니나 미아네 가족이나 그들은 자신들이 자주하던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서로간의 이별이 아닌 것이 아닐까. 미아는 음악으로 연결된 부모와 生 에 특별한 추억을 나눈 동생과 죽음으로 영영 헤어진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가슴속에 그것을 간직한 채로 죽음마저도 추억의 마침표로 찍은 것은 아닐까.

미아에겐 가족뿐 아니라 친구와 음악도 있었다. 착한 소녀의 가면을 벗고 둘도 없는 단짝이 된 킴은 끝까지 애덤을 도와 중환자실의 미아를 만나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미아는 자신의 일부와도 같았던 첼로를 통해서도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나는 이 과정이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음악의 꿈을 가진 열일곱 소녀가 다시는 첼로 연주를 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첼로를 통해 첼로 때문에 자신을, 세상을 알게 된 것에 이 작품은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미아는 음악캠프에서 독주가 아닌 오케스트라에 참여하여 처음으로 그룹의 일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음악이 고독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에 감사를 느낀다. 바비큐 파티에서 아빠와 애덤은 노래하고 테디는 춤추고 자신은 연주하며 보내었던 오후 한때, 그 눈부신 시간이야 말로 행복이었다고 회상한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경험, 애덤과 헨리 아저씨의 기타와 함께 첼로를 연주하며 세상은 어울려야 어울림을 느낄 수 있음도 알아간다. 펑크록의 세계에서 첼로의 자리는 없다고 믿은 미아였지만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텅 빈 남의 자리가 아니라 결국 자신의 열린 마음이었음을. 미아에게 첼로를 연주한다는 것은 사람을 알아가고 세상을 배우는 生의 全 연습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미아는 실전을 펼치지 못했을 뿐인 것이었다. 아니, 실전은 그곳, 가족들과 함께인 거기에서 가능할 터였다.

그래도 역시 가장 슬펐던 건 애덤의 마지막 인사였다. 대학밴드의 슈퍼스타인 남자친구 애덤은 ‘너처럼 음악에 몰입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고 미아의 음악에 대한 집중력, 열정과 태도에 반했다. 이주일 동안 피자배달을 해서 요요마 음악회에 데려간 애덤은 미아의 마지막 순간에 요요마의 피아노 연주곡을 들려주며 기어이 이별을 실감나도록 하였다. 나는 임종을 맞는 사람이 가장 나중에 닫히는 감각이 청각이라 들었다. '좋은 곳에 가시라'는 귓속말을 끝까지 챙겨 듣는 것이 이승에서 행하는 마지막 감각이며 남겨진 사람들과의 약속이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고. 미아는 애덤과 사랑을 이어준 요요마의 음악을 들으며 마지막 순간 남은 힘을 다해 그의 손을 쥔 채로 ‘너무도 푸근하고 따스하고 곤한 끝없는 낮잠’속으로 빠져 들 수 있었던 것이다. ‘네가 남아준다면, 널 보내’ 줄 거라는 애덤의 간절한 부탁을 뒤로 끝내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네가 살아 돌아온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다 하겠다는 말, 네 대신 죽기라도 하겠다는 그말 때문에 우린 편히 눈감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이만큼 사랑받았으면 된 거라고, 내가 떠나더라도 우리 사랑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 사랑만 간직한 채라면 그곳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모두가 기다리는 거기도 다음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애덤이 ‘미아’를 부르며 막을 내리고, 나는 그만 그 호명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꼭 내가 미아가 되어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그것은 또다른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그렇게 낮잠에 빠진 나를 다시 현실로 소환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서운하지 않았다. 혹시 미아는 그 호명을 듣고 나처럼 다시 깨어나진 않을까, 나는 그렇게 기대를 하는 것이다. 내 눈앞에서 죽음을 확인하고 내 손으로 뼈를 묻었다 해도 사람의 죽음을 믿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제와 믿는다 해도 그것이 결코 존재의 부재에 털끝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가 상대를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대답을 듣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 믿기 때문이다. 죽음을 인식한다고 해서 바로 부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죽음을 수용한다고 해서 부재를 수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건 자신이 자각하는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상실감의 원인이 죽음이라면 부재의 고통과 마주하는 것, 그것은 부재한 사람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 하지 않을까. 사실, 존재의 ‘상실’은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사랑이나 희망의 부재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다행히도 사랑과 희망의 부재는 이미 죽은 자의 책임이 아니고 살아있는 나의 문제, 나의 의지인 것이다. 상실을 견뎌내는 사랑의 의지는 기꺼이 존재의 부재를 다시 희망의 존재로 전복시키는 生의 지혜였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읽었다 말하며 얻어버린 가장 큰 교훈이었다. 상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상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과 나누었던 사랑과 삶을 외면하는 일인 것이다.

리뷰를 쓰기를 잘했다. 나는 이 책을 제대로 몰입하지 못해 더 슬펐고, 슬픔을 좀 줄여보려고 하다가 계획에 실패 한 것이었다. 좀 덤덤해지자고 했지만 실은 애초에 덤덤치 못할 책을 집어든 것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슬픔은 상실의 고통에 대한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반응이다. 이제서야 오늘 슬퍼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치유할 수 있고 내일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또 기억해 낸다. 몇 년 전 <인생수업>으로 유명해진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상실수업>이라는 후속책에서 ‘상실’은 모두 끝났다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는 삶’의 증거라 하였다. 모두 끝이면 잃을 것도 없고 아플 것도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가 가시고 얼마되지 않아 서점에서 이 책을 무의식 중에 집어들고 집에 들어왔었다. 책을 넘기다 보니 유일하게 줄이 쳐진 문장이 있었는데 그 문장은 오늘 내가 떠올린 느낌의 문장과 거의 흡사했다. ‘지금의 고통은 그 당시의 행복의 일부이다. 결국 거래인 셈이다.’ ‘나니아 연대기’로 잘 알려진 영국의 작가 C.S. 루이스가 이렇게 멋진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으로 꽤 고통스런 나만의 ‘상실수업’을 비로소 치루어 낸 듯하다. 이 책과 거래한 내가 온당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나는 아직 지독한 상실로 가슴팍에 가슴만한 구멍이 생긴 채로 그안에서 길을 헤매는 '미아(迷兒)'이면서 아직도 엄마를 찾아 生을 떠나고 싶은 '미아(未兒)'이지만 오늘 치루어 낸 상실의 고통은 결국 내 자신을 '미아(美我)'가 되게 할 보약이리라. 언젠가 지금의 고통이 반드시 나중의 행복의 일부가 되는 날이 나는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때쯤이면 아마도 오늘의 ‘상실수업’을 알차게 받게 해준 ‘네가 있어 준다면’, 이 책의 미아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내 고통은 지금도 행복의 한 조각으로 여길 수 있을 듯 하다. 미움의 한 조각이 있어도 여전히 전부는 사랑인 것처럼. 나는 고통 한 조각에도 여전히 전부는 행복한 사람, 그 행복의 조각 전부가 고통이어도 결국은 다시 행복해 질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그때도 마찬가지이길 바라본다. 그건 아마도 먼저 가신 내 어머니가 미처 못다한 말씀이며, 어쩌면 내가 먼저 꼭 해야했을 약속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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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3-03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충격이 크셨겠습니다.
이 책 참 많은 사람이 읽던데 한사람님에겐 또 나름 큰 의미로 와닿았겠네요.
이 책이나 언급하신 책들이 참 많은 힘과 위로가 되죠?
C.S루이스가 참 근사한 말을 했군요.
정말 리뷰 쓰시길 잘하셨어요. 축하드려요.ㅎ
이책 저도 언젠가 꼭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사람 2011-03-03 14:36   좋아요 0 | URL

가볍게 읽을수 있는 책인데
저는 괜스레 가볍게 읽으면 안될것 같다는 생각도 했던거 같아요^^
그리고, 리뷰는 더할수 없이 무겁게 표현된 거 같아
쓰고나서도 창피하다는 생각은 했답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보인다는 생각만 버리면
스스로 시원해지는 아이러니 ㅋ

언젠가 언제라도 꼭 읽어보세요^^

저는 좋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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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상영종료




 


< 제83회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2011)-나탈리 포트만>


드디어 받을 사람이 받았다. 베니스와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까지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니 그랜드슬럼을 이루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지라 그녀의 수상소식이 놀랍진 않았다. 막 어제까지 이런 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 생각하여 나라도 어떻게든 리뷰를 써볼까 하던 차였다. 아직도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다만 언제쯤 끄적여 볼까 살짝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날아든 수상소식이 조금은 일찍 내 발목을 잡아 당겼달까. 이 영화는 말로 다하기 아까운 아름다움이다. 순간 느꼈던 모든 것을 고이 빚어 나만의 소중한 케이스에 영구 밀봉하고 싶은, 가지고도 기리고 싶은 아름다움이었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도 나는 한참을 넋을 놓아 버렸다. 설명할 순 없지만 어떤 生의 비밀 답안지라도 몰래 훔쳐본 기분, 그것이 혹 예술이라는 장르에 해당된다면 그것의 속성에 관통상이라도 입은 기분, 어떻게 더 이상 완벽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완벽이라는 마취에 압도당한 나는 왜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이 영화의 마지막은 예리하게도 아려왔고 차마 리뷰는 그 자상을 확인하는 절차가 될듯하다.

영화는 ‘백조의 호수’의 프리 마돈나를 연기하게 된 한 발레리나의 ‘예술적 성공’과 그와 동시에 이루어진 ‘자기파멸’의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발레라는 전문적 분야를 완벽하게 수행해낸 나탈리 포트만은 실제 열 세 살의 나이에 발레의 꿈을 접기도 한 인물이었기에 이토록 훌륭할 수 있었던 것일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 때문에 만나게 된 발레리노(뉴욕 발레단 수석안무가)와 약혼, 현재 임신의 몸으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다는 것. 어찌 보면 그녀를 좌절케 했을 발레가 그녀의 꿈과 사랑을 다시 실현시켜준 결과가 되었으니 그녀에게 있어 발레는 영화(映畫)이상의 영화(榮華)가 된 셈이다. 그녀가 ‘레옹’의 마틸다로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1994), 그때 난 불같은 청춘이었는데 어른들 흔히 하시는 말씀처럼 ‘애가 애를 낳게 된’ 주인공이 바로 그녀이니 그간의 흐른 세월일랑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을까. 지난주 <언노운>에 출연한 다이앤 크루거에 반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엔 나탈리 포트만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몇 년 전에 ‘브이 포 밴데타(V For Vendetta, 2005)’라는 영화에서 삭발한 그녀의 완벽한 두상을 보고 인상깊었던 기억(영화는 별로였지만 그녀의 연기는 훌륭)도 떠올랐고 ‘천일의 스캔들(2008)’에서 스칼렛 요한슨(동생분)을 질투하며 동생을 밀어내던 초록색 드레스의 카리스마도 다시금 겹쳐졌다. 그녀는 대체로 연기 앞에선 한 치의 흔들림이 없어 소위말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이미지로 뇌리에 각인된 배우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번 영화에서도 강인한 캐릭터를 기대하며 그녀의 성공을 바랐던 것 같다.




< 레옹, 1994 >



<브이 포 밴테타, 2005>
 


< 천일의 스캔들, 2008 >


다행히도, 그녀는 성공했고 불행히도 그녀는 실패했다. 완벽한 성공이었지만 그럼으로써 완벽하게 파멸했다. 성공했기 때문에 파멸한 것일까 파멸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일까. 성공과 파멸이 인과관계로 형성된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아무래도 이번 영화를 보고나서 ‘천재는 자기를 파괴하면서 예술을 창조한다’는 논리에 가장 아름답게 설득당해 버린 것이 아닐까.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끊임없는 열정은 바로 완전하게 자아를 상실해야만 비로소 환희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비극적 진실을 이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누구보다 완벽함을 소원해 온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난 정말 완벽했다’고 ‘나는 그것을 느꼈다’고 말하며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완벽하고 싶었으면 자신과도 바꾸면서 기어이 얻어야 했던 것일까. 가끔, 자신을 소진시키는 궁극의 가치, 자신의 죽음이라는 막다른 결과에 이르면서 자기창작의 완성을 이루어낸 예술가를 접할 때면 예술은 결코 ‘생산’과 ‘건축’의 장르가 아니고 ‘소모’와 ‘파괴’의 장르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나 이번 영화처럼 ‘블랙스완’이라는 어둠과 악의 힘, 그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가 예술로서 대중에게 감동을 전달해야 할 땐 그 매개체가 되는 배우는 ‘흑’과 ‘악’의 광기에 반드시 치명적 관통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화에서 ‘블랙스완’을 연기하던 니나는 마침내 등에서 깃털이 생겨나 ‘검은 날개’가 완성되는 합체의 장면에서 가장 큰 감동을 전달한다. 관객은 소름끼치듯 그녀의 연기에 넋을 잃게 되지만 그녀는 그토록 신비한 ‘검은 날개’를 제 몸에서 잉태해내기 위해 무엇을 버린 것일까. 아니 무엇을 만든 것일까. 혹시 그녀 자신이 창조해낸 ‘검은 날개’는 또 다른 니나의 자아로서 현실에 드러나 생명력을 갖게 되면 정작 니나의 생명이 위태로와지는 죽음의 날개는 아니었을까. 니나의 삶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검은 날개’는 과연 니나 자신이 원한 것이었을까. 설사 니나가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예술은 왜 그녀가 ‘검은 날개’를 달아주길 바란 것일까. 혹시 누구보다 ‘블랙 스완’을 고대하고 찬양하는 그들(관객),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메이커들(감독) 자신은 스스로 ‘검은 날개’를 달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 속에서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사람은 명백히도 두 사람이었다. 모두 인상깊었던 조연들이었다. 한 명은 니나의 어머니(전직 발레리나), 또 한 명은 니나의 스승(현직 발레 감독)이었다. 어머니는 순수하고 순종적인 ‘백조’로서의 니나를 강요해왔고 감독은 니나의 내부 깊숙이 잠재해 있는 관능적이고 공격적인 ‘흑조’를 찾아내고자 했다. 동시에 다른 곳에서 니나를 컨트롤하고 억압하는 이 두 사람은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도 확연히 다른 컬러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발레연습장으로 대변되던 감독의 주변엔 철저하게 흑과 백으로만 구성된 콘트라스트로 니나가 시종일관 긴장하도록 만들었고 엄마와 단둘이 사는 니나의 소형아파트에서는 핑크빛과 인형으로 연출된 공주님의 방을 연출하여 과보호된 니나의 가정환경을 더욱 대비시켰다. 니나는 주로 이 두 공간만을 지하철로 이동하고 연습실의 복도를 통과하며 하루를 보내는 인물이었다. 여기서 니나가 자신을 인지하는 방식은 어디서건 존재하는 ‘거울’과 ‘창문’을 통해서 였는데 영화를 통털어 나는 니나가 거울을 볼 때 가장 무서웠고 가장 슬펐다. 니나는 거울속에서 완전한 분열증세를 보였고 거울이 많아질수록 증세는 심각해져 갔다. 어머니의 억압, 감독의 질책, 동료와의 경쟁, 왕년의 스타에 대한 죄책감등이 거울엔 고스란히 투사되어 복합적인 양상으로 드러났다. 이 작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만들고 확인하고 끝내 깨부수는 영화였다.


 

나탈리 포트만이 그다지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은 역할이 아닌 발레리나 역을 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이 ‘거울’을 보고 ‘자신’을 깨닫고 알아가는 내면연기에 있었던 것 같다.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발레리나 연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배경음악과 기술적인 효과들이 함께 이루어낸 종합연출의 결과였다고 본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거울을 보며 심리변화를 표현해야 하는 거울신은 어찌 보면 약속처럼 빈번하고도 계획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런데 이 반복의 공포는 관객에게 점진적인 두려움을 제공해야 했고 비극의 결말을 예상케 할 수도 있었다. 하여 그녀는 과도하게 미쳐서는 안되었고 연기하듯 두려워해서는 서로가 부담스러워질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많이 인내하고 절제했다. 시종일관 기쁜 웃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그녀가 단 한번 마지막에 울면서 희미하게 미소짓는 슬픈 환희는 그래서 더 극적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그녀의 마지막 얼굴은 강인하게 뇌리에 남아 예술이 가진 고통의 미학을 끈질기게 기억하라고 부탁한다. 그녀의 발레복에 퍼지던 빨간 핏빛이 그대로 붉은 꽃으로 피어나길 기원하라고 그녀의 마지막 눈은 오랫동안 응시한다. 사라진 건 그녀일까 그녀의 예술일까 아니면 우리의 댄서일까. 둘 중 하나가 소멸되어야 한다면 우린 그 순간을 외면하고 싶다. 영화는 그래서 막을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 수상소식에 힘입어 이 영화가 탄력을 받게 되리라 믿는다. 이미 상을 받았으니 알려진대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에 찬사도 쏟아 질 것으로 예상된다. 나는 이번 그녀의 연기에서는 완벽함도 만족했지만 배우로서 어떤 행복감을 엿보았다고 느껴진다. 그건 그렇게 발레리나로서 완벽한 연기를 해낸 후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예술가의 극적인 운명처럼 그녀 자신도 그와 같이 살다가 죽는다면 더 좋을 건 없겠다는, 자신이 자신을 최대한 부러워하는 마지막 얼굴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슬픈 얼굴이었다. 배우라는 직업, 광대의 숙명, 예술가의 욕망, 인간의 탐욕, 이 모든 것들이 짧은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조명되며 한 마리의 백조와 또 한 마리의 흑조가 비로소 한 몸이 되는, 그래서 엄숙하고도 치명적인 生의 한 순간 그것은 죽음이어야 가능한 절대공연이었다. 끝내 니나의 ‘검은 날개’는 ‘하얀 바닥’으로 추락하며 분열된 정신이 하나가 된다. 완벽한 아름다움은 이렇게 더 완벽한 슬픔으로 파도치게 된다. ‘백조’는 떠나갔고 이제 ‘호수’마저 잔잔해진 지금, 그녀가 지나간 당신의 가슴엔 어떠한 파문이 얼마나한 무늬가 그려졌는가. 당신도 나처럼 손톱이 할퀴고 간 마냥 선연한 아픔으로 아름다운 물결을 새기었는가.

이 영화를 보고 사람 속엔 누구나 ‘백조’ 한 마리와 ‘흑조’ 한 마리가 나란히 등을 대고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는 흑조를 숨기고 백조의 모습대로, 누군가는 백조를 잊고 흑조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결국 두 가지 다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예술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착각마저 든다. 니나와 그의 숨겨진 본능을 도출해 내려는 속세의 감독을 보면서 나는 한명의 유명가수를 떠올렸다. 아주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해 전교회장으로서 엄친딸이었던 보아, 그녀도 지금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백조’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지금의 카리스마 넘치는 인상이 어쩐지 훈련된 ‘흑조’의 모습은 아닐까 염려가 되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내가 너무 멀리간 것인지 모르지만 이 영화를 보고나니 우리 연예 산업의 거대 상업적 메카니즘하에서 지독히도 훈련된 아이돌 가수들의 이미지가 불현듯 중첩된다. 한류가수를 내세우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사업계엔 니나의 발레감독처럼 그들에게서 ‘흑조’라는 상업적 가능성을 발견해내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원래 ‘백조’를 잊어버리도록 유도하는 지도자들이 많은 건 아닌지. 우린 어쩌면 깨끗한 ‘백조’가 없다고 그들을 비난하면서 속으론 내심 ‘흑조’가 제공하는 쾌락만을 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대중은 재능이 없기 때문에 욕심이 많은 것이기에.

예술가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오래 살길 바란다. 물론, 이것도 예술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을 향유할 우리를 위해서라는 걸 고백한다. 또 물론, 예술가라고 그들 모두가 완벽에 집착한다고 믿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건네 본다. 나 역시 완벽에 집착하는 성향을 오래도록 가져본 사람이지만 그 완성도의 종착지가 죽음인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이 축복받은 예술가임을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다. 축복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 완벽에 집착하여 정신질환으로 발전하는 것은 삶의 불공평한 코미디요 비극적 멜로일뿐인 것이다. 예술가라고 다 완벽하란 법 없고 그랬다고 다 죽어서도 안된다. 그들은 어쩌면 예외의 인생을 살다갔을 뿐, 예술에 대한 미화나 찬양이 곧 모방이나 롤모델로 동격화 되어선 안될 것이다. 비예술가인 난 그래서 이렇게 마음대로 말할 수 있고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부럽고 신기한 건 그들의 슬픈 운명이 아니라 그 운명으로 남겨진 그들의 창작물이요, 그로인해 맛본 진하고 오래된 감동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그들이 만들어 준 그것을 낼름 받아 먹으면 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처음으로, 예술가가 아닌 것이 미안하다.

어제, 봄비가 내렸다. 비는 꼭 을씨년스러워 가을비같았지만 봄이 오는 길목에 내렸으니 너를 ‘봄비’라 불러본다. 이름을 부르고 나니 봄을 손짓하는 모든 생명짓이 그리워진다. 바람이 아직 차다. 그래도 온다하면 조금은 설레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 그만 이 변덕이 부끄럽다. 그러고보니 예술하지 않아도 예술가가 아니어도 이 영화, 다시 시작하기 두려운 춘삼월에 더없이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우린 예술을 못해도 그것으로 울고 웃을 수 있으니, 봄이 되지 않아도 꽃피고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 아니던가. 그래, 얼마든지 영화로 거울을 깨고 내안에 본성을 확인해도 좋을 영화이다. 그렇게 깨부수고 발견한 나만의 그것, 당신도 나도 그건 꼭꼭 숨었던 ‘흑조’가 아니라 한 송이 ‘흑초’ 이었음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비록 애타는 가슴으로 까맣게 타버린 꽃이라도 그을린 재를 모아 다시 부활하는 만개의 봄날이면 어떨까 싶다. 완전히 연소해진 잿더미 속에서도 꿋꿋이 불사하여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새. 어느 바람부는 봄날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그런 날 우린 ‘백조’도 아닌 ‘흑조’도 아닌 한 마리의 ‘불사조’로 다시 피는 꽃이 되자. 비록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더라도. 예술가는 적고 대중은 많더라도. 봄은 느끼고 시작하는 대중들의 것이므로. 우리는 그렇게 인생이라는 예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므로.



완벽이란 건 통제를 통해 이루어 지는 게 아니야.
해방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지.
스스로 놀래킴으로써 관객을 놀래키는 거야.
탁월함, 그건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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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1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보들의 결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은 어떻게 살아도 평생 바보는 아닐 줄 알았던 자신이 결국 바보일 수 밖에 없었던 당시 현실을 실컷 욕설하는 글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욕보이는 능력을 타고난 존재이다. 존 케네디 툴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 작가는 아무래도 ‘문학’으로 자신을 조롱하며 ‘글재주’로 현실을 견뎌낸 것 같다. 뭐 대부분의 문인들이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겐 문학이 왜 희망이 되지 못했을까. 아니 왜 끝까지 희망으로 문학을 하지 않았을까. 차라리 다른 걸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니 할 줄 아는 게 오로지 문학만 있었다면 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소설은 많이 아는 자가 많이 아는 것을 토로하는 거대, 거사의 현장이었다. 대체로 어떤 아비규환의 참사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나는 그의 지속적인 토악질이 고통스러웠다. 책을 덮고도 사건현장인 그곳, 그가 달아난 연민의 구덩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그건 페이지를 넘길수록 두터워진 슬픔의 더께때문 이었을까. 이 작품은 주인공이 웃길수록, 상황이 기가 찰수록 더더욱 쓸쓸해지는 구석이 있다. 불행히도 나는 오백 오십 페이지나 이 서러움을 견디고 참아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묵직한 알 수 없음의 실체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건 애환이 아니라 애증이었다. 전대미문의 애증후박(愛憎厚薄) 코미디, 미국은 이런 이야기가 대단히 잘 먹히는 나라였다.

허나, 여긴 미국이 아니고 나는 미국인이 아닌지라 이 작품이 전혀 웃겨주는 코미디로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식으로 연출해보라 한다면 가족간 약간의 신파가 섞인 新조폭계(?) 블랙 컬트무비쯤 될까. 우리네 조폭코미디는 ‘컬트’라기 보다는 ‘컬투’에 가까운데 분위기는 오히려 시니컬한 비극쪽으로 이해되었다. 너무 웃기면 끝에 가서 눈물도 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여러 번 당하고 나니 결국 눈물도 슬픔이 되는 것이었다. 그건 이 작품을 집필한 작가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더더욱 막지 못하는 어떤 목메이는 숙연함이라 고백하고 싶을 정도로.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美德)은 작가와 어머니의 실제 관계가 본 서사에 투사되었다는 그림자효과일 것이지만 그러한 작가는 정작 이 작품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자살하였다는 것 또한 충격적인 악덕(惡德)일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한 어머니의 끈질긴 투항으로 작가 사후에 출간된 이 작품이 퓰리쳐 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는 것은 다시 봐도 대견한 공덕(功德)의 드라마였다. 그렇기에 우린 이 작품에 후덕(厚德)한 인심을 발휘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이 책은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와 같이 바보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니 정작 바보를 명백히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책에서 ‘바보’는 등장하지 않는다. 혹시 그들이 ‘바보’로 보였다면 그 바보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결탁’하지 않는다. 그 어떤 무엇을 결탁하여도 어짜피 바보 짓일텐데 그건 바보를 두 번 죽이는 일 아닌가. 그들은 그럴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차라리 온전한 바보였다면 조금 덜 슬펐을까. 그들은 딱 바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영리했다. 다만, 그들이 한데 모인 모양새를 보니 마치 대단한 인권신장을 위해 집회를 결성한 듯 보여지기는 했다. 이들의 탄탄한 결속력이야 어짜피 소설가의 몫일 뿐이었다. 다행히 검둥이, 뜨내기, 부랑자, 이방인, 퇴역 빈민등으로 구성된 뉴올리언스 프렌치 쿼터 구역의 주민들은 단지 모여들었을 뿐인데 ‘버번거리 광란의 사고’라는 기사로 대서특필된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흥행에 성공한 것이요, 스타로 탄생된 인물도 있었으니 ‘바보들의 결탁’은 이들 바보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젠 체하는 다수 ‘바보’들의 시각일 뿐이었다. ‘바보’는 부끄러운 오해였고 ‘결탁’은 치졸한 오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똑똑했으며 그 모임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모아놓고 보니 그들은 모두 인생의 패배자요, 하층민인 것은 더욱 분명해 보였다. 다만, 그들은 바보로 보였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결탁도 의미성을 부여받지 못할 것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성되었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그 모임이 어떤 중요한 결정의 순간임을 암시하는 生의 갈림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보도 모이고 보면 문학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 바보도 그려놓고 보니 이토록 생생한 주연으로 탄생하였다는 것, 모임아닌 모임, 이 한 번의 결탁은 허구이상의 현실감을 제공하며 철저한 비현실속으로 독자를 몰입하게 하였다. 그것은 이 책을 읽어 내려갈 땐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덮고 난 후 서서히 밀려드는 웅장함이었달까. 바보에 압도된 중력의 힘은 마치 거구의 육체로 등장한 주인공의 쇼크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남들은 죽는다고 웃어 대지만 나는 내가 나인 것이 얼마나 죽도록 슬프단 말인가. 이 책은 바로 실컷 웃다가 천천히 울게 되는, 울다가 다시 살이 돋아나는 그런 책이다. 이 책에서 다양한 종류의 바보들이 결탁하여 앞으로 무언가를 펼칠 것으로 기대되는 최초 발기대회쯤으로 보이는 그들의 마지막 아우성은 애처롭게도 어리숙한 사복경찰의 검거로 중단된다. 잡으려고만 작정하면 모두 하나같이 잡혀들어 갈 이유가 있었기에 그들은 우발적으로 모인 것이 필연적으로 흩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그네이셔스는 백화점 앞에서 그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불량한 행색 때문에 경찰의 불시 검문을 받지 않았던가. That's all right !, 그러므로 ‘바보들의 결탁’은 결과적으로 바보짓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단 한명 우리의 주인공 이그네이셔스는 가장 극적인 탈출을 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 같은 새로운 시작을 예고한다. 허나 그가 그곳을 탈출하였다고 과연 바보의 삶을 버리고 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짜피 또 다른 형식의 바보로 살아가기 위한 변장이나 회피의 연장은 아니었을까.

특이하게도 이 소설은 과거나 미래를 말하지 않는 작품이었다. 이그네이셔스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 바보가 되었으며, 과연 앞으로도 계속 바보로 살아갈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만큼이나 기구한 작가의 운명때문이기도 했을까. 바보는 탈출하는 순간 그러한 마음을 먹는 순간 더 이상 바보로 행복하기는 힘들다. 물론, 서사의 중간에 여자친구와의 튀는 학창시절이, 마찬가지로 여자친구와의 불안한 미래가 언급되긴 했지만 그건 통털어 지금의 이그네이셔스를 더 부각하는 참고사항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그는 아무리 돌아가고 아무리 나아가도 지금 제자리, 그 육중한 거구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무를 것으로 보였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시점에만, 오늘의 시간에만 매달려 하루하루 살아가는 허무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내일 희망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와 노동여건때문 만은 아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가는 마치 자신을 변호하듯이 이그네이셔스가 이렇게 된 이유를 꽤 사회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오염된 미시시피강을 아버지를 대체하는 상징적 존재로 미화시키기 위한 미국의 노력을 현실과의 소통 실패문제로 진단하며 전 예술분야에 걸친 미국의 이러한 위선때문에 자신은 소통이 부재된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설파하고 있었다. 자연의 진실마저 왜곡하고 변형하는 그들과 소통하고 싶지 않다는 신념은 옳고도 아름다웠다. 자연과 사회와 인간과의 소통에 실패한 이그네이셔스는 누가 뭐래도 초록색 사냥모자와 장밋빛 앵무새를 개성있게 코디하며 보란듯이 자신을 과장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사회에 어울리는 유사색이 아니라 정반대의 보색으로 자아를 배색한 그는 결코 크리에이티브한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그의 주변엔 하나같이 튀는 선글라스와 우스꽝스런 악세사리, 싸구려 텍스쳐의 옷감등으로 억압된 자아를 분출하는 지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마치 가장무도회를 참가하듯 각자 개성이 넘치다 못해 시각적 요소만으로도 공공질서에 피해를 주는 것으로까지 묘사된다. 동등하게 수상해 보이는 이들은 미국식 ‘버티기 정신’과 ‘요령’을 타고난 자들이기에 오가는 말 또한 자기중심적이며, 행동거지 또한 감정적이다. 속사포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는 이들 간의 대화는 1960년대 미국 뉴올리언스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진지하게 상기시키며 그들만의 독특한 지방색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대가 다르며 나라가 달랐던 내가 모두 공감할 순 없었지만 뭐랄까, 무엇보다 ‘바보’된 그들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보는 아니었지만 바보로 보여져 바보같아진 그 ‘마음’ 만큼은.

몇 가지 의미심장했던 장치들을 떠올려 본다. 표면적으로 그의 첫인상이 되 버린 ‘초록색 사냥모자’의 초록색, 그것은 왜 초록의 계절과 초록의 내일이 되지 못했을까. 이 책에서 이그네이셔스의 첫 번째 직장 ‘리바이 팬츠’사(혹시, 리바이스 청바지의 회사인가 싶었던)의 여든이 넘은 경리보조 미스 트릭시도 하필 초록색 셀룰로이드 챙모자를 쓰고 출퇴근을 한다. 그 외에도 작가는 서사에서 초록이나 파랑을 그다지 싱그럽게 묘사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 답은 바로 리바이 팬츠사의 안주인 리바이 부인에게 있었다. 도저히 60년대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그녀의 대저택엔 딱 하나 색상보정이 되지 않은 불량한 TV가 있었는데 그 화면에 등장한 배우의 얼굴은 온통 초록색이었던 것. 총천연색이 되지 못한 배우의 초록 얼굴은 흡사 시체를 연상시키며 공포스럽고 혐오스런 인간군상을 표상한 것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이그네이셔스의 모자나 곧 죽음을 앞둔 트릭시 부인의 모자나 미국의 보수기득권 층에서 보기엔 매한가지 초록의 흉물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 이 작품에서 가장 촌철같은 철학적 메시지로 자주 언급되는 철학서는 어떤 의미에서 이그네이셔스의 좌우명이자 우리네 삶의 아포리즘이 아니었을까. 중세사상의 기반을 닦은 철학서 <철학의 위안>에서 핵심개념으로 등장하는 로타 포르투나이rota Fortunae, 즉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 책을 덮고 나자 문득 실제적 효력을 발휘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바로 ‘우리의 운명은 행운과 불운이 주기적으로 번갈아 찾아온다’는 이그네이셔스의 말을 빌어 그의 탈출에 행운을 기원함과 동시에 내게도 운발의 전이를 소원하는 일말의 기대때문이었다. 여지껏 내 삶이 불운이었다면 앞으로는 행운일 수 있다는 희망, 오늘 잠시 행운이었다면 다음에 찾아 올 불운을 잊지 않으며 지금 오만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그것은 내가 오백페이지 넘는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따스한 잠언이었다. 이 책은 ‘바보’의 유머라기 보다 ‘현자’의 충고에 가까웠다.

겉으로 바보로 보였지만 그가 누구보다도 지적이고 철학적이었다는 것을 일일이 증명이라도 하듯 작가는 이그네이셔스의 언어, 문학적 능력을 열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작중에서 그는 ‘구어체’와 ‘문어체’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인물로 표현되었는데 그는 주로 ‘대화’할 때 세계 언어를 쓰는 사람이었고, ‘저술’할 때 세계 철학을 반영하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말빨과 글빨이 되는 문학적 소양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일상의 대화에서 ‘벨탄샤웅(독일어, 세계관’), ‘세구로(스페인어, 물론입니다’), ‘레자프리캥(불어, 아프리카인들)’등의 외국어를 관용적으로 사용하며 언어의 유희를 일상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머니의 친구가 된 이탈리아계 아주머니가 사용하는 이탈리아 방언에서부터 라틴어, 이디시어까지 때와 곳을 불문하고 자유자재로 튀어나오는 그의 언어구사력은 말들의 잔치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작가가 부여한 주인공의 능력은 혹시 작가 자신의 무기이자 매력은 아니었을지. 이러한 유희적 말장난과는 사뭇 다르게 그가 작정하고 연작한 근로청년의 ‘일기’나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글은 그의 사고가 마냥 엉뚱하고 터무니 없는 무지에서 시작된 것만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하는데 충분했다. 일기는 무겁도록 철학적이었고 편지는 차갑도록 논리적이었다. 어떤 반전과도 같이 글로써는 누구보다 지적인 면모를 보여준 이그네이셔스의 ‘저술작업’을 읽는 일은 이 작품을 넘기면서 가장 흥분되고도 놀라운 참 기쁜 순간이었다.

특히, 이그네이셔스가 리바이 팬츠사에 취직해 사장의 서명으로 거래처에 보낸 짧은 서한은 그의 세계관과 논리체계를 한눈에 증명하는 짧은 뉴스였으며 이 책에서 가장 짜릿한 시놉시스였다. 그건 거의 작품의 주제였고 작가가 에둘러 하고 싶었던 속마음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고발장으로 눙쳐진 그의 농담에 허가 찔리기라도 한듯 나는 착잡해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자사 제품의 바지기장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포목점 사장에게 그는 상대의 황폐한 세계관과 상업적 발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뒤떨어진 마인드를 신랄하게 지적한다. 한낱 뭣도 모르는 치기로 비롯된 억지라 하기엔 진실로 아까운 문장들이었다. 그저 전통적인 방식의 바지 기장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을 벗어난 칠부 바지를 남성패션의 대명사로 만들지 못하는 기업은 광고, 판촉의 전략에 전혀 창의적 마인드가 없다는 것과, 디자인과 재봉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리바이 팬츠’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유통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판매업자의 자질이라 꼬집은 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처음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는 여타의 글에서도 대체로 투쟁적, 호전적인 성향을 유지하며 사상으로서는 누구보다 혁명적인 환타지를 논리화하곤 했다. 이것은 대부분 현실에 무능력한 자들이 글로써 세상에 항거하는 전형적인 무혈문학의 한 장르일 것이다. 그런데 반복되는 이 글들의 기저에 흐르는 하나된 공통점이 있었다. 책을 덮고 서서히 떠오른 단어, 그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바보에겐 주어지지 않는 상대적 ‘박탈’이었다. 그는 혹시 새로운 발상, 새로운 형식을 수용하지 못하는 기득권 세력을 향해 혼자서 바위에 계란 던지듯 미친 척하고 그까짓 종이 한 장을 휙, 날려 보낸 건 아닐까. 실패한 사람들에겐 기회조차 주지 않고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겐 무조건 편견을 가지는 것에 대해 자기식으로 울분의 펜을 휘갈긴 것은 아닐까. 그것은 혹시나 완성도가 높지 않았을지 모를(그러나 누구보다 새롭다고 생각했을) 자신의 원고를 문전박대한 세상에 대한 분노의 항거는 아니었을까. 그의 방바닥에 온갖 잡지사에 보내려던 그 많던 원고들은 쓰디쓴 시위의 각혈이 아니었을까. 그 서한이 오십만 달러의 소송에 휘말리게 될 운명이었던 것은 역으로 자신의 글이 오십만 달러의 값어치가 있다는 타당한 계산에서 비롯된 반증은 아니었을까.

비록 소설이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그네이셔스가 어머니와의 갈등을 풀지 못하고 끝내 헤어지는 것으로(마지막 여자친구의 구원등판은 너무 허리우드적이지 않았을까) 이야기는 끝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파멸의 주체이자 평화의 적군이었다. 그의 집 현관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이라는 문구가, 집 정면 벽에는 ‘선의의 인간들에게 평화를’이라고 써 있었다고 하던가. 악의가 아닌 선의를 가진 이그네이셔스가 평화를 얻기 위해 치룬 댓가는 어머니와의 이별이었다는 것이 나는 가장 가슴아팠다. 그건 문학으로 부자관계를 이별시킨 마지막 자기예언으로 보였기 때문에. 실제로 작가는 자신의 성공을 기대한 독선적인 어머니와의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결국 갈등의 정점에서 그는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자살로 生을 마감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토록 소원하던 아들의 입신을 위해 마치 잘 짜여진 각본의 개성있는 조연으로 인상깊은 연기를 펼치신 한명의 배우와도 같았다. 그렇다. 소설가는 그 둘 중 하나로 충분할 것이다. 나는 이번 비운의 소설가 한 사람과 뛰어난 배우 한 사람으로 인해 그들의 기이한 예술적 정신에 크게 감명받았다. 사악한 문명속에서 추락을 막아주는 안전장치로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며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유문이 막힌다’는 그의 재치는 평소 ‘횡경막이 껄끄럽다’와 ‘십이지장에서 멈추었다’는 나만의 문장노트에 추가하고 싶은 애교였다. 그가 제시한 두 가지 트라우마, 배턴루지의 강사직 면접 탈락과 동거동락하던 개의 죽음은 한 인간의 내적, 외적 동기를 희석시키는 적절한 사건으로 구성상 치밀했다고 느껴진다. 그 외 검거실적이 없어 화장실에 감금되던 순찰경관 민큐소, 오프닝 나이트때 새와 함께 대박을 친 바텐더 달린, 포르노 유포검거에 큰 공로를 끼친 꼬마건달 조지, 부랑자와 검둥이, 청소부 사이에서 번민하던 뒷골목 자아 존스, 그들의 약점만을 공략하던 ‘기쁨의 밤’의 영업주 레이나, 이그네이셔스로 회사생활의 참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관리자 곤잘레스,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치매이었던 귀여운 바보 미스 트릭시, 아이들을 통해 남편을 조종하려던 리바이 부인, 또 그것을 적당히 속아 넘어가준 현명한 바보 리바이 사장, 철도회사에서 사십오년 근무한 퇴직연금으로 데이트하던 엄마의 남자친구 클로드, 그리고 그의 둘도 없는 천생연분 여자친구 머나, 이들 모두에게 나는 ‘미국에선 유죄로 밝혀질 때까지는 누구든 무죄’라는 이그네이셔스의 충고를 빌어 안부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다시 바보가 그립다. 이제 바보도 전략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라는 바보 프로젝트가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합류한지 오래이다. 바보를 생각하자니 퍼뜩 자신을 ‘바보’로 낮추어 부른 김수환 추기경이 그리워진다. 이 책에서의 바보는 그러한 따스한 바보가 아니고 성공하지 못한 부류, 돈없고 빽없는 그러나 자존심만 있는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보여진다. 스스로 자각하는 바보가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바보인 것이다. 모두 다 진정한 진짜배기 바보는 아닌 것 아닐까. 정말 바보들은 자신들의 자화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실제 바보가 아니면서 바보가 편할 때, 바보가 유리할 때, 바보가 좋아보일 때의 그 바보의 개념만 원했던 것은 아닐까. 오늘 내가 슬퍼지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스스로 생각하는 바보도 남들이 바라보는 바보도 아닌 나는 어떤 종류의 바보일까,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모든 욕심 버리고 바보같이 살고 싶다가도 한편 세상모르는 바보로 비쳐지는 것이 두려운 이 얄팍한 갈등 때문이다. 산다는 게 바보여야 할 때도 있겠지만 누구보다 현자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 합리화하며, 늘상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속세에 연연하는 이 미련을 그들을 통해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동감을 말하고 싶지 않은, 적당히 눈감아 주고 또 적당히 웃어주며 사는 것이 편하다는 충고를 해주고 싶은 비겁함 때문이다.

오, 포르투나, 그대 변덕스러운 여신이여. 이번엔 어느 차례의 수레바퀴이실 런가. 삼신할머니의 랜덤만큼이나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여. 나 오늘만큼은 그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려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복권을 바라는 일확천금의 유혹에서 벗어나 보고자 한다. 그건 행운이냐 불운이냐 눈감고 바퀴를 돌려대는 댁들의 일정일뿐 나의 계획표는 내 손안에 든 나만의 펜으로 작성하려 한다. 문득 이 책에서 한 번도 제대로 공연하지 못한 장밋빛 앵무새가 떠오른다. 장밋빛 꿈을 꾸던 그 새는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앵무새를 슬그머니 두줄긋고 그 위에 파란 잉크로 ‘행복의 파랑새’라고 적어본다. 그리곤, 그 옆에 ‘바보’ 이렇게 새겨본다. ‘사랑해’ 말하고 나면 더 사랑하고 싶어지듯 ‘바보’ 하고 나니 바보도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혹시 그대에게도 이 바보짓은 유효할지 모르겠다. 그래 가끔은 바보도 하늘을 보자! 우린 서로를 바보라 불러도 행복해지면 되는 사람들, 저 하늘을 보며 바보처럼 활짝 웃어주면 그만인 사람들, 그렇게 결탁하여 오늘 못다한 혹시 행운일지 모를 내일을 맞이할 사람들, 그리고 남몰래 그들을 기다리는 바보같은 나, 정말 바보도 좋을 사람들이니까. 우리의 결탁은 한낱 바보짓만은 아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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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 Unknow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거의 개봉과 동시에 보았기에 지인들의 평을 들을 수 없었다. 결말의 보안 유지를 위해 전세계 동시 개봉을 결정했다는 아주 기초적인 정보조차 나는 알지 못했다. 영화관에 가지 않으면서 책으로 선회한 나는 오로지 이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뿐. 그리고 영화를 보고 원작이 몹시 궁금해지긴 처음이라-이런 경우 원작이 영화보다 나을 거라는 기대를 포함하여-그런데 또 막상 원작을 집어 들려니 이미 알고 있는 반전의 실체를 자꾸 분석하려 들 것이 뻔하므로-이상야릇한 기분으로 극장을 빠져나왔다. 결론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주 들어 <언노운>의 영화관계자들의 비평을 보니 반전에 대한 실망이 많았기로 나는 비관계자 입장에서 좋았던 점을 기억해보고 싶다.

 먼저, 나는 이 작품의 배경인 베를린이 참 좋았다. 독일에 가보지 못했기에 겨울배경의 베를린은 회색 그 이상의 다크그레이였다고 할까. 마틴 해리스역으로 분한 리암니슨도 좋았지만 독일출신 다이앤 크루거(Diane Kruger, 1976 년생)는 개인적으로 더 좋았다. 찾아보니 약 5년 전에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2005>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미스터리한 인물로 등장했던 기억이 다시금 새록새록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사라진 여자친구로 등장하며 시종일관 차갑고도 지적인 매력을 잃지 않았다. 마틴 해리스의 아내로 등장한 미국배우 재뉴어리 존스는 낯은 익었지만 출연작이 생각나지 않았고 이번 영화에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아무래도 영국풍보다는 독일풍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자체가 여주인공들의 대결구도나 로맨스를 말하는 장르가 아닌지라 여자 배우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였지만 다이앤 크루거는 분량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듯하다.




 


< 다이앤 크루거 주연,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 2005>


마틴 해리스 박사가 베를린에 도착해 교통사고를 당하는 초반부 장면에서 바로 그가 타고 있던 택시를 운전한 여성이 다이앤 크루거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공항과 호텔앞에 즐비한 모든 택시는 화이트 벤츠였다는 것, 그리고 곧 처참하게 물에 빠져 박살이 났다는 것, 그런데 유리창을 무지막지하게 부수고 탈출하는 주인공도 바로 그녀였다는 것, 미모의 여기사는 설상가상 정신잃은 마틴 박사까지 구출했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특수 훈련을 받은 요원의 액션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활약덕에 그녀가 마틴 박사의 사건에 개입이 되었을 것이라는 예상, 그리고 꽤 비중있는 조연이겠구나 하는 것. 후자는 맞았건만, 전자는 보기 좋게 아니었다.



박사는 72시간만에 깨어나 다시 호텔로 간후 아내와 재회하지만 아내는 자신을 몰라보고 누군가 엉뚱한 사람이 자신이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나 혼자 바보 된 상황인 것이다. 처음엔 사고로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생각했지만 점점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된 그가 기억을 더듬어 원래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 혼자 사건을 추적한다는 설정은 그다지 새로운 발상은 아니었다. 박사가 죽어야 하는 이유 뒤에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런 경우 대개 아내가 치정에 얽혀있거나 스파이와 관련되어 감쪽같은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오래전부터 실행되어온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정도. 만약 극적으로 자신을 찾게 된다하면 주변인의 배신에 가슴아파 하며 그들에게 복수를 한 후 최초로 자신을 구해준 택시운전사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엔딩처리 될 것이 자명해보였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 공식과도 같은 '잃어버린(빼앗긴) 자아찾기'에서 두가지 차별화 전략을 내세웠다. 하나는 배후조직의 음모(테러의 목적)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연출속에서 나름 21세기 적으로 신선했다는 것이고, 나머지는 다시 찾게 된 자아가 원래 자아대로 살지 않고 우리를 배반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우리를 위로한 결과가 된다는 것. 여기서 이 영화가 그토록 차별화를 선언한 ‘반전’의 물음표는 아마도 ‘지금 당신이 찾고 있는 자신이 진짜 자신인가’에 해당하는 질문이 아닐까. 지금 누군가 당신을 죽이려 하는 음모와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전 당신이라는 인물을 만들어야 했을 음모도 있었다면, 하고 말이다. 혹시 그 음모의 희생양이 당신이라면 당신이 찾고자 하는 당신의 원래 모습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아니 찾을 수 있기는 한 것일까에 대한 수수께끼 그것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찾고자 하는 당신이 당신이 찾아야 하는 당신이 아니라면 당신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입증 할 것인지, 하는 허를 찔린 듯한 이 질문은 영화 전반 내내 극적인 긴장감을 유도해 내는 데 성공한 듯 하다. 내가 아는 내가 나의 진짜가 아니라는 진실, 그것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웃기지만 아니 웃기지도 않지만 슬픈, 아니 슬프진 않지만 우스운 정말 알 수 없는 비현실. 영화는 그것을 현실화하였다.

사실, 이 궁금증을 해결하는데 다이앤 크루거는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바텐더로 일하며 돈을 모아 영주권을 얻고자 하는 불법체류자로서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해나가던 이방인이자 하층계급의 인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힘없고 능력없어 뵈는 젊은 처자가 해리스 박사에겐 유일한 의지가 된다. 그녀는 단순한 거래가 일단락 된 뒤에도 해리스 박사를 위험에서 또 한번 구출해내는 수호천사의 역할을 마다 않는다. 우연히 국제적 사건에 휘말리게 된 처자가 꼭 그러했어야 할 당위성을 나는 쉽게 찾을 수 없었지만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는 감성의 공감대를 두 배우가 잘 이끌어 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영상이 주는 시각적 개연성의 효과이자 영화만이 제공하는 매력일 것이다.

이 작품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파괴적이고 거대하진 않으나 과장없이 관객들에게 생각의 여지를 제공한 점이 장점인 영화였다. 박사가 헤메이는 눈내리는 베를린 거리는 아마 원작과는 상이한 연출인 듯한데(원작의 출장은 파리로 확인) 택시가 사정없이 다리밑으로 추락하는 신, 후진으로 도망치던 거리 추격신, 호텔 폭파신 등은 내 경우 아이와 관람하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또 하나, 병원 간호가사 알려주었던 전직 동독 스파이가 동료에게 배신하지 않기 위해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다는 설정도 의외로 여운을 던져주며 눈길을 끌었는데 이는 관객을 위한 각색의 묘미로 보여진다.

이번 영화에서 나는 늘 테러의 주체로 등장하는 이슬람계에서 벗어나 테러의 주체는 누가되었건 그 테러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임을 깨우치며 기분좋게 반전을 즐겼다. 반전의 파워가 어찌되었건 그건 보기드문 작품임에는 분명했다. 테러를 계획하는 이유에서도 단순한 보복이나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GMO'(유전자 변형농산물)과 같은 인류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이슈가 등장한 점도 의미있었다. 아마 원작에서였다면 사람의 기억과 자아의 합체,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간의 심도높은 성찰을 엿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로도 짧았지만 내 기억만으로 나를 증명할 수는 없으며, 내가 아는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영화가 제공하는 메시지를 무리없이 전달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원작을 먼저보고 영화를 보았다면 나는 어떠하였을까. 그때도 반전이 새롭지 않다는 평가에 반기를 들 수 있었을까. 내가 생각할 때 이 영화에서의 반전은 주인공이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군지 알게 되었지만 갑자기 그와 일치되지 않게 정의로와진 위선이 아니었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우리로선 당연한 반가움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로서는 자신이 찾게된 자신을 (원한다 해도)벗어나기 힘든 것이 더 당연한 인지상정 아닐까. 동료의 배신과 생명의 위협이라는 조건부와 상관없이 약간의 갈등도 없었던 주인공의 단호한 태도는 좀 아쉬웠다. 그래도 같이 살던 여자로부터 다른 여자로 턴하는 방향인데 일말의 갸우뚱은 필요치 않냐는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미국영화의 옥에 티같은 한계이기도 한데 보스니아 내전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지나(다이앤 크루거)를 위해(?), 아니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그녀 때문에 마치 은혜를 베풀듯 갑자기 테러를 온몸으로 막아 내고 인류건강에 이바지 할 주인공으로 변모하게 되는 그 영웅심, 미국 영화의 만고불변의 진리, 그것은 어쩌면 가장 큰 이득을 위해 온갖 종류의 테러와 전쟁을 계획해 내는 미국 스스로를 향한 예술적 단죄이자 문화적 보상은 아닐런지. 그런데 더 큰 진실은 늘상 알면서도 그것에 울고 그것에 우는 우리네 정많은 인간됨은 아닐지.

그녀를 생각하며 독일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다. 유난히도 겨울을 싫어하지만 만약 겨울에 꼭 가야할 여행지가 있다면 나는 그곳이 독일이길 소원할 것이다. 나는 지적인 눈물이 좋다. 리암 니슨은 우리 나이로 환갑일 터인데 다음에도 액션을 하실런지 궁금하다. 다이앤 크루거는 아무래도 미스터리 장르에 어울리는 외모인데 이번 액션도 근사했다. 두사람은 나이차와 상관없이 지적으로 잘 어울렸다. 가는 겨울이, 혹 아쉽다면 이 영화의 흩날리는 눈발에 스산한 마음을 맡겨보면 어떨까. 차도녀는 역시 겨울이 제격 아닌가. 다가오는 봄이 살며시 두려워진 이 변덕의 미련이야 누구를 탓하리오만은 삶은 다행히도, 나를 대신해주는 또 다른 인생이 있더라는 것. 겨울이여, 잠시만 기다려 다오. 아직은 더 쓸쓸해지고 싶었다네, 나 아직은 봄처녀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네.
 


-다이앤 크루거 - 독일, 금발, 선글라스 차도녀 종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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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2-2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배경인 영화가 좋긴하지요.
근데 허리우드풍일 것 같아 일단 좀 꺼려져요.
책이 더 좋다는 말도 있고...
마지막 쓰신 글에서 풉~
저도 얼굴이 참 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문제는 도시적이지는 않다는 게 흠이어요.ㅋㅋ

한사람 2011-02-24 14:33   좋아요 0 | URL

얼굴은 찬데 도시적이지는 않다...음...
상상이 어렵다는^^
슬쩍 책 정보를 보니 영화와는 많이 다르더라구요
완전 출장배경부터가 파리니까요
영화에선 아무래도 삭제된 서사가 많을듯 하구요

책을 먼저 봤어야 하는데....

그럼 반전은 완전 충격이었을거 같아요!
 
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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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은 불운  

적어도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는 울분에 쌓일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공부를 잘 해놓는 것이 학교생활을 편하게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편임을 일찍부터 알아챈 꽤 눈치빠른 학생이었다. 나는 그 시절 흔치 않았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고 부모님이 늦은 나이에 어렵게 본 자식이었기에 그야말로 과보호의 울타리에서 성장기를 보낼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행동을 통제, 간섭하는 일상의 모든 잔소리들에 유난히 거부반응을 보이는 성향이 있어 부모님은 여느 외동딸처럼 나를 키우진 못하셨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의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일단 공부를 잘하는 것이 지름길이었기에 나는 편하게 살고자 공부를 한 경우였다. 백점의 시험지를 들고 가면 아무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내게 가장 극도의 반응을 불러 일으키던 '공부하라'는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공부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 공부를 잘 해 버렸으니까. 공부를 잘 해버리면 사실 많은 시간 공부 말고 다른 짓(?)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으니까. 처음부터 공부 안하려고 공부한 나였기에 나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그다지 부럽지 않았고 내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도 않았고, 공부를 잘하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는 친구들을 한마디로 맞갖잖게 여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나는 매일 혼나고 지겨운 잔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계속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불편한 학교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부분 우등생은 열등생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일을 거쳐 온 결과 공부를 잘하는 능력은 비교적 쉬운 분야의 기술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타고난 재능과 특별한 기술 없이도 반복해 시간을 투자하고 집중을 발휘하면 그래도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 내기 쉬운 쪽에 속했다. 내 경우도 투자한 시간과 시험성적은 비례했던 편이라 대저 '열심히 하면 대학간다'는 이치를 의심없이 믿어왔다. 우리시절 성적표와 우등상의 심리적 폭력은 막강했는데 이 성적 트라우마는 공부를 잘한 친구들이 결국 결혼도 사회생활도 성공할 것 같은 후광효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성적 트라우마가 극복되는 시기는 공부 잘했던 친구의 불행과 몰락을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듣게 되는 시점과 일치하기도 했다. 학창시절 매번 일등을 놓치지 않고 선생님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던 친구, 일류대학에 합격해 같은 독서실 플랭카드에 합격자로 이름을 떨친 그였지만 계속되는 사업실패로 보험영업사원이 되어 나타난 경우, 얼굴도 예쁘고 집안도 좋아 그 시절 자타공인 엄친아였지만 불의의 사고로 튼실한 중견기업의 후계자인 남편을 잃게 된 전교회장... 모종의 울분같은 게 형성되어 쌓이기 시작한 건 많은 부분 인생의 결정적 순간들을 보내면서 였던 것 같다.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실패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인생은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비교적 예측가능한 학창생활을 유지해온 나로서는 인정하기 힘든 生의 울분이었다. 특히 모범생으로 학생시절을 마친 나 같은 체제 순응자는 공부한 시간만큼 점수가 올라가고 그 점수대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예측불허의 상황을 견디기 어렵고 뜻밖의 결과에 극심한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주어진 모든 숙제를 제 시간에 제출했으며 한 번도 규칙이나 시간을 어기지 않은 내 경우 변칙적인 편법을 사용하거나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내심 적대시 하며 적당히 넘어가는 세상의 융통성에 울컥할 때가 많았다. 그러니 행여라도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으로부터 피해라도 당했다면 얼마나 원통하고 분개했을 텐가. 

바로 그 원통과 분개가 내 전부였던 시간들, 최근까지 나는 '사업실패'와 '어머니의 교통사고'로 그 시간들에 자유롭지 못한 인생을 살고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나는 보기좋게 망했고 내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어머닌 그 어떤 실수도 없었지만 현장에서 즉사했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함에서 벗어나 生의 울분에서 자유로와 지는 것만이 내 살길이라 여기며 지난 몇 년을 보냈다 할 수 있다. 이 두가지에 있어 내가 투자한 생의 노력들은 그 결과와 비례하지 않았다. 아니, 정반대였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나는 열심히 살지 말고 대충살았어야 했을까. 왜 인생은 잘못하지 않아도 벌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왜 그 많던 선생님들은 열심히 한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실수하지 않아도 죽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넋두리가 길었다. 내 인생의 울분을 생각하자니 잠시 이 책의 울분을 잊게 된 탓이다. 이 책은 채 스무 살도 채우지 못한 청춘의 죽음을 적나라하게도 클로즈 업하여 그것을 확인하는 독자로 하여금 그 상황자체를 울분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절대로 동의할 수 없음이 울분의 연대를 선동한다. 하여 작품속 젊음이 움켜 쥐고 있던 울분은 작품 밖 독자의 울분으로 완벽하게 전이되며 급기야 내 안의 울분과 정면에서 마주치도록 한다. 내 울분을 생각하자니 이 책의 울분을 공감하자니 죽지 않고 살아있는 지금의 나는 그래도 운이 좋았던 것일까, 싶어진다. 책을 덮고 나는 '울분'이 순간적으로 '불운'으로 읽혀지기도 했다. 내 울분을 알아달라 하기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너무나 미안하도록 불운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죽음을 비극이라 칭한다면 기실 비극의 인생을 살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 비극의 내용이 천차만별인 것만이 우리를 희극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참 서러워지는 독서였다. 

울분은 인연

이 책은 이미 죽은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까지를 회상하는 글이다. 즉, 화자는 이미 죽고 난 후, 자신이 죽은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일정시기 죽음의 열차를 타고 온 여정의 풍경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화자의 시점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화자는 비극의 당사자로서 절대 자신이 이렇게 될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핀을 맞아 삶과 죽음의 중간상태인 림보상황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동시에 조율하고 있었다. 죽어가고 있고, 결국 죽었기 때문에 가능해보인 이 서사의 구조가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한다는 작가로서 미국현대史를 기록하는 일종의 문학의 예지夢으로 느껴졌달까. 앞날을 예견한 꿈이라 하기엔 시리도록 차갑고 처연했다. 어찌 보면 마커스는 자기 예언효과를 정확하게 이루어낸 성공의 인생을 살았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악몽일지라도 지겹도록 미리 꾼 꿈을 실현한 것이니 말이다. 작가는 한 청년의 회상을 통해 철저하게 개인의 영역인 꿈속에서도 1950년대 미국사회의 무의식이 개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상기시켰다. 마커스에겐 사회가 예상하는 죽음의 시나리오가 있었고 그는 거짓말처럼 똑같이 죽어버린 청춘이었다. 그런데 죽어지는 방법 또한 반항, 퇴학, 징집, 전사로 이어지는 부정적 시나리오의 극대치를 마치 자신이 수행해야 할 최대 목표치라도 되는 것처럼 빈번하게 되새기던 그였기에 그의 죽음은 오히려 그가 가졌던 울분만큼이나 화가 나지 않기도 했다. 차라리 작가가 의도한 화자의 의식적 강박증(자신은 전사할 것이라는)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 더 무섭고 불안했으며 행여 그렇게 예고를 하였음에도 주인공이 죽지 않았다면 그것이야 말로 반전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다행히도 이 작품은 그렇게 죽어버린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작가가 집필했다는 것이 안도의 한숨으로 남을 정도였다.

이렇듯 끝내 자신이 죽어진 광경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고백을 멈춘 화자는 한국전에서 중공군의 총검을 맞아 모르핀이 투여된 상태에서의 기억을 한 번의 호흡으로 쉬지않고 내달렸다. 숨가쁜 회상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책을 덮을 수 없도록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게 한 작가의 집중력이 대단했다. 특이했던 건 이 작품의 시작이 한국전쟁이며 마지막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어떤 책을 읽고 나면 꼭 그와 관련된 뉴스를 확인하게 되는 징크스가 있는데 이번에도 책을 덮고 나니 거짓말같이 신문 일면에 등장한 기사가 있었다. 바로 중공군에 맞써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군인들의 유해 몇 십구를 강원도 산골 어느 참호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신문에서 확인한, 수적으로 압도적이었던 중공군을 맞아 온몸으로 투항한 그들의 결과는 잠시 내게 모르핀이 생각날 정도의 숙연한 고통에 머무르게 했다. 하필이면 왜 미국 뉴어크 지방의 유대인 촌뜨기 대학생이 한국전쟁이 시작될 무렵 대학에 입학하고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죽었고 죽고 난 후 휴전협정이 되었을까. 소설속 미래, 작가의 과거, 나의 오늘이 겹쳐지며 지구를 몇바퀴 돌고 난 별똥별 하나에 깊숙이 관통된 기분이었달까. 어쩌면 그 별똥별이 오늘 사는 모르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마커스가 대학에 입학한 첫날부터 아버지는 '아들이 죽을까봐' 노심초사, 전전긍긍하였고 아들이 죽고 나서 아버지는 '내 눈에는 죽음이 오는 것이 보였다'며 자신도 죽을 것이라 외친다. 한국전쟁의 기간동안 바다건너 미국의 노동자 집안, 유대인 부자에게 일어난 일은 나와는 다른 시대를 살아온 미국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는 나로 하여금 역사야말로 개인의 비극이 펼쳐지는 피할 수 없는 '무대'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리고 현재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무대'가 엮어내는 그 어떠한 '공연'과도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모든 것이, 모두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은 세상이라는 인생의 바다에 내던져진 우리네 모두의 '울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울분'은 이미 연대하고 있었던 인간들의 필연적인 우연의 총합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슬픔의 다른 말은 아니었을까.  

미 중동부의 조그만 이류대학에 다니던 한 젊은이의 죽음이 60년 후 한국의 한 독자와 어떤 우연을 발생시킨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필연적으로 자꾸 발생하는 우연들이 인연이라 본다면 사람은 그 인연 때문에 태어나고 죽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인연이라고 해서 연분처럼 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거기엔 악연도 추연도 있다. 어느 날 발생하는 뜬금없는 우연도 나와 전혀 무관한 인연은 아닌 것이며 내 인생안에서 생겨나는 그 어떤 일에도 무고한 시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 그것으로 이루어진 사회와 국가, 그 국가의 역사가 지금의 나와 어떻게든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는 말과도 같다. 다만 모든 우연이 밝혀지고 드러나고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늘 비극의 무대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스토리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에 살아간다면 누구나 어떤 방법으로든 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기실 비극이 가지는 가능성은 인간인 이유로 백프로일 것이지만 비극의 다양성은 결국 인연의 차별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행운이냐 불운이냐의 운명에 기인한다 할 것이다. 해서 나는 이 책을, 이 작품의 '울분'을 '불운이 되는 인연으로 인한 슬픔'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울분을 쌓게 한 조건으로 작가는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와 '미국'이라는 학교를 그 배경으로 내세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본다면 참 잘 짜여진 치밀한 계획의 인연이었고, 완벽한 슬픔이었다.  

울분은 무의식

마커스는 유대인 출신 노동자 집안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자신의 영웅으로 삼은 아들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도살장에서 닭을 죽이는 방법을 목격하고 역겨워도 닭의 내장을 꺼내는 일을 배웠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집 앞의 쓰레기통을 치워야 했다. 칼을 쓰는 아버지와 피가 튀긴 어머니 밑에서 그는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책임성, 근면, 성실, 정직함을 배웠지만 그러한 정육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A학점을 받으려던 우등생이었다. 마커스가 내세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땐 주로 '칼'과 '피'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를 떠올렸다는 점에서 이는 훗날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막연하게 두려워하게 되는 첫 번째 무의식으로 자리잡았다는 생각이다. 마커스는 칼과 피를 보는 아버지의 일을 살인행위가 아닌 누구보다 '정결한 고기'를 얻기 위한 직업적 행위로서 합리화, 정당화 하지만  생계를 위해 윤리를 저버려야 하는 도덕적 양심은 그의 무의식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가족의 무의식은 어머니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칼을 씀으로써 피를 씻으면서 먹이를 만드셨지만 그러한 칼에 흉터가 난 올리비아는 강경하게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몸에 칼을 댄 행위에 도덕적 잣대를 적용한 것이다. 또한 무의식 바깥의 표면적인 의식으로는 자신들과 신분이 다른 올리비아를 '허턴 양'이라 존칭하며 경계심을 계급화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작업할 때 '칼로 네 손만 자르지 마라, 그럼 다 잘되게 돼 있어' 라 말하며 칼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칼이 가진 위험성을 생명의 안위와 동일하게 여긴 아버지의 무의식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대학에 입학한 다 큰 아들의 신변과 안전에 집착하며 강박증을 보인 것은 비단 먼저 전사한 두 명의 조카들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며 '아주 작은 것으로 부숴질 수 있는' 미래의 비극적 결과를 항상 염두해 두라는 잔소리는 너무나 간단하고도 능숙하게 동물의 생명을 취하던 아버지의 죄의식이자 뿌리깊은 무의식은 아니었을까. 마커스가 이런 아버지의 터무니없는 비합리적 태도에 좌절하며 느낀 감정은 늘 모범생이었던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에 대한 첫 번째 울분이었다. 이 책은 무의식에서 시작된 울분이 어떻게 우리의 무의식을 다시 지배하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 첫 번째 울분을 해결하던 방식, 즉 첫 번째 대학을 나와 집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두 번째 대학으로 도망쳐버린 사실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와인스버그 대학의 학생과장이 '자네가 모든 곤경에 대처하는 방식'이라고 판단한 마커스의 대처방법이었다. 그는 두 달간 룸메이트 두 명과 헤어지며 혼자만 지낼 수 있는 방을 택하게 되는데 문제를 지니고 있던 버트럼 플러서와 앨윈 아이어스와 한방을 쓸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은 단지 '공부에 집중하여 A를 받고 싶다'는 주장을 한다. 지난시절을 돌이켜보면 인생의 목표에 방해되는 것을 즉각적으로 제거하거나 인간 관계를 중단하는 방법은 최후에 시도되어야 할 카드였다. 일을 하다가 갈등이 생기면 관계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사람을 찾거나 한번 생각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여겨지면 끝까지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를 설득하고자 과도한 논리를 제시하는 성향은 지난 시절 독단으로 독녀생활을 해온 내게 있어 참 친숙한 방법들 이었다. 마커스는 면담을 요청한 학생과장에게 이러한 독선적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그와 열띤 논쟁을 벌였는데 나는 이 장면이 작품을 통털어 가장 화가 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논쟁에서 그는 흡사 지식을 무기로 전쟁터에 출격한 전투요원으로 보였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에 위배되는 상황엔 유독 전투적으로 방어를 하는 성향이 결국 죽음을 이르게 한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날의 논쟁은 '공격수' 출신인 학생과장과 '수비수' 출신인 마커스의 대결이기도 했는데 어쩐 일인지 학생과장은 방어적인 공격을, 마커스는 공격적인 방어를 최선의 전술로 삼는 차별화 전략을 펼쳐보였다. 서로 상대를 몰랐기 때문일까. 내가 알기로 학교라는 곳은 어느 조직보다도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잘못을 통해 그것과 연관된 가정환경 및 특이사항이 없는지 따져들어 기어이 연계논리를 답안으로 작성하는 조직이다. 마커스는 두 달간 두 번이나 룸메이트를 바꾼 것 외에도 아버지의 직업란에 코셔 정육점이 아닌 그냥 정육점으로 표기한 것, 유대인이면서 선호하는 종교에 유대교라고 적지 않은 것을 지적당하며 한순간에 타인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집단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학생으로 분류된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런 판단에 방어하는 심리로 채플참석에 대한 못마땅함을 신의 존재여부로 까지 확대, 거론하며 버트런드 러셀의 서적을 예로들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그는 채플의 부당성을 누구보다 주장했기 때문에 스스로도 그것에 위배되는 행동은 하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소수 유대인 신분으로 실은 부모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지 못했던 콤플렉스가 학생관리에 능숙한 학생과정의 덫에 걸려 표면위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나는 모두 A를 받는 학생이었다'는 그의 속외침이 공허해 보였던 건 '나는 모두를 점수 매기는 학생과장이다'라는 학생과정의 무언의 질시와 겹쳐졌기 때문일까. 마커스의 상한 자존심은 전쟁기사를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불통이 튀게되는데 이는 결국 무의식에서 시작된 불안증세임이 명백해 보였다.

마커스는 왜 융통성이 없었을까. 나도 대학교 1학년에 채플 수강시간이 그렇게 부당할 수가 없었는데 우리 땐 세 번 불참하게 되면 재수강을 해야 했었다. 조교 선배가 한명씩 얼굴을 확인해가며 출석을 체크하는 바람에 우린 감히 대리출석 같은 건 꿈도 못꾸었고 기왕 출석한 거 좋은 자장가나 듣는 것으로 생각하자 여기며 시간을 때웠던 기억이 선하다. 채플이 월요일 아침이었기 때문에 더욱 싫었지만 가끔 유익한 세상 잔소리들도 없지 않았던 기억, 한주를 빠르게 시작한다는 보람과 만족, 간혹 만나게 되는 선배나 동창생들...돌이켜보니 대강당의 문이 닫혀지는 순간 헐레벌떡 골인하던 그 순간도 나중에 추억이 되는 시간이었다. 마커스도 그냥 신의 존재여부를 떠나서 한 시간 정도 마음의 명상을 가지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면 안되었을까. 마커스가 스스로 저질렀다고 하는 실수들 중에 채플 대리출석은 제일 아쉽고 짧은 생각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A학점이라는 게 꼭 자신이 미련스럽게 투자한 시간과 비례하는 공부의 양만이 아니고 살다보면 어느 날 문득 귓전에 들려오는 노래 한 소절에서도 비롯될 수 있음을 그 나이에 알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울분이 차오를 때 모든 동포의 가슴에도 울분이 가득했던 중공군의 노래는 따라할 줄 알았기에 나는 그의 고지식함이 터질듯 안타까웠다.  그가 정작 그 노래를 불러댄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 건 신을 믿지 않아 채플을 거부했던 그라도 만약 채플을 들었다면 종교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는 우연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래서, 나약한 사람도 상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고 상대의 약한 곳도 강한 곳과 똑같이 나를 파괴할 수 있으며 상대의 약점이 바로 그 사람의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더욱 뼈아프게 들렸다. 청춘은 그때까지 아는 만큼 전부의 지식이 무신론자인 자신의 종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지나고나니 이 책을 넘겨가며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그땐 나조차도 그랬으면서 지금  어른된 심정으로 자꾸만 마커스의 잘못을 찾으려 하고 그것을 따지려는 내 자신이 왜 이리도 염증이 나던지.

또 하나 채플과 함께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을 찾으라 한다면 사람들은 올리비아와의 만남이라 답할 듯하다. 마커스가 정육점의 주검의 냄새, 앞치마의 핏자국으로부터 벗어나 법률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청춘의 한 시기에 올리비아는 어떤 필연성을 가진 악연이었을까. 마커스와의 첫 데이트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성애행위를 보여준 올리비아는 정육점 경영자의 시각으로 가늠하자면 '정결한 고기'가 아닌 '버려진 고기'였다. 죽어서 싱싱한 피를 뽑지 못하고 면도날의 흉터만 간직한 채 실패와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올리비아는 흡사 부모님이 미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동물을 표상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동물의 육신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 생명을 깔끔하게 빼앗지 못한 것은 사업의 실패이자, 직업의 수치이며, 가정의 불운이고, 대상인 동물에게도 죄스런 일이다. 마커스가 서점에서 최초로 균등하게 양쪽으로 머리를 가른 가르마와 쉬지 않고 아래위로 움직이는 올리비아의 다리에 끌렸던 것은 흡사 잔인하게도 머리가 잘린 채로 죽지 않고 마구 뛰어다니는 한 마리의 닭을 연상시킨다. 외양적으로는 클리블랜드 교외 부자출신으로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부모의 이혼으로부터 상처가 시작된 올리비아는 머리가 잘린 짐승, 영혼없이 육체만 남겨진 청춘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올리비아가 마커스에게 시도한 행위는 상대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을까. 병문안을 와서도 육체로 상대를 기쁘게 하는 행위야말로 오히려 진실한 사랑의 증거였을지 모른다. 그녀는 남겨진 자신으로 최선을 다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듯 상처를 가진 그녀가 충수염 수술로 입원한 마커스를 찾아가 건낸 꽃다발과 육체적 호의는 어렵게 내민 진심이었으며 그러했기에 마커스 어머니로부터의 의식적인 경계는 다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계기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무의식적 공포로부터 자식을 구속했다면 어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평화를 유지하고자 자식으로부터 주체성을 빼앗고 만 것이다. 마커스 어머니는 자신의 이혼과 올리비아와의 결별을 물물교환하며 상처를 공평하게 나누길 원했다. 지긋지긋한 정육점의 생활을 탈출할 방편으로 자식을 공부시켰지만 결국 자신들이 생각하고 행동해온 관습은 바꾸지 않음으로써 기존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자식들은 이 부모의 무의식에서 억압된 자아를 탈출시키고 독립된 자아로 향하기 위한 통과의례로 반드시 부모의 무의식이 완강하게 거부하는 배우자에 이끌리게 되어 있다. 이는 콤플렉스와 한계상황을 많이 보유한 가정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비극의 공식이 아니던가. 그런데 작가는 이 인연으로 발생된 울분의 시작을 한 가정에서 학교로, 나아가 미국사회와 다른 나라의 전쟁터에서 어떻게 결말지어 졌는지 발전시킴으로써 당시 미국사회의 부조리했던 전통관습을 예리하게 들추어 내고 있었다. 총칼이 난무하는 전쟁보다 더 사악하고 견딜 수 없는 건 결과적으로 그러한 전쟁터로 청춘을 내몰게 한 그들의 무책임, 억압된 가치, 강요된 윤리는 아니었을지 당시의 시기를 지나온 작가로서 그 예각적 시각은 참 통쾌하기 까지 했다.

이러한 미국사회 보수관료층의 생각을 단적으로 전파해 준 렌츠 학장의 일장연설은 그야말로 어느 시기 우리 나라 어느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그대로 그곳으로 날아가 미국을 한국으로 한국을 미국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시골출신 순진한 학생들의 눈싸움에서 시작된 우발적 단순집회는 광란의 분노 궐기 대회로 변모하고 급기야 팬티습격사건으로 확대되어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여기까지는 한순간 청춘의 치기어린 해프닝, 광란의 열정이 빚은 보편적 비극으로 여길 수 있었다. 그날밤 자동차 모험을 나간 앨윈이 사고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다수의 공모자, 참가자들이 퇴학 처리 된 것도 이해할 만했다. 당시 미국사회에서 크게 이슈가 되었던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마커스는 적어도 학교대표로 고별사를 읽고 수송부대에서 정보부대로 옮겨갈 수 있는 반절의 기회를 확보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울분은 끈질긴 무의식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마커스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유대인 남학생, 클럽의 회장이면서 농구스타 우등생 서니 코틀러의 천연덕스러운 제안에 압도되어 그만 채플 대리출석을 감행하고 만 것. 이 역시 평소 우월해 보이는 코틀러로부터 굴욕감을 느끼던 마커스가 그 앞에서 대범해 보이려 제안을 받아 들인 것이었다. 애초에 채플 수업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거부의사를 굽히지 않았고,그  해결책으로 정직을 버렸고, 결국 의식적인 오늘을 택하지 않고 무의식적인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퇴학과 한국전 참전으로 이어졌으며 그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 방법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분명한 건 컴플렉스의 불똥이 왜 한반도로 튀게 되었는지 그도 작가도 우리도 알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튀게 된다면 그시절 그 곳은 다른 곳이 아닌 한반도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미간 오래된 무의식이 한 순간 방향을 정한 것이라면 이제 우리 울분의 방향은 삶의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울분은 치유 

이 책은 결국 무의식을 여행한 한 청춘의 기행기에 다름아니었다.  무의식으로 비롯된 울분을 찾아 그로인해 죽음으로 치유를 얻은 슬프지만 교훈적인 이야기였다. 그가 여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은 무엇일까. 책에서 모르핀은 고통을 감소시키는 약물이 아니라 죽어가는 화자의 기억을 돕는 연료로 묘사되며 비록 잘려나간 육체의 고통은 줄여 주었지만 정신만은 굴복당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어떤 촉매제의 역할을 한다. '모르핀을 맞고' 에 해당하는 분량에선 모르핀을 맞은 무의식의 상태에서 점점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과정을 그려나가고 있다. 마커스는 바로 무의식의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을 의식화 한 것이다. 나는 이 회상의 시간이 '모르핀을 맞고' 난 후의 시간인 것이 이 작품에서 반전이라면 반전이라 믿고 싶었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발견하지 못할 수 있었던 깊고 깊은 무의식을 찾아내 그것을 정면으로 인식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인간의식이 억압한 사연을 담고 있는 거대한 지하창고가 아니던가. 이 무의식을 의식화 한 것이 바로 마커스의 회상이자 고백이라 본다면 죽음은 무의식의 바다에서 비로소 '벗어나' 무사히 자신의 의식으로 귀환한 상태이므로 조금은 덜 서럽다 말하고 싶다. 마커스는 자신의 무의식에서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고 자아를 찾은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두 번 살지 못하는 마커스의 한 번 인생은 끝이 났지만 마커스의 무의식은 그로 인해 의식화되었기로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남겨진 그의 무의식, 아니 끝내 의식화된 그의 무의식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가 남긴 청춘의 고백들은 혹시 우리가 의식화하지 못한 무의식이자, 꺼내지 못한 갈등의 편린들은 아닐까. 마커스야말로 자신의 문제를 의식화할 기회를 가진 운좋은 청춘은 아니었을까. 그 순간이 불운하게도 죽음의 순간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작가는 이 무의식은 스스로 억지로 끄집어 낼 수가 없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영리하게도 죽지도 살지도 않은 중간상태에서 모르핀을 안전장치로 사용하는 능숙함을 보여주었다. 이 책을 통해 무의식은 반드시 갈등의 상황, 외부적인 장애에 부딪힐 때라야만 드러나는 것임을 다시금 깨우친다.

우리는 살면서 내안의 심리적 갈등이 타자와 맺고 있는 관계속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갈등을 발견했다 해도 외면하거나 해결하려 할 때 내 무의식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도 알지 못한다. 외동딸로 자란 내가 인간관계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사람과의 갈등 국면을 헤쳐 나오는 일이었다. 형제들간의 크고 작은 갈등을 겪어보지 못한 내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거짓말처럼 마커스의 방식과 일치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그 순간엔 장애된 것을 제거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빨랐기 때문이다. 매순간 열심이었고 내 잘못이 없었지만, 방해가 되는 것은 다 돌아보지 않고 살았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내게 닥쳐온 피해나 불행은 억울했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점점 커지는 배신감으로 억울한 마음을 쌓는 일, 그로인한 울분을 차곡차곡 저장하는 일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사실도 이 책을 덮으며 착찹하게 인정한 부분이다. 물론, 마커스가 꼭 갈등에 대처하는 독선적인 방식 때문에 죽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갈등을 헤쳐 나오는 태도는 분명 삶의 우연까지도 지배하는 원칙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에 가만히 끄덕이게 된다. 그렇다면 갈등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 살면서 사회적 책무와 무의식적 욕망, 도덕적 관습과 죄의식이 충돌하여 선택을 고민하게 되는 순간은 헤아릴 수가 없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 경우 역시 불가능하다. 갈등은 삶의 진행만큼이나 등가의 원리로 중단되지 않는 법칙이라는 생각,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실은 건강하게 삶을 살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표가 된다는 생각을 한다. 울분은 그러한 갈등이 원하는 대로 해결되지 않았을 때 생겨나는 리비도의 반증일 터이다. 그렇게 본다면 갈등을 외면하고 그것에 부딪치지 않고 그 긴장으로 에너지를 폭발시키지 않는 사람에게 남겨진 잔여물, 그 에너지의 나머지가 울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울분이 쌓인 다는 것은 분출되지 못한 에너지가 증가한다는 것이고 억압된 나머지 에너지가 그 사람의 인생전부를 갉아 먹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린 남은 生 동안 울분의 에너지를 열심히 변환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인연으로 인한 갈등이 생기면 각자 내면의 숨겨진 무의식을 의식화하고 서로간에 발생한 그 긴장을 외면하지 않아 거기서 생겨난 에너지를 다시 生의 기운으로 흡수하는 일, 어렵지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작가는 혹시 한평생 이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을 쓰게된 것은 아닐까. 혹 틀리지 않았다면 내가 얻은 오늘의 결론은 어쩌면 내 울분을 달래준 감사의 선물이었다.

사실, 너무나 허탈한 청춘의 날벼락에 내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아 스스로 내 자신을 다독거리며 글로써 울분을 달래고자 이 서평을 쓰게 되었다.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아 책을 통해 내 울분의 자기탐색 시간을 가져본 것은 이 책으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도 끝내 울분의 에너지를 배출하고자 하는 내 자신의 잉여 에너지를 여실히 느낀다. 칼 융은 '진정한 치유란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 했다. 내 자신이 되는 길은 자신의 울분을 바로 보고 그 시작을 바로 알며 그 에너지가 자신을 파괴치 않도록 에너지 관리를 제대로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나 이제, 울분으로 울분 때문에 죽고 싶지 않다. 나의 죽음은 또 다른 누군가의 처절한 울분이 될 것이기에. 나는 울분으로 다시 살고 싶다. 울분으로 희망을 만들고 싶다. 비록 내일 당장 전쟁과 같은 '불운'에 휘말리며 안 보이던 '인연'에 희생양이 될 지라도, 내 안에 '무의식'에 지배되어 잘못된 선택을 할지라도 나는 오늘 울분을 '치유'삼아 좀 더 행복해지고 싶다. 언젠가 내 울분이 당신의 울분도 보듬고 안아줄 수 있게 된 날, 그 대견한 치유가 비로소 실현된 그날 나는 그 '울분'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오늘도 남겨진 여분의 그것을 어루만진다. 이로써 된 것이다. 당신의 울분도 오늘만은 내게 기대어 내 손을 잡으시라. 이렇듯 죽지 않고 살아남은 행운의 기쁨을 함께 공유하자. 큰 목소리로 울분도 함께이면 눈물어린 감사나 가슴시린 행복일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린 그렇게 서로 인간된 본분으로 다가올 삶에 흔쾌히 격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 만이 제법 내 자신이 되는 방법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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