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공
소설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내 가슴에 무슨 장애라도 생긴 것일까. 재미난 소설이 없어진 것인지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소설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건 대략 일 년 정도 된 듯하다. 소설을 읽을 만큼 읽었다거나 소설보다 재미난 책을 발견해서 일어난 현상은 아닌데 어쩐지 다시 소설이 좋아지질 않는다. 내가 바라는 건 지금의 소설들 보다는 더 중량감 있는 예를 들면 텍스트에 대한 어느 정도의 무게감일지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최근에 집어든 한국 소설(장편)들은 하나같이 읽고 나면 허공에 증발해버리는 느낌이다.
#2. 이동
정이현의 <사랑의 기초>는 마치 비행기 안에서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보면 다른 곳에서 본 것보다 기억이 덜 나곤 했다. 집중과 몰입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고 내가 움직이면서 - 무언가에 의해 이동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 - 글이나 영상을 보고 있기에 아무래도 정보 수용에 있어 정지해 있는 상태와는 다른 것이 아닐까, 막연히 추정해 본다. 이 책은 가만히 앉아서 보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디 들어는 보았지만 다시 갈 일은 없었던 의외의 장소, 그곳으로 이동 중인 상태에서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펼쳐든 책. 책의 내용은 딱 내가 예상하는 그만큼이었고 내가 기대했던 건 감동이나 놀라움 같은 것도 아니었으면서 나는 굳이 기대한 만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기대를 하는 마음도 하지 않는 마음도 동시에 갖고 있었던 것인데 책을 덮고 나선 기대를 안했다고도 기대를 했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고 할까. 그저 다른 사람들은 기대한 만큼은 아니다, 하는 말을 더 이해하지 않을까 하여 그 말을 적는 것을 선택했던 것 같다.
#3. 거리
한 권의 책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엿보고 그에 비친 내 자신을 발견하기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새삼 내 상황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내가 느낀 건 작가는 이 책을 쓸 때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예감이다. 소설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지 남의 이야기를 하는지 독자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확실히 남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으로, 정말로 남들의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소설가가 서사의 텍스트와 일부러 거리감을 유지하려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리는 유지된 채로 시작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자신은 다 지나온 생의 터널일수도 있고 원래 소설가가 말하는 방식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날카롭거나 좀 더 구체적일 순 없었을까.
#4. 두려움
또 내가 느낀 건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원하는 만큼 쓰고 싶어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하는 것과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잘 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능력이 독자에겐 부족하다. 그야말로 작가와 같은 성별을 가진 동년배인 독자로서의 직관은 이 책에 대한 무감의 요인을 여러 상황으로 확산하도록 유도한다. 수요에 부응하는 공급방식으로서의 사랑 이야기. 얼마간 짜 맞추어진 인위적 설정으로서의 연애 이야기. 물론, (검증되지 않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으로서의)방식 때문에 이 책이 흥미롭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독자인 내가 사랑과 연애를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부분 위치를 이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아직도, 이제 더 이상 연애과정을 소재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나를 울리거나 웃기지 못함을 깨닫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그게 두려워 더욱 이런 소설을 멀리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5. 택시
가끔, 나의 사랑은 이제 끝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 연애 비슷한 시기를 보낼 수 있을까, 억지로 자문해보면 대답은 언제나 원치 않는다 쪽이었다. 언젠가 리뷰에도 썼지만 현재로선 이성이 별로 필요치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아마 살면서 생각이 바뀌는 시기가 올 수는 있겠지만 나는 사실 남자가 없는 삶이 너무나 편하고 안온하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나는 애초부터 한 남자와 가정을 꾸려 그 안에서 무언가 희생하며 행복을 만들어가는 현명한 주부의 인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던 성격이었던 듯 하다. 연애만 신나게 하고 절대 결혼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정상적인 삶, 평범한 삶이라는 속세의 주류 가치에 당연히 나도 편입되어야 하는 줄, 그래야 남들처럼 행복해지는 줄 알았던 시기가 있었다. 대략 이십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그때 양단간의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꼭 온다. 이 사람이 운명적 사랑이라는 착각은 제도권에 편입하려는 꽤 정당한 방식으로서 무리없이 행해진다. 마침 택시를 잡으려 했고 그때 지나가던 택시를 타게 되는 것이 결혼이라는 무책임한 이벤트임을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지만.
#6. 포물선 방정식
이 책은 그렇게 택시를 타고 가다가 목적지 까지 가지 못하고 내리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작가는 그 순간을 허공에서 포물선이 겹쳐지는 기적 같은 일이라 말했다. 수학을 잘하셨을까. 포물선이 겹쳐지는 그림이 어느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현상학적 그래프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주가 동향 실시간 그래프라면 와 닿았을까... 그러고 보니 고2때인가 포물선의 방정식으로 수학 경시대회 때 상을 탔던 기억은 난다.
다른 곳에서 발생해 잠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209p
#7. 불신
불행히도 이제 나는 사랑했던 사람을 한때나마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기적이라 생각지 않는다. 나는 대부분 사랑지상주의와 사랑을 한 편인데 그들은 모두 사랑을 믿는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반대로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믿을 수 없는 것도 드물다 생각한다. 사랑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었을 뿐이지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듯 사랑도 믿을 수 있는 사랑과 믿을 수 없는 사랑이 생겨날 뿐인 것이다. 선과 악 앞에서 그것을 택할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이지 악인은 따로 있지 않다. 절대적 사랑이 따로 있지 않은 이치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무조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다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이 다양할 뿐인 것이다. 나는 나처럼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결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사랑을 선호해야지만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정확하거나 옳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돌아보면 화끈 거리는 것. 그건 바로 사랑은 어떠 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사랑한다면 이래야 한다는 통속과 억압이 실은 사랑을 바로보지 못하게 하는 우리 일상들은 아니었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많다.
#8. 추억
그 와중에 그래도 이 책 덕분에 내가 잊고 있었던 감각은 운 좋게도 회상의 절차를 통해 어렵게 복원되었다. 처음 손을 잡았던 날이 기억나는 사람. 손을 처음으로 잡게 되었을 때 미세하게 그러나 점점 압도적으로 떨려오던 그 느낌. 그 순간이 추억으로 남은 사람은 두 사람이다. 한명은 가장 오래 사랑했던 남자, 다음은 가장 마지막에 사랑한 남자. 나머진 언제 어떻게 손을 잡았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니까 이 책이 나를 데려간 지점은 아마 남자와의 사랑이 시작되던 장소, 그 주변 쯤 되는 것 같다. 손을 잡은 곳은 모두 차 안이었다. 그러므로 내 사랑의 기초는 차안에서 쌓여진 것이다. 나는 왼손이었고 그들은 모두 오른 손이었다.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내 위치가 모두 조수석이었기에...
준호가 가만히 민아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왼손과 오른손을 잡은 채 밤길을 걸었다. 누가 왼손이고 누가 오른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별은 높이 반짝이고 봄꽃들이 뿜어내는 향내는 아스라했다. 귓가에 종소리가 잘랑거리는 밤, 저 우주 만물사이에 작동하는 오묘한 섭리 앞에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바치고 싶어지는 밤, 봄밤이었다. -111p
#9. 온도
그런데 이 책이 가지는 한계는 손을 잡았던 그 이전이나 그 이후로는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긴 더 이상 바라지 않았기에 더 많은 것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겠다. 손을 잡았다는 것은 앞으로 다른 것도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손을 잡을 때 불행히도 언제 손을 놓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더 불행한건 아니 그나마 다행인건 도대체 언제부터 손을 잡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전화가 언제였는지 점점 희미해져간다. 사람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자동 정리해 가는 훌륭한 구석이 있다. 핸드폰 정리를 하면서 전화번호부를 정리했다.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의 전화기는 뜨거워질 일이 없다. 전화기의 온도와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사랑의 온도는 비례하지 않을까... 서늘하기만 한 내 전화기의 온도를 측정해준 책. 이 책은 사랑의 기초체온을 측정해 준다.
#10. 소설 같은 사랑
뒤늦게 영화 <은교>를 보았다. 한마디로 소설의 반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느꼈다. 소설에선 노시인 이적요가 열일곱의 소녀에게 새삼스런 동요를 느끼게 되는 과정과 설명이 더 복잡했다.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싱그러운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그에 따르는 시인의 상대적 패배감이 그냥 작가 박범신 자체로 느껴질 정도였다. 캐릭터만 비교하자면 소설에선 이적요가 더 입체적이었고 영화에선 은교가 가장 빛나보였다. 영화에선 서지우도 악하고 나약한 구석만 보여준 것 같아 공감가지 않았다. 소설에서 나는 천재적 재능을 가지지 않은 작가로서의 좌절감에 상당부분 공감했었고 그 열등감을 건드리는 이적요의 시선이 가끔은 과하다고 그래서 서지우가 반감을 가질 만한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소설에선 이적요의 사후에 은교가 자신의 앞날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시인이 혼자 죽을 때 더없이 쓸쓸해지던 슬픔, 외로움, 무상함 같은 건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영화는 은교의 안녕이라는 인사가 마지막이다. 은교는 어디론가 가겠지만 시인은 누워서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의미였을까. 젊음은 살아야 하기에 도망가는 듯 했고 늙음은 죽어야 하기에 머물러 있는 듯 했다. 왜 화가 나는 것인지 그건 헤어짐도 시작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지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사랑은 이럴 것이다에 꽤 잘 어울려 보였다.

< 은교 - 2012 / 감독 정지우, 출연 박해일 김무열 김고은>
#11. 진실
사랑을 한다고 다 사랑하는 만큼 자신의 사랑을 실행하고 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훗날에 사랑했었다고들 말한다. 아니 자신의 사랑은 대부분 확신에 찬 상태로 어떠한 사랑이었다 곧잘 단정하곤 한다. 사랑을 믿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은 먼 훗날에 얼마든지 의도대로 상황에 따라 자기 요구에 맞추어 각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각색은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할 때 일어나며 얼마든지 교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교정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질지 교정이 있기 전까진 자신조차 알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실제 느끼고 체험했던 시간의 경험보다는 그것을 기억하고 훗날 평가한 결과 치에 더 비중과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내 ‘경험자아’는 최고의 사랑이었지만 내 ‘기억자아’는 최악의 이별로 분류할 수 있다. 사랑을 한 사람도 한 시기도 한 기간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내 사랑은 내 기억에 의해 다른 모습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에 남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내 경험자아가 이끄는 진실의 얼굴은 아닐까...
#12. 보통
아마 생의 시기상으로 알랭 드 보통이 이야기 하는 사랑에 더 가깝기 때문일까. 사실 정이현의 소설보다는 보통의 글이 더 와 닿기는 했다. 주제를 바꾸어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터인데 왜 정이현은 연애를 왜 보통은 결혼 후를 사랑과 연결 지으려 했을까. 의도하진 않았지만 독자로서 어쩔 수 없이 두 소설을 비교하게 된다. 미안하지만 텍스트의 밀착도면에서 보통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헤어지게 되는 글, 헤어지는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약간의 낭만과 적당한 청승이 숨어 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해서이다. ‘실연의 달콤함’이라는 수사가 있듯이 그것은 혼자서만 들쳐보고 몰래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서 족할 것이다. 얼마 전 가수 김범수는 슬픈 발라드를 불러야 하는데 지금 애인과 행복한 상태라 도무지 슬픈 감정이 나오지 않아 가짜로 이별선언을 하고 강제로 이별의 상황을 유발한 시기에 녹음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백지영도 한창 새로운 애인이 생겨 설레이던 중에 슬픈 발라드를 불렀더니 반응이 예전 같지 않았다고 했다. 소설도 그럴 수 있다면 작가는 아마 지나간 이별에의 고통 같은 건 충분히 덮을 수 있을 만큼 지금, 행복한 건 아닐까...
#13. 욕망
아니면 세대가 바뀌어서, 다시 말해 내가 한 세대를 지나와 지금의 젊은 세대와는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에 민아-준호 커플의 심드렁한 연애를 더욱 심드렁하게 보는 것일까. 예를 들어 90년대 학번들의 평범한 이십대의 사랑을 구체화하여 보여준 김경욱의 소설 <동화처럼>이 떠오른다. 김경욱의 경우는 이야기 자체는 큰 재미가 없어도 공감하지 못할 거리감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시대의 많은 아줌마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에선 만족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김선아나 김하늘이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에 한 가닥 대리만족의 감흥을 기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민아-준호가 너무 평범해서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다른 것으로 채울까 싶었는데 다행히 TV에선 아직도 송승헌이나 소지섭, 심지어는 장동건까지 여전한 척 폼을 잡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건 어쩌면 그들이 제시하는 사랑의 방식을 철저히 비웃으면서도 한편으론 그 우스움을 발견하고 같이 웃어보려는 여인의 기초적인 욕망은 아닐지. 가령 '저 우주 만물사이에 작동하는 오묘한 섭리 앞에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바치고 싶어지는' 어느 봄밤, 흐드러진 벚꽃나무 아래에서 그들이 손을 잡은 다음에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
< 신사의 품격 - 5회 예고편 中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