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부  

 

나는, 잘 있어요.
당신도 잘 있나요?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날이 있죠.
울었지만 웃고 있다 말하게 되는 날이 있죠.

고맙고도 그리워요.
이 모든 가을에 울고 있을 당신들이.

인연은 행운이 아니라 생각하고
인간은 불운의 존재라 생각해요.

나는 행운도 불운도 바라지 않지만
인간이기에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인연에 손 내밀지 않던 내게 마음을 열어준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도 가을이 많아 아팠던가요.
그래서 누군가의 가을을 기꺼이 안아줄 수 있었나요. 
 

 

 #2. 지나간 시간  

 

 <그해 가을>에 이성복 시인은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라 말했던가요. 오랜만에 시집을 빌렸어요.   

 왜 하필 이 시집이었냐 하면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덕분이었죠. 이 책의 리뷰를 근사하게 써 볼 생각이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리뷰는 쓸 자신이 없어요. 바보같지만 써지지가 않을 듯해요. 대신에 책을 정말 열심히 읽었답니다, 하하. 강신주 교수는 첫장부터 이성복 시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저는 그만 이 시집에 빠져버렸어요. 그중에 저를 가장 울게 하던 시를 적어봅니다.  

 


<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 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 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
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112p 책의 본문과 똑같이 옮겼어요. 아직도 띄어쓰기를 이해 못하겠어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는 문정희 시인도 소개되어요.  고백을 하자면  80년대 사춘기를 보낸 제가 기억하는 시인은 서정윤과 도종환이 마지막이래요.  어쩌다보니 여간해선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일절 읽지 않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 제가 유일하게 가슴에 품은 시집이 문정희 시인의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이다>입니다. 일년에 시집 한 권 안사는 주제에 시인을 존경한다 말한다면 염치 없음을 아는 제가 촌스럽게 들쳐보는 유일한 시집이지요. 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으면 이상하게도 잘 못 외우는 시지만 그래도 입에서 맴도는 문정희 시인의 시가 생각나요.  


< 목숨의 노래 >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엄마의 젖가슴같은 시이죠. 매년 습관처럼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려 할때 꼭 이 시집을 만지작 거립니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서 한용운의 시와 함께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소개됩니다. 미루어 두었던 <사랑의 단상>을 다 읽고는 뒤늦게 베르테르의 자살에 깊은 애도를 했습니다. 많이도 사랑하고 싶었던 것인지 저는 그만 제가 아는 사랑을 떠들고 싶어 소설을 써야겠다 아주 무책임한 결심을 다하게 되었어요. 정말 좋더군요. 어줍짢은 제 언어로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 저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아프듯 그도 아플 것이라는. 내가 사랑이었다면 그도 사랑이었을 것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아무 말할 수 없다는.

   

 

#3. 가을을 닦다

 

저는 요즘 도올 서생의 <중용 인간의 맛>을 읽고 있어요. 아주 아껴가면서 페이지를 넘겼는데 얼마남지 않았어요.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아주 교양있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하하. 도닦는 기분도 들고요. 해설이 아주 재미나고 쉬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군요. 이쪽과 저쪽의 중간이 중용인지 알았던 제 무지가 참으로 부끄러웠답니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밑줄긋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생각같아선 두어줄 옮겨 놓고 싶지만, 그것도 저어하게 되네요. 저자의 주장과 논리가 좋다고 그것에 감동받았다고 하는 것이 제게는 어떤 트라우마가 될 듯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요. 시간이 지나야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되는 것이니까요.  

 

 

저는 이렇게 살고 있어요.
쓸쓸하고 가끔은 서럽지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인 걸요. 

이번 겨울엔 첫눈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첫사랑이 그리울 것 같아서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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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게 물들었네요. 잘 지내시죠?
안부를 듣고서 안부를 묻는, 아이러니한 상황 :)

한사람 2011-11-12 08:44   좋아요 0 | URL

예, 단풍이 질 때 까지만요^^
수다쟁이님도 좋은 가을,기쁜 주말 이여~

아이리시스 2011-11-12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사지 않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읽어낼 자신이 없어서이고 내면적으로는 시집은 시가 어려운 줄 모를 때 막 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한테 읽히면 그건 시가 아닐 것 같거든요. 저한테는 그게 벽이고 그 벽은 한때 글을 쓰고 싶던 사람으로서 허물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요. 좋으면 더 좋아하는 티를 못 내겠는 그런 마음. 언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없어요. [사랑의 단상]을 읽을 때 베르테르보다 사랑보다 먼저 느껴진 건 그거였어요, 한사람님.

예, 저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어요.

이미 다 알고 계실테니까요.^^

한사람 2011-11-12 08:47   좋아요 0 | URL

일년에 두어권 시집을 읽는 것 같구요.
그러다 우연히 가슴을 때리는 시를 만나는 것 같아요.
그럴때 무심했던 마음이 부끄럽지요.

<사랑의 단상>은 짜릿했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다 느낄지라도 그런 글은 본적이 없었어요 ㅋ

아무 말 할수 없다는 말이라도 들어서 좋은걸요^^

이진 2011-11-12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정희 시인의 시, 너무 좋습니다.. 원래 시는 좋아하지 않았는데 요즘 감성적인 알라디너분들 덕분에 시에대해 관심이 팍팍 생기는것 같은걸요? [이제는-]이라는 시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되는군요. 해설집이 따로 없나요 ㅎㅎ

한사람 2011-11-12 08:50   좋아요 0 | URL

하하, 저도 다는 이해 못했어요.
다만 볼드로 눌러쓴 부분은 무슨말인지 어떤 기분인지 알것 같아서요 ㅠ
강신주 교수가 '정든 유곽'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시네요. 시집 뒷부분에도 해설이 있구요..

한 편의 시와 거기에 사용된 단어들은 시인의 삶을 알지 못하고선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봐요. 그래서 전 늘 오독하는 독자랍니다^^

2011-11-12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2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3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3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1-11-13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하게 쓸 예정이었던 리뷰... 아쉽네요ㅠ 저는 요즘 잘 못지내고 있지만.. ㅎㅎ 저는 이번 겨울이 왠지 옆구리가 시릴 것 같아서 싫구먼요, 풋

한사람 2011-11-13 20:59   좋아요 0 | URL

어떤 일을 중단하게 되었을때 그 일에 쏟아지던 에너지는 반드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봐요 ㅋ
이제 숙제같았던 리뷰쓰기(?)에서 벗어나 다른 글을 쓸수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하려구요

내일부터 추워질거라네요. 월요일부터 추워지는거 정말 싫습니다.
마음을 먹어야 하는 아침이 싫어요 ㅋ

2011-11-17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7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