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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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응급실을 몇 번이나 가게 될까. 아니 그동안 나는 몇 번이나 응급실을 갔었던가. 떠올려 보니 내가 환자였던 경우와 가족이나 친지가 환자였던 경우로 나뉘어진다. 두 경우의 경험은 관점과 목적이 완전히 달라 같은 곳을 방문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분명한건 둘 다 정신이 없었다는 것과 의사는 단 한명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문제가 해결되었건 더 심각해졌건 절대 의사는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진료 받은 모든 병원의 의사가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이 심각할수록 담당하는 의사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대상임이 분명하다. 이 책을 읽고는 더욱 확신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응급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고 최대한 그 상황을, 일어난 문제를 처리하는 해결사에 가까웠다. 설령 그 해결방법이 환자의 죽음일지라도 그것은 응급의사의 몫이었다.

 

사람이 병원에 갔을 때 가장 응급한 상황은 목숨이 끊어질 것이냐 붙어 있을 수 있느냐의 생사의 갈림길, 만약은 다시 없는 그 순간일 것이다. 작가는 바로 자신이 경험한 생사의 순간들을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최대한 밀착하여 조심스레 전달하고 있다. 그곳에 신기하게도 지난날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의사가 서 있었다. 그는 사람을 살렸다고 웃을 수도, 못 살렸다고 울을 수도 없는 기계인형처럼 몸과 마음을 다바치고 있었다. 내가 의사가 된 것처럼 이토록 생생한 시점과 표현이라니.

 

우연히 페이스 북에서 한 챕터를 읽고는 바로 주문했다. SNS상에서 끝까지 읽기엔 꽤 긴 내용이었는데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못이 빨려 들어가던 찰나와, 미련 없이 못을 안고 걸어오던 그의 고독과,

최후의 시선으로 못을 받아들이던 그의 안구 따위가 생각날 때가 있다.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나 믿기 어려울 때, 어떤 광경을 보고 있으나 그 존재가 가늠되지 않을 때

무엇을 얼마나 더 잃어야 불행해질 것인지 생각할 때, 고독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할 때,

그리고 내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느낄 때, 이 일련의 광경을 한번 씩 떠올려 옆자리에 앉혀본다.”

 

숨을 멈추고 연속적으로 이끌려 들어간 몇 개의 문장들은 무엇을 얼마나 더 잃어야 불행해질 것인지에서 고독은 어떤 것일까’,를 지나 내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절망의 3단계를 참 정확하게도 정리했다는 느낌. 그러나 사람은 결국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불행도 가늠해본다. 고로, 이 세문장이 내게 준 결과는 나도 불행 했었지에서 시작해 그러나 지금은 불행하지 않다는 자각이었고 그러므로 고독하지 않다는 깨달음 이었달까. 세상에, 저 문장의 대상은 눈에 못이 찔려 그 후로 평생 한 쪽 안구를 잃어버렸을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일은 살면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누군가, 혹은 내게도 일어날 수는 있는 일이다. 꼭 못에 눈이 찔리지 않더라도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 눈 정도는 잃어버렸을 때라야 비로소 확실하게 드러나는 감정은 아니었을까.

 

죽고자 했던 사람들은 예정된 택배물처럼 도착했다.”

 

하지만 막상 책을 사들고 집에 와서 부터는 생각만큼 진도가 척척 나진 않았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어가는 장면을 시시각각 확인하는 일은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멈출수는 없었다. 작가는 의사로서의 사실적인 표현은 물론 객관적인 사실을 자신만의 주관적인 의미부여로 마무리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 환자에겐 단 한번뿐인 죽음을 연속적으로 목격, 처리하고 돌아와 새삼 떠오르는 삶과 죽음의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되어야하는 일상들을 그리고 있었다.

 

이 책은 왜 쓰여졌을까.

이 글은 누구를 위한 글이었을까.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는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의사된 심정을 떠올려 보았다. 자살자가 쏟아지는 밤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수많은 죽음을 단정 짓던 자신의 혓바닥을 증오하던 그였다. 용기 있게 찢어진 열상을 모두 맡기고 견디어준 환자에겐 수고하셨다는 말을 잊지 않던 그였다. 지하철 투신 환자를 처리하고 돌아가는 퇴근길엔 무사히 덜컹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지하철을 기적이라 부르던 그였다. 유가족들의 압도적인 오열이 귀를 관통한 다음엔 돌아와 숨죽이며 혼자 울 수밖에 없던 그였다. 성탄절에도 아픔을 멈출 순 없어 뜬눈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던 그였다.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괴물이거나 천벌을 받아야 할 악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이 살았기에 똑같이 하얀 눈을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을 눈이 내렸다고 소복히 덮을 수는 없는 그였다.

 

책을 덮었을 때 비로소 잊을 수는 없었기에 차라리 기억하는 방식을 택한 그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에 무감해지지 않기 위해 글을 썼던 것이다. 죽음에 무감해진다는 건 곧 삶에 무감해진다는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문득 살고자 하는 일과 죽고자 하는 일의 무게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걸까를 생각한다. 살고자 하는 일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므로 더 힘든 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정도와 노력의 차이로 인해 우린 그렇게 힘겨운 날들 속에서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날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고자 하는 일에는 더 쉽고 덜 어려운 노력은 없다. 죽고자 하는 일은 성공과 동시에 종료되며 그 성공마저도 내가 누릴 수는 없다. 죽고자 하는 일도 결국엔 살아내야만, 사는 동안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살고자 하는 일은 죽고자 하는 일과 모양만 다를 뿐 기실 속 내용은 같다는 점에서 우린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하는, 아니 잘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얄궂은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이 기록은 죽음을 잊지 않아야 삶도 더 생생하다는 역설을 묵직하게 제시한다. 어쩌면 우리는 응급하지 않기 때문에 매일매일 살아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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