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를 선택한 나라 -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벤저민 카터 헷 지음, 이선주 옮김 / 눌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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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읽기 시작한 벤저민 카터 헷의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를 마침내 다 읽었다. 책의 절반가량을 호기롭게 읽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생각해 봤다. 그 이유가 뭘까하고 말이다.

 

내 나름대로 분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19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된 14년 동안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었다. 대략적으로 당시 독일 국내 정치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는 점 그리고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독일 경제가 나락으로 추락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과 수많은 실직자들이 발생해서 결국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집권했다는 정도의 지식이 전부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출범시킨 사회민주당을 필두로 한 독일 국내 정치에 대해 몰랐고, 그레고어 슈트라서-쿠르트 폰 슐라이허-프란츠 폰 파펜 등등의 정치 플레이어에 대한 무지 때문에 잠시 쉬게 되지 않았나 싶다.

 

벤저민 카터 헷이 저술한 민주주의의 위기 그리고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분석에서 출발한다. 19148, 독일 제국은 발칸에서 시작된 전쟁에 하나가 된 상태로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4년 뒤인 191811월 전쟁에 진 것도 아닌데 결국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신화가 탄생했다. 그것은 독일 민족정신에 그어진 하나의 생채기였다. 21번이나 내각이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의 원죄는 그런 패배의식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게다가 1919년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탄생한 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파멸과 창조는 한 끝 차이라는 걸까. 저자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한 독일 민중이 어떻게 해서 히틀러라는 도무지 타협을 모르는 야만적 지도자를 선택하게 되었고, 훗날 2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재난 속으로 뛰어들게 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려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꼽은 키워드는 두 가지다. 오판과 과소평가. 파펜이나 슐라이허 같은 기득권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히틀러와 나치당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오판했다. 192311월 뮌헨의 비어홀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보헤미아 졸병출신 아돌프 히틀러는 당시에는 애송이였지만, 혼란스러운 정치판에서 체급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치기 어린 비어홀 폭동의 경험을 통해 미래의 독재자는 군대와 관료의 조력 없이 권력을 찬탈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후 독일 내부의 정치 혼란과 경제 위기는 나치즘이 독버섯처럼 퍼질 수 있는 기가 막힌 환경이었다. 나치는 농촌 중심의 신교도에게 인기를 끌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베를린이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계열 노동자들의 요새였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왔다. 1925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전쟁 영웅 힌덴부르크는 우파 중심의 국가 통합을 꿈꾸었다. 집권 초기만 하더라도, 귀족 출신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정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았다. 프로이센 귀족 출신의 육군 원수가 오스트리아 출신 상병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보지 않아도 뻔한 결과가 도출되지 않을까.

 

독일 정치에 분노와 증오의 싹을 뿌린 나치가 두 번의 총선을 거치면서 무시할 수 없는 정치집단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프로파간다의 전문가였다. 당시 유명한 상업광고를 능가하는 정치 선전으로 괴벨스는 히틀러를 독일 국가의 마지막 희망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한편에 그런 선전이 있었다면, 다른 한편에는 철모단과 돌격대라는 무력집단을 동원한 정치 폭력이 존재했다. 나치 집단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던 1931-32년 내란 위기는 절정이었다. 문득 수년 뒤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에 앞서 독일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다른 하나의 키워드인 과소평가를 살펴보자. 당시 독일의 다수 중산층 보수주의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히틀러 일당에 베팅을 걸었다. 그들은 히틀러와 수하들의 권력욕과 야망을 과소평가했다. 1933130, 힌덴부르크가 지루한 줄다리기 협상 끝에 어쩔 수 없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자 나치들은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의회 다수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을 모두 불법화시키고, 게슈타포를 동원한 정적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괴벨스도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서 언론을 통제했다. 당시만 해도 새로운 매체였던 라디오를 동원하고, 포스터를 이용한 여론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그전에 자본을 동원한 이게파르벤 같은 대기업이 언론을 순치시키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지금 현재 차례로 건설기업에 넘어간 언론의 모습과 어쩌면 이렇게 일치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반대파들이 히틀러 집권 초기에 그를 제압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역시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12년 독재와 전쟁 그리고 패전과 분단을 피할 수가 없었다. 히틀러의 전횡을 막기 위한 부총리 프란츠 폰 파펜과 에트가어 율리우스 융, 프리츠 귄터 폰 치어슈키, 헤르베르트 폰 보제 같이 양심적 인사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1934630<장검의 밤> 사건으로 일소되면서 히틀러와 나치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반대파 뿐 아니라, 자신의 집권에 정치 폭력을 행사하면서 지대한 공을 세운 돌격대와 한 때 동지이자 돌격대 지도자 에른스트 룀마저 숙청해 버렸다.

 

저자는 독일 중심주의가 독일 정치에서 우선시 되었을 때, 전쟁이 일어났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유럽 공동체 건설의 아이디어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이미 태동되었다는 점도 놀랍다. 민주주의가 번성하고 미국-영국-프랑스와 협력할 때, 독일이 번영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역사가 보여준다. 유럽 통합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국가가 독일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신호들이 잇달아 들어왔을 때, 오판과 과소평가로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 결과는 독일 민족을 파멸로 인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의 독일 사람들은 민주 시민 양성을 국가적 목표로 삼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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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3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3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3-02-15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읽어야 할듯요

레삭매냐 2023-02-15 17:28   좋아요 1 | URL
다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다 읽고
나니 보람찼습니다.
 
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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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부터 읽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던 책이 있었다. 김훈 작가의 <하얼빈>이었다. , 다른 책도 하나 있었지.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전자는 사지 않았고, 후자는 사서 읽었다. <해방일지>는 이번 달궁 독서모임의 책이기도 해서, 다음달이 되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을 계획이다. 김훈 작가의 책들은 개인적으로 정한 어떤 이유 때문에 사서 읽지는 않고, 빌려서 읽는다.

 

고등학교 시절 왜 이렇게 한국 근대사가 싫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국사 시험을 망치고 말았다. 물론 어렵기도 했었지만.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외우다 보니 역사적 사건들 간의 상호작용을 몰랐고, 억지로 외운 것들을 쉽게 까먹기 마련이었다. 이번에 <하얼빈>을 읽으면서 한국 근대사를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게다가 침략자 일본의 개항 이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다 보니 유기적 관계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그리고 너뷰트로 그전에 봐둔 러일전쟁에 대한 개관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청일전투에서 일본군이 육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던 성환 전투에 대한 작가의 단상에서는 무릎을 쳤다. 이런 거지, 하고 말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소설에 대한 감상을 말하기 전에 서설이 길었다. 역사적 사건에 기반한 소설 <하얼빈>은 두 가지 시선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조슈 번사 출신으로 조선 침략에 선봉에 서 있던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다른 캐릭터는 그를 사냥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황해도 신천 출신의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다. 전혀 서로 다른 두 캐릭터의 심리를 오가며 서사를 이끌어 간다는 게 가능할까라는 독자의 의구심을 작가는 단박에 뽀개 버린다.

 

우선 이토는 철저하게 자국의 이해에서 조선 침략에 나섰다. 그는 을사늑약부터 시작해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방식으로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선봉장이었다. 군대해산 후, 조선 팔도에서 일제에 대항하는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서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서 소요를 진압하고 민중을 학살했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폭압적 방식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미개한 조선을 문명화시킨다는 자신들만의 논리를 구사했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소위 탈아시아해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자신의 실력에 비해 과대망상에 가까운 헛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토는 무력이 아닌 도장으로 조선을 집어 삼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움직이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던 건, 이른바 국가 조선의 운영을 맡았던 사대부들이 이런 일본의 침탈에 대항하지 못하고 국운이 쇠락하는 왕조 국가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깨닫고 앞장서서 친일에 나섰다는 점이다. 대대손손 누려온 지극의 복락을 연장하기 위해 그들은 양심이나 체면 혹은 배알도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 오히려 국가로부터 아무 것도 받은 것도 없이 항상 수탈만 당하던 백성들이 나서서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의 기관총 앞에 농장기로 무장하고 항거했다. 많이 보던 모습이 아니던가. 역사는 비극적으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목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소설의 한 축에 빌런 이토가 있었다면, 다른 한 축에는 그를 사냥해야 하는 포수 신천 출신 도마 안중근이 있었다. 19세에 교구 사제 빌렘에게 세례를 받은 안중근은 순흥 안씨 집안의 가장이었다. 어려서부터 리더십이 있었고 하는 식의 영웅 신화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노루 사냥을 즐기던 그에게 총알은 한 발이면 충분했다. 서두에 등장하는 그의 사냥에 묘사는 결국 이어질 대사에 대한 명징한 암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안중근은 이토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왜 그가 이토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특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무엇이 방해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야 하는 것처럼, 주인공을 운명의 시간과 장소에 데려다 놓기 마련이다.

 

, 순서가 좀 어긋나긴 했지만 이토는 근대화의 부산물인 시간에 국가 조선과 민중을 적용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어쩌면 서양 근대화의 기본은 노동을 측정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물자와 사람을 이동시킬 수 있는 가장 유요한 수단인 쇠비린내나는 철도의 부설이지 싶다. 사적 시간에 얽매인 민중들을 교화해서 공적 시간의 개념으로 유도해내서, 하나의 동일한 일체감과 유대감을 만드는데 성공해서 병영국가로 나가기 시작한 국가 일본을 건설한 자신감에서 초대 통감 이토는 조선을 통치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향에서 후대 교육에 매진하기도 했던 안중근은 사랑하는 처자와 정든 땅을 버리고 국권 침탈의 수괴로 자신이 정한 이토를 저격하기로 결심한다. 그 와중에 스며든 빌렘 신부나 뮈텔 주교와의 갈등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십계명에도 나오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이유로 사제들은 안중근의 거사에 반대한다. 실제로 한국 천주교에서는 안중근이 이토 저격에 성공한 다음, 정치적 이유로 안중근과 선긋기에 나섰다. 안중근의 의거가 독립전쟁의 일환이자 정당방위였다는 점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수십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런 부분들은 소설만으로는 알 수 없기에 결국 추가로 공부해야 했다. 일개 독자로 이럴진대, 글 쓰는 작가들은 도대체 이런 서사를 쓰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정확한 사전 조사가 필요한 걸까.

 

작가에 대한 개인의 호오와 상관없이 <하얼빈>은 김훈의 스타일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문장은 언제나처럼 간결했고, 힘이 넘쳤다. 예를 들어 안중근은 깊이 잠들었다라는 문장을 보자. 이토라는 거물의 저격을 앞두고, 청년 안중근의 심리상태를 이보다 더 조준사격하듯 표현할 방법이 없지 않을까. 일본과 러시아 관헌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타겟을 쏠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역사가 말해 주지만, 그에게 필요한 건 단 세 발의 총알뿐이었다. 불안한 사냥꾼의 심리처럼, 총구는 늘 흔들렸다.

 

그리고 이토가 죽었다고 해서, 무너져 가는 조선이 다시 기적처럼 부활할 수도 없는 그런 형국이었다. 이토가 죽었어도, 이토의 후계자들은 조선을 통한 대륙 진출이라는 고래 일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숱한 청춘들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했다. 영악한 책사였던 이토의 모든 행동은 자국의 조선 침략을 위한 방편이었다. 순종의 남행부터 시작해서, 볼모로 황태자 이은의 태사를 자처하며 일본으로 잡아간 것까지. 고려 왕조의 폐허 앞에 망해가는 나라의 군주 순종 일행을 배치해서 촬영한 사진은 프로파간다와 정치쇼의 극치였다. 러일전쟁 당시, 그들이 군신이라 일컫는 노기 마레스케의 멍청한 전술로 러시아군의 토치카와 기관총 앞에 숱한 일본군이 갈려 나간 백옥산 참배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토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살다가 총에 맞았다.

 

이토의 저격까지 직전까지 밀도를 압축해 가던 서사는 저격 성공으로 긴장이 완화된다. 그리고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의연하게 자신의 죽음을 기다린다. 다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는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자신에게서 정치적 정당성을 제거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검찰관 미조부치의 예리한 심문을 유연하게 맞받아친다. 사실 안중근 재판 역시 자신들이 그나마 문명국이라는 점을 열방에 과시하고 싶은 하나의 정치쇼였다. 이미 결론은 나 있었으며, 이른바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안중근의 묘역이 사후, 성역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제는 유해를 가족들에게 인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독립된 조국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안중근의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점이 통탄할 심정이다.

 

다음 달이면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순국 113주기다. 마음이 처연하다.


[뱀다리] “뮈텔은 신앙과 문명을 군함에 실어서 세계에 전하는 조국 프랑스와 프랑스 왕과 프랑스 군대와 프랑스 교회를 위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251).”

 

안중근이 사형 언도를 받은 1910214일은 프랑스 제3공화국 시절인데, 프랑스에 왕이 있었나? 50대 뮈텔 주교에게 치매라도 온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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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2-10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하얼빈> 재밌을 거 같네요^^

레삭매냐 2023-02-15 17:34   좋아요 1 | URL
다른 건 몰라도 가독성 하나
는 끝내 줍니다.

간결하면서도 힘찬 서사의 힘!
 
카프카와 함께 빵을 에프 그래픽 컬렉션
톰 골드 지음, 전하림 옮김 / F(에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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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도서관에 가서 톰 골드 작가의 <골리앗><달과 경찰>을 읽었다. 집에 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더 찾아 보니, 톰 골드의 다른 그래픽 노블도 있는 게 아닌가. 아뿔싸! 그 책을 만나기까지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만난 책이 바로 <카프카와 함께 빵을>이다. 읽은 지 이틀이 지났는데, 기억을 되살려 가며 리뷰쓰기에 돌입해 본다.

 

아무래도 톰 골드가 작가다 보니 그 업계(도서 출판업)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판 그리고 분석을 그려 넣은 컷들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한 권의 시집이 나오기 위해서는 참 많은 비용들이 필요하다. 출판하기 위해 인쇄소에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무엇보다 최근 비용이 급상승하고 있는 마케팅 비용은 덤이겠지. 그 외에도 파티에 소용되는 샴페인 비용이 들어 있다는 점이 참. 그리고 작가의 몫으로 돌아가는 인세는 정말 쥐꼬리만하다. 그러니까 전업 작가로 먹고 살기가 참 어렵다는 표현을 이렇게 돌려치기로 하는 걸까? 그리고 그 세부 인세 내용에 다시 샴페인 비용이 등장한다. 그네들은 참 샴페인을 좋아하는갑다. 그리고 보니 나도 샴페인이 먹고 싶어졌다. 오래전 어느 출판사 연말 파티에서 신나게 마신 샴페인? 스파클링 와인 벨리니 생각이 나네 그래. 그땐 참 좋았지.

 

미래의 글쓰기에 대한 단상도 마음에 들었다. 최신 전자 장비가 동원되어 플롯 설정을 위한 아이디어 개발부터 시작해서 자료 조사 등등 거의 모든 것들을 인간이 아닌 A.I.가 대신하는 장면이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니 반면에 그만큼 글쓰기라는 창작이 쉽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나의 그림을 보고도, 참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존재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이런 다양성이야말로 어쩌면 창작의 기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설 <맥베스>, <로빈슨 크루소> 또는 <프랑켄슈타인>이 발표되던 시절에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낼 수 있었다면? 맥베스는 세 마녀로 메시지를 받고 수락과 거절 사이에서 고민하고, 무인도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는 신호가 끊어져 고뇌한다. 드라큘라 백작는 메시지로 피를 요구한다. 아 그렇게 해서 현대판으로 재탄생한 클래식 캐릭터를 이용한 퓨전 소설로 다시 쓰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변주에 많은 신경을 써야하겠지만 말이지.

 

책을 산더미처럼 보관하고서도 킨들을 찾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사실 나도 가끔 생각나는 책들을 책더미에서 찾을 수가 없어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지 않았던가. 그만큼 편리한 전자책이 내 곁에 와 있지만, 나는 애써 전자책을 외면하고 종이책만을 고집하는 올드 스쿨 스타일이다. 아니 도대체 왜 전자책을 사는 거지? 아무런 소장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책만큼 편하게 읽지도 못하는데 말이지. 소장하는 재미도 없지 않은가. 이렇게 종이책 사기를 자기합리화시키면서 어제도 중고 서점에서 네 권의 책들을 사지 않았던가, 하하하.

 

기억의 한계다. 톰 골드가 소개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절반도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책이라도 곁에 있다면 슬쩍슬쩍 되짚어 보겠지만 아쉽게도 오늘 책을 들고 집을 나서지 못했다. 그 바람에 이미 휘발해 버린 기억들을 아쉬워 할 뿐이다. 이래서 핸드폰으로 사진이라도 찍어둘 것을. 나중에 집에 가서 보고 더 추가해야 할지도.

 

<카프카와 함께 빵을>에서 톰 골드 작가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책과 독서의 미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책이 가진 효용과 기능들이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가운데 여전히 글쓰기를 해내는 생산자들과 그들이 생산한 책들을 소비하는 독자들의 선순환이 과연 어디까지 갈지 너무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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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2-07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이 직접 그리신 겁니까?!!
자녀분이?
인상이 참 좋네요ㅎㅎㅎ

<카프카와 함께 빵을>아껴 읽는 중이지만 아직까지
버릴게 없는, 매 페이지 마다 웃음이 자동으로 흘러나옵니다.ㅎㅎ

레삭매냐 2023-02-07 18:34   좋아요 1 | URL
네 제가 인터넷에 떠도는
작가의 캐리커처를 보고
뚝딱 그려 봤습니다.

말씀해 주신 대로 격공
하는 바입니다.
다른 책들도 만나 보고
싶은데, 안나오네요 -

독서괭 2023-02-08 16: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마지막 그림이 너무.. ㅋㅋㅋㅋㅋㅋ 양심을 찌릅니다!!
오 매냐님이 직접 그리신 그림이라니, 느낌있게 잘 그리셨습니다!! 종이책이 없어 다 담아내지 못하셨다고 하니, 그 점이 전자책의 장점이 아닐까 싶네요. 어디서든 다시 훑어볼 수 있다 ㅋㅋ 하지만 저도 전자책은 별로입니다.. 종이책만큼 정이 가지를 않네요. 쩝

레삭매냐 2023-02-08 17:08   좋아요 1 | URL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예전에 앨리스 먼로가 노벨문학상
받았다고 해서, 바로 뛰쳐 나가서
책을 샀는데 그 때 산 책을 여적
읽지 않고 있지 뭡니까 그래 ㅠㅠ

저두요! 저두요!
전자책 리더도 큰 맘 먹고 샀거만,
도통 손이 가질 않더라구요. 어디
에 있는 지도 모르겠네요.

고양이라디오 2023-02-10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자책 리더기 있지만 안 쓰고 있네요ㅎ 종이책이 훨씬 정감가고 좋습니다^^

톰 골드 만나보고 싶은 작가네요ㅎ

그림 잘 그리시네요ㅎ

레삭매냐 2023-02-10 16:39   좋아요 1 | URL
제 그림 실력은 그저
일천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전자책 리더기가 종이책
의 매력을 대체할 수 없
다고 생각합니다.

톰 골드, 갠춘한 작가라
고 생각합니다.
 
메디치 2 - 피에 물든 백합
파트릭 페노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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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간만에 대학시절 지기들을 만나게 되어 부천 나들이 나섰다. 워낙 촌에 살다 보니 어디 한 번 나들이하기가 쉽지 않다. 가는 길에 부천 알라딘에 들러 파트릭 페노의 <메디치> 시리즈 중에 두 번째 권을 샀다. 그리고 보니 왜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이 시리즈가 없는지. 천상 사서 보던가 해야지 싶다. 그리고 아주 재밌게 읽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후원한 바로 그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1권부터 읽어야 하지만, 중고책방에는 2권만 덜렁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르네상스 이탈리아를 무대로 한 메디치 가문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를 능가할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할 만하지 않을까 싶더라.

 

일 마니피코 시절이 가고 난 다음, 다시 한 번 공화정의 뜨거운 열기와 그리고 사보나롤라로 대표되는 개혁의 시절이 폭풍처럼 피렌체를 휩쓸고 간 다음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포폴라니라고 하여 차남 계열의 메디치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이탈리아에서 최고가는 용병대장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가 등장해서 용맹을 떨친다.

 

발루아 왕조의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신성로마제국의 칼 5세는 이탈리아에서 각축전을 벌였다. 도시국가 피렌체는 사실 독자적으로 유럽을 좌지우지하는 두 강력한 국가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줄타기 외교전을 펼쳐야 했다. 피렌체는 그 때마다 말을 갈아타며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약소국 신세였다. 메디치 가문 출신 두 번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칼 5세와 대립하다가 로마 약탈이라는 전무후무한 치욕을 겪기도 했다.

 

자신의 근거지였던 피렌체에는 자신의 서자 알레산드로를 파견해서 지배자로 삼았다. 그리고 알레산드로의 유력한 경쟁자 용병대장 조반니는 전장에서 죽게 만들어 버렸다. 조반니의 아내였던 마리아는 유일한 아들 코시모를 데리고 피신하는데 성공한다. 인기 없는 군주였던 알레산드로가 암살당하자 마키아벨리의 세례를 받은 호랑이 새끼 코시모가 피렌체의 독재자로 나서게 된다. 그 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2권의 표지에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훗날 토스카나 대공이 되는 코시모 1세다. 이 책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브론치오가 그린 초상화는 교활하고 영명한 군주라기 보다 왠지 전사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자신에게 돌아온 권력을 코시모는 누구와도 나눌 생각이 없었다. 당시 피렌체가 속해 있던 이탈리아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일단 코시모는 자신을 가장 든든하게 지지해줄 수 있는 인물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칼 5세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스스로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봉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가신들을 동원한 공포정치를 가동해서 우선 피렌체의 지배를 확보한 다음 토스카나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해 가기 시작한다.

 

일 마니피코 시절부터 왕관 없는 제후라는 가문의 약점을 지워내기 위해 코시모는 철저하게 마키아벨리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마저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냉철한 권력의 화신으로 변하게 될 줄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자신의 아내도, 자식들도 모두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권세가 강화될수록, 개인사는 비극으로 얼룩져 간다. 파트릭 페노 작가는 권력의 정점에서 예술애호가 코시모가 키마이라라는 조각을 얻기 시작하면서 잇달아 벌어지기 시작한 비극을 소설적 코드로 다루는데 성공한다.

 

사랑하는 아내 엘레오노라의 아버지이자 장인 돈 페드로가 출정을 앞두고 사망하고, 많은 자식들 역시 차례로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장남 프란체스코보다 더 유망했던 차남 추기경 조반니가 삼남 가르시아와 사냥 중에 다툼을 벌이다 죽고, 다른 아들을 카인이라 부르며 아버지가 직접 처벌에 나선다. 자신의 반대파를 없애기 위해 코시모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백합의 도시, 피렌체는 피로 물들어 갔다.

 

냉철한 군주 코시모는 피렌체 사람들에게 계속된 번영만 약속해 준다면,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걸까? 정적들에게는 가차 없는 지도자였지만, 자신의 기반이 되는 백성들과 자기가 다스리는 국가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능수능란한 줄타기 외교를 구사하면서 프랑스-신성로마제국-교황 사이에서 실리로 대표되는 국익과 명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일 마니피코가 왕관 없는 제후로서 중세를 주름잡은 메디치 가문의 기틀을 닦았다면, 마키아벨리주의자 코시모는 조상들이 결코 이루지 못했던 토스카나 대공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물론 대공의 왕관을 쓰기까지 많은 희생과 우여곡절이 필요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교황의 눈 밖에 난 개신교도 자문이자 대공의 친구였던 피에르 카네르스키였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걸 위해, 코시모는 결국 카네르스키를 교황의 손에 넘기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카네르스키는 화형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파트릭 페노는 코시모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과연 그가 그랬을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피렌체의 절대 군주로 군림하던 코시모 역시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코시모의 뒤를 이은 장남 프란체스코는 후사를 남기지 못해 로마에서 추기경 생활을 하던 페르디난도가 메디치 가문의 당주가 되는 것으로 메디치 두 번째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파트릭 페노의 <메디치>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권력 무상을 느꼈다. 소설에 묘사되는 대로 코시모 데 메디치가 확실히 민심과 당대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한 뛰어난 군주였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자신의 국정 운영이 자식의 치세에도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좋은 후계자를 세우는 것도 지도자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가문의 영속을 위해 아무리 노력했어도, 아버지를 능가하지 못한 자식들 덕분에 메디치가의 영화는 존속되지 못하고 쇠락하기 시작했다. 역사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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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2-07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구분들 뵈러 부천 ...
의왕에서 멀지도 않은 그 거리를 가시는 ˝김에˝ 또 책 겟하셔서 읽어내시는...게다가 리뷰 쓰기 (저는 솔직히 귀찮아서 읽고만 말 때가 많은데...)까지 다 하시는 매냐님^^ 존경합니다

레삭매냐 2023-02-07 15:37   좋아요 1 | URL
여전히 부족한 독서인으로
책읽기의 완성은 리뷰? 독후감
쓰기라고 생각한답니다.

다른 거는 귀차니즘에 포기해
버리지만, 독후감은 꾸역꾸역
쓰는 제가 대견하기도 합니다.
넵.

술 퍼먹고 복귀하려니 넘 힘들
었습니다.

얄라알라 2023-02-07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저도 요즘에요...˝~~한 나를 칭찬해˝ 그 말이 그렇게 귀엽게(?) 들리더라고요. 쑥스럽지만 제 스스로에게 선물하듯 그 말을 쓰는데, 레삭매냐님께서도 ˝리뷰를 꼬박꼬박 쓰는 나를 칭찬해˝하셔도 좋겠어요^^ 멋지십니다!

레삭매냐 2023-02-07 18:35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헷 -

책 읽고 나서 바로
바로 리뷰를 쓰지
않으면 그 때의 기
분이 모두 날아가
버려서 나중에는 쓰
지 않게 되더라구요.

밀리지 않고 쓰려고
노력합니다. 감사합
니다.

새파랑 2023-02-08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부천 알라딘 단골입니다 ㅋ
저도 어디가면 꼭 알라딘 우주점이 있는지 확인하게 되더라구~!!

레삭매냐 2023-02-08 15:50   좋아요 1 | URL
그러시군요 !!!

저는 오늘 송도 가서
제프 다이어의 <그러
나 아름다운> 신판
땡겨 왔답니다 ^^

서니데이 2023-03-13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thkang1001 2023-03-15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샥메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가필드 2023-03-1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축하드려요 💐
 
골리앗 - 2014 앙굴렘 국제만화제 대상후보작
톰 골드 지음, 김경주 옮김 / 이봄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바람돌이님의 <골리앗> 리뷰를 봤다. 분명 예전에 그래픽 노블로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럴 땐 다시 읽어야 한다. 어제 도서관에 들러서 <골리앗><달과 경찰>을 내리 읽었다. 전자도, 스산한 느낌이 드는 달나라 이야기도 다 마음에 들었다.

 

골리앗은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대공병기의 이름이 아니다. 그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다윗이 맞서 싸운 블레셋 출신의 거인 전사에서 유래되었다. 거대한 사이즈로 완전 무장을 한 골리앗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발한다. 놋쇠투구에, 단창 그리고 방패로 무장한 무시무시한 전사에 맞서 싸울 이스라엘 병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 목동 출신의 애송이 다윗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불세출의 블레셋 출신 전사는 다윗 전설을 위한 불쏘시개가 아니었을까.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전쟁 영웅이 된 다윗은 결국 사울 왕에 이어 유대왕국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팔레스타인(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유대인) 사이는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베들레헴을 기점으로 유대 왕국을 둘로 나누려던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엘라 계곡에서 대치하게 된다. 너튜브의 어느 다큐멘터리를 보니 골리앗은 45kg이나 나가는 전신갑주를 입은 중보병이었고, 그에 대항하는 다윗은 투석병이었다는 분석이 등장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대규모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일기토 대결 방식이 전쟁에서 선호된 모양이다. 근거리 전투에서 다윗을 박살내고 싶었던 골리앗은 내게로 오라고 적에게 외친다. 후대 연구자들은 골리앗이 성장 호르몬 과다분비로 말단비대증(Acromegaly)을 겪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합병증으로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복시증이 있었을 거라고도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골리앗은 보이는 게 없었다. 그래서 골리앗의 방패지기 소년은 적의 이동을 구분하는 역할을 맡지 않았을까. 그래픽 노블에서 골리앗의 눈 역할을 해주던 방패지기 소년이 골리앗의 곁을 떠났을 때, 이미 승부는 정해졌던 게 아닐까.

 

갑옷을 입지 않은 다윗은 골리앗에 비해 훨씬 더 뛰어난 기동성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는 다년간의 목동 생활을 통해 훈련된 투석병이었던 다윗이 던진 돌팔매의 위력은 현대에 있어 권총의 살상능력에 가까웠다고 한다. 일격필살의 위력으로 다윗은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에 도전장을 냈다. 그런 다윗이 여러 제약을 지닌 골리앗을 일기토 대결에서 이기는 게 아주 허황된 전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톰 골드가 그린 <골리앗>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성경에서는 다윗을 부각시키기 위해 무시무시한 전사로 묘사되지만, 가드 사람 골리앗은 사실 전쟁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 그리고 심지어 행정병 출신의 거인이었다. 이스라엘군과의 지루한 교착상태(40여일)를 타파하기 위해 블레셋 사령관은 골리앗을 전면에 내세우기로 결정한다. 그런 걸 보면, 그는 전장에서 비밀병기의 중요성을 잘 알던 지휘관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딱히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최전선에 나선 골리앗은 할 일이 없다. 그저 매일 같이 사령관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도발하는 문구를 읽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시 병영으로 돌아온다. 그러다가 다윗의 등장으로 전선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골리앗은 허무하게 죽고 만다.

 

톰 골드의 <골리앗>을 읽으면서 오랜 전설/신화의 실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오랜 과거의 진실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요즘처럼 동영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건을 목격한 소수가 남긴 구전에 기반한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목동 출신의 소년 다윗이 어마무시한 능력과 신체적 조건을 가진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린다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할까. 이게 신념의 문제로 간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사후약방문처럼 나중에 갖다 붙인 정밀한 분석들을 보면 아주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아닌 것처럼 포장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기존의 사고 대신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톰 골드의 <골리앗>은 의미 있는 독서였다. 상당히 많은 여백을 각자의 상상에 맡긴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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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1-30 16: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어제 그 책은 없고ㅠ
이 책은 있더군요. 조만간 저도!!

레삭매냐님 스타 하시나봐요ㅋㅋㅋㅋ
웬지 저그 하실듯 합니다.
저는 테란^^*

레삭매냐 2023-01-30 16:10   좋아요 3 | URL
어제 알았으면 더 빌렸을
텐데, 톰 골드 아재의 책이
좀 더 있더라구요.

주말에는 내내 그래픽 노블
만 봤네요. 저도 밀린 리뷰
가 늘어서 팍팍 써볼랍니다.

저도 테란했습니다. 그냥
솔플 하는 정도로 헷
실력은 미천하지요.

stella.K 2023-01-30 16:21   좋아요 3 | URL
아니 스타는 뭐고 테란은 또 뭡니까?
요즘 말은 당췌...ㅠㅎㅎㅎ

거리의화가 2023-01-30 16:22   좋아요 3 | URL
스타는 하지 않았지만 워낙 유명한 게임이라 저그, 테란 알아먹는 저^^;;;

stella.K 2023-01-30 16:42   좋아요 2 | URL
아, 게임 이름인가요?
와, 두 분들 대단하시네요.^^

coolcat329 2023-01-30 19:37   좋아요 2 | URL
하하 저도 테란 ㅋㅋ
아 제 20대 추억의 게임 ㅠㅠ

그레이스 2023-01-30 16: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전에 소개받은 적 있어요.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기를 한 책이란 생각이 들어요.

레삭매냐 2023-01-30 17:37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

이 참에 골리앗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네요.

책으로 촉발된 지혜의
탐구에 너튜브가 또
한 도움 주네요.

거리의화가 2023-01-30 16: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바람돌이님께서 소개해주실 때 마음에 남았어요.
골리앗이 말단비대증과 복시증을 겪었을 거라는 분석이 재밌습니다^^ 어쩌면 이런 전설은 메타포가 담긴 이야기에 포장 전술을 그럴싸하게 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로 해석하기보다는 다양한 방향의 해석이 필요한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3-01-30 17:39   좋아요 3 | URL
예전에 만난 <골리앗> 기억
이 나지 않아 부러 도서관에서
다시 읽었답니다 :>

언급해 주신 대로 예전 전설/
신화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싸인들이 잔뜩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네요.

다양한 해석이야말로 우리
책쟁이들이 책을 읽는 이유
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coolcat329 2023-01-30 1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도서관에서 찾아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1-31 07:42   좋아요 1 | URL
톰 골드의 책들, 추천합니다.

새파랑 2023-01-31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쟈는 프로토스 아닌가요? ㅋ 신화의 골리앗과는 다르게 스타의 골리앗은 좀... ㅋ

골리앗에게 저런 사연이 있다니 첨알았습니다~!!

레삭매냐 2023-01-31 17:12   좋아요 1 | URL
프토 질럿의 공격력은 정말 ~
스타 골리앗은 정말 허접하지요 :>

저도 어디선가 얼핏 듣고 나서
이번에 너튜브로 정주행하고
알게 되었네요. 신화의 재해석
재밌었습니다.

서니데이 2023-02-01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리앗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군요.
다윗의 돌에 맞는 역할 외에 다른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도 괜않은 것 같습니다.
잘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02-02 10:09   좋아요 1 | URL
그렇죠.

과거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다가
새로운 해석을 접하게 되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
더라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