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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의 독서법 - 분열과 고립의 시대의 책읽기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23년 3월
평점 :

또 한 번 위험한 책을 만나게 됐다. 이번에 개장했다는 송도국제도서관에 가서 서평가로 유명한 미치코 다카쿠니의 <서평가의 독서법>을 빌려다 읽었다. 우선 백여 권의 목록으로 이루어진 첫 네 페이지들을 복사해서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4B 연필로 밑줄을 죽죽 그어가면서 읽기 시작했다. 금방 다 읽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다 읽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한 열흘 정도 걸렸나.
이언 매큐언의 <속죄>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혹은 조지 오웰의 <1984> 같이 기존에 읽은 책들의 제목이 등장할 때는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신작 <프랑켄슈타인>을 최근에 봐서 그런 진 몰라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양한 버전으로 변주될 영원한 고전들의 반복될 도전적 재해석이 참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물론 아예 존재도 몰랐던 에드위지 당티카 작가의 소설집이나 천하제일 이야기 대회격인 모스(MOTH)에 소개된 이야기들을 모은 캐서린 번스의 <모든 밤을 지나는 당신에게> 같은 책은 이미 미치코 가쿠타니의 서평집을 읽기도 전에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절판된 책들도 있어서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만날 수가 없는 책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난관을 헤쳐 가면서 읽는 것 또한 우리 책쟁이들의 숙명이 아닌가 말이다.
NYT의 저명한 서평가인 미치코 다카쿠니가 19세기 블로거로 명명한 플로베르는 세상에 걸작을 남기기 위해 15년 동안 캐릭터 만들기에 전념했다고 했던가. 정확한 기록을 위해서라면 다시 책장을 넘기는 수고를 마다해야 않겠지만, 오독 또한 책읽기의 즐거움 중의 하나라는 지인의 충고를 받아 들여 내 마음으로 해석해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라면 대단한 수고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여전히 쉽게 쓰인 것들을 그렇게 우리의 곁에서 쉽게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다. 쉴 새 없이 갈고 닦고 연마해서 만들어낸 빛나는 캐릭터들은 그렇게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 같은 보통의 평범한 이들에게는 그런 노력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 않을까.
스티븐 킹의 책들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글쓰기의 대가인 그의 조언을 들어 보자. 누구나 아이디어를 낼 수는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아이디어의 결합으로 무언가를 증명해내야 한다. 빛나는 아이디어의 개발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순간보다 상황에 중점을 두라고 그는 조언한다. 매일의 글쓰기 목표를 세워, 죽치고 글을 쓰란다. 무엇보다 많이 읽고, 쓰기는 반드시 필요하겠지. 말은 쉽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를 기반으로 해서 건국된 미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미치코 가쿠타니는 여러 정치 서적들을 통해 신랄한 비판 의식을 보여준다. 근 2세기 전, 프랑스 출신 알렉시 드 토크빌은 건국 초기의 미국을 직접 여행하고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걸작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토크빌은 노예제 때문에 미래에 벌어질 끔찍한 내전을 예고했으며, 당대 미국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고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회의적 시선을 보여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원죄인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학살과 강제이주 그리고 노예제도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어쩌면 토크빌의 목소리를 빌려 가쿠타니는 그 어느 때보다 분열과 혐오로 점철된 현재 미국 사회의 병리학적 현실을 비판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버락 오바마의 말처럼, 과거의 문제들을 딛고 새로운 시대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일정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진보의 과정은 언제나 그렇듯 일보 전진과 후퇴의 연속이다. 그러니 현실이 우리를 속일 지라도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역시 가쿠타니의 서평집에도 소개된 토미 오렌지의 <데어 데어>는 읽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비슷한 결의 제법 읽었지만 완독하지 못한 브랜던 홉슨의 <에코타 가족>도 진짜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들에게 강제된 신산한 삶에 대한 스케치로 다가온다.
일찍이 이탈로 칼비노는 고전은 모름지기 ‘다시’ 읽는 거라는 말로 초보 독서가에게 열패감을 안겨 주었다. 고전을 한 번 읽기도 어려운데, 무려 다시 읽는 거라니.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칼비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처음 접할 때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괴물에 대해 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거듭 해서 읽으니, 괴물을 만들어낸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진짜 괴물이라는 생각을 그리고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는 피조물이지만 인간들에게 괴물로 간주되어 흑화된 괴물에 대한 동정심이 솟았다. 또 다시 읽게 된다면 보다 새로운 관점을 읽게 되지 않을까. 책의 어디선가 만난 “새롭게 읽”으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2019년에 작고하신 토니 모리슨 여사의 전작 읽기에 도전하고 있는데, 미처 가쿠타니 작가가 소개한 <솔로몬의 노래>는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못했다. 끝 간 데 없는 슬픔의 극한을 구사하는 토니 모리슨 작가는 다양한 원천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빌러비드>는 생각만 해도 슬퍼지는 그런 소설이 아니던가.
지난 사반세기 동안 무려 14권의 소설을 발표한 데이브 에거스도 이번에 새롭게 발굴(?)해낸 작가다. 국내에 그의 소설은 세 권이 소개가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인 <왕을 위한 홀로그램>은 6년 전에 읽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자전적 소설이라는 데뷔작 <비틀거리는 천재의 가슴 아픈 이야기>도 <서평가의 독서법> 읽고 나서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내가 이 책이 아주 위험하다고 말하는 거다. 책쟁이들의 끝없는 독서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현대 정치 관련 연설들은 모두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뛰어넘을 수 없고, 미국 현대 문학은 모두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후손이라는 헤밍웨이의 말은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다음 주말 독서모임 책인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를 다 읽고 나면, 그전에 시작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