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들의 밤 - 제154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다키구치 유쇼 지음, 이승준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월의 마지막 날, 다키구치 유쇼의 <산 자들의 밤>을 읽는다.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아 중고서점에서 지난주에 사서 읽기 시작했다. 분량이 적어서 금방 읽을 줄 알았으나,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라는 변수가 발생해서 좀 늦어졌다.

 

지난 12월에 고모님의 장례를 치러서 그런지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 농사꾼으로 살아온 핫토리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모인 일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사실 너무 많은 인원들이 등장하다 보니 하나하나 기억할 수조차 없다. 우리 친척들 이름도 모르는 판에, 소설에 나오는 핫토리 5남매 부부 그리고 10명의 손주들과 증손 슈토까지 기억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지 싶다.

 

개인적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는다면 일본 사람들은 초밥을 먹는다는 점이었다. 식구들이 모여 고인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건, 한국이나 일본이 다를 게 없지만. 오래 전에 본 영화 <학생부군신위(1996)>처럼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해서 떠들썩한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게 그렇게 이야기들이 넘실거린다.

 

고인의 손주 라인인 중고등학생 녀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례식장에 비치된 츄하이(하이볼?)나 맥주를 꺼내 마시는 장면은 아무래도 낯설었다. 우리나라 장례식자에서도 그런가. 최근에 문상을 갔던 장례식장에서는 술을 제공하지 않던데,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더라. 항상 술에서부터 문제가 출발하지 않던가.

 

고인의 시신은 집회소에 안치되어 있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핫토리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기 시작한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사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중학교 때부터 등교거부를 하다가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요시유키 같은 말썽꾼도 등장한다. 아무래도 식구들이 많다 보니 이런 문제아 하나 정도는 있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지 않나 싶다.

 

요시유키의 동생 지카는 자기보다 10살 많은 오빠의 삶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긴 소설에 등장하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번듯한 일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곁을 떠나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게 젊은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딱히 하는 일도 없다. 나중에 요시유키가 무슨 음원을 만든다는 것을 동생 지카는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로부터 극적인 무슨 일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은 그렇게 아주 조용하고 무덤덤하게 진행된다.

 

미국 위스콘신 출신의 다니엘과 가마쿠라 바닷가에서 자란 사에가 만나 고인의 증손 슈토가 태어났다. 이 또한 아주 기묘한 인연이 아닐까. 초상집에서 경야를 치르던 식구들은 온천랜드로 우르르 몰려가 온천욕을 즐기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연을 다한 이는 이제 초상이 끝나는 대로 화장하고 신사로 모셔지려나. 그래도 산 사람들은 산 사람들 대로 계속해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

 

집회소(일본식 장례식장)에서 내가 기대한 건, 고인이 남긴 유산을 두고 한바탕 치르게 될 전쟁(?)이었는데 의외로 또 그런 장면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았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산 고인에게 돈이 될만한 재산이 없어서였을까. 고인이 살던 집은 근처에 살던 아들 야스오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원만하게 처리되었다. 대가 한국의 장레식장에서 벌어지는 막장 드라마를 기대했다면,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와 같이 살던 문제아 요시유키는 그대로 같이 사는 것으로 결정됐다.

 

참 소설에 등장하는 테레사 텐(등려군)<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라는 곡이 궁금해서 너튜브로 찾아서 들어보기도 했다. 애절하기도 하여라. 고인의 평생지기 핫짱은 고인과 함께 떠났던 어느 해의 츠루가 여행을 추억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도 오래 되어 그런진 몰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또 어디선가 기억은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고 했던가. 둘이서 여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는 <산 자들의 밤>을 읽기 전에 무엇을 기대했을까. 아마 우리와는 다른 일본의 장례 문화, 고인을 추모하는 방식 같은 것들을 기대하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라고 했던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수용할 수 있다면, 그나마 좀 마음의 위안이 되려나. 고인과의 친밀도에 따라 아마 자신이 느끼는 상실감의 강도가 다르지 않을까 싶다. 해외에서는 고인이 사전에 자신의 장례식에 대비해서 눈물바다 대신 유쾌한 축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 이벤트를 준비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역시나 우리네 전통과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다.

 

책의 말미에 달린 <야곡>에서는 무언가 허무주의적인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마가 단골손님들을 상대로 운영하는 주점 이야기였던가. 나는 <산 자들의 밤>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착각했었네. 다른 건 모르겠고 석쇠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시샤모구이는 한 번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언제고 이 책은 다시 한 번 읽어야봐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계속해서 주변에서 상을 당하는 이들이 있어 그런지, 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참 낯설지 않게 다가오더라. 무언가 하고 싶은 말들이 더 있었는데 미처 담지 못한 그런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동안 중고서점에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 뜨길 기다렸다. 심지어 당근도 뒤졌다고 하지. 이 책은 빌려서 읽기보다는 아무래도 왠지 소장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눈과 우박이 쏟아지던 지난 토요일, 드디어 중고서점에 <면도날>이 나왔다는 뉴스를 들고 냉큼 달려가서 사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건 뭐 중고책이 아니라 한 번 넘기지도 않은 새책인 걸 그래. 500쪽 짜리 책이었는데 단 이틀만에 다 읽었다. 재미와 주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수작이었다. 이런 맛에 고전을 읽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면도날>1919년에 <달과 6펜스>라는 걸작 소설을 발표한 어느 작가(아마 서머싯 몸의 페르소나겠지)가 화자로 등장해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전후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다양한 인물들이 펼치는 삶들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내용에 대한 기록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오십대 중년 엘리엇 템플턴이다. 미술품과 골동품 거래로 돈을 벌기 시작한 엘리엇은 지독한 속물대장이다. 자신의 재력과 특유의 친화력을 발판으로 삼아 사교계에 진출한다. 그리고 곧이어 사교계의 스타가 되어, 각종 파티를 열어 저명한 인사들과 교류하고 또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사업과 인맥을 확장하고 구축해 나간다.

 

엘리엇의 조카딸 이사벨 브래들리는 이제 막 유럽의 전장에서 돌아온 고아 출신 래리(로렌스) 더렐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 하지만, 나이를 속이고 육군항공대 소속으로 전장에서 자신을 구하려던 동료 팻시의 죽음을 보고서 심각한 트라우마에 빠진 상태다. 이제 막 전쟁에서 벗어나 세계 제국으로 성장해 가던 시절의 미국 청년에게 주어진 기회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래리의 생각은 달랐다. 너무 이른 시기에 삶의 고된 맛을 봐서였을까? 아니면 조실부모하고 후견인에 의해 양육되면서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 탓일까? 당장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자는 이사벨의 제안을 거부하고 유럽 대륙의 파리로 건너가 한동안 공부를 하겠다고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부터 래리와 이사벨의 관계는 파탄을 예고하지 않았나. 게다가 이사벨에게는 백만장자 출신 헨리() 매튜린의 아들 그레이가 열렬하게 구애를 하고 있었다. 사실 모든 조건에서 래리보다 그레이가 월등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레이와 래리는 친구 사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레이는 아버지 헨리를 설득해서 래리를 아버지 회사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었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이사벨은 왜 래리가 이런 좋은 제안을 마다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래리는 파리로 떠나 자유로운 보헤미안으로서 2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서 라틴어를 공부하고, 심지어 그리스어까지 배우는 지식에 대한 열의를 보여준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것처럼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고 보다 더 많은 배움을 추구하는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미국 작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국외자(expatriate)이자 전형적인 몽상가 혹은 이상주의자의 모습이 보여진다.

 

더 이상 래리의 학문과 배움의 외도(?)를 견딜 수 없었던 이사벨은 파리로 건너가 래리와 결혼 문제를 두고 담판을 짓는다. 아니 이 갈등은 시작하기 전부터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나. 래리는 학문의 구도자 같은 자신의 배움의 길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이사벨은 고작 1년에 3,000달러 수입으로 만족하며 사는 래리의 삶을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 고향 시카고로 돌아가게 되면, 안정적 직업과 더 많은 수입으로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왜 그런 호사를 거부하냐는 주장이다. 여기서 바로 나는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의 격렬한 충돌을 볼 수가 있었다. 도무지 타협이 불가능한 두 세계가 맞부딪힌 것이다. 그리고 결말은 예상한 그래도였다. 이사벨은 약혼을 취소하고, 시카고로 돌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그레이 매튜린과 결혼에 골인한다.

 

이사벨이 시카고에서 부잣집 도련님과 신혼살림을 차린 동안, 우리의 주인공 래리의 방랑은 계속된다. 화자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후 이십년 동안의 시절을 오가며 서로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충실하게 해준다. 이 점 또한 작가가 설계한 그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사실 소설 <면도날>에는 래리와 이사벨의 이야기 뿐 아니라 엘리엇이나 다른 등장인물에 대한 자잘한 이야기들이 숱하게 등장하지만, 나는 적어도 이번 독서에서는 래리와 이사벨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읽었다고 고백한다.

 

래리는 파리를 떠나 이번에는 프랑스의 랑스 지역에 가서 탄광노동자로 변신한다. 골방에서 책만 읽던 샌님이 어떻게 노동이 강하기로 유명한 탄광에 가서 석탄을 캐게 되었을까. 어쩌면 작가 서머싯 몸은 지식인들이 그런 빡센 노동도 한 번 쯤은 경험해 봐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다음에는 우연히 만난 폴란드 귀족 출신 코스티를 만나 함께 독일 농장 노동자가 되어 한동안 일하기도 했다.

 

주인공 래리 더렐은 언어를 배우는데 있어 어쩌면 남다른 실력을 가졌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모국어인 영어는 물론이고, 전쟁 영웅으로 프랑스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가 있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공부했고, 독일 농장 경험을 통해 독일어도 배웠다. 나중에 나오지만, 래리의 유랑은 인도에까지 다다르게 되는데 거기서는 타밀어를 배워 구루들과 교류하는 수준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거의 천재적 수준의 존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독일 농가 여주인과의 관계 때문에 코스티와 이별한 래리는 이번에는 철학의 나라 독일 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하숙집에서 우연히 만난 베네딕트 수도회 출신의 엔스하임 사제를 따라 수도원 생활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라, 갑자기 래리가 추구하는 구도의 길을 되짚어 보다 보니 문득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렇게 소설과 후대의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상호 작용을 했던 걸까.

 

래리의 다음 목적지는 인도였다. 미국으로 가는 배의 간판원으로 변신했던 래리는 인도 봄베이에서 불현듯 하선해서 저명한 인도의 구루를 찾아 나선다. 독일 수도원에서 신과의 조우를 잠시 경험했던 래리는 인도에서 절대자와의 합일까지 경험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포레스트 검프 이전에 이미 래리 더렐이라는 걸출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엑스페이트리어트(국외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읽으면서 조금 전율하기도 했다.

 

자 그렇다면 다른 주요 인물인 이사벨 브래들리 아니 이제 그레이와 결혼했으니 이사벨 매튜린에게 시선을 돌려 보자. 모두가 다 알다시피 <검은 목요일>로 알려진 19291024일 증시 폭락으로 매튜린네 집안은 폭삭 망해 파산해 버렸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사벨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구원자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파리 사교계의 이단아 엘리엇 템플턴이었다.

 

엘리엇을 파산의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그전부터 교류하던 바티칸의 뛰어난 정보력이었다. 미국 주식이 폭락할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엘리엇은 밥 매튜린이 관리하던 자신의 주식을 모두 처분하고 안전 자산인 금으로 바꿔, 위기에 철저하게 대비했다.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은 누이 루이자도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뼈 속까지 속물이긴 했지만, 사람 좋은 엘리엇은 조카 이사벨네 가족을 외면하지 않고 파리로 불러 들여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들어 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이사벨 가족에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한편, 오랜 방랑 끝에 파리로 돌아온 래리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동향 출신 소피 맥더널드를 만나 결혼을 결심한다. 여전히 래리를 사랑하고 있던 이사벨은 도저히 술과 마약으로 엉망이 된 소피와 자신의 옛 연인이 결혼하는 걸 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 화자에 의해 드러나게 되지만, 이사벨은 최악의 방법으로 소피와 래리의 결합을 방해하는데 성공한다.

 

서머싯 몸은 <면도날>에서 화자이자 작가로 등장해서 소설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사건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하면서, 서사를 주도한다. 아마 그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독자들은 서사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으리라.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몸은 방대한 서사를 통해 전달한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며 사는 걸까? 래리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그리스 원어로 읽을 때 너무 기뻤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어쩌면 나는 래리처럼 책에서 그런 위안과 구원을 기대하며 살지 않나 싶었다.

 

이사벨에게서는 타협의 미학에 대해 배웠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는 게 바로 우리네 인생이다. 래리를 사랑했지만, 래리의 이상을 공유할 수 없었던 또다른 속물이자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이사벨은 래리와 함께 하는 고난의 행군 대신 부유한 가문 출신의 호남자 그레이를 선택해서 결혼이라는 선택을 했다. 물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로 집안이 박살나기는 했지만 그레이는 래리와 달리 여전히 재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험난한 시기를 버텨 나갔다. 그리고 엘리엇 삼촌이 죽고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텍사스 댈러스에 가서 석유 사업을 시작한다. 아마 이사벨 가족들은 그곳에서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았겠지.

 

서머싯 몸의 <면도날>은 고전은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라는 통념을 제대로 혁파해준 그런 멋진 작품이었다.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고향에 돌아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청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구도의 길에 나섰다. 무언가 확실한 것을 길 위에서 과연 깨우쳤는가에 대해서는 끝까지 알 수가 없지만, 그의 방랑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출발할 때에는 부모가 남긴 유산이 많은 도움이 됐지만, 어느 순간 래리는 그마저도 포기해 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뉴욕에 가서 택시를 운전하면서 먹고 살면서 자신만의 소중한 시간을 가지겠다는 선언 앞에서는 끝까지 자신의 몽상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래리가 1970년대, 뉴욕의 밤거리를 누비는 "택시 드라이버" 트래비스 리로 변신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도 해봤다.

 

왜 이런 걸작을 이제야 만나게 되었는지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폴 린치의 <예언자의 노래>와 더불어 올해 만난 최고의 책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an22598 2025-03-31 15: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면도날 너무 재밌죠? ㅎㅎ 저도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고 작가입니다!

레삭매냐 2025-03-31 17:44   좋아요 1 | URL
네 너무 재밌게 읽었답니다.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절대자와의 합일
부분이 좀 빡시긴 했지만요 :>

예전에 사서 묵혀둔 <케이크와 맥주>
도 이참에 도전해야봐야겠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25-04-03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100배 리뷰입니다ㅎ 저도 면도날 달과6펜스 인생의베일 정말 재밌게 읽었죠ㅎ

케이크와 맥주 저도 읽어야 되는데 잘 안되네요ㅎ

레삭매냐 2025-04-04 07:24   좋아요 1 | URL
넵! 저도 <달과 6펜스> 아주 재밌게
읽은 기억입니다.
그리고 보니 <인생의 베일>도 참
인상 깊었죠.

<케이크와 맥주> 빨랑 읽어야 하는데...
 
암캐
필라르 킨타나 지음, 최이슬기 옮김 / 고트(goat)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책을 알게 되었지? 출발점을 특정할 수가 없다. 동네 도서관에 책이 없어서 상호대차로 지난주에 빌려서 부지런히 읽었다. 요즘 책구매를 최대한(?) 자제하고 어지간한 책들은 도서관 대출로 읽는 중이다. 어쩌면 오늘도 집에 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서 또 어떤 책을 빌리지도 모르겠다. 항상 후보들은 줄지어 대기 중이니 무슨 걱정이랴.

 

소설 <암캐>의 공간적 배경을 추적해 본다. 부에나벤투라까지는 찾았는데 아마 콜롬비아 서부 태평양 바닷가에 인접한 어느 작은 어촌 마을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 다마리스가 도냐 엘로디아에게 암놈 강아지, 치를리를 한 마리 데려오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수놈들은 그나마 입양이 손쉬운데, 암놈 강아지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애견인이 아니다 보니 그 쪽 세계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무려 11마리의 강아지들이 태어났는데, 어미는 독살당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 도입부가 결말에 가서 마주하게 되는 비극과 수미상응하는 어떤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보면 소설가들은 자기 소설의 곳곳에 그런 장치들을 아주 영리하게 계획적으로 배치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치를리의 형제들은 모두 죽고 유일하게 치를리만, 아이가 없는 다마리스의 지극정성으로 생존하는데 성공한다. 다마리스의 남편인 로헬리오는 이미 데인저, 올리보, 모스크라는 세 마리의 개들을 키우고 있는데 난폭하게 개를 다룬다. 다마리스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치를리(미스 콜롬비아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고 했던가)에게 로헬리오가 손을 댄다면 죽일 지도 모른다는 고백도 한다. 이거 조금 살벌한데 그래.

 

다마리스와 로헬리오는 작은 오두막집에서 텔레노벨라를 시청하며 아주 소박한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리고 이웃에는 레예스 저택이 있는데, 그 집 아들이었던 7세의 동갑내기 니콜라시토를 파도가 집어 삼키는 비극이 벌어졌었다. 그 때가 197712, 셜리 사엔스가 미스 콜롬비아가 됐던 해라고 한다. 셜리 사엔스가 실존 인물인지 구글링으로 검색해 보기도 했다. 역시 소설은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다마리스의 보살핌을 받는 치를리가 계속해서 가난하지만 인정 많은 부부와 같이 살았다면 좋았겠지만, 어느 날 다른 개들을 따라 밀림으로 들어간 치를리는 한 달 넘게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마리스는 마체테 칼로 무장하고, 치를리를 찾아 무성한 정글을 이 잡듯이 뒤지지만 결국 달아난 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포기하려던 차에 치를리가 돌아왔다.

 

참 다마리스는 부부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 심지어 많은 돈을 들여 주술의 도움에 청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다마리스가 나중에 치를리가 새끼를 가지게 되었을 때, 모종의 시기심을 느끼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로헬리오는 다마리스에게 정글의 맛을 본 치를리가 계속해서 도망칠 거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동시에 도주와 귀환을 반복하는 치를리에게 다마리스도 서서히 지쳐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던 치를리는 임신한 채로 다시 다마리스에게 돌아온다. 치를리는 자기가 낳은 새끼들에게 모성이 없는지 다시 밀림으로 도망쳐 버렸고, 남은 새끼들은 다시 다마리스가 돌보게 됐다. 수컷 두 마리는 쉽게 주인을 찾아 주었지만, 하나 남은 암컷 새끼는 원하는 이가 없어 히메나 아주머니에게 주기로 결정한다.

 

일이 좀 꼬여서 히메나 아주머니에게 암컷 강아지를 주지 못하고, 대신 어미인 치를리로 대신하게 된다. 히메나에게 단속을 단단히 하라고 주의를 주지만, 치를리를 다시 다마리스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레예스네 니콜라시토 방의 커튼을 엉망으로 만들고, 비극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한다.

 

필라르 킨타나 작가는 다마리스와 치를리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해서, 엔딩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을 담담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언뜻 보면 강아지 치를리의 일생에 주인공의 삶을 투영시키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는 치를리(임신)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라고나 할까. 유년 시절, 니콜라시토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던 다마리스에게 소중하게 지켜온 니콜라시토의 방을 엉망으로 만든 치를리를 그녀가 과연 용서할 수 있었을까. 소설의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분출하는 증오와 애정, 시기 같은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가 느닷없이 닥치는 폭풍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점은 2만 원에 육박하는 책값이었다. 물론 책의 가치를 분량으로 매길 수는 없겠지만 백쪽 조금 넘어가는 책인데 말이지. 그게 조금 궁금했다. 어쩌면 서지 정보에 나와 있는 대로, 알려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 (양장) - 2024년 하반기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도서
과달루페 네텔 지음, 최이슬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주 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러 과달루페 네텔 작가의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를 빌렸다. SNS에 가끔 올라오는 책소개 글의 유혹을 이길 방법이 없더라. 그리고 존 밴빌의 신간과 카뮈의 <계엄령>을 만나기 전까지 네텔 작가의 <이네스>에 빠져 버렸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나서 다시 <이네스>에 매달렸다. 많은 장점 가운데서도 가독성 하나는 끝내주는 책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프랑스 유학파로 지금은 고국인 멕시코에 돌아와서 계속해서 연구활동 중인 라우라다. 그녀에게 결혼과 출산은 선택지가 아니다. 그녀의 친구 알리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아우렐리오를 만나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다. <이네스>에서는 라우라의 삶과 동시에 알리나 출산, 이웃 도리스네 이야기 그리고 라우라의 집에 둥지를 튼 비둘기 커플의 이야기가 엇갈리면서 흥미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우선 알리나의 출산 도전은 난관의 연속이다. 늦은 나이에 출산을 결정해서 아이를 갖기가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어렵게 얻은 아이는 임신 중에 심각한 문제를 얻어, 태어나도 곧 죽게 될 거라는 비관적 전망들을 담당 주치의들로부터 듣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옆집에는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 도리스와 그녀의 아들 니콜라스가 산다. 남편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도리스는 하나 남은 니콜라스마저 잃을까봐 극도로 보호하고 외출까지 막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니 바깥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어린 아들과의 충돌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래도 뻐꾸기의 알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비둘기 커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서사는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한 이네스의 탄생 그리고 이네스를 돌보게 되는 보모 마를레네의 이야기를 위한 준비의 하나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의 운명에 대해 좋은 소식은 하나 없다. 하지만 알리나는 출산을 강행한다.

 

그렇게 태어난 이네스는 살고자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세상에 보여준다. 심지어 미렐레스 박사는 얼마 살지 못할 아이의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런 비극의 당사자가 아니다 보니,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주변의 경고에도 꿋꿋하게 생을 영위해 나간다.

 

이런 고통의 바다 속에서 알리나는 무지막지한 인터넷 쇼핑이라는 방식으로 현실에서 도피를 시도한다. 일견 그런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라면 과연 어떤 방식을 선택했을까? 아마 책으로의 도피를 시도하지 않았을까. 몽테스키외의 말을 빌리자면, 한 시간의 독서가 이기지 못할 세상의 고통은 없다고 했던가.

 

한편, 비둘기 커플 둥지에 탁란한 유사부모의 이미지는 이네스의 보모 마를레네 뿐 아니라자신도 실제 삶에서 니콜라스를 통해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린 그리고 언제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이네스에 대한 마를레네의 집착(?)은 과연 알리나의 의심을 살 정도로 도가 넘지 않았나 싶다. 산후 우울증세와 더불어 알리나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 절박한 처지에 처한 부모라면 아마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설의 2/3 정도 되는 지점까지는 중요인물인 이네스가 언제라도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는 팽팽한 긴장감을 빌미로 해서 독자를 잡아 놓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나는 <이네스>에 대한 흥미를 잃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물론 알리나의 쇼핑 부채나 마를레네에 대한 의심 같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잠재적 문제들이 하나둘씩 풀려나가는 재미는 확실했다. 하지만 여성들간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좀 작위적이라고 해야 할까. 니콜라스가 멀리 떠난 뒤, 라우라와 도리스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대표적이었다.

 

소설의 초반에 독자를 사로잡은 생명에 대한 강렬한 주제의식과 전개방식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이런 기세를 타고 소설의 후반부까지 긴장감을 유지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럼에도 뛰어난 가독성과 삶에 천착하는 이네스의 강인함을 중심에 둔 서사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왠지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어울리는 그런 소설이라고나 할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5-03-24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시간의 독서가 이기지 못할 세상의 고통은 없다˝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레삭매냐 2025-03-25 07:12   좋아요 1 | URL
현실과 세월이 하 수상하니,
책에서 위로를 구하게 되는가 봅니다.
 
계엄령
알베르 카뮈 지음, 안건우 옮김 / 녹색광선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혼돈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110일 전의 비상계엄 사태가 시발점이었다. 책쟁이들은 무언가 이런 시절을 달랠 수 있는 책을 원했고, 출판사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알베르 카뮈의 희곡 <계엄령>을 신속하게 펴냈다. 무려 77년 전에 발표된 카뮈의 희곡 <계엄령>은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찬반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희곡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에스파냐 총독이 다스리던 카디스에 어느날 페스트와 그의 비서가 등장해서, 권력을 이양 받는다. 당연히 페스트는 독재/전체주의의 상징이다. 실질적 권력자였던 총독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보장받고, 권력을 페스트에게 넘긴다. 왜 이 장면에서는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를 수상으로 발탁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페스트와 그의 충실한 비서는 각종 포고령과 표식이라는 폭력적 방식으로 카디스를 장악해 버렸다. 전체주의 독재자답게 죽음이라는 공포 그리고 까다로운 조항의 규칙과 규정들을 제정해서, 대중의 비판을 무력화시킨다. 삼단계로 구성된 살생부에서 마지막 단계인 말소의 위력은 대단하다.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고 말을 듣지 않는 카디스 인사들은 예외 없이 말소 처리된다. 그렇게 카디스 시민들은 페스트의 노예로 전락한다.

 

이런 테러와 공포로 무장된 페스트 일당에게 시장이나 주정뱅이 나다처럼 적극적으로 부역하는 이른바 콜라보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하지만, 반대로 희곡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디에고와 그의 약혼녀 빅토리아처럼 페스트로 죽어가는 무고한 이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저항에 나서는 이들도 없지 않다. 문제는 카디스의 대부분의 인사들처럼 그들 역시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떻게 죽음이라는 근원적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카뮈는 좀 진부하기는 하지만, 사랑의 힘으로 카디스 시민들에게 주어진 억압과 굴종의 족쇄를 풀어버릴 수 있게 저항에 나서야 한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서사를 이어나간다. 그 와중에 빅토리아의 아버지 카사도 판사네 집에서 벌어지는 막장극은 한바탕 코미디다. 이런 실소를 자아내는 에피소드 역시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희곡에서 빠지면 안 되는 그런 요소가 아니었을까.

 

카뮈가 <계엄령>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어쩔 수 없이 시대정신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 디에고로 대변되는 선동가들은 전후 프랑스 정계에서 활발한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프랑스 공산당(PCF)을 연상시킨다. 전후 비시 정부의 나치 부역자들을 숙청하는데 성공한 프랑스는 서방세계를 위협하는 스탈린의 소련과의 냉전 모드에 돌입한다. 카뮈의 <계엄령>은 그런 상황에서,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을 모델로 삼아야 하지 않았냐는 격렬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에스파냐 내전에서 승리하고 스스로 카우디요의 자리에 오른 프랑코 총통의 에스파냐가 희곡 <계엄령>의 무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카뮈의 전체주의 비판이 공산주의 뿐 아니라 서방세계의 독재 전체주의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빅토리아가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연인을 대신해서 대속제물을 자처하는 디에고의 모습에서는 기독교의 메시아가 연상됐다. 결국 그의 거룩한 희생으로 빅토리아는 구원받고, 카디스 역시 페스트의 손에서 해방된다. 문제는 그렇게 한 번 물러간 페스트(전체주의)가 남긴 악의 씨앗이 언제고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치명적 후유증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런 점은 우리가 강고하다고 믿어왔던 민주주의가 이번 사태에서 얼마나 취약했던가와 대비되면서 많은 교훈을 준다.

 

카뮈의 <계엄령>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를 했었나 보다. 아무래도 디테일에서 70년이라는 시간의 더께를 뛰어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무지와 망각을 먹고 자라는 독버섯 같은 전체주의 독재의 망령에 대한 청년작가의 은유는 탁월했지만, 우리의 상황은 당시 프랑스가 처한 그것과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당시 프랑스의 시대상에 대해 몰라서 더 공감하기 어렵지 않았나 싶다. 그런 점에서 책의 말미에 달린 해설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자꾸만 지연되는 정의 때문인지 무력감에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린 느낌이다. 문득 <계엄령>을 진짜 연극 무대에서 관람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란공 2025-03-23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발써 100일이 넘었군요. 답답한 상황이 끝날 기미가 안보이네요.

레삭매냐 2025-03-24 07:26   좋아요 1 | URL
그야말로 천일 같은 백일이었습니다 ㅠㅠ
끝이 없네요.

그레이스 2025-03-24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별 3개예요?
시대적 한계가 있었군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
울화가 ㅠㅠ
병나겠어요ㅠㅠ

레삭매냐 2025-03-25 07:11   좋아요 1 | URL
1948년의 프랑스와 2025년
의 한국의 괴리가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저도 기대를 많이 했는데...
좀 아쉬웠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 가는데,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점
이 정말 답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