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여 잘 있거라 (모노 에디션) 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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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 항상 우연이라는 생각이다. 이번 여름 지독히도 책을 읽지 않았다. 이제 날도 선선해지고 그랬으니 책 좀 읽어볼까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무려 14년 전에 사두었던,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버전으로 읽게 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었다. 무려 14년이나 걸렸지만, 읽는 데는 달랑 이틀이 걸렸다. 다시 독서력에 발동이 걸리는 걸까.

 

소설의 대가라고 알려진 헤밍웨이의 장편소설이 5권 뿐이라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리고 1929927일에 발표된 <무기여 잘 있거라>30세의 헤밍웨이가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1차세계대전 당시 이손초 강 유역의 카포레토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발칸반도를 집어 삼키려고 섣불리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에 나섰던 이탈리아의 무모한 도전이 오스트리아-독일 동맹군의 공격 앞에 무너지는 과정을 그야말로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미국 출신 프레더릭 헨리다. 이탈리아 전우들에게 그는 종종 페데리코 엔리코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나는 그를 페데리코라고 부르기로 했다. 때는 1915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 우디네 부근의 최전선에 배치된 페데리코는 앰뷸런스 운전을 맡은 중위로 참전했다. 콜레라가 유행해서 7천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죽었다는 이이야기로 소설이 시작된다.

 

그런데 미국 출신의 페데리코는 아직 미국이 전쟁에 정식으로 참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이탈리아군에 가담하고 전투에 배치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기대한 미국에서 삶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젊은 미국 청년은 오로지 동료이자 외과 의사인 리날디와 사제 그리고 몇몇 이탈리아 전우들과 시덥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순간의 단순한 쾌락을 추구하는 그런 청춘으로 소개된다.

 

그러던 중에, 리날디를 통해 알게 된 스코틀랜드 출신 금발의 간호사 캐서린 바클리를 만나면서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미국인답게 금세 사랑에 빠지고, 또 격정적인 사랑으로 이어지게 된다. 첫 만남부터 다짜고짜 키스를 시도하다가, 바클리 양에게 뺨을 맞기도 하는 봉변을 당한다. 이런 게 전형적인 미국식 연애방식이었나. 연애를 일종의 브리지 게임 정도로 생각하는 화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 페데리코가 바클리 양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관계가 시작된 건 아니었다. 무려 8년이나 만난 약혼자를 솜므 전투에서 잃은 바클리 양의 사연에 서글퍼졌다. 처음부터 왠지 앞으로 벌어질 비극을 예언하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헤밍웨이가 구사하는 강력한 서사의 힘은, 마치 하드보일드 액션영화를 보는 것처럼 자세한 사항이나 미묘한 감정에 대한 묘사 없이 격렬한 사랑으로 폭풍처럼 페데리코와 캐서린을 몰고 들어간다.

 

페데리코와 캐서린의 사랑이 깊어 갈수록, 이손초 전선에서 맞붙은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의 전투 역시 날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었다. 공격에 나선 이탈리아군은 19만이나 되는 대병력을 잃고 위기에 봉착했다. 사람들은 이런 추세라면, 이탈리아가 전쟁에 이길 수 없다는 전망까지 할 정도였다. 이탈리아군은 잡다한 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군보다, 훈족의 후예라며 두려워하는 독일군의 공세를 더 두려워했다. 소설에서 헤밍웨이는 독일군 15개 사단이 훗날 이어질 카포레토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독일군 6개 사단과 오스트리아군 9개 사단으로 구성된 동맹군 15개 사단이 이탈리아군을 위기로 몰아 넣었다. 훗날 사막의 여우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에르빈 롬멜이 카포레토 전투에 등장했다.

 

한편, 전선에서 페데리코가 마네라와 파시니 그리고 가부치들과 전쟁에 대한 신랄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헤밍웨이의 반전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누구도 손해를 보면서 전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지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돈을 버는 인간들의 탐욕도 제어할 수가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적의 박격포탄 공격이 시작된다. 다리 부상을 당한 파시니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페데리코는 참호용 박격 포탄을 맞아 심각한 무릎 부상을 당하고 후방 밀라노로 후송된다. 그 결과, 은성 훈장을 받게 되는데 전장에서의 눈부신 무공을 세훈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헤밍웨이는 콕 집어서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캐서린과 다시 만나 사랑을 확인하고 미래를 약속하게 된다.

 

부상에서 치유 중인 페데리코는 찾아온 사제는 이제 전쟁이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생명을 직접 위협하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지에서 벗어난 페데리코가 전쟁을 혐오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왜 페데리코가 미국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과 직접적 관계도 없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우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찌만, 헤밍웨이는 이번에도 능숙하게 전쟁이 계속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로 본질적 문제들을 회피한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밀라노에서 무릎 부상을 치료한 페데리코는 카포레토 전투가 벌어질 전장으로 복귀한다. 19171024일 독일-오스트리아의 대공세 앞에, 이탈리아군 전선은 붕괴되고 대규모 퇴각에 나선다. 페데리코 역시 적군의 파상공세 앞에, 속수무책으로 담당한 앰뷸런스를 상실하고 동료들과 후퇴길에 나선다. 미국 출신 장교라는 정체성으로 헌병대에 체포되어 탈영병으로 간주되어 총살당할 위기에서 탈리아멘토강에 몸을 던져 탈출에 성공한다.

 

구사일생으로 익사의 위기에서 벗어난 페데리코는 추위와 허기 그리고 고통에 시달리면서 캐서린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힘으로 밀라노에 도착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캐서린이 스트레사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 다시 그녀를 찾아 길을 나선다. 스트레사에서 캐서린과 재회한 페데리코는 다시 안식을 찾아 스위스까지 보트로 탈출하게 된다. 영구중립국인 스위스에서 그들에게 행복한 시간은 잠시 뿐, 결국 소설은 비극적 엔딩으로 치닫는다.

 

헤밍웨이는 인류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이라는 전통적 테마를 중심에 두고, 포탄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전장을 배경으로 반전 메시지를 가득 담아 <무기여 잘 있거라>를 발표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한결 같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캐서린은 자신이 사랑하던 약혼자를 솜므 전투에서 잃었다. 신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제는 물론이고, 곳곳에서 등장하는 소시민과 일반 병사들 역시 전쟁의 무용성을 설파하고, 어떻게 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는지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마다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전쟁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결국 자신만의 종전 선언을 한 페데리코야말로 소설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반전을 그대로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반드시 전쟁에서 살아남아 사랑하는 캐서린과 꼬마 캐서린을 돌봐야 한다는 사명감이 점층적으로 생산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이 발표된 뒤, 3년 후에 만들어진 게리 쿠퍼 주연의 동명 영화는 원작 소설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소설의 엔딩은 19183월경인데, 영화에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하고 이탈리아가 승리했다는 부분이 등장한다. 캐서린이 난산 끝에 죽는 장면도 소설에서는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처리됐다면, 드라마성을 강조하는 영화는 좀 더 애절하고 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여담으로 1929<무기여 잘 있거라>가 발표될 당시에는 소설의 몇몇 부분들이 검열되기도 했다고 한다. 2025년 판본에는 헤밍웨이가 수정한 부분들이 검열 이전의 상태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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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 각본집 영화 오디세이를 책으로 만나다
크리스토퍼 놀란 지음, 김은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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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 관람의 여운이 가시기 않은 상태에서 <오디세이 각본집>을 만나게 됐다. 주말 행사처럼 된 도서관 방문을 했다가 신간코너에서 <오디세이 각본집>이 들어와 있는 걸 봤다. 바로 빌려서 바람처럼 읽기 시작했다. 뭐랄까 영화를 복기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호메로스의 고전 <오디세이아>를 원전으로 삼아 21세기 <오디세이>를 새롭게 창조해냈다. 원작의 얼개는 그대로 갖추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담아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시인이었던 호메로스도 당시에 떠돌던 마법이 지배하던 시대의 구전 전승 설화들을 집대성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오디세이아>를 만들지 않았을까.

 

호메로스가 인간의 기억력에 기반해서 서사를 구축했다면, 놀란 감독은 새로운 세기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카메라를 동원했다. 귀로 듣는 서사보다, 눈으로 보는 서사의 힘이 전세계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 잡아 버렸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고대 서사는 외눈박이 괴물 사이클롭스, 무자비한 거인족, 인간을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마녀 키르케 그리고 바다에서 선원들을 유혹하는 세이렌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동원해서 일련의 고정된 이미지들을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주목하는 인물은 바로 주인공 오디시어스다. 장장 10년에 걸친 불가능해 보이는 트로이 전쟁을 지략으로 승리로 이끈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영웅의 귀환 서사는 다만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문제는 그의 귀환이 무기한 지연되면서, 이타카 왕국의 질서는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왕비 페넬로페의 힘만으로는 당장 눈앞에 닥친 바다민족의 침공이라는 대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현실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오디시어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소식을 듣기 위해 방문한 스파르타의 국왕이자 트로이 전쟁에서 오디시어스의 전우였던 메넬라오스는 바다민족과 싸우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호언장담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헬라인들의 청동기 문명은 어디서 왔는지 여전히 미스터리로 되어 있는 바다민족의 침공으로 이후 400년간의 암흑 시기를 맞이하게 됐다. 어쩌면 신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혹독한 대가를 오디시어스가 치른 것처럼, 헬라 민족도 비슷한 궤도를 겪게 된 게 아닐까.

 

오디시어스는 트로이 왕국의 멸망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과연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회의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 고뇌하고 번민하는 오디시어스의 모습은 고대인이라기 보다, 현대인의 가까운 모습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헬라인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제우스의 법을 지키라는 명제를 트로이 목사 사건으로 깨부순 사람이 바로 오디시어스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 그들이 신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헬라 문명을 공격한 정체불명의 바다민족에 대해 비난할 수 있을지 묻고 싶어졌다. 어쩌면, 트로이 마지막 날의 모습은 훗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당하게 될 대재앙의 계시가 아니었을까.

 

오디시어스가 귀환길에서, 자신의 함대에게 공급할 식량과 보급품을 위해 가는 곳마다 거래와 협박 그리고 약탈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에게 현지인들은 협력의 대상이 아닌 오직 약탈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말을 할 수 있었던 사이클롭스에게 왜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느냐는 부하의 말에 개미와 말하는 걸 봤느냐며 핀잔을 주는 오디시어스의 모습이 연상됐다. 자신의 섬을 침략한 오디시어스와 그의 부하들은 외눈박이 폴리페모스에게 그저 한끼 식량에 불과했던 것이다.

 

신의 분노와 싸우며 고향 이타카로 가기 우해 고군분투하던 오디시어스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방문한 섬의 현지인들에게는 모두 믿을 수 없는 이방인이자 약탈자에 불과했다. 그랬기 때문에 라이스트리고네스 섬의 거인족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헬라 이방인들을 일방적으로 공격해서 그들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몰살시켜 버리지 않았던가.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도 살아남은 아무도 없다는 말에 무모하게 도전에 나서는 오디시어스의 모습은 만용에 가깝다. 신이 정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는 오디시어스. 가장 갈망하는 것들은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신탁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결국 태양신의 신성한 소들을 잡아먹고 하데스로 향하게 되는 오디시어스 부하들의 모습에서 결국 다시 한 번 필멸의 존재성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오디세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한 번 각본집을 읽으면서 고대 역사를 다시 한 번 현실에 적용시켜 보게 되었다. 한 때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이 트로이 전쟁으로 정점을 찍고 결국 하강곡선을 타고, 암흑기를 거쳐 훗날 지중해의 새로운 패권국가가 되는 로마에게 정복되었다. 19세기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며, 팍스 브리타니카를 구축했던 대영제국도 역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몰락하고 과거 식민지였던 미국에게 패권을 내주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도 이제 저물고 있다는 시그널을 사방에서 볼 수가 있다.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트로이 함락을 지켜보던 고대 전사 오디시어스의 모습이 세계 경찰국가의 위상을 잃고, 하루가 다르게 몰락하는 과거 거인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면 너무 나간 해석일까.

 

무려 3천 년 전부터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내러티브가 또 새로운 천년에도 이렇게 위력을 잃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새로운 창조의 모티브가 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서사가 가진 힘의 본질이 아닐까.


[뱀다리] 크리스토퍼 놀란의 재창조(re-creation)의 묘미는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타카 전사 시논의 캐릭터 추가보다 기존의 것에 대한 생략이 아니었을까. 사이클롭스 폴리페모스 에피소드에서 그 유명한 오디시어스의 노바디(우티스)” 서사는 이번 영화에서 아예 제외시켜 버렸다.

 

결국 에우마이오스가 말한 대로, 오디시어스의 영민함이 언젠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는 예언은 폴리페모스 에피소드를 통해 구현된다. 신의 분노 앞에,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를 부정(노바디:우티스)하면서 오디시어스는 사이클롭스를 농락한다. 그리고 폴리페모스를 공격하고 나서, 기지를 발휘해서 동굴을 탈출하면서 사이클롭스에게 화살 한 대를 날리는 장면으로 놀란 감독은 이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퉁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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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나
안드레 애치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비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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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이 얇은 책을 읽는데 오래 걸렸을까? 앉은 자리에서 바로 다 읽을 줄 알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다 읽는데 무려 일주일이나 걸렸다. 아마 계속해서 읽다 말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가서 읽기의 반복 때문이 아닐까.

 

소설은 떠나간 사랑 이타마르에 대한 속절없는 사랑의 절박함을 쓰는 마리아나에 대한 이야기다. 모두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마성의 매력을 지닌 남자 이타마르. 이탈리아 모처의 아카데미를 찾은 마리아나는 그와 만나는 순간, 바로 사랑에 빠졌나 보다. 아니 마리아나의 사랑은 뭐랄까 일종의 강박적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여성 마리아나의 관점에서 기술한 이 책의 저자는 노년의 아재가 아니던가. 아무래도 떠나가 버린 사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마리아나의 심정을 과연 안드레 애시먼이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을지 좀 궁금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 진 몰라도, 도무지 복잡다단한 마리아나의 마음에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아마 그래서 책읽기의 속도가 더디지 않았나 싶다. 이미 바람둥이 이타마르란 녀석은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마리아나에 대한 감정을 정리한 지가 오래다. 천연덕스럽게, 자신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에게 다른 여자와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기까지 한다. 이건 뭐 정말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도대체 뭘 어떡하잔 말인지. 사실 더 비난하고 싶은 사람은 마리아나였지만.

 

어쩌면 마리아나는 글쓰기나 편지 같은 방식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명징하게 정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신이 무얼 하더라도, 그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감정에 저편에 도사리고 있는 미련은 계속해서 마리아나의 발목을 잡는다.

 

결국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한 마디 없이 아카데미를 떠나 버렸다.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기에 숙소라는 물리적 공간의 빈자리는 곧 채워졌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관계는 그런 식이라고 노련한 작가 안드레 애시먼은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주려는 걸까. 세상만사에 시작과 끝이 존재하듯이,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문제는 시작은 어렵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이라도 엔딩은 과히 쉽지 않더라는. 그냥 그런 감정들의 편린들이 처연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의 애틋한 감정을 상대방의 그것에 동조해서, 무언가 새로운 방식과 형태의 사랑이라는 감정에까지 도달하게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이 아닐까. 또 그런 게 인간의 의지로 된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마리아나가 이별 뒤에 이 책에서 보여주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아름답다기 보다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마리아나> 읽기가 무려 일주일이나 걸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의 작은 변명이려나.

 

작가의 모든 책이 좋을 수 없다는 걸 제임스 설터를 읽으면서 나는 알게 됐다. 어쩌면 그 적용을 이번에는 안드레 애시먼에게 적용하게 될 지도. 결국에 가서, 나는 순순한 애시먼에 대한 팬심으로 <마리아나>를 읽었노라고 고백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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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의 은밀한 생활
알레한드로 삼브라 지음, 홍덕선.현혜진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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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매일 같이 온라인 서점에서 신간 코너를 둘러 본다. 오늘은 또 어떤 작가의 새로운 책들이 나왔나 하고. 어쩌면 내 일상의 루틴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한 작가를 알게 됐다. 알레한드로 삼브라의 <분재>란 책이 나왔다. 그런데 분량이 엄청나게 얇다. 이거 앉은 자리에서 바로 읽을 수도 있겠는데 그래. 아무래도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을 해야겠다. 그리고 같은 칠레 출신의 내가 애정하는 로베르트 볼라뇨를 언급하다니. 이거 출판사가 마케팅을 좀 아는가 보다.

 

어쨌든, 바로 신간을 수급할 수가 없으니 일단 삼브라 작가의 전작을 찾아본다. 딱 한 권 아주 오래 전에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책은 이제 절판이 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서관을 이용하는 수밖에.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책이 바로 <나무들의 은밀한 생활>이라는 요상한 제목의 책이었다.

 

이 책도 분량이 많지 않아서 어제 빌려서 단박에 다 읽어 버렸다. , 그리고 보니 이달에는 버지니아 울프를 읽어야 하는데. 그래서 <막간>이라는 책도 하나 빌리긴 했지. <올랜도>는 미처 읽지 못하고 반납했고. 자꾸만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샌다.

 

짧은 소설 <나무들의 은밀한 생활>의 화자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문학 교수일을 하고 있는 훌리안이다. 그림 공부를 하러 출타한 베로니카의 딸 다니엘라에게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렇다면 일종의 베드타임 스토리 정도가 될까. 바오밥나무랑 또 뭐더라. 암튼 그러다가 베로니카가 돌아오면 이야기가 끝난다고. 왠지 아라비안 나이트 생각이 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작가의 의도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았나 싶다. 약간 키치적인 느낌이 드는 걸 그래.

 

이제는 원수가 된 옛사랑 카를라와 헤어지고 나서 새로운 피난처를 찾던 훌리안이 제과 조리장 일을 하던 싱글만 베로니카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뭐 그런 조금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과거가 살짝살짝 드러난다. 생각보다 넓은 집을 구하게 되면서, 훌리안은 임대료를 더 내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했다. 평일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에는 글쓰기를 하는 훌리안의 유일한 관심사는 분재와 나무의 성장이었다.

 

소설의 어디선가 훌리안과 다니엘라의 친부 페르난도에게 적이 없다는 말을 읽고, 캐릭터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나에 대한 사유에까지 이르렀다. 나에게도 적이 있을까? 그런 생각은 곧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자문하게 됐다. 결국 나의 책읽기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가 과연 책에서 삼브라 작가가 소개하는 훌리안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있을지도 자신이 없어졌다.

 

그 다음에는 <나무들의 은밀한 대화> 같은 괜찮은 책들이 절판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생각도 들었다. 왜 어떤 책들은 절판의 운명에 처하게 되는 걸까. 소위 베스트셀러니 고전이니 하는 책들응 시장의 선택을 받아 계속해서 독자들이 읽고 있자 않던가. 삼브라 작가의 데뷔작 <분재>의 출간으로 나는 책이 나온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야 이 책과 그리고 이 책의 저자와 만나게 되지 않았던가.

 

페르난도와 베로니카의 잘못된 만남, 그리고 100일 정도 밖에 유지 되지 않은 그들의 실패의 과정들이 불쑥불쑥 하지만 예정된 대로 등장한다. 누군가에게는 멍청이, 건달, 또라이 그리고 이기주의자로 보이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한 없이 다정한 남편이자 새 아빠로 보일 수 있다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됐다. 그것이 과연 시각이나 관점이 차이일까.

 

원수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다. 훌리안은 언뜻 박애주의자처럼 보이는 카를라를 원수로 규정한다. 그것도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편견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를 원수로 생각하려면 그 사람에 대해 너무 잘 알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역설적 명제라는 생각이다. 그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원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56쪽에 나오는 사랑에 대한 삼브라 작가의 서술은 정말 압권이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랑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불안정한 심리적 상태에서 사랑의 절박함을 사랑했을 수도 있지 않나라는 유추가 되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이성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등장하는 기억을 위한 저장소가 필요했다는 말도 마음에 와 닿더라. 뭐 이 정도면 명언제조기가 아닐가 싶을 정도다.

 

폴 오스터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같은 작가들을 실명으로 언급하는 기술도 왠지 볼라뇨를 연상시킨다. 아니 어쩌면 칠레 출신 작가들이 애용하는 기법이 아닐가 싶기도 하고. 칠레의 눈이 부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나, 칠레 문학은 갈색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할 것 같다.

 

영어 공부 때문에 혐오와 수치심을 느끼게 됐다며 끝나는 결론이 좀 난해하게 다가온다. 그 이유는 더 수긍이 되지 않고 말이지. 어쨌든 순서가 좀 바뀌긴 했지만, <나무들의 은밀한 생활>을 읽었으니 이제 작가의 원류에 해당하는 <분재>를 만나봐야겠다. 그 외에도 3편의 소설이 더 있다고 하는데 과연 만나게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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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2
버지니아 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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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한 권 읽었다. 우연히 스레드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소개 글을 읽었고, 그것을 계기로 읽다말다를 반복하던 <댈러웨이 부인>을 완독할 수가 있었다. 너튜브의 플롯 서머리 콘텐츠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초반에는 제법 도움을 받았는데, 책읽기가 본궤도에 오른 다음에는 그냥 내리 읽을 수가 있었다.

 

20세기 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을 대표한다는 울프의 소설을 이제야 읽게 되다니. 역시 어느 책을 만나게 되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236월의 어느 날이다. 주인공은 오늘 파티를 열기로 한 댈러웨이 집안의 여주인 클래리사다. 과연 의식의 흐름대로,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사유와 시간을 넘나들며 그들이 펼쳐 보이는 서사가 잇달아 등장하기 시작한다. 현재는 1923년의 런던이지만, 모든 일의 시작은 33년 전 1890년대의 보턴이다.

 

당시 클래리사에게는 피터 월시라는 애인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은 스스로를 사회의 낙오자라 생각하는 옥스퍼드 출신의 사회주의자 피터는 지금도 여전히 호주머니 속에서 주머니칼을 놀리는 중년의 남성이다. 클래리사는 매력적인 피터 대신, 재미는 없지만 미래의 안정과 경제력을 고려해서 리처드 댈러웨이를 선택했다. 과거의 그런 선택이 지금의 속물적인 성향의 클래리사를 탄생시킨 걸까. 아니면 소설을 따라 가다 보면 알게 되는 것처럼 원래부터 클래리사는 그런 인물이었던 걸까. 어디선가 들리는 피스톨 사운드. 그것을 계기로 또 다른 캐릭터가 등장한다.

 

소설의 또 한편에는 1차 세계대전 베테랑 출신의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가 있다. 전쟁영웅으로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청년이지만, 그는 5년 전에 끝난 전쟁의 심각한 PTSD 증상을 겪고 있다. 자신의 상관으로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 전선에서 전사한 에번스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탈리아에서 만난 (루크)레치아와 결혼했지만, 이 결혼 또한 사랑 없는 결혼의 전형처럼 보인다. 사랑 없는 결혼에 그는 죄책감을 느낀다. 런던 상공에 비행기가 '스카이라이팅'이라는 기법으로 신박한 광고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11시 무렵에 클래리사는 단골 꽃집에서 웨스터민스터 저택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30년 전, 보턴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 샐리 시턴과의 우정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한 마디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종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고나 할까. 마성의 매력을 지닌 샐리는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다. 게다가 교양까지 있어서 플라톤도 읽었다고. 심지어 클래리사는 그녀와 키스까지 했다고 고백한다.

 

그 다음 주자는 클래리사의 옛 애인 피터 월시다. 그는 5년 만에 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만난 데이지와 결혼하기 위해 런던의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던가. 현실세계에 클래리사가 있다면, 그 반대편의 이상 혹은 판타지를 대표하는 인물로 버지니아 울프는 피터 월시를 배치했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의 곳곳마다 부딪히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적 충돌이야말로 <댈러웨이 부인>을 이끌어 가는 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소설의 가장 비극적 인물은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가 있다. 저명한 신경과 의사인 윌리엄 브래드쇼는 셉티머스에게 중증 신경 쇠약 진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는 셉티머스에게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떨어진 시골 요양소에 가보라고 권고한다. 이미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져 버린 그에게 그런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브래드쇼와의 진료는 왠지 신부님과의 고해성사를 연상시킨다. 그나저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가혹한 운명을 어쩌면 처음부터 지각하고 있어서 그런 진 몰라도 "그 사건"이 도대체 언제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 시계는 가열차게 돌아간다. 누군가는 세상의 고통에 시달리고, 또 주류세계에서 낙오했다는 상실감이 넘실거리는 가운데서도 오늘 저녁 자신의 저택을 방문할 인사들에게 최상의 음식과 마실 것들 그리고 최상의 환대를 대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클래리사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클래리사는 언제나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파티는 그녀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직 버지니아 울프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 보지 못해서 작가의 작품에서 시간의 역할에 대해 공통적인 분석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역시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치유를 위한 개념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즐거움과 쾌락을 위한 무엇이라면, 셉티머스처럼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에게는 결국 "엔딩", 그러니까 종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파티에 최선을 다하는 클래리사 댈러웨이가 정작 그 서커스처럼 돌아가는 파티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는 감정의 고백이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런던 사교계의 파티라는 것이 나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고려한 의무에 가까운 게 아니었나 하는 심정이란 말이다. 게다가 무슨 절차와 과정 그리고 의례가 많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쇼맨십에 가까운 과장된 다정함은 부담으로 작동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파티에 초대받지도 못한 클래리사의 옛 친구 샐리 시턴이 등장하면서 많은 주의를 기울여 준비한 파티에 균열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30년 전, 나체로 패리 하우스의 거실을 뛰어 다니며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샐리답게 이번에도 어김없이 무례를 반가움으로 눙치는 내공을 시전한다.

 

등장인물들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의식의 교차 같은 흐름들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사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모바일 시대로 접어들면서 증폭된 불확실성에 대한 근원이 어쩌면 과거의 어느 특정한 선택으로부터 유발된 게 아닌가라는 사유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아울러 작가가 소설의 곳곳에 배치한 시간의 설정은 내가 과연 어디에 서 있는가에 대한 가늠자 같은 은유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가끔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화자의 전환이나 혹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여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마치 내 앞으로 달려오는 것 같은 맹렬한 시간의 분노를 마주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다. 그 시간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 같은 캐릭터는 결국 부서지고 만다. 스타일리스트 피터 월시는 자기 나름의 회피라는 방식으로, 그리고 주인공 클래리사는 런던의 명사들과 즐겁지도 않은 파티라는 도피처를 선택하는 것으로 시간에 맞선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책을 마저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해서 그런 사유들을 미처 기록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또 나중에라도 다시 읽게 된다면 어떤 다른 생각으로 만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이제 다음으로 울프의 16세기 로맨스물인 <올랜도>를 읽는다. 이 책도 역시나 재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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