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나
안드레 애치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비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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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이 얇은 책을 읽는데 오래 걸렸을까? 앉은 자리에서 바로 다 읽을 줄 알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다 읽는데 무려 일주일이나 걸렸다. 아마 계속해서 읽다 말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가서 읽기의 반복 때문이 아닐까.

 

소설은 떠나간 사랑 이타마르에 대한 속절없는 사랑의 절박함을 쓰는 마리아나에 대한 이야기다. 모두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마성의 매력을 지닌 남자 이타마르. 이탈리아 모처의 아카데미를 찾은 마리아나는 그와 만나는 순간, 바로 사랑에 빠졌나 보다. 아니 마리아나의 사랑은 뭐랄까 일종의 강박적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여성 마리아나의 관점에서 기술한 이 책의 저자는 노년의 아재가 아니던가. 아무래도 떠나가 버린 사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마리아나의 심정을 과연 안드레 애시먼이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을지 좀 궁금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 진 몰라도, 도무지 복잡다단한 마리아나의 마음에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아마 그래서 책읽기의 속도가 더디지 않았나 싶다. 이미 바람둥이 이타마르란 녀석은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마리아나에 대한 감정을 정리한 지가 오래다. 천연덕스럽게, 자신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에게 다른 여자와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기까지 한다. 이건 뭐 정말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도대체 뭘 어떡하잔 말인지. 사실 더 비난하고 싶은 사람은 마리아나였지만.

 

어쩌면 마리아나는 글쓰기나 편지 같은 방식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명징하게 정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신이 무얼 하더라도, 그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감정에 저편에 도사리고 있는 미련은 계속해서 마리아나의 발목을 잡는다.

 

결국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한 마디 없이 아카데미를 떠나 버렸다.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기에 숙소라는 물리적 공간의 빈자리는 곧 채워졌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관계는 그런 식이라고 노련한 작가 안드레 애시먼은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주려는 걸까. 세상만사에 시작과 끝이 존재하듯이,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문제는 시작은 어렵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이라도 엔딩은 과히 쉽지 않더라는. 그냥 그런 감정들의 편린들이 처연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의 애틋한 감정을 상대방의 그것에 동조해서, 무언가 새로운 방식과 형태의 사랑이라는 감정에까지 도달하게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이 아닐까. 또 그런 게 인간의 의지로 된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마리아나가 이별 뒤에 이 책에서 보여주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아름답다기 보다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마리아나> 읽기가 무려 일주일이나 걸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의 작은 변명이려나.

 

작가의 모든 책이 좋을 수 없다는 걸 제임스 설터를 읽으면서 나는 알게 됐다. 어쩌면 그 적용을 이번에는 안드레 애시먼에게 적용하게 될 지도. 결국에 가서, 나는 순순한 애시먼에 대한 팬심으로 <마리아나>를 읽었노라고 고백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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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의 은밀한 생활
알레한드로 삼브라 지음, 홍덕선.현혜진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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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매일 같이 온라인 서점에서 신간 코너를 둘러 본다. 오늘은 또 어떤 작가의 새로운 책들이 나왔나 하고. 어쩌면 내 일상의 루틴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한 작가를 알게 됐다. 알레한드로 삼브라의 <분재>란 책이 나왔다. 그런데 분량이 엄청나게 얇다. 이거 앉은 자리에서 바로 읽을 수도 있겠는데 그래. 아무래도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을 해야겠다. 그리고 같은 칠레 출신의 내가 애정하는 로베르트 볼라뇨를 언급하다니. 이거 출판사가 마케팅을 좀 아는가 보다.

 

어쨌든, 바로 신간을 수급할 수가 없으니 일단 삼브라 작가의 전작을 찾아본다. 딱 한 권 아주 오래 전에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책은 이제 절판이 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서관을 이용하는 수밖에.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책이 바로 <나무들의 은밀한 생활>이라는 요상한 제목의 책이었다.

 

이 책도 분량이 많지 않아서 어제 빌려서 단박에 다 읽어 버렸다. , 그리고 보니 이달에는 버지니아 울프를 읽어야 하는데. 그래서 <막간>이라는 책도 하나 빌리긴 했지. <올랜도>는 미처 읽지 못하고 반납했고. 자꾸만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샌다.

 

짧은 소설 <나무들의 은밀한 생활>의 화자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문학 교수일을 하고 있는 훌리안이다. 그림 공부를 하러 출타한 베로니카의 딸 다니엘라에게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렇다면 일종의 베드타임 스토리 정도가 될까. 바오밥나무랑 또 뭐더라. 암튼 그러다가 베로니카가 돌아오면 이야기가 끝난다고. 왠지 아라비안 나이트 생각이 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작가의 의도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았나 싶다. 약간 키치적인 느낌이 드는 걸 그래.

 

이제는 원수가 된 옛사랑 카를라와 헤어지고 나서 새로운 피난처를 찾던 훌리안이 제과 조리장 일을 하던 싱글만 베로니카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뭐 그런 조금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과거가 살짝살짝 드러난다. 생각보다 넓은 집을 구하게 되면서, 훌리안은 임대료를 더 내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했다. 평일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에는 글쓰기를 하는 훌리안의 유일한 관심사는 분재와 나무의 성장이었다.

 

소설의 어디선가 훌리안과 다니엘라의 친부 페르난도에게 적이 없다는 말을 읽고, 캐릭터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나에 대한 사유에까지 이르렀다. 나에게도 적이 있을까? 그런 생각은 곧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자문하게 됐다. 결국 나의 책읽기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가 과연 책에서 삼브라 작가가 소개하는 훌리안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있을지도 자신이 없어졌다.

 

그 다음에는 <나무들의 은밀한 대화> 같은 괜찮은 책들이 절판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생각도 들었다. 왜 어떤 책들은 절판의 운명에 처하게 되는 걸까. 소위 베스트셀러니 고전이니 하는 책들응 시장의 선택을 받아 계속해서 독자들이 읽고 있자 않던가. 삼브라 작가의 데뷔작 <분재>의 출간으로 나는 책이 나온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야 이 책과 그리고 이 책의 저자와 만나게 되지 않았던가.

 

페르난도와 베로니카의 잘못된 만남, 그리고 100일 정도 밖에 유지 되지 않은 그들의 실패의 과정들이 불쑥불쑥 하지만 예정된 대로 등장한다. 누군가에게는 멍청이, 건달, 또라이 그리고 이기주의자로 보이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한 없이 다정한 남편이자 새 아빠로 보일 수 있다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됐다. 그것이 과연 시각이나 관점이 차이일까.

 

원수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다. 훌리안은 언뜻 박애주의자처럼 보이는 카를라를 원수로 규정한다. 그것도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편견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를 원수로 생각하려면 그 사람에 대해 너무 잘 알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역설적 명제라는 생각이다. 그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원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56쪽에 나오는 사랑에 대한 삼브라 작가의 서술은 정말 압권이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랑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불안정한 심리적 상태에서 사랑의 절박함을 사랑했을 수도 있지 않나라는 유추가 되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이성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등장하는 기억을 위한 저장소가 필요했다는 말도 마음에 와 닿더라. 뭐 이 정도면 명언제조기가 아닐가 싶을 정도다.

 

폴 오스터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같은 작가들을 실명으로 언급하는 기술도 왠지 볼라뇨를 연상시킨다. 아니 어쩌면 칠레 출신 작가들이 애용하는 기법이 아닐가 싶기도 하고. 칠레의 눈이 부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나, 칠레 문학은 갈색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할 것 같다.

 

영어 공부 때문에 혐오와 수치심을 느끼게 됐다며 끝나는 결론이 좀 난해하게 다가온다. 그 이유는 더 수긍이 되지 않고 말이지. 어쨌든 순서가 좀 바뀌긴 했지만, <나무들의 은밀한 생활>을 읽었으니 이제 작가의 원류에 해당하는 <분재>를 만나봐야겠다. 그 외에도 3편의 소설이 더 있다고 하는데 과연 만나게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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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2
버지니아 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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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한 권 읽었다. 우연히 스레드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소개 글을 읽었고, 그것을 계기로 읽다말다를 반복하던 <댈러웨이 부인>을 완독할 수가 있었다. 너튜브의 플롯 서머리 콘텐츠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초반에는 제법 도움을 받았는데, 책읽기가 본궤도에 오른 다음에는 그냥 내리 읽을 수가 있었다.

 

20세기 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을 대표한다는 울프의 소설을 이제야 읽게 되다니. 역시 어느 책을 만나게 되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236월의 어느 날이다. 주인공은 오늘 파티를 열기로 한 댈러웨이 집안의 여주인 클래리사다. 과연 의식의 흐름대로,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사유와 시간을 넘나들며 그들이 펼쳐 보이는 서사가 잇달아 등장하기 시작한다. 현재는 1923년의 런던이지만, 모든 일의 시작은 33년 전 1890년대의 보턴이다.

 

당시 클래리사에게는 피터 월시라는 애인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은 스스로를 사회의 낙오자라 생각하는 옥스퍼드 출신의 사회주의자 피터는 지금도 여전히 호주머니 속에서 주머니칼을 놀리는 중년의 남성이다. 클래리사는 매력적인 피터 대신, 재미는 없지만 미래의 안정과 경제력을 고려해서 리처드 댈러웨이를 선택했다. 과거의 그런 선택이 지금의 속물적인 성향의 클래리사를 탄생시킨 걸까. 아니면 소설을 따라 가다 보면 알게 되는 것처럼 원래부터 클래리사는 그런 인물이었던 걸까. 어디선가 들리는 피스톨 사운드. 그것을 계기로 또 다른 캐릭터가 등장한다.

 

소설의 또 한편에는 1차 세계대전 베테랑 출신의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가 있다. 전쟁영웅으로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청년이지만, 그는 5년 전에 끝난 전쟁의 심각한 PTSD 증상을 겪고 있다. 자신의 상관으로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 전선에서 전사한 에번스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탈리아에서 만난 (루크)레치아와 결혼했지만, 이 결혼 또한 사랑 없는 결혼의 전형처럼 보인다. 사랑 없는 결혼에 그는 죄책감을 느낀다. 런던 상공에 비행기가 '스카이라이팅'이라는 기법으로 신박한 광고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11시 무렵에 클래리사는 단골 꽃집에서 웨스터민스터 저택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30년 전, 보턴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 샐리 시턴과의 우정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한 마디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종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고나 할까. 마성의 매력을 지닌 샐리는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다. 게다가 교양까지 있어서 플라톤도 읽었다고. 심지어 클래리사는 그녀와 키스까지 했다고 고백한다.

 

그 다음 주자는 클래리사의 옛 애인 피터 월시다. 그는 5년 만에 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만난 데이지와 결혼하기 위해 런던의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던가. 현실세계에 클래리사가 있다면, 그 반대편의 이상 혹은 판타지를 대표하는 인물로 버지니아 울프는 피터 월시를 배치했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의 곳곳마다 부딪히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적 충돌이야말로 <댈러웨이 부인>을 이끌어 가는 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소설의 가장 비극적 인물은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가 있다. 저명한 신경과 의사인 윌리엄 브래드쇼는 셉티머스에게 중증 신경 쇠약 진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는 셉티머스에게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떨어진 시골 요양소에 가보라고 권고한다. 이미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져 버린 그에게 그런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브래드쇼와의 진료는 왠지 신부님과의 고해성사를 연상시킨다. 그나저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가혹한 운명을 어쩌면 처음부터 지각하고 있어서 그런 진 몰라도 "그 사건"이 도대체 언제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 시계는 가열차게 돌아간다. 누군가는 세상의 고통에 시달리고, 또 주류세계에서 낙오했다는 상실감이 넘실거리는 가운데서도 오늘 저녁 자신의 저택을 방문할 인사들에게 최상의 음식과 마실 것들 그리고 최상의 환대를 대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클래리사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클래리사는 언제나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파티는 그녀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직 버지니아 울프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 보지 못해서 작가의 작품에서 시간의 역할에 대해 공통적인 분석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역시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치유를 위한 개념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즐거움과 쾌락을 위한 무엇이라면, 셉티머스처럼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에게는 결국 "엔딩", 그러니까 종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파티에 최선을 다하는 클래리사 댈러웨이가 정작 그 서커스처럼 돌아가는 파티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는 감정의 고백이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런던 사교계의 파티라는 것이 나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고려한 의무에 가까운 게 아니었나 하는 심정이란 말이다. 게다가 무슨 절차와 과정 그리고 의례가 많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쇼맨십에 가까운 과장된 다정함은 부담으로 작동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파티에 초대받지도 못한 클래리사의 옛 친구 샐리 시턴이 등장하면서 많은 주의를 기울여 준비한 파티에 균열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30년 전, 나체로 패리 하우스의 거실을 뛰어 다니며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샐리답게 이번에도 어김없이 무례를 반가움으로 눙치는 내공을 시전한다.

 

등장인물들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의식의 교차 같은 흐름들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사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모바일 시대로 접어들면서 증폭된 불확실성에 대한 근원이 어쩌면 과거의 어느 특정한 선택으로부터 유발된 게 아닌가라는 사유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아울러 작가가 소설의 곳곳에 배치한 시간의 설정은 내가 과연 어디에 서 있는가에 대한 가늠자 같은 은유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가끔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화자의 전환이나 혹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여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마치 내 앞으로 달려오는 것 같은 맹렬한 시간의 분노를 마주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다. 그 시간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 같은 캐릭터는 결국 부서지고 만다. 스타일리스트 피터 월시는 자기 나름의 회피라는 방식으로, 그리고 주인공 클래리사는 런던의 명사들과 즐겁지도 않은 파티라는 도피처를 선택하는 것으로 시간에 맞선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책을 마저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해서 그런 사유들을 미처 기록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또 나중에라도 다시 읽게 된다면 어떤 다른 생각으로 만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이제 다음으로 울프의 16세기 로맨스물인 <올랜도>를 읽는다. 이 책도 역시나 재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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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에서 온 신사
안드레 애치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비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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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작가 안드레 애시먼의 새로운 책들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격이 얼마든, 책의 두께가 얼마나 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로 주문장을 날렸다. 그리고 책은 바로 다음날 도착했다. 마치 걸신 들린 독서가마냥, 애시먼 작가의 책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페루에서 온 신사> 그리고 <마리아나>가 그 주인공이었는데 나의 원픽은 <페루에서 온 신사>였다.

 

티레니아 바다가 보이는 이탈리아 남부의 어느 도시에 8명의 아메리카니들이 요트를 타고 방문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어떻게하는 즐거울까라는 고민 뿐이었다. 좋은 시절이지 않은가. 즐겁게 노는 것만이 관심이라면 말이지. 문득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었다.

 

그리고 그들을 유심하게 관찰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페루에서 온 신사 라울이었다. 관계의 출발은 어깨 통증에 시달리는 아메리카니 중의 한 명인 마크를 페루 신사가 단 5초만에 치료한 것이다. 어때 벌써부터 무언가 주술적 향기가 나지 않는가 말이다. 라울 아저씨는 정말 무슨 게임에 나오는 힐러 캐릭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뿐 아니었다. 그는 8명의 아메리카니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나라면 그 순간, 무섭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라울은 그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정보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자신에 대해 누군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면, 좀 소름이 끼치지 않을까. 심지어 뉴욕에서 리스본을 거쳐 이탈리아에 이르는 친구들의 모든 경비를 댄 뉴욕의 잘 나가는 트레이더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주기까지 한다.

 

모든 그룹에서 그렇지만, 낯선 사람과 대결구도를 만드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바로 마고였다. 마고는 낯선 라울과 대척점을 형성한다. 이고가 강한 성향이라고 해야 할까? Opposite Attract란 표현처럼 상극처럼 보이지만, 또 라울과 마고는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면서도 동시에 서로에게 이끌린다고 해야 할까.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한 여름의 이탈리아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또 하나의 색다른 서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안드레 애시먼 작가는 리얼리즘 대신, 전생이라는 이전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 구조를 독자에게 내던진다. 그렇지, 그 정도되는 설명이 아니라면 페루 출신 신사 라울이 마고를 필두로 한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 그렇게 잘 알 수 있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페루에서 온 신사>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허용되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우리 독서모임의 누군가처럼 핍진성이나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또 할 말이 없겠지. 나는 그런 것보다 전생에 그 누구보다 더 사납게 싸우고 그리고 격렬하게 사랑했던 라울과 마리아의 이야기에 그만 흠뻑 빠져 버렸다.

 

<페루에서 온 신사>는 노년에 도달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 작가 안드레 애시먼의 판타지에 가까운 연애소설이다. 분량 때문인지 몰라도 그야말로 물 흘러가듯 그런 전개에 빠져 페루 신사 라울의 궤적을 쫓다 보니 어느새 이야기가 끝나 있더라. 사실 엔딩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전생과 현생을 오가며 넋두리처럼 흐르는 서사의 바다에 빠졌다가 기슭으로 나와 이탈리아의 강렬한 태양 아래 몸을 말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렇지, 바로 내가 바로 이런 맛에 안드레 애시먼의 책들을 좋아하는거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또 되짚어 보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간결하면서 강렬한 서사 말이지. 여름이 길목에서 만난 멋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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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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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다시 조르조 바사니 작가의 <금테 안경>을 읽었다. 아마 그 때, 작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바사니 작가의 책들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 읽지 못했던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성벽 아래서>도 이번에는 읽었다. <왜가리><건초 냄새>까지 나왔다면 완벽했을 텐데, 그게 좀 아쉽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걸작은 다시 읽어도 항상 좋은 법이다. 소설 <금테 안경>의 화자는 바로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에서 내가 첼레스티노로 명명한 작가의 페르소나다. 그가 사는 페라라에는 베네치아 출신 아토스 파디가티 선생이라는 저명한 중년의 이비인후과 의사가 있었다. 그가 애용하는 "금테 안경"은 그의 분신 혹은 상징과도 같은 무엇이라고나 할까.

 

탁월한 의술과 친절함 그리고 세련된 진료로 파디가티 선생은 페라라 공동체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그런 인사였다. 그리고 재산은 자연스럽게 그의 노력에 응답했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적어도 파디가티의 성적 취향에 대한 추문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편 페라라에서 볼로냐로 통학을 하던 첼레스티노와 친구들은 대학 강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볼로냐로 향하던 파디가티를 기차에서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문제의 델릴리에르스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지난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은 델릴리에르스는 노골적으로 파디가티의 성적 취향을 조롱하고 놀림감으로 사용한다. 내가 보기에 델릴리에르스는 순수 악 그 자체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척에서 관찰한 나, 첼레스티노의 감상과 기록이 이어진다. 바사니는 실제 있을 법했던 사건에, 자신의 감정을 추가하고 혐오와 배제로 무장한 이탈리아 파시즘이 부상하던 시절의 광기를 적절하게 배합해서 <금테 안경>의 서사를 완성해간다.

 

파디가티와 델릴리에스가 빚어내는 볼썽사나운 추문의 절정은 19378월의 휴양지 리초네 부근에서 그야말로 폭발한다. 사실 그들의 기묘한 우정은 보수적인 페라라의 부르주아 사회에서 물의와 논란의 대상이었다. 가십 전문가 라베촐리 부인에게 이 커플은 좋은 먹잇감이기도 했다. 독설가였던 라베촐리 부인은 나치를 찬양하며 그들의 주장에 동조해서 타당성과 위대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3년 전에 있었던 나치들의 오스트리아 총리 엥겔베르트 돌푸스 암살사건에 대한 언급도 살짝 등장하기도 했던가.

 

신혼부부라며 조롱을 받던 둘의 파국은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그해 8월의 마지막 날, 언쟁으로 시작된 델릴리에르스와 파디가티의 다툼은 결국 청년의 주먹에 파디가티가 넉다운되고 기절하는 일대 소동으로 마무리된다. 현장을 목격한 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이야깃거리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델릴리에르스는 파디가티의 모든 것을 챙겨 도망가 버렸고, 쓸쓸하게 홀로 남은 파디가티 선생은 결국 가진 돈을 다 털어 페라라로 귀환하게 된다. 문득 여기에서 금이 간 파디가티의 금테 안경은 앞으로 다가올 어두운 미래에 대한 암시가 아니었을까.

 

1937년 리초네에서의 여름이 첼레스티노와 다른 이들에게 화양연화의 시절이었다면, 그 다음부터 비극의 연대기가 시작됐다. 리초네에서의 추문으로 페라라에서 존경 받던 파디가티 선생은 병원에서 해고됐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급속하게 늙어갔다. 그보다 큰 사건은 1년 뒤부터 유대인들을 겨냥한 엄격한 인종법이 실시된다는 소식이었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박해와 학살의 미래가 올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여기서 바사니 작가는 자신의 다른 작품들에서 어김없이 빌런으로 등장하는 파시스트 시아구라를 소개한다.

 

페라라 도시 곳곳에서 벌어진 배제와 혐오에 대한 전조는 주인공과 전도유망한 법학도 니노 보테키아리와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페라라 유대인 대다수가 지닌 도시 부르주아로서의 정체성을 자랑하고 심지어 자발적 파시스트였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인종적 배경 자체를 숨길 수가 없지 않았던가. 파시즘에 대해 아무리 완벽한 연대와 수용을 한다고 말해도, 그들의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주인공이 나이든 성적소수자 아토스 파디가티의 극단적 선택에 소식을 신문에서 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전에 화자의 아버지는 잠시나마 페라라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법이 절대 공포되지 않으리라는 유력자의 거짓말에 현혹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가짜뉴스는 현실을 잊기 위한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파디가티는 절망에 빠진 화자에게 저항이나 거부하지 말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파디가티의 선택은 자신의 조언과 다른 결의 무엇이 아니었던가.

 

10년 만에 다시 <금테 안경>을 읽어 보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실현을 위해 질주하는 실존이 아닌가. 자신의 거친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환멸과 고독감에 대한 바사니 작가는 어쩌면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잡아내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바사니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처럼, <금테 안경>에서도 화자로 대변되는 청춘들이 미래가 너무 불투명해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극단적 절망감을 표출하는 서사도 과연 대단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쉴 새 없이 달려서 조르조 바사니 작가의 소설들을 세 권을 섭렵했고, 이제 <문 뒤에서>만을 남겨 두고 있다. 남은 3일 동안 무리 없이 다 읽을 수 있겠지. 오래 전에 읽은 책들을 다시 읽고, 휘발해 버린 감상들을 되살리는 재미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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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6-06-11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테 안경」 저도 다시 읽고 싶네요. 조르조 바사니의 책은 두 권 읽었는데, 생각하면 조금 쓸쓸해집니다. 슬픈데 아름답고... ‘페라라‘도 가보고 싶어요.

레삭매냐 2026-06-11 22:33   좋아요 1 | URL
책을 다 읽고 나서,
제 심정이 딱 그랬습니다.

살면서 페라라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