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에서 9시 사이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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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은 레오 페루츠 작가의 달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이제 한 권(아니 두 권인가?) 더 읽으면 국내에 나온 페루츠 작가의 책은 다 읽게 된다.

 

<스웨덴 기사>로 출발한 나의 페루츠 읽기는 <심판의 날의 거장>을 거쳐 <9시에서 9시 사이>에 도달했다. 세 작품 모두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또 확실하게 다른 서사와 결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소설 <9시에서 9시 사이>의 문제적 주인공은 가난한 대학생 슈타니슬라우스 뎀바다. 역시 키워드는 뎀바의 가난이다. 그는 가난 때문에 자신이 애인이라고 생각했던 조냐 하르트만이 게오르크 바이너와 바람이 났다고 생각한다. 슈타니는 조냐가 바이너와 베네치아로 여행가는 걸 저지하기 위해 목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하룻밤 동안에 장기간 베네치아 여행을 위한 자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대개의 경우, 이런 미션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배가 고픈 그는 가게에서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하다가 가게 주인에게 도둑으로 몰리기도 한다. 공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손이 없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농락한다. 슈타니의 서사를 따라가는 동안, 그가 충분한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훔친 책을 골동품상에게 넘기려다가 경찰에게 잡혀 두 손에 수갑을 찬 채 도주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슈타니에게 수갑은 무언가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구할 수 없게 만드는 핸디캡이자, 그를 자꾸만 곤경에 빠뜨리는 하나의 장치인 셈이다.

 

수갑 찬 손을 내밀어서 돈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슈타니가 하는 시도마다 족족 실패한다. 우체부가 가져온 자신이 정당하게 번 우편환부터 시작해서, 어쩌면 그렇게 운수가 없는지 모르겠다. 빈의 마리아힐퍼 슈트라세를 비롯한 방방곳곳을 누비며 자신이야말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운이 없는 사나이라고 떠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슈타니는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그런 그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슈테피라는 조력자가 있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가 떠나기 위해, 돈을 마련하다가 그야말로 은팔찌를 찬 셈인데 그런 남자의 은팔찌를 풀어 주겠다고 나섰다. 그녀의 시도는 참 좋았으나, 정말 운이 없는 사나이인 슈타니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돈이 주머니에 거의 들어올 것 같으면서도 또 마지막 순간에 손바닥 위의 모래처럼 스르르 사라지게 구성한 레오 페루츠 작가의 기법도 참 대단하다. 선의를 가지고 슈타니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도움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과외비를 가불 받으려고 화상을 입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집 바깥어른이 치료해 주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슈타니는 어쩔 수 없이 줄행랑을 치고 만다. 그는 참 운도 지지리도 없는 남자다.

 

가장 안타까운 장면 중의 하나는 슈타니가 30크로네 빚을 받으러 도박판에 있던 친구를 찾아가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는 초심자의 놀라운 운빨로 무려 270크로네나 되는 판돈을 따게 되는 행운을 거머쥘 뻔했다. 도박판에 있던 이가 자신의 시계를 분실했다며, 예의 시계를 찾기 위해 같이 도박을 하던 사람들의 몸수색을 하겠다며 나서면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이 수갑을 찬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었던 슈타니는 결국 자신이 정당하게 딴 돈을 포기하고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기가 찰 노릇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슈타니에게 아주 운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엔딩은 예상대로 비극이었다. 이렇게 내내 운이 없다가 또 막판에 가서 인생한방 역전을 얻게 되는 설정도 어쩌면 그간의 서사에 대한 배신이라는 이유에서 처음부터 배제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1918년에 발표된 <9시에서 9시 사이>는 원래 프라하와 빈 그리고 베를린의 다양한 신문들에 연재되던 작품이었다. 당대에 이미 인기를 끌었고, 1922년에 MGM사에 영화화 판권이 팔렸지만 영화로 제작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책의 표지에 등장한 망토를 두른 슈타니슬라우스 뎀바의 이미지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두 개의 수갑이 그가 처한 모든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 기사>처럼 이번에도 역시나 페루츠 작가는 소설의 첫 부분부터 주인공의 기이한 행적을 설명하는 결정적 단서를 심어 놓았다. 그랬었군, 왠지 작가의 스타일을 좀 더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마지막 남은 책 <밤에 돌다리 밑에서>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지 한 번 테스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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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25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갑을 차고 애인과의 여행비를 벌기위해 12시간의 제한된 시간속에서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아이리쉬의 스릴러소설을 읽는 느낌을 주고있네요.히치콕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책소개가 맞단 생각이 드네요.그런데 책분류가 오스트리아문학인데 왜 동유럽소설인지 살짝 이해가 안가네요.
 
스웨덴 기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264
레오 페루츠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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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친구의 피드를 보고 레오 페루츠 작가의 <스웨덴 기사>를 읽게 됐다. 물론 그전에도 이 책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잘 모르는 작가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고나 할까. 이틀 전에 도서관에 가서 <스웨덴 기사><심판의 날의 거장>까지 빌려왔다. <스웨덴 기사>는 너무 재밌어서 순식간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리아 크리스티네 폰 블로메라는 귀족 부인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러시아 황제를 상대로 한 스웨덴 기사로 국왕과 함께 전쟁에 나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아버지 크리스티안 폰 토르네펠트가 마리아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1701년 초의 중부 유럽 슐레지엔의 어딘가로 독자를 인도한다.

 

두 명의 청년이 주위의 시선을 피해 도주 중이었다. 한 명은 <닭 도둑>으로 교수형을 피해 도망 중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크리스티안 폰 토르네펠트로 탈영병 신세였다. 두 사람 모두 잡히면 사형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신세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도둑은 그나마 절망적 상황에 나름 적응을 했지만, 전쟁 영웅을 꿈꾸는 부잣집 도련님은 그러지 못했다. 두 사람이 잠시 몸을 피하고, 끼니를 해결한 방앗간에서 죽은 방앗간 지기가 등장한다. 레오 페루츠 특유의 환상문학의 성격을 지닌다고 해야 할까.

 

기진한 토르네펠트는 스웨덴군에 종군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도둑에게 알려 주면서 인근 장원의 주인은 사촌에게 도움을 요청해 달라고 부탁한다. 도둑은 토르네펠트가 건네준 반지와 정보들을 가지고, 예의 장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장원의 관리가 엉망이고 또 하인들과 고리대금업자가 장원의 부를 약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모를 여의고 장원의 주인이 된 아리따운 십대소녀 마리아 아그네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그녀가 토르네펠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 이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 가게 될지 대충 예상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 도둑은 토르네펠트를 이른바 <주교의 지옥>으로 인도해서 세상과 격리시키고 자신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전에 자신을 평생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잔혹한 남작"을 만나 죽을 뻔하기도 하지만, 마리아 아그네타의 후의로 매질을 당하고 풀려난다.

 

도둑은 잔혹한 남작이 추적 중이던 도적단의 수괴 검은 이비츠를 대신해서 그의 부하들을 수하에 넣고, 잔혹한 남작에게 반격을 개시해서 그의 용기병대를 패퇴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개미잡이, 바일란트, 브라반터 그리고 빨강 머리 리스 등으로 성물도적단을 구성해서 인근 교회의 성물들을 털면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다.

 

성물 도적질로 충분히 마리아 아그네타의 장원을 회복시키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한 도둑은 성물도적단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해산시킨 다음, 자신은 마리아의 장원으로 금의환향한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토르네펠트 행세를 하면서 마리아와 결혼에 골인한다. 이런 치밀한 준비를 하는데 2년이 소요됐다. 어엿한 귀족이라는 뒷배를 지닌 장원의 주인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도둑은 농사와 가축을 기르고 양모를 생산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려운 시절을 잊지 않고,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서는 안된다는 모토 아래 검소한 면모까지 보여준다.

 

그런 와중에 사랑하는 딸 마리아 크리스티네까지 얻게 돼서 남부러울 게 없는 그런 삶을 살게 된 도둑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런 행복한 시간들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두목이 나눠준 자금을 탕진한 개미잡이와 바일란트가 도둑의 장원을 찾아온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들을 도둑은 처음에는 제거하려고 하지만, 생각을 바꿔 그들을 자신의 일꾼으로 받아 들인다.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개미잡이와 바일란트를 도둑의 소재를 알려준 성공한 사업가 브라반터가 어느 날 찾아와서, 빨강 머리 리스가 도둑의 정체를 잔혹한 남작에게 일러 바치고 잔혹한 남작이 도둑 추적에 나섰다는 소식을 전하고 자신은 재산을 정리하고 떠난다며 도둑에게 알린다.

 

운명의 도박사 도둑은 어쩔 수 없이 잔혹한 남작의 추적을 피해 스웨덴 기사로 변신해서 개미잡이와 바일란트를 데리고 전쟁에 나선다. 그동안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버리고 떠나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정체가 들어나는 건 그것보다 더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도둑은 일당과 함께 빨강 머리 리스를 찾아가 인생을 건 마지막 도박에 나서게 된다.

 

도둑과 귀족의 뒤바뀐 운명에 대한 기본 줄거리는 어쩔 수 없이 마크 트웨인이 1881년에 발표한 <왕자와 거지>를 연상하게 만든다. 레오 페루츠는 그런 큰 줄거리 위에, 자신의 장원으로부터 500KM나 떨어진 폴타바 전선에서 매일 밤 자신을 찾아오는 토르네펠트를 추억하는 마리아 크리스티네가 경험한 미스터리를 엮는다. 그러니까 폴타바 전투에서 죽은 토르네펠트와 자신을 찾아온 토르네펠트는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엔딩에서 다시 처음의 서사로 돌아가게 만드는 레오 페루츠의 작법은 과연 대단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맹렬하게 싸운 도둑/이름 없는 남자가 보여주는 삶의 그림자는 비장하게 다가온다. 밑바닥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름 없는 남자는 성물도적단의 리더로 활약하면서 평범한 가난한 이들을 약탈하기를 거부한다. 교회에 비치된 성물들을 약탈하는 그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목사에게 그가 댓거리를 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기장 심는 시기와 병든 벌들을 치유하는 법 그리고 좋은 양모를 생산하는 방법들을 잘 알고 있던 도둑은 그가 일으켜 세운 장원에서 사랑하는 마리아 아그네타, 크리스티네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다. 하지만,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토르네펠트의 것을 사악한 방법으로 빼앗은 원죄로부터 도둑은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레오 페루츠는 모두가 명예를 지키는 방식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곳곳에 작가가 포진시킨 죽은 방앗간 주인이라던가 주교의 지옥 같이 환상적인 요소들은 역사 미스터리 <스웨덴 기사>와 맞물리는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스웨덴 기사>는 엔딩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훌륭한 수미쌍관으로 마무리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읽기 시작한 <심판의 날의 거장>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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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2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이야기가 재밌을듯요. 찜해둡니다

레삭매냐 2025-09-13 09:24   좋아요 1 | URL
서사의 전개와 엔딩이
아주 끝내 줍니다.

<심판의 날의 거장>도
잇달아 읽고 있는데,
흥미진진하네요.

왠지 레오 페루츠의 팬
인 될 것 같습니다.
전작 읽기 도전합니다!

카스피 2025-09-12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웨덴 기사의 평이 대부분 왕자와 거지의 성인판 동화 버젼이란 이야기가 많네요.사실 이 책에서 다루는 역사적 배경은 18세기 북유럽의 복잡한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소설속에 등장하는 스웨덴 기사에 나오는 스웨덴 국왕은 칼 12세로 작센서제후및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인 아우그스트 2세와의 리보니아 지역을 두고 한 전쟁을 한 인물이지요.
이 전쟁은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쟁만이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도운 노르웨이-덴마크 왕국의 프레데리크 4세와 루스 차르의 표토르 1세과도 연관된 전쟁으로 18세기 초반 북유럽의 대부분이 연결된 아주 복잡미묘한 전쟁으로 십수년간 싸운 것으로 압니다.
스웨덴 기사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소설속 배경이 되는 18세기 초반(1701년~30년)까지 북유럽 역사를 알아보시는 것도 재미있으실 거에요^^

레삭매냐 2025-09-13 09:26   좋아요 0 | URL
네 언급해 주신 대로입니다.

폴타바 전투 검색하다가 대북방전쟁
에 대해 알게 되었네요. 예전 같으면
사전에 공부를 좀 하고 독서에 들어
갔을 텐데, 게으른 독자는 일단 건너
뛰고 본문에 충실했다는...

시간 내서 알려 주신 부분에 대해
알아 보고 싶네요.

로씨야 짜르 표트르 대제가 등장한
다니 더더욱 흥미롭네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8
코맥 매카시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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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를 봤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킬러 안톤 시거가 산소탱크와 스턴건(혹은 캐틀건)을 들고 설치는 몇몇 장면만이 기억에 날 뿐. 그리고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책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공간적 배경은 텍사스의 어느 황무지. 베트남 전에서 저격수로 이름을 날린 용접공 36세의 루엘린 모스는 영양 사냥에 나섰다가 횡재를 하게 된다. 마약상들이 서로 총질을 한 끝에 모두 죽은 것이다. 아니 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외면하고 자그마치 240만 달러가 든 돈가방을 챙겼던가. 그런데 진짜 사건은 모스가 돈가방을 챙기면서부터 시작된다.

 

그전에 희대의 킬러 캐릭터로 선보인 안톤 시거는 자신을 체포한 부보안관을 죽이고 탈출에 성공한다. 시거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무법자다. 돈가방에 트랜스폰더라는 추적기를 단 덕분에 시거는 모스의 소재를 어렵지 않게 파악한다. 아마 누구나 주인이 없어 보이는 그렇게 큰돈을 얻는다면 모스와 같이 행동할 것이다. 나라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 대가가 죽음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베트남 전에서 한 시절 전사로 보낸 모스는 사신(死神) 같은 시거의 존재와 능력을 몰랐던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19살 난 신부 칼라 진을 엘 파소로 피신시키지만, 그녀 역시 모스와 함께 얽매인 운명일 따름이었다.

 

소설에서 자신의 감정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인물로 에드 탐 벨 보안관이 등장한다. 코엔 형제가 연출한 영화에서는 타미 리 존스가 벨 보안관 역을 맡았지. 모스가 한 세대 전의 전쟁을 대표하는 선수라면, 벨은 두 세대 전의 전쟁, 2차 세계대전 전쟁 영웅 출신의 보안관이다. 그동안 유능하고 충실하게 군민들의 안전 위해 봉사해온 벨 보안관은 막판에 자그마치 9건이나 되는 미제 살인 사건을 뒤로 하고 불명예퇴진을 하게 될 운명이다. 테렐 군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보안관을 무시하며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저지르는 시거의 준동에 늙은 보안관은 어쩌면 예이츠의 시에 나오는 대로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그가 독백처럼 건네는 말처럼, 그의 조부모들이 온갖 피어싱과 귀걸이 장식을 한 후손을 보았다면 과연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나이든 세대의 경험과 지식을 존중하지 않게 되었다. 세대를 거듭하며 전수되어져온 지혜의 사슬은 인터넷을 뛰어넘은 모바일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꼰대들의 진부한 잔소리가 된 것이다. 어쩌면 코맥 매카시가 냉혹한 킬러가 날뛰는 이 소설을 통해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분열된 아메리카의 실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도 극우 청년 활동가가 유타 밸리 대학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학생들과 대담 중에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는 총기를 규제하라는 아우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정헌법 2조를 거론하면서 총기에 의한 죽음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지지하던 총기 때문에 생명을 잃게 됐으니 이런 역설이 또 어디에 있을까.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도 모스와 시거는 너무 쉽게 총기를 구한다. 신분증이 없어도 충분한 돈만 있다면 누구라도 총기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소설을 통해 나는 알 수가 있었다. 지금은 좀 다른 이야기겠지만, 여권은커녕 신분증 없이도 국경수비대가 지키는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설정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멕시코 의사에게 이글패스에서 시거에게 맞은 총상을 치료한 모스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국경을 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240만 달러라는 충분한 자금을 지닌 모스는 총기면 총기, 자동차면 자동차 그리고 잠시 머물 숙소에 이르기까지 구하지 못하는 게 없었다. 자본주의 천국 미국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참고로 모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신분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코맥 매카시의 서사에는 잡다한 상념들이 끼어들 틈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무미건조해 보이는 서사로 힘차게 이야기들을 이끌어간다. 산소탱크와 스턴건 그리고 산탄총으로 무장한 사신에 가까운 시거는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동네 보안관 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간발의 차이로 자신을 사로잡을 뻔하기도 하지만 그를 해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법 집행자에 대한 하나의 모욕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 평범한 시민들을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공권력에 대한 작가 나름의 힐난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도대체 아홉 건이나 되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건만 군 보안관은 무얼 했단 말인가. 평상시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지만, 정작 비상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뒷북만 신나게 치고 킬러 시거의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결국 소설은 끝나 버리고 만다.

 

무엇보다 소설이 개인적으로 권선징악 부류의 결말이 아니라 마음에 들었다. 그런 결말은 너무 전형적이고 식상하지 않은가. 거악을 형성한 악당들은 여전히 세상이 제 것인 양 법을 무시하고 만인에게만 평등한 법이라며 조롱하고 있지 않은가.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되고 혐오가 넘실거리는 작금의 세태에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만큼 들어맞는 소설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히 명작이라 부를 만하다.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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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1 22: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코맥 맥카시 책 딱 한권 봤는데 진짜 뭐랄까 다시 집으려면 좀 용기를 내야하는 느낌이에요. 말씀하신대로 무미건조해보이는 서사를 너무 강하게 밀어붙여서 약간 숨이 막히는 느낌? 내 인생에 뭔가 긴장이 필요하구나 싶으면 손에 들게 될거 같습니다. ^^

레삭매냐 2025-09-12 09:53   좋아요 1 | URL
영화에서 빌런의 포스가 너무 강렬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설에서도 못지 않더라구요.

저는 코맥 매카시의 책은 기록
을 보니 4권 읽었더라구요.

말씀해 주신 대로 읽기가 쉽지
않아서 손이 잘 가지 않는...

얄리얄리 2025-09-12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다시 번역되서 나왔나 보네요. 그것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이라는 막강한 뒷배경(?)을 가지고요. 제가 코맥 맥카시 작품 중 첫번째 읽은 것이었는데, 책과 영화에서 본 충격이 다시 생각납니다. 그 충격에도 계속해서 맥카시의 작품을 찾아 읽었으니, 호불호는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말씀에 동의하게 됩니다. ˝가히 명작이라 부를 만하다. 충분히.˝

레삭매냐 2025-09-12 09:56   좋아요 1 | URL
아주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
뭐랄까 거시키하면서도 자꾸만
찾게 되는 그런 맛이 있더라구요.

절판되었다가 문동세문으로
새단장해서 나왔더군요. 가격인
상은 덤이구요.
(지금 찾아 보니 아예 다른 출판
사였네요.)

그레이스 2025-09-22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다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읽으려고 두고만 있습니다.
요즘 미국을 보면...;;;;

레삭매냐 2025-09-24 08:25   좋아요 1 | URL
그렇죠 아무래도.

요즘 미국이 저희가 예전에
알던 그 미국이 아니더라구요 ㅠ
 
액스 - 박찬욱 감독 영화 <어쩔수가없다> 원작소설 버티고 시리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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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던가? 있었다. 블로그의 리뷰를 검색해 보니 15년 전, <뉴욕을 털어라>라는 책으로 작가와 처음 만났다. 나에게는 생소한 작가지만 위키피디아로 검색해 보니 1959년부터 작고한 2008년까지 49년 동안 모두 108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사후에도 4편의 소설이 더 발표됐다. 1년에 2.2편 꼴로 마치 소설 찍어내는 기계처럼 그렇게 소설을 쓴 모양이다. 정말 대단한 작가로구나.

 

이번에 썰을 풀 <액스>는 작가가 1997년에 발표한 92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1997년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바로 IMF가 터진 그해다. 언제까지나 성장할 것만 같았던 세계가 빵하는 소리와 함께 신자유주의 시절의 붕괴를 예고한 그런 시기였다. 우리에게는 IMF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베이비 부머 세대의 미국인들에게는 사무자동화라는 이름으로 미국 중산층을 대변하는 중간관리자들의 수효가 필요 없게 됐다. 자본의 무한한 증식은 사무자동화로 필요가 없어진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간을 대량 해고하고, 최대 이윤의 확장이라는 고유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 순간 우리의 주인공 51세의 버크 데보레가 등장한다. 그린 밸리의 세일즈맨으로 출발한 베이비 부머 세대의 이 남자는 할시온 밀스의 벨리알 밀에서 23년간 특수 산업 용지 제작에 자신의 영혼을 태웠다. 그의 헌신적인 노동의 대가로 회사에서는 안정적인 직장과 급여 그리고 건강보험을 제공했고, 고용인과 피고용인은 만족스러운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할시온 밀스가 이웃 캐나다의 제지 공장과 합병 결정이 나면서 괴로운 이별의 순간이 도래했다. 2,100명에서 1,575명으로 대대적인 인원 감축의 여파는 버크를 빗겨 나가지 않았다. 16개월을 옛 직장에서 버텼지만 결과는 정리해고였다. 전직을 위한 카운슬링 역시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과 취업전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였다.

 

버크 데보레에게 유일한 선택은 비슷한 특수 제지 업계로 전직하는 것 뿐이었다. ,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곳에서도 중년의 중간관리자 급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해고 있지 않았나? 그렇다면 잡마켓에는 버크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구직자들이 넘쳐 나고 있다는 말 아닌가? 만약 당신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한국에서라면 얼마 되지 않는 밑천을 가지고 닭을 튀기는 레드오션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자영업자들의 무덤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버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을 선택한다. 그것은 바로 경쟁자들을 클린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소설 <액스>의 초반에서 경쟁자들을 목록에서 지우기 위한 소품으로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에서 획득한 전리품 루거 권총이 등장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북미 대륙의 어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는 그래서 추적이 전혀 불가능한 그 권총 말이다. 국가폭력을 기반으로 건국된 미국의 유산인 폭력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총기다. 불나방처럼 어떤 위험이 있는 지도 모르고, 버크가 제지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즐겨보는 주간지에 올린 구인란을 보고 연락을 취한 첫 번째 희생자 허버트 에벌리 씨를 찾아간 버크는 손쉽게 경쟁자를 처리한다. 물론 그전에 루거를 사용하기 위해 연구도 하고 직접 사격연습을 하는 정성도 보였다. 첫 번째 클리닝 작업이 힘들었다면 아마 이어지는 버크의 연쇄살인은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을 지도 모르겠지만, 너무나 손쉽게 성공하게 되자 자신감이 붙은 연쇄살인범의 액션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냉혹한 자본주의식 경쟁에서 도태된 실업자 버크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해고한 고용주들의 입장을 수용한다. 그리고 그는 분노의 화살을 구조적 모순에 돌리지 않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실업자 그리고 잠정적 경쟁자인 구직자들에게 돌린다. 그것은 마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노갈등을 부추기는 기득권층의 사악한 전략이 유효하다는 방증이라고나 할까. 가장이 경제활동으로 가정의 유지를 위한 소득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한때 윤택했던 중산층 가정생활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우선 아내 마저리가 파트타임 일자리를 얻어 생활전선에 투입된다. 아내에게 알리지 않고 경쟁자들을 죽이러 다니는 와중에, 아내 마저리와의 결혼생활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게 된다. 불행은 언제나 홀로 오지 않는 법, 집에 돈 나올 구멍이 없다는 걸 잘 아는 아들은 소프트웨어 절도에 나섰다가 경찰에게 체포된다.

 

이렇게 겹겹으로 누적된 불행이 버크의 주변을 강타하지만, 신념에 불타는 연쇄살인범은 목표를 수정하지 않는다. 그가 목표로 삼은 경쟁자들 역시 자신과 같은 처지의 평범한 가장이고, 일자리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동지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차례차례 사람을 죽이는 과정에서, 버크가 자신만의 논리를 앞세워 냉혹한 사회에 맞게 자신을 변형시켜 과정은 비극의 재현이다. 뉴욕 주의 제지 공장 매니저로 근무 중인 업튼 랠프 팰런의 자리야말로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결정한 버크는 모든 장애물들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버크의 살인 행각은 그가 계획한 대로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 딸과 불륜에 빠진 교수로 착각한 두 번째 희생자 부인의 예상치 못한 닦달에 그만 희생자는 3명으로 불어난다.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모든 정황이 해당 교수를 진범으로 지목하면서 버크는 혐의에서 벗어난다. 다만, 희생자의 직업과 총의 발사 탄도 추적으로 경찰의 의심을 사게 되면서 버크는 편리하고 간편한 총기 대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희생자와 말을 섞게 되었다가 일종의 관계가 성립되면서 잠시 회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임무를 자각하게 된 냉철한 킬러는 자동차를 이용해서 희생자를 죽이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기민함도 잊지 않는다. 이런 계획을 세울 정도로 뛰어난 브레인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이라면 버크 같은 악당은 마땅히 자신의 악행에 어울리는 결말을 맞아야 한다는 클리셰이를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작가는 간단하게 날려 버린다. 일련의 범죄를 통해 자신감이 붙은 버크는 초범이 아니라 상습범으로 중형을 구형받을 수 있었던 아들의 범죄행위를 완벽하게 무마시키는데 성공한다. 버크의 클리닝 작업은 계속되고, 마침내 업튼 팰런마저 해치우고, 가스폭발로 위장한 사고로 팰런의 집마저 날려 버린 버크는 마침내 팰런이 맡고 있던 매니저 자리를 얻고야 만다. 다른 희생자에게 자신의 악행을 덤탱이 씌워 면죄부를 부여 받게된 버크 데보레는 자신이 가진 기술을 이용해서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겠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한다.

 

도대체 무엇이 평범한 가장을 이런 악의 화신으로 돌변하게 만든 걸까? 자신이 오래 몸담아 온 조직에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냉혹하게 내쳐진 버크의 내적 분노는 영민한 머리로 수립한 계획과 철저한 자기방어 기제를 가동시켜 만든 논리로 세상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살인이라는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오로지 자신이 하는 행위들은 모두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것이라며 합리화한다. 실업으로 사회에서 유리되었을 때, 개인의 재교육과 재정착을 지원하는 복지시스템의 부재가 어떤 식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는 냉혹하게 짚어냈다. 이것을 마냥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당장 버크 데보레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됐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편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는 버크의 가정 문제에도 상당한 내공을 들였는데, 정리해고와 실업이 만들어낸 이슈가 단순하게 개인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상당히 유의미한 설정이었다. 마저리는 버크의 정리해고 소식을 듣자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면서, 앞으로 다가올 냉혹한 시절을 대비한다. 아들 빌리가 절도죄로 체포되었을 때, 같은 범죄자 특유의 감각을 동원해서 빌리가 숨겨둔 장물들을 가택수색에 대비해서 모조리 치워 버린다. 어쩌면 이렇게 믿음직한 가장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면서, 다른 남자에게 향하려던 떠나려던 마저리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결말에서 범죄자가 누리게 되는 해피엔딩은 역시 불편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웃의 평범한 가장을 그런 끔찍한 범죄자로 내몬 버크의 주변상황도 못지않게 불편했다. 소재의 설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개 그리고 얼치기 킬러에서 출발해서 모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는 냉혹한 연쇄살인범이 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정교한 저술은 탁월했다. 단선적이고 평면적이지 않은 결말에 이르기까지 28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코스타 가브라스가 2005년에 연출했다는 프랑스 영화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다리] 다음 달 개봉예정인 박찬욱 감독 연출 이병헌/손예진 주연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원작으로 대목을 맞아 재개정판이 나온 모양이다. 지금 트레일러를 찾아보니, 원작보다 부인 마저리의 역할이 강화된 느낌이다. 지원자는 네 명, 자리는 하나라는 말이 의미하듯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2005년 코스타 카브라스 감독의 영화가 보다 원작에 충실했다면,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감독 자신의 해석이 한국식으로 추가되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총기 규제가 엄격한 한국에서 어떻게 주인공이 총을 수중에 넣게 되었는지 그게 제일 궁금하다.

 

[뱀다리2] 새로 나온 재개정판의 표지는 왠지 몇 가지 키워드로 AI가 만들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레오나르도로 한 번 시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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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8-28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도끼는 추리소설 명작중의 하나이지만 오래전에 절판된 책이지요.역시나 재간되는 이유는 영화의 원작으로 영화 흥행을 기대하면서 다시 출간하는 것이 었군요^^;;;

레삭매냐 2025-08-28 12:46   좋아요 0 | URL
네 다음 달에 이 소설을 모티프로
한 영화가 개봉한다고 해서 또
부랴부랴 책이 나온 것 같습니다 :>

세상만사에는 다 이유가 있죠.
 
비 내리는 그리스에서 불볕천지 튀르키예까지 - 무라카미 하루키 여행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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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7년 전, 19889월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저 유명한 춘수 씨는 이웃나라 한국 대신 인류문명의 시원지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 흐르는 땅 튀르키예를 찾았다. 우리 춘수 씨의 서정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글 솜씨야 다 아는 사실이고, 그가 과연 비오는 그리스와 불타는 튀르키예에서 무얼 보고, 느끼고 기록으로 남겼을지 궁금했다.

 

그의 그리스-튀르키예행은 아마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 위한 기획이었는지 사진작가와 편집자까지 동반한 그런 여행이었다. <비 내리는 그리스에서 불볕천지 튀르키예까지>는 그리스와 튀르키예 기행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먼저 그리스 정교의 성지로 알려진 아토스 반도 기행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우라노폴리스에서 뱃길로 아토스 반도와 외부를 연결하는 다프니라는 곳으로 향한다.

 

다프니 항구의 여권보관소에 여권을 맡기고, 아토스 반도에서 통행할 수 있는 체류허가증을 받는다고 한다. 역시 일반 관광지가 아닌 신들의 정원이라는 별칭답게 조건이 까다로운 모양이다. , 그리고 수도사들이 기도와 수도에 정진하는 곳이어서 그런 진 몰라도 여자들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아토스 반도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카리에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인 도보 여행길이다. 마라톤광, 달리기광으로 알려진 춘수 씨에게 그 정도 걷기는 누워서 떡먹기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동료들에게는 곤욕의 시간들이었나 보다. 스타브로니키타, 이비론 같이 정말 이국적인 이름인 수도원들을 춘수 씨 일행들은 순례한다. 아토스 반도에서 숙식을 모두 수도원의 호의에 의지해야하는 이방인들의 처지가 왠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서도 춘수 씨는 먹을거리가 풍족해 보이지 않는 수도원에 둥지를 튼 고양이 가족들을 걱정해 주는 센티멘털리즘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진 찍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수도사들 때문에 그들의 풍채를 볼 수 없지만, 빈약한 먹거리에도 불구하고 뚱뚱하다는 그들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수도사들이 춘수 씨들을 따돌리고 자기들끼리만 맛난 것을 먹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에 젖기도 한다. 그런 깜찍한 발상이 재밌다. 순간, 역시 춘수 씨구나 싶더라.

 

그 외에도 필로세우, 카라칼르 그리고 그란데 라브라 등의 수도원을 일주한 춘수 씨네는 안나 아기아라는 곳에서 체류기간을 넘어 지내다가 결국 배를 세내어 다프니 항구로 그리고 다시 문명세계로 점프를 한다. 다시 속세로 돌아온 그들은 식당에서 푸짐하게 한상 차리고, 실컷 맥주를 퍼마신다. 역시 신들의 정원을 찾았던 이들조차 속세의 즐거움은 잊을 수가 없었나 보다. 성은 찰나지만, 속은 영원하다는 역설일 지도 모르겠다.

 

짧은 그리스 여행을 마치고 다음은 춘수 씨와 같은 나라 출신인 후지와라 신야가 자신의 책 <동양기행>에서 광물의 세계로 표현한 튀르키예로 춘수 씨들은 이동한다. 2부 타이틀에 적어 놓았듯이 튀르키예에 대한 하루키의 직접적인 인상은 차이, 군인 그리고 양이다. 차이는 튀르키예식 홍차로 어딜 가든 차이하네(차이를 파는 튀르키예식 카페)에서 차이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튀르키예 남정네들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유럽 땅에는 이스탄불과 주변의 조각 땅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유럽국가 행세를 하며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되어 있는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입증이라도 하듯, 사방에서 경찰과 군인들이 눈에 띈다고 한다. 이란과의 국경 근처에서 만난 군인들과의 사진촬영에 얽힌 에피소드 역시 흥미로웠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휴가 중인 군인의 사진을 찍는 것도 제재를 가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튀르키예 사람들의 주식이라고 할 수 있는 양과는 도대체 친해질 수 없는 하루키의 말에서는 문화상대주의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쨌든 모든 여행자들은 이방인이 아니던가. 각자의 취향과 입맛을 존중해 주자고.

 

춘수 씨는 일본인 특유의 상대방이 구사하는 지나친 친절함에 당혹스럽기만 하다. 루스 베네딕트가 여사가 <국화와 칼>에서 언급한 온[]이 문득 떠올랐다. 상대방에게 그런 온을 받으면, 되갚아야 한다는 그네들의 생각 때문일까. 이방인들에게 친절한 무슬림들의 속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다 보니, 무에진이 외치는 모스크의 기도시간 알림 정도 외에 춘수 씨는 철저하게 종교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비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것은 슬쩍 회피하는 작가 특유의 성향이려나.

 

춘수 씨들의 일정은 어느 순간 끝난다. 그는 철저하게 이방인으로서의 자세를 고수한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려고 하지 않고, 항상 차이하네에서 외롭게 글을 쓰며 맥주타령을 한다. 이 책 이전에 <먼 북소리>라는 유럽기행 에세이가 있다고 하는데 그 책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을 들어왔지만, 그의 대표작들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쨌거나 이렇게 그리스와 튀르키예를 누빌 수 있었던 춘수 씨가 마냥 부러워지는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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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26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채출간 된거 보고 읽을까 말까 했는데 딱히 안 끌려버리네요. ㅎㅎ 사진작가를 대동하는 여행에 이방인으로서의 자세.... 그냥 흔한 여행기일것같은 느낌이 드는걸요

레삭매냐 2025-08-26 22:19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너무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지금과는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싶습
니다.

패트릭 리 퍼머의 <그리스의 끝, 마니>
라는 책이 있는데 참 좋습니다.
지금 검색해 보니 품절되었네요...

카스피 2025-08-26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네요.하루키가 사진작가를 대동하고 여행했던 88년은 일본경제의 최전성기로 당시 한국은 겨우 여행자유화가 되있던 시기로 특히 남성들은 군대를 안갔다왔으면 아예 여귄발급이 안되던 시기라고 하더군요.이제 세월이 흘러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고 한일간 해외여행도 역전되었으니 아마 당시를 살았던 분들은 설마 이런날이 올까 상상도 못하셨을것 같습니다.아마 이제 일본에선 이런 기항문이 나오기 힘들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5-08-27 07:17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경제
가 마치 미국을 와그작 씹어 먹을 거
라는 공포가 있을 때였죠.
물론 플라자 합의로 모든 게 물거품
이 되었지만요.

요즘에는 너튜브가 대세이다 보니
기행문 대신, 화려하게 편집된 동영
상이 대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stella.K 2025-08-27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먼 북소리 유명하긴 하죠. 저는 안 읽었지만. 근데 이 책이 그저 그렇다면 먼 북소리도 별로가 아닐까 싶기도하네요. 이젠 춘수 씨도 예전만큼 책을 내는 것은 아니니 이렇게 과거를 울거 먹는 거겠죠. 춘수 씨는 그래도 되잖아요. 근데 하루키를 춘수 씨라니까 좀 촌스럽긴 하네요. ㅎㅎ

레삭매냐 2025-08-27 10:22   좋아요 1 | URL
아마 그 시절에 읽었다면 좀 더
트렌디했겠지만, 2025년에는...

궁금해서 <먼 북소리> 책을 찾
아보니 표지가 참 그렇네요.

완전 한글로 풀어서 봄나무 씨
로 하려다가 참았습니다.

춘수 씨는 그래도 되는 레벨이
니깐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