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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평점 :

세상에 이런 책이 다 있나 그래. 정말 오래 전에, <광기와 우연의 역사>라는 책으로 슈테판 츠바이크와 처음 만났다. 그리고 나서 오랜 시절 그의 책들을 읽어 왔다. 하지만, 다른 전작주의 작가들처럼 그렇게 강렬하게 매달려서 죽어라고 츠바이크의 책들을 읽은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기회가 닿는 대로 그의 책들을 꾸준하게 읽어왔다. 그리고 어제 중고서점에서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사서 읽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모두 9편의 짧은 에세이들로 구성된 이 책을 그만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가히 츠바이크를 지난 세기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롭고 조용했던 19세기 말에 태어나,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세기를 살다가 간 오스트리아 출신 양심가의 저술들은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히틀러라는 제목 때문에 맨 마지막 에세이부터 읽었다. 과학과 철학의 나라 독일을 그야말로 야만국가로 만들어버린 희대의 독재자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은 그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작품에 등장했던 모양이다. 책을 불살라 버리고,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인종주의로 무장한 파시스트의 등장은 어쩌면 대공황의 위기가 휩쓸던 지난 세기 불가피한 그런 현상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더 암울한 장면은, 불행하게도 지난 세기의 그런 불행한 과거가 다시 한 번 되풀이될 것만 같은 세계사적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인류는 도대체 과거에서 배우는 게 없다는 말일까. 현자 츠바이크의 지적들이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진행형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상상이려나.
개인적으로 내가 이 책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글은 바로 첫머리에 배치된 <걱정 없이 사는 기술>이다. 그리고 보니 이 편은 나중에 수록된 <나에게 돈이란>과 어쩌면 묘하게 공명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노동을 팔아 하루를 먹고 사는 그런 존재들이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의 한 시간의 노동을 금전으로 환산해서 일용한 양식과 주거 그리고 필요한 잡다한 것들 마련하고, 삶을 영위해 간다.
모두가 그런 걸까? 아마 이 편에 등장하는 안톤이란 사나이는 그런 것 같지 않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잠자리와 먹거리 그리고 기타 필요한 것들을 얻어 살아간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정말 일말의 걱정이나 스트레스 없이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참 부러웠다. 그도 물론 다양한 노동을 제공하고 금전적 보상을 받지만, 당장 필요한 이상은 절대 받지 않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고, 현재를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 반해 버렸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아마 ‘하늘이 무너지지 않나’ 싶을 정도의 걱정과 불안은 아니겠지만 아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안톤은 자신의 필요 뿐 아니라 타인의 필요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안톤에게 도움을 츠바이크 박사가 그가 필요 없는 따뜻한 외투 하나를 요구하자, 그야말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물품들을 모두 내준다. 그러자 안톤은 자신에게 필요한 외투를 하나 챙기고, 나머지는 나머지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한다. 아니 이런 이타적인 삶을 사는 다 있다고? 아무리 20세기 이야기라지만, 아마 안톤은 철저한 반자본주의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나만의 필요를 추구한다고 해서 이기주의자로 몰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과연 안톤처럼 사적 이익 대신 이타적인 사고를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1793년 1월 21일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시는가. 바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군주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위해 구름 같은 군중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런 역사적 대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센강에서 한가롭게 낚시질을 즐겼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4년차에 민중들은 하도 많은 사건들을 겪다 보니 어느새 국왕의 처형이라는 경천동지할 사건조차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된 게 아닐까.
당장 우리만 하더라도 지난겨울의 계엄사태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격변 속에 살아오지 않았던가. 츠바이크 작가에 의하면 우리의 가냘픈 심장은 일정한 분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할 수 없다고 분석한다. 아니 그러한 불행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싶은 마음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라는 존재는 그런 불행의 도래를 사전에 감지하고 감당할 수 없다면 피하고 싶은 그런 감정 상태를 미리 준비하고 있는지도.
청년 츠바이크가 노년의 위대한 작가 로댕을 만난 일화에서 배운 교훈에 대한 이야기도 마음에 든다. 대가는 우연히 만나게 된 청년을 무시하지 않고 환대해 주었다. 아니 나라도 너무 황송해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의 작업장에 방문한 츠바이크는 손님을 앞에 두고, 예술 창조의 무아지경에 빠져 버린 로댕의 진면모를 마주하게 된다.
근 한 시간도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의 손님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자신이 만들고 있던 예술 작품의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모습을 목격한 츠바이크는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지고 만다. 나중에 정신을 차린 로댕은 청년 츠바이크에게 정중하게 사과한다. 하지만 츠바이크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노라고 고백한다. 인간이 자신의 목표하는 바와 목적을 상실하고, 오로지 도달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완벽을 추구하는 지고의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독서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탈출하기 위해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이나 루이스 세풀베다 작가의 <핫라인>을 읽곤 했었다. 이제 한 권 더 예의 목록에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말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금방 다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지만, 상대적으로 긴 여운과 생각할 거리들을 남기는 그런 책이기도 했다. 곁에 두고 오래도록 다시 읽을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