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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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토성의 고리>는 독일 출신 영국 작가 W.G. 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가 자신이 영국으로 이주해서 20년 이상 산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을 도보로 여행하면서 쓴 소설이다. 허구와 역사적 사실을 잘 배합하기로 유명한 W.G.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에는 우리나라로 치면 야사로 다루어질 법한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다. 책에 실린 사진을 보면 정말 리얼리티에 충실한 것 같으면서도, 어느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는 작가의 유려한 픽션을 발하기도 하니 말이다. 어느 것을 취해도 꽃놀이패라는 느낌이 드는 책이다.

W.G. 제발트의 글을 읽으면서 역시 문인은 역사는 물론이고 사회, 경제는 물론이고 다방면에 능통해야겠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문인이 책을 읽은 그의 작품은 풍성해진다고 믿고 싶다. 영국 써퍽 지방을 위시한 여러 지방을 유람하면서 작가가 보고 느낀 점에 대한 연관적 분석은 정말 탁월하다.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전 세계를 호령하던 대영제국 성립의 결정적 계기였던 “쏠 베이 해전”을 필두로 해서 가문에서 가문으로 이어지는 영국 내에 산재한 고성의 유래와 해당 가문에 대한 이야기에 귀가 절로 솔깃해진다.

로우스토프트를 배경으로 한 청어 잡이에 대해서도 W.G. 제발트의 예리한 시선은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지난 세기 청어는 “근본적인 절멸 불가능성”의 상징이었다고 적는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독성물질로 인한 환경오염 앞에 어떤 것도 무한하지 않다. 이런 도거 뱅크의 청어 잡이와 2차 세계대전에서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해방시킨 르 스트레인지 소령의 침묵은 기묘한 공명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인류의 양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 홀로코스트의 비극 앞에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인류 문명은 ‘연소’라는 과정을 통한 소멸로 치닫고 있다는 경고일까?

중국 청나라로 갔어야 할 기차를 보면서 부패와 독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가던 제국의 흔적을 좇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영국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었던 <아편전쟁>으로 만성적 무역적자에서 단박에 벗어나 새로운 상품시장을 개척한 제국주의의 실체를 고발한다. 한편, 황위계승의 기존질서를 부정하며 오직 권력만을 추구하던 서태후의 탐욕으로 한 때 세계 최강의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물론, 청제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태평천국의 난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라는 대외적인 요소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저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잣는 누에야말로 이상적인 백성으로 본 위정자의 오만에도 일침을 가한다.

조국 폴란드를 떠나 영국에서 작가 활동을 만개했던 조셉 콘래드의 콩고 기행과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책에도 등장하는 로저 케이스먼트의 비교도 빼놓을 수 없다. 망명객으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 활동을 했던 콘래드는 벨기에 레오폴드 왕의 사유지였던 식민지 콩고의 실상과 식민제국주의자들의 범죄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W.G. 제발트는 서구인들이 당시 지도상에 백지로 나와 있던 미개척지를 어떻게 파괴해 나갔는지 담담한 어조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W.G. 제발트는 영국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에 대한 광폭 행보를 멈추지 않는다. 고대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겠다는 일념으로 생업마저 포기하고 매달린 알렉 제럴드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무수한 시간에 걸친 연구와 노동이 필요한 이 프로젝트를 묵묵하게 수행하는 은퇴한 농부에게 작가는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1975년 네덜란드 느릅나무 병과 1987년 전대미문의 폭풍으로 쑥대밭이 된 소소한 역사적 사실도 빠지지 않는다.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졸부들이 토지와 대저택을 경쟁적으로 구입하고 어떤 경제적 효용도 없는 파괴적 사냥에 몰두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협력해서 수많은 죄없는 사람을 학살한 크로아티아 의용군 우스타샤의 만행과 이들의 문서작업을 도운 이가 바로 전 UN 사무총장이자 오스트리아 대통령 쿠르트 발트하임이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작가는 문명의 역사는 발전의 역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파괴의 역사였노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마지막 장에서 고래도 국가적 차원에서 비단 제작과정을 비밀에 부쳤던 중국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서방으로 누에를 반입하는데 성공한 후에도 양잠업이 서구 사회에 뿌리 내리기까지 유구한 시간이 걸렸다는 점도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그리스,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를 거쳐 서유럽에 전파된 양잠업이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에서는 어떻게 해서 실패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다시 세기를 뛰어넘어 나치 완벽주의자의 시도에까지 도달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놀랐다. 역사와 자연과학적 사실 그리고 정치의 조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W.G. 제발트의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토성의 고리>에서 W.G. 제발트의 지성과 학식에 비해 턱도 없는 실력으로는 어디까지나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 솔직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잘 모른다고 해서‘ 이건 모두 소설이야’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다만 아쉬운 건 우리에게 4편의 작품만을 남겨 놓고 영면의 세계로 간 작가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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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의 노래(들) - 닉 혼비 에세이
닉 혼비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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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노래다. 일전에 책에 대한 영국 출신의 작가 닉 혼비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닉 혼비가 평생 좋아한 31곡의 노래에 대한 자신의 감상, 느낌 그리고 특별한 인연을 소개한 책을 읽었다. 어려서부터 팝송을 좋아해서 그런 진 몰라도 이 책에 정감이 간다. 표지에 실린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카세트테이프며 타이프라이터가 인상적이다. 아마 닉 혼비는 비 내리는 런던의 어느 카페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쓰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아주 잠깐.

어차피 <닉 혼비의 노래들>은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어서 일단 목록을 훑어봤다. 가수의 이름은 알지만 나름 팝뮤직 좀 들었다고 자부하는데 아는 곡이 하나도 없었다. 좌절했다. 그나마 맨 끝에 실린 우리에게는 영화 주제가 <라 밤바>로 널리 알려진 로스 로보스부터 읽기 시작했다.

지금 로스 로보스의 <관따나메라>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OK guys, we’re rolling”으로 시작되는 신나면서도 경쾌한 이 곡은 아쉽게도 가사가 스패니시라 한 마디도 알아먹을 수가 없다. 그나마 영어라면 가사 해석이 조금이라도 가능할 텐데 말이다. 그리고 보니 닉 혼비는 가사가 없는 클래식 곡은 안 듣는다고 했던가. 어쨌든 음악을 듣는 사람이 흥겨움을 느껴 춤출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음악의 본령이 아니겠느냐고 닉 혼비는 자신 있게 독자에게 묻는다.

닉 혼비는 좀 능글맞을 정도로 자기가 수십 년 동안 들어온 노래에 자신의 삶을 슬그머니 투영시킨다. 아는 노래라고는 <Born in the U.S.A.> 밖에 모르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Thunder Road>를 그야말로 카세트테이프가 다 늘어지게 들었노라는 자기 고백으로부터 시작해서 산타나의 음악을 내심 첫 섹스의 사운드트랙으로 쓰겠노라고 결심했다는 이야기까지 특정음악과의 특별한 인연을 줄줄이 사탕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보니 나도 아주 오래 전에 크리스 드버그의 <The Lady In Red>라는 노래에 미쳐서 한 시간짜리 카세트테이프에 온통 그 노래만 녹음해서 워크맨으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무도회장에서 만난 붉은 옷의 여인에 대한 크리스 드버그 식 예찬이었던 것 같은데 그 노래가 아직까지도 그렇게 기억이 난다. 오죽했으면 영어라고는 관심이 없던 내가 어렵사리 가사를 구해(그 시절에는 아쉽게도 인터넷이 없었다) 그 어려운 영어 가사를 다 외웠을 정도니까 말이다. 맨 끝에 크리스 드버그가 속삭이는 “I love you”는 정말 압권이었다.

리메이크에 일견이 있는 로드 스튜어트에 관해서도 닉 혼비의 붓은 쉬지 않는다. 보통 오리지널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오리지널 곡만큼 그가 부른 다른 가수들의 노래 또한 일품이다. 개인적으로 아이슬리 브러더스의 <This Old Heart of Mine>은 특히 좋아하는 곡이어서 그런지 책에서 만났을 때 반가웠고, 결국 예전 CD를 찾아서 듣기까지 했다.

독주(solo play)에 관해서도 닉 혼비는 자신만의 뚜렷한 주관을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물론 아티스트가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애드립으로 연주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찬성한다. 하지만 가끔 어떤 경우에는 청중으로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연주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독주가 등장하기도 하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그럴 적에 닉 혼비는 과감하게 연주회장을 떠나라고 선동한다! 실제로 펍에 가서 맥주도 한 잔 마시고 또 당구도 한 게임 쳤다고 했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음악을 즐기라는 말이다. 옳거니!!!

솔직히 말해서 <닉 혼비의 노래들>을 읽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 등장해주길 바라 마지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개인의 취향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새로운 곡들과의 만남 역시 즐거운 체험이었다. 보통의 책읽기가 상상력과 읽기(시가적인 차원)였다면, 닉 혼비의 노래들은 그것을 뛰어넘어 ‘듣기’까지 도달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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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열쇠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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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원작 소설을 읽기 전에 먼저 영화를 봤다. 그래서 이번 독서는 필연적으로 영화와의 차이점을 찾아내는 여정이었다. 확실히 책이 영화보다 그 디테일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꼼꼼하고 풍부했다. 영화가 원작의 전체적인 줄거리와 그 전개에 충실했다면 드 로즈네의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배경과 심리, 모두가 잊고 싶어 하는 벨로드롬 디베르 일제 검거 사건(벨디브 사건)의 속살에 방점을 찍는다.

소설은 ‘열쇠구멍’에 조금씩 다가서는 미국 출신 저널리스트 줄리아 “주주” 자몬드와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라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과감하게 생략된 줄리아의 성장 배경과 파리에서 15년 전에 만나 결혼한 프랑스 남편 베르트랑과의 관계를 소설은 좀 더 자세하게 들려준다.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줄리아의 게이 친구들과의 대화, 그리고 우연히 만난 유대인 희생자의 후손 기욤과의 대면을 통해 줄리아는 벨디브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 든다. 1942년 7월, 파리 마레지구 생통주 가의 아파트에 살던 사라와 그녀의 남동생 미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작가는 60년 전에 벌어진 미스터리 사건에 도전하다.

10살 먹은 소녀 사라는 폴란드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난 프랑스 소녀다. 폴란드에서 건너온 그녀의 부모들은 여전히 프랑스어에 서툴지만 그녀는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어엿한 프랑스 시민이다. 그런 자국의 시민들을 나치 점령군이 아닌 프랑스 경찰이 벨로드롬 디베르에 몰아넣어 핍박하고 짐승 취급한 다음, 아우슈비츠에 보내 학살에 동조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런 끔찍한 짓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국시로 삼은 나라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다는 것인가!

영화에서는 드 로즈네 여사가 소설에서 다양하게 기술한 부분 중에서 정말 독자로 하여금 공분케 하는 몇몇 장면을 취사선택해서 보여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비극의 현장을 목격하는 것 같은 비참함이 충분히 느껴졌다. 그 순간, 독자는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타자가 아니라 당시 벨로드롬에 갇힌 유대인을 핍박하는 가해자의 입장에 선 듯한 착각이 든다. 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어떻게 해서 이런 반인륜적인 범죄행위가 벌어졌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분석보다 사라라는 소녀를 통한 희생자 삶의 궤적에 있다. 당시 체포된 13,152명의 외국계 유대인 중 두 살에서 열두 살까지 모두 사천 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이 되돌아오지 못했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는 파리의 아메리켄, 이방인 줄리아 자먼드를 통해 프랑스인들의 숨기고 싶은 치부를 헤집는다. 가해자의 입장에 섰던 이들의 시선으로는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걸 염두에 둔 설정이었을까. 수십 년을 조국 미국을 떠나 파리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이방인인 줄리아는 우연히 알게 된 사라 가족과 자신의 시집 테자크 집안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남편 베르트랑과의 결혼은 시나브로 파경으로 치닫는 가운데, 중년의 임신부 줄리아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 남편과 필연적 갈등 구조를 생성한다. 그래도 줄리아는 이제는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된 사라 스타르진스키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괜히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라는 남편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임신한 몸을 이끌고 줄리아는 뒤포르 집안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미국 그리고 이탈리아 루카까지 내달린다.

미국 출신 기자 줄리아에게 60년 전의 벨디브 사건으로 치환된 프랑스판 홀로코스트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소설이 그리는 사라의 수용소 체험기는 영화에서 보여준 것 이상으로 끔찍하다. 체포된 유대인들의 돈과 보석을 약탈하고, 아이에게도 가차 없이 곤봉을 휘둘러 대는 경찰의 폭력 앞에 그만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줄리아와 그녀의 남편 베르트랑이 이사오려고 새롭게 단장하는 마레지구 생통주의 아파트는 과거의 비극으로 통하는 공간이다. 바로 그곳에서 사라의 동생 미셸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고, 전쟁 전의 단란한 가정은 파괴됐으며 가족을 모두 잃은 사라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마지막 남은 프랑스의 양심을 대변하는 선량한 쥘과 주느비에브의 도움으로 사라는 비로소 구원을 얻지만, 가슴에 새겨진 상처를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많은 이들처럼 사라도 혼자 남겨진 세상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소설에서 사라의 삶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또 하나의 장치는 네 살배기 동생 미셸에 대한 원죄다. 어쩌면 과거의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열 살짜리 꼬마도 자신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을 했는데, 당신은 어쩌면 우리의 형제일지도 모르는 벨로드롬의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아니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가라고 말이다.

Zakhor. Al Tichkah.
기억할지어다. 절대 잊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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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로라 리프먼 지음, 홍현숙 옮김 / 레드박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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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엘리자 베네딕트는 소위 잘 나가는 남편 피터, 딸 이소 그리고 아들 앨비와 함께 교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자가 한 통의 편지를 받으면서 베네딕트 가정에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수 있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엘리자가 잊고 싶어 하던 과거의 끔찍한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의 저자 라우라 리프먼은 테스 모너핸 시리즈로 유명한 미국 볼티모어 출신의 작가다. 이 책에서 작가는 1985년 십대 소녀만을 골라 살해한 연쇄 살인마 월터 보먼에게 납치되어 39일간 악몽 같은 고통을 겪다가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소녀 엘리자베스 러너의 이야기를 마치 르포 기사처럼 재구성한다. 한 번은 현재 엘리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다른 한 번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마지막 희생자를 폭행하고 끔찍하게 살해한 죄목으로 버지니아 주에서 사형 선고를 대기하던 월터 보먼은 범죄자를 구호하는 사회운동을 하는 바버라 라포투니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잘 나가는 남편을 좇아 참석했던 파티 사진에서 과거를 지우고 살고 있던 엘리자를 월터가 발견한 것이다. 바로 이런 개연성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납치 당시에도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 때문에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어린 엘리자베스는 이 악랄한 시리얼 킬러로부터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월터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자신에 대해 너무 방대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점증적으로 다가오는 월터의 위협 앞에 마침내 엘리자는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한 가지 사실을 감춘다. 범인 월터는 왜 예외적으로 엘리자만을 죽이지 않았던 걸까? 잘난 인물에도 불구하고 이성 관계에서는 젬병이었던 월터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간다. 물론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법을 이용해서 말이다. 월터는 프랑스 출신 철학자 자크 데리다를 뺨치는 실력으로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고, 정당화한다. 십대소녀 엘리자에게 이런 일탈을 일삼는 월터는 확실히 버거운 상대였다. 라우라 리프먼은 어찌 보면 조금은 장황한 전개를 통해 1985년 여름에 발생한 끔직한 사건의 진실을 한 꺼풀씩 벗겨낸다.

충실한 남편 피터에게도 엘리자는 자신이 겪은 악몽의 전부를 알려 주지 않는다. 그녀가 남편 피터에게 말한 대로 23년이라는 세월 뒤에 다시 비극을 떠올려 보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 수가 없단다. 선택적 기억상실이라는 표현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에는 많은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연쇄 살인마로부터 가정과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엘리자의 노력, 비록 자신들의 딸이 월터에게 피해를 입었지만 원칙적으로는 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러너 부부의 대의, 피해자에게는 괴물로 낙인찍힌 월터를 구호하는 바버라 그리고 ‘눈에는 눈’식의 복수를 원하는 피해자의 부모의 호소가 복잡하게 마주한다. 모두를 만족시킬 해결책이란 과연 존재하는 걸까?

1985년이란 시간적 배경을 구체화하는 팝차트를 석권했던 팝가수 마돈나와 왬의 히트곡 제목을 소설의 각장의 부제로 올리는 라우라 리프먼의 센스가 돋보였다. 꾸준하게 등장하는 새로운 캐릭터는 소설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장치로 멋지게 작용했다. 간만에 서스펜스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문학의 ‘저글러’를 만나 즐거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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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서 빈둥거리다 길을 찾다 - 명문가 고택 편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 시리즈 3
이용재.이화영 지음 / 도미노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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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가 쓴 글을 읽었다. 글쓴이 이용재 씨는 건축학 전공자로 건축평론가로 활동하며, 사업을 말아 먹고 지금은 택시 운전을 생업으로 삼았다고 했던가. 조선시대 양반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글쓴이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는 우리 선조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고택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아, 먼저 이용재 씨의 글 솜씨는 다소 파격적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색다른 그의 글이 마음에 들었지만, 모두에게 적용되는 건 아니니까.

아주 오래전 답사로 찾았던 강릉 선교장이 1번 타자로 등장한다. 너무 오래 전의 추억이라 기억조차 희미한 선교장의 자태를 글쓴이의 사진과 글로 되새김질하기 시작한다. 어느 고택이던지 스토리텔링이 있기 마련이다. 선교장의 내력에는 태종의 아들로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양녕과 효령대군의 이야기가 배어 있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효령대군 자손이 거처를 옮긴 곳이라고 하던가. 왕의 권위에 버금가는 99칸 위용을 자랑하는 선교장이다. 아마 그것도 왕의 후손이니 가능했던 게 아닐까?

다음은 연경당이다. 사실 연경당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궁금한 마음에 인터넷 검색을 다해봤다. 바로 지척인 서울 창덕궁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격렬해지는 당파 싸움의 중심에 서 있던 정조의 아들 순조시대 이야기다. 정조의 죽음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 선생을 비롯한 개혁파, 천주교도들에 보수 세력의 대한 대박해 그리고 다시 순조의 친정이 이뤄지면서 엎어지는 대반전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스토리텔링이 끊이지 않는다. 역시 단순하게 건물 이야기뿐이 아니라 그런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건물도 새롭게 다시 보이는 모양이다. 글을 보면서 주말에 시간을 내서 창덕궁 연경당 투어에 나설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해본다.

요즘 한창 인기몰이 중인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도 나오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된서리를 맞은 사육신 성삼문의 후손으로 살아남은 외손주 엄찬 고택에 대한 일화도 빠지지 않는다.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영조 대에 이르러 신원을 회복한 성삼문과 변절의 상징으로 변하기 쉬운 숙주나물의 기원이 되었다나 어쨌다나 하는 신숙주의 세계관에 대해 글쓴이는 조용조용하게 묻는다. 다만 그 선택은 각자의 몫이란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던 대목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바로 성주 백세각 편에 나오는 우암 송시열에 관한 이야기다. 송희규 선생의 후손으로 남인이라는 사실이라는 자처하는 종손의 말이 한 번 걸작이다. 우암을 싫어하지 않느냐는 글쓴이의 질문에 대차게 이렇게 받아친다. “안동에서는 똥개 이름이 전부 시열”이라고(115쪽).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노론의 영수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속이 다 시원했다.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곳곳의 고택을 지키는 사대부 가문의 후손들이 맡고 있다는 작금의 세태가 안쓰럽기 짝이 없다. 스러져 가는 고택을 중건하고 새롭게 꾸민다는 짓이 오히려 조상의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유가적 인문 교양의 미덕을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안타깝다.

조정의 권력투쟁보다 차라리 낙향해서 후세를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군자의 도락 중에 으뜸이라는 말도 피부에 와 닿는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쉴 틈이 없었다. 요즘 같은 천민 자본주의식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정도를 유지하면서 가세를 일으켜 세우고, 진정한 의미의 상생을 구현한 사대부들의 의기는 정말 본받아야할 것이다.

지난달에 휴가로 전주를 다녀왔는데 아쉽게도 <학인당>에는 미처 가보지 못했다. 슬로시티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한옥마을답게 전주에서 보낸 시간은 정말 거북이 걸음처럼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무얼 특별하게 하지 않아도, 그렇게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야말로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선물이 아닐까 싶다. 오래전에 무턱대고 다니던 답사의 추억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이번 가을에는 고택을 좀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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