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경찰 Mooncop
톰 골드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에디시옹 장물랭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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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는 일용할 양식을 벌기 위해 피곤하고, 또 주말에는 주말대로 힘들고 피곤하구나. 오늘은 도서관을 두 곳이나 들렀다. 누가 보면 책에 미친 사람인 줄 알겠다고.

 

알라딘 서재/북플은 책읽기를 강제(?)하는 무언가가 숨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투비 어쩌구까지 생겨서 더더욱 사람을 붙들어 두게 생겼다. 알라딘 동지분의 서재에서 본 톰 골드의 그래픽 노블 두 편을 도서관에서, 앉은 자리에서 순삭의 속도로 읽었다. 먼저 만난 <골리앗>은 분명 예전에 읽은 기억이 나는데 리뷰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냥 읽고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모양이다. 이래서 기록으로서의 리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때 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와 비교해 볼 때 책읽는 즐거움이 배가가 되지 않나 그런 착각에 빠져 보기도 한다. 모든 게 다 일장춘몽이다. 심지어 책읽기까지 말이다.

 

<골리앗>을 다 읽고 나서 13분 만에 <달과 경찰>을 쓱싹 읽었다. 점심으로 고등어구이를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다른 일행들이 나를 재촉한다. 얼마 남지 않았는데 빨랑 읽어야지 하는 마음에 조급해진다.

 

문캅은 달에 거주하는 경찰이다. 당시 아마 대략 12명 정도의 달주민이 살았지 아마. 그러다가 달에 사는 게 지루해지는지 하나둘씩 달을 떠나기 시작한다. 달에는 경찰을 필요로 하는 사건 사고도 발생하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어제와 같고 조용하고 무료해 보인다. 그래도 그런 곳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지 않던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공간이 되지 않은 달의 모습은 왠지 사람들이 점점 떠난다는 시골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이 떠나고, 그 사람들을 상대할 상점이나 서비스가 같이 사라지면서 시골 아니 달의 황폐화는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 다시 경찰 업무 이야기로 돌아가서 달에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사건해결률 역시 100%. 참 이상한 통계수치가 아닐 수 없다. 아예 사건이 없으니 사건해결률이 100%...

 

문캅은 아침마다 도너츠 가게에 들러 커피와 도넛 한 개를 주문한다. 그런데 점점 사람들이 사라지니, 도너츠 가게 마저 문을 닫을 판이다. 그나마, 루나도너츠에 새로 부임한 점원이 생기면서 문캅의 위로가 되어 준다. 그렇기 우리 닝겡들은 자고로 그런 위로가 필요한 존재들이었지. 참 기묘하다. 사람들이 득시글대는 건 싫은데, 그의 부산물로 발생하게 되는 의료나 각종 서비스는 또 아쉽다. 어쩌란 말인가 그래.

 

문캅이 살던 아파트에는 모두 12명이 살았다. 그러다가 8명이 떠나고 꼴랑 4명만 남게 된다. 달에는 무언가 기상천외한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집 나간 댕댕이를 찾는 일 정도랄까. 문득 그렇게 황량한 지구를 바라보는 느낌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아마 그런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달로 떠나지만, 결국 그곳 역시 지구별처럼 그다지 살만한 곳(?)이 못된다는 생각에 다시 지구별로 귀환하게 되는 모양이다.

 

문캅 역시 서장에게 전근을 요청하지만, 대체자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된다. 그러니까 나의 의지와는 1도 상관없이 이제부터 나는 달에 머무르게 생겼다. 왠지 마음이 답답해진다. 일용할 양식을 벌기 위해,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노동을 팔아야 하는 숙명이 엇비슷하게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나.

 

그래도 뭐 딱히 문캅은 불만이 없는 모양이다. 루나 도너츠의 우수점원과 드라이브를 나가기도 하고, 나름대로 달에 사는 이유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다. 삶에 어떤 이유를 만들어 내는 거야말로 삶의 큰 의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딱히 무엇이 좋다고 말하기 쉽지 않지만, 그냥 마음에 들었다. 디테일보다 심플하게 구성된 캐릭터들을 묘사한 그림이며 달 분위기들이 물 흘러가듯 마음을 적셨다고나 할까. 이렇게 간단한 설계로도 충분히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거면 됐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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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1-29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3분만에 읽으셨다니 저희 도서관에 이 책 제발 있음 좋겠네요. ^^

일장춘몽... 너무나 공감되는 요즘입니다. 갈수록 기억력이
떨어져 슬퍼요.

레삭매냐 2023-01-30 10:35   좋아요 1 | URL
기억력의 부재...

제가 요즘 그러하답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들이 있는데 머리
에서는 빙빙 도는데 말로 나오지
않더라는. 이것 참 -

그래서 메모가 중요한가 봅니다.

부디 미미님 근처 도서관에서 문
캅과 만나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파랑 2023-01-29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에 사람이 없어서인지 줄거리도 엄청 심심하네요 ㅋ 문캅의 취미가 독서였다면 덜답답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레삭매냐 2023-01-30 11:15   좋아요 1 | URL
뭐랄까... 달에서의
심심파적이 주를 이루고
있답니다.

그렇죠!!! 문캅 씨가 책
쟁이였다면 아마 달에서
의 생활도 그닥 ㅋㅋㅋ
 
검은 바이올린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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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광인의 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책의 서두에 나오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이름을 접하는 순간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검은 바이올린>의 주인공 요하네스 카렐스키의 영혼도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179531세의 요하네스 카렐스키는 대혁명의 와중에 서 있었다. 5살 때, 처음 집시로부터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요하네스는 2년 만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거듭나게 된다. 천재란 것인가. 아무런 노력도 없이, 마치 유년 시절의 모차르트처럼 타고난 재능을 그저 악보에 옮기면 되는 것이었던가. 대장금처럼 홍시맛을 기가 막히게 구별해내는 그런 능력의 보유자는 유럽 전역을 돌며 연주여행에 돌입한다.

 

우리는 이런 천재 탄생 전설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 순간, 천재는 적당한 광고와 어느 정도의 프로파간다로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무언가(음악 같은 특별한 재능에, 어린 나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를 지닌 누군가의 퍼포먼스에 신기해하고 기꺼이 비용과 시간을 지불한 준비가 되어 있다. 여기서 18세기 말, 그것도 대혁명기의 근대적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단초를 엿보게 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정상의 순간에서 요하네스는 지극히 외로웠다. 이것 또한 그보다 앞선 천재들의 숙명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다. 이십대의 나이에 페르시아와 이집트, 인도(당시까지 알려진 세계의 전부)까지 정복하면서 모든 것을 이룬 청년 알렉산더가 결국 회의에 빠져 계속된 정복전쟁과 폭음으로 건강을 해치지 않았던가. 글렌 굴드가 그랬던 것처럼 연주여행 대신 요하네스 역시 다른 것이 하고 싶었다. 그것은 오페라 작곡이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자 그는 보통의 연주자가 되고 말았다. 비범한 재능이 어떻게 소멸되는가에 대한 막상스 페르민식 고찰이라고나 할까.

 

여기까지가 천재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일반론이라면, 다음 무대는 보다 극적이다. 프랑스에 대적하는 반혁명전쟁 와중에 31세의 요하네스에게 징집통지서가 날아든다. 혁명과 전쟁은 요하네스 같은 예술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요하네스는 툴롱 포위전과 방데미에르 13일 쿠데타에서 두각을 드러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지휘 아래 이탈리아 원정에 참가한다.

 

정말 놀라운 변신이 아니던가. 예술가에서 당시 유럽 최강이라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상대로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의 기치를 내세운 그랑 아르메의 일원으로 한니발 이래 알프스를 넘은 전설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페르민 작가는 이런 역사적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고, 연주자 요하네스의 극적인 변신을 유도한 걸까?

 

그것은 자연스레 다음 무대로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소설적 장치였다고 판단된다.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 원정대는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천년 공화국 베네치아를 점령한다. 그리고 그 전에 벌어진 전투에서 요하네스를 치명상을 입고 전사의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는 검은 천사를 만난다. 검은색 그러니까 느와르는 요하네스 삶의 후반부를 장식하게 될 숙명이었다고나 할까.

 

부상당해 베네치아에 남게 된 요하네스는 그곳에 크레모아 출신 바이올린 장인 에라스무스를 만난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말처럼, 소싯적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요하네스와 그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린 노장인 에라스무스의 만남은 새로운 서사의 진행을 위한 예비가 아니었을까.

 

요하네스가 자신의 오페라의 천상계의 목소리를 담고 싶어 했다면, 장인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만든 바이올린에 그 소망을 이루고자 했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지닌 천재들은 각자 다른 영역에서 인간 소망의 기쁨이라는 유사 이래 우리 인류가 추구해온 이상의 구현을 위해 돌진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천재적 열정에서 한 번 삐끗하면 광기로 추락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약관의 나이였던 에라스무스(르네상스 시대 최고 지식인의 이름과 같다는 점에 주목한다)는 베네치아 페렌치 공작의 주문으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능가하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에 도전한다. 그것은 마치 신의 영역을 도전하는 미약한 피조물 인간의 부질없는 노력의 산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페렌치 공작의 딸이자 프리마돈나 카를라가 등장하게 되고, 점점 느와르로 채색되어 가던 서사는 비극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검은 바이올린>은 탐미적인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짧은 단락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이 지닌 흡입력은 대단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강렬한 빛에서 출발해서 그라데이션이라는 삶의 과정을 통해 죽음을 상징하는 느와르(black)로 행진해 가는 서사가 보여주는 힘에 매료되어 버렸다. 에라스무스가 검은 바이올린을 만들어내는 순간에서는 메리 셸리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창조해내는 그 순간이 연상되기도 했다. 신의 영역인 창조에 도전하는 인간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로 읽힐 수도 있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색채삼부작 가운데 두 번째인 <검은 바이올린>을 읽기 전에 마지막인 <꿀벌 키우는 사람>을 먼저 읽었는데, 과연 막상스 페르민은 색채의 주술사라고 평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룰 수 없는 꿈에서 우리를 끌어 내어 다시 현실 세계의 제 자리로 환원시키는 기술도 탁월했다. 환상과 꿈 그리고 광기라는 불협화음에 가까운 삼박자를 절묘하게 조율하면서 색채로 독자를 현혹시키는 그런 재주에 감탄할 수 밖에. 이제 색채 삼부작의 마지막 <>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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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1-27 10: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평이 극단적으로 갈리는군요. 저는 책 소개를 보고는 좀 취향이 아니다 싶어서 제쳐두었었는데 레삭매냐님때문에 또 관심이 생겼습니다. 이거 어떡하실거예요. 관심가는 책만 자꾸 늘어서 감당이 안돼....ㅠ.ㅠ

레삭매냐 2023-01-27 10:32   좋아요 2 | URL
그 또한 책읽기의 재미가
아니겠습니까.

하나의 콘텐츠에 대해 모
두가 같은 생각을 가진다
면 그 또한 이상한 현상
이 아닐까요 :>

물론 자신의 스타일과 맞
지 않을 순 있겠지만 한
번 도전해 볼만하지 싶습니다.

잠자냥 2023-01-27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냐 님은 별 다섯! ㅋㅋㅋ 전 어제 꿀벌 읽기 시작했다가 일단 내려놨습니다..........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3-01-27 11:14   좋아요 0 | URL
눈이 좀 그렇다 하셔서
눈은 일단 맨 끝으로 디밀어
놓았답니다.

왠지 색채 3부작 가운데
깜장 바이올린이 젤 갠춘
치 않나 싶네요.

미미 2023-01-27 1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렇게 써주시니 읽고 싶어지네요!!
검은 바이올린의 비극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합니다.
게다가 164페이지에 이 모든 것이 담겨 있다니 그점도 매력^^*

레삭매냐 2023-01-27 11:20   좋아요 2 | URL
인스타에서 이 책에 대한
피드를 찾아 봤다가 첫줄
에 스포를 보고는 그만...

사실 엑기스는 에라스무스
아재의 서사에 담겨 있죠.
고거는 애써 리뷰에서 뺐습
니다. 너무 다 까면 그러니
깐요.

짧고 강렬한 소설이었습니다.
다만 여성의 객체화는 좀 불
편하지 않았나 싶네요.

자목련 2023-01-27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탐미적인 소설은 맞을 것 같아요. 별5이라니, <눈>을 어떻게 읽으실까 궁금합네요^^

레삭매냐 2023-01-27 17:43   좋아요 0 | URL
<눈>은 지금 읽기 시작했답니다.
분량이 적어서 금방 다 읽지 않
을까 싶습니다.

라로 2023-01-29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 책은 뭔가요!! 색채 삼부작이라니,, 아~~~
매냐님 늘 넘사벽인 책들을 읽으시는 분!!
그런데도 읽고 싶게 만드시죠!!흑

레삭매냐 2023-01-29 16:37   좋아요 0 | URL
책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답니다.

쉽게쉽게 읽을 수 있지요.
<눈>과 <꿀벌 키우는 사람> 모두
읽긴 했는데 리뷰 쓰기가 쉽지 않
네요.
 
바다의 긴 꽃잎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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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이사벨 아옌데의 책들을 읽는다. <세피아빛 초상>으로 워밍업을 한 다음, 작년 말에 사둔 <바다의 긴 꽃잎>도 내쳐 읽었다. 다음 주자는 <영혼의 집>이다. 이래서 책을 미리미리 사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구나 싶다. 이런 날들을 대비해서 미리 책들을 사둔 나를 칭찬한다.

 

책의 제목 <바다의 긴 꽃잎>은 소설의 두 번째 무대가 되는 칠레 국가를 상징한다. 북쪽으로는 아타카마 사막, 동쪽으로는 안데스 산맥, 남쪽으로는 남극 그리고 서쪽에는 태평양 너른 바다가 버티고 있는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의 섬 같은 나라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나라의 형상을 보면, ‘바다의 긴 꽃잎이라는 시적 표현이 바로 이해가 된다.

 

1938년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 노르테역에서 심장은 멎은 어린 병사 라사로를 주인공 빅토르 달마우가 살려내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것은 죽은 라사로를 살려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인가. 의대생 출신 빅토르는 음대 교수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 마르셀 류이스와 교사 출신 어머니 카르메의 영향을 받아 공화군 진영에 서서 지난 3년 동안 현장에서 인턴으로 활동해왔다. 빅토르와 다른 기질의 동생 기옘은 처음부터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프랑코가 지휘하는 국민전선 반군과 맞서 싸웠다.

 

테루엘 전투에서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빅토르는 후방으로 이송된다. 테루엘 전투와 에브로 강 전투에서 패배한 공화군은 내전에서 지고 있었다. 아버지 마르셀은 죽기 전에 장남 빅토르에게 어머니 카르메와 동생과 동생의 연인 로세르 브루게라를 데리고 국민전선의 보복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공화국은 모로코 출신 식민지 병사들을 앞세운 국민전선 일파의 만행을 선전했다. 하지만, 공화군 역시 거점 지역들이 국민전선 반란군에게 함락될 위기가 되면, 국민전선 포로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서로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이들이 벌인 비극의 현장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공화파 역시 프랑코 군대가 승리했을 때, 벌어질 보복을 예상하고 자진해서 망명길에 나섰다. 기옘은 전선에서 전사했고, 기옘의 아이를 가진 로세르는 추위와 기아를 딛고 노쇠한 시어머니 카르메와 함께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길에 나선다.

 

여기서 잠깐 스페인 내전의 실상에 대해 살펴 봐야할 점이 하나 있다. 작년말부터 읽기 시작한 앤토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에 따르면 1936년 초에 있었던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했더라도, 내전은 피할 수가 없었을 거라는 예상을 읽은 기억이 난다. 좌우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무력 충돌은 기정사실이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공화국에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의 국민전선을 악으로, 그리고 그 반대편을 선으로 규정하는 단순한 이분법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정든 고향 땅을 떠난 스페인 아니 카탈루냐 사람들인 로세르와 빅토르는 프랑스 땅에서 마침내 무사히 재회하는데 성공한다. 좌파라는 낙인을 찍힌 패배자들은 이웃 프랑스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심지어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부에서도 말이다. 84년 전에도 여전히 난민이란 존재는 이방인이었고, 불청객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스페인 난민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졌는데 그건 라틴 아메리카의 섬으로 불리는 바다의 긴 꽃잎인 칠레였다.

 

물론 칠레에서도 난민 유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칠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파블로 네루다가 특별 영사로 등장해서 칠레에 필요한 이들만 선발하라는 본국의 훈령을 어기고 다수의 스페인 난민들을 받아 들였다. 그렇게 해서 선택받은 인원들은 위니펙호를 타고 대서양 바다를 건너 발파라이소 항구에 도착한다. 그나마 망명 스페인 사람들에게 유리했던 조건은 칠레 역시 같은 스페인어권 국가였다는 점이다. 오랜 타국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언어가 얼마나 그 사회에 동화되는데 필요한 요소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참 그전에 빅토르는 난민 조건을 보다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제수였던 로세르와 위장결혼을 한다. 의대 출신 청년이었던 빅토르는 다른 이들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칠레 사회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로세르 역시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서 초기에는 빅토르보다 더 달마우-브루게라 집안에 공헌한다.

 

소설의 두 번째 공간의 무대가 되는 칠레를 대표하는 집안으로 델 솔라르가 선택됐다. 가장 이시드로는 오로지 돈과 성공을 밝히는 전형적인 사업가로 등장한다. 도냐 라우라는 보수적인 칠레 가정을 수호하는 인물로 그리고 조력자이자 델 솔라르 집안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인디오 출신 후아나 낭쿠체오가 차례로 등장해서 서사를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집안의 장남 펠리페는 댄디 스타일의 청년으로 칠레 난민 수용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나중에는 우파 진영으로 변신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딸 오펠리아는 위장결혼한 빅토르와 불장난을 벌이다가 파국적 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작가 이사벨 아옌데가 달마우 가족들을 칠레로 보내는 순간부터, 1973911일 선배 독재자 프랑코를 존경하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세계에서 최초로 선거 혁명으로 집권한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뒤엎은 쿠데타 시절에 과연 달마우 가족들의 생존기가 궁금해졌다. 더군다나 원래 조국이었던 스페인에서보다 칠레에서 보낸 시절이 더 많아진 빅토르 달마우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아예 접어 버렸다. 어머니 카르메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달마우 가족은 재회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아옌데의 체스 파트너일 정도로 전직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을 밀고한 사람은 바로 이웃집 여자였다. 그 결과, 예순의 나이에 가까운 빅토르 달마우는 군부에 의해 연행되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됐다. 청년 시절에는 공화군 의사로 활동했던 빅토르가 노년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잃고 수용소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로세르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석방되고, 결국 다시 한 번 베네수엘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피노체트 군부 독재의 끝이 다가오면서 빅토르와 로세르는 칠레로 귀국한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빅토르는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로세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론 그때 가서는 진정한 사랑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남편이 심장전문 의사였지만, 정작 자기 아내의 병을 진단하지 못했다는 역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로세르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다. 세계사적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계속되는 간난신고를 이겨낸 빅토르와 로세르의 인생역경 서사의 빌드업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사벨 아옌데가 치밀하게 구상해서 한 방에 터뜨린 서사의 힘이 느껴졌다.

 

마지막에는 궁금해 하던 마지막 퍼즐(???)까지 맞춰주는 서비스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그렇지, 바로 이 맛에 우리가 소설 읽기를 끊지 못하는 거지.

 

빅토르와 로세르의 진보적 목소리만큼이나 그 대척점에 서 있던 이시드로/펠리페와 오펠리아의 보수적 입장에도 작가는 균형감을 발휘한다. 칠레 선거혁명 당시 모든 칠레 국민들이 인민연합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자칭 입헌 군주주의자라는 펠리페 델 솔라르를 과거에서 온 혈거인이라고 풍자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들 마르셀처럼 아예 정치하고는 담과 쌓고 산 이들도 많았다. 글을 아는 모든 이들은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교육 투사였던 카르메 여사의 불굴의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몸으로 보여준 멋진 캐릭터가 아닐 수 없었다.

 

이사벨 아옌데가 <세피아빛 초상>에서 19세기 칠레 근대사를 다루었다면, 이번의 <바다의 긴 꽃잎>에서는 20세기 스페인과 칠레 현대사를 연결하는 서사시에 문학적 방점을 찍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빅토르, 로세르, 펠리페나 오펠리아 같은 캐릭터들이 모두 불세출의 영웅은 아니다. 그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단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삶과 욕망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한 치 앞의 미래조차 보이지 않던 순간을 살아낸 이들에 대해 이사벨 아옌데는 경의를 표한다.

 

<바다의 긴 꽃잎>은 나에게 여러 의미에서 참 멋지고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새해 벽두에 만난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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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1-17 18: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옌데 그 삼부작을 중고로 드뎌 다 모았습니다.
이젠 읽기만 하면 되네요.
고수님들이 다 칭찬을 하시는 작품이라 참 기대됩니다.

레삭매냐 2023-01-18 17:39   좋아요 1 | URL
오오 다 모으셨군요 !!!

전 아직 <운명의 딸>은 못 샀네요.

<영혼의 집>은 중고서점에서 잘
사서 쟁여 두고 있답니다.

독서괭 2023-01-23 0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리미리 사두신 선견지명을 칭찬합니다!ㅎㅎ 아옌데 쭉쭉 읽어나가시겠군요. 역사 배경을 좀 알고 읽으면 더 재미날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님 남은 연휴도 즐겁게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3-01-24 23:48   좋아요 2 | URL
연휴 대비, 아니 꼭 특정 시기를 대비하지 않으셔도 미리미리 사두셔서 연휴가 즐거우신 레삭매냐님을 칭찬해. ‘미리 책들을 사둔 나를 칭찬한다‘눈 레삭매냐님의 글을 읽고 기분이 좋아져서 웃고 갑니다. ^^

얄라알라 2023-01-24 23:50   좋아요 2 | URL
칠레를 지도에서 보면 길쭉하다는 것만 알지, ˝바다의 긴 꽃잎˝이라니! 괭님 말씀처럼, 역사 배경을 알고 읽으면 더 재미도 있겠지만 큰 공부도 될 것 같습니다^^ 연휴 끝나가지 폭풍 책 욕심!

레삭매냐 2023-01-26 13:56   좋아요 2 | URL
아이고 연휴가 다 지나가서야
댓글을 달게 되네요.

너무 추버서 책도 제대로 못
읽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1-26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스페인에 빠지셨나보네요ㅎ

소설이 주는 감동, 서사의 힘. 이 맛에 소설읽기를 멈출 수가 없지요^^

레삭매냐 2023-01-26 13:57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그러합니다.

오래 전에 바르셀로나에
가보겠다고 티켓값 알아
보던 시절 생각이 문득
나네요 ^^

소설읽기, 심각한 중독입니다.
 
야스미나와 감자 먹는 사람들 미래그래픽노블 6
볼테르 마나에르 지음, 이희정 옮김 / 밝은미래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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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수원에 새로 생겼다는 국립농업박물관에 다녀왔다. 일단 새로 지은 곳이라 그런지 깨끗하고 넓직한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주차장이며 입장료가 무료가 더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 진 몰라도 주차자리도 많았다. 출입구 밑으로 전시되어 있는 수직정원에서 자라나는 초록이들의 향연도 볼만했다. 문득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식물들을 재배하면서 먹고 살 수 있지 않나 싶더라.

 

책을 넘겨보면 아주 다양한 모양새의 감자 품종들(?)이 등장하는데 과연 실재하는 종자들인지 살짝 궁금해졌다. 그래픽노블의 주인공은 학교에 다니는 야스미나가 주인공이다. 십대 청소년 정도로 보이는데, 야스미나는 학업보다 요리에 더 관심이 많다. 공부하는 이야기는 1도 등장하지 않고, 오직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도시락을 만들고 또 식재료들을 구하는 이야기만 나온다.

 

그리고 보니 야스미나는 친구도 없다. 자신의 텃밭을 키우는 시릴과 마르코가 그녀의 유이한 친구들이다. 시릴이 농약도 치고, 질서정연한 농작물 재배를 하는 사람이라면 마르코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자연농법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다. 그러니까 일체의 비자연적인 요소들을 배제하자는 극단주의자라고나 할까.

 

야스미나가 사는 아파트의 꼭대기층에는 아마릴리스라는 괴짜 연구자가 살고 있다. 그곳은 야스미나에게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공간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아빠의 허브 도시락을 만들기 위한 돈이 없다. 그래서 위층에 지천으로 깔린 천연 식재료들을 슬쩍한다는 거지. 처음에는 서양배를 슬쩍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연 식재료를 고집하는 야스미나의모습에서는 재작년에 작고하신 방랑식객 아저씨가 떠오르기도 했다. 장 몇 가지만 가지고, 자연에서 나는 것들로 맛난 음식들을 뚝딱 만들던 그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지.

 

문제는 기업가 톰 드 페르가 시릴과 마르코의 텃밭을 사들이고 이른바 슈퍼 감자를 대량생산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야스미나의 아빠까지 배가 고파서 유행하는 슈퍼 감자 칩을 먹고는 사달이 나기 시작했다. 인도의 모처에서 댕댕이처럼 되어 가는 기현상이 발생했다고 하는데, 슈퍼 감자를 미친 듯이 먹어댄 야스미나가 사는 곳 근처에 사는 사람들 역시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무엇보다 야스미나의 아빠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결국 자본과 결탁한 유전자 조작과 기업가 톰 드 페르의 욕심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돈만 된다면 사람들의 건강 따위는 고려할 바가 아니라는 말일까. 자신이 하는 연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채 연구에 매진했던 아마릴리스에게 책임이 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선의에만 의지한다는 게 궁극적인 파국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만화는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일단 한 번 잘못된 걸 바로 잡기 위해서는 처음의 노력보다도 더 많은 노고가 필요하다는 점도 말이다.

 

톰 드 페르를 막기 위한 야스미나들의 게릴라전은 왠지 19세기 초반 벌어졌던 러다이트 운동을 연상시켰다.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자본과 기업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앙숙인 시릴과 마르코도 연대해야 한다는 걸 여실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동화 같은 해피엔딩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겠지만.

 

아마릴리스가 개발한 스스로 벌레를 퇴치하는 식물에 대한 연구는 나름 신선했다. 폭발적인 지구별의 인구증가로 식량난에 시달리지도 모른다는 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식량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으로 한쪽에서는 과식에 의한 과다체중 문제가 또 한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식량 부족으로 굶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톰 드 페르가 개발한 슈퍼 감자 같은 종자혁명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은 너무 멀리 나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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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1-16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는 그냥 감자라고 하지만 남미에 가면 시장에 감자가 종류별로 수십종이 있대요. 다 다른 감자! 원래 감자가 남미에서 구대륙으로 넘어온거잖아요. ^^

레삭매냐 2023-01-17 09:0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신대륙에서 온 작물이지요.
감자 고구마, 예전에 구황 작물로
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나네요.

만날 장에서 사다 먹지만 그렇게
종류가 다양한 지는 미처 몰랐네요.
 
달까지 가자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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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리뷰의 제목을 인생 한방이다라고 쓰려고 했다. 아니 존버 아니면 엑싯도 후보에 있었다. 하지만 역시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동력인 욕망에 초점을 맞춰 보았다. 결국 욕망이다, 모든 건.

 

소설 <달까지 가자>의 서사는 초코밤으로 유명한 마론제과에 근무하는 세 명의 여성 노동자들인 다해, 지송 그리고 은상 언니가 엮어 간다. 일단 그들의 임금은 타직종에 근무하는 이들에 비해 너무 짜다. 하지만, 다른 데 갈 데도 없다. 그저 오늘 하루의 노동으로 먹고 사는 이들이다. 화자 정다해의 기준에서 집필된 일기 형식이랄까. 같이 빌려온 정지아 작가의 <자본주의의 적>을 보고 나서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는데 하룻밤 새에 다 읽어 버렸다. 그만큼 재밌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보니 작가의 전작 소설집도 그렇게 읽었지 아마. 그 책은 다 읽고 나서 팔아 버렸다.

 

항상 서설이 길다. 마론제과 삼총사는 따라지 인생들이다. 일단 벌이가 시원치 않으니 삶이 팍팍하다. 주인공은 외부의 먼지와 욕실에서 스물스물 새어 나오는 물이 들지 않는 그런 거주 공간을 원한다. 그러려면 지금 사는 곳보다 더 많은 보증금과 월세를 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법칙이다. 보다 나은 것을 원한다고? 그럼 돈을 더 내라고. 모두가 알다시피 월급쟁이에게 추가 소득은 언감생심이다. 하긴 요즘에는 배민 배달 같은 투잡으로 소소한 용돈벌이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세태를 포착해서일까? 돈에 진심인 은상 언니는 아예 사내에 강은 상회를 차리고 치약부터 스타킹, 대일밴드 그리고 컵라면에 이르는 잡화를 팔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한 달에 버는 돈이 9만원이었다. 찌질하지만 정말 공감이 갔다. 회사 동료들과 점심 먹을 때 보통 내가 계산을 하고 카카오페이로 이른바 뿜빠이를 하는데, 지역화폐를 이용하면 한 달에 한 3-4만원 정도는 떨어진다. 커피값 정도 되는 셈인가. 암튼 그렇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장류진 작가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탈출구가 없는 젊은이들이 한 때 열광했던 비트코인/이더리움을 전면에 내세운다. 존버와 엑싯 그리고 손떨림과 집착으로 가득한 이렇게 좋은 소재를 작가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으리라. 은상 언니가 다해와 지송을 이더리움 투기에 끌어 들이기 시작한다. 물론 지금처럼 비트코인이 폭락한 상태에서라면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겠지만, 불과 몇 년까지만 해도 코인으로 돈벼락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가 있었다. 그나마 주식은 법으로 보장되고 거래시간이라도 있지, 코인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벼락부자들이 나고 또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많았지 않았나 싶다.

 

소설에 어느 지점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같은 흙수저들에게 성공 혹은 쉽게 돈 벌 수 있는 포탈이 아주 잠깐 열린 거라고. 얼마나 집중했는지 아니 내가 코인에 투자한 것도 아닌데, 그들의 삶에 몰입해서 코인이 더 폭락하기 전에 엑싯하라고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 인간이 어디 그런가 그야말로 영끌해서 모은 돈 2천만원을 투자해서, 아홉자리 숫자를 찍고 십수년을 일해도 벌 수 있을까 말까 한 돈이 나의 가상화폐 지갑에 들어온다면 나라도 사리판단을 흐리게 될 것 같다. 도대체 언제 팔아야 한단 말인가? 모두가 J커브를 그리며 올라가는 그래프의 아름다운 모습에 영혼을 빼앗겨 버릴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반대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겠지만.

 

삼총사의 제주도 7성 호텔 여행은 비트코인 판타지의 끝판왕이었다. 그들이 투기한 이더리움의 떡상은 과거의 구질구질한 삶들을 모두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렸다. 달까지 가보자는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전까지 자신들을 옥죄던 물질적 조건과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자, 매 순간들이 행복으로 치환되었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우리가 얼마나 물질의 노예가 되었는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조마조마한 순간들을 넘기는 삼총사 모두 한몫 든든하게 챙기고 엑싯에 성공했다. 이거야말로 현대판 동화가 아닌가. 이더리움의 선구자이자 강장군 은상 언니가 다해와 지송을 차례로 비트코인 투기판에 끌어 들이는 장면은 전형적인 불안 마케팅이다. 억대를 넘어가는 이더리움 지갑을 눈앞에 들이미는데 아마 당해낼 장사는 없을 것이다. 후발주자인 지송이 주저주저하며 조금 더 먹겠다고 엑싯 순간을 늦추는 장면에 어찌나 공감이 가는지 몰랐다.

 

이더리움이 그들의 관계에 균열을 내기 전에 야근을 위해 의기투합한 삼총사가 테이크아웃 맥주를 마시면서 떠들다가 직장 상사에게 들킬 뻔한 장면도 압권이었다. 물질이라는 외부적 조건이 개입하기 전, 정말 순수하게 즐길 수 있었던 시간에 대한 묘사는 경쾌했다.

 

우리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 걸까.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욕망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하거나 적당히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변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부추기는 욕망의 본질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뱀다리] 안윤 작가의 소설집에서 만난 "윤슬"이라는 단어를 다시 만나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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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1-10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말은 참 많이 들었는데요. 하룻밤 새에 다 읽으셨군요! 내용 보니 드라마로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3-01-10 13:47   좋아요 1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바로 드라마 각이지 싶습니다.
비트코인과 제주도 바다 같이
콘텐츠와 비주얼에서 어필할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과업계의 이야기까정 !!!

라로 2023-01-10 13: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또 이렇게 뚝딱 쓰셨군요!! 저는 오늘 <쇼사> 100페이지 (전화기로) 읽었어요,, 그러니 책으로 한 50페이지도 안 되게 읽었겠죠??^^;;;
윤슬이 반짝이는 잔물결?인가요??
제가 아이 한 6명쯤 낳았다면 막내의 이름으로 짓자고 했던, 아 놔~~~.ㅎㅎㅎㅎ

레삭매냐 2023-01-10 13:53   좋아요 1 | URL
저의 기분 가는 대로
적는 날림 리뷰~이지효
ㅋㅋㅋ

밤에 읽고 낮에 희미한
기억에 의지해서 쓴다는.

<쇼샤>는 정영문 작가가
번역을 한 것 같은데...
왠지 18년 전 번역을 울궈
먹은 게 아닌지 합리적 의
심이 드네요 ㅋㅋㅋㅋ

분명 사둔 기억이 나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겠
습니다.

윤슬, 니름이 반짝반짝합니다.

페크pek0501 2023-01-10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고 좋아하게 된 작가입니다. 이 책도 탐나는군요...

레삭매냐 2023-01-10 19:09   좋아요 0 | URL
다른 단편들을 모두 잊어
버리고 오로지 거북알만
기억이 나네요 ^^

일상의 소소함을 퍼올리
는 트렌드세터답다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