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프레드 포드햄 지음, 이상원 옮김, 하퍼 리 원작 / 미메시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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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는 죽이면 안돼. 그런데 어치는 죽여도 돼.

 

공기총을 삼촌에서 선물 받은 아들에게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한 말이다. 어떤 행동은 허용되고, 또 어떤 행동은 하면 안되는 걸까. 프레드 포드햄이 그린 그래픽 노블로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었다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다시 읽었다.

 

8세 소녀 스카웃은 어머니를 여의고 편부 애티커스 휘하에서 오빠 젬(제러미)과 함께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자신에게 청혼한 딜 해리스와 친구가 된다. 집 근처에는 도시괴담에 나올 법한 으스스한 소문의 주인공 부 래들리가 산다. 그의 집에 가는 건, 겁많은 꼬맹이들에게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마 책으로는 많은 내용이 다루어졌겠지만, 그래픽노블에서는 많은 디테일들이 빠지고 대신 큰 줄거리로 넘어간다. 소설의 중심에는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톰 로빈슨의 재판이 위치한다. 1935년 딥 사우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앨라배마 메이콤에서 그런 가공할 만한 범죄를 저지른 깜둥이에게는 오로지 신의 처벌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니 사법적 처단에 앞서, 소수의 극렬 인종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톰 로빈슨에게 복수하기를 원한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한 결핍의 시대였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그런 경제 위기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 역시 피폐해져 있지 않았을까.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타인의 억울한 사연에 귀를 기울일 필요 없이 없었으리라. 게다가 흑인은 다수 백인들과 다른 인종이라는 사회적 편견으로 무장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랬으리라. 아마 얼마 전까지도 큐클랙스클랜(KKK)이 그곳에서 그리고 그후에도 준동하지 않았을까.

 

군내에서 최고의 명사수라는 타이틀을 지닌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는 무력에 호소하지 않는다. 마치 무림의 고수가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강호의 조무래기들을 상대하듯 애티커스는 자신의 실력이 꼭 필요하지 않다면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공익을 위해 광견병에 걸린 개를 상대할 때, 한 방으로 개를 사살하는데 성공한다. 그제서야 자기 아버지의 실력을 인정하게 된 스카웃과 젬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아버지 애티커스와 달리 핀치 가문의 전통과 관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알렉산드라 고모는 다수 메이콤 시민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세상을 뜬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부재를 채우는 인물로 아이들을 돌보고 음식을 만들어주는 흑인가정부 캘퍼니아의 존재에 대해서도 눈여겨 볼 만하다. 그리고 캘퍼니아는 스카웃과 젬을 흑인들이 다니는 교회로 인도하기도 한다. 백인들이 믿는 신과 흑인들이 믿는 신은 다른가? 하나의 존재에 대한 다른 가치는 왜 발생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쨌든 정의의 사도 애티커스 핀치는 자신이 판단했을 때, 무고하다고 생각한 톰 로빈슨 변호에 적극 나선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를 깜둥이 애인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에 맞서 스카웃-젬 남매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멸시에 가까운 조롱에 폭력으로 맞서지만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아버지 애티커스도 애들과 싸우지 말라고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이들이 말을 듣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그래픽노블에서 최고의 장면은 스카웃이 톰 로빈슨에게 린치를 가하기 위해 몰려온 백인 무리를 스카웃이 제압하는 컷이 아닐까 싶다. 무리가 흥분한 폭도로 변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꼬마 소녀는 그들을 설득해서 현장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걸 감성에 대한 이성의 승리라고 생각해야 할까. 백인들이 지배하는 사회 질서에 균열을 낸 톰 로빈슨에 대한 사적 응징을 막아내는 힘이 결국 이성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에는 공판 과정이 전개된다. 톰 로빈슨의 국선 변호를 맡은 애티커스는 누구나 납득할 만한 논리와 실력으로 사실을 밝혀 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메이엘라 유얼은 백인들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에 실체적 진실보다 역시나 감정을 자극하고 호소한다. 꼬마 소녀가 봐도 명백한 진실은 결국 톰 로빈슨에게 유죄 평결이 내려지면서 뒤집혀진다. 가장 선진적이고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미국에서도 차별과 편견을 넘을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저자 하퍼 리는 고발한다.

 

결국 톰 로빈슨은 감옥에서 탈주를 시도하다가 자그마치 17발이나 되는 총탄을 맞고 죽는다. 그는 어쩌면 애티커스가 전력을 다해 항소심에 임해도 재판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마지막 도박에 나섰던 건 아니었을까. 백인들은 톰 로빈슨이 전형적인 흑인 범죄자의 길을 걸었다고 비아냥거렸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 좌절하게 되자 탈옥을 시도했고 그 결과 총에 맞아 죽었노라고 말이다.

 

어쩌면 소설은 이 지점에서 마무리되어야 했던 게 아닐까. 핼로윈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스카웃과 젬 남매에게 밥 유얼이 벌이 납치소동극이 소설의 전개상 꼭 필요했나 싶다.

 

미국 사람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인종문제는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풀 수 없는 난제 가운데 하나다. 이미 구조화된 사회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한, 차별과 편견이 사라지길 바라는 건 난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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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3-09 14: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그 뒷부분이 더 의미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종문제를 넘어서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반전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레삭매냐 2023-03-09 15:59   좋아요 1 | URL
그렇죠. 결국 법을 집행하고
판단하는 것도 인간인데 그
인간들이 편견과 고정관념
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는 점이 참 그랬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 돼? - 아흔 살 넘은 부모 곁에서 살기, 싸우기, 떠나보내기
라즈 채스트 지음, 김민수 옮김 / 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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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년 전에 NYT에서 선정한 베스트북 10 자료를 다시 보게 됐다. 그 땐 그냥 시큰둥했었는데 이번에는 왠지 이 리스트에 있는 책들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10권이 아니라 22권이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부커상 수상작에 꽂혀서 책들을 사모으지 않았던가. 절판된 책이 애로사항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책사냥꾼의 본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바로 사냥에 나서서 아일랜드 분쟁을 다룬 논픽션 <세이 나씽>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나의 가장 큰 관심은 바로 뉴요커에 카툰을 그리는 라즈 채스트의 그래픽 노블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돼?>였다. 역시나 시티출신의 라즈 채스트는 유대인 가정에서 자란 작가였다. 벌써부터 귀가 솔깃해지지 않는가. 어쩌면 미국 문학판의 주류는 유대인 작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쪽 출신들이 차고 넘친다.

 

아흔이 넘은 부모님들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들이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한가득이다. 나의 부모님들도 연세가 드시고, 이런저런 병환을 가지고 계시다 보니 남의 일 같이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계속해서 날아오는 부고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기도 하다.

 

라즈 채스트 역시 부모님 슬하에서 벗어난 뒤, 시티 대신 코네티컷에 둥지를 튼 모양이다. 교사 출신의 부모님들은 구두쇠 유대인답게 한 푼이라도 아껴야 잘 산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계셨다. 그들과 쇼핑하는 장면을 작가는 광인과의 쇼핑이라고 명명했던가. 도대체 은행에서 예금하면 주는 공짜 믹서기가 왜 그렇게 필요하단 말인가.

 

어머니가 무슨 서류인가를 찾으시겠다고 사다리에 올라 가셨다가 다치고, 또 노인성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방치할 수 없었던 작가는 결국 많은 비용이 드는 요양원으로 부모님을 모신다. 모든 이들이 그렇지만 다가오는 이별, 그러니까 죽음에도 많은 비용이 든다는 걸 외면하고 싶어한다. 한 달에 자그마치 7,200달러 그리고 나중에 14,000달러까지 치솟은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지점에서 한푼두푼 아낀 돈을 모두 저축한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한다. 아니 어쩌면 라스트 부부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그 돈들을 알뜰하게 모아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담담해질 수는 없겠지. 그게 또 타인의 문제가 아닌 나 자신의 문제라면 더더욱 말이다.

 

자그마치 부모님이 48년을 사신 아파트를 정리하는 장면에서도 울컥했다. 우리 아버지는 뭘 그렇게 밖에서 주워 오신다. 지난 번에 방문했을 적에는 왜 지하실에 스노보드가 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심지어 제법 쓸만하기까지 했다. 당신은 타시지도 못할 인라인스케이트의 모습도 보였다. 놀라운 허섭쓰레기들의 행진이었다.

 

라즈 채스트는 수천권의 책들과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정리해야 한다고 불평했다. 그런데 나도 그 못지 않을 것 같다. 예전에는 그런 것들을 마구 내다 버려도 돈 한푼 들지 않았지만 이제는 쓰레기들을 버릴 적에도 돈이 든다. 어머니가 지난 번에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1차로 정리를 시도하셨는데 내다 버리는데도 제법 돈이 들었다고 하셨다. 다 내다 버리고 나니 지하실이 훤해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지하실에 가서 꼬맹이와 같이 탁구도 치고 그랬다. 내가 처음 탁구를 배울 적에 어머니와 지하철 역사 빈 공간에 준비된 탁구대에 가서 탁구공 줍느라 고생하던 기억이 났다.

 

IQ 152의 엘리자베스 채스트 여사는 채스트 집안의 그야말로 폭군이었다. 그녀의 말은 가족 모두에게 권위있는 법이자 명령 그 자체였다. 그러니 작가와 사이가 좋았을 리가 있나 그래. 아버지 조지 채스트의 마지막 순간과 달리 어머니와의 이별은 참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지난 주말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책 토론에서 부모 세대와의 갈등 그리고 화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지. 내가 읽는 것들이 그리고 내 삶의 어느 부분들이 연결되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모두가 기피하는 주제이긴 하지만, 또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문제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부모의 죽음도 글쓰기의 소재로 삼는 그네들의 문화가 좀 이질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롤랑 바르트와 아니 에르노의 애도 일기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았나 싶다. 죽음이라는 가장 대면하고 싶지 않은 강렬한 주제를 그래픽 노블이라는 방식으로 녹여 내서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도서관에도 비치가 되어 있지 않고, 근처의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가 없어서 우주점 서비스로 샀다. 이렇게 싸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격이 착했다. NYT 추천은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이렇게 좋은 책들이 절판된다는 게 아쉽다.

 

[뱀다리] 더께이야기도 있었지. 세월과 함께 쌓인 먼지가 더께가 되고, 더께가 내려 앉은 물건에는 왠지 손이 가지 않게 되더라. 나의 책들 위에도 더께가 쌓이고 있다. 자주 본 책들은 그렇지 않던데. 세월의 더께를 이기기 위해서라도 읽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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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필드 2023-03-06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을거 같아요 ^^ 그래픽 노블이라 더 흥미 있어보여요

레삭매냐 2023-03-06 11:59   좋아요 1 | URL
네 일단 그래픽 노블이라
보통책보다는 죽음-이별
을 덜 무겁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슬프고 또 한편으로는 웃
기고, 공감하고.

페넬로페 2023-03-06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양쪽에 다 노모가 있어 이 책의 내용에 공감할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노년에 대비할 나이가 되었고요.

제 주변 도서관에 검색해봤더니 이 책이 없어요.
수소문해서 구입할 정도로 부지런하지도 못하고~~
세월의 더깨를 쓰고 있는 다른 책이나 부지런히 읽어야겠어요^^

레삭매냐 2023-03-06 14:34   좋아요 1 | URL
저도 결국 도서관에서 수배할
수가 없어서 우주점을 이용
해서 구입해서 읽었답니다.

구하는데 든 품이나 비용이
1도 아깝지 않은 그런 책이었
답니다. 가격도 착하게 만나
서 그랬는 지도 모르겠네요.

세월의 더께를 뒤집어 쓴 책
은 저도 못지 않게 소장 중
이라 ㅠㅠ

바람돌이 2023-03-06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세드신 부모님들이 계시니 이런 책들은 읽으면 왠지 울컥할 거 같아요.

레삭매냐 2023-03-07 13:42   좋아요 1 | URL
바로 제가 그랬답니다.

아, 남은 시간이 이제 얼마
없구나하고 절실하게 느껴
지더라구요.

어려서는 절대 느끼지 못
한 감정이라고나 할까요.

자목련 2023-03-07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8년을 산 아파트를 정리하는 기분은 어떨까요. 큰언니의 유품을 급하게 정리했던 마음이 무얼까 싶어요. 그냥 두어도 나쁘지 않은데 말이에요. 죽음은 참 어렵지만 가까이 해야 할 존재 같아요.

레삭매냐 2023-03-07 13:43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부분이라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러네요.

책으로 만나는 것과 정
말 실체적으로 경험하
는 것과는 아마 많이 다
르겠죠.

고양이라디오 2023-03-07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을 거 같아서 주문했어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3-03-07 19:55   좋아요 1 | URL
그러시다면 중고책으로?

엄청 재밌고 또 나름 배울
거리도 많이 담겨 있답니다.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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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읽어야 하는 책을 읽게 된다. 작년 겨울에 사둔 책을 네그리타가 만개한 봄에 읽는다. 자전적 에세이 <사나운 애착>을 통해 스스로를 공부벌레, 문학소녀 그리고 페미니스트로 규정한 해방된 작가 비비언 고닉을 처음 읽었다. 뉴욕 브롱스의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내력이 <사나운 애착>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무엇이 작가의 글을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책에 매달려 있는 3일 동안, 책으로 전자책으로 그야말로 책을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읽었다. 퇴근길 버스에서 전자책으로 만나는 비비언 고닉의 일화들이 어찌나 재밌었는지 모른다. 책이 발표된 건, 1987년으로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이다. 아니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 아닌가. 오십줄에 들어선 작가는 자신보다 훨씬 연세가 드신 어머니가 맨해튼으로 브롱스로 그리고 윌리엄스버그로 계속해서 공간이동을 하며 자신의 과거를 속삭인다.

 

일단 아버지를 46세에 잃은 어머니와는 그야말로 징글징글한 애증의 관계다. 나도 살아 보니,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사람이 보통 원수가 되더라. 자주 안보는 사람과는 원수가 될 일이 없다. 그 사람의 삶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작가와 어머니 같은 경우는 너무 붙어 있어서, 다른 가족도 아닌 유대인 이민자 가정이니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다른 나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가정에는 대부분 회고록에 담을 만한 이야기들이 차고 넘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가 괴로워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추모하는 장면을 작가는 냉정하게 드라마퀸의 연기라고 평가한다. 나치 부역자 처벌에 나선 검사 역할을 맡은 어머니는 훗날 시티칼리지에 진학해서 새로운 삶이 영역에 들어선 딸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넘어서는 안될 선을 무시로 뛰어넘는다. 이들 사이에서 말폭탄으로 유혈사태에 가까운 사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하지 않을까. 실제로 물리적 충돌도 불사하는 어머니였다.

 

세대 간의 전쟁은 선택이 아닌 디폴트였다. 석사 학위까지 딴 딸의 유식함에 질린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그래, 나는 무식하지만 그동안 살아온 체험으로 지난 300년 간의 연애소설에 대해 지식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딸과의 토론을 일축해 버린다. 동시에 자신은 그러지 못했지만 해방구 시티칼리지에서 자주적인 생각과 토론하는 법 그리고 새로운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한 딸의 성공을 아낌 없이 축하해 주기도 한다. 자고로 그런 법이다, 가족이란 관계는. 반세기를 뛰어넘는 애증의 세월에 대한 비비언 고닉이 구사하는 변증이라고 해야할까.

 

24세에 금발의 외국인 화가가 비비언 고닉은 어머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순결고수 경찰을 자처한 어머니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 그전에 해방된 여성이자 자주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거듭난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바로 이웃집 과부 네티 러바인이었다. 남편이 어이 없이 죽고 난 다음, 비유대인 여성이었던 네티는 브롱스의 게토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는 선택을 했다.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발산했고, 무수한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 중에는 교구 신부도 있었다고 했던가.

 

네티는 남성우월주의적 시선이 넘실거리던 1950년대 미국의 가부장적 프레임 속에서 비비언이 매력적인 오브제로 거듭날 수 있는 스킬을 전수해준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해방된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수해 나간다. 아니 그리고 보니 밀레니엄 세대에 태어나 나는 달라 달라를 외치던 어느 걸그룹의 데뷔곡 가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공부벌레에서 문학소녀 그리고 페미니스트로 진화를 거듭하던 작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두 인물을 에세이 속으로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 네티 러바인 여사와 어머니가 될 것이다.

 

다시 결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카산드라를 자처했던 어머니의 예언대로 금발의 외국인 화가와는 애시당초 맞지 않는 결혼이었다. 떠들썩한 유대식 가정 결혼식부터 어쩌면 파국은 예정되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캘리포니아에서 나름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기세 좋게 출발한 스테판과의 결혼은 5년 만에 박살이 났다. 이걸 자아의 충돌로 해석해야 할까? 아니면 서로 너무나 다른 두 개의 행성 간에 교집합의 부재로 보아야 할까? 타인을 이해해야 하고, 나를 죽여야 한다는 결혼 생활의 타협을 이십대의 고닉은 어디서고 배우지 못했던 게 아니었는지. 아니면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결혼생활을 너무나 이상화시킨 어머니가 안겨준 PTSD 혹은 트라우마 같은 무언가가 작동한 결과는 아니었는지.

 

그후 고닉은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이웃집 소년 데이비 러빈슨 그리고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 유부남 좌파 노동운동가 조 더빈이라는 작자들과 더불어 허기와 욕망으로 가득한 관계를 갖기도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된 데이비는 사회복지사였다 다시 18세기에나 등장할 법한 정통 유대교 랍비로 변신을 거듭한다. 뻔뻔한 유부남 조 더빈에게는 가스라이팅을 당하기도 한다. 남자들은 모두 쓰레기지만, 그래도 한 놈 정도는 필요하다고 세라 이모가 그랬던가, 어머니가 그러셨던가. 일찍이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아니 에르노가 자기는 자신이 경험한 것들만 글로 쓴다고 했는데, 그전에 앞서 몸소 실천한 해방된 여성이 바로 비비언 고닉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은 뉴욕이라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브롱스 토박이 비비언 고닉은 이혼하고 다시 브롱스로 복귀해서 빌리지 보이스 기자활동을 하면서 세상을 두루 주유했다. 평생 여행이라고는 고작해봐야 가족들과 뉴욕 인근 동네만 다닌 어머니와는 시각차가 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두 모녀는 그야말로 다시는 보지 않을 각오로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동시에 로어이스트사이드와 하우스턴가를 누비며, 커피는 자고로 연하게 끓여야 한다 아니다 진하게 끓여야 한다로 옥신각신한다. 바로 이런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이 바로 뉴욕이다.

 

, 어디선가 만난 외로움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그렇지 외로움은 누구에게 의지해서 풀어낸 게 아니라 스스로 해결해야지. 아니 그런 외로움 해결에 대한 의존적 태도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더군다나 작가처럼 뉴욕이라는 밀레니엄 캐피탈에서 누릴 수 있었던 숱한 문화적 혜택들이 있었다면 더더욱 말이다. 모두가 가고 싶다고 해서 휘트니미술관 전시를 보러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나도 방문했던 MoMA와 저 멀리서 궁륭형 지붕이 보였을 때, 염통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구겐하임 뮤지엄이 보고 싶다고 해서 내일이라도 당장 보러 갈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비비언 고닉은 직사각형에 자주적인 인간으로 거듭난 자신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사납게(fierce) 투쟁했다. 모두의 삶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와중에 아버지를 상실한 열패감부터 시작해서 죽은 부군을 따라겠다고 무덤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연출하는 어머니, 쓰레기 같은 놈들과의 순수하고 강렬한 성적 욕망, 숱하게 남자들이 꼬이는 이웃의 매력적인 젊은 과부 네티 등과의 다양한 애착들(attachments)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삶이라는 투쟁 속에서 발생한 이런 소소한 애착들이 하나둘 모여 나라는 존재가 이루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애착들을 걷어내고 난 뒤에 남은 건, 과연 무엇일까.

 

[뱀다리] 역시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가 아닐 수 없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통해 조지 기싱의 <짝 없는 여자들>과 버나드 맬러머드의 <수선공>(무려 퓰리처 수상작!)이라는 책들의 존재를 알게 됐다. 후자는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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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3-03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할거리가 너무 많아서 전 리뷰를 못쓰겠어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니까 글로 적기가 힘드네요
애증의 모녀관계는 많은 상처를 남깁니다^^
독서가 이리 즐겁다니...
독서에 올인하게 만드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도 우리 엄마라는게 아이러니예요^^
레삭매냐님, 즐겁게 읽으시는 모습 눈에 보일듯 했어요~~

레삭매냐 2023-03-03 14:10   좋아요 1 | URL
저도 책 읽으면서 A4 사이즈
노트 네바닥에 메모를 했는데
다 써먹지도 못했네요 ㅠㅠ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요 ~

비비언 고닉의 다른 책들도
만나 보고 싶습니다.

페넬로페 2023-03-03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녀는 애증의 관계가 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카산드라를 자처했다니 완전 그러네요.
이 책 도착해 있는데 저도 빨리 읽어야겠어요^^

레삭매냐 2023-03-03 17:59   좋아요 2 | URL
저자 - 어머니 그리고 네티
의 애증의 트라이앵글이
정말 흥미진진했답니다.

넘모 재밌어서 후딱 읽게
되었네요. 다른 책도 어서~

미미 2023-03-03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 초반부 읽다 말았는데 오늘 저도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아 진짜 재밌네요^^*

레삭매냐 2023-03-03 21:08   좋아요 2 | URL
저는 지난 12월에 사서 아예
펴 보지도 않고 있다가 이번
에 읽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읽을 수가 있었
답니다. 너무 재미지구요.

레알 굿입니다!

자목련 2023-03-04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은 좋아요!
저도 이제 읽으려고요^^

레삭매냐 2023-03-05 16:07   좋아요 0 | URL
비비언 고닉, 짱입니다 -

전 어제 새로 산 다른 고닉
여사의 책도 읽고 있답니다.

빠이팅, 응원합니다.

바람돌이 2023-03-04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이제 배송받았는데 책의 판형이 작고 그리 두껍지 않아서 읽기 어렵지 않겠구나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읽으신 분들은 진짜 할말이 이렇게 많다고 하니 점점 기대가 됩니다. ^^

레삭매냐 2023-03-05 16:26   좋아요 1 | URL
아주 재미져서 술술술~
그렇게 넘어간답니다.

새로 나온 책도 읽어 보려
고 한답니다.

이 책에 대한 다양한 이야
기들, 기대해 봅니다.

얄라알라 2023-03-06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사각형에 자주적인 인간...
아, 정말 레삭매냐님께서 ‘언젠가는 읽게 될 책‘을 유혹하시는 문장이 말입니다 ㅋㅋ고단수이십니다.

네그리타가 만개한 봄!
사진 또 새로 올려주시면 하고 조용히 부탁 아닌 부탁을^^

저는 봄 맞아 애니시다 큰 아이로 데려왔는데 한 달도 안 되어서.....그냥 초록만 남았어요^^:;;

레삭매냐 2023-03-06 12:04   좋아요 1 | URL
저는 또 애니시다는 무언가 하고
검색해 봤지 뭡니까 파닥파닥 ~

노랑노랑하 꽃들이 아주 예뻐
보이더라구요. 역시 식물의 세계
는 무궁무진한가 봅니다.

아시는 분이 시흥 모처에 있다
는 희귀 식물 가게 나들이 포스
팅을 해주셨는데 저도 한 번
가보고 싶더라구요 헷 :>

네그리타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답니다. 어제 사진에 담았어
야 했는데 까비요.

책쟁이-리뷰어에게 최고의 상찬
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자목련 2023-03-10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빠 돌아가시고 슬픔에 잠식된 엄마를 보는 일은 너무 괴로울 것 같습니다. 고닉처럼 어찌 이렇게 잘 풀어내셨을까요. 좋았던 만큼 리뷰 쓰기는 어려운 책이었어요. 고닉이 매력적인 작가라는 건 분명하고요! 멋진 글 잘 일었습니다^^*

레삭매냐 2023-03-11 11: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누군가의 죽음은 특히나 부모님
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것 같
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슬픔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물론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암스테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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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소재와 이슈의 마법사라고 부를 만하다. 이언 매큐언의 부커상 수상작(1998년 수상)으로 작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암스테르담>다시읽었다. 아마 내가 처음으로 읽은 이언 매큐언의 작품이다. 그전에도 한 번 읽었지만 리뷰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나 보다.

 

소설 <암스테르담>은 죽음으로 시작한다. 소설에 나오지도 않는 망자 몰리 레인의 장례식에 모인 네 명의 남자들의 이야기다. 고인의 남편 조지 레인은 죽은 부인의 애인들이 못마땅하기 짝이 없다. 우중충하고 이미지의 돈 많은 출판업자 조지가 어떻게 해서 자유로운 영혼인 몰리를 아내로 삼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처음부터 작가는 망자에 대한 정보 없이 산 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고인에 대한 이미지를 빌드업하기 시작한다.

 

먼저 클라이브 린리가 있다. 중년 남자로 유산상속을 받아 젊어서부터 고생을 모르고 살았다. 그리고 정부에서 의뢰받은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한 교향곡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크고 작은 성공을 체험했다고 해야 할까. 아티스트답게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로 산행을 즐긴다. 산행 중에 떠오른 악상이야말로 클라이브의 재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주자는 <더 저지>의 편집국장으로 맹활약 중인 버넌 핼리데이다. 나중에 조지가 제공한 사진을 대중에 공개하는 역할을 맡는다. 현 내각의 외무장관 줄리언 가머니도 빠질 수 없는 몰리의 애인이다.

 

매큐언 선생의 책을 읽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선생은 작품의 길이에 상관없이 5개의 챕터로 소설을 구성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소설 <암스테르담>도 예외는 아니다. 이언 매큐언 선생은 등장인물들이 종사하는 직업을 통해 캐릭터의 성격을 하나씩 밝혀 나간다. 역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클라이브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신문기자, 출판업자 그리고 정치인보다(그리고 보니 거의 사회를 이끄는 모든 직업군을 망라한 느낌이다) 지식인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작곡가라는 직업이 갖는 우월감이라고나 할까.

 

작가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들에게 일종의 뮤즈로서 영감을 주었던 여신이었던 몰리 레인에 대한 이미지를 재창조해낸다. 누군가에게는 작업의 영감을, 삶의 의미였고 혹은 무한한 쾌락을 주었던 인물이 이제는 한 줌의 재로 남게 되었다는 허망함이 압도적이다. 중세 이래 인간에게 무한반복 중인 메멘토 모리는 매큐언 선생의 소설에서도 변주되고 있었다.

 

소설을 읽는 몰리를 사이에 둔 연적이자, 수십 년 지기였던 클라이브와 버넌의 관계도 흥미로웠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조지를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은 몰리의 마지막 남자였던 조지가 만든 음모의 희생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진흙탕 개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고상한 지위와 직책을 가진 사람들 역시 욕망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외무장관 가머니의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크로스드레싱에 캣워크 포즈를 취하며 잘 나가는 보수정치인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겉으로는 강력한 이민규제 법안을 밀어 붙이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우파 정치인의 사생활이 실제와는 너무 다르다는 사실에 유권자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 거기에 양념처럼 곁들여서,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저명한 정치인의 평판을 하루아침에 날려 버릴 수도 있는 선정적인 가십성 기사를 게재하고, 개인의 사생활 보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언론매체의 본성에 대해서도 작가는 일침을 가한다. 문제는 그런 방식이 오래 전부터 횡행해 왔고, 지금은 그 당시보다 더 심각해졌다는 정도의 차이 정도랄까.

 

등장인물들의 개인사 뿐만 아니라, 이미 그 시절부터 브렉시트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져 왔다는 것을 이언 매큐언 소설의 곳곳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미래를 위한 하나의 유럽인가? 아니면 위대한 대영제국의 부활인가에 대한 논쟁은 이미 통합 이전부터 영국의 국가적 이슈였다는 점을 매큐언 소설의 읽으면서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과거냐 미래냐, 청년세대와 노인세대 간의 갈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 것이다. 그렇게 축적된 추체험의 발현이 브렉시트라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물로 나왔을 뿐이다. 문학을 통해 그런 정치적 가능성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흥미를 돋우는 요망한 상상은 접어 두고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인간관계가 언제나 그렇듯, 상호간의 호혜적 관계 유지는 지난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클라이브와 버넌의 관계로 작가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손익분기점의 설명을 시도한다. 아무리 친구라고 하지만 내가 아닌 타자의 이익을 위해 내가 언제까지 손해볼 수 있을까? 결론은 작가가 소설에서 표현했듯이, “우정에 대한 전반적이고 상세한 재정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클라이브와 버넌이 암스테르담에 간 결정적 이유다. 얄궂은 두 개의 초대장이 서로에게 발부되었다고 해야 할까나.

 

소설 <암스테르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두 가지를 꼽고 싶다. 하나는 세상사에 지친 클라이브가 악상을 떠올리기 위해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아 산행하는 장면이다. 필생의 역작을 위해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필요악이지 않을까. 다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의무조차 외면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작가는 독자에게 묻는다. 다른 하나는, 결정적 순간에 버넌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로즈 가머니의 여사의 정치적 쇼다. 아무리 사전에 연출된 것이라고 하지만, 로즈 가머니 여사처럼 천연덕스럽게 궁지에 몰린 남편의 위기탈출을 돕는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뭐 이언 매큐언 정도 되는 작가라면 이 정도의 반전 정도는 당연히 준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으로 인간관계의 저변을 파고들어, 이렇게 멋진 소설을 창조해낸 작가의 역량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나의 이언 매큐언을 찾는 여정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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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2-28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짧은데 참 좋았던 기억이에요. 다른 긴 소설보다 이게 특히 좋았는데 절판되어 아쉬웠는데 다시 나왔네요 :)

레삭매냐 2023-02-28 11:40   좋아요 1 | URL
절판되었다가 다시 나온 건
환영하지만, 가격 인상이 된
건 슬픕니다.

번역도 새로 했으면 하는 바
람은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네요.

자목련 2023-02-28 1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읽고 리뷰까지 썼으나 기억엔 없고요.
말씀처럼 개정판은 환영하지만 가격 인상과 택배비를 생각하면 선뜻 구매가 어렵습니다. ㅠ.ㅠ

레삭매냐 2023-02-28 13:41   좋아요 0 | URL
물가 압력이 이 정도일 줄
미처 몰랐네요.

책도 이제는 당분간은 도서
관 희망도서와 구간을 읽어
야지 싶습니다.

책 사기에 이렇게 신중하게
될 줄이야 ㅠㅠ

blanca 2023-02-28 13:42   좋아요 1 | URL
저는 지금 책 팔려고 쌓아 놓았어요. 중고 팔고 사려고요.

blanca 2023-02-28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안 그래도 이 책 배송 기다리고 있어요. 레삭매냐님 글 읽으니 더욱 더 기대되네요.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2-28 14:57   좋아요 0 | URL
아 - 저도 이참에 다시 책팔기
책 정리하기 프로젝트 돌려야
하나 싶네요.

당장 팔 책부터 봐야지 싶습
니다.

이언 매큐언 작가가 한창 때
쓴 작품이니 만큼 마음에 드
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람돌이 2023-02-28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예전 번역판으로 읽었었는데 매끄럽게 읽히지 않아서 고생햇던 기억이 있네요. 그런데도 이언 매큐언답게 아픈데를 콕 쑤시는 그런 긴장감이 있었다는 기억은 남아있습니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고요. ㅠ.ㅠ

레삭매냐 2023-02-28 19:27   좋아요 1 | URL
역자가 같은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개정판으로 낼 때에는 가격이 오
르는 만큼 새로운 역자를 기용해서
번역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읽고 잊어 버리고 또 읽는 게 우리
책쟁이들의 숙명이 아니겠습니까.

moonnight 2023-02-28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책으로 분명히-_- 읽었으나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요ㅜㅜ 장례식에 모였다 정도만-_-;;;; 왜 읽는 걸까요-_ㅠ

레삭매냐 2023-02-28 19:29   좋아요 1 | URL
클래식은 다시 읽는다
라는 말을 예전에 이탈로
칼비노 선생이 말했었죠.

책은 한 번 읽는 게 아니라
다시 읽는 게 디폴트가 아
닐까요. 저도 읽고서도 다
잊어 버린답니다.
 
중세 3 : 만화로 배우는 서양사 - 중세를 지배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 한빛비즈 교양툰 12
올리비에 보비노 지음, 파스칼 마냐 그림, 이정은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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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말에 도서관에 들렀다가 <중세> 만화로 배우는 서양사 시리즈 3권을 빌렸다. 생각보다 글밥이 많아서인지 금방 읽을 줄 알았던 그래픽 노블들을 다 읽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보니 1권과 2권 리뷰는 쓰지도 못했네.

 

3권은 중세의 두 축 가운데 봉건제도와 핵심이었던 기독교(가톨릭)를 다룬다. 로마 시대에 소아시아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기독교 문명은 서구 문명의 핵심 요체의 자리에 오른다.

 

다신교 사회였던 로마 시대에 기독교가 유입될 때만 하더라도, 유일신 사상의 기독교는 다수 로마 민중들에게 배척당하고 심지어 박해를 받기도 했다. 유구한 기독교 역사에서 박해와 순교는 교세를 누그러뜨리는 기제가 아닌 오히려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훗날 일본의 위정자들은 그런 기독교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무지막지한 탄압 대신 교묘하게 사제와 신도들의 배교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전파를 억압하는데 성공했다. 아마 고대 시대에는 이런 정치적 방법을 몰랐던 모양이다. 기독교인들을 십자가형이나 사자굴에 던져 넣는 방식이 유효할 거라는 판단착오가 그 반대 효과를 불러 오기도 했다.

 

기존의 로마 중심의 세계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고 노바 로마라 부르기 시작하며, 세계의 중심을 동쪽으로 이동시킨 콘스탄티누스 시절에 비로소 기독교는 제국의 유일한 종교의 지위를 얻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그 후 천년 이상 중세 시대를 지배한 기독교 세상이 열리게 됐다.

 

로마 교회의 수장인 교황을 중심으로 서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이끄는 동로마교회의 분열은 1054년 결정적인 분기점을 만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사도로 꼽히는 베드로의 대리인으로 자청하던 교황이 어느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대리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사도의 대리인의 위치와 성자의 대리인의 위치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의 수직적 체계는 필연적으로 세속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 관계였다. 야심적인 교황들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교권이 세속권을 능가하게 되었다.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교황에게는 제후들을 파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파문당한 제후나 세속군주는 봉건 질서 시스템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치명상을 입기 마련이었다. 권위가 사라진 군주에게 계속해서 충성을 맹세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로마 교황들은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연옥을 발명해서 면죄부를 발행하고, 그리스어로 쓰인 니케아 신경에는 원래 없었던 필리오케를 삽입해서 위격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등 동방교회와 점점 멀어지는 길을 택하기 시작했다.

 

필리오케(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도) 논쟁은 초기 기독교 신학 논쟁에서 유래되었다. 27편의 신약성경들은 그리스어로 쓰였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라틴어와 달리 그리스어는 추상적이고 이상을 추구하는 언어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신과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기독교 교리에서 핵심을 이루는 삼위일체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가, 인간이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논쟁이 선행했다. 논쟁을 즐기는 그리스인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주제는 없었다. 게다가 신성과 인성을 각각 강조하는 이단까지 가세하면서 논쟁에 기름을 끼얹게 되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론에 입각한 니케아 신경이 채택되면서 위격에 대한 논쟁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서방교회에서 당시 에스파냐에서 널리 퍼져 있던 아리우스파를 배제하기 위해 니케아 신경에 원래 그리스어 버전에는 없던 필리오케를 슬쩍 끼워 넣으면서 동서교회의 갈등이 폭발해 버렸다.

 

2차전은 성상파괴 문제였다. 군인 출신 동로마 황제 레오 3세가 726년 성상파괴 명령을 내리면서 동서교회 갈등이 다시 분출했다. 당시 무슬림과 대치하고 있던 레오 3세는 일절의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이슬람 세력의 영향을 받아 동로마 교회에서 유행하던 성상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로마 교회는 황제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황의 통제 아래 있었던 서로마교회의 상황은 동로마의 그것과는 달랐다. 로마에서 교황은 계속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세속권을 강화해 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교황이 동로마 황제의 일방적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117년에 걸친 성상파괴 논쟁(Iconoclast Controversy)은 기존의 전례를 따르는 것으로 유야무야되고 만다.

 

1054년 교황의 특사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파문하고, 대주교 역시 특사를 파문하는 사태로 교회는 분열하게 된다. 그리고 4차 십자군원정 당시 콘스탄티노플이 십자군에게 약탈당하는 사태로 동서교회는 분열을 넘어 서로 적대의 관계로 돌입하게 된다.

 

중세 교회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신앙이나 구원의 문제를 등한시하고 대형 교회 건축에 집중하게 되면서 결국 몰락하게 되는 과정은 21세기 한국 교회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즐겨보는 종리스찬 JDSN이 너튜브에서 언급한 대로, 외형적으로 거대한 양적 성장을 이룬 한국 교회가 더 이상 청년 세대에 매력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고 기존의 성도들조차 가나안 성도들이 되는 현상에 소위 교계 지도자들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염불보다 젯밥이 눈이 먼 사이비 목사들이 정치판을 휘젓는 모습도 기가 차다. 종교 권력이 세속화되었을 때, 중세 가톨릭교회는 권력의 정점에서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붕괴가 시작되었을 때, 그들만 모르고 있었다. 21세기 어느 나라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외면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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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2-15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분이네요 ^^
종리스찬 tv 보고 왔어요

레삭매냐 2023-02-15 17:27   좋아요 1 | URL
인스타로 알게 된 분인데
콘텐츠가 인상적이어서
자주 보고 있답니다.

가필드 2023-02-17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샥메냐님 얼마전에 봤던 난처한 미술이야기 중세편을 다룬 4-5편도 생각나게 하네요
성상 파괴로 남아 있는 유물들이 많이 없다 하셨거든요 ㅠㅠ 교회들이 세속화되어 있는게
문제인거 같아요 이럴때일수록 초대 교회들의 갈급했던마음들이 생각나게 합니다

레삭매냐 2023-02-17 14:37   좋아요 1 | URL
논쟁이라는 게 막상 당시에는
죽어라고 싸우지만 나중에 지
나고 나면 왜 싸웠는지도 모르
기가 다반사인 것 같습니다.

성상 파괴논쟁도 발발할 시점
에는 뜨거웠지만, 나중에 결
국 유야무야되고 말았지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캐치 프레이즈는 500년 전 종
교개혁 당시부터 있었던 표현
인데 아직도 그러고 있다는 게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