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 하늘의 아들, 현세의 인간
마크 C. 엘리엇 지음, 양휘웅 옮김 / 천지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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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지 열흘이 넘어가는 마크 C 엘리엇이 저술한 <건륭제>를 회상하며 리뷰를 써본다. 원래 포부는 장대한 리뷰를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기억의 한계로 생각나는 대로 써볼 생각이다.

 

1711년 출생한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의 4남 홍력은, 부황이 1735년 사망하면서 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대로 강건성세(강희-옹정-건륭)의 무대를 활짝 열었다. 사실상 만주에서 발흥한 여진족의 나라 청은 18세기 세계 최강국이었다. 아마 지금의 중국이었다면, 아시아 대륙에 만족하지 않고 더 넓은 영역에 도전하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였던 강희제 시설 이미 중국 대륙을 장악한 청나라는 느슨했던 강희제 통치 시절을 지나 문자옥을 시행하며 독재자로 군림했던 옹정 시절을 지나 이십대 청년 천자를 맞이했다. 어려서부터 황제 교육을 받은 건륭제는 자신감에 넘치는 청년 황제였다.

 

소수의 만주족으로 압도적인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청나라는 철저하게 무력에 의존했다. 만주에서 대륙으로 진출하던 시절 청군의 주력이었던 팔기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청나라의 대륙 지배가 공고해 지면서 과거를 통해 발탁된 관료들도 망국 명나라에 대한 기억조차 잃어 버리고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었다.

 

저자는 건륭 치세의 특징으로 군기처와 주접제도를 우선적으로 꼽았다. 무력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다 보니, 특권화된 군인들의 연합체가 중요했다. 옹정제 시절에 만들어진 군기처는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만주 출신 황족들 중심이었으나 한족들이 등용되면서 건륭제 치세 동안 핵심 기관으로 발전해 나갔다. 다음의 주접제도는 전국의 관료들을 감시하고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제도였다. 정력 넘치는 청년 천자는 붉은 글씨로 전국에서 조정으로 올라오는 문서에 비답을 달았다. 결국 정보가 권력 그 자체라는 점을 청년 천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훗날 십전노인이라 불릴 정도로, 건륭제는 전쟁에도 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선 즉위 초반 남부에서 터진 묘족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한나라 이래 중원의 골칫거리였던 중가르와 동투르키스탄을 마침내 복속시키는데 성공했다. 현대 중국의 국경은 건륭제가 사실상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청년 천자는 채찍과 당근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변경의 식민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아버지 옹정제가 남긴 막대한 재정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대원정 작전을 수행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마 돈이 없었다면 중가르 원정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건륭제의 원정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단순하게 전투단을 조직하는 것 뿐, 아니라 대규모 원정군을 위한 보급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전쟁이란 보급으로 한다는 사실을 청년 천자는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점 한족화되어 가는 만주 귀족들의 야성을 키우기 위해 건륭제는 실전에 버금갈 정도의 사냥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말로 제국을 세울 수는 있어도, 마상에서 천하를 통치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이미 한족을 능가하는 학식과 골동품에 대해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던 건륭제는 청나라의 천하를 위해 지나치게 한족화되어가는 황실 귀족들이 조부 시절처럼 말을 달리고 사냥을 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자신들의 조상격인 여진족의 금나라가 그런 식으로 망한 경우를 천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마크 C 엘리엇의 <건륭제>에는 많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모후를 위해 자주 남순 혹은 순행에 나서 장강 주변 유역을 유람했다. 물론 천자의 순행은 비용이 많은 드는 사업이었지만, 특별한 내우외환이 없는 가운데 충분히 황실의 재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서양 출신 저자는 건륭제의 뛰어난 업적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만, 제위 기간 후반에 인구가 폭증하면서 후대에 미치게 될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신중한 태도로 저술한다. 하늘의 아들 그러니까 천자는 모든 인민의 아버지로 그들의 행복과 번영을 책임져야만 했다. 어쩌면 황제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의 무게에는 인민의 행복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만큼의 막중한 책임감이 뒤따르지 않았을까.

 

18세기 중국 인구 폭발은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전 세대보다 더 많아진 인구를 먹이기 위해 그만큼 많은 토지가 필요해졌다.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던 중국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규모 개간이 이루어졌지만, 세금 징수를 피하기 위해 개간된 토지들이 나라의 장부에서 대규모로 누락되는 일이 발생하면서 미래 국가 재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영국을 필두로 한 서방 국가들이 중국 대륙에서 새로운 사업과 무역의 기회를 찾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건륭제가 아무리 성군이라도 하더라도, 치세 말기에 가서는 화신 같은 탐관을 잘못 기용하는 실책이 이어지면서 성쇠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달이 차면 기울기 시작한다는 만고불변의 법칙이 국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 게 아닐까 싶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강희제>, <반역의 책> 등으로 강희 옹정 연간을 읽었다면 또다른 서양 학자인 마크 C 엘리엇의 <건륭제>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성기를 맞이했던 시절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흥미로운 책이 절판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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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정치의 위기, 90년대생의 정치질 - 노무현재단 청년 황희두 에세이
황희두 지음 / 포르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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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로 나라가 다 떠들썩하다. 한쪽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거라며 상대방을 공격하는데 여념이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편인데, 내가 즐겨 보는 너튜브의 김태형 소장님은 전자들이 1년 정도 후쿠시마 생수를 마시고 또 거기서 산 음식물들을 섭취한 뒤에 괜찮다면 방류하는 것도 어떠한가라는 솔루션을 제시했다.

 

황희두 청년이 쓴 책 이야기에 앞서 극단적으로 갈리는 정치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이른바 포스트 트루스시절에 우리가 얼마나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받아들이는 게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국인에 도움이 되는지 말이다.

 

사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 이러저러한 팟캐와 너튜브를 통해 황희두 청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으로 청년 정치인 기대주로 성장하고 있는 그의 삶을 조명해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거두절미하고 오십대 이상의 중년남성들이 장악한 정치 영역에 이런 청년들의 진출을 적극 환영하는 바이다. 왜 우리는 서구의 정치 선진국에서처럼 십대 시절부터 정당 활동을 펼치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해서 이십대, 삼십대 청년들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나올 수 없는 그런 토양이 되었단 말인가.

 

한 때 386이라 불리며 한국 정치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이들은 시간이 많이 지나 기득권층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들이 보여준 민주화 학생운동 그리고 그 후에 정치활동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효용은 다한 게 아닌가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제 총선이 일년 앞으로 다가왔지만, 새로운 바람이 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작금의 상향식 공천으로는 새로운 개혁을 주도할 신진 세력의 등장을 기대하기란 난망해 보인다.

 

오늘 따라 유난히 서설이 길었다. 여튼 프로게이머로 출발한 황희두 청년의 일대기는 파란만장했다. 우선 다른 사람과 다른 길을 걸었다. 학교를 그만 두기 전에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리고 학교를 중퇴한 뒤, 본격적인 프로게이머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가 누린 성공의 시간들을 길지 않았다. 하지만 이 또한 청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그런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누구나 비슷한 궤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다면 그만큼 재미없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그렇지 않아도 입시라는 획일적 교육이 미래 청소년들의 꿈과 희망을 죽인다는 마당에 말이다.

 

그의 책에서 내가 퍼올린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유능한 관종이라는 표현이다. 언제부터인가 청소년들의 꿈이 인기 너튜버가 되어 돈과 권력 그리고 명성을 거머쥐는 거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그만큼 너튜브 콘텐츠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말이 아닐까. 그전에는 대통령이나 장관 같은 권력자의 꿈을 그 다음에는 건물주가 되겠다고 하다가 이제는 또 콘텐츠 개발자가 되겠다고 한다. 황희두 청년의 말대로 유능한 관종이 되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정치 선진화에 앞선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그런 나라가 되는 기초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책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이야기지만 말이다. 어쨌든 비슷한 시기에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먼저 체험 황희두 청년의 조언이니 새겨 두면 좋을 듯 싶다.

 

황희두 청년은 이제 모두가 공감할 만한 국민 예능의 부재를 들며 파편화된 개인들의 단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각자도생의 시기에 공존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하게만 들린다. 전지구적 위기였던 역병 때문이기도 했지만, 진보정권에서도 우리의 삶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공동체적 삶을 우선하기보다, 개인의 영달과 사익 추구야말로 중요한 삶의 가치라고 떠들어대는 유사 언론의 선전선동의 위력이 어마어마한 가운데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 지에 대한 가늠하기조차 어려워진 시절 탓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황희두 청년은 이런 상황 속에서 개개인이 고지전, 진지전 그리고 심리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창한다. 어쩌면 일상에서 정치질은 이런 전투의 연속일 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일상에서 회피기동을 하거나 아니면 설득하는 작업도 마다해서는 안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생각들을 가진 이들과 일상에서 마주하는 때가 많은데, 나는 그것을 하나의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나도 청년이었다면 아마 그들의 생각을 단박에 바꾸기 위해 전쟁을 치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전쟁을 치른다고 해서 그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황희두 청년의 글을 다 읽은 소회는 부디 그가 국회에 진출해서 청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총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청년을 발굴하기란 난망한 미션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내공을 쌓고, 활발한 정치력을 발휘해온 황희두 청년이 현실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꿈이야말로 일상을 바꿀 수 있는 하나의 초석이 될 거라고 감히 예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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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문학동네 30주년 기념 특별판) 문학동네 30주년 기념 특별판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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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글] 고래 / 천명관

2009. 5. 31. 1:47


* 이 리뷰는 무려 14년 전에 쓴 리뷰다. 책도 재개정판으로 나오는 마당에 리뷰라고 해서 울궈먹기가 안될쏘냐, 이 말이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천명관 작가의 <고래>는 몇 년 전에 근처 서점주인형의 추천으로 이미 한 번 읽었던 책이다. 뭐 지금이야 4, 500쪽 정도의 책들이야 쉽게 읽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아, 이 책 두껍다라는 타령이 절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추천으로 읽기 시작하면서도 내내 불안해했었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너무 재밌어서 바람에 게눈 감추듯이 다 읽었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재밌으니까 그리고 다시 옛 추억의 여행지를 더듬어 가는 여행길이어서 그랬을까.

 

천상 구라꾼(혹은 이야기꾼)인 천명관 작가의 이 판타지와 현실세계에 철저하게 기반한 리얼리티로 범벅이 된 <고래>는 매혹적인 이야기다. 2대에 걸친 어느 모녀의 기구한 인생유전에 덧붙여서, 고구마 줄기처럼 달려 나오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등장 그리고 섬세하기 그지없는 이야기틀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처음 읽을 당시, 아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고 작가의 창작력에 경이를 표했던 기억이 맴돈다.

 

부두, 평대 그리고 공장 이렇게 3개의 큰 장으로 구성된 <고래>는 주인공 금복과 그의 딸 춘희의 파란만장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어느 촌부의 딸로 태어나 부둣가에 흘러들어 깡다구 하나로 자수성가해서 삶의 정점을 맞이했다가 바로 거지 신세로 추락하기도 하고,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 기업을 일으키는 금복의 삶이 바로 천명관 작가가 그려내는 이야기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관계하는 만남은 언제나 불행으로 귀결된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고, 한때 같이 살았던 생선장수가 그랬으며, 유년의 추억을 같이했던 걱정이 그랬고 부둣가의 날건달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딸 춘희마저 평탄치 못한 삶의 여정을 걸었다. 해피엔딩을 갈구하면서도, 희극보다는 비극이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작가는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금복과 춘희의 삶을 지극히 제한된 부두, 평대 그리고 공장이라는 공간으로 옭아매면서 독자들에게 그 이상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는 친절한 경고까지 덧붙이기도 한다. 남북의 장군들에 대한 작가의 희화는 슬쩍슬쩍 핵심적인 부분들을 비껴 나가면서도, 피할 수 없는 시대상을 그리고 있었다. 어쩌면 작가의 그런 언급이 없었더라면 <고래>의 시공간적 배경들은 아예 판타지로 치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공간적 낯설음만큼이나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 역시 지극히 이원적이다. 소설 전반부의 주인공인 금복은 현실의 치열한 삶을 살아나가는 억척여인의 전형으로 나중에 가서는 성전환이 된 게 아닐까할 정도로 남성화된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온통 휘젓고 있는 물신(物神) 맘몬(Mammon)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한편 그의 딸인 춘희(春姬)는 리얼리티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판타지 세계에 사는 섬세함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아예 홍진세상의 더러움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인지 말을 할 수가 없는 벙어리란다. 그녀와 생뚱맞기 짝이 없는 코끼리 점보와의 대화는 현실세계와 판타지의 경계에서 요란한 회오리들을 만들어낸다. 하긴 춘희는 국밥집 노파의 딸인 애꾸에 비하면 보다 현실계에 좀 더 가까운 인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소설의 제목으로 정한 고래의 상징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금복이 부둣가 시절 우연히 보게 된 대왕고래의 거대함은 그녀의 삶을 지배하는 물욕과 결합해서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을 한다. 그녀는 건어물장사, 다방 그리고 벽돌사업 끝에 자신에게 판타지이자 현실세계로부터 도피처였던 극장을 만들게 되는데 바로 그 극장의 꼴이 바로 고래였다는 것이다. 뛰어난 사업가로서 금복은 요즘 말로 하자면 얼리 어댑터로 벌써부터 커피 맛을 알고 시골마을에 다방을 차리고, 또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해야 할 시기에 벽돌사업을 시작해서 건설 붐에 한몫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성공이 그녀의 개인적 행복을 담보해 주진 않는다.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의 주변인들은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맺는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미 천명관 작가는 책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예의 법칙들로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세뇌해두었기 때문이다. 절로 멋지다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이야기의 법칙이었으니까.

 

책을 다 읽고 나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고래에서 현실계와 판타지를 넘나드는 작법에 대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타이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아울러 포스트모더니즘 역사 이론의 첨가도 뒤늦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남과 북의 두 장군들의 이야기와 슬쩍 빗겨나가기가 예의 포스트모더니즘 역사 이론과 일맥상통함을 알게 됐다. 역시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주무대인 마콘도는 천명관 작가의 <고래>에서 평대로 치환될 수가 있겠다. 너무 작위적이지 않냐고 묻는다면, 나는 적어도 그렇게 읽었다라고 답할 수가 있겠다.

 

춘희 파트에서 난 자꾸만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와 불멸의 영화 <양들의 침묵>의 렉터 박사의 짬뽕이 연상이 됐다. 혹시 영화감독이 소설 <고래>에서 영화의 어느 캐릭터를 베낀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뭐 아니면 말구! 무언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 같았던 금복의 이야기에 비해, 춘희 이야기에서는 니힐리즘의 향기와 판타지스러운 결말이 조금 아쉬웠던 것 같다.

 

하지만 놀라운 건 <고래>가 천명관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다. 초짜 작가가 이런 글을 썼단 말인가,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쨌든 <고래>를 읽고 나서 작가의 다른 책이 없나 해서 찾아보니 재작년에 <유쾌한 하녀 마리사>라는 단편집을 발표했었다고 한다. 작가 소개글에 보니 계간 <문학동네>에 장편 <사신(死神)과의 하룻밤>을 연재 중이라고 하는데 그의 새로운 작품이 기대된다.

 

[뱀다리] 가히 국내 작가 최고의 데뷔작이라고 할 만한 어떤 작품 이래, 그것을 능가할 만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 주지 못하는 어느 작가에 대한 아쉬움이 짙어지는 그런 봄밤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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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5-13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천명관 책 있는데 함 읽어봐야겠슴다.
아시겠지만 시나리오 쓰다 소설 쓴 거 잖아요.
부커상은 어떻게 되나 모르겠어요.

레삭매냐 2023-05-13 21:34   좋아요 0 | URL
오 그랬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이 소설 영화로 맹글면 재밌겠다
싶은데... 그럴 일은 아마 없지
싶습니다.

페크pek0501 2023-05-14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래, 이 책 큰 상의 후보에 올랐던 것 같아요. 신문에서 보고 놀랐던 기억이...
글 잘 쓰는 사람이 참 많구나, 새삼 느끼며... 저주 토끼를 비롯해 대단한 작가들이에요.
앞으로 우리나라 작가들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레삭매냐 2023-05-14 22:50   좋아요 0 | URL
케이팝 다음에는 부디 케이노블
이 뒤를 잇기를 바랍니다.

cyrus 2023-05-15 0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궁 모임 이전에 펭귄클래식 모임 한창 했을 때인가? 그 당시에도 <고래>가 엄청 재미있다고 호평하신 분이 있었어요. 올해 국제 도서전에 천명관 작가 <고래> 북토크가 열린다고 하던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거 예약을 안 했네요... ^^;;

레삭매냐 2023-05-15 08:35   좋아요 0 | URL
그랬던가요? 그랬다면 그게
저일 수도 있겠네요 ㅋㅋㅋ

제가 그곳에 간다면 왜 데
뷔작 만한 작품을 다시 쓰지
못하고 있는지 물어 보고
싶네요.
 
싱글 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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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리고 또다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을 읽는다. 내가 지금까지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었더라. 인생책까지는 아니더라도, 항상 곁에 두고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읽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지난달에는 책을 거의 읽지 못했다. 갑자기 발생한 일신상의 이유 때문에. 그래서 오월의 첫날에 다시 <싱글맨>을 읽기 시작했다. 독서 슬럼프 탈출에 이만한 책이 없지 싶다.

 

소설 <싱글맨>의 주인공은 영국 출신으로 올해 58세의 조지다. 그는 게이다. 그리고 파트너 짐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소설 제목에 등장하는 싱글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말 그대로, 싱글이면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그의 처지를 대변한다고나할까. 조지는 철저하게 고독 가운데 살고 싶어하지만, 그의 주변은 그런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선 서던 캘리포니아로 안정과 직업을 찾아온 평범한 보통 가정들이 조지 주변에 포진해 있다.

 

아이를 좋아하던 짐과 달리 조지는 그러지 못하다. 사실 처음에 읽을 적에는 이 부분을 간과했었는데, 아이를 기르는 입장이다 보니 이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나와 다른 어떤 부분들이 그들이나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와 다른 사고와 문화 혹은 습관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차별하게 되는 어떤 이들의 성향에 대해 수긍이 되기도 했다. 대개의 경우,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조지는 서던 캘리포니아를 상징하는 자동차를 타고 프리웨이를 지나 대학으로 출근한다. 교외에 살면서 교수라는 안정적인 전문직을 가진 게이 남성이라. 또 어떻게 전형적인 클리셰이로 보일 수도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는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대학이라는 공적인 공간으로 위치이동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조지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된다.

 

시간적 배경은 19621211일 정도,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를 2주 정도 남겨둔 시점이다.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그야말로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11일간의 긴박한 시간이 지난 다음이다.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자국 인구의 3/4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방을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강성 발언을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크리스 아이셔우드는 당장 핵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분위기도 언젠가는 지나가고 또다시 평화로운 일상이 전개될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바로 이런 지점에 싱글맨 조지의 단순해 보이는 일상,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시대적 위기 그리고 다시 개인들의 소소한 일상을 뭉뚱그려 아우르는 서사의 힘을 보여준다. <싱글맨>을 읽을 때마다 생각할 거리와 동시에 심심파적으로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싱글맨>은 하루 동안, 캘리포니아에 사는 영국 출신 문학교수 조지의 일상을 다룬다. 이 짧은 하루 동안에, 이렇게 다양한 묘사가 가능하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정치적으로는 우리가 사는 지구별을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었던 쿠바 핵미사일 위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조지는 16년 동안 같이 산 짐을 잃었다. 그리고 외로움 가운데 삶을 이끌어 나간다. 그가 느끼는 고독의 한 스푼이라도 내가 느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웃과의 소소한 이야기들, 그 다음에는 출근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린 채 근엄한 문학교수로서의 일상을 이어간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을 두고 작가의 실력이 발휘하는 지점을 대단했다. 마치 나도 강의 속에 들어가 있는 그런 분위기라고나 할까.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런 미묘한 지점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는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실력을 정말 대단했다. 말미에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강의시간을 넘겨 버리는 장면까지 완벽했다.

 

그 다음에 교수 식당에서의 연기 무대다. 동료 교수들은 조지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까? 지금이라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소설이 발표된 반세기 전인 1964년에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제자와의 대화에서 그리고 동료들과의 가벼운 대화에서 어쩔 수 없는 텐션이 느껴진다. , 그전 출근길에 테니스장에서 전력을 다해 테니스를 치는 사내들을 보고 흥분을 느끼는 조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 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 감정은 어쩌면 작가 아이셔우드의 그것일지도.

 

강의를 마치고는 사별한 짐과 썸을 탔던 요양원의 도리스를 찾아간다. 예전에는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연적에 대한 감상들이 이어진다. 역시나 기묘하다는 감정이 든다. 그전에 방문한 체육관에서는 평등을 만끽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침에 거절한 이웃이자 지기인 샬럿의 초대에 응한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샬럿을 방문해서 짐이 죽었을 때, 자신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추태를 부린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는 조지. 그렇지 모름지기 우리 인간이란 그럴 시기에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 아닌가 말이다.

 

샬럿의 집에서 나온 조지는 스타보드사이드 술집에서 만난 제자 케니 포터와 작은 일탈을 경험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을 넘거나 하진 않는다. 위태로운 줄타기 같은 감정이라고나 할까. 몇 번을 읽었어도 엔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의 기억 속으로 휘발되어 버린 느낌이랄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무엇 때문에 <싱글맨>이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지. 물론 거창한 시대적 사건도 있었지만, 작가 크리스 아이셔우드는 그것보다 개인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 서사를 제시한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상 속에도 이렇게 다양한 감정의 파편들이 녹아 있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에 나는 매료가 된 게 아닐까. 개인이 하나의 우주라면 그 우주에 담긴 이야기들은 얼마나 다양하고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지 말이다. 억지스럽지 않은 설정에, 조지라는 개인의 일상에 변화무쌍한 감정을 투영한 점도 마음에 들었다. 조심스레 한발자국 들어가 한 꺼풀만 더 벗기면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튀어나오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6년 전에 중고서점에서 2,900원을 주고 산 <싱글맨>은 그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읽을 판이다. 아니 점심마다 즐기는 아이스 라떼 한잔 값보다도 싸지 않은가. 읽어도 읽어도 질리지 않고 새로운 무언가를 퍼올리기에 <싱글맨>만한 책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의 인생책 가운데 하나로 꼽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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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5-09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계신 건 구판인가 봅니다. 언제고 신간 한번 사셔야겠네요. 신간이 중고샵에서 발견되면 순삭-ㅋ

레삭매냐 2023-05-09 10:09   좋아요 1 | URL
제가 신간이 나왔을 적에 역자라도
다르다면 사들일라고 생각도 해보
았으나... 역자가 같아서 패스했답니다 ^^

도대체 역서에 실린 ˝오호통재라˝ 그리고
˝도장왈짜˝의 원어는 어떤 표현인지 너무
궁금합니다.

바람돌이 2023-05-09 1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이 마르고 닳도록 읽는 책이라니... 이건 찐보증아닙니까? ^^
저도 일단 보관함에 킵합니다.

레삭매냐 2023-05-09 20:04   좋아요 1 | URL
책이라는 것이 워낙에 편차가
있다 보니...

바람돌이님께서도 부디 좋아
하시면 좋겠습니다 ^^

빨강앙마 2023-05-11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레삭매냐님이 그리도 애정하시는 책이란 말씀이세요? 오오오오오.... 제목만 어렴풋하게 들어봤었는데 급 호감이 생기네요.. ^^ 저도 이런 책 한권쯤 있었음 하네요.. 재독한 책이 진짜 다섯손가락안에도 못드는 판국이니..

레삭매냐 2023-05-12 23:09   좋아요 0 | URL
굳이 이탈로 칼비노 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책은 고저 모름지기 ‘다시‘
읽는 것이라는 주자의 사실에
방점이 찍히지 않나 뭐 그런 생
각을 해보게 됩니다.

페크pek0501 2023-05-14 17: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900원 오!!! 행운을 잡으셨네요!!!

레삭매냐 2023-05-14 22:47   좋아요 1 | URL
별다방 라떼가 오천원이니
정말 싸다고 생각됩니다.

얄라알라 2023-06-08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레삭매냐님!!!^^
30000원 적립금 이야기를 여기서 하긴 뭐하지만, 페크님께서도 2900원 행운 이야기를 하시니^^

따블 행운이십니다. 축하드려요~~
 
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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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다. 한겨레문학상 14회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14년 만에 다시 책이 나왔다. 보통 책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곤 하는데, 문득 재밌는 책이 읽고 싶어졌다. 호모 부커스의 직감으로 이 책이 재밌을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이럴 때, 책쟁이는 즐겁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과는 세 번째 만남이었다. <열외인종 잔혹사>라는 다소 알쏭달쏭한 제목의 이 책의 저자는 주원규 씨라고 한다. 그의 이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신학을 전공한 목사님이라는 점이었다. 과연 소설 쓰는 목사님이 문학이라는 가상의 시공간 속에서 어떤 스토리텔링을 펼쳐 보여 줄지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기대에 부풀었다.

 

<열외인종 잔혹사>1124일이라는 특정한 날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다. 그리고 네 명의 주요 인물들을 시간의 흐름의 구성에 내맡긴다. 월남 파병군 출신으로 연금생활자이자 극우 보수논객을 자처하는 장영달 옹이 첫번째 타자로 등장을 한다. 일흔 살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소위 좌빨척결을 지상과제로 삼는 범상치 않은 캐릭터다. 요즘 말하는 태극기 부대의 원형 같은 인물이라고나 할까. 평상복처럼 걸치는 군복이 그렇게 잘 어울린다고. 두 번째 주인공의 이름은 윤마리아. ‘이태백세대의 전형으로 외국계 제약회사에 3개월째 식대와 교통비조차 지급받지 못한 채 인턴에서 정규직 채용이 되기 위해 착취당하고 있다.

 

세 번째 인물은 노숙생활 5년차의 김중혁이다.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물로, 동료 광록과 함께 무료급식소 그리고 쓰레기통 사냥에 나선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린 캐릭터인 기무. 노랑머리(이제 노랑머리는 좀 진부하지 않은가)17살 청소년으로 장영달 옹의 말을 빌리자면 싸가지는 애시당초에 발톱의 때처럼 생각하지도 않는 무적(無籍) 청소년의 표상이다. 우연한 기회에 피씨방에서 보게 된 온라인 게임 이벤트에 뛰어 들었다가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 자본주의 심장 코엑스몰에서 펼쳐지는 상상을 초월한 카니발의 세계로 초대받게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이들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철저하게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들만을 골라서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작가의 픽업에 탄복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디 삶과 행동들이 궁상맞다고 해서, 그들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들도 저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시점에 주원규 작가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오래 전 유행하던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공간이동을 시도한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마콘도가 있었다면, <열외인종 잔혹사>에는 서울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 심장이자 타지마할(나름 참신한 표현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메카라는 표현만 할까 과연?) 코엑스몰로 이 화려한 캐릭터들을 긁어모은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각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고, 친절한 분석에 그럴싸한 개연성마저 확보하는데 성공한 작가는 이제 본격적인 무대인 코엑스몰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전반부가 21세기 대한민국의 리얼리즘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 중심이었다면, 코엑스몰로 대변되는 후반부는 십헤드 카니발(sheep head carnival) 다시 말해 양머리들이 총을 들고 다수의 인질들을 잡고, 총기난사가 벌어지는 공간이 중심이 된다. 그나마 전반부를 지탱해오던 사실주의 블랙유머와 냉소들은 공간이동을 하면서 혼돈 그 자체로 진화한다. 도대체 양머리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왜 그런 난장판을 벌이는지 판단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어쩌면 그것조차도 작가의 철저한 계산 아래 준비된 것일까?

 

각각 1부와 2부로 나뉜 <열외인종 잔혹사>의 서사구조는 참 경이롭다. 우선 책의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1부에서는 코엑스몰로 주인공들이 모이기까지 5분이나 10분 단위의 시간의 흐름의 서술구조를 선보인다. 딱 두 번 5분과 10분이 아닌 시간이 등장하는데, 한 번 찾아보시라 나름 재미가 있다. 물론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휘리릭 다 읽은 책의 책장 넘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2부에서는 작가 시점의 서사에 중점을 둔다. 이런 구조는 마치 다른 두 권의 책을 읽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대로 혼란스럽다면 그 또한 글쓴이의 트릭에 빠진 것이겠지만.

 

작가가 구사하는 냉소적이면서도 설명조의 작법은 예전에 다시 읽었던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연상이 되었다.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가 신파조의 설명을 곁들이는 그런 개입이 느껴졌다고 해야할까? 물론 거북살스럽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오히려 지독한재미가 느껴졌다. 어쩌면 하급문화에 대한 로망이라고 해야할까? 작가의 대리인들인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상스러운 육두문자들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다.

 

참 왜 작가는 2부의 주무대를 최악의 도시서울의 그 많은 장소 중에서 유독 코엑스몰로 정했을까? 그건 아마도 그 공간이야말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심장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닐까? 아니면 소설의 어느 부분에선가 나온 것처럼, 모든 이들이 차 없이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수단으로 액세스가 가능하다는 이동을 위한 편리의 발현이었을까? 어쨌건 실제로 그렇게 많은 인파들이 몰리는 코엑스몰에서 상상을 초월한 양머리 카니발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확실히 <열외인종 잔혹사>는 지독하게 재밌다. 동시에 민주주의가 역주행을 감행하고, 빈부의 격차해소는 요원해 보이기만 하고, 변변한 일자리를 찾는 건 정말 백사장에서 바늘찾기 보다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현실 속의 처절한 리얼리즘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인 패러디가 여기저기 아주 절절하게 배어 있다. (발표 당시) 신예작가라 그런지 결말 부분이 좀 아쉽긴 했지만, 기발한 상상력의 현현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직 읽어 보시지 않았다면 말을 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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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4-21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다가 결말 부분이 아쉬울 때 진짜 아쉽죠.^^

레삭매냐 2023-04-29 09:51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렇죠 !!!

마무리를 잘 짓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