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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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읽어야 하는 책을 읽게 된다. 작년 겨울에 사둔 책을 네그리타가 만개한 봄에 읽는다. 자전적 에세이 <사나운 애착>을 통해 스스로를 공부벌레, 문학소녀 그리고 페미니스트로 규정한 해방된 작가 비비언 고닉을 처음 읽었다. 뉴욕 브롱스의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내력이 <사나운 애착>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무엇이 작가의 글을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책에 매달려 있는 3일 동안, 책으로 전자책으로 그야말로 책을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읽었다. 퇴근길 버스에서 전자책으로 만나는 비비언 고닉의 일화들이 어찌나 재밌었는지 모른다. 책이 발표된 건, 1987년으로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이다. 아니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 아닌가. 오십줄에 들어선 작가는 자신보다 훨씬 연세가 드신 어머니가 맨해튼으로 브롱스로 그리고 윌리엄스버그로 계속해서 공간이동을 하며 자신의 과거를 속삭인다.

 

일단 아버지를 46세에 잃은 어머니와는 그야말로 징글징글한 애증의 관계다. 나도 살아 보니,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사람이 보통 원수가 되더라. 자주 안보는 사람과는 원수가 될 일이 없다. 그 사람의 삶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작가와 어머니 같은 경우는 너무 붙어 있어서, 다른 가족도 아닌 유대인 이민자 가정이니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다른 나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가정에는 대부분 회고록에 담을 만한 이야기들이 차고 넘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가 괴로워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추모하는 장면을 작가는 냉정하게 드라마퀸의 연기라고 평가한다. 나치 부역자 처벌에 나선 검사 역할을 맡은 어머니는 훗날 시티칼리지에 진학해서 새로운 삶이 영역에 들어선 딸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넘어서는 안될 선을 무시로 뛰어넘는다. 이들 사이에서 말폭탄으로 유혈사태에 가까운 사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하지 않을까. 실제로 물리적 충돌도 불사하는 어머니였다.

 

세대 간의 전쟁은 선택이 아닌 디폴트였다. 석사 학위까지 딴 딸의 유식함에 질린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그래, 나는 무식하지만 그동안 살아온 체험으로 지난 300년 간의 연애소설에 대해 지식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딸과의 토론을 일축해 버린다. 동시에 자신은 그러지 못했지만 해방구 시티칼리지에서 자주적인 생각과 토론하는 법 그리고 새로운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한 딸의 성공을 아낌 없이 축하해 주기도 한다. 자고로 그런 법이다, 가족이란 관계는. 반세기를 뛰어넘는 애증의 세월에 대한 비비언 고닉이 구사하는 변증이라고 해야할까.

 

24세에 금발의 외국인 화가가 비비언 고닉은 어머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순결고수 경찰을 자처한 어머니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 그전에 해방된 여성이자 자주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거듭난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바로 이웃집 과부 네티 러바인이었다. 남편이 어이 없이 죽고 난 다음, 비유대인 여성이었던 네티는 브롱스의 게토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는 선택을 했다.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발산했고, 무수한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 중에는 교구 신부도 있었다고 했던가.

 

네티는 남성우월주의적 시선이 넘실거리던 1950년대 미국의 가부장적 프레임 속에서 비비언이 매력적인 오브제로 거듭날 수 있는 스킬을 전수해준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해방된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수해 나간다. 아니 그리고 보니 밀레니엄 세대에 태어나 나는 달라 달라를 외치던 어느 걸그룹의 데뷔곡 가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공부벌레에서 문학소녀 그리고 페미니스트로 진화를 거듭하던 작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두 인물을 에세이 속으로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 네티 러바인 여사와 어머니가 될 것이다.

 

다시 결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카산드라를 자처했던 어머니의 예언대로 금발의 외국인 화가와는 애시당초 맞지 않는 결혼이었다. 떠들썩한 유대식 가정 결혼식부터 어쩌면 파국은 예정되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캘리포니아에서 나름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기세 좋게 출발한 스테판과의 결혼은 5년 만에 박살이 났다. 이걸 자아의 충돌로 해석해야 할까? 아니면 서로 너무나 다른 두 개의 행성 간에 교집합의 부재로 보아야 할까? 타인을 이해해야 하고, 나를 죽여야 한다는 결혼 생활의 타협을 이십대의 고닉은 어디서고 배우지 못했던 게 아니었는지. 아니면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결혼생활을 너무나 이상화시킨 어머니가 안겨준 PTSD 혹은 트라우마 같은 무언가가 작동한 결과는 아니었는지.

 

그후 고닉은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이웃집 소년 데이비 러빈슨 그리고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 유부남 좌파 노동운동가 조 더빈이라는 작자들과 더불어 허기와 욕망으로 가득한 관계를 갖기도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된 데이비는 사회복지사였다 다시 18세기에나 등장할 법한 정통 유대교 랍비로 변신을 거듭한다. 뻔뻔한 유부남 조 더빈에게는 가스라이팅을 당하기도 한다. 남자들은 모두 쓰레기지만, 그래도 한 놈 정도는 필요하다고 세라 이모가 그랬던가, 어머니가 그러셨던가. 일찍이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아니 에르노가 자기는 자신이 경험한 것들만 글로 쓴다고 했는데, 그전에 앞서 몸소 실천한 해방된 여성이 바로 비비언 고닉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은 뉴욕이라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브롱스 토박이 비비언 고닉은 이혼하고 다시 브롱스로 복귀해서 빌리지 보이스 기자활동을 하면서 세상을 두루 주유했다. 평생 여행이라고는 고작해봐야 가족들과 뉴욕 인근 동네만 다닌 어머니와는 시각차가 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두 모녀는 그야말로 다시는 보지 않을 각오로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동시에 로어이스트사이드와 하우스턴가를 누비며, 커피는 자고로 연하게 끓여야 한다 아니다 진하게 끓여야 한다로 옥신각신한다. 바로 이런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이 바로 뉴욕이다.

 

, 어디선가 만난 외로움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그렇지 외로움은 누구에게 의지해서 풀어낸 게 아니라 스스로 해결해야지. 아니 그런 외로움 해결에 대한 의존적 태도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더군다나 작가처럼 뉴욕이라는 밀레니엄 캐피탈에서 누릴 수 있었던 숱한 문화적 혜택들이 있었다면 더더욱 말이다. 모두가 가고 싶다고 해서 휘트니미술관 전시를 보러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나도 방문했던 MoMA와 저 멀리서 궁륭형 지붕이 보였을 때, 염통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구겐하임 뮤지엄이 보고 싶다고 해서 내일이라도 당장 보러 갈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비비언 고닉은 직사각형에 자주적인 인간으로 거듭난 자신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사납게(fierce) 투쟁했다. 모두의 삶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와중에 아버지를 상실한 열패감부터 시작해서 죽은 부군을 따라겠다고 무덤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연출하는 어머니, 쓰레기 같은 놈들과의 순수하고 강렬한 성적 욕망, 숱하게 남자들이 꼬이는 이웃의 매력적인 젊은 과부 네티 등과의 다양한 애착들(attachments)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삶이라는 투쟁 속에서 발생한 이런 소소한 애착들이 하나둘 모여 나라는 존재가 이루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애착들을 걷어내고 난 뒤에 남은 건, 과연 무엇일까.

 

[뱀다리] 역시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가 아닐 수 없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통해 조지 기싱의 <짝 없는 여자들>과 버나드 맬러머드의 <수선공>(무려 퓰리처 수상작!)이라는 책들의 존재를 알게 됐다. 후자는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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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3-03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할거리가 너무 많아서 전 리뷰를 못쓰겠어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니까 글로 적기가 힘드네요
애증의 모녀관계는 많은 상처를 남깁니다^^
독서가 이리 즐겁다니...
독서에 올인하게 만드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도 우리 엄마라는게 아이러니예요^^
레삭매냐님, 즐겁게 읽으시는 모습 눈에 보일듯 했어요~~

레삭매냐 2023-03-03 14:10   좋아요 1 | URL
저도 책 읽으면서 A4 사이즈
노트 네바닥에 메모를 했는데
다 써먹지도 못했네요 ㅠㅠ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요 ~

비비언 고닉의 다른 책들도
만나 보고 싶습니다.

페넬로페 2023-03-03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녀는 애증의 관계가 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카산드라를 자처했다니 완전 그러네요.
이 책 도착해 있는데 저도 빨리 읽어야겠어요^^

레삭매냐 2023-03-03 17:59   좋아요 2 | URL
저자 - 어머니 그리고 네티
의 애증의 트라이앵글이
정말 흥미진진했답니다.

넘모 재밌어서 후딱 읽게
되었네요. 다른 책도 어서~

미미 2023-03-03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 초반부 읽다 말았는데 오늘 저도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아 진짜 재밌네요^^*

레삭매냐 2023-03-03 21:08   좋아요 2 | URL
저는 지난 12월에 사서 아예
펴 보지도 않고 있다가 이번
에 읽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읽을 수가 있었
답니다. 너무 재미지구요.

레알 굿입니다!

자목련 2023-03-04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은 좋아요!
저도 이제 읽으려고요^^

레삭매냐 2023-03-05 16:07   좋아요 0 | URL
비비언 고닉, 짱입니다 -

전 어제 새로 산 다른 고닉
여사의 책도 읽고 있답니다.

빠이팅, 응원합니다.

바람돌이 2023-03-04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이제 배송받았는데 책의 판형이 작고 그리 두껍지 않아서 읽기 어렵지 않겠구나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읽으신 분들은 진짜 할말이 이렇게 많다고 하니 점점 기대가 됩니다. ^^

레삭매냐 2023-03-05 16:26   좋아요 1 | URL
아주 재미져서 술술술~
그렇게 넘어간답니다.

새로 나온 책도 읽어 보려
고 한답니다.

이 책에 대한 다양한 이야
기들, 기대해 봅니다.

얄라알라 2023-03-06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사각형에 자주적인 인간...
아, 정말 레삭매냐님께서 ‘언젠가는 읽게 될 책‘을 유혹하시는 문장이 말입니다 ㅋㅋ고단수이십니다.

네그리타가 만개한 봄!
사진 또 새로 올려주시면 하고 조용히 부탁 아닌 부탁을^^

저는 봄 맞아 애니시다 큰 아이로 데려왔는데 한 달도 안 되어서.....그냥 초록만 남았어요^^:;;

레삭매냐 2023-03-06 12:04   좋아요 1 | URL
저는 또 애니시다는 무언가 하고
검색해 봤지 뭡니까 파닥파닥 ~

노랑노랑하 꽃들이 아주 예뻐
보이더라구요. 역시 식물의 세계
는 무궁무진한가 봅니다.

아시는 분이 시흥 모처에 있다
는 희귀 식물 가게 나들이 포스
팅을 해주셨는데 저도 한 번
가보고 싶더라구요 헷 :>

네그리타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답니다. 어제 사진에 담았어
야 했는데 까비요.

책쟁이-리뷰어에게 최고의 상찬
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자목련 2023-03-10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빠 돌아가시고 슬픔에 잠식된 엄마를 보는 일은 너무 괴로울 것 같습니다. 고닉처럼 어찌 이렇게 잘 풀어내셨을까요. 좋았던 만큼 리뷰 쓰기는 어려운 책이었어요. 고닉이 매력적인 작가라는 건 분명하고요! 멋진 글 잘 일었습니다^^*

레삭매냐 2023-03-11 11: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누군가의 죽음은 특히나 부모님
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것 같
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슬픔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물론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