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등학생 때 금붕어를 키운 적이 있다. 한 마리의 금붕어가 어항 속에서 헤엄치며 노는 것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먹이를 주려고 먹이가 든 내 손을 어항 위로 가까이 대면 금붕어는 먹이를 먹기 위해 위로 쏙 올라오곤 해서 먹이를 주는 재미도 있었다. 어째서 한 마리뿐이었는지 그 이유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가 한 마리만 준 것인지, 아니면 몇 마리를 샀는데 다 죽고 한 마리만 남았는지 기억이 없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지금부터 말하려는 사건이다. (누구나 지난 일에 대해선 인상적인 부분만 기억하는 법이다.)


한 마리가 어항 속에 갇혀 있는 것을 보니 금붕어가 심심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김새와 크기가 비슷한 것으로 금붕어 한 마리를 더 사서 그 어항에 넣어 주었다. 둘이 친구처럼 의지하며 즐겁게 놀라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내가 키우던 금붕어가 새로 사 온 금붕어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키우던 금붕어가 입으로 새 금붕어의 몸을 쪼고 있는 것 같았고, 그럴 때마다 새 금붕어는 도망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람이고 그들은 금붕어니까. 혹시 둘이 장난치며 노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며칠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뒤, 새 금붕어가 물 위에 떠서 움직이지 않았고 물은 뿌옇게 변해 있었다. 죽은 것이다. 둘이 즐겁게 장난친 게 아니라 괴롭게 전쟁을 치르고 새 금붕어가 패배하여 죽은 것이다. 아마 한쪽에서의 일방적인 전쟁이었을 것이다.


난 이 일에 충격을 받았다. 죽은 금붕어를 땅 속에 묻어 주고 나니 기분도 우울했다. 그리고 동료 금붕어를 죽인 그 금붕어를 더 이상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정이 떨어졌고 무서웠다. 그 뒤로는 더 이상 금붕어를 키우는 취미가 없어져 버렸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예상한 것과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일으킨 그 금붕어에 관한 것이다. 홀로 있는 게 심심할까 봐 내 딴엔 생각해서 새 금붕어를 넣어 주었는데 새 금붕어를 죽임으로써 오히려 홀로 남는 것을 택한 그 마음 작동의 이유가 궁금하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적’으로 알고 그랬을까. 먹이를 나눠 먹어야 하는 경쟁자로 알고 그랬을까. 일종의 텃세였을까. 그 이유를 금붕어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 모를 일이다.


사람들 중에도 그 금붕어처럼 나의 예상과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친절을 베푼 나의 말에 상대가 불쾌감을 표명하는 사람들을 본다. 어째서 그들은 내가 예측하던 것과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하는 것일까. 서로 삶의 역사가 달라서일까, 세계관이 달라서일까.


이런 생각 끝에 나의 삶을 돌아본다. 나 역시 분명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보여 상대를 실망하게 만들거나 상처를 준 적이 있을 것이다.


2.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내가 의도한 바와 다른 방향으로 상대가 마음 작동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때 그렇다. 그럴 때 상대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려는 태도와 상대에 대해 관찰하는 태도가 내게 필요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것과 관련하여 강신주 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는 눈여겨볼 만한 이런 글들이 있다.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 인간 자신, 세계 그리고 우주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주장의 기초입니다. 관찰자의 소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각하고, 말하고, 기술하고, 설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강신주 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특히 그(비트겐슈타인)가 혐오했던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함부로 말하는 인간의 허영이나 과시욕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의 속내에 대해 당사자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함부로 이야기하고 있는가?


- 강신주 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맥락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 규칙을 따른다. ~ 문제는 같은 언어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 발생하기 쉽다. 겉으로는 유사해 보이지만 그들은 지역, 가족, 학교, 전공 등등에 의해 나의 문맥과는 일치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욕쟁이 할머니의 식당에서 느끼기 쉬운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어떤 삶의 문맥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섬세하게 읽어내야 한다.


- 강신주 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 강신주 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사람마다 세상을 읽는 문법이 다르고 사유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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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9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2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2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1-08-22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을 하나하나 꼼꼼히 다 읽어 보셨다는 분이 있어 떨리네요.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비교적 나은 글도 있고 꽤 후진 글도 있을 겁니다. 사실 그 후진 글들을 삭제하고 싶었으나 그냥 두었습니다. 너무 잘난 사람은 매력이 없는 법. 추천수가 0인 글도 가끔 써야죠. ^^^
 


단상(19)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유 외


1.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유


요즘 가장 관심 있게 읽는 책은 심리학 분야의 책이다. 인간을 이해하게 만드는 책에 흥미를 느껴서다. 인간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서다. 알아도 안다고 할 수 없는 게 인간이란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인간을 알기 위한 공부는 끝이 없을 것 같다. (혹시 심리학을 공부하고 나면 내 글에 심리학적 관점에서 쓴 부분의 글도 출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이번 달에 구입한 책은 심리학책은 아니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이다. 일본의 드라마 작가이면서 소설가인 무코다 구니코가 쓴 책으로 ‘유쾌한 인간관찰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인간관찰기’라는 말에 끌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일본 최고의 드라마 작가께선 인간에 대해 얼마나 예리한 통찰력을 가졌는지가 궁금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다. 그래서 구입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것은 이 부분. 



다른 강아지나 고양이를 데리고 즐겁게 놀고 난 뒤면 나를 맞이하는 우리 집 고양이에게 좀 미안한 기분이 들어, 좋아하는 마른 멸치를 평소보다 두세 마리 더 주기도 한다.


‘인생, 가는 곳마다 바람기 있음’이 아닐까?


백화점에서 살 마음도 별로 없는 옷을 입어보는 것도 일종의 바람피우기이다. 인스턴트 라면이나 세제를 다른 상표로 바꿔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마다 광고라는 것이 주부에게 바람피우기를 권한다.


이런 사소한 바람을 피우면서 우리는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하루하루 생활의 근심을 잊는다. 미니 사이즈의 바람피우기인 것이다. 그 덕분에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게 아닐까?


- 무코다 구니코 저,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 159쪽~160쪽.





이 글에 따르면,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통해 바람을 피우고 있는 셈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데이트를 하고 임어당과 데이트를 하고 알랭 드 보통과 데이트를 하고….


어느 특정한 연예인에 열광하며 광팬을 자처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과의 데이트를 맘속으로 즐기며 가짜 바람을 피우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예전에 ‘배용준’ 배우를 보기 위해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방문한 일본 주부들은 배용준 배우와의 데이트를 맘속으로 즐기며 그들의 남편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바람피우기’란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배우자 또는 연인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는 것과 같다고.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그 무엇이 있다구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책이 있다구요.”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연예인이 있다구요.”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강아지가 있다구요.”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명품 쇼핑이 있다구요.”


무코다 구니코에 의하면, 그 덕분에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배우자 또는 연인은 그런 바람피우기의 대상에 대해 불쾌하기보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다른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을지라도 진짜 바람피우기가 아니라면 말리지 말 일이다.



2. 나는 울 만큼 원하는 게 있을까




아직 이십대를 넘지 않아 보이는 청바지 차림의 엄마 손에 이끌려 매장을 나서는 중이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아이의) 얼굴은 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비통한 표정이었고, 좀처럼 울음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그 아이는 뭘 갖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지금, 소리 내어 울 만큼 원하는 게 있을까?


- 무코다 구니코 저,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 50쪽~51쪽.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한 번쯤은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어서 울어 본 적이 있으리라. 나는 피아노를 갖고 싶어서 운 적이 있다. 절실하게 갖고 싶었다. 조르고 조르다가 나중에 내 방에 피아노를 들여 놓던 날,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피아노가 배달되기 전날 밤엔 흥분되어 잠을 설칠 정도였다. 피아노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요즘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런 절실함을 느끼지 못한 채 성장하는 것 같다. 오히려 부모들이 나서서 피아노를 사 주고 핸드폰을 사 주는 게 요즘의 추세이기 때문이다. 또 냉장고엔 먹을거리가 잔뜩 들어 있다. 그 예전 작은 사탕 하나에도 행복해 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한 세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아이들이 그 옛날의 아이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무엇을 갖기 위해 울어 본 적이 없는 아이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많았고, 걱정거리가 없었으며, 사람들 간에 갈등이나 분쟁이 없었다. 기후는 늘 알맞았고 환경은 쾌적하였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은 그곳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 이 천국에서 나가게 해 주십시오. 제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발 제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이유는 간단했다. 천국에서의 생활이 권태로웠기 때문이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바로 ‘권태’였다. 권태야말로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근심이 있고 고민이 있고 행복과 불행이 섞여 있는 세상이 그리워졌다.


울 만큼 원하는 게 있는 사람은 최소한 권태롭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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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나는 지금, 소리 내어 울 만큼 원하는 게 있을까?”(51쪽)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지금 소리 내어 울 만큼 원하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 울고 싶은 정도라는 건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을 절실히 원하는 것을 의미하리라.


그러다가 한 가지 생각해 냈다. 울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통찰력을 갖는 것임을.


작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글을 쓸 땐 잘 쓰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가수가 아니더라도 노래를 부를 땐(노래방에서든 어디서든) 잘 부르고 싶은 것과 같다. 노래를 부르는 건 즐기기 위해서지만 막상 노래를 부를 땐 잘 부르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건 즐기기 위해서지만 막상 글을 쓸 땐 잘 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글을 잘 쓰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문장력과 통찰력이다. 글의 형식이 좋으려면 문장력이 필요하고, 글의 내용이 좋으려면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장력보다 갖기 어려운 게 통찰력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좋은 글을 만난다는 것은 필자의 통찰력을 마주하는 일이다.


나를 포함해 글쟁이들이 제일 듣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닐까.


“당신의 글을 보니 통찰력이 대단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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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코다 구니코의 다른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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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011-07-26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지금 간절히 원하는 건 문장력과 통찰력 둘다 입니다.

페크pek0501 2011-07-27 00:57   좋아요 0 | URL
와우, 반가워요. 겸손의 말씀이시군요.ㅋ

어떤 때는 좋은 문장력을 발견하는 재미로 책을 읽을 때가 있어요.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이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김수영 시인)
라는 구절이 생각나요.
이 간단한 구절이 맘에 들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07-2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어린이나 청소년이 불행한 것은 놀거나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그들의 부모세대는 그래도 방학에 쉬기도 했는데 요즘은 방학 때도 학교 가서 공부해야 하고...그들이야 쉬고 싶겠죠.부모들이 닦달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요.

페크pek0501 2011-07-27 18:02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요즘 아이들이 물질적 혜택은 많지만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고생인 것 같네요.

좋은 댓글에 감사 드립니다.

반가웠어요. ㅋ
 


단상(18) 그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면


어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생각나는 것으로 상대에게 선물 공세로 환심을 사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효과도 안심할 수 없다. 상대가 선물을 준 ‘사람’이 아닌 선물로 준 ‘그것’만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듯하다. 돈도 들지 않고 효과도 만점인 것.


러셀에게서 답을 구했다.




특별히 예쁘거나 뛰어나지 않더라도 사랑 받는 방법은 만나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의식적인 아부는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최선의 방법은 그들과 어울리는 순간을 즐기고, 무엇보다 그들이 과시하는 능력을 즐기는 것이다. - 346쪽. 

-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에서.




러셀에 의하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은 ‘상대가 과시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그 시간을 함께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 연인에게 열광했던, 또는 현재 열광하는, 또는 미래에 열광할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하는 것 같다. 가족이나 친구보다 연인에게 열광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연인이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멋지게 봐 줌으로써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임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일 것 같아서.



예를 들면 나는 그녀의 두 앞니 사이의 틈을 이상적인 배열로부터의 불쾌한 일탈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치아의 완벽성을 독창적으로 그리고 사랑할 가치가 있는 방식으로 재배치한 것으로 보았다. 나는 그녀의 치아 사이의 틈에 그냥 무심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예뻐했다. - 128쪽.


그것의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 150쪽.


- 알랭 드 보통 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의 눈엔 결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두 앞니 사이의 틈’에서도 독창성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게 바로 연인의 눈이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을 최대한으로 아름답게 봐 주는 그 ‘연인’이 그렇지 않은 무심한 ‘친구’에 비해 좋아지는 건 당연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에 이런 게 있다.




아까 내가 마치 모욕 받은 계집처럼 네 앞에서 그만 눈물을 흘렸다는 것, 그것 때문에라도 나는 영원히 너를 원망할 거야! 또 지금 너한테 이런 걸 고백하고 있다는 것, 이것 때문에라도 나는 영원히 너를 미워할 거다! 그렇다, 너는 이런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네가 공교롭게 그런 순간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 185쪽.

-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이 남자는 계집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여자를 원망하겠다고 한다. 하필 이러한 때에 그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미는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모습만을 보게 해 주고 싶었던 상대가 자신의 가장 추한 모습을 우연히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목격이라 할지라도 남자는 화가 난다. 누구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본 사람을 싫어하고 자신을 근사한 모습으로 봐 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추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땐 모른 척하고 지나갈 일이다.)


TV 드라마에서 딴 여자와 연애하는 남편의 단골 대사로 등장하는 말이 있다.


“그 여자는 나를 남자로 느끼게 해 줘.”


이 말은, “그 여자는 남자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던 나를 남자로 느끼게 해 줘.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남자로 말이야.”라는 말과 같다. 그러니 아내와 함께 있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게 행복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살고 싶다는 마음의 표출인 셈이다. 결국 자신을 잘 봐 주는 이가 좋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무조건 그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그 상대가 가진 매력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똑같은 조건 하에서라면 자신에 대해 호감을 나타내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똑같은 정도로 매력적인 두 사람이 있다면 그중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다. 우월감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므로.


이런 예를 들어 본다.


만약 자신이 중학교 때의 성적은 상위권에 속하는데, 고등학교 때의 성적은 하위권에 속한다면 어느 동창회에 가길 좋아할까. 그 두 동창회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있다면 어디로 발길을 돌릴까.  

답은 뻔하다. 중학교 동창회에 갈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다 우월하게 보이는 자리를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 행복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인정해 주지 않는 친구보다 인정해 주는 친구를 좋아하나 보다.  

결론은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면, 상대가 이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 것.


‘너를 만나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 같아.’

.................................................................



<후기>


여러 책을 읽다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같은 내용을 표현만 다르게 쓴 글이 많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다르지만 내용이 많이 중복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웬만큼 독서를 해 본 사람은 ‘거기서 거기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폼 나게 표현하면 ‘하늘 아래 새로울 게 하나도 없다. 같은 내용에 대해 다양한 변주가 있을 뿐이다.’가 된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미처 알지 못한 걸 생각해 냈다. 나를 따르는 후배 몇이 있는데, 내가 그들을 예뻐하는 가장 큰 이유를 알아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만날 때마다 나를 좋게 봐 주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이 ‘선배님과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아요.’하는 얼굴이라고 여겨질 때 내게서 아름다운 빛이 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기에 그들을 좋아함을 알았다.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뭐든지 다 알고 계시는군요.’하는 듯한 얼굴로 보는 학생들을 내가 좋아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독서를 ‘내면으로의 여행’, ‘나를 읽는 행위’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다.

................................................................



<이 글과 관련한 책>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

알랭 드 보통 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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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7-1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며 음, 음, 음, 하며 감탄을 탄복하며 읽었습니다. ^^ 지금 제 상황에 딱 맞는 리뷰이어서요. 크게 깨달아 우주의 지평이 열리는 기분입니다. ㅋㅋㅋ

저도 놀러왔어요. 이런 좋은 글을 보다니 오늘은 무척이나 상쾌한 날이네요. 헤헤 노신 선생을 좋아하신다는 방명록에 자극 받아 노신 선생의 리뷰를 쓸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

읽고 또 읽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페크pek0501 2011-07-19 15:18   좋아요 0 | URL
'탄복하며...'라는 말은 듣기 좋은 새콤달콤한 말입니다. 새콤달콤해지는군요. 고맙습니다.

참, 루쉰이라는 아이디를 잘 지으신 것 같아요. 제가 루쉰의 팬이라서 들르게 되었으니까요. 저도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좋아하는 작가 이름으로 아이디를 짓는 건데...ㅋㅋ 꼭 루쉰의 분신 같거든요.

좋은 리뷰 쓰시길 기원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7-20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사람은 남자로만 혹은 여자로만 살면 불륜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부모로,남편이나 아내로 살고 있기도 하다는 점을 자각해야 하는데...그래도 능수능란한 도사들에게 걸리면 해답이 없죠.

페크pek0501 2011-07-21 13:57   좋아요 0 | URL
결혼제도가 있어서 딴 길로 새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맞아요. 결혼제도가 아내나 남편,또는 부모의 자리를 갖게 함으로써 질서를 갖게 하죠.

"그래도 능수능란한 도사들에게 걸리면 해답이 없죠." - 이 말도 맞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이성이 아니라 정열이다(임어당의 말)."의 경우가 분명 있으니까요.

반가웠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1-07-22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3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3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4 0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상(17)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있다


1. 인간은 정확한 대답을 할 줄 모른다


내가 어떤 말을 하고 난 뒤에 그 말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따져 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친구의 모임에 늦게 도착한 내게 친구가 왜 늦었냐고 물었던 날에 내가 한 대답이 과연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이런 대답을 했다. “차가 많이 밀렸어.”


그런데 실제로는 차는 조금만 밀렸고, 다른 이유로 늦었다. 전날 밤, 샤워를 하고 잤으므로 그 다음날 아침 외출준비를 할 땐 샤워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청소기를 돌리고 나니 땀이 나서 샤워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머리를 말리고 손질하느라 늦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의 내 대답은 “청소기를 돌리고 나니 땀이 났고 시계를 보니깐 사워를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 샤워했는데, 머리 말리고 손질하느라 늦었어.”라고 해야 진실이며 정확한 대답이다. 그런데 난 차가 밀렸다는 핑계를 대어서 나의 잘못을 ‘차가 밀린 도로 사정’의 탓으로 돌린 셈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그렇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차가 밀렸다고 말한 이유가 꼭 내게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길게 대답하기보다 짧게 편히 말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다.


어느 날 고등어 두 마리를 사서 조림을 했다. 갈치를 좋아하는 아이가 식탁에 앉으면서, 왜 하필 고등어 반찬이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등 푸른 생선이 몸에 좋으니까 사 왔지.”였지만 사실은 고등어가 세일을 하고 있어서 사 왔던 것이다. 이것도 세일을 해서 사 왔다는 것보다 몸에 좋아서 사 왔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말했다기보다 그냥 생각난 대로 편히 말한 것에 불과하다.

나중에 돌아보면 왜 그렇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어려운 걸까, 하고 의아해진다. 그래서 다음부턴 진실만을 말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는데, 또 진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같은 실수를 하고 만다. 잘못 대답함으로써 어떤 때는 내게 이롭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게 불리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 나를 통해 조금씩 ‘인간’을 알아가고 있는데, 나를 포함해 인간은 정확한 대답을 할 줄 모른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그 옷을 왜 구입했냐는 물음에 대해 백 퍼센트의 진실로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왜 좋아하냐는 물음에 대해 백 퍼센트의 진실로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까. 좋아하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을 왜 좋아하냐는 물음에 대해 백 퍼센트의 진실로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나는 할 수가 없습니다.”이다. 물음에 꼭 알맞은 정확한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만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아, 그땐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어. 잘못 말했어.’라고. 이럴 때마다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필립 그레이브스 저, <소비자학?>에서 저자는 “설문조사처럼 경영자들과 마케터들이 의지하는 전통적인 시장조사 활동은 지난 50년간 산업 전반에 쓸데없는 혼란만 가져왔으며 쓸모없는 것이라고 비판한다.”(조선일보, 2011. 7. 9-10.) 이에 따르면 “기업에서 실시하는 시장조사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의식적인 활동인 데 반해 소비자의 구매 행동 대부분은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일 경우가 많다. 시장조사의 질문이 적절하고 소비자들도 성실히 이에 답한다 할지라도, 자신(소비자)이 미래에 행할 소비행위를 예언하듯 답할 재주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는 책들을 읽은 적이 있다.


2.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 책


생활 속에서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있다는 걸 자주 경험하게 되는데, 책에서도 그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장하준 저,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이런 글이 있다. “우리에게 참된 희망을 주는 것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대다수가 탐욕스럽지도 않고 편협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 때는, 그 일로 엄청난 물질적 이득을 얻는다거나, 그 일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순응주의자가 되는 편이 훨씬 쉽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잘못된 정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대부분의 정치가들과 신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으면 될 텐데, 왜 굳이 먼 길을 돌아다니며 ‘불편한 진실’을 찾아다니겠는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부정부패와 게으름, 혹은 방탕함 탓으로 돌리면 쉬운데, 왜 굳이 가난한 나라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신경 쓰겠는가?”


장하준 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저자는 세계 경제의 재건을 위해 경제 시스템을 재설계하려 할 때 지켜야 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 중 하나가 인간의 합리성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는 인식 위에서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면 우리의 객관적 사고 능력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2008년 우리의 경제 시스템이 붕괴한 것은 복잡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근본적으로 무한하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시스템이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하준 저자의 글을 읽으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도 인간에 대한 통찰은 필수임을 인식하게 된다. 사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 그 어떠한 일일지라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먼저 이해해야 함은 당연하다. 인간이 관계하지 않는 세상일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임어당도 경제학 분야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이런 글을 썼다. “마르크스가 계산에서 빠뜨린 것은 영국인 및 미국인의 인간적 요인이었다. 또는 양국인의 일하는 방법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모든 미숙한 경제학의 커다란 맹점은 국민적 문제의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있는 일종의 불가능한 요인을 탐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생활의 발견>, 144쪽, 범우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는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아감으로써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가장 무관심한 게 ‘인간에 대한 이해’인 것 같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것도 그 밑바탕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고 타인을 알고 인간의 공통된 심리와 각각의 특색을 아는 일에 공부가 필요하다. 혹시 우리는 자신이 바로 인간이기에 따로 인간에 대한 공부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지각’ 부족을 지적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할 때, 외적인 힘에 의해 확실하게 강제되지 않는 한, 그들의 결정은 그들 자신의 것이며, 무엇인가를 바랄 때 그렇게 바라는 것 또한 자기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자기 자신에 대한 커다란 환상의 하나이다. 우리 결정의 대부분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암시되는 어떤 것이다. 결정을 내린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을 수는 있어도, 실제로 인간의 결정 행위는 인간이 두려운 고립감이나 생명, 자유, 안락함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내몰렸을 때 타인의 기대에 보조를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자유로부터의 도피>, 168쪽, 홍신문화사)     

  

이 글을 읽으며 핸드폰을 떠올렸다. 핸드폰이 처음 출현할 때부터 난 구입하고 싶지 않았다. 불편한 족쇄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다. 또 친구의 모임에서도 수시로 울리는 누군가의 핸드폰도 싫었다. 얘기를 하는 중에 그 벨소리로 대화가 끊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핸드폰을 사지 않겠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생겼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내게 핸드폰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불평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불평을 듣고서야 할 수 없이 뒤늦게 핸드폰을 구입하게 되었다. 내가 사고 싶어서 산 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영향 때문에 산 셈이며, 타인의 기대에 보조를 맞춘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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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


필립 그레이브스 저, <소비자학?>

장하준 저,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

에리히 프롬 저, <자유로부터의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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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07-1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어느 블로그에 들어갔더니“인간은 그 개성에 맞는 사건을 만나게 마련”이라는 말이 있다 - 라는 구절이 있었다. 읽는 순간 이 문장에 반해 버렸다.

이 글에 쓴 '인간은 정확한 대답을 할 줄 모른다'라는 생각을 내가 한 것도 딱 내 개성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 대한 관찰을 즐기는 나의 개성.

"인간은 그 개성에 맞는 사건을 만나게 마련" - 이 구절로 나중에 칼럼을 쓰고 싶다. 소설 속에서 이 구절에 알맞는 인물들 몇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생긴대로 산다'가 되지 않을까.^^^

신지 2011-07-13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도 뭔가 댓글을 쓰려다가 말았습니다. 저로서는 pek님 글이 늘 공감되고 이해가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댓글을 쓰려면 항상 '제대로 말하기'가 어려워서요. "인간은 정확한 대답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구나, 싶습니다(!).^^ 인용하시는 부분들도 참 좋습니다~

페크pek0501 2011-07-13 12: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ㅋ

저 역시 여러 블로그를 돌아다니는데, 댓글 쓰는 것 쉽지 않아요. 제가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죠. (그것을 읽는)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라는 걸, 잘 알기에...

칼럼이나 단상의 글을 쓸 때도 글쓰기가 자신의 내면을 자신도 모르게 다 보여 주는 일 같아서 부담을 느낄 때가 많아요. 뷔퐁의 말대로 "문체란 곧 그 사람"이니까요.

저는 삶을 좀 마음 가볍게 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고민, 고뇌 없이), 글 쓸 때만은 무거워져요. 그래서 진지해져요. 아마 글 쓸 때가 가장 진지한 것 같아요. 삶은 그냥 대충 삽니다. 마치 간이역에 잠깐 내린 승객처럼요. 장례식장에 가 보면 느껴져요. 이 세상은 잠깐 머물다 가는 간이역과 같다는 것을...

반가웠습니다.

아, 제 블로그에서는 편하게 댓글 써도 됩니다. 인간은 정확한 대답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제가 이해하는 사람이므로...^^^


신지 2011-07-13 14:46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여러 블로그를 돌아다니는데, 댓글 쓰는 것 쉽지 않아요. 제가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죠.

ㅡ> 아,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어요 ㅜ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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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그냥 대충 삽니다. 마치 간이역에 잠깐 내린 승객처럼요.

ㅡ> 이것도 비슷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삶은) 저는 좀 소극적이고, 사회적인 욕심이 그다지 없는 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는 건강하지 못하다거나, 좋지 않은 성격으로 보는데^^ 전 저의 그 점이 마음에 들어요.





페크pek0501 2011-07-13 21:16   좋아요 0 | URL
"(삶은) 저는 좀 소극적이고, 사회적인 욕심이 그다지 없는 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는 건강하지 못하다거나, 좋지 않은 성격으로 보는데^^ 전 저의 그 점이 마음에 들어요." - 저와 많이 비슷하시군요. 욕심이 많지 않은 것 아닙니까?

제가 만약 피자집을 운영한다면 쏟아지는 주문을 어느 정도 선에서 끊어내고 문 닫고 조용히 앉아 시를 읽으며 휴식을 즐길 것 같습니다. 이걸로 저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합니다.

가끔 엄마에게 듣는 말, "넌 왜 그리 욕심이 없니?, 그러니 발전도 없지..."입니다. ㅋ 근데 전 그런 제가 좋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7-1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하준 씨 글을 보니 '용기의 반대말은 순응'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인습이나 고정관념 등에 순응하는 보통사람들과의 투쟁이 거대권력과 투쟁하는 것보다 더 힘들죠.

페크pek0501 2011-07-13 21:11   좋아요 0 | URL
새 손님이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용기의 반대말은 순응' - 이라는 말은 명언 같은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인습이나 고정관념 등에 순응하는 보통사람들과의 투쟁이 거대권력과 투쟁하는 것보다 더 힘들죠." - 동의합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ㅋ

노이에자이트 2011-07-14 17:41   좋아요 0 | URL
서로서로 배워가는 거죠.

페크pek0501 2011-07-15 00:45   좋아요 0 | URL
예 예 예!!!!!!!!

꼬마요정 2011-07-14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하준 씨 정말 좋아해요~^^

글이 너무 멋져서 저도 댓글을 달려고 하니.. 음.. 모르겠습니다.^^;;

횡설수설하는 게 제 개성인가봐요.. 무슨 말을 하다가도 삼천포로 빠지거나 주절주절 하거든요..ㅠㅠ

어쨌든, 멋집니다!!

페크pek0501 2011-07-15 00:45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접수하겠습니다.

횡설수설, 저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횡설수설이란 제목으로 글 쓰려던 적이 있어요.^^^ 인간적인 글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단상(16) 사치의 행복과 무소유의 행복과 즐김의 행복


1.

사치의 행복 : 가끔은 사치하고 싶다


<사치와 문명>이란 신간이 나왔다. 이 책은 동서고금 문명을 ‘사치’라는 키워드로 분석한 것으로, “사치는 유용성에 앞서고, 인간적이며, 필수적이며 영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치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류 문명 발전의 견인차라고 주장하는 책이다(조선일보, 2011. 6. 11.). 사치가 없다면 세상 발전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 책장에서 찾아보았더니 마광수 저, <자유에의 용기>라는 책에 ‘사치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었다. 이 글에 의하면 사치욕구의 발로가 여가의 증대와 맞물려 ‘일할 의욕’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소비의 미덕’으로 이어져 유통의 발달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민중들은 그들이 영원히 ‘민중’으로만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신분상승을 이룩해 ‘귀족’이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대중적 귀족의 출현을 인정하고 대중적 사치를 인정하는 사회는 경제발전의 속도가 빠른 반면, 민중들을 계속 검약(儉約)과 절제의 윤리로만 순치(馴致)시키는 사회는 경제가 침체될 수밖에 없다. 사치스럽고 귀족적인 소비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구조 속에서는 일반 대중들이 땀 흘려 일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소련이나 동유럽국가들의 경제가 붕괴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마광수 저, <자유에의 용기>에서.


 

사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두 권의 책이 반가웠다. 내가 사치로 인해 부끄럽게 여겨졌던 일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 관리’를 몇 번 받으러 다닌 일이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와 발의 피로를 느끼던 때에 그 광고지를 보게 되어 가게 되었다. 지압과 마사지로 발의 피로를 풀어 줌으로써 몸의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 주어 건강하게 해 준다는 광고 문구가 꽤 유혹적이었던 것. ‘발 관리’를 받기 위해선 한꺼번에 돈을 내고 회원가입을 해야 했다. 이것은 내 생활수준에 비추어 보면 ‘사치’에 속한다. 평소엔 검소한 편이지만 가끔은 이런 사치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알뜰하기만 한 삶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문을 통해 대학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하는 학생들에 대한 기사를 보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방송을 볼 때면 나의 ‘발 관리’의 사치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돈이 없어 불행한 삶을 사는데 나는 하지 않아도 될 ‘발 관리’를 받으러 다니는 사치나 누리며 살고 있다니,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사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이 두 권의 책을 보니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 같은 세상은 물론 위험하다. 하지만 그것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되고 나면 더 이상 일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된다면 더 이상의 경제발전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삶의 질적 향상도 없을 것이다. 훗날 부자가 되어 사치하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게 한다. 고급 자동차와 외제 골프채를 갖고 싶은 욕구, 멋진 호텔 같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구, 세계여행을 하고 싶은 욕구, ‘발 관리’나 ‘얼굴 마사지’와 같은 서비스를 받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사는 게 좀 싱겁지 않겠는가.


때로는 사치에 대한 욕구가 생활의 활력을 주리라. 물론 지나친 사치라면 독이 되겠지만.



2.

무소유의 행복 : 버림으로써 행복하다


많이 가질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교통난과 주차난이 심각한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 중에는 자동차를 가지고 외출해서 불편했던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때로는 자동차를 소유함으로써 행복한 게 아니라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행복할 때가 있다.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기르던 분이 계셨다. 그 분은 그 난초를 위해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그러던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그분은 외출 중에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음을 알고 문득 난초가 생각났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외출했던 것이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그때 그 분은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난초를 안겨 주었다. 비로소 그 분은 얽매임에서 벗어나서 날 듯 홀가분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 분이 법정 스님이시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 법정 저, <무소유>에서.




무소유의 행복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사치의 행복보다 무소유의 행복이 더 좋은 이유는 사치의 행복이 자신 혼자의 행복인 것에 반해 무소유의 행복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무소유의 행복은 자기만이 아닌, 우리들 모두의 행복을 지향한다. 

 

3.

즐김의 행복 : 행복은 즐기는 것이다


사치의 행복은 이웃을 생각할 때 마음이 불편해지는 행복이다. 이웃에게 미안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사치의 행복으로 늘 만족하기란 불가능하다.


무소유의 행복은 정신 수양을 필요로 할 만큼 쉽게 갖지 못할 행복이다.


내가 갖고 싶은 행복은 ‘즐김의 행복’이다. 현재를 즐기며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아무런 즐거움 없이 현재를 참고 견디며 사는 것에 반대한다. 예를 들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절약하며 저축을 하는 삶을 살더라도 현재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하는 사람은 세 번 향락한다고 한다. 노동 자체에서, 노동의 결실에서, 그리고 노동한 뒤의 휴식에서.


연예인들 중에는 정상에 올랐던 위치에서 인기가 떨어져 아래로 추락하면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연예인뿐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노동의 결실만을 중요시해서 일의 결과에 따라 행복과 불행 사이를 오간다.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다면 우리 삶이 덜 외롭고 덜 불행할 텐데.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공자) 이것은 곧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뜻도 된다. 이처럼 공자도 즐기는 상태를 최고의 경지로 봤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든 그 시간을 즐기는 게 행복의 비결. 우선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하겠다. 구두쇠가 불행한 이유도 즐기지 못해서라고 한다. “구두쇠들은 가진 것을 결코 즐기지 못하고 잃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플루타르코스)


논어에 이런 글이 있다.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복습하는 것은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벗들이 먼 곳에서 오는 것은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논어)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에는 ‘행복한 한때’가 어떤 때인지를 알게 해 주는 글이 있다.  
 

 



 

  


 

  



예를 들어 내 경우라면 참으로 행복한 한때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잠을 푹 자고 나서 아침에 깨어 새벽 공기를 마시면 폐가 부풀대로 부푼다. 그러면 마음껏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 싶어져서 가슴 근처의 피부나 근육에 기분 좋은 운동의 감각이 일어난다. 따라서 일도 할 수 있겠다는 그런 한때. 손에 파이프를 들고 의자에 발을 뻗고 있으면 담배 연기가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그런 한때.


여름 여행길에서 목이 탄다. 아름답고 깨끗한 샘이 있어서 물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구두와 양말을 벗어버리고는 펑펑 솟아오르는 그 얼음 같이 찬 물 속에다 발을 담그는 그런 한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뒤에 안락의자에 턱 기대앉는다. 같이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서로 꼭 맞는 사람들뿐. 흥겨운 청담(淸談)이 꼬리를 물고 경쾌하게 자꾸만 흘러나온다. 몸도 마음도 이처럼 천하태평스런 한때.


어느 여름날 오후, 지평선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한 15분만 있으면 초여름의 소낙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비를 맞고 싶은데, 우산을 안 들고 비오는 데 나가기도 어색하다. 그래서 급히 벌판 한가운데로 뛰어나가서 소낙비를 맞고는 흠뻑 젖어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 사람들에게는, 뭘 비 좀 맞았는데… 하는 한때.


-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에서.



나도 임어당의 글을 흉내 내어 다음과 같이 써 보았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거리의 사람들은 재빠르게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 풍경을, 나는 비 한 방울 맞지 않는 집에서 창문을 통해 내다본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어떤 책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게 만든다. 궁금해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까지 책을 읽고 나서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난다. 이런 게으른 자유의 행복이 얼마만이냐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건강을 위해서도, 몸 관리를 위해서도, 기분전환을 위해서도 운동은 필요하다. 땀 흘려 운동을 하고 난 뒤 흠뻑 젖은 몸으로 샤워를 한다. 우선 얼음물 같은 찬물로 여러 번 얼굴을 적시며 ‘아, 시원하다’라는 느낌을 즐기고 난 뒤에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한다. 샤워를 마치고 나면 갈증이 난다. 이럴 때 냉장고에서 꺼내 시원한 물을 들이킨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외출하기 전,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내 모습을 아이에게 보이며 “나 어때?”라고 묻는다. 아이는 “그냥 사십대 아줌마 같지 뭐.”라고 답한다. 나이는 못 속이는 모양.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해 주었더니 친구들이 일제히 까르르 웃는다. 한 친구가 묻는다. “넌 어떤 말이 듣고 싶었는데?” 나는 답한다. “아가씨 같다는 말.” 이 얘기를 듣자 또한번 친구들이 일제히 까르르 웃는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즐기려고 마음먹으면 실제로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 많아진다.  



요즘 장마철이다. 비가 와서 습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비가 와서 공기가 상쾌함을 즐기자. 행복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의 것이 아니므로. 행복은 그것을 느끼는 자의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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