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19)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유 외


1.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유


요즘 가장 관심 있게 읽는 책은 심리학 분야의 책이다. 인간을 이해하게 만드는 책에 흥미를 느껴서다. 인간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서다. 알아도 안다고 할 수 없는 게 인간이란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인간을 알기 위한 공부는 끝이 없을 것 같다. (혹시 심리학을 공부하고 나면 내 글에 심리학적 관점에서 쓴 부분의 글도 출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이번 달에 구입한 책은 심리학책은 아니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이다. 일본의 드라마 작가이면서 소설가인 무코다 구니코가 쓴 책으로 ‘유쾌한 인간관찰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인간관찰기’라는 말에 끌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일본 최고의 드라마 작가께선 인간에 대해 얼마나 예리한 통찰력을 가졌는지가 궁금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다. 그래서 구입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것은 이 부분. 



다른 강아지나 고양이를 데리고 즐겁게 놀고 난 뒤면 나를 맞이하는 우리 집 고양이에게 좀 미안한 기분이 들어, 좋아하는 마른 멸치를 평소보다 두세 마리 더 주기도 한다.


‘인생, 가는 곳마다 바람기 있음’이 아닐까?


백화점에서 살 마음도 별로 없는 옷을 입어보는 것도 일종의 바람피우기이다. 인스턴트 라면이나 세제를 다른 상표로 바꿔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마다 광고라는 것이 주부에게 바람피우기를 권한다.


이런 사소한 바람을 피우면서 우리는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하루하루 생활의 근심을 잊는다. 미니 사이즈의 바람피우기인 것이다. 그 덕분에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게 아닐까?


- 무코다 구니코 저,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 159쪽~160쪽.





이 글에 따르면,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통해 바람을 피우고 있는 셈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데이트를 하고 임어당과 데이트를 하고 알랭 드 보통과 데이트를 하고….


어느 특정한 연예인에 열광하며 광팬을 자처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과의 데이트를 맘속으로 즐기며 가짜 바람을 피우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예전에 ‘배용준’ 배우를 보기 위해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방문한 일본 주부들은 배용준 배우와의 데이트를 맘속으로 즐기며 그들의 남편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바람피우기’란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배우자 또는 연인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는 것과 같다고.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그 무엇이 있다구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책이 있다구요.”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연예인이 있다구요.”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강아지가 있다구요.”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명품 쇼핑이 있다구요.”


무코다 구니코에 의하면, 그 덕분에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배우자 또는 연인은 그런 바람피우기의 대상에 대해 불쾌하기보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다른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을지라도 진짜 바람피우기가 아니라면 말리지 말 일이다.



2. 나는 울 만큼 원하는 게 있을까




아직 이십대를 넘지 않아 보이는 청바지 차림의 엄마 손에 이끌려 매장을 나서는 중이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아이의) 얼굴은 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비통한 표정이었고, 좀처럼 울음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그 아이는 뭘 갖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지금, 소리 내어 울 만큼 원하는 게 있을까?


- 무코다 구니코 저,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 50쪽~51쪽.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한 번쯤은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어서 울어 본 적이 있으리라. 나는 피아노를 갖고 싶어서 운 적이 있다. 절실하게 갖고 싶었다. 조르고 조르다가 나중에 내 방에 피아노를 들여 놓던 날,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피아노가 배달되기 전날 밤엔 흥분되어 잠을 설칠 정도였다. 피아노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요즘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런 절실함을 느끼지 못한 채 성장하는 것 같다. 오히려 부모들이 나서서 피아노를 사 주고 핸드폰을 사 주는 게 요즘의 추세이기 때문이다. 또 냉장고엔 먹을거리가 잔뜩 들어 있다. 그 예전 작은 사탕 하나에도 행복해 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한 세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아이들이 그 옛날의 아이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무엇을 갖기 위해 울어 본 적이 없는 아이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많았고, 걱정거리가 없었으며, 사람들 간에 갈등이나 분쟁이 없었다. 기후는 늘 알맞았고 환경은 쾌적하였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은 그곳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 이 천국에서 나가게 해 주십시오. 제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발 제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이유는 간단했다. 천국에서의 생활이 권태로웠기 때문이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바로 ‘권태’였다. 권태야말로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근심이 있고 고민이 있고 행복과 불행이 섞여 있는 세상이 그리워졌다.


울 만큼 원하는 게 있는 사람은 최소한 권태롭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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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나는 지금, 소리 내어 울 만큼 원하는 게 있을까?”(51쪽)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지금 소리 내어 울 만큼 원하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 울고 싶은 정도라는 건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을 절실히 원하는 것을 의미하리라.


그러다가 한 가지 생각해 냈다. 울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통찰력을 갖는 것임을.


작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글을 쓸 땐 잘 쓰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가수가 아니더라도 노래를 부를 땐(노래방에서든 어디서든) 잘 부르고 싶은 것과 같다. 노래를 부르는 건 즐기기 위해서지만 막상 노래를 부를 땐 잘 부르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건 즐기기 위해서지만 막상 글을 쓸 땐 잘 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글을 잘 쓰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문장력과 통찰력이다. 글의 형식이 좋으려면 문장력이 필요하고, 글의 내용이 좋으려면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장력보다 갖기 어려운 게 통찰력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좋은 글을 만난다는 것은 필자의 통찰력을 마주하는 일이다.


나를 포함해 글쟁이들이 제일 듣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닐까.


“당신의 글을 보니 통찰력이 대단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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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코다 구니코의 다른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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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011-07-26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지금 간절히 원하는 건 문장력과 통찰력 둘다 입니다.

페크pek0501 2011-07-27 00:57   좋아요 0 | URL
와우, 반가워요. 겸손의 말씀이시군요.ㅋ

어떤 때는 좋은 문장력을 발견하는 재미로 책을 읽을 때가 있어요.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이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김수영 시인)
라는 구절이 생각나요.
이 간단한 구절이 맘에 들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07-2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어린이나 청소년이 불행한 것은 놀거나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그들의 부모세대는 그래도 방학에 쉬기도 했는데 요즘은 방학 때도 학교 가서 공부해야 하고...그들이야 쉬고 싶겠죠.부모들이 닦달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요.

페크pek0501 2011-07-27 18:02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요즘 아이들이 물질적 혜택은 많지만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고생인 것 같네요.

좋은 댓글에 감사 드립니다.

반가웠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