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15) 어른이 된다는 것 외  


1.

어른이 된다는 것


인간의 고독을 알기 시작하면 어른이 된 것이다.

비가 오는 걸 좋아하게 되면 어른이 된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는 게 흥미 없어지면 어른이 된 것이다.

라면을 먹는 게 싫어지면 어른이 된 것이다.

병원 주사가 무섭지 않게 되면 어른이 된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어른이 된 것이다.

타인의 약점을 포용할 수 있으면 어른이 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생기면 어른이 된 것이다…. 또 뭐가 있을까.


홍은희 저, <삶의 시간들>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인간의 기본감각을 구성하는 것은 시각, 촉각, 청각, 미각, 후각이다. 젖비린내가 가시고 사내냄새가 나는 것만으로 어른이 다 됐다고 하기엔 미흡하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변화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나는 오감의 변화를 거쳐 마지막으로 어른을 완성하게 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마음씀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따금씩 얼굴을 마주하는 먼 곳에 있는 이들보다도 늘 서로 부대끼며 사는 이들을 배려할 수 있어야 비로소 어른이 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홍은희 저, <삶의 시간들>에서.




이 글에 따르면 어른이 되는 시점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생길 때라고 한다. 내가 생각할 땐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객관적으로 보며 의식할 수 있어야 어른인 것 같다. 예를 들면 화가 날 때, 자신의 감정에만 취해 화를 낼 게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헤아리며 감정을 자제할 줄 알아야 어른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사람은 아마 커피숍에서 혼자 누군가를 기다릴 때조차도 누가 봐도 아름답도록 좋은 모습을 연출할 것이다. 마치 거울 앞에 있는 것처럼 ‘자기 점검’을 할 것이다.  

어른이 되기 어렵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는 알고 살아야겠다. 각자가 바람직한 어른이 될 수 있는 기준 하나는 가져야겠다. 어른다운 어른이 되기 위해서. 
 

2.

그의 1%의 단점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 유난히 단점이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처음엔 잘 몰랐던 어떤 점이 언제부턴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그것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99%의 좋은 점마저 없애 버리는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바로 그 1%의 단점이.
  

그 1%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 이렇게 예를 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다 좋은데 그 1%의 단점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만약 만날 때마다 꼭 한 번 이상의 거짓말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친구로서 만날 수 있을까. 또 어떤 사람은 다 좋은데 그 1%의 단점이 험담을 하는 것이다. 만약 만날 때마다 꼭 한 번 이상의 험담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친구로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다 좋은데 그 1%의 단점이 잘난 척을 하는 것이다. 만약 만날 때마다 꼭 한 번 이상의 잘난 척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친구로서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성격적 단점을 얼굴의 점으로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두 남녀가 만나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 얼굴에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 그것을 발견했을 때 그 점은 개미보다 작아 보였으며 그 점이 있어도 그녀는 그 남자가 좋았다. 한 마디로 그녀는 그 점이 그 남자의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감정도 변해서 어느 시점부터 그 점이 점점 크게 보이더니 급기야 개미보다 작았던 점이 오백 원짜리 동전 크기로 보이면서 보기 싫어졌다. 그의 1%의 단점이 그의 99%의 좋은 점을 다 덮어 버렸다. 그녀는 남자를 만날 때마나 자신의 변심 때문에 괴로웠다. 결국 그녀는 그와 결별했다. 

 
이럴 경우 그녀는 그 남자가 상처를 받을 게 가엾어서 싫어도 억지로 참고 만나야 할까. 결별한 그녀에게 우리는 마음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 1%의 단점이 그 나머지 99%를 무색하게 하는 이런 상황에 우리는 이별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론 단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완벽한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자꾸 어떤 단점이 눈에 띄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우리는 그 상대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단점을 고치라고 충고를 할 수도 없다. 사람의 어떤 점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려 그것을 없애는 게 쉽지 않다. 오히려 충고함으로써 그 상대의 기분만 상하게 할 가능성이 많다. 결국 어떤 단점이 크게 거슬리기 시작하면 그 인간관계는 끝장나고 마는 게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나에게도 물론 단점이 있다. 그런데 알면서도 고쳐지질 않는다. 그 이유를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찾았다. ‘인간이란 언제 어디서든 이성이나 이익이 명령하는 것에 따르기보다는 하고 싶은 짓을 제멋대로 하고 싶어 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참 공감 가는 말이다.   




인간이 추악한 짓을 하는 것은 오직 자기의 참 이익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은 대체 누구인가? ~ 아아, 이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가! ~ 인간이란 자기의 참된 이익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밀어젖히고 아무에게도 아무것에도 강제되고 있지 않은데도 다른 모험의 길로 돌진하는 법이다. ~ 다름 아니라, 인간이란 언제 어디서든 이성이나 이익이 명령하는 것에 따르기보다는 하고 싶은 짓을 제멋대로 하고 싶어 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설사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대되더라도 하고 싶은 걸 어쩌겠는가. -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그런데 아까 말한, 그녀와 헤어진 그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답은 간단하다. 그 점을 큰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여자를 만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분명히 있다. 짚신도 아름답게 봐 주는 이가 있는 법이니까. 연인관계에서도, 친구관계에서도.  

3.

어떤 신문을 구독할 것인가

 

내가 구독하는 신문은 안티팬이 많이 있는 신문이다. 안티팬들은 이 신문을 보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어느 신문을 보냐고 물으면 신문의 이름을 말하기가 부담스럽다. 그래서 다른 신문으로 바꿀까를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냥 보기로 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이 신문의 편집방식에 익숙한 나로서는 다른 신문을 보는 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신문은 자주 새로운 변화를 꾀하며 도전하는 정신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며 만들어 가는, 볼거리가 풍성한 신문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셋째, 이 이유가 제일 중요한데, 사설을 읽으면 나와 생각이 다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생각이 같은 신문을 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의 차이를 경험함으로써 사고의 균형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경영학의 대가 톰 피터스는 말했다. “두 사람이 업무에 대해 항상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불필요한 사람이다.” 신문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와 생각이 같은 신문은 불필요한 신문이다.


(만약 같은 사안에 대해서 다른 신문의 반응이 궁금해지면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4.

읽은 책 중에서 인상적인 글


R. M. 릴케 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외롭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외로움이란 어렵기 때문이죠. 그것이 어렵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외로워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외로움에도 가치가 있음을 안다면 외로운 시간에 위로가 될 것 같다.


R. M. 릴케 저, <아름다운 여인들에게>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행복하고 충만한 처지에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진지하고 깊이 인식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삶에도 그 나름대로 불행으로 인한 이득이 있음을 안다면 삶의 위안이 될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값싼 행복과 고결한 고민과 과연 어느 쪽이 좋을까?”


이 글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사색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답을 쉽게 얻을 수 없을 것 같다. 고결한 것은 좋아하지만 값싼 행복을 물리칠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자신의 삶이 아니라 자식들의 삶을 생각해 본다면 답은 쉽게 나온다. 자식들이 고결한 고민 따위는 하지 말고 값싼 행복에 만족하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마음고생을 하는 건 싫기 때문이다 품위와 품격은 좋아하지만 그 무엇보다 행복이 우선 아닐까. 


5. 

아직 미래가 남아 있다

 

또 여름이다. 이번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왜 그리 여름은 빨리 오는지 모르겠다. 작년 여름이 석 달 전쯤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1년이라니. 시간에 바퀴가 달린 것만 같다. 그 바퀴가 이젠 두렵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늦여름이다. 늦여름은 지루하던 더위가 끝나서 아침과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간지럽게 해서 좋다. 8월 말이나 9월 초의 날씨가 그렇다. 그런 날 해질 무렵에 산책을 하고 싶다. 더위를 무사히 넘긴 자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걸을 수 있는 늦여름.

언제 이 여름이 가려나. 내 마음은 벌써부터 늦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만족하는 현재를 살고 있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겐 아직 미래가 남아 있다.


“당신은 어떤 미래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기다리는 것이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는 날입니까, 회사에서 승진하는 날입니까, 책 내는 날입니까, 사랑하는 이와 만나는 날입니까, 다이어트가 성공하는 날입니까,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입니까,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날입니까, 남에게 꿔 준 돈을 받을 날입니까, 아니면 실컷 웃는 날을 기다립니까?”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기다림을 갖고 있을 것이다. 미래를 향해 우리가 기다림을 갖는 것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이 미래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상(14) 애인, 친구, 책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면


1. 애인, 친구, 책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면


얼마 전, ‘세바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맞히는 퀴즈가 있었다. 그 중 재밌는 퀴즈가 있었는데, ‘평생 애인 없이 살기’와 ‘평생 친구 없이 살기’ 중에서 어떤 것을 사람들이 선택하는지를 알아맞히는 것이었다. 답은 ‘평생 애인 없이 살기’였다. 조사한 사람들 중 70% 이상의 사람들이 애인보다 친구를 더 중요시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마도 애인에 비해서 친구가 더 자신에게 잘 해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 같다. 애인과 싸우거나 결별할 때 또는 외로울 때 위로를 해 주는 것은 친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렇게 아는 게 아닐까. 애인은 가끔씩 적대적인 관계에 있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애인은 늘 내 편일 수 없다는 것을.


만약 사람들에게 애인, 친구, 그리고 한 가지 더 넣어 책, 이렇게 세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떻게 될까. ‘평생 애인 없이 살기’, ‘평생 친구 없이 살기’, ‘평생 책 없이 살기’ 중에서 가장 끔찍할 것 같은 인생을 고르라면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다. 이 중에서 ‘평생 책 없이 살기’가 가장 끔찍할 것 같다는 사람도 꽤 있을 듯하다. 나도 여기에 속한다. 책이 없는 세상은 살맛이 나지 않는 세상이 될 것 같다.



애인은?

애인이 있어서 좋은 점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쁨과 달콤한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쁜 점은 상대에 대한 의무가 따른다는 점이다. 연애를 하면 언제든 상대가 불러내면 아무리 외출이 귀찮은 날에도 만나러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혹시라도 나가지 않으면 상대는 섭섭해 하거나 화를 낼 것이다. 또 생일 같이 특별한 날은 꼭 챙겨 줘야 하고, 아플 땐 더 마음을 써 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 물론 사랑에 빠지면 그런 의무를 다하는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통계에 의하면 오래 사귈수록 달콤한 설렘도 점점 퇴색한다고 하니, 오래 사귀면 애인으로 인해 귀찮게 여겨지는 일이 생길 듯하다. 결국 둘 중 더 좋아하는 쪽이 있기 마련이고, 더 성의 없는 쪽이 있기 마련이어서, 한쪽은 화를 내고 다른 한쪽은 화를 풀어 줘야 하는 관계가 되기 쉽다. 혹자는 ‘연애’하면 떠오르는 게 ‘스트레스’라고 했다. 아마 가장 많이 싸우는 인간관계가 연인관계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시에 주는 게 애인이란 존재가 아닐까.

친구는?

친구는 애인에 비해 기쁨을 덜 주지만 스트레스도 덜 준다. 애인에 비해 서로 관심이 적기 때문이다. 관심이 적어서 싸울 일도 많지 않다. 친구의 좋은 점은 늘 그 자리에 있어 준다는 점이다. 애인은 한동안 만나지 않으면 저절로 이별이 되지만 친구는 소원하게 지내다가도 언제든 만나면 예전의 친숙했던 친구관계로 돌아가게 된다. 단점은 무관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구보다는 애인이나 가족을 더 챙기기 때문에 섭섭할 때가 많이 생긴다.

책은?

그러면 책은 어떠한가. 애인이나 친구를 만나는 일과 비교하면 책을 만나는 일엔 의무도 없고 섭섭함도 없다. 그저 새로운 책을 대할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이 생길 뿐이다. 싫증이 날 새도 없이 새 책은 매일 쏟아져 나와 설렘이 이어진다. 한번 책의 달콤한 열매를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자연히 책의 세계로 빠져 들게 된다. 독서만큼 값이 싸면서도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없으며(몽테뉴), 독서하는 사람은 참된 벗, 친절한 충고자, 유쾌한 반려자, 충실한 위안자가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M. T. 바로).



책으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자질

나에게 재능이 있다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자질이다. 나에게 그 자질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에 속한다. 책을 읽으면 어떠한 잡념도 사라지고 곧장 몰입하게 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길 것이다. 행복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해 시기하지 않고 너그러워진다는 점이다. 시기심이란 자기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므로,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공연히 시기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행복한 독서광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돈 많은 친구를 만나면, “넌 부자가 되거라, 난 책으로 행복할 테니.”라고 생각하고, 옷을 멋지게 잘 입는 친구를 만나면, “넌 멋쟁이가 되거라, 난 책으로 행복할 테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만약 ‘부자인 것’과 ‘책이 주는 행복’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독서광들은 아마 ‘책이 주는 행복’을 택할 것이다. ‘멋쟁이인 것’과 ‘책이 주는 행복’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역시 ‘책이 주는 행복’을 택할 것이다.


책은 참 잘생겼다고 느낀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볼 때면 또는 책이 방바닥에 쌓여 있는 것을 볼 때면 나는 그것의 잘생긴 외양에 감탄하곤 한다. 이보다 더 잘생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전자책의 출현으로 인해 종이책의 종말을 논한다고 해도 한 장 한 장 넘기는 종이의 질감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러셀에 의하면 독서의 두 가지 동기는 독서를 즐기는 것과 읽은 책에 관해 자랑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미 책에 매료된 사람은 즐거움을 얻으면서 동시에 자랑거리를 갖게 하는 책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2. 이달에 구입하고 싶은 책


<아렌트 읽기>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제자가 쓴 것으로,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3단계로 나누어 조명한 책이라고 한다. 그동안 여러 책에서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는 글을 많이 읽어 온 나로서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한 권의 책으로 그의 저작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정신의 삶>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아 구입하고 싶다.



나치 시대 독일의 공무원이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어떻게 태연히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을까? 이상주의적 신념을 가진 소시민을 살인기계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세기적 비극의 기원을 '생각 없음'에서 찾았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가장 뛰어난 제자이자 독보적인 아렌트 전기를 썼던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이 스승의 사상을 차근히 짚어간 아렌트 해설서이다. 

아렌트 사상을 크게 3단계로 나누어 확장되고 전개되는 사상의 궤적을 파악해내고 있다. 정치의 파괴부터 정치의 회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아렌트의 주요 저작 3종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정신의 삶>을 꼼꼼히 읽어내며 이 사상의 흐름을 통해 현대 세계의 정치 상황들, 이라크전쟁이나 일본의 역사왜곡 등의 민감한 사안들을 조명하고 있다. - <책 소개, 알라딘에서 발췌>


 

<한나 아렌트의 저작들>
  

 

 

 

 

 

 

3. 책과 관련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

새 책의 빳빳한 질감을 느끼는 것,

책에서 외우고 싶을 만큼 좋은 구절을 발견하여 연필로 밑줄을 긋는 것,

책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것,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할 책을 고르는 것,

반값 세일의 책을 구입하는 것,

집에 배달된 책의 포장지를 뜯는 것,

책의 첫장을 펼치는 것,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그 다음에 읽을 책을 책장에서 고르는 것,

찌개가 끓는 동안 식탁에서 시집을 뒤적이는 것,

여행을 떠나는 날에 가방에 넣을 책으로 무엇이 좋을지 생각하는 것,

밖에 비가 오고 있음을 느끼며 책을 읽는 것,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책을 읽는 것,

독서노트를 사러 문구점에 가는 것,

독서광인 친구를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내가 알고 있는 책 정보를 누군가가 묻는 것,

책에 대한 정보가 많은 블로그에 들어가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 :

책 보다가 잠든 뒤에 전화벨 소리를 듣게 되는 것,

창문으로부터 들이친 비에 책이 젖는 것,

책이 구겨지는 것,

내가 아끼는 책을 누군가가 빌려 달라고 하는 것,

한참 재밌게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외출할 일이 생기는 것,

아끼던 책이 오래되어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는 것,

책 읽으며 안구건조증이 느껴지는 것,

전자책의 편리성을 알리며 종이책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신문기사를 보는 것,

불황으로 문을 닫게 된 출판사나 서점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상(13) 책을 통해 본, 인간의 욕망이 낳은 것들


1.


김윤희 저, <이완용 평전>이란 신간이 나왔다. 저자가 이완용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책이어서 그를 그저 매국노로만 알던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게 해 줄 것 같다. 매국노로 살았던 그의 삶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저자는 “이완용은 그저 ‘매국노’로서가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할 줄 모르는’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호명하는 가치에 호응할 줄 모르는’ 인물로서 비판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조선일보, 2011. 5. 28.).


이 책에서 새로 밝혀낸 것에 대해 저자는 “그의 생활은 탐욕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대 제2의 갑부였지만 생활은 대체로 검소했다. 취미도 붓글씨에 문방사우 수집 정도였다. 돈 버는 것에 대해 창피해 하지 않아 직접 채소 농사에 투자해서 돈을 벌어보이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신문을 통해 이 책의 소개에 대한 글을 읽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 누군가의 전부가 아니라 그저 일부일 수 있다는 것. 더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나쁜 점은 우리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일 수 있다는 것. 예를 들면,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공통점이 아니던가.


쇼펜하우어 저, <사랑은 없다>에는 이런 글이 있다.




누구에게나 ‘우주의 멸망과 자신의 멸망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어보아라.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심지어는 전쟁이 일어나 국가에 존망의 위기가 닥쳐도 ‘그럼 나는 어떻게 되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하고 제일 먼저 자신의 이해타산을 떠올린다. - <사랑은 없다>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히생활자의 수기>에는 이런 글이 있다.




세계가 파멸하는 것과 내가 차를 마시지 못하게 되는 것과 어느 쪽이 큰일인가! 설사 온 세계가 파멸해 버린대도 상관없지만, 나는 언제나 차를 마시고 싶을 때 마셔야 한다. -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까. 만약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평생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것’과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까. 만약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평생 술을 마실 수 없는 것’과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까. 이것에 대한 답변이 어떨지는 이런 질문으로 확연히 짐작할 수 있다. ‘평생 술을 마실 수 없는 애주가’와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불행한 삶을 살까.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난 것에 대해선 며칠만 지나면 잊고 말 것이다. 자신의 불행이 중요하지 타인의 불행 따윈 안중에 두지도 않는 게 인간 아닌가. 

<이완용 평전>을 통해 이완용의 삶을 들여다보면 뜻밖에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그 결론이 궁금하다. 나의 결론도 독자들의 결론도 궁금하다.

2.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원작, 제프리 S. 크래머 엮음, <주석 달린 월든>이란 신간이 나왔다. 소로우의 <월든>이란 책에 대한 안내자 역할을 해 줄 책이라고 한다.


소로우가 인용한 고대 경전부터 그리스 신화, 논어 등 동서양 고전의 출전을 파악하고, 현대의 작가와 학자들이 인용한 소로 관련 내용까지 덧붙였다(조선일보, 2011. 5. 28.)고 한다.



요즘 하우스 푸어(House Poor)란 말이 신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불 능력으로 감당 못하는 집을 산 사람들’을 말한다. 하우스 푸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집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난하다.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한 돈을 갚느라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하다.


일찍이 소로우는 미래에 하우스 푸어와 같은 사람들이 출연하는 세상이 오리라고 예견했던 것일까. 이미 그는 세속적인 성공만을 위해 숨 가쁘게 사는 문명사회의 사람들이 과연 행복한가를 스스로 묻게 만드는 글을 남겼다. 그것이 1854년에 출간된 <월든>이다.  






사람들은 그릇된 생각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조만간에 땅에 묻혀 퇴비로 변한다. 사람들은 흔히 필요성이라고 불리는 거짓 운명의 말을 듣고는 한 옛날 책(성경)의 말처럼 좀이 파먹고 녹이 슬며 도둑이 들어와서 훔쳐 갈 재물을 모으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러나 인생이 끝날 무렵이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인생이다. - <월든>에서.






지금 남부와 북부에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려고 눈을 번뜩이는 악랄한 노예주인들이 수없이 많다. 남부의 노예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지만 북부의 노예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노예감독일 때이다. - <월든>에서.






오늘 모든 사람들이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묵과한 것이 내일에는 거짓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 <월든>에서.





‘오늘’은 50평짜리의 비싼 아파트에서 은행 빚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갖고 사는 게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일’이 되면 잘못된 생각으로 판명될지 모른다. 그 50평의 아파트에서 사는 것보다 그보다 싼 30평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빚 없이 저축하며 마음 편히 사는 게 좋은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로우는 실제로 문명을 등지고 월든 호숫가에서 원시적인 삼림 생활을 했다. 그 생활을 <월든>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미 <월든>을 읽은 나로서는 <주석 달린 월든>이 궁금해진다. 독자들의 호응도 어떨지 궁금하다.


3.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이란 작품이 있다. 여주인공인 가난한 L부인은 남편과 함께 파티에 가기 위해 친구로부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려서 하고 간다. 파티가 끝나 집에 돌아와 거울에 선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다. 목에 당연히 걸려 있어야 할 목걸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오는 도중 그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이다.    

    
  
 

 

 

 


궁리한 끝에 그들 부부는 어느 보석상에서 그 잃어버린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아주 비슷한 것을 사서, 빌렸던 친구에게 돌려준다. 목걸이의 가격은 매우 비쌌으므로 그들은 빚을 졌고 10년 동안 심적, 육체적으로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나자 빚을 다 갚았다.


어느 날 L부인은 우연히 거리에서 자기에게 목걸이를 빌려 주었던 친구를 만나게 되어,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그 친구에게 들려준다. 그때 L부인은 그 친구로부터 이런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아, 가엾어라. 내 목걸이는 가짜였단다. 기껏해야 5백 프랑밖에 되지 않는 것인데…….”


L부인이 파티에 가기 위해 값비싼 목걸이를 친구에게 빌리기까지 한 것은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중요시해서다. 이렇듯 겉치레를 중시하는 허영심은 우리의 삶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옷을 구입할 때 값싼 옷 대신 비싼 옷을 사는 이유가 옷감이나 색상, 디자인 등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단지 유명 메이커의 옷이기 때문이라면 이것도 허영심이다. 또 승용차를 구입할 때 소형차 대신 중형차를 구입하는 이유가 더 안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라면 이것도 허영심이다.


L부인처럼 생활필수품이 아닌 고급 목걸이를 필요로 할 때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목걸이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


4.


최근 악성 댓글로 괴로워하다가 자살한 사람이 있었다. 위치 추적이 가능한 스마트폰과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CCTV로 사생활 침해 논란이 생겼다. 이것들은 과학의 발전으로 생기는 폐해다. 지진이나 원전사고만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예전엔 없었던 나쁜 일들이 자꾸 생긴다. 이렇게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들이 앞으로 또 얼마나 생길까.


과학의 발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까. 휴일이 없는 과학의 발전이 나는 두렵다. 도대체 과학은 이 세상을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인가. 그곳에도 사람 냄새가 나긴 할까. 이쯤해서 인간의 욕망에 끝이 있었으면 좋겠다.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에 이런 글이 있다.




교구 목사 오피미언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과학에 대한 길고 통렬한 비난을 마무리한다. “과학이 인류에게 끼친 해악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날이 저물 것이다. 인류를 절멸시키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인 운명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 <런던통신 1931-1935>에서.





 

5. 


요즘 스마트폰 사용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언젠가는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고립을 당할지 모른다. 나 역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소로우가 될 자신이 없기에, 언젠가는 스마트폰을 구입하게 될 것이다. 스마트폰이 위치 추적까지 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조차도 결국 구입하고 말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씩 어떤 문화의 ‘노예’가 되어간다. 그렇다면 행복한 노예일까, 불행한 노예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옹달샘 2011-06-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울림을 주는 글입니다. 저도 스마트폰이나 갤럭시탭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듭니다. 그러다 새로운 기계조작법을 익히는게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요. 어떤 문화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말이 실감이 나고 소름끼치기도 하네요. 나중엔 인류의 지배자가 문명이나 문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페크pek0501 2011-06-13 18:02   좋아요 0 | URL
며칠 전 친구를 만났는데,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어요. 스마트폰 사용자들끼리는 무료로 제공되는 통신서비스가 있다며 저보고 스마트폰을 사라고 하더군요. 제 핸드폰에 통신하면 사용료가 많이 든대요. 이런 말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듣게 되면 결국 저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스마트폰을 사게 될 거예요. 혼자서 왕따 당하지 않으려면 이 시대의 문화를 부지런히 쫓아가야 할 듯...ㅋ 세상이 천천히 바뀌었으면 해요.
 


<맘대로글>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


내가 다니는 미용실이 있다. 친정어머니의 단골 미용실이라 가게 된 곳이다. 미용사는 의외로 60대 노인이었다. 그런데 노인 같지 않게 머리 손질하는 손놀림이 능숙하고 솜씨가 좋았다. 파마도 커트도 잘 했다.


친척 결혼식이 있던 어느 날, 머리 드라이를 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아마 세 번째로 간 것 같다. 그날 그 미용사분이 내게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왜 물으시냐고 했더니, 내가 참 특별한 분 같단다. 무슨 말인가 싶어, 뭐가 특별하냐고 물었더니, ‘보통 주부’ 같지가 않단다. 그러면서 “특별하게 멋있으세요.”하고 웃으며 말했다. 난 이건 그냥 나를 단골손님으로 만들고 싶어 기분 좋게 해 주려는 뜻으로 하는 말이겠지, 하고는 가벼운 미소로 응대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중3인 둘째딸에게 그 얘기를 들려 줬다. “오늘 이상한 소릴 들었는데, 미용실에서 엄마가 특별하대. 보통 주부 같지가 않대.”라고 했더니 딸이 무심코 “응 엄마 특이해.”하는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 미용사가 한 말보다 딸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더 궁금해졌다. “나, 평범하잖아. 내가 뭐가 특이한대?”라고 했더니 “내 친구들의 엄마들하고 많이 달라.”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봐, 뭐가 어떻게 다른지, 했더니 아이 말은 이러했다. “겉모습도 다르잖아. 다른 아줌마들은 다 뚱뚱한데, 엄마는 말랐잖아. 그리고 아주 다른 건 말투가 다르고, 말의 내용도 좀 달라. 나 혼낼 때도 선생님처럼 논리적으로 말하려고 하잖아.”라고 하면서 덧붙였다. “우리 친구들도 엄마 보고 특이하대. 아줌마 같지 않대.”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거 좋은 거지?” 아이가 대답했다. “그냥 엄마의 개성이야.”


난 내가 다른 주부들과 다른 점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다. 때로는 주위 사람들이 나보다 더 나에 대해 아는 척하며 어떤 점을 말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땐 나를 놀라게 한다.


그 미용사가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싶어 내가 미용실에서 했던 말을 더듬어 봤더니 이거였다. 커피 한 잔을 주시길래, 내가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말을 했던 것. “커피가 참 맛있네요. 매일 마시는 커피지만 특별히 맛있게 느껴지는 날이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네요.”라고 했던 것. 이것밖엔 없었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미용실에서 수다 떠는 취미가 내겐 없었다. 내가 한 그 말에 나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던 셈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나의 역사와 지식을 반영한다’라는 말이 있다.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언어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자신의 글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다. 그건 마치 자신의 일기장을 보여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하면 난 가끔 공포를 느낀다. 이 블로그에 올린 내 글들이 나의 일기와 같기 때문이다. 글은 아무리 자신을 미화시키며 쓴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문체는 곧 그 사람이므로.


나이 들어가면서 내가 점점 아줌마스러워진다고 느낄 때가 많다. 가령, 쓰던 핸드폰이 고장 나서 핸드폰을 새로 사러 갈 때 두 딸들이 내게 새로운 기종을 권하는데, 나는 기존 써 오던 핸드폰의 사용방식과 가장 비슷한 것을 골라 산다. 새로운 사용방식을 배우기 싫기 때문이다. 점점 두뇌를 써야 하는 변화가 싫고 익숙한 것만 좋아한다. 이런 나를 보고 큰딸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아줌마들은 할 수 없어.”라고 한다. 난 “응 아줌마들은 할 수 없어.”라고 답하며 인정한다.


언젠가는 아줌마스러워지는 시간을 지나 노인스러워지는 시간에 이를 것이다. 나의 친정 부모님을 보면 쉬이 추측할 수 있다. 그날그날의 주식 변동이나 은행 금리에 대해선 나보다 더 잘 아시면서 핸드폰의 문자 사용법을 모르시고 통화만 하실 줄 아신다. 또 신문을 통해 세상일엔 밝으시면서 컴맹이시다. 두 노인만 살기 때문에 컴퓨터가 아예 없다. 이런 두 분들의 모습은 곧 나의 미래 모습이다. 먼 훗날 스마트폰을 지나 더 새로운 무엇이 나왔을 때 나 역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둔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가는 세월의 아쉬움과 늙음의 서글픔이 느껴진다. 그래서 ‘아줌마 같지 않다’라는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이 말에 의하면 내 개성이란다. 먼 훗날 노인이 되었을 때도 ‘노인 같지 않다’라는 말을 듣는 개성도 있었으면 좋겠다.

.....................................



<후기> 위의 글을 읽은 독자에게


위의 글을 읽어보면 결국 자기 자랑의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줌마이면서 아줌마 같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듯하다.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의 공통점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난 점이 한 가지 이상 있다는 점이다. 잘난 점이 한 가지라도 없다면 잘난 척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게 중요하다.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진짜 잘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뛰어나게 잘난 사람은 만인이 알고 있게 마련이어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 잘난 척할 필요가 없으므로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 재벌들이 돈 많다고 자랑하지 않는 것처럼.


잘난 척하는 사람들을 잘 관찰해 보면 그들은 열등감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 잘난 척은 열등감을 은폐하기 위한 또는 자신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고로, 부자라고 자랑하는 사람들,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미남 또는 미녀라고 자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들이 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주자. 태어나서 고생하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인간의 삶은 얼마나 고독한가. 그런 고독한 삶을 살아내는 존재들에게 하하하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주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엔 고생하며 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제일 편할 것 같은, 부모 슬하에 있는 청소년들조차도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졸린 눈으로 학교에 가서 딱딱한 의자에 장시간 앉아 있어야 하는 고생을 한다. 지금 나보고 그런 학교에 다니라고 한다면 못 다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단상(12) 글을 왜 쓰는가, 자랑 때문인가 재미 때문인가


사람들은 왜 글을 쓸까. 사람마다 글 쓰는 이유가 각각 다를 것이다. 그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두 가지만을 뽑아 쓰고자 한다.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인가, 재미있어서인가.


첫째,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견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쓰는 목적 중의 하나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책을 통해서든 블로그를 통해서든 글 쓰는 사람은 남에게 읽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여기엔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이 끼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지적 능력 또는 글쓰기 능력을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란 작품에서 이렇게 썼다.




“의젓한 인간이 진심으로 만족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란 도대체 무엇일까?

답 -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신을 자랑할 수 있어서다. 이것은 글을 쓸 때도 나타난다. 그래서 정확한 자서전이란 없다고 한다.



“하이네가 단언한 바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반드시 거짓말을 하게 마련이므로 정확한 자서전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따른다면, 예컨대 루소만 하더라도 자기 참회록 속에서 줄곧 자신을 헐뜯고 있는데, 그것은 허영심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 한다. 나는 하이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때로 자기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엄청난 범죄를 날조하여 스스로 범인을 자처하고 나설 수도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작가 최인호는 최근 한 일간지(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왜 (사뮈엘) 베케트니 이런 작가들이 인터뷰를 안 하는지 알겠어. 인터뷰라는 건 자기 미화야. 100% 자기 미화. 난 옛날부터 인터뷰를 많이 했지만 동시에 싫었어. 나온 기사를 보면, 진짜 내 얘기가 아니야. 남에게 보여지는 내 얘기였어.”


여기서 ‘자기 미화’란 결국 ‘자기 자랑’인 셈이다. 신문 인터뷰뿐만 아니라 TV 출연에서도 ‘자기 자랑’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야기를 나누는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들은 자신의 생활을 소개하며 자신의 집, 부부금실, 음식솜씨 등을 자랑스럽게 공개한다. 한결같이 집은 멋지게 꾸며져 있고, 부부금실은 좋으며, 음식솜씨는 최고임을 보여준다. 결국 ‘자기 자랑’이다. 의사가 출연하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그가 TV에 출연해 하는 일은 시청자들에게 유익한 지식과 정보를 줌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의 강점을 알리는 일 다름 아니다. 그래서 어느 의사는 유명인사가 되기도 하는데, 그러면 그가 근무하는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 수가 증가한다고 한다. 그가 정치가라면 그가 출마할 선거에서 유리하게 작용하는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그가 작가라면 그가 쓴 책의 판매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점이 있더라도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은 결코 TV 출연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랑하고 싶은 욕구는 작가들이나 TV에 출연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평범한 주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주부들이 모이는 친구 모임엔 남편 자랑과 자식 자랑의 얘기가 늘 단골 화젯거리가 된다. 이것과 관련한 글이 있다. 러셀의 <런던통신 1931-1935>에 수록된 글이다.




평균적인 유부녀는 다른 유부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사는 듯하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그들의 남편보다 부유하고 자기 자녀들이 그들의 자녀들보다 성공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고자 애를 쓴다. 부유한 유부녀라면 집안 관리와 인테리어에 있어 이웃들보다 나은 취향을 과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 <런던통신 1931-1935>, 90~91쪽.


 

결론적으로 말하면, 글을 쓰는 사람들이나 TV 출연을 하는 사람들이나 보통 주부들이나 모두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어떤 점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모두가 갖고 있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 가까운 것이지, 글 쓰는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글 쓰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매슬로우(A. Maslow)의 계층적 욕구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자신의 욕구충족을 증가시키거나 아니면 욕구충족의 감퇴를 회피하려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충족되지 않은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고 바로 그들 욕구의 충족을 추구하기 위해 동기를 갖는다. 그리하여 인간의 욕구는 가장 낮은 단계의 생리적 욕구를 비롯해, 안전의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 등 상향적 계층화된 욕구구조를 갖고 있다(황상재 저, <조직 커뮤니케이션 이해>를 참고). 이 이론에서 주목할 것은 ‘존경의 욕구’다. 이것은 남들로부터 존경 받거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다. 이 욕구로 인해 인간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길 좋아한다.

 

 

둘째, 글쓰기 자체의 재미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남에게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게 글 쓰는 이유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남으로부터 인정받거나 자신을 자랑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악기 연주와 비교할 수 있다. 누구나 피아노나 기타를 훌륭하게 연주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결국 그 악기에 대한 흥미를 가진 자만이 악기를 다룰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더라도 결국은 글 쓰는 재미를 아는 자만이 글을 쓸 것이다. 따라서 글을 쓰기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글쓰기가 재미있게 느껴져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만 글을 쓴다면 일기를 쓰는 습관을 가진 사람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일기의 독자는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도 일기를 쓰고 있는데,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그냥 글쓰기 자체가 좋아서 쓰는 것이다. 오히려 누군가가 볼까 봐 꼭꼭 숨겨 둔다. 매일 쓰는 건 아니지만 한 달에 몇 번은 꼭 써 온 게 벌써 삼십 년 가까이 되었다. 어떤 인상적인 사건이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꼼꼼히 정리해 쓰게 되는데, 훗날 그 일기를 읽었을 때 무슨 뜻의 글인지 내가 알기 위함이다. 이럴 때 글쓰기는 나만의 비밀스런 세계 속에서 작은 행복을 갖게 한다. 

글쓰기엔 분명히 문장과 문단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즐거움이 있다. 적합한 낱말의 선택, 그것들의 조합, 직유나 은유로 문장을 묘사, 그것들의 배치, 문단 구성 등을 하는 행위는 마치 퍼즐놀이를 하는 것처럼 흥미롭다. 볼펜으로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컴퓨터로 글을 쓸 때 자판을 두드리는 즐거움도 있다. 자판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재밌는 놀이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작가들이 글을 쓰는 큰 동기를 네 가지로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로 ‘미학적 열정’으로 인한 즐거움을 들었다.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말의 아름다움과 말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에 주는 영향을 인지하는 즐거움,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그래서 놓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어떤 경험을 공유해 보려는 욕망. - <나는 왜 쓰는가>에서.


확실히 글쓰기에는 감미로운 즐거움이 있다. 쓰지 않을 수 없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왜 연애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연인들은 ‘만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어서’라고 말할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사람도 ‘쓰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어서’ 글을 쓴다고 할 수 있다. 글 쓰는 사람들에겐 세상에서 글쓰기만큼 유혹적인 일이 없을 것이다.

직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든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이든, 그들은 글쓰기의 재미에 푹 빠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나도 지금 이 순간, 그 행복 속에 있다. 

  

..............................................................

<참고사항>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작가들이 글을 쓰는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제시하였다.

1) 순전한 이기심 :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무시했던 어른들에 보복하고 싶은 욕망. 이게 작가의 동기, 그것도 강한 동기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2)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말의 아름다움과 말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에 주는 영향을 인지하는 즐거움,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그래서 놓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어떤 경험을 공유해 보려는 욕망.

3) 역사적 충동 : 사물/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한 사실들을 발견하며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모아 두려는 욕망.

4) 정치적 목적 :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 나는 왜 쓰는가, <동물농장>, 민음사, 137~138쪽.      

 

.......................................................................................
 

<후기>

나는 조지 오웰이 쓴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를 민음사에서 나온 <동물농장>이란 책에서 읽었다. 이 책에는 <동물농장>이란 소설 외에 ‘자유와 행복’과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가 실려 있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만을 모아 놓은 것으로는 한겨레출판의 <나는 왜 쓰는가>라는 책이 있다. 29편의 에세이를 볼 수 있다.


조지 오웰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글은 모두 읽고 싶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5-19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는 이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위에 적은 두 가지 이유도 빠지지 않겠지요.^^

여전히 바쁘신지요?

페크pek0501 2011-05-19 18:4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하나도 바쁘지 않아요. 바쁜 일이 끝났거든요. 그저 책 보며 운동하며 지내요. 10년간 했던 돈벌이를 손에서 놨더니 이 '게으른 자유'가 좋습니다. 행복해요.
앞으로는 글을 많이 쓰려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종종 들러 주시면 자극제로 알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순오기님처럼 덩달아...

페크pek0501 2011-05-1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으른 자유'에 취해 살다

식구들이 다 나간 텅 빈 집에서 혼자 책 보다가 늦잠 자는 버릇을 못 고쳐요. 아침잠은 왜 그리 달콤한지...
제가 마약처럼 못 끊는 것 - 책과 아침잠과 커피와 운동, 이것들은 중독수준이랍니다. 아침엔 잠 자느라 저녁엔 운동하느라 하루가 짧아요.

컴추루 2011-05-30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2번인 것 같은데..그리고 운명에게 떠밀려서 오다보니 뭔가를 쓰고 있고..쓰지 않을려고 고개 돌리면 그 놈의 쓰고 싶은 욕망이 나를 또 가만히 놔두지 않아서 또 쓰고 있고ㅎ 은경씨 큰 목소리 듣지 않았더니 귀가 좀 심심합니다~

페크pek0501 2011-05-31 00:33   좋아요 0 | URL
닉네임이 바뀐 듯. 반가워라ㅋ. 나도 2번입니다.
글쟁이 친구들이 여럿 있는데, 글쓰기를 중단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어요.
오랜만에 연락되어서 물어보면 글쓰기는 늘 현재진행형이죠. 일종의 중독인가 봐요. 한 번 발을 담그면 뺄 수 없는... 아마 나도 이 짓을 계속할 것 같아요.

오늘 친구가 놀러와서 하루종일 수다 떨었어요. 컴추루님과도 언젠간 수다 떠는 날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