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16) 사치의 행복과 무소유의 행복과 즐김의 행복


1.

사치의 행복 : 가끔은 사치하고 싶다


<사치와 문명>이란 신간이 나왔다. 이 책은 동서고금 문명을 ‘사치’라는 키워드로 분석한 것으로, “사치는 유용성에 앞서고, 인간적이며, 필수적이며 영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치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류 문명 발전의 견인차라고 주장하는 책이다(조선일보, 2011. 6. 11.). 사치가 없다면 세상 발전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 책장에서 찾아보았더니 마광수 저, <자유에의 용기>라는 책에 ‘사치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었다. 이 글에 의하면 사치욕구의 발로가 여가의 증대와 맞물려 ‘일할 의욕’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소비의 미덕’으로 이어져 유통의 발달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민중들은 그들이 영원히 ‘민중’으로만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신분상승을 이룩해 ‘귀족’이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대중적 귀족의 출현을 인정하고 대중적 사치를 인정하는 사회는 경제발전의 속도가 빠른 반면, 민중들을 계속 검약(儉約)과 절제의 윤리로만 순치(馴致)시키는 사회는 경제가 침체될 수밖에 없다. 사치스럽고 귀족적인 소비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구조 속에서는 일반 대중들이 땀 흘려 일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소련이나 동유럽국가들의 경제가 붕괴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마광수 저, <자유에의 용기>에서.


 

사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두 권의 책이 반가웠다. 내가 사치로 인해 부끄럽게 여겨졌던 일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 관리’를 몇 번 받으러 다닌 일이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와 발의 피로를 느끼던 때에 그 광고지를 보게 되어 가게 되었다. 지압과 마사지로 발의 피로를 풀어 줌으로써 몸의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 주어 건강하게 해 준다는 광고 문구가 꽤 유혹적이었던 것. ‘발 관리’를 받기 위해선 한꺼번에 돈을 내고 회원가입을 해야 했다. 이것은 내 생활수준에 비추어 보면 ‘사치’에 속한다. 평소엔 검소한 편이지만 가끔은 이런 사치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알뜰하기만 한 삶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문을 통해 대학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하는 학생들에 대한 기사를 보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방송을 볼 때면 나의 ‘발 관리’의 사치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돈이 없어 불행한 삶을 사는데 나는 하지 않아도 될 ‘발 관리’를 받으러 다니는 사치나 누리며 살고 있다니,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사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이 두 권의 책을 보니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 같은 세상은 물론 위험하다. 하지만 그것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되고 나면 더 이상 일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된다면 더 이상의 경제발전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삶의 질적 향상도 없을 것이다. 훗날 부자가 되어 사치하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게 한다. 고급 자동차와 외제 골프채를 갖고 싶은 욕구, 멋진 호텔 같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구, 세계여행을 하고 싶은 욕구, ‘발 관리’나 ‘얼굴 마사지’와 같은 서비스를 받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사는 게 좀 싱겁지 않겠는가.


때로는 사치에 대한 욕구가 생활의 활력을 주리라. 물론 지나친 사치라면 독이 되겠지만.



2.

무소유의 행복 : 버림으로써 행복하다


많이 가질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교통난과 주차난이 심각한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 중에는 자동차를 가지고 외출해서 불편했던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때로는 자동차를 소유함으로써 행복한 게 아니라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행복할 때가 있다.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기르던 분이 계셨다. 그 분은 그 난초를 위해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그러던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그분은 외출 중에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음을 알고 문득 난초가 생각났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외출했던 것이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그때 그 분은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난초를 안겨 주었다. 비로소 그 분은 얽매임에서 벗어나서 날 듯 홀가분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 분이 법정 스님이시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 법정 저, <무소유>에서.




무소유의 행복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사치의 행복보다 무소유의 행복이 더 좋은 이유는 사치의 행복이 자신 혼자의 행복인 것에 반해 무소유의 행복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무소유의 행복은 자기만이 아닌, 우리들 모두의 행복을 지향한다. 

 

3.

즐김의 행복 : 행복은 즐기는 것이다


사치의 행복은 이웃을 생각할 때 마음이 불편해지는 행복이다. 이웃에게 미안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사치의 행복으로 늘 만족하기란 불가능하다.


무소유의 행복은 정신 수양을 필요로 할 만큼 쉽게 갖지 못할 행복이다.


내가 갖고 싶은 행복은 ‘즐김의 행복’이다. 현재를 즐기며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아무런 즐거움 없이 현재를 참고 견디며 사는 것에 반대한다. 예를 들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절약하며 저축을 하는 삶을 살더라도 현재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하는 사람은 세 번 향락한다고 한다. 노동 자체에서, 노동의 결실에서, 그리고 노동한 뒤의 휴식에서.


연예인들 중에는 정상에 올랐던 위치에서 인기가 떨어져 아래로 추락하면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연예인뿐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노동의 결실만을 중요시해서 일의 결과에 따라 행복과 불행 사이를 오간다.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다면 우리 삶이 덜 외롭고 덜 불행할 텐데.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공자) 이것은 곧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뜻도 된다. 이처럼 공자도 즐기는 상태를 최고의 경지로 봤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든 그 시간을 즐기는 게 행복의 비결. 우선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하겠다. 구두쇠가 불행한 이유도 즐기지 못해서라고 한다. “구두쇠들은 가진 것을 결코 즐기지 못하고 잃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플루타르코스)


논어에 이런 글이 있다.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복습하는 것은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벗들이 먼 곳에서 오는 것은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논어)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에는 ‘행복한 한때’가 어떤 때인지를 알게 해 주는 글이 있다.  
 

 



 

  


 

  



예를 들어 내 경우라면 참으로 행복한 한때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잠을 푹 자고 나서 아침에 깨어 새벽 공기를 마시면 폐가 부풀대로 부푼다. 그러면 마음껏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 싶어져서 가슴 근처의 피부나 근육에 기분 좋은 운동의 감각이 일어난다. 따라서 일도 할 수 있겠다는 그런 한때. 손에 파이프를 들고 의자에 발을 뻗고 있으면 담배 연기가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그런 한때.


여름 여행길에서 목이 탄다. 아름답고 깨끗한 샘이 있어서 물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구두와 양말을 벗어버리고는 펑펑 솟아오르는 그 얼음 같이 찬 물 속에다 발을 담그는 그런 한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뒤에 안락의자에 턱 기대앉는다. 같이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서로 꼭 맞는 사람들뿐. 흥겨운 청담(淸談)이 꼬리를 물고 경쾌하게 자꾸만 흘러나온다. 몸도 마음도 이처럼 천하태평스런 한때.


어느 여름날 오후, 지평선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한 15분만 있으면 초여름의 소낙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비를 맞고 싶은데, 우산을 안 들고 비오는 데 나가기도 어색하다. 그래서 급히 벌판 한가운데로 뛰어나가서 소낙비를 맞고는 흠뻑 젖어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 사람들에게는, 뭘 비 좀 맞았는데… 하는 한때.


-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에서.



나도 임어당의 글을 흉내 내어 다음과 같이 써 보았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거리의 사람들은 재빠르게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 풍경을, 나는 비 한 방울 맞지 않는 집에서 창문을 통해 내다본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어떤 책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게 만든다. 궁금해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까지 책을 읽고 나서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난다. 이런 게으른 자유의 행복이 얼마만이냐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건강을 위해서도, 몸 관리를 위해서도, 기분전환을 위해서도 운동은 필요하다. 땀 흘려 운동을 하고 난 뒤 흠뻑 젖은 몸으로 샤워를 한다. 우선 얼음물 같은 찬물로 여러 번 얼굴을 적시며 ‘아, 시원하다’라는 느낌을 즐기고 난 뒤에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한다. 샤워를 마치고 나면 갈증이 난다. 이럴 때 냉장고에서 꺼내 시원한 물을 들이킨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외출하기 전,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내 모습을 아이에게 보이며 “나 어때?”라고 묻는다. 아이는 “그냥 사십대 아줌마 같지 뭐.”라고 답한다. 나이는 못 속이는 모양.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해 주었더니 친구들이 일제히 까르르 웃는다. 한 친구가 묻는다. “넌 어떤 말이 듣고 싶었는데?” 나는 답한다. “아가씨 같다는 말.” 이 얘기를 듣자 또한번 친구들이 일제히 까르르 웃는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즐기려고 마음먹으면 실제로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 많아진다.  



요즘 장마철이다. 비가 와서 습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비가 와서 공기가 상쾌함을 즐기자. 행복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의 것이 아니므로. 행복은 그것을 느끼는 자의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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