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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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이야기의 소비 중 요약 /90년대의 오타쿠들은 일반적으로 80년대에 비해 작품세계의 데이터 자체를 고집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나 의미에 대해서는 극히 무관심하다. 반대로 90년대에는 원작의 이야기와는 관계없이 그 단편인 일러스트나 설정만이 단독으로 소비되고 그 단편에 소비자가 마음대로 감정이입을 강화해가는, 다른 유형의 소비행동이 대두해왔다. 이 새로운 소비행동은 오타쿠들 자신에 의해 '캐릭터 인간'으로 불리고 있다. 후술하듯이 거기에서 오타쿠들은 이야기나 메시지와는 거의 관계없이 작품의 배후에 있는 정보만을 담담하게 소비하고 있다.-76쪽

<에반겔리온>의 팬이 추구하고 있었던 것 중 - (전략) 많은 건담 팬들은 건담의 세계를 정밀조사하는 데 욕망을 쏟고 있다. 즉 거기에는 가공의 커다란 이야기에 대한 정열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나타난 <에반겔리온>의 팬들, 특히 젊은 세대(제3세대)는 그 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조차도 에반겔리온의 세계 전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처음부터 2차창작적인 과도한 읽어내기나 캐릭터 모에의 대상으로서 캐릭터의 디자인이나 설정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즉 거기에서는 건담의 세계 같은 커다란 이야기=햐구는 이미 환상으로서도 욕망되고 있지 않았다. <건담>의 팬은 '우주세기' 연표의 정합성이나 메카닉의 리얼리티를 이상하게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77쪽

5. 데이터베이스 소비 중 요약 /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화는 90년대에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모에'란 원래 80년대 말에 생긴 말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캐릭터 또는 인기 연예인 등을 향한 허구적인 욕망을 의미했다고 한다. 특정한 캐릭터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관련 상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하기 때문에 제작자에게는 작품 그 자체의 질보다 설정이나 일러스트를 통해 모에 욕망을 어떻게 환기할 것인가가 기획의 성패를 직접적으로 좌우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길게는 70년대까지 거슬러올라가지만 그 중요성은 90년대의 미디어믹스의 흐름 속에서 결정적으로 중대되게 되었다.-90쪽

'이야기 소비'에서 '데이터베이스' 소비로 중 요약 -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만화,애니메이션,게임,소설,일러스트, 트레이딩 카드, 피규어, 기타 여러 작품이나 상품의 심층에 있는 것은 이제는 결코 이야기가 아니다. 90년대의 미디어믹스 환경에서 그 다양한 작품이나 상품을 묶는 것은 캐릭터밖에 없다. 그리고 소비자는 그 전제 위에(95)서 이야기를 포함한 기획(만화나 애니메이션 또는 소설)과 이야기를 포함하지 않는 기획(일러스트나 피규어)사이를 마음대로 왕복하고 있다. 여기에서 개개의 기획은 시뮬라크르이며 그 배후에 캐릭터나 설정으로 이루어진 데이터베이스가 있다.-95쪽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에 이르는 흐름 속에서 우리의 세계상은 이야기적이고 영화적인 세계시선에 의해 지탱되던 것에서 데이터베이스적이고 인터페이스적인 검색엔진에 의해 읽어내지는 것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 속에서 일본의 오타쿠들은 70년대에는 커다란 이야기를 잃어버렸고,80년대에는 그 잃어버린 커다란 이야기를 날조하는 단계(이야기 소비)에 이르렀으며, 계속되는 90년대에는 그 날조의 필요성조차 폐기하고 단순히 데이터베이스를 욕망하는 단계(데이터베이스 소비)를 맞이했다.-97쪽

(전략)코제브는 헤겔적인 역사가 끝난 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존양식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하나는 미국적인 생활양식의 추구,그가 말하는 '동물로의 회귀'이며 또하는 일본적인 스노비즘이다./'스노비즘'이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그것을 부정하는 행동양식이다. 스놉은 환경과 조화하지 않는다.비록 거기에 부정의 계기가 전혀 없다고 해도 스놉은 그것을 굳이 부정하고 형식적인 대립을 만들어내어 그 대립을 즐기고 애호한다. 코제브가 그 예로 들고 있는 것은 할복자살이다. 할복에서는 실질적으로는 죽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도 명예나 규율이라는 형식적인 가치에 입각하여 자살이 행해진다.이것의 궁극의 스노비즘이다.(119)-118,119쪽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부정의 계기가 있다는 점에서 결코 '동물적'이지는 않다.그러나 그것은 또 역사시대의 인간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르다. 스놉들의 자연과 대립(예를 들면 할복할 때의 본능과의 대립)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도 역사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순수하게 의례적으로 수행되는 할복은 아무리 그 희생자의 시체가 쌓여도 결코 혁명의 원동력은 되지 않는 것이다.-119쪽

포스트 역사의 인간 = 오타쿠들은 오타쿠계 작품의 가치와 패턴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서 굳이 취향을 분리해낸다. 즉 '형식을 내용에서 계속 분리해낸'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에서 의미를 받아들이거나 사회적 활동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방관자로서의 자기(='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자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121쪽

스놉하고 냉소적인 주체는 세계의 실질적인 가치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들은 형식적 가치를 믿는 척하기를 그만두지 못하며,때로 그 형식=겉모습 때문에 실질을 희생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코제브는 이 '그렇기때문에 더욱'을 주체의 능동성으로 파악했지만, 지젝은 그러한 전도가 오히려 주체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강제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복을 자행하고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탈린주의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싫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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