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
구회영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8월
구판절판


필름(film):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현상은 필름으로부터 시작한다. 필름은 빛이 닿으면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물질이 입혀진 띠모양의 셀룰로이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져서 느낄 수 있는 실재하는 물체이다.(중략)그러므로 영화가 세계 속에 존재하는 여러 방식 - 빛과 소리에 의한 한순간의 영상으로서, 관객의 기억과 무의식의 단편으로서,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을 통하여 재현된 모습으로서 - 중에서 필름은 가장 구체적이며 물질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7쪽

한 편의 이어진 필름은 또한 한 편의 영화와 동의어로도 쓰인다. 어떤 영화가 지금/여기에 있느냐없느냐를 가늠하는 가장 확실한 - 아마도 유일한 - 기준을 우리는 필름의 존재에서 찾는다. 그래서 <장군의 아들>은 지금 우리에게 있고 - 20여개의 프린트가 전국의 극장에서 '돌아가고' 있으며, 네가(negative)가 보관되고 있으므로- 나운규의 <아리랑>은 지금 우리에게 없다.<아리랑>을 보았던 수많은 선대의 관객들의 증언과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민족의 노래'가 된 그 영화의 주제가가 끊임없이 불리워지고 있음에도, 그러므로 영화가 일단은 필름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야만 그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는 믿음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는 셈이며, 영화 = 필름이라는 등식이 우리의 일상언어 속에서 받아들여짐은 이러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을 것이다. -7쪽

그러나 필름은 아직 '움직이는 그림' 곧 활동하는 사진 또는 무비(movie)가 아니다. 필름이 복제하는 현실의 모습은 아직은 정지된 세계, 정사진(still photograph)으로 구성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필름은 영화 특유의 기계 장치를 거쳐 관객의 감각기관에 빛과 소리로서 전달될 때 비로소 우리가 영화라 기억하는 현상이 되는 것이다-7쪽

무비(movie;motion picture;활동사진)(전략) 영화가 등장하자마자 '신기한 구경거리'로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도 활동사진으로서였다. 대중은 일단 '움직임'을 보고 싶어하였고, 소리나 색채에 대한 요구, 혹은 이야기나 등장인물에 관한 흥미는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그림(motion picture)'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 아니듯이, 그리고 영화의 가장 원초적인 매력인 '움직임을 보는 즐거움'이 사실은 일종의 눈속임에 의하여 가능하듯이, "영화=무비/활동사진"이라는 등식에는 영화 자체가 사람들에게 속임수로서- 체제,권력,자본의 유지와 이익을 위하여 -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 숨어 있다.-8쪽

시네마(cinema)(전략) 영화를 '습관적'으로 보는 관객집단이 형성되고 영화제작이 대규모, 대량생산체제를 갖추어감에 따라 영화는 더 이상 관객을 찾아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영화가 배급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들 - 영사기를 돌리기 위한 전기시설, 필름을 운발할 수 있는 교통편, 그리고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할 만큼의 여유를 가진 관객들- 이 충족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크고 작은 시네마가 들어섰고, 관객들은 영화를 찾아 자연스럽게 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적어도 TV가 관객들의 극장가기 습관을 허물어뜨리기 전까지는, 극장 설계자들의 유일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관람에 불편을 주지 않으면서 객석수를 최대한으로 늘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주말의 관람인파를 모두 받아들이기 위하여 새로 지어지는 대도시의 극장들은 점점 커졌고(9) 그 규모에 걸맞게 또한 호화로움을 더해갔다.-9,10쪽

시네마는 그러나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중략) 하나는 다양한 도시공간을 게릴라처럼 뚫고 들어가는 소극장 (중략) 또 하나는 '구경거리'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테크놀로지들 / 이러한 두 경향은 그것들의 현대성과 첨단기술 / 역설적으로 오늘날의 영화와 관객과의 관계를 영화 초창기의 / 관객을 찾아 상영공간을 만들어가는 소극장 / 영화가 신기한 구경거리임을 새삼 발견하게 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 -10쪽

80년대 헐리우드 영화 텍스트의 안과 밖에 드러난 몇 가지 '증후군'을 살핌으로써 그것들이 90년대의 보다 근본적인 변혁의 '조짐'인지 따져봄은 가능할 것이다. 그 첫번째 증후는 "경계 무너뜨리기"라고 부를 수 있다. 자아와 타자, 중심과 주변, 대회사(MAJOR)와 독립영화(indies),주류(mainstream)와 소수파(cult)의 구분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장르와 장르 사이, 관습(convention)과 새로운 감수성 사이를 '넘나듬'이 예삿일이 된 것이 80년대말의 할리우드 사정이다. 그러나 더욱 문화사적 의의가 큰 경계 무너뜨리기는 창작자/수용자라는 전통적 이분법의 영역에서 일어났다. 여기에는 80년대의 가장 큰 영상혁명을 가져온 비디오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86쪽

엘리트 비평가와 무식한(?) 대중 사이의 간격도 좁혀져왔다. 대중은 비디오와 케이블 TV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취향을 발견하고, 불특정 다수의 관객이 아닌 나름대로의 안목과 지식을 가진 특성화된 소집단들로 변모해갔다. 처음 비디오에 적대적 입장을 취했던 헐리우드의 우려와는 달리, 80년대는 대중이 '영화관'을 재발견한 시대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비디오 보급률과 비례하여 극장영화의 총관객수가 80년대 중반 이후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이 가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보아도 되리라.-87쪽

60년대 후반에 소년기를 보낸 홍콩영화팬 첫세대는 중국무사들의 고풍스런 의상과 그들이 펼치는 '의협'의 세계를 기억한다. 그 다음 세대 관객들은 이소룡의 날렵한 몸놀림과 쌍절봉의 바람 가르는 소리에서, 혹은 성룡, 홍금보, 원표 트리오의 좌충우돌 액션 속에서 홍콩영화를 만났다. 그리고 비디오의 탄생과 함께 자라난 첫세대인 80년대의 가장 새로운 관객들은 주윤발-장국영-왕조현-유덕화로 이어지는 '신드롬'을 형성하며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한가운데에 '홍콩'이라는 고유명사를 깊이 새(227)겨 놓았다.-227,228쪽

그리하여 1990년대초, 서울은 어쩌면 세계에서 홍콩 다음으로 많은 홍콩영화를 동시에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 도시가 되어 있는 듯하다. 직배된 미국 영화, 몸살을 앓는 한국 영화, '고급' 관객을 유혹하는 '예술' 영화 광고들 사이에 칸막이처럼 끼어있는 홍콩영화 광고의 이미 친숙해진 이미지, 그리고 재개봉관 영화광고란의 수많은 홍콩영화 제목들과 비디오가게마다 붙은 무수한 홍콩영화 포스터. 이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 영화관객, 그리고 미래의 한국 영화를 끌고나갈 새로운 세대들의 '영화환경'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228쪽

컬트 무비 / 영화광을 위한 진혼곡 中 (1) 컬트 영화는 정의될 수 없고, 정의되어서도 아니된다. "도대체 컬트 영화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컬트(cult)'라는 외래어를 정의함으로써 답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컬트 '현상'을 가능케 하는 '문화/하위문화(subculture)'와 그 문화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를 이야기함으로써 비로소-우회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다. 컬트는 쉬운 해답을 갖지 않은 문제라 생각하는 편이 컬트를 이해하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컬트의 의미는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고, 그 내용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컬트는 사전이라는 동어반복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쉽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이미 컬트가 아니며 고정불변의 컬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229쪽

(2) 컬트 영화는 관객이 만든다. 관객만이 마지막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중략) 관객들은 재해석을 통하여, 관람경험의 '제의(ritual)'화에 의하여, 혹은 애증/찬탄/야유가 뒤섞인 관심으로써 컬트 영화를 길러낸다. 컬트는 상업영화의 생산/소비 메커니즘 속에 관객이 능동적으로 자신들만의 자리를 확보하는 유효한 방식이다. 관객만이 컬트를 결정하고, 최후까지 결정권을 지니는 것이다. -229쪽

(3)컬트 영화의 관객은 언제나 소수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발적이고, 열광적이며, 때로는 광신적인 소수이다. 다수의 관객 대중에게 버림받고 외면당한 영화는 컬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229)진다. 그것이 소수의 지지자/후원자들에게 발견되면서 이 '미운 오리새끼'는 컬트 영화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이들은 자신만이 그 영화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다가,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확신'을 가지고 컬트 영화에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이 극장 저 극장을 쫓아다니며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보고,주인공들의 분장과 몸짓과 대사를 흉내내고, 주위사람들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전도'에 열을 올리는 소수의 '광'들이 컬트 영화의 진정한 주인들이다.-229,230쪽

(4)컬트 영화의 자격은 영화의 상업적 성공과 관계가 없다. "관객동원('동원'이라는 말에 숨은 이데올로기에 주목할 것)"에 실패한 영화는 일단 '소수'만을 위한 영화라는 컬트의 조건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흥행에 실패한 영화가 모두 컬트 영화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영화가 소수의 열광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반대로 첫개봉에서 '떼돈'을 벌었다 하여 그 영화가 컬트 영화가 될 자격을 자동적으로 상실하는 것으도 아니다.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 대다수 관객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 영화광들이 그 영화를 '재발견'할 때, 그것은 '대작흥행영화'에서 컬트영화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한 영화가 수용되는 문화의 차이라는 요소가 덧붙여진다. 한 나라에서의 '흥행' 영화가 국경을 넘어가면 '예술'영화가 되듯, 문화적 차이에 따른 관객의 오해(?)가 때로는 컬트 영화를 낳는 근거가 된다. -230쪽

(5) 컬트 영화는 반드시 관객공동체의 문화를 반영하며, 관객공동체의 대변자가 된다. 컬트 영화를 만들고 키워나가는 관객들은 언제나 특정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다(때로는 거꾸로 컬트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러한 집단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집단은 공통된 기호와 취향과 나름대로의 규범을 가지며 공통의 정서로 끈끈하게 맺어진 '공동체'이다. -230쪽

(6) 컬트 영화는 얌전한 영화가 아니다, 컬트 영화는 논쟁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컬트 영화는 상식을 벗어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상식은 '영화는 모름지기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충고로부터, '영화는 이러이러한 것을 다루어서는(230)안된다'는 경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식을 깨는 곳에서 컬트 영화는 출발한다. 기존의 영화형식을 거부하는 영화, 그 사회의 정치적, 윤리적 금기를 건드리는 영화, 소외집단의 편에 서는 영화, 영화의 존재 자체가 '사건'이 되는 영화, 이런 영화들은 언제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그 논쟁 속에서 컬트 영화는 태어난다. -230,232쪽

(7)컬트 영화는 단순히 구경거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컬트 영화를 관람함은 일종의 제사/의식에 참여함과 같다. (전략) 관객들은 컬트 영화를 한번 '소비'하고 잊어버리는 다른 영화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컬트 영화를 관람하는 시간과 공간은 마치 일상을 벗어난 신비로운 체험의 자리와도 같다. 그것은 관객들의 삶 속에 '살아 숨쉬는' 경험으로 남는다. 그래서 컬트 영화는 종교를 모르는 사람에게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게 하고, 마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마술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232쪽

(8)컬트 영화는 비평가들을 속이고, 영화이론을 믿지 않으며,제작자들을 배반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들 모두를 구원한다. 비평가들은 대부분 가장 많은 사람이 동의하리라고 여기는 기준으로 영화를 잰다. 그래서 컬트 영화는 그 기준에 '미달'됨으로써 비평가들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영화이론 또한 컬트 영화를 예상하지 못한다. 이론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컬트영화를 뒤쫓아오며 '설명'하고 '해석'할 때 뿐이다. 제작자들은 전혀 엉뚱한 관객들의 반응에 당황한다. 흥행의 공식을 컬트 영화는 여지 없이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컬트 영화의 주인인 관객들은 이렇게 고정관념을 깸으로써 영화가 이론과 자본과 '여론'의 노예가 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컬트 영화는 자신들이 '불온'하고 '불건전'하다는 딱지를 받기 일쑤지만, 그렇게 됨으로써 영화라는 문화현상이 사라져버리지않고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나가는 데 기여한다. 비평가들과 영화이론과 제작자들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232쪽

(9)컬트영화는 멈추어 있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재발견, 재해석,재평가된다. 컬트 영화는 소수의,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영화이다. 그러면서 컬트 영화 자(232)체도 소수파가 된다. 컬트 영화라 불리울 수 있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어렵사리(!)컬트의 대열에 낀 영화가 그 자리를 언제까지나 지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후략) (10) 컬트 영화는 부정을 통하여 긍정으로 가는 영화이다. 영화문화의 한쪽 모퉁이에 뚫린, 미래로 열린 창이 컬트 영화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컬트 영화는 정의될 수 없고, 정의되어서도 아니된다. -232쪽

컬트 영화의 발생은 한 사회의 극장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한 사회의 극장문화는 또한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컬트 영화라 불리우는 현상은 각 사회의 극장문화의 차이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중략) 기존의 보수적인 배급망을 타기 어려웠던 이 영화들은 처음 대학 캠퍼스나 소규모의 시네클럽들에서 틀어졌다. 그리고 이 영화들이 어느 정도 고정된 관객층을 확보하게 되자 주로 대도시의 학생 거주지역, 예술활동 중심지, 그리고 캠퍼스타운 언저리에 하나둘씩 레퍼토리 시네마(repertory cinema)라 불리우는 영화소극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계열화되어 있던 기존의 영화관들과는 달리 이 소극장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되었고, 돈을 벌겠다는 목표보다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영화들을 더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영화광들의 소박한(?)의도와, 자신들만의 문화공간을 갖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의 요구가 맞아 떨어져 생겨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34쪽

컬트 영화 출현의 기반인 소극장들이 '멸종'되어갔던 반면, 헐리우드는 컬트 영화시장에 주목하고 기존의 배급망을 통하여 컬트 영화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에 나온 <록키 호러 픽쳐 쇼우(Rocky Horror Picture Show)의 대성공이 하나의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중략)그러나 <록키 호러..>의 성공은 흔치 않은 예외에 속한다. 컬트 영화가 보여지는 공간은 갈수록 줄어만 갔는데, 비디오의 출현과 함께 컬트 영화광들은 비디오가 축복인 동시에 저주임을 깨닫게 된다. -236쪽

컬트 영화의 요람이자 보금자리였던 레퍼토리 소극장들이 거의 자취를 감출 무렵인 1980년대 초반, 비디오라는 새로운 영상매체가 등장하였다. 상류계층의 '노리개'정도로 인식되었던 비디오 플레이어는 점차 가격이 낮아지면서 급속히 일반에게 보급되었고, 이와 함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비디오 대여점은 사람들이 영상매체를 대하는 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편으로는 영화-비디오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영화사의 창고에서 잠자던 숱한 필름들이 -걸작이고 졸작이고 가릴 것 없이-비디오에 옮겨졌고, 한편으로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의 문화적인 의미가 새로워졌다.-237쪽

컬트 영화팬들에게 비디오는 복음처럼 들렸다. 이제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기다릴 필요 없이 언제나, 마음껏 볼 수 있었고, 아직 그 영화의 '진가'를 모르는 주위사람들에게도 손쉽게 일차 관람하길 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컬트 영화의 흥행으로 근근히 유지해오던 소극장들에게 비디오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일부는 아예 비디오 대여업-주로 외국영화, 독립영화,컬트 영화를 취급하는 -으로 방향을 돌려 새로운 갈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디오는 컬트 영화를 보는 기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곧 공동체의 관람경험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빼앗아갔다. 소극장들이 없어지고, 영화광들이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밀실에서 텔리비전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을 때 컬트 영화의 시대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진짜 컬트 영화와 진짜를 흉내내어 장삿속으로 만들어진 가짜 컬트 영화의 구별도 이제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컬트 영화라는 현상이 처음 나타났던 유럽과 미국의 경우이다. 컬트 영화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 애당초 없었던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될 수도 있다. -237쪽

영화의 경우는 우리나라 영화보다도 엉뚱하게도(?) 외국 영화에서 컬트 현상이 나타났으니, 다름아닌 '홍콩 느와르'의 선풍이 그것이다.그리고 여기에는 80년대 들어 소극장의 형태로 급속히 불어난 '재개봉관'들의 존재와 비디오의 광범위한 보급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의 홍콩영화붐에 불길을 당긴 것은 <영웅본색>이었는데, 이 '전설적' 영화의 개봉관에서의 흥행성적은 사실 신통치 않았다(서울의 경우 화양,명화, 대지극장에서 87년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개봉, 9만 4천 604명을 동원). 그러나 <영웅본색>은 뒷골목과 변두리의 '동시상영'프로가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주인공의 옷차림과 제스추어를 모방하고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되풀이해 보는 청소년 집단-'주윤발 신드롬'에 걸린(?)-이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238쪽

'개봉관 실패 -> 재개봉관 성공'의 과정은 <천녀유혼>의 경우에도 반복되었는데, 여기에 '극장에서의 실패 -> 비디오로 재평가'라는 새로운 현상을 <열혈남아>가 보태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한국적인 '컬트'현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물음과는 별도로, 8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에 홍콩 영화가 파고들어온 과정,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 관객에게 수용되는 양상을 이해하는 데 이들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비디오문화의 또 하나의 부산물은 쏟아져나오는 프로 테이프 덕분에(?) 우리들이(238) 말로만 듣던 '그들'의 컬트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에게 컬트인 것이라 해서 '우리'에게도 컬트 영화일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나라에도 컬트 영화가 존재하느냐 혹은 앞으로 나타날 것인가 하는 데 있지 않다. 컬트를 이야기함은 진지하게 영화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고 '읽는' 방법의 깊이와 너비를 더해 줄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지한 사람들'속에는 상투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영화의 '재미'를 찾으려는 '영화광'들도 당연히 포함된다. -238,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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