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현대 예술의 거장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지음, 한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6월
구판절판


1. 비밀 속의 어린 시절,1932~1946 중 / (전략)이 시기부터 그의 주요 피신처는 스크린, 즉 캄캄한 영화관이었다. "인생, 그것은 스크린이었다"(각주 4: 이 표현은 또한 트뤼포의 '영화광 시기'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에릭 로메르가 사용하기도 했다)는 트뤼포의 문구는 이 유년 시절의 열정을 잘 요약하고 있다. 관객으로서의 트뤼포에 대한 첫 각인, 즉 조숙하고 비밀스럽고 날카롭다는 인상은 이 마법의 장소, 바로 앙리-모니에의 아파트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외로프 광장의 연속 상영영화관에서 형성되었다. -51쪽

점령기의 프랑스 영화에 대한 애정은-예컨대 1940년대 중반 어린 트뤼포가 남긴 수첩 기록에 의하면, 그는 <까마귀>를 14번, <인생 유전>을 9번, 클로드 오탕라라의 <연인Douce>를 7번 보았다-1946년 여름부터 시작된(53) 미국 영화의 대대적 상륙에 따라 또다른 천체의 발견, 즉 감독과 뱅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면서, 때때로 증오로 바뀌기도 했다. 전쟁이 시작된 시기에 모니크 이모를 따라 처음 간 이후, 트랑스아 트뤼포는 친구 로베르 라슈네, 클로드 티보다와 어울리면서 동네 영화관을 휩쓸고 다녔다.클리시 광장과 로슈슈아르 가 사이에는 20개가 넘는 영화관이 있었다. 클리시,아르티스티크,트리아농,게테 로슈슈아르, 팔레 로슈슈아르,록시,피갈,시네아크 이탈리앵 외에도 6,000석의 객석을 자랑하는 유명한 고몽 팔라스 극장도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점령기의 속박과 궁핍을 잊게 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이 꿈의 장소들을 에워쌌다. 다른 종류의 삶처럼 보이는 이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는 젊은 시네필에게 학교나 가족, 또는 사회보다 더욱 풍요롭고 자극적이며 매력적인 것이었다. 부모들은 점령기의 환경을 감수하면서 영화관,극장,쇼 무대를 찾아-53,54쪽

꿈속으로 도피했지만,자식들은 더 이른 낮 시간대에 바로 같은 장소에 틀어박혀 모의하고 학교 수업에 빠지고 가족과의 식사를 멀리했다. 트뤼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처음 본 200편의 영화는 학교를 빠지거나 돈을 내지 않고 슬쩍 영화관에 들어가 몰래 본 것들이다. 나는 이 멋진 즐거움에 대한 대가를 심한 복통이나 소화불량으로 치렀다. 이 증상은 모두 죄의식으로 인한 공포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죄의식은 영화가 야기하는 감정을 증대시킬 뿐이었다. 나는 또한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를 간절히 느낀 나머지 점점 더 화면 가까운 쪽에 앉음으로써 영화관의 존재를 잊을 수 있었다."부모가 연극 구경을 갈 때면 12세의 소년은 잠든 척 남아 있다가, 영화 시작 부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동네 영화관으로 달려갔고, 때로는 부모보다 먼저 집에 도착하기 위해 영화가 끝나기 전에 빠져 나왔다. -54쪽

13세 때 그는 피갈의 영화관에서 나올 때마다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일을 겪었다. "그 남자들은 해질 무렵 명확한 이유도 없이 어린이들을 노리고 뒤쫓는 것 같았다. 그것은 상당히 음산한 느낌이었다. 두렵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 두려움을 즐겼다."트뤼포에게 숨어서 본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영화보기의 조건이기도 했다. 당시의 문화 상황 안에서 영화애는 이때부터 레지스탕스의 게토와도 같은 것이 되어간다. 다시 말해 반문화라는 조직망을 결성하고 비밀장치와 암거래 등으로 조금씩 사적인 일기장의 형태를 갖춘 뒤, 충실한 입문자들과 그 내용을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공동체 바로 그것이었다.-55쪽

정성일의 추천사 중 /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사상 최고의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영화사상 가장 영화를 사랑한 감독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그 유명한 테제,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결국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을 한 다음, 그 말을 실천한 사람이다. 트뤼포는 영화의 모든 것을 시네마테크에서 배운 첫 번째 세대이다.그는 본 영화를 보고 또 보았다.그는 학교에 거의 다니지 않았으며, 그런 다음에도 책의 도움을 빌리지 않았다.하지만 트뤼포는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모든 것을 걸었다. – 6쪽 -6쪽

청소년기의 프랑수아 트뤼포는 하루 3편의 영화를 보고, 일주일에 3권의 책을 읽는 일에 명예를 걸었다. 혼자서든 친구와 함께든 상관은 없었지만 판단만은 스스로 내려야했다. 트뤼포는 라슈네에게 독학자의 극단적 자세를 옹호하는 고백을 했다.(중략) 영화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 트뤼포는 즉시 분류 방식을 습득해 각각의 영(72)화감독을 대상으로 하는 파일을 만들었다."그것은 프랑스 감독 마르셀 아부케르에서 시작해 미국 감독 프레드 지네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이 파일 속에는 그는 <에크랑 프랑세>,<시네비>,<시네 보그>,<시네 미루아르>,<파리 시네마>,<시네 다이제스트>,<시네 몽드>등의 잡지에서 오려낸 기사를 정리해놓았다. 나바랭 가 아파트의 작은 붙박이장은 트뤼포가 쌓아놓은 자료로 금세 꽉 차버렸다. 1947년 가을 부모의 꾸지람을 들은 그는 자료를 로베르의 방으로 옮겼는데, 이 자료는 여기서도 방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곳에서 두 소년은 자료와 책들에 둘러싸여 생활했다. 이것은 그들의 포위된 정신구조에 대한 공간적 은유이자 축적된 지식의 물리적 증거였고,또한 1950년대와 1960년대 '시네필'의 황금기를 특징짓는 영화 리스트 작성, 등급-72,73쪽

매기기, 필모그래피 수집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숭배 현상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트뤼포는 전후 영화 주간지 가운데 내용이 충실했던 <에크랑 프랑세>에서 지식의 공백을 채울 또 하나의 수단을 찾아냈다. 1948년 4월 13일부터 12월 7일 사이의 독자 투고란에는 '파리 나바랭 가 33번지 f 트뤼포'라고 서명된 글을 15편 이상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의 펜을 빌려주세요'라는 이름의 이 독자 투고란은 33세의 젊은 평론가 장 샤를 탸겔라가 담당하고 있었다. 타겔라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나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했고 새로운 작품 소개를 끝없이 요청했다. 나는 그의 열정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당시 생활의 절반은 영화해설 일로, 나머지 절반은 영화관 안에서 보내고 있던 나로서는 최고의 독자를 발견했던 것이다. 최소한 그 열정은 엄청났으니까."-73쪽

이런 형태의 수련은, 당시 젊은 영화광들과의 경쟁에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곧 놀랄 만한 '인간 시네마테크'로 간주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73쪽

더 어리고 더 반항적이고 더 가난한 트뤼포는 이 까다롭고 폐쇄적인 작은 시네필 집단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무언가를 증명해보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 즉 더 많은 영화를 보고 자신의 충동을 어는 정도 절제한 후 토론을 거쳐 확신을 세우고 최종 자료 분석과 글을 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연구 능력에 있었다. 그는 시네마테크 상영회에 리베트, 두셰,고다르,쉬잔 클로샹들레르와 함께 가장 충실히 참석했을 뿐 아니라,기사와 자료를 오려내 분류해 모아놓거나, 전문지를 읽고 많은 주석을 다는 일에 욕심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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