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리처 시리즈 5번째 책으로 <악의 사슬>을 시작했다. <하드웨이>, <1030>, <사라진 내일>보다 <61시간>이 더 재미있다고 얼마 전에 적었는데, <악의 사슬> 또한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다.
떠돌이 잭리처가 계속 사건에 휘말리는 것이 이 시리즈를 이어나가는 데 필수적 요소인지라, "뭐야 잭리처, 김전일이야 뭐야"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만 보니 잭리처의 사건 개입은 김전일보다 훨씬 개연성이 높다.
첫째, 악당은 어디에나 있다.
둘째, 잭리처는 구린 냄새를 맡는 데 선수다(관찰력/추리력).
셋째, 잭리처는 정의감이 투철한 히어로 주인공이다(본인은 낯간지러워 할 것 같지만).
넷째, 잭리처에게는 정의를 구현할 능력이 있다(지적/신체적 능력).
다섯째, 경찰과 협력하거나 정보를 얻는 등 사건을 깊게 파고들 수 있는 환경적 뒷받침이 가능하다(잭리처의 과거 헌병대 수사관 전력 덕분).
어느모로 보나 사건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특히 리처는 여자와 어린아이에 대한 폭력은 두고 보지 않는 사람이다.
잭리처 시리즈에는 '절대악'이라고 부를 만한 악당이 등장한다. 작가는 악당의 유년기라든지 악당의 인간적 면모라든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악은 악일 뿐, 동정의 여지는 없기 때문에 독자는 리처가 가하는 정의의 철퇴를 그저 시원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악은 어디에나 있다.
잭리처가 활동하는 주무대가 미국이므로 총기나 마약 범죄가 많이 등장한다. 땅덩이가 넓기 때문에 <악의 사슬>에서처럼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시골마을은 몇명의 사람에게 장악되어 버리고 범죄는 감춰질 수도 있다. 역시 미국, 무시무시하군.
그런데 가만, 우리나라에도 어마무시한 사건이 있지 않았나. '버닝썬 게이트' 말이다. 유명인, 경찰유착, 마약, 강간, 성매매, 불법촬영물유포 등 더럽기 짝이 없는 사건. 우연히 버닝썬 클럽에 들어간 잭리처가 불법 현장(특히 물뽕 먹여 여성 강간하는 현장)을 발견한다면? 리 차일드씨, 한국에는 총기가 없을 뿐 소재가 될 사건은 많답니다..
악당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혹은 만들어지는가.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를 학창시절에 피상적으로 배우면서, 나는 백지설에 강하게 끌렸었다. 인간은 백지상태로 타고나고 거기에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는 이론. 지금은 찬성하지 않는다. 백지로 타고나는 인간은 없다.

▶ <굿 미 배드 미>는 스릴러소설이지만, 싸이코패스 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녀의 극복기에 더 가깝다.
예전에 <굿 미 배드 미>를 읽고 쓴 리뷰에도 적었지만, 내가 아주 좋아하는 드라마 <너를 기억해>에도 나온 늑대이야기가, 지금의 내가 가진 악에 대한 생각과 가깝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살고,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는 것.
나는 그 어떤 사람도 착한 늑대만, 또는 나쁜 늑대만 갖고 태어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다만 태어날 때부터 어느 한 쪽이 유독 크고 힘이 센 경우는 있을 것이다. 보통은 비등비등 하겠지만.
▶드라마 <너를 기억해> 포스터는 완전 로코스타일이라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절대로 로코가 아니고, 범죄심리스릴러물이며, 장나라는 저렇게 섹시한 이미지로 나오지 않고, 로맨스는 있으나 비중이 적다(그럼에도 설레게 하는 포인트들이 적절히 들어가 있어 취향저격).
그런데 '착한' 늑대가 가진 특성과 '나쁜' 늑대가 가진 특성이 무엇일까? 인간이 보이는 행위는 결과에 불과할 뿐 늑대의 특성 자체는 아니다. '나쁜'이라는 것이 곧 '사람에 대한 폭력' 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착한'은 타인에 대한 관심, 공감능력, '나쁜'은 그 반대쯤 되려나.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을 뒤늦게 정주행 중인데, 이수정 교수님이 싸이코패스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도 그가 가진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비범죄적 방법이 있다면 범죄자가 되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취지로 이야기 하셨다. 그렇다면 유독 크고 힘이 센 나쁜 늑대를 갖고 태어난 사람도 나쁜 늑대에게 목줄을 잘 채우고 다스린다면 나쁜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을 터이다.

▶ <범죄영화 프로파일>은 책으로도 나와 있다. 정리된 언어로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이다혜 기자의 매끄러운 진행과 이수정 교수님의 명쾌한 말투를 듣는 즐거움은 덜할 것 같지만.
그런데 착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법, 나쁜 늑대에게 목줄을 채우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어린시절에 보호자인 어른들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다. 그 시기에 나쁜 늑대가 마음껏 덩치를 불려 버리면, 그 뒤에는 휘둘리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제발, 출산하라고 돈을 주지 말고 이미 존재하는 아이들의 양육에 심혈을 기울이면 안 될까? 이수정 교수님이 일갈하듯 "폭력이 있는 가정은 더이상 가정이 아니"니, 가정을 지키려 하지 말고 아이를 지켜주면 안 될까? 아이의 건전한 양육을 위해 아무리 비용을 쏟아부어도, 그로 인해 예방될 범죄피해를 생각하면- 수사, 재판, 수감에 들어가는 비용, 피해자 지원비용 등은 어마어마 할 것이다 - 절대로 과하다 할 수 없을 텐데.
이수정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가정폭력 범죄자의 유형 중에는 '가부장적 사고'로 인해 아내와 아이들을 본인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그들을 대상으로만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딱히 잘못이라 여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유형은 교육과 상담을 통해 어느 정도 교정의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착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방법으로 독서, 특히 고전을 읽는 것이 권장될 수 있을 터인데, 그 고전이 가부장적 사고에 찌들어 있다면? 스스로 착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쁜 늑대가 그것을 훔쳐 먹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고전 중에 여성을 비하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신경 써서 여성서사를 읽혀야 하는 이유다. 남성서사 위주로 읽어온 나 역시 많이 읽어야 하겠고.
양육의 책임을 부모에게만 전가하지 말고, 정부가 어떻게 해주겠지 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어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주변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면 좋겠다. 아이들이 마음을 의지할 곳, 착한 늑대를 키워나갈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곳, 좋은 어른과 좋은 사회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곳. 그런 공공의 장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