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라는 단어의 뜻은 1895년 4월 27일 비평지 <애서니엄 thenaeum)>의 리뷰 란에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역량을 품고 있는˝ 여성을 묘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사실상 바뀌지 않았다. 한 세기 전 입센Henrik Iben 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말했듯 페미니즘은 ˝다른 모든 것 이전에 나는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진술이다. - 49쪽, <백래시> 프롤로그
2000년대 중반에 이르게 되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 중요한 인식론으로 자리 잡고, 2010년대 중반이 되면 공공연하게 ˝자기 밥그릇 싸움에 혈안이 된 무뇌아적 페미니스트˝ 와 같은 말이 등장하게 된다. 한국 사회는 페미니즘의 수혜 아래 있었지만, 그 과실은 오히려 반페미니즘적 의제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여성에 대한 후려치기‘와 ‘역차별의 감각‘이 사회에 스며든다. 꼴페미-된장녀-김치녀로 이어지는 온라인에서의 여성 혐오 표현은 IMF 이후 펼쳐진 백래시의 큰 자장 안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결국 여성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은 더 견고해졌고, 여성에 대한 물리적 폭력 역시 점증했다. 대중문화의 여성 혐오는 더욱 노골적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헬조선‘의 세계에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부당함이나 어려움을 설명할 언어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여성들이 페미니즘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반격에 대한 반격으로서, 여성들은 다시 또 페미니즘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집단적으로 축적된 경험의 기록으로부터 우리는 역사가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여성의 역사는 계속되는 백래시에 부딪히고, 그러면서 퇴보하기도 하고 우회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멈추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앞서간 사람들이 그려 놓은 지도 안에서, 비록 협로일지라도, 다음 발걸음을 놓을 길을 발견하는 일일 터다. - 14,15쪽, <백래시> 손희정 해제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요,"라며 신중하게 입장을 밝히는 일종의 말버릇이 유행하는 때가 있었다. 나 또한 신중파였기 때문에 이런 언어를 썼을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오염되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나의 의견이 왜곡되고 상대로부터 곧바로 튕겨져 나와 버릴 염려 때문에,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이 "내 말이 여성과 남성을 편 가르려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논리적으로 비춰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손한 태도로 말을 가렸다. 지금도 나는 내 말을 검열하는 편이지만, 가부장제의 여성 억압이라는 논제에 있어서 '객관성'과 '중립성'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이제 안다. 멀고 멀고 아주 먼- 그 어떤 계급도 생기기 이전에 이미 여성은 억압당하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는 것만이 진실이다. 남성청자에게 이 문제에 관해 '중립적, 객관적, 논리적'인 사람으로 비춰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진짜 전하고 싶은 논지에서 멀어진다. 페미니즘 의제만 나오면 팔짱 끼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사람을 굳이 설득하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어차피 듣지 않을 자를 청자로 세울 필요는 없다.
그 와중에 간혹 우호적인 청자를 만나면 참으로 기쁜데.. 지금 자주 보는 남성 동료들이 그런 편이라 참 좋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백래시>는 1990년대 초에 미국에서 출간된 책이지만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모습 또한 설명해준다. 페미니즘이 부상하면 할수록, 반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은 이미 완성되었다면서 현재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또는 일어나지도 않은 문제들)을 페미니즘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내용들을 살짝 비틀어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왜곡된 통계를 언론에서 떠들어대기.
<백래시> 1장에서 다루고 있는 남자 품귀 현상, 불임 유행병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20대 중반쯤 되면 여성들은 좋은 남자를 빨리 잡아서 결혼하고 노산이 되기 전에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누구 할 것 없이 주변 어른들은 하나같이, '남들이 채가기 전에 빨리 잡아라'면서 나를 위한 조언이라 한다. 나는 그 사람들이 정말 나를 생각해서 좋은 의도로 한 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째서 유독 여자에게만 결혼 상대가 '품귀' 되는가? 왜 남자에게는 '노산'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가? 정자는 안 늙나?
고학력/고수입 여성보다 고학력/고수입 남성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고학력/고수입 여성의 결혼이 더 어렵다 여겨지는 것은 부부 중 여성보다 남성이 더 고학력/고수입이거나 적어도 비등해야 한다는 생각, 고학력/고수입 남성은 나이 들어도 어린 여성의 상대가 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어렵다는 생각,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어쨌든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떄문일 것이다. 고학력/고수입 여성은 싱글일 때 훨씬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일찍 결혼해야 한다는 압박을 주면? 경력에 매진하기 힘들어진다. 일부는 결국 가정에 들어 앉혀지게 될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이 싱글 여성의 정신 건강에 대해 확인한 사실은 단 한 가지다. 그것은 바로 고용이 싱글 여성의 정신 건강을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1983년의 획기적인 인생 흔적Lifeprints 연구는 싱글 여성에게 정신적 고통을 야기하는 중요한 원인은 부실한 결혼 가능성이 아니라 부실한 고용 상태임을 보여 주었다. 여성의 건강에 대한 20년치의 연방 데이터를 검토한 사회연구소와 건강통계국의 연구자들 역시 유사한 결론을 내놓았다. “우리가 검토했던 세 요인[고용, 결혼, 자녀] 중에서 여성의 건강과 관련 있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일관된 요인은 단연 고용이다.” 이들은 일을 하는 싱글 여성은 자녀가 있건 없건 집에 있는 기혼 여성보다 심 신의 건강이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싱글 여성을 하나의 범주로 다룬, 보기 드문 장기 연구에서 연구자 폴린 시어스 Pauline Sears 와 앤 바비 Ann Barbee는 이들이 추적했던 여성들 중에서 싱글 여성들의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일을 했던 싱글 여성들이 가장 만족도가 높았다. - 96쪽, <백래시> 1장
<백래시>가 보여주는 사회학자들의 오류 가득한 연구들, 그럼에도 입맛에 맞는 연구라면 득달같이 신문에 대서특필하는 언론들, 연구의 오류를 지적하는 반대의견에 대한 묵살은 충격적일만큼 적나라하게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여준다. 여자들은 집에 가야 한다. 여자들이 겪는 모든 문제는 페미니즘이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30대 직장 여성의 '불임 유행'의 원인이 "성병인 클라미디아를 퇴치하는 데 더뎠던 의사와 정부 관료들의 태만 탓"(89쪽)일 수 있다는 점 등 중요한 팩트들을 쏙쏙 빼먹는 행태들. 정말 후지다.
맞벌이 가정의 워킹맘이 힘들다면 그 이유는 "가정에 있어야 할 여성이 무리하게 사회에 나가서"가 아니라, 가정에서의 업무 분담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가 돈을 벌어오길 원하지만, 집안일은 나누어 하기 싫은 남편들 때문이다. 싱글 여성이 힘들다면 그 이유는 "결혼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독립한 여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선과 여성에 대한 범죄가 만연한 현실 때문이다.
<백래시> 읽기, 글씨가 매우 빽빽하지만 즐거운(동시에 빡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수전 팔루디의 요목조목한 지적이 통쾌함과 동시에 입맛이 쓰다..
인용
* 해제: 손희정 평론가의 해제, 좋다!!
무엇보다 백래시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부당한 것에 ‘NO‘라고 말하는 여성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좌절의 회로에 머물게 한다는 점에서 악질적이다. 여성의 불행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면서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백래시」는 그 불행의 원인을 지목하는 손가락의 방향을 페미니즘에서 반페미니즘적인 반동으로 ‘제대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선언˝이라 할 만하다. - 10쪽
팔루디의 말처럼, 여성들의 비참과 불행은 페미니즘 탓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충분하 지 않은 탓일 뿐이다. - 14쪽
* 15주년 기념판 서문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페미니즘의 기본 정신들이 상업적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마치 세 개의 황금 사과처럼 우리 발밑을 굴러다닌다. 경제적 독립이라는 페미니즘 윤리는 구매력이라는 황금 사과가 되었다. 그리고 이 구매력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카드 빚과, 터져 나갈 것 같은 옷장, 그리고 절대 끝나지 않는 허기를 안겨 줄 뿐이다. 허기가 절대 채워지지 않는 건 물질적인 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결정이라는 페미니즘 윤리는 ‘자기 계발‘ 이라는 황금 사과로 변신했다. 이 자기 계발은 주로 외모와 자부심, 그리고 젊음을 되찾으려는 헛수고에 바쳐진다. 그리고 공적 주체라는 페미니즘 윤리는 언론의 관심이라는 황금 사과로 탈바꿈했다. 이제는 이 세상을 얼마나 많이 바꾸는지보다 이 세상의 틀에 얼마나 멋지게 맞춰 사는지에 좌우되는 인기를 좇고 있다. - 27,28쪽
페미니즘 혁명은 한 번도 극악무도한 경쟁이나 승자독식의 윤리에서 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경제적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이 혁명은 시궁창에 처박히고 말았다. 경제적으로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 성공을 사회 변화와 책임감 있는 시민 정신, 창조적인 인간성의 증진, 성숙하고 생기 넘치는 공적 세상의 건설이라는 더 크고 의미 있는 목표들로 전환시키는 법을 찾지 못했다는 반쪽짜리 진실에서 여성들은 환멸을 느낀다. - 29쪽
* 제1장 프롤로그
‘남자 품귀 현상‘에서부터 ‘불임 유행병, 여성의 번아웃, ‘유해한 어린이집‘에 이르는 소위 여성의 위기는 여성이 처한 실제 삶의 조건이 아니라, 미디어와 대중문화, 광고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닫힌 시스템 안에 그 기원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순환은 여성성에 대한 거짓된 이미지를 영속시키고 과장한다. - 39쪽
진실은 지난 10년간 여성운동이 어렵사리 쟁취한 한 줌의 작은 승리를 무력화하려는 노력, 여성의 권리에 대한 강력한 역습, 반격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역습은 대체로 은밀하다. 이 역습은 대중문화라는 허울을 쓴 히틀러식의 거짓 선동으로 뻔뻔하게 진실을 거꾸로 세우고, 여성의 지위를 고양시킨 모든 조치들이 사실은 여성의 지위 하락을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반격은 세련되면서도 진부하고, 얼핏 보기엔 ‘진보적‘이지만 동시에 보란 듯이 후지다. (…) 하지만 지난 10년간 여성들이 불행해진 것은 (여성들이 아직 손 에 쥐어 보지 못한) ‘평등‘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평등에 대한 여성들의 탐색을 중단시키려는, 심지어는 역전시키려는 압력이 점점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 42,43쪽
이런 사건들이 ‘반격‘인 것은 항상 여성의 진보‘에 대한 대응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대응을 촉발시킨 것은 기반암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은 여성 혐오만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개선하려는 현대 여성들의 각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 44쪽
반페미니즘적 반격은 여성들이 완전한 평등을 달성했을 때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커졌을 때 터져 나왔다. 이는 여성들이 결승선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여성들을 멈춰 세우는 선제 공격이다. - 45쪽
여성의 권리를 상대로 한 반격은 그것이 정치적인 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전혀 투쟁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성공을 거둔다. 그것이 사적인 색채를 띨 때, 한 여성의 내부에 똬리를 틀고 안에서 그녀의 관점을 바꿔 버릴 때, 그래서 그녀가 억압은 모두 머릿속 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상상하게 될 때, 그리고 결국 그녀 역시 자발적으로 이 반격에 동참하게 될 때 반격은 가장 위력을 갖게 된다. - 48쪽
반격의 수식어들은 반격이 자행하는 모든 범죄들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린다 - 49쪽
* 제1부 신화와 회상
* 제2장 남자 품귀 현상과 불모의 자궁
정신 건강 연구자 제럴드 클러먼Gerald Kerman과 미르나 와이즈먼Myrna Weissman은 여성 우울증에는 두 가지 큰 원인밖에 없음을 확인했다. 그것은 바로 낮은 사회적 지위와 결혼이었다. - 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