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음을 치료하는 법
로리 고틀립 지음, 강수정 옮김 / 코쿤북스 / 2020년 4월
평점 :
"심리 치료를 계속 받는다면 더 나은 유년기에 대한 희망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래야 더 나은 성년기를 만들 수 있어요. - 457쪽
지인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인데, 아마 추천이 없었다면 스스로 고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만족스런 독서였으니, 역시 믿을 만한 추천은 받아볼 가치가 있다.
로리 고틀립은 심리치료사로, 이 책은 그의 실제 경험에 기초한다. 그러나 내담자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섞기도 하였다고 하므로, 어느 정도는 픽션의 요소가 있다. 읽는 느낌도 약간 픽션 같다. 처음에는 미드 보는 느낌이 들어 재미있으면서도 그저 그 정도였는데, 뒤로 갈수록 감동이.. 놀라움이.. 오, 삶이란 무엇인가.. 그러면서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애정이 솟아나는 느낌이 든다.
여기 등장하는 '환자'는 다섯이다.
1. 존: '스트레스 누적'을 호소. 잠을 잘 못 자고 아내와의 관계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 사람들에 대한 짜증을 표출하면서 '멍청이들을 잘 다룰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함.(16쪽) - 처음에는 진짜 또라이 같았다.
2. 줄리: 서른세 살의 대학 교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암 진단을 받음.(49쪽)
3. 리타: 우울증으로 내원한 이혼 여성. '잘못된 선택들'이라고 믿는 것들과 제대로 살지 못한 인생에 대한 회한을 토로. 한 해동안 삶이 나아지지 않으면 '끝낼' 계획이라고 함. (224쪽)
4. 샬럿: 나이는 스물다섯. 지난 몇 달 동안 '불안'을 느꼈다고 호소. 최근에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함. 일이 '싫증'난다고 말함. 부모와의 관계가 어렵고, 사교 생활은 바쁘지만 진지하게 연애를 한 적은 없음. 긴장을 풀기 위해 밤마다 '와인 한두 잔'을 마신다고 함. (264쪽)
5. 로리(저자 본인): 뜻밖의 이별 후 내원한 40대 중반의 환자.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몇 번만 치료를 받을 생각'이라고 함.(27쪽) - 저자는 물론, 다른 심리치료사(웬델)에게 치료를 받는다.
이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문제와 환경은 다양한데, 이런 다양한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이사이에 자기 자신의 스토리(어떻게 심리치료사가 되었는지, 어떻게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지:정자 기증, 심리치료를 받게 된 이유와 경과)를 함께 들려주면서 자칫 난삽해지기 쉬운 다양함을 잘 엮어냈다. 이 두꺼운 책을 관통하는 가장 굵은 줄기는, 사람과 삶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정신의학 용어나 심리치료 용어들이 나오고 살아간다는 것의 불확실성, 거기서 오는 불안, 늘 어려운 관계맺기, 죽음이라는 질문 등 귀담아 들어둘 만한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결국 나를 가장 감동하게 한 것은 저자의 내담자들을 향한 연민과 애정이었고, 그 자신이 스스로 내담자가 되어본 만큼, 의사와 환자로서 '그들'과 나를 경계짓지 않고 함께 깨달아가는 연대관계로 그려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심리치료를 꼭 받아보고 싶어진다.
나는 관계에서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그러니까 심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한다. 제아무리 최고의 관계라고 해도 가끔은 상처를 입고, 누군가를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이따금 상처를 주게 되는데, 그건 우리가 사람이어서 그렇다면 이야기다. 우리는 연인이나 부모, 자녀, 친구에게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거나 받을 텐데, 상처 없는 친밀한 관계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정 어린 친밀한 관계의 좋은 점은 회복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심리 치료에서는 이 과정을 불화와 회복이라고 부른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 관계에서 불화를 겪더라도 그걸 엄청난 재앙처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서 불화가 회복되는 걸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불화를 감내하고, 그것이 관계의 끝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며, 어쨌든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까지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 522,523쪽
회복탄력성, 많이 강조되는 부분이다. 부모가 아이 앞에서 싸우는 게 좋지 않다고만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싸우면서도 아이 앞에서는 아무 문제 없는 척 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서로의 불만을 잘 이야기하고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며 결국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 물론 폭력이나 폭언이 난무하는 싸움은 안 보여주는 게 낫다!
역시나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눈길을 많이 끌었다. 샬럿은 부모가 적절히 이끌어주지 못해서 '너무 빨리 운전대를 잡아버린' 케이스다. 어느날 상담시간에, 샬럿은 과거에 본 광고 이야기를 하며 펑펑 운다. 그것은 엄마 개가 운전을 하고 있고, 뒷좌석에 앉은 아기 강아지가 잠이 들며, 이에 엄마 개가 차를 멈추고 따스한 눈으로 강아지를 바라보는데, 강아지가 깨서 찡찡대자 엄마 개가 한숨을 쉬며 다시 운전을 하는(이거 매우 공감된다), 귀엽고 재미난 광고다. 그런데 샬럿은 왜 펑펑 울었을까.
사람들이 스스로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어렸을 때 표현에 제재를 받았기 때문일 수 있다. 아이가 '나 화났어'라고 말하면 부모들은 보통 이렇게 얘기한다. "정말? 그렇게 사소한 일에? 너무 예민하구나!" 또 아이가 슬프다고 하면 부모들은 말한다. "슬퍼하지 마. 어머, 저것 좀 봐, 풍선이네!" 그리고 아이가 무섭다고 하면 또 이렇게 말한다.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아기처럼 굴지 마." 하지만 심원한 감정을 영원히 봉인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샬럿의 삶에는 운전석에 앉은 엄마 개가 없었다. 엄마는 우울감에 젖어 늦게까지 파티를 전전하며 술을 마셨고, 아빠는 출장으로 자주 집을 비웠다. (...) 그런 상황에서 샬럿은 너무 일찍 어른처럼 굴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테면 면허도 없이 삶의 운전대를 잡은 미성년 운전자였던 셈이다. - 321, 322쪽
마음이 아팠다. 그냥 보면 매일 와인 한두잔 마시는 정도라고 변명하면서(사실은 더 마심), 늘 정착할 생각이 없는 남자를 만나다가 상처받는 걸 반복하는 샬럿은 다소 한심한 인사로 보이지만,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연민과 함께 애정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서 처음에 정말 별로였으나 나중엔 많이 좋아지는 인물은 존이다. 존 이야기는 자세히 하면 스포가 되므로 생략한다. 눈물 콧물 짜냈다는 건 안비밀ㅜㅜ
저자 자신의 시련은 위에 쓴 것처럼 남친의 갑작스런 이별 통보였는데, 그것이 그동안 묻어두었던 수많은 불안들을 폭발시킨다. 처음 내담해서 저자는 심리치료사 웬델 앞에서 엄청나게 울고, 남친에 대한 험담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심리치료사로서 일하는 저자 자신도, 중은 제머리 못 깎는다지, 자기가 상담받을 때는 보통 환자들과 큰 차이가 없다. 저자가 진솔하게 풀어놓는 경험담이 재미있다. 그러나 심리치료가 계속되자, 겉으로 드러난 이별 외에 깊은 내면에 존재하던 심리적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저자는 '행복'에 관한 책을 쓰기로 출판계약을 맺고 책을 쓰려고 붙들고 있으나 진도는 나가지 않고 너무너무 괴롭다. 또 저자는 진단명 불명의 증상 때문에 고통을 받지만 남친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
웬델은 내가 그에게 털어놓은 관심사를 나열한다. 이별, 책, 나의 건강, 아버지의 건강, 아들의 성장, 내가 하는 얘기에는 전부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언제까지 살게 될까? 죽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중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웬델에 따르면, 나도 내 환자처럼 나만의 대처 방식을 만들어냈다. 내가 내 손으로 인생을 망친다면, 그것이 일어나길 기다리지 않고 내가 직접 죽음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꼭 그걸 원한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 그걸 선택하겠다는 것. 나무에 복수하기 위해 내가 앉아 있는 가지를 잘라버리는 것처럼. '맛 좀 봐라, 불확실성아!'
통제력의 한 형태로서의 자기 파괴, 나는 이런 역설로서 내 마음을 감싸려 했다. 죽음이 일어나기 전에 죽음을 설계하는 것처럼, 끝이 빤한 관계를 지속한다면, 작가로서의 이력을 엉망으로 만든다면, 몸의 이상을 직시하는 대신 두려움 속에 숨어버린다면, 나는 살아 있는 죽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내가 지배하는 죽음을. -365쪽
또 저자에게는 "누군가 너에게 죄책감이라는 소포를 보냈다고 해서 네가 그걸 꼭 수령해야 하는 건 아니야."(415쪽)라고 말해주는 멋진 아버지가 있었지만(아 정말 너무 멋지지 않나?), 어머니와의 관계는 많은 딸들이 그렇듯 녹록치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성인이 된 후에도 이어져 왔는데, 심리치료가 이 관계에도 조금은 진전을 가져다 준다.
(...) 우리는 오래된 패턴에 휘말렸는데, 엄마는 당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내가 뭔가를 하길 원하고, 나는 그걸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고 싶어 한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잭도 나를 그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최선이라는 구실을 내세우며,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식을 통제하려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엄마와 나는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해도 가끔은 소름이 끼치도록 비슷할 때가 있다.
(...)
엄마의 전화 한통이 이 모든 걸 수면 위로 불러낼 줄 누가 알았을까. 모녀의 해묵은 짜증 밑에 엄마가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영원히 머물러주길 원하는 염원이 있다는 걸?
'삶의 본질은 변화이고 사람들의 본질은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라던 웬델의 말이 생각난다. (...) 그런데 이 나이대에선 감정에도 노안이 오는 건지 모른다. 더 큰 그림을 보려면 멀찍이 물러서야 한다. 여전히 불평투성이더라도 지금 지닌 것을 잃게 되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기 위해서는. - 504~506쪽
로리 고틀립의 테드 강연도 있는 모양이다. 틈날 때 들어보고 싶다.
그런데, 서재 글에서 바로 영상 볼 수 있게 띄우는 방법 무엇인가요? 예전에 찾아봤더니 다락방님이 친절한 설명글을 올리신 적이 있던데, 다시 찾아보려니 안 찾아져요 ㅠㅠㅠ
-> 친절하신 다락방님이 댓글로 알려주셔서 성공!!^^
심리 치료사의 침묵은 이제 진부한 영화적 클리셰가 되었지만, 침묵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자기 마음을 진정으로 헤아릴 수 없다. 말을 하는 중에는 머릿속에 머물면서 감정과 안전하게 거리를 둘 수 있다. 침묵은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과 비슷하다. 그 진공 속으로 쓰레기(말, 말, 더 많은 말들)를 던져 넣는 걸 그만두는 순간, 뭔가 중요한 것이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침묵을 공유할 때, 그것은 환자 본인조차 존재하는지 몰랐던 생각과 감정의 금맥이 될 수 있다. - P251
비록 부모의 규칙에 갇혀 있지만 아이들은 사실상 한 가지 차원, 즉 감정적인 차원에서만은 완전히 자유롭다. 아이들은 최소한 한동안은 남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울거나 웃거나 떼쓸 수 있다. 꿈도 마음껏 꾸고 욕망을 표출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비슷한 연령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자유를 느끼지 못하는데, 그건 이런 감정적 자유와의 접점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리 치료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다시 한번 감정적으로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 P367
가난한 집에서 자란 여자는 딸에게 새 구두나 장난감을 사줄 때마다 잔소리를 한다. "네가 얼마나 복 받은 아이인지 알기나 해?" 비판이라는 포장지에 싸인 선물. 그런가 하면 아들이 지망하는 명문 대학을 둘러보러 가지만 투어 내내 가이드와 학사 일정과 기숙사를 흠 잡아서 아들을 민망하게 만들고 입학 가능성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아버지도 있다. 부모들은 왜 이럴까? 자기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질투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그들이 가진 기회. 부모가 제공하는 경제적, 감정적 안정. 자식에게는 창창한 미래가 펼쳐져 있고, 자신에게는 과거만이 남았다는 사실.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모든 걸 자녀들은 갖게 해주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행운을 누리는 아이들에게 미움을 품게 되기도 한다. - P414
사과는 기만적일 수 있다. 사과가 내 기분 좋자고 하는 것인가, 상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것인가? 자신이 한 행동 때문인가, 아니면 나는 잘못한 게 없지만 상대가 잘못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인가? 그 사과는 누굴 위한 것인가? 용서는 더 어렵다. 심리 치료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억지 용서라는 표현이 있다. 이따금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상처를 가한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한 부모, 집을 턴 강도, 아들을 죽은 폭력배 같은 사람들을 말이다. 사람들은 선의를 갖고 충고하곤 한다. 용서할 수 없다면 분노에 사로잡혀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물론, 어떤 사람들은 용서를 하면 엄청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잘못된 행동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용서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믿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 P415
용서할 수 없다고 해서, 생각이 짧거나 충분히 강하지 못하거나 동정심이 부족한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하려는 말은, 용서를 하지 않고도 연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를 떨치고 앞으로 나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있는데, 특정 방식으로 느끼는 척하기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 P416
그래서 리타의 자녀들처럼 나도 엄마를 차단해버린 적이 있었다. 그 시기는 오래 전에 지나갔지만, 리타와 마주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울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내 고통이 아니라 우리 엄마의 아픔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엄마와 나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왔지만 지금처럼 엄마가 겪어온 삶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부모(자신의 부모 말고)가 마음을 털어놓고 속살을 드러내면서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는 걸 들어볼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모습을 보면 각자의 상황이 어떻든 부모의 삶을 새롭게 이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 P499
"네." 그가 말한다. "나는 또라이처럼 굴죠." 그러다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인다. "이따금."
최근에 존과 나는 이따금이라는 말의 아름다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 말이 우리를 얼마나 공평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스펙트럼의 양 끝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안락한 중간에 머물게 하는지에 대해. 그것은 흑백 사고를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 P5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