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과잉이라는데, 정치교육서 써줄 사람 어디 없수?
‘지방선거 겨냥 출판기념회 봇물’. 그간 정치·사회 분야의 출판에 주력해왔지만 1990년대를 거치면서 확연해진 매출 하향 곡선이 도무지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터라, 이런 기사 제목 하나에도 괜스레 심사가 뒤틀린다. “이런 홍보용 팸플릿에 다름 아닌 책들이 끼어드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 그러나 사실 이건 자신의 무능에 대한 애꿎은 화풀이일 따름이다. 서점에서도 ‘정치·사회’ 매대는 졸아붙다 못해 아예 코너 자체가 없어진 곳도 수다할 만큼 돼버린 사정이 그런 책들에 결정적 책임이 있거나 한 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정치·사회 관련서의 과도한 위축이 일개 출판 분야의 어려움 정도로 가벼이 여겨질 사안은 결코 아니란 점이 중요할 것이다. 이는 곧 한 사회의 정신적·지적 축적이 균형을 잃어간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생물다양성협약, 문화다양성협약처럼 ‘출판종다양성협약’이라도 맺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판사는 판결로 말하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출판인은 책으로 말하는 것이겠다. 따라서 그런 출판 현실을 타개해나가는 것 역시 거기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겠지만, 왠지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출판 현장에서 느끼는 답답함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정치 관련서로 국한해서 한번 보자. ‘거대한 사회 변화의 패러다임’까지는 일단 논외로 하자. 나아가 우리 사회 특유의 비틀리고 과잉된 ‘정치 관심’이니 극에 달한 ‘정치혐오증’이니 ‘인터넷에서의 카타르시스 효과’니 하는 따위도 건너뛰자. 설사 그게 주요한 원인이라 해도, 그것들만으로는 현실정치에 관한 책들이 죽어라고 안 팔리는 게 충분히 해명되지는 않는다. 왜냐? 아무리 “저놈, 아주 정치적인 인간이야!” 하는 말이 최악의 욕설이 된 세상이라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사람살이에 정치 아닌 게 없어서다. 하다못해 한 가족관계 내에서도 ‘정치’는 작동되는 것 아니던가. 그리하여 ‘개판’ 소리를 무시로 듣는 우리 정치판의 뿌리로까지 자분자분 더듬어가다 보면, 정치교육의 중요성에 새삼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제껏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정치교육 비슷한 것이나마 받아본 기억도, 그럴 기회도 갖지 못해왔다. 우리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어려서부터, 또는 작은 단위에서부터 성숙된 정치의식을 가꿔가도록 하는 데 전혀 관심을 둬오지 않은 것이다. 콩 심은 데선 콩 나오는 법이다. 민주시민으로서의 가장 기초적인 소양교육을 소홀히 한 채 언젠가는 ‘아름다운 정치문화’가 꽃피겠지 하고 기대하는 건 그저 허욕일 따름이다.
하여 그런 시각으로 정치 관련서들을 죽 일별해볼작시면, 과도한 단순화를 감수하고 말하건대 정치 비사를 위주로 한 폭로성 책, 특정 정파의 이해에 기반한 주장이나 정보를 담은 책, 특정 정치인의 홍보성 책, 그 한편엔 일반인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정치학술서들…. 그 속에서 ‘대중을 위한 정치교육서’는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듯 어렵사리 자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대중용 정치교육서를 쓴다는 게 무슨 정파적 글쓰기로 오해될 일도 아니겠건만, 묘하게도 출판 현장에선 정치교육서의 필자를 만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정치에 대한 대중교양서의 가치를 낮게 보는 게 아니라면, 그 많은 능력 있는 필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벌써 수개월째 정치교육서 기획안을 여기저기 디밀고 있는 처지이고 보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사족 한마디. 방송의 책 관련 프로그램에서건 이런저런 선정도서 목록에서건 현실정치와 관련된 책들은 늘 찬밥 신세다. 이유인즉슨 ‘정치적으로 너무 예민해서…’라는 것일 터인데,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도 유분수다. 사회적으로 합의가 필요한, 그래서 예민할 수밖에 없는 현재적 사안을 담은 책일수록 더 주목해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정치는 생물이라는데, 다 죽은 뒤 알코올에나 담아 구더기조차 생기지 않게 되어서야 관심을 가져줄 요량인 건가. 그러면서 ‘사회적 합의’에 목말라하는 듯 시늉하는 건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노릇이다.
(장의덕 도서출판 개마고원 대표) = 한겨레21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