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라스의 마녀 라플라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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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정말 미스테리한 작가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읽고 나선 꼭 다짐의 말을 한다.

내가 또 다시 히가시노 게이고 책을 읽으면 성을 간다!’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왜 잘 팔리는지 도무지 미스테리다. 애초의 다짐을 잊어버리고,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계속 읽어보지만 아무래도 모르겠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그나마 뒷이야기가 궁금하기는 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소설들 중에 뒷이야기가 궁금했던 적이 있었던가? 내 예상을 벗어났던 소설은 <몽환화>가 유일했던 것 같다.

 

옮긴이의 말에서 양윤옥 번역가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다작이면서도 태작이 드문 작가라고 말했다. 히가시노 게이고만큼 태작이 다작인작가가 있던가? 구멍이 숭숭 뚫린 허술한 플롯, 자동 인형인듯한 영혼 없는 캐릭터, 인터넷으로만 검색한 듯한 빈약한 자료 조사, 안개처럼 뿌옇고 흐릿한 세부 묘사, 읽다보면 어느새 바보가 된듯한 멍청한 대사.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재밌다고 하는 걸까? 도덕 교과서에 나올법한 이런 대사들 때문일까?

 

당신은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중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지 알려줄게.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고, 그런 인간들은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았든 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 아까 당신이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아니야. 이 세상은 몇몇 천재들이나 당신 같은 미친 인간들로만 움직여지는 게 아니야.

 

얼핏 보기에 아무 재능도 없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중요한 구성 요소야.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

 

사람들이 기욤 뮈소를 왜 좋아하는지 미스테리를 풀기위해 기욤 뮈소 전작을 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전작도 불가능하다. 어림잡아 80편이다. 기욤 뮈소 전작 경험으로 유추해 보건대, 전작한들 시간낭비일 공산이 크다.

 

애덤 그랜트는 <오리지널스>에서 걸작을 창작할 비법을 제시했다.

작업량을 늘리면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태반이 태작이다. 그럼에도 잘 팔리고 개중에는 훌륭한 소설도 아마 있을 것이다. 작품의 질을 떠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성실성만큼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만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와 운동량을 파악해내는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물리학을 활용해 그러한 원자의 시간적 변화를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까지 완전하게 예지가 가능하다......라플라스는 그런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 존재에는 나중에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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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6-05-1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왜 잘 팔리는지 도무지 미스테리다...
이거 공감입니다. (저도 게이고 책 읽을만큼 읽었죠. 2/3 정도는 읽었을 듯...)
꼭 만화대본소 작품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쳐다도 안봅니다...^^

시이소오 2016-05-16 13:03   좋아요 0 | URL
공감해주시는 분이 있다니 위로가 되네요.
저는 제 스스로가 `대중감각이 결여`된 인간이 아닐까 심히 괴로웠거든요. ^____^

:Dora 2016-05-1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성을 간다면 어떤 걸로...? 비이소오 히이소오 기이소오

시이소오 2016-05-16 15:21   좋아요 0 | URL
글쎄요. 본명을 갈아야죠. ^^;

:Dora 2016-05-16 15:56   좋아요 0 | URL
아닌 거 알면서도 끌릴 때가 얼마나 많은데요

시이소오 2016-05-16 16:16   좋아요 0 | URL
제 취향이 그렇다구요. 제 취향이 옳다고 주장하는건 아니에요. 히가시노게이고는 오히려 열등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다들 재밌다는데 난 왜 재미가 없을까. 도대체 문제가 뭘까, 하고여.

cyrus 2016-05-1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들이 다 읽는 책에 매력 한 점이라도 느끼지 못하면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남들이 다 읽는 책에 대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서평을 남길 때 망설여집니다. 괜히 악평을 남겼다가는 책 잘못 봤다는 의견을 들을까 봐 무서워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5-16 17:24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글쓰기가 무섭네요. ㅎㅎ
침묵하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푸른희망 2016-05-16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게이고의 성실성만큼은 인정하고 싶습니다,
몇몇 좋은 작품이 있긴 해요...다만...... 아닌것도 넘 많죠..
그리고 가끔 가르치려고 들어서 맘에 안들기도 하구요...

시이소오 2016-05-16 20:51   좋아요 0 | URL
몇몇 좋은 작품 읽자고 80편을 다 읽어볼수도 없고, 저는 포기해야겠어요 ^^;

2016-05-17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7 1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나 같을 땐 정말 놀랄 수밖에 없어요! 히가시노 게이고에 기욤 뮈소 (저는 더해서 코엘료까진데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를 알수 없는 1인 여기 추가합니다 ㅎㅎ

시이소오 2016-05-20 23:46   좋아요 0 | URL
앗, 힌님도요? ^^ 이럴땐 찌찌뽕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
 

21. 한국근현대사를 보는 눈

 

제국의 렌즈와 재현의 정치학

제국의 렌즈.

 

사진은 객관적이지 않다. 제국의 렌즈에 잡힌 조선인들은 그저 원주민에 불과했다.

 

윤치호가 본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윤치호의 협력일기. 박지향

 

윤치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은 사회적 다윈주의와 기독교였다. 그는 세상이 잔혹한 투쟁의 장이기에 3.1운동에도 반대했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윤치호는 또한 독실한 기독교도로 하나님이 전쟁을 진보와 이성을 향한 수단으로 만들어놓았다고 믿었다. 저자는 윤치호의 인간적 고뇌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에필로그에 적었다고. 로쟈의 말대로 일종의 스톡홀름증후군?

 

어떤 역사전쟁 관전기뉴라이트 사용후기, 한윤형

 

자칭 키보드워리어인 저자가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촉발한 역사전쟁을 정리하고 평가한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한윤형은 우선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적극 수용한다. 3.1운동 이후에 한국 민족주의는 전면화됐고 역사적 실체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분단국가를 수립한 김일성과 이승만은 사천년 단일민족을 두 동강냈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3.1 운동 때 이룬 합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로 김구에 대한 평가다. 저자는 김구의 격렬한 반탁 입장이 예기치 않게 친일파와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말한다. 셋째로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뉴라이트는 만한이 자본주의 덕분에 경제가 성장했다고 주장하지만 박정희식 모델은 자유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멀로 오히려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대한민국사의 주류세력은 일관된 기득권 세력이 있었던 게 아니라 기회주의자들의 역사였다고.

 

사상의 은사에서 사상의 오빠로. 리영희 프리즘. 고병권 외

 

1997년 겨울 <한겨례신문>의 수습기자들이 사내 교육으로 리영희 선생의 강의를 들었지만 모두 잤단다. 한때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이상하게 변해 사회와 나라를 걱정했던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인 풍경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한윤형에 따르면 그때와 달리 대학 진학률이 달라졌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자본이 자신을 착취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리영희 선생은 변혁은 반드시 온다는 신념을 거듭 피력했다. 그는 국가 사회의 지배세력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박탈하고 모두에게 공정히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는다면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말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과도 겹친다.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혁명적 과정의 두 가지 계기를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새로운 삶의 창안으로 정리한다. 문화대혁명의 실패에 대해 지젝은 문화대혁명이 과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과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지젝은 베케트의 말을 인용해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고 말한다.














 

로자의 리스트11. 후쿠자와 유키치 읽기.

 

22. 불한당들의 세계사.

 

부도덕하고 참혹한 미국사를 고발하다. 권력을 이긴 사람들. 하워드 진.

 

권력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시각,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는 그가 보기에 미국사는 노예 소유주, 채권자, 인디언 학살자, 군국주의자, 땅 투기꾼, 거대 기업 등 주로 부유한 백인을 위한 역사였다. 그러나 한편 역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민중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 승리했던 과거의 숨은 사건들이 그가 품은 희망의 근거다. 저자는 미국을 건설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국민은, 혹은 미국사의 진정한 영웅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인물이 아니라 간호사, 의사, 교사, 사회사업가, 지역운동가, 병원 잡역부, 건설노동자 등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나라를 뽑자면, 미국과 이스라엘이 아닐까. 일반인들이 미국의 사악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 탓이다. 제발, 탐 크루즈는 미국이 아니다! 그런 사악한 나라에 전작권을 되돌려 주는 건 박근혜 정부의 사악함도 그에 못지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미 제국의 민중사>

<오만한 제국>

<미국민중 저항사1,2>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살아있는 미국 역사>

<권력을 이긴 사람들>

 

1권력 혹은 불한당들의 세계사,

1권력, 히로세 다카시.

부의 제국 록펠러, 론 처노.

 

미국의 재벌 가문 모건과 록펠러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세계를 조종했는지 추적하는 <1권력>은 말하자면 이 불한당들의 세계사.

시작은 미국의 남북전쟁이었다. J.P 모건은 무기를 판매하면서 6배의 차익을 남겼다.

 

1901년 당시 백수의 왕 사자라고도 불린 필적할만한 거대한 구렁이 아나콘다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석유사업가 록펠러였다. 이 양대 자본가가 미국을 지배해왔다는 게 히로세 다카시의 주장이다. 20세기의 첫 대통령 올린 매킨리부터 레이건까지 내각의 66개 각료 자리를 조사해 본 결과 그 중 290개의 자리, 79퍼센터가 모건 록펠러 연합의 수족이었다. 1983년 기준 미국 매출 10위권 기업, “1위 액슨, 2GM, 3위 모빌, 4위 포드, 5IBM, 6위 텍사코, 7위 듀폰, 8위 인디애나 스탠더더 오일, 9위 소칼, 10GE”순위를 진짜 주인으로 바꾸어 나열하면 “1위 록펠러, 2위 모건, 3위 록펠러, 4위 모건 록펠러, 5위 모건, 6위 모건- 록펠러, 7위 모건, 8위 록펠러, 9위 록펠러, 10위 모건이 된다.

 

베트남전에서도 미국은 패배했지만 모건 록펠러 연합은 떼돈을 벌었다.

 

로쟈는 매카시는 빨갱이 사냥꾼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파시스트였지만 모건과 록펠러 같은 투기꾼에게 빨갱이 사냥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이 필요로 한건 빨갱이의 위협을 조장해서 전쟁을 고무하고, 그를 통해서 자기 소유의 기업이 거대한 이익을 올리는 것뿐이다. <....>파시스트나 행동대원은 투기꾼들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당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라는 대목을 강조한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이고 세상은 파시스트들이 아니라 투기꾼들이 움직인다는 게 히로세 다카시의 핵심적인 전언이라고. 남한사회라고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 재벌가 지도를 그려보면 10대 기업이 혈연관계로 거미줄마냥 얽혀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이 나라를 농단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오만하고 저급한 제국, 미국이 세계를 망친 100가지 방법, 존 터먼.

 

저자는 미국이 세계를 망쳐놨다고 주장한다. 무려 100가지 방법으로. 우선 환경파괴. 부시는 온실 가스 배출량을 규제하자는 교토의정서에 사인하길 거부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환상이거나 거짓에 불과하다. 부자들은 점점 부자가 되어가지만 지난 30년간 미국 가계 실질 소득은 늘어나지 않고 소득 불균형만 점차 심화되었다. 미국 기업 경영진의 봉급은 노동자 평균 임금의 475배에 이른다. 일본이 11, 영국이 22배인것과 비교해보아도 터무니없는 차이다.

 

한국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1제곱 킬로미터당 5천 톤으로 미국보다 8배 더 높다. 담배연기만 보면 죽을 듯이 피해가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왜 자동차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엔 관대한 걸까.  자동차 매연보다 담배연기가 더 인간의 건강에 위험한 걸까. 혹은 지구에??

 

핵환산금지조약이냐 핵항의금지조약이냐, 뉴레프트리뷰2.

 

몰랐다. 이런 잡지도 있었는 줄은. NPT핵확산금지조약 역시 불평등 조약이었다. 비핵국가들이 핵무기 개발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국제사찰 아래 원자력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였으나 프랑스조차 NPT가 열강들의 독점적 지위를 강화할 뿐이라면서 도의적 차원에서 협상을 거부했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NPT는 세계 평화를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진정한 핵무장 해제로 나아가려면 NPT를 폐기해야만 한다는 게 <뉴레프트리뷰>의 결론이다.

 














로쟈의 리스트12. 미슐레 읽기.

 

여자의 삶

여자의 사랑

프랑스 역사

프랑스 대 혁명사.

 

23.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레비는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구조된 자들에 대해 말한다. ‘익사한 자구조된 자라는 이분법적인 존재 방식만이 허락되는 사회라면 수용소와 구별 불가능하다. 우리 또한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우리 사회를 가르는 이분법이 낙오된 자성공한 자밖에 없다면 이 또한 절멸수용소와 다를 바 없다. 살아남은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떠올린 <신곡>의 한 구절은 이렇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놨도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레비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 건 수용소 바깥 역시 수용소임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우슈비츠 가자 용산.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라울 힐베르크.

 

이 당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이슬라엘은 수백톤의 폭탄을 쏟아부었고, 아이와 여자 할 것없이 수천 명의 팔레스탄인들이 학살당했다.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1961년 초판이 간행되어 홀로코스트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낸 고전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까지도 이를 넘어서는 저작이 없는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한다. 힐베르크는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프란츠 노이만의 독일 정부론강의를 듣고 나치즘의 지배 구조를 다룬 노이만의 대작 <베헤못:나치즘의 구조와 실행, 1933~1944>를 탐독한다. 노이만은 나치즘이 관료제와 군대, 대기업, 나치당이라는 4개의 독자적인 권력 블록으로 구성돼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힐베르크는 자신의 홀로코스토론에 이를 수용한다.

 

그는 미군이 접수한 나치 문제들 자료를 선별하는 기록보관소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 자신의 논문을 준비했다. 그가 맡은 자료는 책꽃이로 무려 8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그는 <유럽 유대인의 파괴>를 저술, 발표한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의 집대성뿐만 아니라 두 가지 새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첫째로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구조를 밝혀낸다. 그것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 과정이었다. 유대인의 개념 정의, 재산 약탈, 그 이후 절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는 이것을 파괴 과정이라 불렀고 여기에 참여한 집합적 총체를 파괴 기계라고 불렀다. 그가 보기에 전체 과정을 지휘하고 조종한 기관은 없었다


두 번째로 홀로코스트는 어떤 의도나 계획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치즘의 파괴 기계는 사실상 독일 주요 기관들이 모두 망라돼 있기 때문에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그 기계의 부속물이 될 수 있었다. 악은 일상화되었고 5백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의 재가 되었다.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인들은 이제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홀로코스트를 자행한다.로쟈의 말대로 노이만/힐베르크가 말하는 나치즘의 네 가지 권력 블록은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해 보인다. 관료제, 군대, 대기업, 나치당


 

내가 사는 세계의 이야기야. 거꾸로 가는 나라들. 판카즈 미시라.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이후 1970년 중반부터 증가해온 전문 정치인들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부상했다. 대부분은 특별한 훈련을 받았거나 능력을 소지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범법자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나랏돈을 챙기고 전리품을 나눠 갖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거 때마다 수행원과 AK 47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유세에 나다닌다.

 

RSS는 카스트와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힌두교인이 단결하여 힌두국을 설립하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단체다. 간디를 암살한 것도 RSS였다. RSS가 인도의 거대 정당, 교육, 노동조합, 문학협회 및 종교단체까지 장악하고 있다.

 

판카즈 미시라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과 에드먼드 윌슨의 평론을 읽고 자신이 잘 아는 세계로의 여행을 떠났다고. 윌슨은 <감정교육>에 대해 인생에서 뭔가를 볼 시간이 있었던 사람만이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유러피언 드림은 어디에 있는가.

유러피언 드림, 제러미 리프킨

암흑의 대륙, 마크 마조워.

 

아메리칸 드림의 대안으로 제러미 리프킨이 제시한 것이 유러피안 드림이다. 무엇보다도 공동체 의식과 삶의 질을 중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의 요체이며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비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비젼이 참혹한 암흑을 겪고 나서야 세워진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1870년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 사망자는 184천 명 , 1차 세계대전에서 800만명, 2차 세계대전에서 4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숨졌다. 계몽주의의 유산을 자랑하는 유럽에서 왜 이러한 참상이 벌어졌을까? 저자가 보기에 유럽은 거대한 묘지 위에 세워진 실험실이었다. 서로 경쟁하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의 교전장이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나치즘의 몰락과 공산주의의 붕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뜻한다는 시각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로쟈의 리스트 13. 인권의 발명 읽기

 

24.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의 철학, 사카이 다카시

폭력, 로제 다둔

폭력의 세기, 한나 아렌트

법의 힘, 자크 데리다

혁명이 다가온다. 슬라보예 지젝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로제 다둔이 <폭력>에서 지적한대로 <창세기>에서 신은 명령하고 명명하고 구분하고 분리하고 분류하는데, 이 모든 행위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폭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인류의 조상이 된 자는 아벨을 살해한 카인이다. 성서를 따르자면 인류의 역사는 살인자(카인)와 보호자()가 공모한 역사고, 폭력의 역사.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에서 폭력과 권력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동할 때, 곧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이미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갖는다. 때문에 정당화가 따로 필요한 폭력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론을 검토하며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면서 법의 구조이다.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조르주 소렐은 <폭력에 대한 성찰>에서 무력force violence를 구분한다. 전자는 지배 체제가 동원하는 제도적 강압이나 물리적 강제등의 억압적 폭력을 뜻한다.

 

로제 다둔에 따르면, 폭력의 라틴어 원어인 비스vis’ 는 힘의 발휘, 폭력 행위 그리고 군대의 힘을 가리키며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즉 폭력은 인간에 대한 본절적인 규정이기도 하다. 호모 비오랑스, 폭력적 인간이라는 규정이 이로부터 생성된다.

 

<폭력의 철학>에서 사카이 다카시는 비폭력이란 단지 평화를 희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힘을!’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폭력/비폭력이란 이분법은 부적절하다며 반폭력anti- violence이라는 범주를 추가한다. 반폭력은 막연히 올바른 도덕에 대한 반대를 뜻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정치이고 정치적인 것의 복원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는 광의의 행정을 포함시킨 폴리스의 논리와 정치를 일컫는 폴리틱스의 논리를 구분한다. 폴리스란 이미 존재하는 지위나 역할에 사람들을 배분하고 고정시키는 것인 반면 폴리틱스란 배제된 사람들(이민자, 비국민, 이등시민, 정신이상자 등)을 보편적인 이해를 공유하는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한다면 폴리틱스의 논리는 평등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질서를 뒤흔든다.














 

p.s 메를로 퐁티, <휴머니즘과 폭력>

정면환 편, <프랑스지식인들과 한국전쟁>

김홍우, <현상학과 정치철학>

정화열, <몸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생태학>

 

미국을 재교육해야 한다. 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홉스봄이 극단의 세기라 칭한 20세기는 물질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인류의 역량이 우주로까지 뻗어나간 세기였지만 동시에 유사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다.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이 187명백만 명에 달했다. 게다가 민간인의 피해는 제 1차 세계 대전시 5%였던 것이 요즘에는 아예 80~90%에 이른다고. 홉스봄은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단절로 네 가지를 꼽았다. 첫째, 농민 계층의 쇠퇴와 몰락, 둘째, 초거대 도시의 부상, 셋째, 의사소통 수단의 기계화, 넷째, 여성이 처한 상황의 변화.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은 유일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9.11이후 미국은 자신의 힘만을 믿는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서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한 것 외에는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고 경제적 허약함만을 노출시켰다. 역사학자로서 홉스봄은 미국의 현재와 같은 위세가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이라고 본다. 때문에 전쟁광 미국을 말릴 순 없다 하더라도 미국을 재교육시켜야 한다는 게 홉스봄의 결론이다.

 

러시아 혁명, 그 가능성의 중심.

 

러시아 혁명, E.H .

러시아 혁명, 스티브 스미스

 

카는 볼셰비키 독재 체제를 비난했지만 러시아 혁명의 성과마저 부인하지는 않았다. 혁명이 없는 것보다는 위로부터 혁명이 있는 게 더 나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이다. 스티브 스미스가 <러시아 혁명>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도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볼셰비키는 사악했다기보다는 무능했다. 따라서 저자는 러시아 혁명이 써낸 답안은 틀렸지만 문제까지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정치신학 VS 정치철학, 사산된 신, 마크 릴라

 

인간이 전쟁에서 짐승도 하지 않을만큼 만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신을 믿기 때문이다. 짐승은 먹이나 번식을 위해서 싸울 뿐이지만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려고 싸운다.

 

저자는 인간을 짐승보다도 더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광신주의고 메시아주의적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열정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켜서 사고하지 않는, 이른바 정치신학에서 비롯한다.

 

기독교 정치신학은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이 신성한 연계를 이루고 있다는 이미지에 의존한다. 그러한 이미지에 가장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 철학자가 토마스 홉스다. <리바이어던>의 목표는 기독교 신학의 전체 전통에 대한 공격과 파괴였다는 것이 마크 릴라의 평가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주의 전통에서 종교가 이전처럼 정치를 위협하거나 광신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자유주의 신학은 부르주아 사회와 함께 무너진다. 더불이 그들이 꿈꾸었던 신은 사산된 신에 불과했다는 것이 폭로된다. 종말론적 구원사상은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언제라도 악용되었다. 저자는 서구만이 정치신학을 극복했다고 주장한다는데, 당장 미국만 보더라도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 없는 망발에 불과하다. 물론 한국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테러리즘과 디오니소스, 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러한 테러의 양가성은 곧 신성 자체의 양가성이기도 하다. 이글턴은 이러한 양가성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를 꼽는다.

 

테베의 지도자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에게 적개심을 품고 상식 밖의 폭력으로 대응한다. 화가 난 디오니소스는 감옥을 나온 뒤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한다.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이글턴은 <바쿠스>분명 테러리즘과 부당한 정치적 대응 사이의 결정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p.s 에우리피데스 비극 <박코스의 여신도돌>

그리스 비극, <바코스의 여신도들>

천병희, <그리스 비극의 이해>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사이먼 골드힐,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


 25. 정치적인 것의 가장 자리에서

 

아르스토텔레스와 고소영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세계의 정치, 모제스 l 핀레이.

 

참주정은 통치자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고, 과두정은 부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며, 민주정은 빈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올바른 정치질서의 세가지 형태는 왕정, 귀족정, 혼합정이다. 참주정은 왕정의 왜곡이고 과두정은 귀족정의 왜곡이며 민주정은 혼합정의 왜곡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는 단순하다. 모든 국가의 시민들은 넉넉한 계급, 가난한 계급, 그리고 그 중간을 형성하는 중산계급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일반원칙으로서 절제와 중용은 언제나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재산의 소유에 있어서도 가장 좋은 것은 중간 상태다. 중간계급의 시민으로 구성된 국가가 가장 잘 조직된 국가다.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의 가장 좋은 형태를 이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구성원들이 알맞은 재산을 갖는 것이다. 이 글은 2008년에 씌어졌다. ‘고소영’, ‘강부자인선 파문으로 알려져 있듯 명백한 과두정부였다. 박근혜 정부는 민주정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칸트 정치철학 강의,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로 나누는데 그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행위이고, 이 행위의 핵심이 바로 정치적 행위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 함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human species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men이다.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

 

미군 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친 사건을 불가피한 사고라고 보는 판단과 최소한 과실이라고 보는 판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이 더 공유될 수 있는 판단인가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공통감common sense다 이때 공통감은 공적 감각public sense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따라서 정치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의 상식, 즉 공통감을 일깨우는 일이며 공동체 감각을 북돋우는 일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정치적인 것의 귀환, 상탈 무페,

민주주의의 역설, 상탈 무페.

 

상탈 무페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사회의 특정 분야를 지칭하는 정치politics’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자체이기 때문이다. 무페가 적극적으로 참조하는 이는 독일 정치 철학자 카를 슈미트이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다. 즉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가를 판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째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가? 어떤 수준이든 간에 자기 정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와 대립되는 타자가 먼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력과 적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서 권력 관계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것을 변형해나가려 노력하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하는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프로젝트이다.

 

랑시에르의 가장자리에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자크 랑시에르

 

1988년 미테랑과 시라크가 맞붙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은 재선에 임하면서 단 하나의 공약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시라크를 여유있게 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약속의 종언’, 정치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새로운 사유에 대한 요청, 랑시에르와 아감벤

 

랑시에르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고, 아감벤은 정치학, 미학, 언어학, 문헌학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정치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은 통치와 평등이라는 두 이질적인 과정의 충돌이다. 통치의 과정이란 사람들을 공동체로 조직하고 그 자리와 기능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것으로서 치안police을 가리킨다. 평등의 과정이란 몫이 없는 자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그 실천을 말하며 달리 해방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이 해방의 과정, 혹은 해방을 위한 소송을 랑시에르는 정치politics’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이란 이 정치와 치안이 마주치는 현장이다.

 

정치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며, 몫을 갖지 않은 자들을 다시 셈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이며 불화이다.

 

문제작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권의 역설적 논리를 분석하고 수용소야말로 근대성의 노모스이면서 근대 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던 아감벤은 <남겨진 시간>에서 바울의 편지에 대한 치밀하면서도 유려한 문헌학적 주석을 통해 그의 메시아주의를 면밀히 분석한다.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 목적 없는 수단. 조르조 아감벤

 

우리의 정치적 전통에서 핵심에 놓인 주권과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을 버리든가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야 한다.

 

아감벤은 정치철학의 전통적 개념과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에 경험한 현실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생명이며 따라서 정치 또한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이때의 생명은 벌거벗은 생명’, 곧 단순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우리말로는 목숨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인간이나 시민이 아닌 난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 형상이라고 본다. 이런 구도에서 현실적 삶은 말 그대로 생존으로 환원된다. 아감벤은 다른 의미의 생명을 그리스어 bios에서 찾는다. 그것은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삶의 --형태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한 마디로 폼 나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즉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삶, 행복을 향유하는 삶, ‘더 나은 삶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 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인 삶은 그러한 일체의 주권으로부터 돌이킬수 없는 탈출을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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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무미함을 예찬하다.

 

무미함을 예찬하다. 무미예찬, 프랑수와 줄리앙.

 

음식에 관한 책인가 싶었는데, 프랑스 중국학자의 중국 예찬이라 하면 될까? 특히 적인 것들의 예찬. 담박하고 담백하고 단순한 것들. 담박한 음식 중 내가 먼저 떠올렸던 건, 을지로 을미면옥냉면이었다. 처음 먹을 땐 국물이 그저 맹물 맛처럼 느껴졌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된다. ‘아무런 맛이 없다는 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라기 보단 오히려 추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p.s 프랑스와 줄리앙, <운행과 창조>

<불가능한 누드>, <위대한 이미지에는 형태가 없다>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 한스 에빙

 

저자는 예술이란 사람들이 예술이라 부르는 것이다로 정의 내린다. 여기서 사람들은 대중이 아니라 예술계에 속하는 일부의 사람들이다. 계층의 차이에 따라 예술의 취향도 차이가 난다. 상위 계급에게 인정받는 예술은 존중된다. 저자는 이러한 측면을 문화적 비대칭성이라 부른다. 그러고 보면 문학은 상대적으로 대칭적이고 평등한 예술이다. 우리 같은 서민이 오페라나 음악회에 꼬박꼬박 다니긴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저자는 예술가들이 금전적 보상보다는 자신이 재능있고 뛰어난 인간이라는 자만심과 자기기만이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이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예술가들은 자만심보다는 오히려 열등감 속에서, 비자발적인 가난에 내몰리고 있다.

 

슈퍼노멀,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감동, 슈퍼노멀, 제스퍼 모리슨, 후사카와 나오토

 

슈퍼노멀이란, ‘특별한 평범함을 뜻하는 말이란다. 노멀한 물건이 왜 특별해지는 걸까? 저자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드러내주는 용어로 와비사비슈타쿠로 이러한 특징을 표현한다. ‘와비사비는 어떤 물건이 시간이 가면서 갖게 되는 고요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실용적인 미를 통달한 이후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슈타쿠손으로 윤을 낸이란 뜻이다.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만지고 또 만지다 보니 윤기가 흐르게 된 것을 가리킨다.

 

영화 촬영장에선 어떤 소품이 간지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쓴다. 한마디로 와비사비가 안 느껴진다는 거다. ‘시간의 경과없이 현실에서 와비사비는 있을 수 없다. 반면 영화는 소품에서도 시간을 창조해내야만 한다.

 

p.s 로쟈는 자신의 형광펜이 슈퍼 노멀이 아닐까하고 사족을 달았다. 저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자면 이런 건 슈퍼노멀이 될 수 없다. 형광펜은 그냥 형광펜이다.


 

오늘의 미술은 과거의 미술과 어떻게 다른가. 이것이 현대적 미술, 임근준,

 

미술평론가인 임근준 씨가 동시대 작가들의 현대 미술을 소개한다. 저자는 오늘의 미술은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성찰은 담은 예술이라 말한다. 나로선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현대 미술에 대한 탄식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미술 시장은 개들에게 넘어갔다. 러시아, 중국 등의 신흥 부자를 상대해야 하는데, 그들에겐 문화가 없다. 좀 느끼려면, 최소한 뭘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 미국과 서유럽의 미술 시장은 개들에게 넘어간 게 아니고?? 미술시장이 개들에게 넘어간 덕분에 리히터는 가난을 면치 않았나?

 

2009년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 1위는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고, 2위는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 3위엔 유희영 서울시립미술관장이라고. 작가가 아니라 미술관 운영자들이 한국 미술계를 움직인다는 건, 세계적 추세와 더불어 한국 미술계도 돈에 놀아나고 있음을 증명한다. 현대 미술은 더 이상 예술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해졌다.

 

앤디 워홀의 비누 상자, 일상적인 것의 변용, 아서 단토.

 

저자는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말해주듯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에 이제는 예술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제기된다. 그는 그의 전작 <에술의 종말 이후>에서 마치 헤겔이 역사가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예술 역시 자유의 확장으로 종말을 맞이했다고 주장한다.

앤디 워홀을 여전히 예술가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나? 내가 보기엔 희대의 사기꾼에 불과하다. 워홀은 피카소를 보고 사기 치는 법을 배운 듯하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사기꾼들.

 

미술관에서 만난 인문학,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박이문

 

4명의 철학자의 미술과 인문학의 통섭 강의를 책으로 묶었다.

박이문 교수는 예술작품의 구조적 모델로서 둥지를 제시한다. 임태승 교수는 동아시아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과 원리이며 동아시아 예술은 철학적인 원리와 미학적인 범주 사이의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고 말한다. 이광래 교수는 서양 미술사의 탈재현과 반재현의 과정을 기술한다. 조광제는 매체변화와 혁명이 가져온 의식 및 사회 변화의 양상을 기술하고 디지털 시대 새로운 형이상학의 밑그림을 그린다.


























로쟈의 페이퍼 04. 이런 책을 읽고 싶다.

 

크리스 하먼의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붕괴>

한스 굼브레히트 <1926: 시대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기>

레이 황<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

 

전체를 고민하는 힘

 

고민하는 힘, 강상중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 필립 쿡

 

막스 베버는 일찍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마지막 인간이 도달할게 될 지점을 이렇게 기술했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인류가 과거에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도달했다고 자화자찬할 것이다.” 강상중 교수에 따르면, 마지막 인간이란 더 이상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의미란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함께 살아감이다. 함께 살아감은 정치의 본래 목적이고 의의다. 그것은 또한 전체에 대한 관심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너무 많은 부자들이 양산되는 것을 문제로 보았다.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만연해 사람들이 죽어갈 때 다국적 제약 회사들은 국제협약을 무기로 싼 값에 약을 공급하길 거부했다. <유동하는 공포>에서 바우만은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세넷은 <뉴캐피털리즘>에서 관료제 시스템이라는 쇠창살의 삶을 분석한다. 피라미드적 관료제 사회를 대신하여 들어선 것은 무한 경쟁을 독려하는 승자독식 사회.

 

우리는 어떤 혁명을 원하는가.

예수전, 김규항

예수 없는 예수 교회, 한완상,

 

김규항은 예수를 영성가이자 혁명가로 본다. 그는 오늘날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따위를 내거는 양심적인 시민들은 위선자 바리새인들로 진단한다. 아무래도 김규항은 우리에게 너무 일찍 왔다. 그가 한 2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았을텐데. 너무 빠른 건 느린건 만큼이나 멍청해 보인다.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 교회>에서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는 한국 교회도 포함된다. 일명 개독. 개독들을 보면 예전 중세시대 마녀 사냥을 일삼던 카톨릭 수사들이 떠오른다. 한국 교회는 회개를 통해 거듭날 수 있을까.

 

로쟈는 회개에 대한 기대가 미덥지 않다면 프랑스 혁명을 숙고해보길 제안한다. <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에서 로베스 피에르는 공화정의 가혹함은 미덕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인류의 압제자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응징하는 것이 자비라고 말한다. 자비를 베풀고 싶은 압제자들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고 결국엔 군사적 독재자를 출현시킬것이라 예언했다. 한나 아렌트 또한 <혁명론>에서 프랑스 혁명을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짓고 미국 혁명을 혁명의 새로운 모델로 추켜세웠따. - 프랑스아 르벨은 <마르크스 예수도 없는 혁명>에서 20세기 혁명은 미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유혈과 폭력이 없는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공적 선, 사적 선, 레이몬드 고이스.

 

저자는 책을 통해 자유주의의 교리의 비판과 해제을 말한다.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교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인데, 고이스에 따르면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저자는 니체의 계보학을 방법론으로 받아들여, 디오케네스와 카이사르,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례를 검토한다. 오늘날 사적인 것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내 은행 잔고.

 

P.S 비판이론의 이념.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공과 사>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퀜틴 스키너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문화로는 국가에 대항할 수 없다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니시카와 나가오.

 

저자에 따르면 국민을 그만두려면 국민 문화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문명이나 문화나 유럽에 기원을 둔 개념이다. 문명이 인류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물질적인 진보를 예찬한다면 문화는 생활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강조한다. 문명이 미래 지향적이라면 문화는 과거의 전통을 중요시한다. 문명은 프랑스, 영국, 미국등 주로 선진국으로 전파됐고, 문화는 독일을 중심으로 폴란드, 러시아 등 후진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에서는 문명이 국민적 이데올로기로 정착되고 독일의 국민사는 기본적으로 문화사다. 프랑스와 독일의 반복된 전쟁은 문명과 문화 사이의 투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국가이데올로기로서 문화개념은 민족이나 국체개념과 일체였기 때문에 문화로는 국가에 대항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사상으로서의 일본 우익,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 마쓰모토 겐이치, 요시카와 나기.

 

저자는 근대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은 좌익도 우익도 아닌 리버럴이었다고 주장한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출현하면서 리버럴은 근대 일본의 지배계급이 되며, 이들이 메이지 국가 체제의 근대화 노선을 적극적으로 주도해갔다. 이러한 노선에 반체제로 좌익과 우익이 마치 쌍둥이처럼 태어났다. 좌익은 계급의 입장에서 우익은 민족의 입장에서, 근대화 노선에 반대했다. 저자는 우익의 사생관은 전통적인 산화의 미학, 아름다운 죽음의 미학 위에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우익이 타락하여 체제내로 편입하면서 아시아주의를 표방한 것이 대동아공영권이다. 로쟈의 지적대로 일본 우익과 한국 우익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인다. 타락한 꼴통들이 모여 아무나 붙잡고 빨갱이라 욕하면 우익이 되는 실정이니.















 

18. 유동적 근대와 쓰레기가 되는 삶,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유동적 공포란 자연적 악이건 도덕적 악이건 그 공포의 대상이 되는 악이 불규칙하고 불확실하여 제대로 인식할 수 도 없고 대처하기도 어려운 공포를 말한다.

 

<근대 사상에서의 악>의 저자 수잔 니먼을 따라 바우만은 근대 철학이 시작되는 기점을 1755년 포르투칼 리스본 대지진에서 찾는다. 지진으로 수 만명이 죽었다. 이러한 대재난은 근본적으로 신 존재에 대한 질문을 묻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신 역시 마찬가지다. 별자리 혹은 사주팔자가 다 무슨 소용이냐, 수만 명이 동시에 죽었는데. 세월호에서 죽은 사람들은 사주팔자가 다 똑같아서 죽었을까.

 

근대인은 이성에 의해,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 모두 교정될 수 있을거라 기대했다. 지금까지 경험은 오히려 거꾸로 진행됐다. 자연재해는 관리 가능한 것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도덕적 비리가 자연재해에 가까운 것이 돼버렸다. 인간의 부도덕한 악보다 관리가 불가능한 것은 합리적 행동이 산출하는 악이다. 일례로 관료제를 들 수 있다. 관료의 도덕성은 명령에 대한 복종과 빈틈없는 업무 수행으로만 판단된다. 아우슈비츠, 굴락, 히로시마는 이러한 관료제의 합리성이 얼마나 커다란 악을 낳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문제적인 것은 유동적 공포가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자연재해 역시 차별적이다. 뉴올리지언즈 카트리나에서 볼 수 있듯 피해자는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더 나아가 이제 사건 사고 역시 차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강남의 잘 사는 아이들이 배를 타고 가다 좌초됐더라도 국가에서 가만히 앉아 아이들이 죽어가길 기다렸을까. 국가에선 법질서 유지와 경제발전(오늘날 신자유주의)만을 부르짖는다. 근대성은 배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부류가치가 없는 삶으로 구분하며 공포 또한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바우만은 이러한 차별은 근대성의 오작동이 아니라 본질이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들이 너무 맣은가?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한마디로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는 책상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기부해야 하는 이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피터 싱어.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이 덧없이 죽어가는 세계에서 저자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다. 책의 제목이나 질문이나 왠지 저자가 세월호 사건을 예견하고 한국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저자의 질문은 마치 맹자의 우물에 빠진 아이의 일화를 상기시킨다. 신발이나 양복이 더럽혀지고, 지각을 이유로 우물에 빠진 아이를 그냥 지나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한민국 도살자의 딸과 색누리당 국회의원말고는.

 

아직도 매년 970만명의 5세 이하 어린이들이 빈곤 때문에 죽는다. 저자는 기부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한다. 한국의 원조 규모는 0.09 퍼센트라고. 한국은 대외원조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꼴찌를 달린다.

 

거대한 고통의 기원을 찾아서,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이 책의 부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이다. 여기서 우리 시대1940년대를 포함한 20세기 전반기라고 한다. 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경제 대공황, 파시즘, 도로 2차 세계 대전. 대체 왜 이런 전대미문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것일까? 폴라니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시장 경제를 주범으로 지목한다. 식민주의자들은 원주민을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식량 부족 사태를 일으켰다.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믿음과 파행적 현실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저자는 2009년이 거대한 전환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과 신유주의를 주장하는 국가들은 식민지 국가의 전략을 그대로 반복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99프로의 인간들을 굶주림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더더욱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상상 못했던 새로운 전쟁을 불러올 지도 모른다.

 

인류학적 가치이론과 자본주의의 외부.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데이비드 그레이버.

 

저자는 유럽중심의 지적 풍토를 비판하면서 인류학이야말로 사유와 개념의 전 지구적 민주화를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1940년 대 후반과 1950년 초 인류학자 클라이드 클럭혼은 서른 다섯 부족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가치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가치란 사람들이 여러 다른 행위의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바람직한 무언가에 대한 개념이다. ‘가치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경제학에 포섭된다


그러나 경제학은 지역마다 다른 선호나 판단의 문제에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가치의 기본 대상을 단지 사물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준이 필요하지 않을까. 화폐와 상품만의 교환만을 다루는 시장경제 바깥의 다른 교환 방식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그레이버는 인류학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업적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라고 주장한다.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 바깥의 부족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들이 전혀 다른 가치 체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로쟈는 저자의 이론을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나 가라타니 고전의 여러 저작에서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언약론자가 꿈꾸는 사회, 사회의 재창조, 조너선 색스,

 

색스는 이 책을 통해 영국이 경험한 다문화사회로서의 문제점을 바탕으로 다문화주의의 극복과 다문화 사회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다문화주의는 수명을 다했다. 기존의 호텔로서의 사회로는 다문화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기존 별장으로서의 사회역시 주인과 손님의 관계이기에 성공할 수 없다. 그가 제시하는 세 번째 모델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으로서의 사회. 사회는 더 이상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관계의 산물이 아니라 상호존중과 신뢰에 바탕을 둔 언약의 산물이 되어야한다.





























 

19.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

 

세계의 일부인 유럽

백색신화, 로버트,J, C , 김용규.

식민주의자의 세계 모델, 제임스 M 블라우트.

 

세계의 일부는 부유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가난하다.”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제임스 블라우트의 <식민주의자의 세계 모델>은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다.

 

유럽중심주의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영역으로 저자는 지리학과 역사학을 지목한다.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유럽쪽에서 발생했다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결론에서 블라우트는 우리 인식의 근원을 건드리는 네 가지 보편주의의 문제를 비판한다. 첫째.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는 철학적 이원론, 둘째, 빅뱅이론, 셋째,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발생해 유럽으로 확산됐다는 역확산론, 넷째, 산업혁명 이후의 산업화 확산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과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유럽중심주의 해체도 요원하다는 것이 블라우트의 주장이다.

 

로버트 영은 유럽의 기적이라는 신화백색신화라 부른다. 그의 주된 공격대상은 유럽마르크스 주의. 저자가 보기에 마르크스 주의는 여전히 유럽중심주의라는 한계를 갖는다.

 

유럽중심주의와 세계사의 해체,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 한국서양사학회,

세계사의 해체, 사카이 나오키. 니시타니 오사무.

 

문명론적인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아시아 지역에는 동아시아의 유교 문명, 남아시아의 힌두 문명, 그리고 서아시아의 이슬람 문명 등 각기 다른 세 개의 문명이 별개로 존재해왔지만 유럽 중심적 관점은 이를 한데 묶어서 동양이라는 말로 뭉뚱그린다.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분할이 허구적인 상상의 지리학이라 말했다


니시타니는 <세계사의 해쳬>에서 후마니타스안트로포스를 대립시킨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학을 가리키는 후마니타스가 앎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다룬다면 인류학의 어원이 되는 안트로포스는 인류를 오직 앎의 대상으로만 다룬다. 때문에 인문학(후마니타스)은 유럽 연구 내지 유럽적 인간의 연구가 되는 반면에, 인류학(안트로포스)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구가 된다. 한마디로 인문학의 탐구대상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유럽적 인간이다. 로쟈의 말대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극복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일터. (세계사, 인문학을 완전히 해체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 유럽적 보편주의, 이매뉴얼 월러스틴

 

월러스틴에 따르면 16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하나의 긴 시기가 현재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새로운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어떤 시기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전개될 20년에서 50년 사이의 싸움의 결과에 따라 기존의 세계보다 더 사악한 불평등의 세계가 될 수 있고, 생고르의 표현에 따르면 서로 주고받는 만남의 세계가 될 수도 있다. 월러스틴은 이것이 유럽적 보편주의와 보편적 보편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시기에 지식인들이 거짓된 가치중립성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대안으로서의 보편적 보편주의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권의 너머와 환대의 사유, 주권의 너머에서, 우카이 사토시.

 

1964년 도쿄 올림픽, 소학교 4학년이었던 저자는 일본 선수를 응원하면서 히노마루(일본국기)와 기미가요(일본 국가)에 갈채를 보냈다. 그러다 5학년이 되자 이러한 행동에 무언가 불편함을 느꼈다. 일본 현대사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깊어질수록 나쁜 국가에 대한 그의 직관은 확신이 됐다.

 

국민국가의 패권주의와 폭력에 대해 저항의 논리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카이 사토시가 주권의 너머를 모색하기 위해 제안하는 것은 환대의 사유. 주인은 손님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모 여성 개그맨이 일본 TV프로에 나가 기미가요를 열성적으로 불러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손님을 환대했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 원숭이가 일본 노래를 부르다니하고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20.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4천원 인생, 안수찬 외.

 

기자들이 직접 체험한 비정규노동혹은 불안노동의 보고이다. 갈빗집에서 12시간 노동으로 35천원을 받은 임지선 기자는 말했다. “수많은 사람이 빈곤 노동으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놨다는 점에 있어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명랑 좌파의 한국경제론, 괴물의 탄생, 우석훈

 

<88만원 세대>를 필두로 하여 그가 쏟아낸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마지막 책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반화되면서 탄생하는 것이 홉스가 말하는 레비아탄’, 괴물이다. 이 괴물의 다른 이름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자본주의. 우석훈의 대안은 사회적 경제’, ‘연대의 경제’, ‘증여의 경제. 이러한 제3부문을 형성하는 경로는 종교 기관, 대기업, 그리고 정부기관이다. 허걱, 한국에서 가능한 일일까? 종교기관, 대기업, 정부라니.

 

억울하면 서울 시민이 돼라? 지방은 식민지다.

 

강준만 교수는 교육 분산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쉽게 말해 서울에 편중된 대학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자는 거다. 다산 정약용마저 자식들에게 폐자일지라도 사대문 안에서 버티라 했으니, 지방분권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도정일 외.

 

2008년 이후 무너진 민주주의를 보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에서 암시를 받은 도정일 교수는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음을 알면서도 대처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망한다.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위기에 처했음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 때맞게 대처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시민의 양성이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 한홍구 교수의 말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밥 먹여준다

 

대한민국 시민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라는 자각을 갖고서 각자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야 하고, 공부해야 한다. 국가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도 긴급한 공부거리다. 로쟈는 우리가 시민에서 난민의 지위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는데, 2008년 이후 우리는 천민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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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2016-07-08 0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짜 이새끼 글은 역겨워서 못읽겠다..

시이소오 2016-07-08 06:58   좋아요 0 | URL
역겨우면 안 읽으면 됩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7-08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이디도 없고 비방글만 남기는 저런사람의 정신승리...
새벽에 잠도 안자고 뮈하는걸까요.

시이소오 2016-07-08 08:05   좋아요 0 | URL
일베가 아닐까요?? ㅎㅎ

만화애니비평 2016-07-08 08:10   좋아요 0 | URL
참 그분들은 바쁘네요. 새벽에 잠도 안자고 일하면서요 ㅎㅎ

시이소오 2016-07-08 08:1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일당은 잘 받으셔야 할텐데요^^

singri 2016-07-08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저러는건지ㅡ ㅇㅂ의 끝은 어디인가 노답.

시소님의 가열찬 독서를 응원합니다.

시이소오 2016-07-08 08:32   좋아요 0 | URL
아, 응원 감사해용. 싱그리님^^

wasulemono 2016-07-0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본을 못 갖춘 사람도 있었네요!

시이소오 2016-07-09 16:42   좋아요 0 | URL
저분덕분에 댓글이 늘었네요. 감사한 일이네요^^
 

 

11. 푸슈킨과 고골의 나라

 

나보코프와 예술이라는 피난처, 롤리타, 나보코프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제쳐놓고 나보코프가 뽑은 가장 위대한 작가는 1위 톨스토이, 2위 고골, 3위 체홉, 4위 투르게네프. 그가 보기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류작가라고. 예전엔 인정할 수 없었을텐데, 지금으로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싶다. 2007년 영어권의 대표적 현역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1위엔 역시 <안나 카레니나>, 2위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 3위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4위는 나보코프의 <롤리타>였다고.

 

대부분 평론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보코프 역시 레빈-키티 커플의 사랑과 대조적으로 안나 브론스키 커플은 육체적 사랑에만 기초해 있다고 평가한다. 실망이다. 이런 답안은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나올 수 있는 분석 아닌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단지 육체적 사랑에 기초한다는 평엔 동의할 수 없다. 그들도 레빈, 키티 커플 마냥 진정한 사랑을 했다. 아니, 했다고 생각했다. 안나, 브론스키 커플의 비극은 상대방 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다는 데 있다. 사실 그들의 사랑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오히려 허영에 기초한 것이었다.

 

나비의 변태를 거친 기억의 아상블라주, <말하라, 기억이여> 나보코프,

 

나보코프는 기억력이 형편없어 메모리스트가 되었다고. 그래서 그에게 있어 상상력은 기억력의 한 형식이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모든 사건의 객관적 존재 자체가 하나의 불순한 상상의 형식이며 창조적 상상력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니 순수한 객관적 현실이나 순수한 기억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오히려 픽션일 따름이다. 따라서 진실은 언제나 기억과 상상의 창조적인 합성물이다.

 

(<말하라, 기억이여> 아직 절판 상태네요 ^^;;) 


예브게니 오네긴과 차이코프스키, 예브게니 오네긴

 

예전에 <예브게니 오네긴> 광팬 때문에 호기심에 이 책을 읽었다. 나로선 뭐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티치아나나 오네긴과 같은 경험을 했다면 공감할 수 있었을까? 상대방이 나를 사랑할 때 나는 시큰둥하다가,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자 이번엔 자신이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경험? 아무튼 차이코프스키는 작품을 구상할 때 제자인 안토니나 밀류코바로부터 구애 편지를 받았다. 그는 제자의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을 했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외투, 고골.

 

역시 읽었으나 감흥이 없었던 작품이지만 로쟈는 매년 다시 읽으면서 경탄하는 작품이라니 나 역시 다시 읽어봐야 겠다. 주인공 아카키의 외투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현대적으로 보인다. 라캉의 이론에 어울릴 듯.

 

도스토예프스키와 돈.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맞는 말이다. 돈을 빼놓고 도스토예프스키를 논할 순 없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만큼 재밌을 듯.

 

사냥개 같은 시대의 증언 <회상> 나데쥬다 야코블레브나 만델슈탐

 

20세기 러시아 시의 거장 오십 만델슈탐의 부인 나데쥬다 만텔슈탐의 회고록이라고. 시인 만델슈탐은 두 번째 체포 때, 시베리아 강제수용소 이송 중 사망했다. “무슨 이유로 그를 잡아갔지?”라는 질문은 금기시되었지만, 누군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 아흐마토바는 격분하여 소리쳤다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어?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잡아들인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바로 그 시대의 목격담이자 증언이라고.















 

12. 한국 문학에 대한 믿음과 불신 사이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 도처에

순결한 의식이 침몰하고

최선의 무리는 확신이 없고

최악의 무리만이 열광적으로 날뛰고 있네

 

- W.B 예이츠, <2의 강림>

 

오늘날 한국 문학은 죽었다?’ 로쟈는 문학에 대해 가장된 순진한 믿음’, 즉 문학을 좀

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 문단 문학의 종언, 한국 문학과 그 적들, 조영일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을 번역한 평론가 조영일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그는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한국의 문단문학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는 문학편집과 문학비평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전 백패의 운명을 찬양함, 자전거 여행, 김훈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말해 무엇하랴, 김훈의 에세이는 무조건 읽어야 한다.

 

기형도의 보편 문법. <기형도 전집> 기형도

 

인간에게도 누구나 잎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가 서너 개 이상 있다. 그 개별적 가지들은 시간의 묶음이며 그 시차인 공간인 가지 안에는 썩은 잎부터 부활해가는 잎, 돋는 잎 등이 달려있다. 그 잎들은 나무의 물관, 체관의 관다발로부터 양분 및 수분을 공급받으며 또 외적인 요소, 즉 햇빛을 이용하여 녹색 동화작용을 일으켜 내적 에너지를 확충한다. 고로 잎은 나무와 햇빛의 유기적 매체이다.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이질성을 이어주는 것은 동일인으로서의 인칭이다. 우리는 그러한 인칭을 2인칭화(사랑, 친구, 가족)한다. 그러나 과수뿐 아니라 인간의 사육 기간 중에서 우리의 관계들 속에는 엄연히 칼날 같은 전정이 가해진다. 그것은 소극적으로 타의에 의한 단절의 전정과 적극적 전정으로 구분한다.

 

식물적 상상력,모종전정의 시인(기형도의 전정에 최초로 주목한 비평과는 정과리라고. 정과리의 <무덤 속의 마젤란>은 기형도에 관한 필수적인 참고 문헌이라고 한다.)

 

둑방에는 패랭이 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기형도의 시를 안 읽었다. 죽기 전엔 읽어야.

 













13. “너 책이야? 나 장정일이야!”

 

장정일의 공부,

장정일의 독서일기 7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보트하우스

내게 거짓말을 해봐.

 

2004년 독서일기 10년째인 6권의 서문은 이렇다.

 

보혁갈등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지난 몇 년간을 보내면서, 나의 독서관은 개인적으로 내밀한 쾌락을 좇아가는 독서에서 약간 다른 것으로 진화했다. <....>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이 된다. 책과 멀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습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 독서는 민주사회를 억견과 독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강유원은 장정일의 독서 일기 2권에 대한 독후감을 이렇게 적었다.

 

장정일은 많은 분량의 책을 읽지만 그것을 꿰어서 이론적 줄거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듯하다.

 

, 로쟈의 말대로 강유원의 장정일 비판은 공감하기 힘들다. 누가 그랬더라. 언젠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날이 기필코 올 것이라고. 장정일 역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무지를 밝히기 위해 공부한다고 말했다. 덧붙이자면, 또 다시 한나 아렌트를 빌어 말하자면 나는 내 무지가 이제 악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너희가 독서를 아느냐 <장정일의 독서일기5>

 

역시 장정일, 가차 없다. (그 이후 쓰인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도 그의 돌직구는 여전히 곧다.) 지식인들 모두가 장정일처럼 말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단지 검은 것을 검은 것이라고 말해주었으면.

 

장정일 문학의 변죽, <정열의 수난 장정일 문학의 변주>, 문광훈

 

장정일에 대해 말한다면서 저자 얘기만 하는 책이라니, 추천이라기 보단 비추의 리뷰다.

 

로쟈의 페이퍼 03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탐구>, <탐구2>

 

로쟈의 리스트 8. 에리히 프롬 읽기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의 현대성>,

백민정,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박홍규, <우리는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



 













14. 기적에 이르는 침묵

 

기적에 이르는 침묵, <봉인된 시간> 타르코프스키

 

타르코프스키에게 있어서 영화란 시간을 빚어내는 것이다. 로쟈는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대단히 격렬하다고 말한다. 그는 <노스탤지어>의 분신 장면과 <희생>의 방화 장면을 예로 든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격렬하다는 의견에 적극 동감한다.(동지를 만났다) 그의 영화를 볼 때 나로선 몽타쥬보다는 시점의 파괴 때문에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에 대하여,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타키역시 도키 빠였다.

 

이제 나는 우선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쓴 글을 모조리 읽어야만 하겠다. 그리고 그에 관해 쓴 모든 글들 그리고 러시아 종교철학자들이 솔로비요프, 베르쟈에프, 레온체프의 글들도 모두 읽어야 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영화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 모든 것들의 총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살인과 정치적 살인. <데칼로그 십게, 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

 

로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만을 읽고 쓴다. 저자는 야첵의 살인을 해명하기 전에 주인공 뫼르소를 분석하지만 로쟈는 곧바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의 살인은 야첵이나 뫼르소와는 달리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살인이었다.














 

15. 이미지가 들려주는 것

 

러시아에도 미술이 있어?” <러시아미술사> 이진숙

 

러시아 미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이콘화와 19세기 이동파,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등이라는데, 로쟈는 특히나 19세기 미술에 관심이 있다고. 이동파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는 일리야 레핀이다. 그의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은 러시아 미술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바실리 페로프<트로이카>,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 니콜라이 야로센코<삶은 어디에나>의 작품 등을 통해 러시아 미술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고. 그것은 삶의 고통과 분노, 비애와 절망에 대한 연민이면서 그럼에도 끝까지 버릴 수 없는 희망에 대한 송가다.

 


참고서적

조토프 <러시아 미술사>

캐밀러 그레 <위대한 실험>

이주헌,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미술>

 

추의 이미지는 미의 이미지보다 다채롭다.

 

추의 역사, 에코

미의 역사, 에코

 

에코는 <미의 역사>의 자료를 1960년 대 초반부터 모았다고. 미에 대한 개념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비례와 균형과도 같은 기준이 있다면 추의 이미지는 훨씬 다채롭고 풍부하다. 형식의 결여, 불균형, 부조화, 외관 손상, 변형, 불쾌함의 다양한 형상들이 너무 방대해서 단순히 추를 미의 반대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는 게 에코의 주장이다. 즉 모든 아름다움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추함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미술의 고고학,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박이소.

 

원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저자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우리가 보기 전에 이미 작용하고 있는 믿음들에 대해 폭로한다.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로지 미술의 제도 내로 순환해야만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한다. 뒤샹의 변기를 전시회 좌대에 올려놓고 <>이라 명명함은 고대 인물상을 박물관에 전시하여 <비너스>와 명명한 것과 마찬가지다.

 

참고문헌

존 버거, <이미지>

 

곰브리치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곰브리치는 예술은 어떤 시대정신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창조적 개인의 소산이다. 그가 미술사가로서 수호하려는 가치가 단지 서유럽의 전통문명이라니, 지나친 유럽중심주의적인 발상 아닌가.

 

철학자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 수지 개볼릭.

 

로쟈의 말대로 마그리트 그림은 감동을 주진 않는다. 그러나 분명 지성을 자극한다. 저자는 그 유명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그림을 분석한다. 이 그림은 더 이상 재현적 회화의 불가능성을 선포한다. 이제 회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회화적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현대 회화의 가능성과 과제가 동시에 산출된다.

 

베이컨이란 무엇인가, 베이컨 회화의 괴물, 크리스토프 도미노

 

들뢰즈에 따르면 베이컨은 형상적인 것에서 형상을 빼내고자 한다. 그는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외침 그 자체를 그리고자 한다.

 

기술합성 시대의 예술 작품, 미디어 아트, 진중권

 

미디어아티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은 예술과 기술의 공조이고, 공진화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첨단 기술을 통해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켜나가고, 기술자들은 그러한 예술에서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근대 미학을 관장해온 칸트적 미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듯하다. ‘미적 자율성이나 무목적의 목적성같은 개념이 예술과 기술의 극단적인 결합 형태인 미디어아트에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기술을 모두 뜻하던 아트라는 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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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책 도나 타트 존 어빙 헤밍웨이

 

내가 소설 전체를 통째로 필사한 유일한 작품은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다. 필사하는 내내 즐거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열권을 뽑자면 한 손가락은 <위대한 유산>에 바쳐질 것이다. 가장 디킨스다운 현대 소설가는 단연 존 어빙이다.

 

<작가의 책> 존 어빙 편을 들춰볼까.

 

당신의 삶을 바꿔놓은 책이 있다면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입니다.

 

그리고 가장 핫한 디킨스는 도나 타트가 아닐까.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는 곧장 디킨스를 떠올리게 한다. 골동품 점의 호비 아저씨는 <위대한 유산>의 조 가저리다

최근에 디킨스의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읽고서 그런 추측은 점점 강해졌다.

 

<작가의 책>의 도나 타트 편을 참고해볼까.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입니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들은, 제가 작가가 되고 싶게 만들어준 이들인데, 대부분 19세기 작가들이에요. 디킨스, 멜빌, 헨리 제임스, 콘래드, 스티븐슨,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들인데, 그 목록에서 맨 앞 자리를 차지하는 이는 아마 디킨스일 겁니다. 20세기 소설가들이라면, 나보고프, 에벌린 워, 샐린저, 피츠제럴드, 돈 드릴로이고, 21세기 소설가들 중에서 지금까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에드어드 세인트 오빈과 폴 머리예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가장 과대평가된 책을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두 작가는 똑같은 작가를 뽑았다.

누굴까?

 

 

헤밍웨이다.

 

누군가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줬으면 좋겠다.

가장 과대평가된 작가라면 누가 있을까요?”

 

그럼 이렇게 답할텐데.

 

헤밍웨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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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5-13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못미 헤밍웨이 -_- ㅠㅠ

디킨스 좋죠. 저도 무척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위대한 유산 짱짱 조음..

시이소오 2016-05-13 11:32   좋아요 0 | URL
작가의 선호야 그야말로 개인의 취향 아닐까요?
나보코프는 도스토예프스키 싫어했잖아요. ㅋㅋ

위대한 유산 넘 좋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3 11:47   좋아요 0 | URL
ㅋㅋ 무진장 싫어했죠.. 전 나보코프도 좋고 도스토도 좋습니다.

시이소오 2016-05-13 12:05   좋아요 0 | URL
저도 둘 다 좋네요. ㅋㅋ

blanca 2016-05-13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유산>을 필사를 다 하셨다고요? 우아!! 저는 영화부터 봐서 너무 많은 간섭 현상이 일어나더라고요. 저는 <두 도시 이야기>도 좋았어요. 헤밍웨이는 ㅋㅋ 너무 많은 작가들이 부정적인 면을 거론해서 뭔가 넘치거나 부족한 면이 도드라진 것만은 분명한 듯 합니다.

시이소오 2016-05-13 15:04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저는 두 도시 이야기는 아직이네요. ^__^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고 의아했었답니다.`뭐지, 이게` ㅋ 헤밍웨이는 선호가 갈릴만한 작가 같아요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