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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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남한에서는 쌀값이 수시로 변하고 농촌에서는 돈만 있으면 물건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돈 있는 사람은 잘 살고 돈 없는 사람은 못 산다고 말했다.

구속되었다. 군사상 기밀 누설이라는 것. 이른바 반공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현대문학> 653월호에 남정현의 <분지>가 실렸다. (분지는 똥땅이란 뜻)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남정현의 구속에 항의하는 글을 쓴 백낙청, 남재희도 중정에 끌려간다. 2월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법정에 피고인 측 증인으로 출두한다. 변호인은 한승헌이었다. 검사는 소설을 읽고 놀랐고, 용공적이지 않냐고 이어령에게 물었다. 이어령은 이렇게 말했다.

 

병풍 속의 호랑이를 진짜 호랑이로 아는 사람은 놀라겠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아는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이어령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분지>에 징역 7년형을 구형한다. <현대문학>33년 후인 9810월 호에 다시 <분지>를 실었다.



 

322일 판문점 출입기자 이수근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출한다. 110개월 후엔 다시 남한에서 북한으로 탈출한다.

 

신변의 위협과 김일성 독재에 염증을 느껴 탈출했다는 이수근은 689월 모 교수와 결혼하는 등 남한에 정착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수근이 화장실에서 이빨을 딱딱거리면 전파가 나간다는 둥 이수근은 이중간첩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69년에 이수근은 서울을 탈출하지만 2월에 중정에 붙잡힌다. 중정은 이수근을 이중간첩이라 발표한다. 미국 CIA 관계자들은 웃었다. 이수근의 탈출 동기는 중정의 이중간첩 혐의였기 때문이었다.

 

중정 감찰실장 방준모는 이수근에 대해 분노했다. 이수근의 여자관계 때문이었다. 이수근은 여자 사냥의 천재였다고 한다. 이수근은 20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수근 스토리를 김수용은 <고발>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영화는 대종상 영화제에서 박노식이 남우주연상을, 조문진이 반공영화 각본상을 받았다. 이후 이수근이 위장간첩으로 몰리자 수상은 취소되고, 수상자들은 상패를 반납했으며, 영화는 상영취소되었다.


 

민중당과 신한당은 27일 통합 야당인 신민당을 창당, 대통령 후보에 윤보선, 당수 유진오로 결정한다. 장준하는 4월부터 윤보선 선거캠프에 뛰어든다. 장준하의 박정희 비판은 화끈했다.

 

박정희 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독립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니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있는 것은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수치입니다.”, “박정희 씨는 국민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고 있고 그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씨는 과거 공산주의의 남로당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남한에서 지하 조직 활동을 한 사람이며 조직원 동료를 팔아 희생시키면서 자기 한 목숨을 산 사람입니다.”

 

개표 결과, 박정희는 5688666(51.5%)을 얻은 반면, 윤보선은 4526541(40.9%)에 그쳤다. 승패는 이번에도 영남에서 갈렸다. 영남에서 박정희는 2266천표, 윤보선은 893천 표. 5대 때 66만 표였던 것이 6대 때는 137만 표로 두 배나 벌어졌다.

 

막대한 선거자금에 힘입은 부정 선거였던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만일 윤보선이 당선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중정 감찰실장으로 있다 이수근 사건으로 쫓겨난 방준모는 90년대 초에 윤보선 저격 음모를 털어놓았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만일 개표 결과 윤보선의 당선으로 나타나면 총으로 저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박정희를 비난한 장준하에 대한 박정희의 보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는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장준하를 구속한다. 장준하는 동대문 을구 후보로 옥중 출마해 4만 표 이상을 얻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다.

 

5.16 쿠데타 직후부터 철저한 지역주의와 특정지역 패권주의가 시작된다. 영남을 중심으로 한 지배동맹을 구축하면서 호남을 차별했다. 박정희는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한다. 반면 호남 민심을 달래기 위한 호남 복선화 사업36년 후인 2003년에 가서야 완공된다. 강준만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를 사랑하는 영남인은 호남 푸대접론에 별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누가 옳건 그르건 극심한 분열이라고 하는 사실 그 자체다. 문제의 요점은 이것이다. 박정희는 한국인의 분열주의를 증오했다. , 누구보다 한국인의 분열주의를 증오하고 개탄했던 박정희는 자신의 사후 20년이 넘도록 꺼지지 않는 지역 분열주의 화마 또는 그 원흉이 된 것이다.”

 

박정희의 대통령 임기는 1971년에 끝나게 돼 있었다. 박정희는 또 대통령을 해쳐먹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68일에 치러지는 제 7대 국회의원 선거가 중요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온갖 부정이 자행되었다. 박정희는 자유당 시절에 동원되었던 온갖 비열한 수법들을 부활시켰다. ‘야당 토벌 작전까지 시행되었다. 공화당은 흥청망청 돈을 뿌리고 다녔고, 밀가루에 이어 보리쌀이 공짜로 뿌려졌고, 여당을 찍으면 판잣집을 헐지 않겠다는 은밀한 공약이 판을 쳤다.

 

박정희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선거구는 목포였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에 여당 국회의원 10명이든 20명이든 낙선시켜도 상관없다. 반드시 김대중만은 당선이 안 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공화당은 2만여 명의 유령 투표권자를 만들어내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을 감행한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2천 표 차이로 당선된다.

 

공화당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117석을 훨씬 웃도는 130석을 얻는다. 선거 과정 뿐만 아니라 투개표 과정에서도 전국적으로 엄청난 부정이 자행되었다. 야당은 6.8 총선을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요구,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전국 각 대학에선 6.8 부정 선거 규탄데모가 벌어졌다. 박정희는 서울 21개 학교에 휴교령을 내린다. 16일까지 전국 31개 대학, 163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진다.

 

비공식적으로 공화당이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야당과 타협할 자세를 취하자, 야당은 또 다시 분열한다. 타협파와 비타협파. 김대중은 정부 측에 3선 개헌을 할 수 없는 보증을 얻을 것과 지방 자치를 실시할 것,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내세워 타협을 모색하는 게 어떤가?” 하고 제시하지만 강경파는 등원 거부 투쟁을 벌인다. 이후 비타협파는 박정희의 사죄에 아무 소득도 없이 등원한다. 이후 벌어진 북한 무장 공비들의 청와대습격 사건으로 인해 부정선거 문제는 완전히 잊혀진다.

 

동백림, 동베를린을 그렇게 불렀다. 78,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한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

 

총 관련자는 194명이었지만, 기소자는 34명이었다. 유럽에 있던 사람들은 617일 전후해 전격적으로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납치돼 한국에 끌려온다. 서독과 프랑스 정부는 영토주권의 침해 라고 비난한다.

 

730일 대법원 형사 3부가 간첩죄와 잠입죄에 대해 파기 환송 판결을 내린다. 곧바로 2일과 3일 새벽에 용공판사 처단하라는 괴벽보가 나붙었다. 이응로는 국위 선양한 유공자로 초청하고 속여 국내에서 체포된다. 6개월 동안 구금당했던 천상병은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유치되었다. 천상병은 이렇게 말했다.

 

“677월 내 인생은 사실상 끝났던 것이다. 정부부에서는 나를 세 번씩이나 전기고문하며 베를린 유학생 친구와의 관계를 자백하라고 했지만 나는 몇 차례 까무러쳤을망정 끝내 살아났다. .....나는 찢어지는 고통도 이겨냈다.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고문을 한 놈을 찾아 죽이고 싶은 심정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겼으니 이것으로 만족한다. 나는 다리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니지만 진실과 허위 중 어느 것이 강자인가를 알고 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희생자로 알려진 건 윤이상이다. 윤이상은 제 3심에서 10년 형을 언도받았다. 부인도 남편이 보고 싶어한다는 거짓말에 속아 납치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남편과 함께 수감당했다가 얼마 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윤이상은 계속되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윤이상은 독일 정부와 세계적 예술가들의 줄기찬 석방요구에 의해 69225일에 석방돼 독일로 추방된다. 강준만은 이렇게 적었다.

 

김형욱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동백림 사건의 모든 관련자들에게 사죄하고 싶다라고 말했지만, 김형욱은 국가 테러리즘의 하수인이었을 뿐이고 그 우두머리는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이후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외치면서 조국 근대화를 위해선 국가 테러리즘도 필요악이라는 자세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박정희 씨바라



 

661031일 시청 앞에서 벌어진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 환영 행사는 엉뚱하게도 서울 도심부 재개발 사업을 촉진시켰다. 한미 양국의 TV 생중계 때문이었다. 서울 시장 김현옥은 세운상가, 낙원상가, 파고다아케이드 등 도심부 재개발 사업에 매달린다. 세운상가는 주상복합아파트로 당시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2한강교는 65125일 준공 개통되었고 66119일엔 3한강교 (현 한남대교)가 착공되었다. 여의도, 3.1 고가도로(청계 고가도로)도 건설되었다. 워커힐에선 연일 기생파티가 벌어졌다. 박정희는 청와대 앞 궁정동에 안가가 생기기 전까지 주로 워커힐에서 기생파티를 벌였다.

 

67년 들어 박정희는 언론 탄압에서 언론 포섭으로 언론 대책의 방향을 바꾼다. 중정은 <조선일보> 리영희에게 베트남 전쟁에 대해 정부의 나팔수가 되기를 제의하고 금전적으로 후한 당근을 제시한다. 리영희는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의 언론인으로선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은 권력에 빌붙어 영혼 없는 성장을 거듭한다. <조선일보>는 리영희를 쫓아낸다. 신민당은 언론탄압에 대한 소명서를 국제신문인 협회 등에 제출하기로 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히려 신문들이 신민당을 공격한다. 군사정권 탄압이후 <사상계>는 연일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장준하가 6.8 총선으로 국회의원이 된 후, 사상계는 부완혁에게로 판권이 넘어간다. 66년 창간된 계간 <창작과 비평><사상계>의 역할을 일정부분 수행하게 된다. <창작과 비평>엔 김수영과 신동엽의 저항시들이 본격적으로 게재되었다.

 

이즈음 나타난 독특한 장르의 영화는 이른바 만주물이라고 불리는 액션영화들이었다. 이 무렵부터 쿵푸영화가 수입되어 인기를 누렸다.

 

67년 최고의 화제작은 배석인 감독의 <팔도강산>이었다. 팔도강산은 이후 5편의 속편으로 이어졌고, 드라마 <꽃 피는 팔도강산>으로 까지 제작돼 12년 간의 장기흥행을 이어간다.

 

17일 신동헌의 총천연색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이 개봉 해 큰 인기를 끌었다.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63년에 만들었던 일본에선 드디어 한국이 일본을 앞지르고야 말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날 <홍길동>의 필름은 한 벌도 남아있지 않다.

 

17일 미국에서 활동하던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 한국에서도 미니스커트 선풍이 일게 된다. 65년에 데뷔한 남진은 66<울려고 내가 왔나>를 히트시킨 데 이어 67년엔 <가슴 아프게>로 대히트를 기록한다. 한편 이미자는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로 인기를 끌었다.



 

배호는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등 도시형 트로트로 인기를 끈다.

 

북한은 소련, 중국과 갈등을 빚으며 67년부터 김일성 개인숭배가 전면적으로 실시된다. 북한의 자주노선으로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원조가 중단된다. 북한의 전쟁불사론에 따라 군사분계선에서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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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3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복희 미니스커트 광고 기억납니다. 신세계백화점 광고였죠. ^^

시이소오 2016-08-13 14:30   좋아요 0 | URL
기억력 좋으시네요. ^^

2016-08-13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4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