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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박정희는 신년사에서 69년을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하겠다고 발표한다. 서울지검은 당시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피카소 크레파스’, ‘파카소 수채화 물감’등을 생산하던 삼중화학공업 대표 박정원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고 제품의 판매 및 광고를 금지시킨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피카소가 공산당원이라는 것.
3선개헌을 위한 작업도 계속되었다. 전국의 역술계에선 ‘정도령론’이 휩쓸었다. 한상범은 ‘정도령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68년 영구집권의 발판으로 3선 개헌을 합리화하는 공작에 그(박정희)는 ‘역술인’이란 직업을 가진 무당, 점쟁이, 관상가 등을 대대적으로 조직, 동원했다. 그들은 전국 조직망을 거미줄처럼 얽어 박정희가 ‘정도령’이고 민중 대망의 ‘진인’이며 ‘미륵불’의 헌선이고 도래한 ‘메시아’라고 떠들어댔다.”
개헌을 지지하는 정체불명의 정치 단체들도 속출했다. 박정희는 67년 총선 때 “3선 개헌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수없이 말했고. 68년엔 “내가 만약 3선 개헌을 한다면 김상협 의원 당신도 단도를 들고 나에게 덤벼라. 당신들에겐 당연히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까지 말했었다.
6월 13일 신민당 원내 총무 김영삼은 국회 본회의에서 “3선 개헌 음모는 제2의 쿠데타”이며, 개헌 음모의 총본산은 중앙정보부라고 비판했다. 1주일 후, 6월 20일 밤 김영삼은 자택 근처에서 괴한 3명에게 피습당한다. 괴한들은 김영삼에게 초산을 퍼부었으나 차창이 닫혀 있어 피해는 없었다.
박정희는 닉슨 독트린 때문에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의 정상회담을 갖는다. 박정희는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으며, 또 필요하다면 핵무기 설치도 허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파병으로 한국은 약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인다. 베트남 파병은 많은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 신화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는 한진그룹이다. 한진 그룹은 월남 특수 5년동안 1억 3천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한진 그룹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69년 3월 대한항공을 인수해 대재벌로 도약하기 시작한다. 베트남 특수를 들어 베트남 파병을 정당화하는 주장에 대해 한홍구는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 특수의 최대 수혜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매년 우리가 베트남 특수의 전 기간에 벌어들인 금액보다 훨씬 많은 달러를 벌어들였다. ...단 20명의 병력을 파견한 대만, 한 사람의 병력도 파견하지 않은 싱가포르나 홍콩이 베트남 특수를 누리지 못하거나 냉전의 정치경제적 논리 속에서 선택적으로 개방된 미국 시장에서 배제되지는 않았다.
한국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명 피해에, 민간인 학살이라는 멍에에, 미국 ‘용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베트남전에서 얻은 경제적 소득은 겨우 2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 대만이 얻은 소득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전사자는 5천 명, 부상자는 1만 6천명에 이르렀다. 한국군의 대량 사망은 은폐된 채, 신중현 작가 작곡, 김추자 노래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만 울려퍼졌다.
53년부터 66년까지 해외 유학한 사람은 모두 7천 398명이었다. 이중 귀국한 사람은 6%에 불과했다. 상류층 자제들, 이른바 ‘돈 있고 백 있는 놈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돈없고 가난한 이들만이 월남에서 피를 흘려야 했다.
64년엔 ‘무즙 파동’이 있었다. ‘무즙 파동’이란 64년 12월 7일 전기 중학입시의 공동출제 선다형 문제 가운데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시험 문항의 답안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정답은 디아스타제였다. 그런데, 학부모들이 당시 보기 가운데 하나였던 무즙도 정답이 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법원에 제소했고, 나아가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솥 채 들고 나와 무즙으로 만든 엿을 먹어보라는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결국 이 ‘무즙 파동’은 6개월 이 지나 무즙을 정답으로 인정, 떨어진 학생 38명을 경기중학 등에 입학시키며 일단락 된다.
67년엔 ‘창칼 파동’이 있었다. 서울시대 전기 중학교 미술문제 중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쓰고 있는 그림은 어느 것인가?”의 정답이 두 개라는 것이었다. 서울중학교 낙방생 학부모 549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패소해 불합격 처리됐다.
그만큼 국민들은 너도나도 교육에 목숨을 걸었다. 66년 봄 한국부인회는 ‘치맛바람 자숙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KS병도 생겨났다. KS (경기고 –서울대)병이다. 이에 69년 서울에서부터 중학교 무시험 추첨 배정제가 실시된다. 이른바 ‘뺑뺑이’. 71년에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69년엔 패티킴 노래의 <서울의 찬가>가 유행했다. 전체 인구에서 농촌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60년 72%에서 70년에는 59%로 감소했다. 도시화율은 60년 28.3%에서 70년 43.1%로 뛰어올랐다. 60년대의 10년간은 전 셰에서 유래가 없는 ‘압축적’ 도시화의 시기였다. 66년에서 70년 사이 서울 인구 증가는 한국 전체 인구 증가의 77%를 차지했다. 이에 정부가 취한 대응책은 강남 개발이었다.
12월 26일엔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완공되면서 강남은 서울생활권으로 들어오게 된다. 제 3한강교 기공식 이후 이른바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우는 부동산 투기 붐이 일어난다. 당시 강남은 ‘영동’이라 불렸다. 영동지구 개발사업에서 사업비 충당용으로 책정된 체비지 가운데 일부 땅은 정치자금용으로 박정희에 제공되었다.
영동 땅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70년에 학동은 20배, 압구정동 25배, 신사동 50배까지 오른다. 이때 등장한 용어가 ‘복부인’이다. 비판의 화살은 투기를 부추긴 정부가 아니라 ‘아줌마의 탐욕’에 돌려졌다.
개발 열기는 남산에까지 미쳤다. 케이블카, 재향군인회관, 야외음악당, 남산순환도로, 야외음악당, 어린이 회관 등등. 손정목은 남산 외인아파트를 “인간이 얼마만큼 바보일 수 있는가의 극치를 알려주는 사례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왜 남산이었을까? 김현옥은 주로 고지대에 아파트를 지었다. 왜 그랬을까? 국장과 과장들이 아파트를 너무 높은 곳에 지으면 위험하고 불편하지 않냐고 이견을 제시했다. 김현옥은 말했다지.
“야 이 새끼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와우아파트는 70년 4월 8일 붕괴했다. 33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박정권은 강남 개발을 하는 동시에 서울 빈민을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시킨다.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판자촌을 철거하면서 14만 5천명의 주민들 역시 광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경기도 광주에는 뭐가 있었나?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의 상징은 고층건물과 자동차였다. 70년 삼일빌딩이 준공되었을 때 전국민이 자랑스러워했다지.
<사상계>는 몰락한 반면 여성지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67년 <여성동아>가 복간했고, 69년엔 <여성중앙>이 창간된다. 여성지 시장은 <주부생활>과 <여원> 과 함께 4파전을 형성해 간다.
신문들은 계속 배를 불린 반면, 기자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현명한’기자들은 촌지를 챙기는 것으로 가계를 꾸려 나갔다. 청와대 출입 기자 가운데, 청와대 대변인이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써주고 5천불의 촌지를 받는 기자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박정희와 닉슨의 정상회담장 주변엔 월남전 반대 시위가 요란했는데도, 기자들은 “수많은 시민들이 손에손에 태극기과 성조기를 들고 박 대통령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거짓보도까지 햇다.
박 대통령 전세기가 뜨지 못하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기자, 경호원 할 것 없이 텔레비전, 냉장고 까지 사서 전세기에 실었기 때문이었다. 소장 언론인들인 <동아일보>의 유혁인, 최영철, 이동복, <한국일보>의 임방현, 임홍빈, ,조선일보>의 이종식, 동양통신의 김성진 같은 기자들이 예외 없이 변절해, 박정희의 총애와 ‘은혜’를 입었다.
4월 3일엔 ‘미원, 미풍 조미료 광고방송 사건’이 있었다. 미풍 조미료 제조회사인 삼상 계열의 제일제당과 미원 조미료 제조회사인 미원주식회사가 조미료 원료인 이노신산 소다를 일본에서 불법적으로 몰래 들여온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동양방송은 미풍에 대해 보도하지 않고 미원이 밀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만 보도했다.
영화계에선 김지미, 엄앵란, 최은희, 태은실, 이후 문희, 남정임, 윤정희 등의 새로운 트로이카 체제가 구축된다. 관객동원에서 69년은 한국영화사상 최고조를 이룬 해로 기록된다. 영화관객은 69년 1억 9천 400만 명으로 최고 기록을 수립한 이후 70년 이후 계속 내리막을 걷게 된다. 텔레비전의 영향 때문이었다.
8월 8일 MBC TV가 개국한다. 이후 TBC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7월 16일 미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아폴로 1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미국 공보원은 남산 야외음악당에 대형 TV 스크린을 설치, 17일엔 생중계, 22일엔 녹화중계를 방송한다. TV는 또한 만화방이 갖춰야 할 필수 품목이기도 했다. 만화방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1970년 전후로 이때 전국 만화방은 약 1만 8천 개 였다.
68년 코카콜라, 69년 펩시콜라의 한국 상륙은 TV 광고에 큰 영향을 끼친다.
10월엔 클리프 리차드 내한공연이 있었다. 여고생과 여대생들이 손수건과 속옷을 무대로 던진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남성들의 충격 탓이었을까. 71년엔 리처드의 국내 공연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신중현 작사, 작곡 박인수 노래 <봄비>는 새로운 감성으로 인기를 끌었다.
박정희는 67년에 중정에게 공무원 부정부패 단속 지시를 내린적이 있었다. 중정이 단속에 뛰어들었는데 할 수가 없었다. 부패 공무원이 너무 많아 행정과 치안이 마비될 지경이었기에. 이맹희에 따르면, 삼성전자를 만드는 데 에 들어간 뇌물만 5억 원이었다.
“당시는 어느 기업이나 모두 공장의 건설이나 외자(차관) 도입에 연관되어 정부나 혹은 박 대통령에게 적절한 대가를 전해야 했다. 삼성전자를 설립할 당시 내 기억으로는 5억 원을 주었던 것 같다. 이 액수는 당시 차관액의 약 3%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래도 내 경우에는 ....박 대통령과 적절한 라인이 있어서 비교적 액수가 적었던 셈이었다.”
박 정권하에서 정치자금 징수는 공화당 재정위원장만의 몫이 아니었다. 힘을 쓸 수 있는 모든 권력자들이 다 동원되었다. 69년 하반기 어느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학렬은 현대건설, 대림산업, 극동건설, 삼부토건, 동아건설 사장 5명을 소집한다. 3선 개헌과 71년 대선과 총선을 위해 돈을 내놓으라는 이유였다.
박정희는 돈을 뜯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자신의 수족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돈을 뿌려댔다. 박정희는 장군들이 청와대로 인사를 오면 ‘서울에서 양옥 한 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주었다.
60년대엔 박정희의 비호아래 약 40개의 기업이 거의 모든 산업을 독점했다. 기존 산업에 신규 업체가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 120여개의 규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9월 13일, 3선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된다. 14일 새벽 2시 50분, 공화당 및 무소속 의원 122명은 야당 의원들이 점거한 국회 본회의장을 버리고, 길 건너편 국회 제 3별관 3층 특별위원실에 집결해 개헌안을 25분만에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의사봉이 없자 직원이 가져다 준 주전자 뚜껑으로 책상을 탕탕탕쳤다.
9월 22일 중정은 가장 격렬한 개헌 반대운동을 벌인 ‘4.19 6.3 범청년회’ 소탕 작전을 개시한다. 모임 사무총장이었던 최형우는 중정에 끌려가 20여일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의 죄명은 3선 개헌을 반대해서 사회를 혼란케 했으니 북괴를 이롭게 한 용공분자라는 것이었다.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10월 17일로 예정되었다. 박정희는 ‘밀가루 대통령’답게 돈과 밀가루를 퍼붓는다. 김종필은 개헌안이 부결될 경우 군부가 다시 쿠테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며 국민들을 협박한다. 개표결과 투표율 77.1%, 찬성률은 65.1%였다. 각 지역별 찬성표 비율에 따라 총 60만 달러의 보상금이 차등 지급된다.
3선 개헌이 통과되면서 김형욱은 폐기처분된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에 김형욱 대신 김계원을. 비서실장에 이후락 대신 김정렴을 앉힌다.
박정희는 이승만 하야 직후 이승만에 대해 동정적인 사설을 쓴 이병주에게 이런 반론을 펼쳤따.
“그거 안됩니다. 그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혀 없소. 12년이나 해먹었으면 그만이지. 사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 후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도 춘추의 필법으로 그런 자에겐 필주를 가해야 해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라고 할까? 여기서 잠깐. 박정희는 이승만을 ‘돼먹지 않는 놈’이라 말했는데, 이승만을 국부라 하는 것들은 박정희 말을 무시하는 건가? 박정희를 무시하는 건가?
아놔, 이 ‘돼먹지 않은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