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인'이라 하면 무슨 별종 같지만 암튼 책을 좋아하는 독서인들이라면 빙긋이 미소를 지을 만한 책이 출간됐다. 정수복의 <책인시공>(문학동네, 2013). 사회학자이면서 한때 방송인이었던 저자는 '걷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보태자면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 책의 부제는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다. '책 읽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제목의 '책인'인 것(조어 자체는 '책 만드는 사람'을 뜻할 수도 있다). 

 

 

 

저자가 서두에 '독자 권리 장전'을 붙인 게 눈에 띄면서 재미있는데, 나도 언젠가 읽은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 2004)에 나오는 '독자의 절대적 권리 선언'을 보완한 것이다. 좀 밋밋한 제목을 베르나르 베르베르 버전으로 바꾸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독자 권리 장전'쯤 되겠다. 그 권리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책 제목은 <책을 읽을 권리>라고 해도 무방했겠다. 언제(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장소에도 구애받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저자는 17가지의 권리를 나열한다. 설명은 생략하고 항목만 나열하면 이렇다.

 

1. 책을 읽을 권리

2. 책을 읽지 않을 권리

3. 어디에서라도 책을 읽을 권리

4.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

5. 책을 중간중간 건너뛰며 읽을 권리

6.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7. 다시 읽을 권리

8.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9.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

10. 책에 대한 검열에 저항할 권리

11. 책의 즐거움에 탐닉할 권리

12. 책의 아무 곳이나 펼쳐 읽을 권리

13. 반짝 독서를 할 권리

14. 소리내서 읽을 권리

15. 다른 일을 하면서 읽을 권리

16. 읽은 책에 대해 말하지 않을 권리

17. 책을 쓸 권리

 

저자의 말대로 이것은 '시안'이다. 그래서 '상대적이며'란 말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사실 이런 권리라면 남못지 않게 누리고 있는 터여서(남용 수준이라고 할까) 마치 '나의 권리'를 읽는 듯하다. 이 가운데 <책인시공>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주로 '어디에서라도 책을 읽을 권리'와 '언제라도 책을 읽을 권리'다. 제1부 '책을 읽는 시간'이 후자와 관련된 것이라면, 제2부 '집 안에서 책을 읽다'와 제3부 '집 밖에서 책을 읽다'는 모두 전자와 관련된 것이다. 개인적으는 '집 밖에서 책을 읽다'에 한몫 거들고 있어서 반가운데 저자가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의 한 대목을 인용해서다. 

 

김훈의 책을 읽는 가장 좋은 장소는 어디일까? 내 경험에 의하면 저녁시간에 좀 한산한 시내버스이다. 나는 십년도 더 전에, <풍경과 상처>에 맨처음 실린 글이 책으로 묶이기 전에 바로 그 저녁 버스 안에서 읽었고, 읽으면서 황홀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방위생활을 하다가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서 산 책의 말미에 그 글이 붙어 있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던 것인지. 나는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부분을 에어콘이 고장 나 창문을 열어 놓고 달리는 저녁 버스의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읽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책장을 넘기며 그의 글들을 읽을 때, 나는 이 세상에 그만 안 있어도 좋을 듯했다. 

 

요즘 버스 안 조명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니지만, 여하튼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책장을 넘기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그 정도 행복은 누릴 권리가 우리에겐 있다...

 

13.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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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0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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