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매경이코노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한겨레출판, 2011)을 읽고 내용을 간추려보았다. 제목에 답하자면, 인종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무관하다. 인종주의와 관련하여 나온 책 몇 권을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매경이코노미(11. 11. 09)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

‘중요하지만 대개 생각하기를 꺼려하는 주제’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라는 저서에서 ‘인종주의’라고 답한다. 꺼려하는 이유야 물론 분명하다. 인종주의에 드리워진 어두운 현실과 야만적 역사 때문이다. 책의 부제는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라고 붙어 있지만, 사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인종주의가 가진 오래지 않은 역사, 오히려 ‘짧은’ 역사다.  

인종 구분만큼 오래되었을 듯싶지만 정작 ‘인종주의’란 말이 만들어진 것은 1930년대다. 독일 나치의 ‘유대인 청소’ 프로젝트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도입된 것이 인종주의다. 그렇다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종주의란 ‘인종주의의 전사(前史)’ 혹은 ‘인종주의 이전의 인종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종이란 말이 비록 인종주의보다는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쓰인 말은 아니다. 영어의 경우 ‘인종(race)’이 현재와 같은 의미를 갖고 등장하는 건 16세기 중반부터라 한다. 16세기는 지리상 발견의 시대이고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지화가 본격화되는 시대였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에게 신대륙 발견은 동시에 원주민과의 조우를 의미했다. 그들은 원주민에게도 인간의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성을 갖고 있는 똑같은 인간이라면 기독교도로 개종시켜야 했고, 그렇지 않다면 노예로 삼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17세기 노예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아프리카인을 인간보다 모자란 존재로 보는 시각이 널리 퍼졌다. 그런 편견이 없었다면 아프리카의 흑인 2,000만 명을 악명 높은 노예 수송선에 싣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서양을 건너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8세기의 계몽철학자 칸트와 흄조차도 “어떤 사람이 피부색이 새카맣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19세기에 대두한 과학적 인종주의는 흑인종과 황인종이 열등하다는 걸 입증하려 애썼고, 여성과 하등 인종들이 백인 남성보다 추론 능력이 떨어진다고 간주했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빌미로 시민권을 제한하고 정치적 차별을 정당화했다.  

제국주의적 인종주의가 사회적 다윈주의와 결합하면서 나타난 것이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미국과 유럽을 휩쓴 우생학이다. 다윈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을 비롯한 우생학자들은 인류발전을 위해 ‘부적격자’의 출생은 낮추고 ‘적격자’의 수는 늘리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최악의 인종주의가 나치의 ‘유대인 청소’와 ‘최종해법’이다. “벼룩이 집에 살고 있다고 해서 가축이 되지 않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우리들 틈에 끼어 살고 있다 해도 그들이 우리에 속한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한 괴벨스의 발언이 나치의 인종주의를 잘 대변해준다.  

물론 나치의 유대인 청소 프로젝트가 ‘과도한’ 것이긴 했지만 반(反)유대주의 역사는 뿌리 깊은 것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란 용어조차도 사실은 1870년대 후반에야 등장했다. 독일의 선동가 빌헬름 마르가 반유대연맹이란 단체를 만들고 유대인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면서 쓰기 시작한 게 기원이다.  

그러니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인종주의의 역사는 아주 짧다. 더불어 나치의 인종주의 과학이 시도한 인종주의의 정당화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 유전학에 따르면 인류가 서로 다른 유전자풀(gene pool)을 갖고 있는 인구 집단들로 구분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유전자풀의 패턴이 다르고 표현형질에서 차이가 난다고 해서 ‘분리된 인종’이란 개념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오늘날 인종에 관한 과학적 견해다.  

즉 인종이란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다. 따라서 인종의 차이를 전제로 인종 간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인종주의는 근거 없는 허울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구상의 많은 분쟁이 인종화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게 또한 현실이다. 우리는 ‘탈인종적인 미래’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일단은 인종주의에 대한 바로보기가 필요할 듯싶다.  

11. 11. 02. 

P.S. 인종주의에 대해 그다지 읽은 바가 없어서 서평감으로 고른 책이지만 생각만큼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종주의 자체가 몹시도 혼란스러운 개념이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역자 또한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미 모호함과 혼란스러움은 인종주의에 대해 뭔가 '명료한 규정'을 원하는 독자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라고 '옮긴이의 말'에 적었다. "얼핏 보기에도 인종적-계급적-성적-지리적 개념이 혼재해 있는 다층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게 인종주의다.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인종/인종주의를 짧게 소개하는 것이다 보니, 책이 그리 친절하지는 않다."(295쪽) 좀 아쉬운 부분이다.  

   

번역과 관련해서도 한 대목은 교정하고 싶다. 아무리 무난하고 깔끔한 번역이라도 언제나 옥에 티는 감추고 있는 법이니 그걸 고쳐나가는 일이 역자나 편집자만의 몫은 아니다.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결론 '탈인종적인 미래를 생각한다'의 한 대목이다.  

탈민족적, 탈부족적, 탈인종적인 세계시민으로서의 생각 틀과 정체성, 그리고 이전보다 더 과거 회귀적인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21세기에도 작동하고 있다.(283쪽)  

원문은 "A long struggle between attempts to create post-ethnic, post-national, post-racial, cosmopolitan frameworks and identities and more backward-looking projects is going to be a continuing feature of life in the 21thcentury."(170쪽)이다. 역자가 '오랜 투쟁(long struggle)'이란 표현을 옮기지 않아서 메시지가 좀 약화됐다는 느낌이다.  

다시 옮기면, "탈민족적, 탈부족적, 탈인종적인 세계시민이라는 인식틀과 정체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와 이전보다 더 퇴행적인 인종주의적 프로젝트 사이의 오랜 투쟁이 21세기에도 계속 우리의 삶을 특징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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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sbinder 2011-11-10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블로그에서 소개되는 번역된 한 권의 책에 관한 글을 읽을 때면 '두 권의 책을 비교해가며 읽고 있을'로쟈님의 모습을 떠올리곤 해요. 그런 성실함을 본받고자 합니다^^

로쟈 2011-11-24 11:42   좋아요 0 | URL
^^
 

네이버의 '오늘의책'이 어떻게 선정되는지 모르겠지만 10월의 마지막날 '오늘의책'에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가 올라왔기에(http://book.naver.com/bookdb/today_book.nhn?bid=6365013) 기념으로 스크랩해놓는다(기억엔 <로쟈의 인문학 서재>도 언젠가 선정된 바 있다). 글쓴이는 드보르작님이다. 덧붙이자면, <책을 읽을 자유>가 올해의 우수교양도서 410종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고 오늘 발표됐다. 

 

오늘의책(11. 10. 31) 인터넷 서평꾼의 십년간 책읽기의 기록

필요하다. 책을 읽을 자유. 생계 때문일까. 이 땅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다 보면 언제나 책 읽을 시간이 반 토막이 난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다. 이럴 때 포기하지 않는 사람, 책 읽기를 직업으로 한다는 인터넷 서평 꾼 로쟈를 만나보자. 그에게 책은 밥이다. 맛이 있든 없든 먹어야 사는. 이 책은 지난 십 년간 책 읽기의 기록이다. 스타킹보다 책에 대한 페티쉬가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혹자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인문학 이유식, 떠먹여 주기 식이라고 꼬집는다. 하지만 닥치는 대로 먹자, 이유식을 먹고 크면 언젠가 갈비도 뜯을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이 안에는 무려 150여 권이 넘는 책들이 등장한다.  

행복이란 무엇인 가에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까지 저자의 관심은 광범위하다. 먼저 현대 사회에 대한 접근으로 시작할까.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소비사회란 상품의 사용가치보다 과시하기 위한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과시적 소비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남들보다 더 대단한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 ‘행복의 신화’는 ‘행복’을 계량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현대 사회가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믿음'을 가져왔다고 진단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 그리고 ‘낙오자’와 ‘성공한 자’밖에 없는 거대한 ‘수용소’(조르조 아감벤, [호모사케르])에서 살고 있다. 이 사회는 그 둘이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사회를 고민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까. 경제학의 전제는 사회가 개인으로 구성돼 있고, 그들은 최소한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는 개인에게 무의미하거나 걸림돌이 되고 만다. 개인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사회 또한 개인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거나 실현된 사회는 없다. 억압적 사회는 하나의 목소리만을 허용할 것이다. 그런 사회라면 정치는 필요 없을 것이다. 상탈무페([정치적인 것의 귀환], [민주주의의 역설])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협은 적대가 아니라 합리성과 중립성을 가장한 ‘합의’이다.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제비뽑기, 즉 통치할 자격의 부재(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이다.  

아감벤([목적 없는 수단])의 진단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하고 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얼마 전 서울역에 노숙자들을 쫓아낸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 있었다. 아감벤이라면 이러한 현실 정치에 저항하기 위해 목적으로부터 해방된 삶 즉,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을 주장했을 것이다.  

이런 삶을 단순히 비정상적인 삶이라고 단죄할 수 있을까. '정상'과 '비정상', '미'와 '추'는 어떻게 나누어 지는가. 움베르트 에코([추의 역사], [미의 역사])에 따르면 모든 아름다움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추함은 제각각이어서 더 풍부하고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오똑한 코는 하나지만 뭉툭한 코, 넙적 코, 매부리코, 비뚤어진 코, 술주정뱅이의 코 등 한결 다채롭지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전복)이다. 어쩌면 예술이 필요한 것일 수도. 우리에겐 뒤샹('샘')도 필요하고 마그리트('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도 필요하다.  

이 밖에도 예술, 문학, 한국 역사 등을 망라해 지은이의 비판적 안목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지면상의 제약이 있어 아쉽다. 여러모로 유용한 책이다. 어려운 책을 알기 쉽게 풀이해 놓아 대학생부터 누구나 읽을 수 있을 듯하다.  

1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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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0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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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4: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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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0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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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5: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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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16: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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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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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18: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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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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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6: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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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7: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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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구입한 게 두 주쯤 된 듯싶은데 리뷰기사가 좀 뒤늦게 떴다. 김우창 교수의 칼럼집 <성찰>(한길사, 2011) 얘기다. 수년간 경향신문에 기고했던 칼럼들을 모은 것인데, 예전에 나왔던 <시대의 흐름에 서서>(생각의나무, 2005)도 합본돼 있다. 개인적으론 <정치와 삶의 세계>(삼인, 2000)까지 같이 읽어보려고 한다. 그의 칼럼에서 '성찰' 혹은 성찰적 태도의 최대치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는 '성찰'과는 다른 자리에 설 수도 있다...

경향신문(11. 10. 29) 인문학적 사유로 조망한 한국 사회와 세계 문명

전문 칼럼니스트가 대접받는 시대다. 신문에 정치칼럼, 경제칼럼, 환경칼럼, 문화칼럼이 등장한 지는 오래다. 총선 때가 되면 정치 칼럼니스트가 정세를 분석하고 전망을 제시하며, 자유무역협정(FTA)이 현안으로 불거질 때에는 경제전문가가 언론에 단골로 등장한다. 



‘칼럼니스트’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74·사진)는 이러한 흐름에 역행한다. 그는 전문 칼럼니스트가 아니다. 언론인도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사회 현실을 깊고 넓게 읽어내며 미래를 전망하는 칼럼니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2003년 겨울부터 2009년 겨울까지 경향신문에 칼럼을 연재했으며 1년여의 휴식을 가진 뒤 지난 4월부터 다시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김우창은 전문가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통합형 지식인이다.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그는 사계(斯界)의 석학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관심은 아카데미와 전공 분야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일간지 칼럼을 통해 학문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인문학적 사유로 한국 사회와 세계 문명을 조망한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대중집회 ‘월가를 점령하라’를 지켜본 뒤 쓴 칼럼 ‘위기의 자본주의’(경향신문 10월17일자)를 보자. 그는 반월가 시위를 오늘날 세계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내는 ‘가장 증후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며 자본주의 위기의 향방을 조심스레 진단하고 있다. 이 글에는 1920년대 초 아일랜드의 정치적 혼란을 괴수(怪獸)의 이미지로 그려내며 파시즘의 도래를 예언한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가 인용되고 현 자본주의를 ‘익명의 체제’로 규정하며 50개의 머리를 가진 뱀과 비슷하다고 말한 미국 언론인의 분석과 전망을 소개하고 있다. 칼럼 주제는 금융자본의 위기이지만 그 속에는 정치, 경제, 문학, 철학이 들어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사유와 성찰을 바탕으로 그는 ‘유토피아와 종말론적 타도(打倒)’ 사이에서 반월가 시위를 바라보는 다중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살 만한 사회를 만드는 세부 공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김우창의 신간 <성찰: 시대의 흐름에 서서>(한길사)는 그가 2003년부터 9년간 경향신문에 써온 칼럼 156편을 모은 책이다. 저자의 말대로 “칼럼이란 단명할 수밖에 없는 글”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칼럼은 다르다. 신문에 쓰여졌지만 그의 글은 사건과 이슈에 즉물적으로 대응하는 촌평(寸評)이 아니다. 그는 기자 이상으로 사실(fact)을 존중한다. 그의 글에는 발생한 사실이 정확히 제시되고 그것을 보도하고 분석한 세계 유수의 언론매체가 인용된다. 그는 매일 아침 인터넷으로 뉴욕타임스, 르몽드, 슈피겔과 같은 세계적인 신문·잡지를 스크린한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그가 다루는 사건은 전지구적인 문맥을 획득한다.

김우창의 또 하나의 장점은 평정심이다. 그의 글은 쿨하다. 테러리즘, 환경파괴, 분배 불평등을 다루면서도 흥분하지 않는다. 70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를 길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이성적 성찰의 힘이고, ‘사고와 행동의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는’ 포용적 사고의 성취이기도 하다.

김우창은 ‘군자불기’의 지식인이다. 그의 글은 하나의 그릇에 매이지 않고(不器),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다(不羈). 그는 원고지 18장의 길지 않은 칼럼에서 ‘학문의 소요유’를 즐긴다. 김우창이 꿈꾸는 세계는 “세계 속에서 진정한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작은 삶에 충실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리의 주택문화와 부동산정책을 다룬 ‘집짓기와 동네짓기’(313쪽)라는 글이 그 사례다. 그는 여기에서 철학자 하이데거의 ‘유기적 공간’과 ‘국민을 편안하게 한다’(安百姓)는 동아시아 정치의 요체를 설파한 뒤 ‘급조된 거대계획’이 아닌 ‘오래된 작은’ 동네를 예찬한다.

김우창 칼럼의 주제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세계화, 금융위기, 날치기 정치문화, 기업의 사회적 책임, 학문 자율성, 환경생태 문제 등 세계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포괄한다. 북핵, 4대강 사업, 촛불집회, 금융위기, 다문화가정도 있다. 세계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시사받을 게 적지 않을 것이다.(조운찬 선임기자) 

11. 10. 30. 

P.S. 기사에서 언급된 칼럼 '위기의 자본주의'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10. 18) [김우창칼럼]위기의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 시위와 저항의 사건들이 연속되고 있다. 이것은 작은 일들의 연쇄이지만 오늘의 세계 체제의 근본에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증후적인 사건은 미국 뉴욕의 복판에서 일고 있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대중 집회이다. 이것은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워싱턴을 비롯하여 미국의 여러 도시에 같은 성격의 항의 시위를 촉발하고 있다. 또 런던에서는 증권시장을 점령하라는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고 하는데, 세계의 다른 도시에도 시위가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앞, 8월 초에는 런던과 영국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시위와 난동이 있었다. 이러한 일들보다 더 큰 사건은 튀니지, 이집트에서 정권이 무너진 일이었고, 아랍에서의 시위와 갈등과 권력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적어도 서방진영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세계의 주축의 하나인 유럽에서 국가 부채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해결에 가까이 갈 듯하면서도 해결되지 않고, 또 해결의 방안 자체가 경제 위축과 실업 위기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여 참으로 유럽 경제가 종전의 번영을 회복할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1920년대 초에 아일랜드의 시인 W B 예이츠는 ‘제이의 강림(降臨)’이라는 시에서 당시의 아일랜드의 정치적 혼란을 정체를 분명히 파악할 수 없는 괴수(怪獸)의 이미지로 상징한 일이 있다. (그는 후에 이 괴수를 파시즘의 대두에 관계되는 것으로 말하였다.) 모든 것이 중심을 잃고 혼란과 피의 물결이 밀려드는데, 성난 새들이 퍼덕거리며 날아오르는 사막에서 사자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괴수가 어슬렁어슬렁 베들레헴을 향하여 간다--예이츠는 그의 예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이 사막의 괴수는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수호신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미래를 준비하는 귀신인지는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고 있는 여러 사태들은 이와 비슷하게 새로운 역사적 전기의 도래에 대한 조짐인 듯하면서도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불투명하다.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태들은 자본주의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세계의 미래를 위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은 것이다.

객관적이든 아니든 미래에 대한 일정한 전망이 없이는 현재를 하나로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던 공산주의는 그 위광을 잃어버린 이후 미래를 예감케 하는 힘으로 생각되지 아니한다. 지금의 여러 증후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진단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상을 대체할 미래가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최근 BBC와의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인도 출신의 영국귀족원 의원 메그나드 데사이 경은, 지금의 위기의 주 원인--서방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가 아시아로, 즉,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 교수이면서 정치 운동가인 코넬 웨스트는 지금 일고 있는 ‘아랍의 봄’에 대조하여 지금 월가 점령 운동과 같은 사건은 ‘미국의 가을’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것은 그의 다른 설명을 들어보면, 자본주의가 지금의 형태로 지속할 수는 없다는 뜻을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을이 오면 어떤 형태의 변화가 오는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하는 말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전체적인 전망이야 어찌되었든, 풀릴 듯하다가도 풀리지 않고 되풀이되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향방은 심히 점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문가에게도 그러하고 일반 사람의 느낌으로도 그러하다. 다만 일반인들이 절감하는 것은 실업과 빈곤과 소득 감소와 불안한 삶의 현실이다. 월가 점령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불안의 현실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이지만, 시위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의 하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간 금융업의 탐욕에 대하여 여러 글을 발표한 미국의 독립 언론인 매트 태이비는 최근의 글에서 이들이 내놓아야 할 몇 개의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월가 점령 운동에 깊은 공감을 표하면서도 그 요구가 무엇인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운동이 시들해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러한 항목들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논설은 우선 미국에서 물가 상승으로 배고픈 사람이 수천만 명에 이르게 되고, 수백만 명이 집값을 내지 못하여 집을 잃었는데도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원인들을 한 군데로 몰아서 생각하기가 어렵고 그에 대한 책임자를 잡아내어 밝힐 수도 없다. 책임을 져야할 체제가 복잡하고 분산되어 있어서 원인과 책임의 소재를 잡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체제 뒤에 숨어 있고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딱 이것이 문제라고 꼬집어내 말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비유로는 이 익명의 체제는 50개의 머리를 가진 뱀과 비슷하다.

그러나 정치계, 경제계, 금융계에서의 내부자 거래, 등 뒤에서 이루어지는 정경유착의 담합, 규제 제도의 내파(內破) 등이 여기에 관계되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태이비는 시위 군중이 요구하여야 할 사항 다섯 가지를 내놓는다. 첫째, 보험과 투자 금융과 상업 금융을 하나로 뭉치는 통합 금융 체제를 깨트려야 한다. 둘째는 주식 거래, 파생 금융상품 거래에 각각 0.1%와 0.01%의 세금을 부과하고 급속도의 전자 거래에 제한을 가하여야 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 세금만으로도 파산 직전의 금융 기관 구제에 사용한 국고 지출금과 국가부채를 쉽게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건전한 기업 투자가 늘어 날 것이고, 고용 증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셋째, 공적 자금을 받은 회사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로비하는 것을 불법화하고 일반적으로 그들이 대통령 선거와 같은 일에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한다. 넷째, 헤지펀드에 세금 혜택을 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은행 임원들에게 그때그때의 업적에 맞추어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은행은 망해도 본인은 흥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기 때문에 구태여 보상을 한다면, 이삼 년 후에나 회수할 수 있는 스톡옵션을 준다. (사실은 더 적극적으로 보수 상한제가 필요할 것이다.)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데에 고쳐져야 할 항목으로 이 정도가 충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이러한 목록이 그럴싸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것이 입법 조치만으로도 시정될 수 있는 사항들이라는 것이다. 대체 전망이 불투명하게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많은 세부적 수정 노력은 사태를 조금 더 나은 것이 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거대 권력에 의한 유토피아의 실현이 실패로 끝난 것을 많이 보게 된 것이 20세기 여러 사회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보다 살 만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세부 공학의 방법밖에 없다는 주장은 맞는 말로 들린다.

태이비의 시정 항목들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사회 위기에 대한 진단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미국 또는 유럽 또는 아랍 여러 나라의 문제와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의 표면적인 지수로 보아 체제가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와 같은 차원의 전면적 위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할는지 모른다. 성격이 다른 종류의 부정 사건이라고 할, 부산저축은행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미국이나 유럽에 일어난 바와 같은 금융 위기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과 부패는 우리의 일상적 관습이 되어 있고 또 실업자나 빈곤 또는 복지의 문제 또 그 의외의 여러 원인이 합쳐져서 불안과 불행의 느낌이 세계적으로 높은 사회가 한국이다. 이것은 사회 체제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관련된 여러 원인들의 발견과 시정책을 강구함으로써 조금은 나아질 수 있는 현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유토피아와 종말론적 타도(打倒) 사이에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정치적 관심의 형태이다. (적어도 정치 논쟁의 측면에서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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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프만과 인문학의 미래

미국의 저명한 니체 번역자이자 연구자였던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가 다시 번역돼 나왔다. 과거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1998)라고 한번 출간된 적이 있지만 미진한 번역으로 구설에 올랐던 책이다. 에드먼드 윌슨이나 한나 아렌트 같은 '저널리스트'에 대한 비판으로도 유명한데, 실상 초점은 '인문학의 무덤'이 된 1970년대 미국 대학을 향하고 있다(그리고 이 점이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보게 한다). 재번역되길 기대했던(그리고 직접 독려하기도 했던) 1인으로서 출간소식이 반갑다.

  

경향신문(11. 10. 29) 탐색하라, 질문하라, 그리고 비판하라

괴테는 ‘통찰가’ 유형에, 한나 아렌트는 ‘저널리스트’ 유형에 속한다. 이 책의 저자인 월터 카우프만(1921~1980)의 구분에 따르자면 그렇다.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인문학자인 그는 “철학과 문학, 종교와 역사, 음악과 미술”을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이어서 네 가지 유형으로 인문학자들의 태도를 구별한다. 통찰가와 사변가, 저널리스트와 소크라테스 유형이 그것이다.

예컨대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베토벤, 미켈란젤로, 플라톤”은 ‘통찰가’다. 저자 카우프만에 따르자면 “그들은 외로운 사람들”이다. “자기 시대의 일반적 상식과 단절된 채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자신들의 비전을 알리기 위해 계속 시도”하는 이들이다. 반면에 ‘사변가’는 “자신의 엄격함과 전문성에 자부심이 있으며, 자기 분야의 공론이나 공통의 노하우를 지나치게 신뢰”한다. “동시대의 통찰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자기 분야의 통찰가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적대시하는” 특징을 드러낸다. 카우프만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거의 모든 인문학이 대학에 소속된 이후, 대부분의 대학 교수들”이 바로 그런 축에 속한다고 꼬집는다. 

‘저널리스트’ 유형도 비판의 도마에 올린다. 카우프만은 이 유형에 대해 “첫눈에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원고를 제공하지만, 몇 년 지나면 그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다”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부류”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미국의 문학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을 “2차 저작물에나 의존할 뿐 아니라 책의 곳곳에 숱한 오류를 남기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유대인 출신의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전체주의의 가장 중요한 근거인 종교재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플라톤의 <국가>와 <법률>에 나오는 야간의회에 관한 내용을 완전히 무시했다”고 공격한다.

카우프만이 인문학자의 유형을 이렇듯 넷으로 구분하는 까닭은 ‘무너지는 인문학’에 대한 안타까움 탓이다. 그는 통찰가와 소크라테스가 사라지고, 사변가와 저널리스트 유형이 판치는 현실에 대해 애통한 심사를 감추지 않는다. “(인문학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점점 사변가가 되어갔으며, 소크라테스적 에토스는 절멸했다”고 강조한다. 특히 카우프만이 응시하는 과녁은 인문학의 무덤이 된 ‘대학’이다. 그는 “오늘날의 대학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토론과 비판을 중시하는 소크라테스적 유형”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그가 이 책을 집필했던 시기는 1970년대였다. 하지만 인문학의 붕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21세기적 상황은 한층 열악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문화’를 앞세운 대학들이 통찰가와 소크라테스를 몰아냈다는 그의 지적은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적확하다.

이 책은 카우프만이 스스로 밝힌 대로, 모든 인문학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 예컨대 교수와 서평가, 편집자와 저널리스트, 번역가 같은 이들을 염두에 뒀다. 그래서 책을 읽는 방법과 서평을 쓰는 태도, 번역가와 편집자를 향한 비판과 고언 등을 에세이적 문체로 풀어놓는다. 카우프만은 책의 말미에서 “위대한 고전을 보존하고 양육하며, 그것을 통해 인류의 대안과 비전을 탐색하는 것”으로 인문학의 존재 이유를 정리한다. 이어서 ‘탐색과 질문, 비판’을 인문학의 ‘정도’(正道)로 제시하면서, 교수와 언론인, 편집자 등의 지식인들에게 “너 자신을 한 번 돌아보라”고 권유한다.

카우프만은 독일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후, 프린스턴 대학에서 33년간 철학을 가르치면서 5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니체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다.(문학수 선임기자) 
 

11. 10. 29. 

 

P.S. 니체 번역서 외 카우프만의 주저는 <니체, 철학자, 심리학자, 반그리스도>인데 니체 '열풍'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번역될 기미가 없다. 개인적으론 <실존주의,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사르트르까지> 같은 선집도 카우프만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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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문학자의 마음가짐과 인문학의 미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11-07 20:04 
    이번주부터 격주로 주간경향에 북리뷰를 싣는다. 첫번째 책으로 고른 것은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 이미 소개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서평에서는나대로 중요하다 싶은 대목을 간추렸다.주간경향(11. 11. 15)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인문학의 미래가 인류의 미래다!” 미국의 저명한 인문학자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미래>에서 던지는 메시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예언이나 확신이 아니라 희
 
 
헌내 2011-10-29 14:21   좋아요 0 | URL
관련 기사가 생각나서 링크합니다.... ㅠㅠ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logId=4699773&userId=kyoungbin


로쟈 2011-10-29 17:58   좋아요 0 | URL
몇달 전인가 이슈가 됐던 내용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10-30 17:13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서는 한길사에서 <헤겔>이 번역되어 헤겔 전문가로 알려진 인물인데 요즘 그 책 구하기가 영 힘들군요.영어권은 독일 철학에 약해서 카우프만이 몇 안 되는 헤겔 전문가잖아요.

로쟈 2011-10-30 17:16   좋아요 0 | URL
영어권이 독일철학에 약하다는 건 좀 옛날얘기 아닐까요?^^ 카우프만이 활동하던 시기였다면 모를까. 찰스 테일러 같은 이도 걸출한 헤겔 전문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0-30 20:56   좋아요 0 | URL
찰스 테일러 것(헤겔철학과 현대의 위기)은 구해놨는데 카우프만 것이 없어서 아쉬워요.그외 영미권 철학자 중 헤겔철학에 정통한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세요(핀카드 것은 너무 비싸서 도서관에서 빌려볼까 합니다).그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헤겔 관련서적을 꽤 많이 사모았는데 영미권 것은 찰스 테일러 것밖에 없습니다.<이성과 혁명>은 영어로 나온 것이긴 하지만 마르쿠제를 영미권 학자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요.

로쟈 2011-10-30 21:09   좋아요 0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는 지젝이죠.^^ 저는 대학의 '전문가'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푸른바다 2011-11-06 21:49   좋아요 0 | URL
찰스 테일러의 <헤겔 철학과 현대의 위기>는 일종의 축약본이고 방대한 Hegel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테리 핀카드가 정신 현상학 새로운 영역본을 인터넷에 공개했습니다. 쉽게 다운 받아서 볼 수 있습니다.^^ 영미권이 독일 철학에 약하단 건 정말 옛날 이야기고 제가 알기론 독일보다 독일 철학 연구가 더 발달해 있는 걸로 압니다.^^ 미국이 아직 학문의 세계에선 앞서가고 있습니다.^^

푸른바다 2011-11-06 22:06   좋아요 0 | URL
카우프만의 <니체>가 아직 번역되지 않았었군요... 저도 원서는 갖고 있습니다만. 카우프만은 <정신의 발견>이란 책으로 제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프로이트, 아들러, 융을 비교한. 그는 프로이트 지지자였죠...

로쟈 2011-11-07 07:55   좋아요 0 | URL
<정신의 발견>은 말씀하시니 생각나네요. <니체>가 번역되지 않은 건, 국내 니체 수용이 찻잔속의 태풍이 아니었나란 생각을 하게 돼요. 프랑스판 '새로운 니체'만 수용된 감이 있습니다...
 

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애초엔 플라톤의 <국가>에 대해 적으려고 했지만 새로 번역된 <고르기아스>(민지사, 2011)의 한 대목을 읽고서 방향을 약간 틀었다. 칼럼에 나오는 승계호 교수의 플라톤론은 <서양철학과 주제학>(아카넷, 2008)에서 참고할 수 있다.  

한겨레(11. 10. 29) 정의는 약자의 속임수고 철학은 유해하다고?

오래전 학부 시절의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제대한 복학생으로 강의를 같이 들으며 절친했던 동기와 하루는 철학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서양문학을 전공하니까 서양철학도 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문제의식에서였다. 정확하진 않다. 그냥 강의실 밖에서도 ‘학술적인’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철학 공부를 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렇다고 ‘신병’(新兵) 수준은 아니어서 윌 듀랜트의 <철학이야기>나 러셀의 <서양철학사> 같은 책은 이미 읽어둔 터였다. 무얼 먼저 읽을까 의논하다가 또 자연스레 플라톤부터 읽어보자고 합의했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플라톤을 전체주의 사상의 원조로 맹공격한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대학가에서 읽히던 때였다.

문제는 마땅히 읽을 만한 플라톤의 ‘대화편’ 번역이 드물었다는 점이다. 옥스퍼드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입문서를 대신 손에 들었지만 읽어낼 엄두를 내지 못해서 결국은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을 원서로 강독했다. 번역본이 나와 있기도 했지만 가장 얇은 책이라는 게 선택의 주된 이유였다. 그게 개인적으론 플라톤과 근접 조우한 기억이다. 거의 만날 뻔했으나 스쳐지나간 인연이라고 할까.

이후에 번역된 대화편들을 간간이 구입하면서도 열독할 만한 계기는 얻지 못했다. 이제는 같이 읽을 친구가 없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사후정당화이긴 하지만 조금 더 ‘학술적인’ 이유를 대자면 초기 대화편인 <고르기아스>가 새로 번역되지 않은 것도 이유에 포함된다.

미번역된 <플라톤 재발견>의 저자 승계호 미 텍사스대 석좌교수에 따르면 플라톤의 철학적 여정은 <고르기아스>에서부터 시작한다. 플라톤의 모든 대화편이 주제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진다는 ‘연결주의적’ 입장에서 승 교수는 플라톤철학이 소피스트들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고 정리한다.

가령 <고르기아스>에서 주인공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의 권력정치에 대한 옹호와 대면한다. 칼리클레스는 공정이란 관념이 약자들이 강자를 속이기 위해서 고안해낸 속임수이며 강자는 약자를 정복하고 약탈하는 권리를 지닌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의 주장을 물리칠 만한 강력한 논증을 제시하지 못한 채 <고르기아스>는 마무리되고, 플라톤의 이어지는 대화편들은 이 문제에 대한 일련의 응답이라는 게 승 교수의 주장이다. 가장 유명한 중기 대화편 <국가>도 사실 이러한 전체 구도를 반복한다. 제1권에서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는 올바름(정의)이란 강자의 편익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반박하지만 그 반박은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제2권에서 제10권까지 아주 긴 분량을 할애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서 올바름이란 무엇이고, 올바른 국가란 또 어떠해야 하는지 자세히 살핀다. 개인적 차원에 앞서 국가적 차원에서 올바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국가라는 정치공동체를 벗어난 개인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정의의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고르기아스>에서 칼리클레스는 철학 유해론 또한 주장한다. 젊었을 때 적당히 접촉하는 건 괜찮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철학을 한다면 익살스러운 일이 될 거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것은 정치로 충분하지 굳이 정치철학이 필요한가라는 반문으로도 정리될 수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철학은 올바름과 함께 철학 자체를 옹호하기 위한 긴 여정으로도 볼 수 있다. 사정이 그러하기에 중년의 나이에도 플라톤을 손에 드는 것은 ‘플라톤과 함께’ 철학 무용론에 맞선다는 의미도 갖는다

11. 10. 28.  

P.S. 도서관을 검색해보면 <고르기아스> 번역은 1980년대 초반 상서각에서 나온 대화편에 포함돼 나온 적이 있다. 서광사판 희랍 고전 번역 근간 목록에 포함돼 있지만 아직은 감감 무소식이다. 이번에 나온 민지사판은 역자가 "영어판과 일어판을 기초로 비교 대조해 가며" 옮긴 중역본이다. 역자는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 <파이드로스> 세 권을 묶어서 '소크라테스의 스피치 철학'이라고 부른다. <고르기아스>를 스피치 철학, 혹은 소피스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소개한 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또한 일종의 '도전'이라면 번역의 차원에서도 철학계의 발빠른 응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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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9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30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