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구입한 게 두 주쯤 된 듯싶은데 리뷰기사가 좀 뒤늦게 떴다. 김우창 교수의 칼럼집 <성찰>(한길사, 2011) 얘기다. 수년간 경향신문에 기고했던 칼럼들을 모은 것인데, 예전에 나왔던 <시대의 흐름에 서서>(생각의나무, 2005)도 합본돼 있다. 개인적으론 <정치와 삶의 세계>(삼인, 2000)까지 같이 읽어보려고 한다. 그의 칼럼에서 '성찰' 혹은 성찰적 태도의 최대치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는 '성찰'과는 다른 자리에 설 수도 있다...

경향신문(11. 10. 29) 인문학적 사유로 조망한 한국 사회와 세계 문명

전문 칼럼니스트가 대접받는 시대다. 신문에 정치칼럼, 경제칼럼, 환경칼럼, 문화칼럼이 등장한 지는 오래다. 총선 때가 되면 정치 칼럼니스트가 정세를 분석하고 전망을 제시하며, 자유무역협정(FTA)이 현안으로 불거질 때에는 경제전문가가 언론에 단골로 등장한다. 



‘칼럼니스트’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74·사진)는 이러한 흐름에 역행한다. 그는 전문 칼럼니스트가 아니다. 언론인도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사회 현실을 깊고 넓게 읽어내며 미래를 전망하는 칼럼니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2003년 겨울부터 2009년 겨울까지 경향신문에 칼럼을 연재했으며 1년여의 휴식을 가진 뒤 지난 4월부터 다시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김우창은 전문가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통합형 지식인이다.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그는 사계(斯界)의 석학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관심은 아카데미와 전공 분야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일간지 칼럼을 통해 학문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인문학적 사유로 한국 사회와 세계 문명을 조망한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대중집회 ‘월가를 점령하라’를 지켜본 뒤 쓴 칼럼 ‘위기의 자본주의’(경향신문 10월17일자)를 보자. 그는 반월가 시위를 오늘날 세계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내는 ‘가장 증후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며 자본주의 위기의 향방을 조심스레 진단하고 있다. 이 글에는 1920년대 초 아일랜드의 정치적 혼란을 괴수(怪獸)의 이미지로 그려내며 파시즘의 도래를 예언한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가 인용되고 현 자본주의를 ‘익명의 체제’로 규정하며 50개의 머리를 가진 뱀과 비슷하다고 말한 미국 언론인의 분석과 전망을 소개하고 있다. 칼럼 주제는 금융자본의 위기이지만 그 속에는 정치, 경제, 문학, 철학이 들어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사유와 성찰을 바탕으로 그는 ‘유토피아와 종말론적 타도(打倒)’ 사이에서 반월가 시위를 바라보는 다중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살 만한 사회를 만드는 세부 공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김우창의 신간 <성찰: 시대의 흐름에 서서>(한길사)는 그가 2003년부터 9년간 경향신문에 써온 칼럼 156편을 모은 책이다. 저자의 말대로 “칼럼이란 단명할 수밖에 없는 글”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칼럼은 다르다. 신문에 쓰여졌지만 그의 글은 사건과 이슈에 즉물적으로 대응하는 촌평(寸評)이 아니다. 그는 기자 이상으로 사실(fact)을 존중한다. 그의 글에는 발생한 사실이 정확히 제시되고 그것을 보도하고 분석한 세계 유수의 언론매체가 인용된다. 그는 매일 아침 인터넷으로 뉴욕타임스, 르몽드, 슈피겔과 같은 세계적인 신문·잡지를 스크린한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그가 다루는 사건은 전지구적인 문맥을 획득한다.

김우창의 또 하나의 장점은 평정심이다. 그의 글은 쿨하다. 테러리즘, 환경파괴, 분배 불평등을 다루면서도 흥분하지 않는다. 70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를 길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이성적 성찰의 힘이고, ‘사고와 행동의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는’ 포용적 사고의 성취이기도 하다.

김우창은 ‘군자불기’의 지식인이다. 그의 글은 하나의 그릇에 매이지 않고(不器),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다(不羈). 그는 원고지 18장의 길지 않은 칼럼에서 ‘학문의 소요유’를 즐긴다. 김우창이 꿈꾸는 세계는 “세계 속에서 진정한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작은 삶에 충실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리의 주택문화와 부동산정책을 다룬 ‘집짓기와 동네짓기’(313쪽)라는 글이 그 사례다. 그는 여기에서 철학자 하이데거의 ‘유기적 공간’과 ‘국민을 편안하게 한다’(安百姓)는 동아시아 정치의 요체를 설파한 뒤 ‘급조된 거대계획’이 아닌 ‘오래된 작은’ 동네를 예찬한다.

김우창 칼럼의 주제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세계화, 금융위기, 날치기 정치문화, 기업의 사회적 책임, 학문 자율성, 환경생태 문제 등 세계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포괄한다. 북핵, 4대강 사업, 촛불집회, 금융위기, 다문화가정도 있다. 세계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시사받을 게 적지 않을 것이다.(조운찬 선임기자) 

11. 10. 30. 

P.S. 기사에서 언급된 칼럼 '위기의 자본주의'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10. 18) [김우창칼럼]위기의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 시위와 저항의 사건들이 연속되고 있다. 이것은 작은 일들의 연쇄이지만 오늘의 세계 체제의 근본에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증후적인 사건은 미국 뉴욕의 복판에서 일고 있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대중 집회이다. 이것은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워싱턴을 비롯하여 미국의 여러 도시에 같은 성격의 항의 시위를 촉발하고 있다. 또 런던에서는 증권시장을 점령하라는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고 하는데, 세계의 다른 도시에도 시위가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앞, 8월 초에는 런던과 영국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시위와 난동이 있었다. 이러한 일들보다 더 큰 사건은 튀니지, 이집트에서 정권이 무너진 일이었고, 아랍에서의 시위와 갈등과 권력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적어도 서방진영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세계의 주축의 하나인 유럽에서 국가 부채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해결에 가까이 갈 듯하면서도 해결되지 않고, 또 해결의 방안 자체가 경제 위축과 실업 위기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여 참으로 유럽 경제가 종전의 번영을 회복할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1920년대 초에 아일랜드의 시인 W B 예이츠는 ‘제이의 강림(降臨)’이라는 시에서 당시의 아일랜드의 정치적 혼란을 정체를 분명히 파악할 수 없는 괴수(怪獸)의 이미지로 상징한 일이 있다. (그는 후에 이 괴수를 파시즘의 대두에 관계되는 것으로 말하였다.) 모든 것이 중심을 잃고 혼란과 피의 물결이 밀려드는데, 성난 새들이 퍼덕거리며 날아오르는 사막에서 사자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괴수가 어슬렁어슬렁 베들레헴을 향하여 간다--예이츠는 그의 예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이 사막의 괴수는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수호신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미래를 준비하는 귀신인지는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고 있는 여러 사태들은 이와 비슷하게 새로운 역사적 전기의 도래에 대한 조짐인 듯하면서도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불투명하다.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태들은 자본주의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세계의 미래를 위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은 것이다.

객관적이든 아니든 미래에 대한 일정한 전망이 없이는 현재를 하나로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던 공산주의는 그 위광을 잃어버린 이후 미래를 예감케 하는 힘으로 생각되지 아니한다. 지금의 여러 증후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진단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상을 대체할 미래가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최근 BBC와의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인도 출신의 영국귀족원 의원 메그나드 데사이 경은, 지금의 위기의 주 원인--서방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가 아시아로, 즉,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 교수이면서 정치 운동가인 코넬 웨스트는 지금 일고 있는 ‘아랍의 봄’에 대조하여 지금 월가 점령 운동과 같은 사건은 ‘미국의 가을’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것은 그의 다른 설명을 들어보면, 자본주의가 지금의 형태로 지속할 수는 없다는 뜻을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을이 오면 어떤 형태의 변화가 오는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하는 말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전체적인 전망이야 어찌되었든, 풀릴 듯하다가도 풀리지 않고 되풀이되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향방은 심히 점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문가에게도 그러하고 일반 사람의 느낌으로도 그러하다. 다만 일반인들이 절감하는 것은 실업과 빈곤과 소득 감소와 불안한 삶의 현실이다. 월가 점령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불안의 현실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이지만, 시위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의 하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간 금융업의 탐욕에 대하여 여러 글을 발표한 미국의 독립 언론인 매트 태이비는 최근의 글에서 이들이 내놓아야 할 몇 개의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월가 점령 운동에 깊은 공감을 표하면서도 그 요구가 무엇인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운동이 시들해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러한 항목들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논설은 우선 미국에서 물가 상승으로 배고픈 사람이 수천만 명에 이르게 되고, 수백만 명이 집값을 내지 못하여 집을 잃었는데도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원인들을 한 군데로 몰아서 생각하기가 어렵고 그에 대한 책임자를 잡아내어 밝힐 수도 없다. 책임을 져야할 체제가 복잡하고 분산되어 있어서 원인과 책임의 소재를 잡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체제 뒤에 숨어 있고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딱 이것이 문제라고 꼬집어내 말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비유로는 이 익명의 체제는 50개의 머리를 가진 뱀과 비슷하다.

그러나 정치계, 경제계, 금융계에서의 내부자 거래, 등 뒤에서 이루어지는 정경유착의 담합, 규제 제도의 내파(內破) 등이 여기에 관계되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태이비는 시위 군중이 요구하여야 할 사항 다섯 가지를 내놓는다. 첫째, 보험과 투자 금융과 상업 금융을 하나로 뭉치는 통합 금융 체제를 깨트려야 한다. 둘째는 주식 거래, 파생 금융상품 거래에 각각 0.1%와 0.01%의 세금을 부과하고 급속도의 전자 거래에 제한을 가하여야 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 세금만으로도 파산 직전의 금융 기관 구제에 사용한 국고 지출금과 국가부채를 쉽게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건전한 기업 투자가 늘어 날 것이고, 고용 증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셋째, 공적 자금을 받은 회사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로비하는 것을 불법화하고 일반적으로 그들이 대통령 선거와 같은 일에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한다. 넷째, 헤지펀드에 세금 혜택을 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은행 임원들에게 그때그때의 업적에 맞추어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은행은 망해도 본인은 흥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기 때문에 구태여 보상을 한다면, 이삼 년 후에나 회수할 수 있는 스톡옵션을 준다. (사실은 더 적극적으로 보수 상한제가 필요할 것이다.)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데에 고쳐져야 할 항목으로 이 정도가 충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이러한 목록이 그럴싸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것이 입법 조치만으로도 시정될 수 있는 사항들이라는 것이다. 대체 전망이 불투명하게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많은 세부적 수정 노력은 사태를 조금 더 나은 것이 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거대 권력에 의한 유토피아의 실현이 실패로 끝난 것을 많이 보게 된 것이 20세기 여러 사회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보다 살 만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세부 공학의 방법밖에 없다는 주장은 맞는 말로 들린다.

태이비의 시정 항목들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사회 위기에 대한 진단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미국 또는 유럽 또는 아랍 여러 나라의 문제와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의 표면적인 지수로 보아 체제가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와 같은 차원의 전면적 위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할는지 모른다. 성격이 다른 종류의 부정 사건이라고 할, 부산저축은행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미국이나 유럽에 일어난 바와 같은 금융 위기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과 부패는 우리의 일상적 관습이 되어 있고 또 실업자나 빈곤 또는 복지의 문제 또 그 의외의 여러 원인이 합쳐져서 불안과 불행의 느낌이 세계적으로 높은 사회가 한국이다. 이것은 사회 체제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관련된 여러 원인들의 발견과 시정책을 강구함으로써 조금은 나아질 수 있는 현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유토피아와 종말론적 타도(打倒) 사이에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정치적 관심의 형태이다. (적어도 정치 논쟁의 측면에서는 그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