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인가 타대학 도서관에 복사를 신청한 자료가 도착했다는 문자메일을 받았다. 한때는 자주 애용했던 도서관 서비스인데 요즘은 그래도 뜸하게 이용하는 편이다. 신청했던 자료는 월터 카우프만(1921-1980)의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1998) 원서이다. 'The Future of the Humanities'(1995; 초판은 1977). 국역본 자체는 번역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잘 '알려진' 책이다. 예컨대, 출판평론가 표정훈에 따르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우리말로 번역된 이 책은 번역 문장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해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필요 때문에 원서와 대조해가며 읽어 보기 위해 '고가의' 번역본까지 입수했다(IMF시기이던 1998년에 나온 책이 2만원이다!). 표정훈씨의 리뷰를 자료로 옮겨놓는다(http://www.kungree.com/book/good63.htm).

The Future of the Humanities : Teaching Art, Religion, Philosophy, Literature, and History (Foundations of Higher Education)

월터 카우프만, <인문학의 미래>

인문학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에는 대학의 인문학 관련 연구소 소장(교수)들이 모여서 관련 당국의 정책적 배려와 지원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인문학이 정부의 지원이 없어서 그 위기가 심화되리라는 인문학 교수들의 생각은 가당치 않다. 오히려 정부를 비롯한 외부 기관의 지원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 인문학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다. 말하자면, 최근 논의되는 인문학의 위기는 대부분 인문 관련 학과의 위기 아니면 그 학과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의 위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인문계 대학 학과가 모조리 없어지고 인문계 대학 교수들이 모두 직장을 잃는다고 해도, 인문학은 죽지 않는다. 대학이 아닌 다른 곳에서, 대학 교수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요컨대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방식으로 그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터전과 새로운 방식이 당장은 대학에 비해서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라 대학의 비효율보다는 사정이 좋지 않을까 한다.

사실, 여기 소개하는 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나라의 '학과 또는 교수'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헤겔의 <법철학>과 <논리학>을 각각 <권리의 철학>, <논리의 과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물리학>으로, 졸라의 <제르미날>을 <저미날>로 번역해 놓은 것은 그렇다 치고,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번역문이 'The Future of the Humanities'와 독자들이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앞서 언급한 책제목의 오역은 원서의 영역 제목을 무책임하게 그대로 옮겨 놓은 결과들이다.) 물론 저자인 카우프만의 문장 자체가 까다로운 편이기는 하다. 실존주의에 대한 카우프만의 논문을 읽어 본적이 있는데, 영어를 독일어식으로 구사한다. 그러나 나랏돈은 제대로 쓰여져야 한다.

이 책은 한국학술진흥재단번역총서의 하나로 출간되었는데, 번역 지원을 하려면 번역자의 선정에서도, 번역의 질에서도 끝까지 관리, 감독해야 하지 않을까? 궁리닷컴의 '좋은 책' 코너에서 소개하기는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The Future of the Humanities가 좋은 책이라는 뜻일 뿐, '인문학의 미래'가 좋은 책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번역문의 미로를 헤매본 결과, 카우프만은 대략 이런 말을 들려준다. 우선, 인문학을 가르치거나 배워야 하는 까닭 네 가지. 1. 인류가 남긴 위대한 작품들을 보존하고 그것을 보존할 사람을 양성한다. 2. 인생의 존재 이유, 인간 존재의 가능한 목적,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여러 가지 대안을 탐색한다. 3. 비젼(vision)을 가르친다. 4. 비판적인 정신을 기른다.

그리고 카우프만은 인문학의 이상과 같은 존재 이유들이 무시되는 까닭은,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본래부터 걸맞지 않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각광받는 인문학자들이 있기 마련인데, 언론적 성향을 지닌 인문학자들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새로운 것, 최신의 유행에 대한 관심으로 무장하여, 인간 정신의 위대한 산물들의 보존을 위태롭게 하는 주범들인 셈이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를 언론인으로 치부해 버리기까지 한다(*얼마전 강유원도 한 서평에서 아렌트에 대한 카우프만의 견해를 인용했다).



카우프만은 인문학 교육의 핵심은 글읽기, 즉 독서라고 한다. 인문학의 개혁은 학생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는 것에서 출발해야 성과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소개하는 네 가지 독서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해석적 독서. 저자의 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다. 책 자체의 문맥에 관심이 없고, 완전히 자기 방식에 따라 읽는 것이기도 하다. 2. 독단적 독서. 해석적 독서와 비슷한데 그에 비해서 더욱 현학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3. 불가지론적 독서. 오래되고 드문 책이라는 이유로 책을 읽는 것이다. 글의 스타일이나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지엽적인 것에만 주목하며, 내용의 완성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4. 변증법적 독서가 있는데, 카우프만은 이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책을 통해 문화적 충격을 추구하고, 자신을 돌아 볼 기회를 갖고자 노력한다. 책일 단순히 읽는데 그치지 않고 책에게 질문을 던지고 책과 대화한다. 또한 저자가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저자의 전체 작품 및 저자의 지적 발전 과정 속에서 특정 저작이 어떤 의미,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등을 고민하고, 저자가 처한 여러 배경과 저자가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

카우프만은 서평에도 시비를 건다. 대부분의 정기간행물들은, 보다 긴 안목에서 영향을 미칠 독창적인 책보다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책을 다루는데 익숙하다는 것. 구체적인 사례로, 카르두치, 오이켄, 에케가레이, 미스트랄 등, 노벨상 초기에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을 들고 있다. 그들과 동시대인들인 입센, 카프카, 릴케 등은 노벨상을 받지 못했지만, 과연 오늘날의 우리는 어느 쪽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가? 말하자면, '서평을 하는 사람들이, 출판사 개최한 서커스의 호객꾼이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번역도 카우프만의 시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카우프만은 중요한 고전의 영역본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류들을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며 이야기한다. (도대체 이 책의 한국어판 번역자들인 두 명의 대학 교수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학술진흥재단의 번역 지원금 생각?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온 사람들인데, 카우프만이 질타하는 미국 인문학의 현실이 사실인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탄탄한 고전학 훈련을 쌓은 유럽의 지식인이(카우프만은 나치의 압제를 피해 독일에서 이주한 지식인으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랜 동안 철학을 가르쳤다.), 미국 인문학계의 현실에 대해 불만을 표명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미국 나름의 학풍이랄까 그런 것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태도가 부족하다는 단점을 지니기는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례들을 풍부하게 원용하면서 인문학의 목표, 의의, 방법 등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영어 원서를 읽거나 제대로 다시 번역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08. 01. 23.

P.S. 국내에 몇 권의 저작이 번역돼 있지만(나는 그의 <헤겔>을 읽었었다) 카우프만은 무엇보다도 니체의 영역자이자 연구자로 유명하다(청하판 니체 전집에 카우프만의 해설들이 번역돼 실렸었다). 하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그의 책은 단 한권도 없는 듯하다. 한때는 가장 유명했던 니체 연구서의 하나였던 <니체: 철학자, 심리학자, 반그리스도>조차도 한국어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이니 (아렌트와는 상반되게도) 이젠 잊혀진 철학자의 대열에 합류하는 게 아닌가도 싶다. 그의 홈피(http://www.acsu.buffalo.edu/~adspear/Kaufmann%20entrance.htm)라도 링크시켜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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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학은 인문학의 무덤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10-29 08:46 
    미국의 저명한 니체 번역자이자 연구자였던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이 다시 번역돼 나왔다. 과거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1998)라고 한번 출간된 적이 있지만 미진한 번역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던 책이다.에드먼드 윌슨이나 한나 아렌트 같은 '저널리스트'에 대한 비판으로도 유명한데, 실상 초점은 '인문학의 무덤'이 된 1970년대 대학을 향하고 있다.재번역되길 기대했던(그리고 직접 독려하기도 했던)1인으로
 
 
람혼 2008-01-24 01:25   좋아요 0 | URL
정말 청하 출판사 니체 전집의 앞머리마다 놓여 있던 카우프만의 서문들이 떠오르네요.^^

로쟈 2008-01-24 23:27   좋아요 0 | URL
한 시대의 지표쯤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