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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원 신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자서전 특집기사의 한 꼭지로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8)에 대해 적은 것이다.   

 

연세대 대학원신문(161호) 나비의 변태를 거친 기억의 아상블라주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는 제목만 따라가자면 프루스트와 함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는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입증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이토록 정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을까라는 경탄을 자아내는 ‘기억의 예술가’ 나보코프! 하지만 그의 ‘기억’은 ‘기예’가 아니다. 나보코프는 서문의 첫 문장에서 “이 작품은 개인적인 기억의 단편들을 그러모아 상호연관된 조직을 이루도록 조립해놓은 아상블라주”라고 규정해놓았다. ‘개인적인 기억의 단편들’이야 물론 작가이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나보코프의 고유한 자산이겠지만 자서전은 그러한 단편적 자산들의 모음이 아니다. 그것들의 체계적인 아상블라주, 곧 배치이고 구성이다. 그리고 이 작업의 작업반장은 기억력만이 아니다.



나보코프는 한 비평가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기억력이 형편없는 열렬한 메모리스트”라고 말한 적이 있다. ‘메모리스트’는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보코프의 기억력은 ‘형편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메모리스트’가 되는가? 그가 에세이집 <강한 의견>에서 털어놓는 바에 따르면 “상상력이란 기억력의 한 형식”이다.

 

 

나보코프가 보기에, 생생한 기억에 대한 예찬은 기억에 단편들을 저장해두었다가 나중에 창조적 상상력이 회상과 창작을 결합하여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에 대한 예찬이다. 그가 자서전의 영국판 제목을 원래는 ‘말하라, 므네모시네’라고 지으려고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발음이 어렵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기억의 여신’은 기억력과 상상력을 포괄한다. 이 둘은 서로 형제다. 그리고 기억과 상상이 하는 일이 모두 ‘시간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동업자이기도 하다 

 

 

나보코프에게서 기억과 상상이 한 통속이며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는 점은 그의 자서전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전체 15장으로 이루어진 이 자서전에서 프랑스어로 가장 먼저 씌어진 5장 ‘마드무아젤 오’는 나중에 영어로 번역되어 단편집에 수록되었고 7장 ‘콜레트’ 또한 ‘첫사랑’이란 제목의 단편소설로 발표되었다. 이 자서전 자체는 ‘비소설’로 분류되지만 ‘소설’과 ‘비소설’의 경계가 나보코프에게서는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모든 사건의 객관적 존재 자체가 하나의 ‘불순한 상상’의 형식이며 창조적 상상력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니 ‘순수한 객관적 현실’이나 ‘순수한 기억’이란 개념이야말로 오히려 ‘픽션’일 따름이다. 따라서 진실은 언제나 기억과 상상의 창조적인 합성물이다.

 

 

 

 

나보코프가 이 자서전의 글들을 잡지에 연재하기 직전에 발표한 최초의 영어소설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1938)에서 주인공 브이는 러시아 태생의 영국작가인 자신의 이복형 세바스챤 나잇의 전기가 결함투성이인 것을 발견하고 형의 ‘참인생’이 무엇이었는지 직접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혼이란 오직 존재의 방식에 불과하며, 한 영혼의 맥박을 발견하여 그대로 따라간다면 어떤 영혼도 당신의 것이 될 거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은 브이 자신이 곧 세바스챤 나잇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두 명의 ‘작가’가 등장하여 각각 기억과 상상을 통해서 자신의 진실을 찾아가는 <말하라, 기억이여> 또한 마찬가지의 도식을 보여준다. 이때 두 작가란 자서전의 주인공으로서의 ‘나’와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나’를 가리킨다. 가령, 출발점이 된 ‘마드무아젤 오’ 이야기에서 나보코프는 어린시절 늙은 여가정교사 마드무아젤 오의 매력이 ‘소설가 나보코프’가 다른 작품에서 그려낸 초상에서는 사라져버린 것을 애석해한다. 그에게 자서전은 “가련한 마드무아젤에 대한 남은 이야기를 살려보려 하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그 노력을 통해서 복원/창조해내고자 하는 것은 어떤 사건과 인물의 유기적 진실이다. 그것은 시인이 발견하고 창조해내는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시간을 정지시키는, 그리하여 무력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얻어진다 

 



나보코프의 문학관이라 할 만한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자들은 공간의 한 지점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살피는 반면에 시인들은 시간의 한 지점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느낀다. 11장의 ‘첫 시’에 나오는 이 대목을 그는 자신의 철학적 친구 비비안 블러드마크의 말이라고 인용하지만, ‘비비안 블러드마크’는 <롤리타>에 등장하는 ‘비비안 다크블룸’과 마찬가지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나그램이다. , 철자들을 재배열하여 만든 이름이다. 그러니 비비언 블러드마크는 나보코프의 철학자 분신이겠다. 이 ‘두 사람’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시의 의의란 이런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시는 위치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의식으로 포용하는 세계에 관련하여 한 사람의 자리를 나타내고자 함은 태곳적부터 있어 온 충동이다.

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Другие берега Conclusive Evidence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는 바로 그러한 ‘태곳적 충동’에 따라 자신의 위치(자리)를 표시하려는 작가의 ‘필사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자서전은 그의 망명작가로서의 이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자서전’답다. 그는 연재한 글들을 1951 <결정적 증거>라는 제목으로 출간한다(자신의 존재에 대한 결정적 증거!). 첫 번째 영어판이다. 그리고 1954년 아내의 도움을 받아 많은 단락들을 수정하고 보완한 러시아어판 <피안>을 낸다. 최종판으로서 <말하라, 기억이여>(1966)는 이 러시아어판을 다시 영어로 바꾼 ‘악마적인 작업’의 소산이다. 마치 “나비들에게 친숙한 몇 겹의 변태 과정”을 닮은 이러한 작업은 나보코프의 자부대로, 다른 어떤 인간들에 의해서도 시도된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도 이 자서전은 나보코프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08. 06. 22.

P.S. 나보코프의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 읽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19037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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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6-2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를 좋아한다더니 번역본 표지에 나비가 그려져 있군요.나비를 잡으려고 포충망을 든 사진을 아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습니다.

로쟈 2008-06-24 09:51   좋아요 0 | URL
좋아한 수준이 아니라 프로 연구자였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6-24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과연...
 

개인적인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기도 해서 스펠마이어의 <인문학의 즐거움>(휴먼&북스, 2008)을 들고 있다(책에 대한 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28696 참조).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롭게 읽고 있는데 기본적으론 잘 씌어졌기 때문이고, 덧붙여 우리말로 무리없이 옮겨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아쉬움을 지적하자면, 먼저 'Arts of Living'이란 원제를 '인문학의 즐거움'으로 옮긴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 물론 원저의 제목도 그것만 따로놓고 보자면 모호하긴 하다. 부제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어떤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 책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의 즐거움'이란 국역본의 제목은 그보다 더 애매하다. '인문학이 변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는 나름 '긴박한' 제안서이기에 '즐거움'은 언뜻 한가해 보이는 것이다. 해서 이 책에 대해 더 잘 말해주는 것은 '21세기 인문학의 재창조를 위하여'란 부제와 '위기의 인문학을 위한 새로운 모색' 같은 문구이다. 거기에 준해서 책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책이 너무 무겁다. 하드카바의 '튼튼한' 책이 나온 건 아무래도 책에 대한 수요를 소장용이나 도서관 장서용으로 파악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책은 고전명저류가 아니라 '실용적인' 제안서이다. 방대한 자료 검토와 인문적 성찰, 탄탄한 자기주장을 담고 있긴 하나 기본적으론 '보고서'적인 성격의 책이다(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같은 책이 그렇듯이). 저자 자신도 스스로를 '실용주의자'라 칭하고 있고. 하지만 번역본은 너무 묵직하여 가방에 넣고 다니자니 '인문학의 즐거움'보다는 '인문학의 무거움'을 먼저 팔목에 느끼도록 해준다. 이 무게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이기는커녕) "인문학은 이제 밤에 소리 없이 나는 까마귀가 되"었다는 뒷표지의 문제의식과도 맞지 않는다. 정장을 입은 까마귀처럼.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처럼 소프트카바로 처리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리고 또 이 책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유감스러운 건 색인이 누락됐다는 점. 60여쪽의 주석을 실으면서 색인을 누락시킨 건 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번거로웠을까?). 어쩌다 인문서 한권 낸 것이 아니라 '인문출판사'를 자임하고자 한다면 분명한 자기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출판사 휴먼&북스의 기간 리스트를 보니 <인문학의 즐거움>이 좀 이채롭긴 하다). 만든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뒷마무리를 못 지은 것 같은 찜찜함을 공유할 필요가 있을까?

거기에 더 바란다면 저자가 참고/인용하고 있는 책들의 국역본도 같이 기재해주면 좋았겠다는 것. 물론 이건 필수적인 것은 아니고 그저 독자에 대한 서비스 차원의 것이긴 하나 연계독서를 원하는 독자들에겐 유익한 정보가 된다. 가령 리처드 로티나 에머슨, 윌리엄 제임스, 막스 베버, 베블렌, 앨런 소칼 등 국내에 소개돼 있는 책들을 '링크'시켜주는 것. 

 

 

 

 

예컨대 나는 2장에서 "미국에서는 찰스 이스트먼 같은 사람이 최초의 진정한 현대적 세대 - 한 세상을 상실한 뒤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서는 최초의 세대 - 에 속했다."(66쪽)란 문장을 전후로 하여 서너 쪽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 인디언/미국인의 책이 국내에도 소개돼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봤다. '오이예사'(인디언 이름)란 저자명으로 <인디언 숲으로 가다>(지식의풍경, 2000), <삶이란 바람소리일 뿐이다>(거송미디어, 2006)를, 그리고 '오히예사'란 저자명으로 <인디언의 영혼>(오래된미래, 2004)과 <교회로 간 인디언>(도솔, 2007) 등을 찾을 수 있었다. 모두가 엔솔로지여서 아쉽긴 한데, 그래도 나중에 혹여라도 이 책들을 들춰보게 된다면 어떤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번역본에 대한 정보가 병기된다면 말이다.        

몇 가지 아쉬움을 적었지만 그럼에도 책은 재미있다(물론 이 '재미'가 대다수 독자에게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저자가 "흥미없던 주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교수"란 평을 학생들로부터 듣는다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그리고 이미 적은 대로 번역 또한 무난하여 읽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다. 100여 쪽을 읽으면서 '오역'이라고 체크하고 원문을 확인해본 대목은 딱 한 군데이다. 그건 프랑스의 문학사가이자 <영문학의 역사>의 저자 이폴리트 텐느(1828-1893)에 관한 대목이다. 보통 <영문학사>라고 옮겨지는 4권 분량의 방대한 책이 유명한데, 미국에서도 이 책은 많이 읽힌 모양이다. 아래는 갈란드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다.

"나는 날마다 그 모든 위대한 프랑스인들이 '민족' '환경' 그리고 '추진력'에 대해 말한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가장 광범한 영향력을 미친 작품들 중에는 텐느의 4권짜리 <영문학의 역사>가 있었는데, 이 책에는 각 나라의 문화는 그 고유의 물질적 환경에 의해 형성된 집단적 인격을 표상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76-77쪽)

“I bent to this task, pondering all the great Frenchman had to say of race, environment, and momentum.” Among the most widely influential works of the time, Taine’s four-volume History of English Literature purported to demonstrate that the culture of every nation expresses a collective personality shaped by the nation’s material circumstances.

역자가 잘못 옮긴 부분은 먼저 '위대한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위대한 프랑스인'이라는 것. 물론 '이폴리트 텐느'를 가리키겠다. 그리고 텐느가 문학사를 결정짓는 요소로 들고 있는 세 가지 중 '시대'가 '추진력'으로 잘못 옮겨졌다. 찾아보니 "race, environment, and momentum" 중 'momentum'을 그렇게 옮긴 것인데 여기선 'moment'와 같은 뜻이고 '시간변수'를 말한다. 불어의 'temps(시간)'을 옮긴 것이다. 설사 텐느의 문학사관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더라도 조금만 시간을 내 검색해보았다면 피할 수 있었던 오류이다. 물론 이 정도 오류라면 '옥에 티'라고 해야겠다...

08.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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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06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이번에 회원 가입했어요.저에게 폴 부르제의 '백주의 악마' 번역본이 있는데(정음사) 텐느를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프랑스의 가톨릭 정신을 망치는 인사라며 그런 사상과 투쟁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쓴다고 집필 목적을 밝혔더라구요.보수파들에게 텐느는 위험인물이었나 봐요.에밀졸라가 텐느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을까요.실제로 텐느의 사상이 그리 진보적이란 생각은 안들덴데...자연주의의 기계적 유물론이 위험하다고 받아들이니 그랬을까요?

로쟈 2008-04-06 22:59   좋아요 0 | URL
텐느에 대해서는 저도 <문학사회학>이나 <비교문학> 등에서 읽은 게 전부입니다. 세 요소에 '신의 섭리'는 빠져 있으니 가톨릭 정신에는 위배되는 게 아닌가도 싶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4-06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ll을 부사로 옮기고 그다음은 그 위대한 프랑스인(텐느를 가리키는 갈아쓰기 용법)으로 번역해야겠군요.음...좋은 영어공부가 되었습니다.

로쟈 2008-04-06 23:18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all이 대명사이고 뒤에 관계사가 생략된 문장입니다...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 2006)을 잠깐 읽었다(이하에서는 그냥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적는다).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와 <주기율표>(돌베개, 2007)가 한달쯤 후에 나오니까 레비에 관한 책으로는 최초였을 테다. <이것이 인간인가>의 말미에도 서경식의 '작품해설'이 포함돼 있다. 그의 개인사의 곡절까지 포함해서 이래저래 두 사람의 이름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아무려나 <이것이 인간인가>와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같이 읽게 된 셈인데, 잠깐 읽으면서 받은 인상을 몇 자 적는다. 먼저 판권 표시로 보아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의 일본어판은 1999년에 출간됐는데, 국역본 책갈피에는 이 책으로 "2002년에 일본 이딸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로꼬뽈로상을 받았다"고 돼 있다. 몇 년이 지나서 상을 주는 법도 있나 싶었지만, 역시나 그건 아닌 듯하다. <시대를 건너는 법>(한겨레출판, 2007)의 책갈피에는 "2000년에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으로 이탈리아문학원이 주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고 돼 있는 걸 보면(이탈리아문학원?).

'마르꼬뽈로상'이나 '마르코폴로상'이나 어차피 같은 상일 테니까 서로 다른 연도에 다른 곳에서 상을 받았다는 건 말이 안된다. 짐작컨대, 2000년이탈리아 문화원이 주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을 것이다. 참고로 얼마전에 나온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그 해의 '마르코 폴로 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책이다(일어본 초판은 2002년에 나왔다).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은 1996년 1월 1일 밀라노에서 토리노로 향하는 보통열차 안에서 시작된다. 그리고는 예의 미술관 이야기다. "이딸리아에 도착하고 10일이 지났다. 피렌쩨는 따뜻했지만 밀라노에는 눈이 내렸다. 그저께에는, 여행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서둘러 미술관을 돌아보았다. 밀라노에는 이번이 세번째지만, 근대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마리노 마리니의 컬렉션이 충실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예상 밖의 수확이었다."(14쪽)

사실 서경식이란 이름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도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2002)였다. 그래서 내게도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이라기보다는 '미술 에세이스트'로서 먼저 각인되었다. 이게 보통의 미술평론들과는 좀 다른 종류의 에세이들이긴 하지만. 그런 사정과 무관하게 인용한 대목에 눈길이 간 것은 '마리노 마리니'라는 이탈리아 조각가의 이름 때문이다. 기마상 조각으로 유명한 조각가 말이다. 

현대조각에 조예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마리노 마리니'란 이름을 기억하는 건  바로 작년 이맘때 국내에서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비록 초대권까지 받아놓고 가보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서경식은 밀라노의 '브레라(Brera) 미술관'에도 찾아가 마리니의 작품들을 관람한다. 그곳에도 "머리와 네 다리를 쭉 편 말의 등에서 기수가 극한까지 뒤로 몸을 젖히고 있"는 마리니의 대작이 있다고 한다(마리니의 기마상은 말년으로 갈수록 기수가 말을 제어할 수 없어서 점점 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만큼 '고뇌'가 깊어간 것을 뜻한다고).

"하지만 그날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기마상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지나칠 뻔한 작은 남성 조각상이었다. 'Il miracolo'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기적이라는 의미일까. 삐에로인 듯하지만 가슴에 십자가를 건 것을 보면 성직자일지도 모른다. 작은 머리. 비스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 가냘프고 기다란 목선. 조금 익살맞은 그 모습은 애달프고 간절한 평화 그 자체였다. 나는 이제까지 여러 곳에서 마리니의 작품을 봤지만, 이 작품에 담긴 것과 같은 고요함과 깊은 정신성을 발견한 적은 없다."(14-15쪽)

호기심에 마리니의 작품을 찾아봤지만 'Il miracolo'란 제목이 붙은 그림만이 눈에 띈다. '애달프고 간절한 평화 그 자체'를 보기 위해선 밀라노에 가야 할 모양이다. 한편 저자가 그 밀라노에서 토리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은 건 순전히 "만난 적이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인물의 무덤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물론 독자가 곧 알게 되지만 그 무덤의 주인이 바로 프리모 레비이다(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서경식은 2002년 봄에도 토리노와 아유슈비츠를 재차 방문한다. '프리모 레비의 자살'을 다룬 일본 NHK의 특집 다큐멘터리가 그의 책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근거로 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간주곡으로 들어가 있는 이야기는 '무덤'과 관련한 저자의 기억들인데, "이 기억은 1992년 여름 중국 동북지방의 옌뻰(*연변) 조선족자치주를 여행하며 윤동주의 묘를 방문했던 때로도 이어진다."(17쪽) 이어지는 윤동주(1917-1945)의 삶과 죽음은 적어도 (일본 독자가 아닌) 한국 독자들에겐 익숙한 것이다. 1943년에 일경에 체포된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옥사했는데 알다시피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까지는 '상식'이지만 이어지는 사실은 내가 새롭게 안 것이다. 

 

 

 

 

예전에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세계사, 1998/ 푸른역사, 2004) 등을 들춰보긴 했지만 다루어지지 않았거나 내가 주의하지 않았던 듯한데, 그 새로운 사실이란 이런 것이다.

"후꾸오까 형무소로부터 '사체'를 가져가라'는 전보를 받은 윤동주의 늙은 아버지는 간도에서 한반도를 종단하고 현해탄을 건너가 유골을 가지고 돌아갔다. 유골을 묻을 때, 늙은 아버지는 생전 한 권의 시집도 간행할 수 없었던 아들을 위해 '시인 윤동주의 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묘비를 세워주었다."(20쪽)

<시대를 건너는 법>으로 묶인 '서경식의 심야통신'에서도 한번 다루어진 적이 있는데, 나는 윤동주의 유골을 간도의 '늙은 아버지'가 수습했는지도, 또 직접 묘비까지 세워주었는지도 몰랐다(묘비는 막연히 후대에 세워진 걸로 알았다). 그제서야 조금 떠오르는 사실은 이 묘비를 일본 학자가 발견했다는 점.

"사실 그의 묘를 ‘재발견’한 것은 와세다대학 오무라 마스오 교수다. 1980년대 연변대학에 체류했던 그는 윤동주의 묘를 찾아내 그곳을 일본의 독자에게 알리는 글을 썼다."(<시대를 건너는 법>, 319쪽)

이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책이 <윤동주와 한국문학>(소명출판, 2001)이다. 이왕이면 '조선 학자'들에게 발견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역사는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은 듯싶다(모처럼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이상섭 교수의 <윤동주 자세히 읽기>(한국문화사, 2007)가 작년에 나왔다. 언제 읽어봐야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시 '별헤는 밤'에서 시인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이런 시구절을 적어내려가던 시인의 손길을 떠올리면 애달프고 먹먹하다...

이제 프리모 레비(1919-1987)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자 문학자이며 화학자"('174517'은 아우슈비츠에서 왼팔에 새겨진 그의 수인번호다). "그는 1919년 또리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또리노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복이딸리아가 독일군에 점령되자 반파시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싸웠지만, 1943년 12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유대계였기 때문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송치되었다. 그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로 끌려가는 것은 모면했지만, 해방될 때까지 대략 1년의 세월을 노예보다 못한 생활을 하며 보내야 했다."(22쪽)

여기까지는 프리모 레비에 관한 '상식'이라 할 만하다. 한데 내가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아우슈비츠 체험 이후에 레비가 토리노의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이것이 인간인가>를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점. 26살에 생환한 그가 자신의 체험기를 처음 출간한 게 1947년, 그러니까 28살 때이다. 나는 막연히 중년에, 적어도 30대에 쓴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인간인가> 국역본에 자세하게 실린 연보를 참조하면, "프랑코 안토니첼리의 소개로 책은 데실바 출판사에서 2,500부만 출판된다. 훌륭한 평가를 받았지만 판매 면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레비는 작가-증언자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화학자로서의 일에 몰두한다."(314쪽) 그러나 초판 출판을 거절했던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1958년 재판을 간행하고 되고 이것이 초판때와는 달리 일약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고 "이 책은 <안네의 일기>, 빅토르 프랭클(Victor Frankle)의 <밤과 안개>, 엘리 비젤(Elle Wiesel)의 3부작 <밤> <새벽> <낮>과 함께 나찌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진상을 전하는 증언문학의 대표작으로서 지금도 널리 읽힌다. 일본에서는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 한 이딸리아인 생존자의 고찰'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에 번역/간행되었다."(22-23쪽) 물론 우리는 작년에야 이 책을 접하게 됐지만 일역판도 생각보다는 늦게 출간됐다.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가 <이것이 인간인가> 국역본보다 먼저 출간됐고 일역본을 참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은 그에 따라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로 표기되고 있다. 영어본의 제목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하지만 '생존자' 레비는 1987년에 자살했다.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은 그 이유를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것이 인간인가>에 붙인 서경식의 해설에 따르면, "프리모 레비는 생애 총 14권의 소설, 시집, 평론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서경식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책은 차례대로 다음의 다섯 권이다. <이것이 인간인가>(1947/1958), <휴전>(1963), <주기율표>(1975), <지금이 아니면 언제?>(1982),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1986). 아래는 그 영역본들의 표지인데, 나머지 세 권도 모두 국역되었으면 싶다.

영역본의 표지들을 보다 보니 프리모 레비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도 않는데, 지난 2004년 모스크바 체류시에 모스크바대학 본관건물 구내서점에서(서너 평 될까 말까한 공간이다) 나는 처음 '프리모 레비'란 이름과 접했다. 러시아어본이 아니라 영어 중고본들이 서가에 꽂혀 있었고(가장 확실히 기억나는 표지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이다), 나는 여러 차례 망설이다가 구입하진 않았다(언제 읽으랴 싶었던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저명한 '아우슈비츠 작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가 이탈리아인이란 것도 당시엔 알지 못했다(북부 이탈리아에서 아우슈비츠까지 잡혀왔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검색해보니 러시아도 사정은 우리와 비슷해서 <이것이 인간인가>가 2001년에, 그리고 <주기율표>가 바로 올해 신간으로 출간됐다. 

Примо Леви Периодическая система Il sistema periodico

프리모 레비와 함께 서경식이 아우슈비츠 증언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더 꼽고 있는 '빅토르 프랭클(Victor Frankle)'과 '엘리 비젤(Elle Wiesel)'은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저자들이다. 한데, '빅토르 프랭클'은 표기가 잘못됐다.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이 맞다(적어도 국내에서 그렇게 소개됐고, 영어 병기도 잘못됐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말이다(국내에는 여러 종의 번역본이 출간돼 있고 가장 많이 읽히는 건 청아출판사본이다).

 

 

 

 

내가 빅터 프랭클(1905-1997)이란 이름을 접한 건 책에서보다 신문의 칼럼들에서였다.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요법을 제창한 것으로도 유명한 프랭클 박사의 지론은 국역된 책들의 제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의미를 찾는 인간'(<죽음의 수용소에서> 영어본의 원제. 독어본 제목은 <밤과 안개>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등이 말해주듯이 그것은 '의미의 발견'으로 수렴된다. 최악의 생존조건 속에서도 삶의 의미라는 끈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우슈비츠 체험을 통해서 얻어낸 그의 통찰이다.

그런데, 그의 가장 유명한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서경식의 책에서는 <밤과 안개>라고 거명돼 있어서 잠시 알랭 레네의 원작이 혹 프랭클의 책인가 헷갈렸는데 찾아보니 그건 아니다. <밤과 안개>는 그냥 일역본의 제목인 모양이다. 그럼에도 물론 레네의 영화 <밤과 안개>(1955)와 무관하진 않겠다. 이 역시 아우슈비츠를 고통스럽게 증언하고 있는 영화이니까.   

사실 30분 정도 분량의 이 영화를 나는 아주 오래전 프랑스문화원에서 얼떨결에 봤다(내 기억에 남아있는 제목은 <밤 그리고 안개>이다. 국내에는 <밤안개>로 출시됐고, 보통은 <밤과 안개>로 표기되는 듯하다). 몇 번 드나든 문화원 프로그램에 '알랭 레네'라는 아는 이름이 눈에 띄었고 나는 제목에서 <히로시마 내 사랑> 같은 영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웬걸! 영화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나레이션과 다큐멘터리 형식을 통해서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끔찍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참상 속에서 살아 남은 또 다른 증언자, '엘리 비젤'은 국내에 '엘리 위젤'(1928- )로 소개돼 있다. 루마니아 태생의 위젤은 작가이지만 특이하게도 1986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맘때 그의 대표작들이 번역돼 나왔다(<엘리제르의 고백>이란 제목으로 3부작이 번역되었다).

 

 

 

 

물론 균형있는 독서를 위해서는 몇 권의 책을 이 모든 증언들과 같이 읽어두어야겠다. 유대인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다룬 빅토르 퀘페르맹크의 <유대인>(웅진지식하우스, 2008), 볼프강 벤츠의 <홀로코스트>(지식의풍경, 2002), 러버트 위스트리치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을유문화사, 2004), 그리고 노르만 핀겔슈타인의 <홀로코스트 산업>(한겨레출판, 2004) 등이 그 책들이다.

다시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의 첫장은 '여행'이다. 아우슈비츠로의 여행. 열두 량의 기차에 나눠타고 레비와 함께 수송된 유대인들은 650명(혹은 615명)인데 살아돌아온 사람은 그를 포함해 단 세 명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 살바기 에밀리아가 죽었다. 독일인들에게는 유대인 아이들을 죽이는 일의 역사적 필연성이 아주 자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밀라노 출신 엔지니어 알도 레비의 딸 에밀리아는 호기심이 많고 대담하며 활발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여행하는 동안 그 애의 엄마와 아빠는 사람이 꽉 찬 객차 안에서도 함석통에 담긴 미지근한 물로 그 애를 목욕시킬 수 있었다.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 그 기관차의 엔진에서 물을 받아쓰도록 어느 부패한 독일인 기관사가 허락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우리의 여인들, 부모들, 자식들이 사라져버렸다. 아무도 작별인사를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다른 쪽 플랫폼 끝에 있는 거무스름한 덩어리 같은 그들을 잠깐 보았다. 그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23-24쪽)

곧장 가스실과 소각장에서 '절멸'될 대다수의 다른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노인들과 달리 '튼튼한 남자들'로 분류된 레비는 다른 서른 명과 함께 트럭을 타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노동을 통한 절멸'이었다. 곧 지옥이었다("이 저주받을 망령들아, 비통할지어다!")...

08. 03. 02.

P.S. 새학기의 시작은 '바닥에서'부터이다('바닥에서'는 <이것이 인간인가>의 두번째 장제목이기도 하다). 다른 할일들을 잠시 제쳐놓고 따로 몇 자 적어놓은 것은 그래야만 먹먹한 마음의 숨통이 좀 트일 듯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읽다가 눈물이 돌았던 대목은 이런 것이다. 임시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 전날밤의 풍경.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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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3-03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페이퍼 보고, 오전 내내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읽었어요. 읽으며 레비의 다른 책들이 몹시 궁금해졌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같이 보고싶은 다른 책들이 많아졌어요! 읽는 속도는 따라주지 않는데 늘 이렇게 욕심만 앞서니 ^^

로쟈 2008-03-03 17:46   좋아요 0 | URL
다른 책들이라고 해야 현재로선 세 권이 전부인데요.^^;

소경 2008-03-04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수강한 과목의 계획표에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추천 되어 있어 읽어 볼 명분이 생겼네요. 물론 로쟈님의 페이퍼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가 주 동기지만. 새학기 긴 방학을 끝에 맞이한 붕뜬 개학의 기분을 내어버리기에 아쉽지만 페이퍼를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드는게 꼭 읽어 보아야 할 책 같네요. 서경식씨의 책과 함께.

로쟈 2008-03-05 22:25   좋아요 0 | URL
새학기라지만 저는 목소리도 가라앉았습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아직 20대였던 시절에 쓴 글을 옮겨놓는다. 대학원 강의의 기말 페이퍼로 쓴 것인데 무더운 장마철에 학교 연구소에서 1박 2일 동안 썼던 기억이 떠오른다(날밤을 샌 건 아니고 커다란 강의용 책상 위에 드러누워 눈은 붙였었다).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청하, 1988)이라고 국내에는 소개된 나보코프의 첫 영어소설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에 대한 '읽기'인데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내키는 대로 써나간 글이어서 자랑할 만한 구석은 별로 없지만 내겐 기억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글이고 나보코프에 관해 쓴 가장 긴 글이기도 하기에 보존해놓는다(각주는 본문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나보코프의 영어본 일부 표지들은 본문과 무관하게 집어넣었다).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약간의 흥미는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라면 굳이 애써서 읽어볼 필요는 없겠다. '망명작가' 나보코프에 관한 개인적인 흥미를 적어놓은 것이니까...

OPENING

0.1. “반어적인 과학ironic science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무언가 우리에게 할일을 줄 수는 있다. 영원히.” 존 호건, <과학의 종말>(까치, 1997), 222쪽.

아침에 이런 걸 읽다가, 나는 반어적 과학으로서의 문학비평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거꾸로 말이다. 즉 문학비평은 최소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무언가 우리에게 할일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주지 않는다. 정말 그런 듯싶으니 이를 어찌할까. 할일은 주어지지만, 정작 거기에 상스sens, 즉 의미와 방향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것이 일종의 일시적인 무기력증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우리가 처한 사태의 본질이라면 정말 어찌할까. 나는 또다시 아주 친숙한 근심에 발목이 잡힌다. 장마철이어서일까?

0.2. 나보코프에 대한 기억이 이젠 희미해지질 즈음에, 이런 자리에 불려나와서 몇 마디 해야 하는 것은 일종의 고역이다. 네댓장쯤 쓰다가 다시 고치고 지우고 짜깁기하면서 나는 벌써 진을 다 빼버렸다. 사실 그럴 만한 여유도 재간도 없는 처지에, 남들이 뜯어먹지 않는 부분을 골라서 뜯어먹으려니 이 고생이지 싶다. 하지만 뒤져보면, 이미 먹을 만한 부분은 다 거덜나 있다.(이 글에서 몇 마디 주석을 달려고 하는 The Real Life Sebastian Knight이 대충 어떻게 뜯어먹혔는가에 대해서는 Vladimir Navokov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5), p. 634 참조.) 그러니 정성이 갸륵하지 않고서야 새로운 것이 얻어질 리 만무하다. 대략 입막음의 글이라도 작성하고자 일을 벌이긴 했지만, 이미 예전의 정(신)력은 아닌 모양이어서, 나는 지레 지치고 지레 나앉는다. 이래서야 어디 밥은커녕 죽 구경이라도 하겠는가? 참으로 걱정은 걱정이다.

0.3. 어제 나는 무얼 했던가? 아니 지난주에 난 무얼 했던가? 막바지까지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이하 <참인생>, 텍스트로 사용한 것은 V. Nabokov,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 (Penguin Books, 1995);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 권택영 옮김(청하, 1988)이다. 본문에서는 국역/영어의 쪽수만 표기하며, 국역의 경우 일부 수정해서 인용한다.)을 읽었다. 그리고 이제와서, 또다시 마감에 닥쳐 이렇게 몇 자 적어내려 가고 있는 것이다. 계획은 이랬다. 나보코프의 초기 러시아 소설과의 연관성 속에서 <참인생>을 읽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제서야 나는 이 작품을 손에 들었고, 불과 몇 분 전에야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그새 다시 손에 들지 않았다. 한번 읽은 것이다. 소설에 관한 나보코프의 지론은 읽고 또 읽으라는 것이다. 한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은 읽고 또 읽는 거지요. 아니면 읽고 읽고 또 읽든가요. You can only re-read a novel. Or re-re-read a novel.”(Charles Nicol, "The Mirrors of Sebastian Knight," L. S. Dembo (Ed.), Nabokov: The man and his work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7), p. 85에서 재인용.)

뭔가 적어가며 읽긴 했지만, 한번 읽고 모든 걸 손아귀에 다 틀어쥘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무슨 연관성이랴? 해서 계획은 남아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참인생>을 비교적 자세히 읽음으로써 나보코프의 입이나 일단 틀어막아보기로 했다(그리고 비로소 읽기 시작해야지!). 바로 옆에선 푸줏간 주인 같은 나보코프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나의 이런 꼴을 쳐다보고 있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는 것이지. 자신의 체험에 충실할 밖에. 이런, 벌써 몇 시간이 지나갔다. 또 어느새 자정을 넘긴 것이고. 하여간에 나는 나보코프에 대해 쓴다. 쓰기 시작한다. 일단은 이 “무의미의 부메랑boomerangs of nonsense”(218/149)을 던져보는 것이다... Hello, Mr. Nabokov!.. 어쿠!



SCENE 1

1.1 <참인생>(1938)은 마지막 러시아어 장편인 <재능Gift>(1936)에 바로 이어진 소설로서 일단 나보코프의 작가적 경력에서 경계에 자리한다. 이 경계를 지나면서 그는 러시아어 작가에서 영어 작가로 변신한다. 나보코프에 관한 가장 방대한 두 권짜리 전기는 각각 ‘러시아인 시절’과 ‘미국인 시절’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Brian Boyd, Vladimir Nabokov: The Russian Years (London, Chatto & Windus, 1990), Vladimir Nabokov: The American Years (London, Chatto & Windus, 1992).)



아무리 재능있는 작가라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작가적 장래에 대해 염려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참인생>은 나보코프의 약한 고리이다.(Field 같은 이는 <참인생>을 가장 허술한weakest 작품으로 평하기도 한다. Vladimir Navokov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5), p. 634.)

이 시기에 나보코프는 점차 암울해지던 유럽을 떠나 영국이나 미국으로의 이주를 계획한다. 즉 영어-사용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John Lanchester, "Afterword,"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 p. 178.) 이러한 정황에서 볼 때, 이 제2의 데뷔작은 자못 비장한 의의를 가진다. 한 직업작가의 밥숟가락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염려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지.

1.2. 모두 2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참인생>의 1장에서 화자인 ‘나’(브이V)가 존경해 마지 않는 노장 비평가 사우스 케징턴South Kesington이 세바스챤 나잇Sebastian Knight의 때이른 죽음을 접하면서, “가엾은 나잇! 그는 두 시대를 살았지, 먼저는 엉터리 영어로 글을 쓰는 멍청한 작가로, 나중엔 멍청한 영어로 글을 쓰는 엉터리 작가로 말이야. Poor Knight! he really had two periods, the first - a dull man writing broken English, the second - a broken man writing dull English.”(12/6)라고 말하는 부분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 ‘고약한 농담nasty dig’의 대상에 나보코프라고 걸려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더구나 자신이 놀던 물이 아닌 데야!) 이것이 그 염려의 내용이 될 수는 없을까. 과거에 그는 똑똑한 러시아어 작가였지만, 이제는 한낱 엉터리, 멍청이 ‘영어’ 작가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 그럼 어떡해야 하나? 가장 자신 있는 걸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걸로 밀고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건 우리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인 바, 나보코프의 지능이 우리보다 못할 리가 없다. 때문에 그가 이전에 쓴 러시아어 소설들에서 주제와 구성뿐만 아니라 많은 모티브를 <참인생>에 빌려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참고로, J. W. Connolly는 Nabokov's Early Fi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pp. 220-222에서 <참인생>에 나타난 <재능>의 그림자를 몇 가지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나’와 ‘세바스찬’의 관계(<참인생>)가 ‘나’와 ‘표도르’의 관계(<재능>)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 이것을 그는 에셔M. C. Escher의 그림 <드로잉 핸즈Drawing Hands>(서로가 서로를 그리고 있는 두 손)의 이미지로 이해한다. 이때 작가 나보코프는 이 두 손을 그리고 있는 제 3의 손이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것은 작가-화자(‘나’)와 인물-작가(세바스챤)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사실 <참인생>은 바로 이 ‘나’(브이)와 세바스챤의 정체성, 그들의 관계에 대한 수수께끼/퍼즐 풀기에 다름아니다.

1.3. 허구적 인물과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러시아어 소설에서 나보코프의 작가-예술가로서의 자기탐구와 자기확인에의 요구가 빚어낸 것이다. <재능>은 이러한 탐구의 정점으로서, 이 작품은 주인공 표도르가 결국 나보코프와 같은 작가적 반열에 이르게 되는 여정을 형상화함으로써 그것을 일단락짓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전기적 이력을 놓고볼 때, 우리는 이 <참인생>에서 나보코프가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할지에 대해 미리 짐작할 수 있는 바, 그것은 영어 작가로서 러시아어 작가 못지 않은 장래성(재능)의 확인/확보 문제이다(따라서 이것은 <재능>의 반복이자 번안이다). <참인생>의 ‘진짜’ 주인공은 포르 레크노이로 분한 나보코프란 주장도 있다.(“Nabokov's novel has one "real" character, Nabokov himself, who poses as Paul Rechnoy.", Charles Nicol, op. cit., p. 91.)

이 작품에서의 화자-작가인 ‘나’는 나보코프의 그러한 기대의 대리인이다. 이 작품이 ‘나’가 이복형인 세바스챤의 전기를 완성하는 여정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세반스챤을 닮아가는, 세바스챤이 되어가는 여정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나보코프답지 않은 염려와 나보코프다운 기대 속에 <참인생>은 놓여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나보코프의 생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이다.



SCENE 2

2.1. “1938년 프랑스 파리의 어느 단칸방 아파트. 당시 가난한 러시아의 망명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문제의 소설 한편을 탈고한다. 1940년 미국 이주 후 영어로 출간되어 “찬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호평과 함께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책이 아니냐”는 혹평을 받은 이 소설은, 우리들의 책읽기 방식에 중대한 도전을 던진다.” 여기까지는 국역본의 광고인데, 문제는 우리들의 책읽기 방식이 아니라 바로 나보코프 자신일 테다(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울” 수 있겠지).

2.2. 세바스챤 나잇(1899-1936)이라는 러시아 태생 영국작가가 5권의 소설을 남기고 36세의 나이로 죽는다(한편으론 이 6이란 숫자는 브이를 상징하는, 대변하는 숫자인데, 이것은 뒤에서 자세하게 밝혀질 것이다). 아래 이복동생인 나, 브이는 이복형의 출판매니저였던 굿맨Goodman의 전기 <세바스챤 나잇의 비극 The Tragedy of Sebastian Knight>이 결함 투성이임을 발견하고 세바스챤의 새로운 전기를 쓰고자 유품들을 뒤적거리고 생전에 세바스챤과 가까웠던 인물들을 찾아가 얘기를 들으며 자료수집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렇지만 결국 대단한 무얼 얻지는 못하고 그런 과정을 그럭저럭 기술하여 우리 앞에 내놓은 것이 <참인생>이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세바스챤 나잇과 작가 나보코프 사이의 많은 유사점이다.(John Lanchester, op. cit., p. 177-8.)

1899년은 나보코프가 태어난 해이고 1936년은 <재능>을 쓰고 러시아어로는 절필한 해이다. 그러니까 러시아어 작가로서는 생명이 끊어진 해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본다면, 세바스챤 나잇을 나보코프의 러시아어-작가적 분신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세바스챤은 영어로 창작을 했으니까 정작 나보코프와는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차이는 그저 일종의 은폐전략에 불과할 테다. 그것도 보일 거 다 보이는 은폐전략 말이다.

2.3.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 독자는 저자와의 게임에서 승부를 기대할 수 없다"(권택영, "쓰면서 지워가는 소설",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 역자 해설, 255쪽.)는 이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의 내용은 우리의 기대를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세바스챤이다, 아니 세바스챤이 나다, 아니 아마도 우리 둘 다 우리 둘이 다 모르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I am Sebastianm or Sebastian is I, or perhaps we both are someone whom neither of us knows.”(251/173)

이 문장에서 ‘나’(브이)는 나보코프의 영어-작가적 분신이다. ‘나’ 브이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지만, 이때의 V는 Vladimir Nabokov가 아닐까. 그는 나보코프의 일부이기 때문에 풀네임은 갖지 않는다. 한편, 세바스챤이 브이에게 보낸 편지에 Sevastian이라고 서명돼 있는 것은 이 둘의 분신성을 보강해준다. 러시아어 철자 ‘B’가 지닌 이중성(‘B’이면서 ‘V’)이라는 글자퍼즐을 나보코프는 인물퍼즐과 겹치게 만들고 있는 것.

그리고 이들이 둘 다 모르는 어떤 사람은 바로 나보코프인 것이지. 이 두 분신은 모두 전체-나보코프Total-Nabokov의 일부이며 장기말/기사knight이다. 이 점에서 굿맨이 세바스챤을 “그는 완벽한 포우저였다. [H]e was the perfect ‘poser’.”(141/97)고 본 것은 조금 다른 문맥에서이긴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브이와 세바스챤, 두 인물-작가는 모두 나보코프 자신이자 그의 가면이며 포우저이다. 그리고 사실 이 정도만이 내가 나름대로 읽은 <참인생>의 내용이다. 즉 나보코프의 작가적 경력 속에서 <참인생>이 차지하는 의의와 성격을 브이와 세바스챤의 관계가 그대로 반영하고, 반복하고 있다는 것.



2.4. 이런 맥락에서 브이가 성 다미에르St Damier 병원에서 얻은 깨달음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옮겨본다. 그것은 이렇다. 나보코프 자신은 <참인생>을 탐탁찮게 생각한 모양이지만, 이런 대목 같은 부분은 단순한 재능 이상의 통찰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종의 영혼의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라고나 할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향수>에서 도미니크가 어린 아들의 뒤를 좇으며 걸음을 맞추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얼 더 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영혼이란 오직 존재의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만일 당신이 영혼의 맥박을 발견하여 따라간다면 어떤 영혼도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어떤 선택된 영혼, 어떤 수의 영혼들 속에서 그들 모두가 서로 바뀔 수 있다는 부담을 의식하지 않은 채,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충만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바스챤 나잇이다.

[T]hat the soul is but a manner of being - not a constant state - that any soul may be yours, if you find and follow its undulation. The hereafter may be the full ability of consciously living in any chosen soul, in any number of souls, all of them unconscious of their interchangeable burden. Thus - I am Sebastian Knight. (250/172)

브이와 세바스챤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여기서의 ‘영혼’은 ‘언어’란 뜻으로 번역해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영혼)이란 바로 언어가 아니겠는가. 그럴 경우, 브이의 깨달음은 언어(영혼)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즉 그것이 교체가능interchangeable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언어(영혼)의 맥박과 리듬을 잘 찾아내고 따라가는 것이다. 이 소설은 견습작가인 브이가 세바스챤의 행적과 작품세계를 더듬어가면서 이 이복형의 맥박(리듬)을 배워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 소설의 끄트머리에 와서 브이(=영어 작가로서의 나보코프)가 마침내 자신의 반쪽half-brother인 세바스챤(=러시아어 작가로서의 나보코프)을 따라잡은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 대신하게 된 것이다.(그의 브이는 승리의 브이이다).

2.5. 이러한 결말의 의미는 작품의 초반부(4장)에서 브이가 세바스챤에 대해서 갖고 있는 정서적 동질감과 이질감을 대비시켜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언젠가 나는 두 형제가 테니스 챔피언으로서 경기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치는 힘은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경기장을 휩쓰는 행동의 리듬은 정확히 같았다. 만일 그 두 개의 리듬을 그릴 수만 있다면 똑같은 그림이 나타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바스챤과 나도 역시 공통된 리듬을 가졌으리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나와 세바스챤이 마음의 풍요와 재능의 일면이라도 공유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글쓰는 방식을 나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 재능의 높이에 다다를 수는 없지만 나를 도와줄 어떤 심리적 유사점들을 나도 갖고 있다는 것에 자신을 얻은 것이다.

Once I happened to see two brothers, tennis champions, matched against one another; their strokes were totally different, and one of the two was far, far better than the other; but the general rhythm of their motions as they swept all over the court was exactly the same, so that had it been possible to draft systems two identical designs would have appeared. I daresay Sebastian and I also had some kind of common rhythm. (...) This is not meant to imply that I shared with him any riches of the mind, any facets of talent.(...) I cannot even copy his manner{...] I feel that inspite of the toe of his talent being beyond my reach certain psychological affinities which will help me out. (43-45/28-30)

브이와 세바스챤의 관계는 이 인용에서 테니스를 치는 형제의 관계를 닮았다. 즉 두 작가는 힘과 기량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동작의 리듬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에 세바스챤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브이에겐 세바스챤을 따라갈 만한 바탕(=심리적 유사성)은 마련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 바탕이 결국에 가서는 “나(브이)=세바스챤”이라는 당당한 고백을 가능하게 한다.

전기를 쓰기 위해 세바스챤의 아파트에서 유품을 뒤적이다가 브이가 발견한 러시아어 문구 “언제나 찾아야 할 당신의 방식 [T]hy manner always to find...”(48/32)을 마침내 그는 찾아낸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세바스챤의 맥박이고 리듬이며 “특이한 글쓰기 방식queer way”(50/33)이다. 브이는 작가로서 세바스챤의 뒤를 이을 준비가 다 된 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결말이 뜻하는 바이다.

SCENE 3

3.1. 다시 인용하겠다. 나름대로 좋아하는 대목이어서 조금 더 거창한 해석을 덧붙여보기 위해서이다.

영혼이란 오직 존재의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만일 당신이 영혼의 맥박을 발견하여 따라간다면 어떤 영혼도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어떤 선택된 영혼, 어떤 수의 영혼들 속에서 그들 모두가 서로 바뀔 수 있다는 부담을 의식하지 않은 채,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충만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바스챤 나잇이다.

여기서 ‘맥박’은 한 영혼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생의 리듬이다. 이 리듬의 공유를 통해서 영혼은 서로 교환(교체)되고 합일된다. 이것을 통해 브이(그리고 나보코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동시화cosmic synchronization라는 형이상학이다. 이때의 동시화는 곧 시간적인 동시성의 구현인데, 이에 의해서 개체적, 개별적 존재가 지닌 시간의 단속성(=불연속성)과 유한성은 극복될 수 있다. 즉 우리의 영혼은 불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나보코프가 시간을 믿지 않는다고 한 것 은 이런 맥락에서 음미해볼 수 있다.( V. Nabokov, Speak, Memory (London, Weidenfeld & Nicolson, 1967), p. 139.)



3.2. 20세기 전반기 서구 형이상학의 주조음은 시간에 대한 것이다(대표적인 철학자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들 수 있다). 즉 시간은 이 시기의 주된 관심거리이면서 이런저런 입장들을 찍어내는 거푸집이다. 이 시기에 시간이 문제된 것은, 비로소 그것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직선적인 공간화로부터 이탈하여 제값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보이지 않는 시간, 순수한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이때부터 서구 형이상학이란 유구한 깡통에 흠집을 내고 그것을 찌그러뜨리기 시작한다. 이때의 형이상학이란 바로 기하학적 사유(=공간에 대한 사유)로 특징지어지는 것인바, 개념화되지 않는 어떤 것, 그러니까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으로서의 시간 앞에서 제대로 기운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형이상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시간이 낳는 불안은 실존적인 차원의 것이면서 동시에 인식론적인 것이다. 이러한 도전과 불안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

3.3. 저마다의 생애가 시간-내-세계에서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필사적인(더러는 게으른) 도주라고 한다면, 전기bio-graphy는 바로 그 도주의 궤적이다. 전기는 한 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는 생애를 이야기(=형태)의 장속으로 끌여들여 가시화함으로써 시간에 저항한다. 이것이 한가지 대처방법이다. 그리고 신화가 있다. 이때의 신화는 저마다의 생애를 ‘동일한 것의 영원한 되돌아옴’의 자리에 갖다 놓음으로써 그것의 고유성과 유한성을 희석시킨다. 신화는 비유컨대, 모든 이의 생애를 닳고 닳은 동전의 그것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이것이 또다른 대처방법이다. 그리고 나보코프가 제안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시간(=리듬)을 동일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인이 만인의 영혼이 되고, 마스크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나보코프가 말하는 동시화synchronization의 세계이다.

이 동시성의 세계에서 “오직 단 하나의 참 숫자는 하나이고 나머지는 그저 반복일 뿐이다. The only real number is one, the rest are mere repetition.”(<잃어버린 재산Lost Property>)(127/89) 즉, 저마다의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죽음이 있는 것이며, 이 전체로서의 하나는 시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기에 결코 시간-내-존재로서의 유한성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보코프의 게임으로서의 소설은 형이상학으로 승격된다.



3.4. 세바스챤의 네번째 소설 제목인 ‘잃어버린 재산’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패러디한 것인바, 여기서 ‘재산property(=고유성)’이란 말과 ‘시간’의 대응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비록 명시적인 형태로는 아닐지라도, 이미 나보코프는 하이데거-데리다가 지적하게 될 인간의 종언, 인간의 고유성의 종언을 미리 앞당겨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로 데리다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부분을 말이다.

인간의 종언은[시작과 끝]은 존재의 사유와 그 언어 안에 처음부터 언제나 지시되고 등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시는 텔로스와 죽음과 유희 안에서 ‘끝’의 이중적 의미를 변주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유희를 읽어갈 때, 다음과 같은 연관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의 끝[완성]은 존재의 사유이며, 인간은 존재 사유의 끝[목적]이며, 인간의 끝[정점]은 존재 사유의 끝[정점]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언제나 그 자신의 고유한 끝[목적]이며,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고유성의 끝[목적]이다. 존재는 처음부터 언제나 그 자신의 고유한 끝[목적]이며,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고유성의 끝[목적]이다. (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1996), 340쪽.)



"In the thinking and the language of Being, the end of man has been prescribed since always, and this prescription has never done anything but modulate the equivocality of the end, in the play of telos and death. In the reading of this play, one may take the following sequence in all its senses: the end of man is the thinking of Being, man is the end of the thinking of Being, the end of man is the end of thinking of Being. Man, since always is his proper end, that is, the end of his proper. Being , since always, is its proper end, that is, the end of its proper." (J. Derrida, "The Ends of Man," Margins of philosophy, Trans. by Alan Bass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 134.)

인간의 고유성에 대해서 사유한다는 것은 곧 그 고유성의 끝(한계와 목적)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이다. 나보코프의 메타모포시스적인 세계는 바로 그러한 사유의 한 끝을 보여준다. 타인의 영혼과 같은 리듬 속에 공속됨으로써 “나는 세바스챤이다, 아니 세바스챤이 나다.”라는 비분리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한 개인이 지닌 고유성의 종언이면서, 정점이며 또한 완성이 아닐까. <참인생>은 이러한 물음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이며, 그러한 형이상학적 물음이 다차원적인 게임의 형태로 발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유희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보코프의 고유성이며, 그 고유성의 끝이다.



3.5. 인간의 종언을 말하면서 세바스챤의 죽음을 빼놓을 수는 없다. 세바스챤의 일생에서 마지막해인 1936년으로 접어들면서 브이는 이 죽음의 연도와 사람 사이의 “신비한 유사점occult resemblance”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 유사점에 의해 암시되는 것은 그 죽음의 필연성이고, 비고유성이다. 이 부분이다.

세바스챤 나잇 d. 1936... 이 연도는 나에게 잔물결이 이는 연못 속에 그 이름을 비추어 본 것같이 보인다. 마지막 세 숫자의 곡선은 물결 모양 같은 윤곽이 웬일인지 세바스챤의 개성을 상기시켜준다.(...) 만일 내가 여기저기에서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것의 그림자조차 파악하지 못했거나, 이따금씩 무의식적인 뇌의 작용이 은밀한 미로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도록 나를 이끌지 않았다면, 내 책은 서툰 실패작에 불과하다.

Sebastian Knight d. 1936... This date to me seems the reflection of that name in a pool of rippling water. There is something about the curves of the last three numerals that recalls the sinuous outlines of Sebastian personality.(...) If here and there I have not captured at least the shadow of his thought, or if now and then unconscious cerebration has led me to take the right turn in his private labyrinth, then my book is a clumsy failure. (224-5/154)

여기서 브이는 자신과 세바스챤의 관계가 운명적인 분신double이면서 동형isotopie이며 거울 관계에 놓여 있다는 걸 무의식적이지만 알게 된다. 1936년에서 936은 잔물결(3)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본 형상이다(9↔6). 여기서 9가 세바스챤이라면 6은 브이이다. 머릿 숫자 1은 이들이 한몸임을 말해준다. 세바스챤은 자신의 운명의 소용돌이를 안고 이제 서서히 종국을 향하고 있고, 브이는 바야흐로 작가로서 입문하고 있다. 이렇듯 서로 하강하고 상승하는 운명을 9와 6은 도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인생>의 시작인 1장에서 언급되는 한 러시아 여인은 “올가 올레고브나 오를로바Olga Olegovna Orlova라는 달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여인의 일기에서 브이는 세바스챤이 태어난 1899년 12월 31일의 날씨 기록을 본다. 여기서 이 “달갈 같은 이름”은 세바스챤의 태생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는 O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6년 후에 브이 또한 같은 집에서 태어난다. 여기서 세바스챤과 브이를 나타내는 숫자인 9과 6은 O에 운동성(꼬리)이 부여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숫자 상징은 20장에서 세바스챤이(나중에 Kegan이란 다른 환자임이 밝혀지지만)이 입원해 있는 병실은 36호라는 데에도 이어진다. 936에서 9(=세바스챤)가 떨어져나간 것이니 세바스챤이 이 병실에 입원해 있을 리 없다. 그는 이미 죽은 것이다. 세바스챤 나잇Knight은 나잇night(=어둠) 속으로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다. 브이는 성 다미에를 병원을 찾아가 세바스챤을 찾으며 이렇게 말한다. 'I have come,' I said, 'to see Monsieur Sebastian Knight, K, n, i, g, h, t. Knight. Night.'(168) 이렇듯 나잇의 이름은 몇 차례에 걸쳐 낱낱으로 분해되고 결국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12장에서 로이 카스웰Roy Carswell(이것 또한 루이스 캐롤의 아나그램이다) 속의 초상화가 보여주는 세바스챤, 즉 연못 속의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는 모습(144/99)을 이제 브이 또한 반복하고 있는 것인데, 사실 <참인생>의 이야기 전체가 바로 이 연못 속의 자신 들여다보기인 것이다. 브이는 세바스챤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욕실로 가서 거울looking- glass 앞에 몇 분 동안 서 있는다.”(234/160)

3.6. 브이가 세바스챤의 아파트를 찾아갈 갔을 때 발견한 이상한 문구 또한 이러한 거울보기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시간의 동시화synchronization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깊게깊게 잠드는 자였기에 로저 로저슨, 늙은 로저슨은 늙은 로저스가 산 것을 샀다. 깊게 잠드는 자가 되는 게 그토록 두려운 늙은 로저스는 내일을 놓치는 게 그토록 두려웠다. 그는 깊이 잠드는 자였다... 그는 숙명적으로 내일의 사건의 영광, 이미 훈련의 영광을 놓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에 그가 하는 것은 사고 그날 저녁을 사기 위하여 집으로 옮겨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가 아니고 여덟 개의 각기 다른 크기와 강도로 똑딱거리며 9, 8, 11시를 지나치는 자명종 시계는 그는 시계를 침실에 놓았고 그 모습은 마치 9개의 알람시계가 9마리의 고양이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As he a heavy A Heavy sleeper, Roger Rogerson, old Rogerson bought old Rogers bought, so afraid Being a heavy sleeper, old Rogers so afraid of missing tomorrows. He was a heavy sleeper. He was mortally afraid of missing tomorrow's event glory early train glory so what he did was to buy and bring home in a to buy that evening and bring home not one but eight alarm clocks of different sizes and vigour of ticking nine eight eleven alarm clocks of different sizes ticking which alarm clocks nine alarm clocks as a cat has nine which he placed which made his bedroom look rather like a (50/33)

무슨 말인지 잘 알아먹기 힘들지만(번역도 부분적으로 맞는 것 같지 않다), 여기서도 로저스Rogers와 로저슨Rogerson은 트윈twin이며 분신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내일의 어떤 사건(영광)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로 크기도 다르고 똑딱소리도 다른 8개의 알람시계를 사서 9시, 8시, 11시 등에 맞춰놓는다. “깊은 잠”이란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면, 이 말장난word-play이 배면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죽음 극복에의 욕망이다. 이 욕망이 세바스챤에게서 자신의 창작으로 나타났다면, 동생 브이에게는 형의 삶을 전기의 형식으로 다시 복원하려는 의지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들은 로저스Rogers와 그를 따르는 로저슨Rogerson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8개(9개?)의 알람시계를 동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이미 앞에서 얘기한 동시화의 세계가 아닐까.

SCENE 4

4.1. 나보코프의 이전의 러시아어 작품들이 그렇듯이 <참인생> 또한 게임적인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이미 세바스챤 나잇Sebastian Knight의 기사Knight와 그의 애인인 클레어 비숍Clare Bishop의 주교Bishop가 이미 장기의 말이름이다. 그리고 세바스챤이 죽은 장소인 성 다미에르St Damier에서 다미에르Damier는 불어로 장기판을 뜻한다. 이렇듯 게임소설novel as a game적인 성격과 자기 정체성의 탐구novel as a quest for identity의 병치라는 나보코프 특유의 전략은 어떤 효과를 유발하는가? 이 문제를 세바스챤이 쓴 소설들과 그에 대한 브이의 읽기를 따라가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4.2. 세바스챤이 제일 처음 쓴 소설은 <무지개빛 단면The Prismatic Bezel>(1924)이다. 여기서 ‘무지개빛’이라는 건 프리즘을 통해서 투과된 빛의 분광을 뜻한다. 우리 눈에 그저 단순하게 한 가지로 보이는 빛이 실제로는 여러 가지 빛의 종합이라는 걸 프리즘은 보여주는 것인데, 이 프리즘이 바로 세바스챤에게서(그리고 나보코프에게서) 바로 소설이란 허구적 세계가 아닐까. 이 <무지개빛 단면>은 일종의 탐정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10장). 열두명의 사람들이 한 하숙집에 묵고 있는데, 아베슨G. Abeson이란 미술판매상이 자신의 방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된고, 런던에서 탐정이 어렵사리 도착해 수사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투숙객들이 다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이때 시체가 사라져버린다. 그러면서 이곳을 어슬렁거리던 행인인 늙은 노즈박Nosebag이 자신의 가발과 거은 안경을 벗어던지면서 자신이 아베슨임을 드러낸다. 여기서 노즈박Nosebag은 아베슨G. Abeson의 아나그램이다.

이렇듯 철자변환의 게임을 존재의 동일성 문제,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짓는 세바스챤의 방식은 바로 나보코프의 그것이면서 이 <참인생>의 그것이기도 하다. 브이와 세바스챤 또한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아나그램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세바스챤의 이러한 방식을 브이는 ‘문학적 구성의 방법methods of literary composition’(114/79)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허구적 작품이 구성되는 원리인바, 그것을 브이(그리고 세바스챤)는 아나그램(=구성․편집의 문제)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세바스챤의 이러한 인식과 방법은 그의 마지막 소설인 <의심스러운 아스포델The Doubtful Asphodel>에도 이어지는 바, 거기서 그는 기법의 완벽함을 과시한다. 브이의 주석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부분들이 아니고, 그것들의 조합이다. It is not the parts that matter, it is their combination.”(216/148)

4.3. 두번째 소설인 <성공Success>에서 다루어지는 ‘인간 운명의 방법methods of human fate'은 이와 관련하여 작가의 문제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소설 속에 나오는 윌리엄과 마술사의 대화를 보라.

“제가 토기 한 마리 사 드릴까요?” 윌리엄이 말한다. “필요하면 내가 하나를 만들지.” 마술사는 ‘필요한’이란 말이 무슨 끝없이 긴 리본이라도 되듯이 길게 빼면 대답한다. “괴상한 직업이예요, 소매치기가 미치죠, 주문만 외면 되니가요. 거지의 모자 속에 든 동전과 당신의 마술모자에 든 오믈렛, 말도 안되지만 같거든요.” 윌리엄이 말한다.

"May I buy you a rabbit?" asked William. "I'll hire one when necessary," the conjuror replied drawing out the "necessary" as if it were an endless ribbon. "A ridiculous profession," said William, "a pickpokek gone mad, a matter of patter. The pennies in a beggar's cap and the omelette in your top hat. Absurdly the same." (120/83)

마술모자 속의 오믈렛과 거지의 모자 속에 든 동전을 “말도 안되지만” 같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작가-마술사의 허구적 세계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방법이다. “필요하다면” 한 인간의 운명을 만들어낼 수 있고, 또 조종할 수 있는 세계, 허구적 세계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무지개빛 단면>에서 피력된 구성방법과 더불어 <참인생>이 어떻게 읽혀야 하는가에 대한 안내 지침의 역할을 한다.



4.4. 세번째 소설인 <우스운 산The Funny Mountain>(1932)은 세 개의 단편 모음집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세 명의 불쌍한 여행자를 도와주는 실러Mr Siller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실러가 문제되는 것은 세바스챤의 마지막 여인을 찾아가는 브이의 여정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인물인 실버만Silverman이 이 실러를 빼닮았다는 데 있다. 즉 실버만은 허구적 인물인 실버의 현실적 구현체이다. 거꾸로 말하면, 실버만은 브이의 허구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인물이다.(최유미,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 연구>(서울대 석사논문, 1992), 36-38쪽.)

“가장 정직한 중개인을 조심하라. 당신이 들은 것은 정말이지 세번 굴절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Beware of the most honest broker. Remember that what you are told is threefold.”(66/44)는 브이의 내면의 메아리는 이제 그 자신의 실재성에 대한 의혹으로까지 확산된다(사실 <참인생>의 가장 믿음직한 브로커 행세를 하는 인물이 바로 화자-작가인 브이가 아닌가). 그러한 의혹은 사실 브이 자신에게서 먼저 터져나오고 있기도 하다.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가 세바스챤 나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내 양심 속에서 같은 음성이 반복된다. 정말이지 누구인가? Who is speaking of Sebastian Knight? repeats that voice in my conscience. Who indeed?” 만약에 <참인생>이 세바스챤의 여섯번째 소설이라면, 6이란 숫자와 브이와의 연관성은 앞에서 여러 번 지적한 바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론 결국 허구적 주인공인 브이가 작가 세바스챤의 삶에 대해 궁리하고 탐색하고 있는 형국이 된다. 이런 식의 읽기 또한 ‘가능한’ 읽기이다.



4.5. 사실 다른 나보코프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참인생>에서도 어떤 고유한 유일한 읽기란 가능하지 않다. 그런 읽기를 통해 굿맨이 세바스찬 나잇의 문학세계를 규정지으면서, ‘불쌍한 나잇poor Knight’이 “소위 우리시대의 산물이며 희생자product and victim of what he calls ‘our time’”(77/52)라는 걸 보여주려한 것이 한낱, 브이에 의하면, “굿맨의 소극The Farce of Mr Goodman”이 되고 마는 것은 그런 유일한 읽기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심한 손가락innocent blind fingers”(98/67)으로 작품(열쇠)를 만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국 브이가 실재적인 인물이든, 허구적인 인물이든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다만 그의 존재가 그렇듯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것만을 유의하면 되겠다.

여기서 제3의 중재적인 해석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것은 나보코프가 두 세계, 혹은 더 나아가 다(多)세계 모델을 세계관으로 견지하고 있었다는 관점이다. 그 관점에 의하면, 거울 안의 세계와 거울 바깥의 세계는 동일한 지위의 현실성을 갖는다. 이미 앞에서 6과 9의 숫자를 통해 브이와 세바스챤이 거울상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걸 지적한 바 있는데, 세바스챤의 시점에서 볼 때, 브이는 자신의 허구적인 거울상에 불과하고, 또 브이의 시점에서 볼 때, 세바스챤은 이미 죽은 인물로서 자신의 전기를 통해 재생되어야 하는 인물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시점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우월한 현실성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두 세계 모델은 시간의 힘을 상대화시킨다는 강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세바스챤의 마지막 소설인 <의심스러운 에스포텔>에서 다루어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4.6. 세바스챤의 네번째 소설 <잃어버린 재산>은 브이에 의하면, 문학적인 발견의 여정에 있어서 일종의 정지halt이며 요약summing up이다. 이 소설의 한 장은 비행기 추락사고를 다루고 있는데, 떨어진 항공우편물 가방에 남아있는 편지들을 브이는 다시 소개하고 있다. 이들 중 연애편지는 당시 클레어 비숍과의 멀어져가는 관계에 대한 세바스챤의 안타까움이 직접 토로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히는데, 사랑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 부분은 재미있으면서도 우리가 앞에서 지적했던 동시화의 문제와 연관해서 중요한 시사를 제공해준다.

사람은 천명의 친구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렘은 이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나는 체조가 아니라 댄스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는 사백 명의 부인들을 모두 다 사랑한 어느 거대한 터키인의 사랑을,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처럼 상상해볼 수 있나요? 왜냐하면 만일 내가 <둘>이라고 말하면 나는 세기 시작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끝이 없지요. 오직 단 하나의 참 숫자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 그리고 사랑이란 이 단수 개념을 설명하는 최고의 대표자입니다.

One may have a thousand friends, but only one love-mate. Harems have nothing to do with this matter: I am speaking of dance, not gymnastics. Or can one imagin a tremendous Turk loving every one of his four hundred wives as I love you? For if I say "two" I have started to count and there is no end to it. There is only one real number: One. And love, apprently, is the best exponent of this singularity. (137/94)

여기서의 하나, 즉 단수성singularity은 앞에서 언급한 단수화synchronization과 유사한 의미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개인 것, 혹은 복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하나One라는 것은 정념론적 원리이면서 인식론적 원리이다. 아니 원리라기 보다는 차라리 가능조건이다(적어도 체조가 아니라 댄스가 문제되는 것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보코프 소설에서의 여러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분신들이며, 또 이 분신들은 전체-나보코프Total Nabokov로 수렴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일(一)과 다(多)의 수렴, 발산운동이 그의 소설을 직조하는 원리가 되는 것이라. 한편으론 이 일과 다, 부분과 전체는 마치 프랙탈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부분은 전체를 고스란히 자기 안에 내포해 가지고 있다. 부분과 전체를 서로 닮은 꼴인 것이다. 브이가 세바스챤을 닮고, 세바스챤이 작가 나보코프를 닮는 과정은 이러한 일/다의 운동, 프랙탈 운동 과정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나보코프의 창조원리가 아닐까 싶다.



SCENE 5

5.1. 일/다의 수렴 발산 운동 대신에 왔다리 갔다리 식으로 이야기가 여기까지 뻗어나오게 되었다.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내리는구만. 세바스챤의 마지막 소설로 넘어가기 전에, 그의 마지막 여인(마지막 사랑?)이었던 니나(=르세프)에게 브이가 정작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하지 못하고 넘어간 이유를 잠시 음미해본다.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런 종류의 여인들에게 책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자기 자신의 삶이 백 권의 소설이 주는 스릴보다 더 야단스러울 텐데 만일 그녀가 만 하루 동안 도서관에 갇혀서 보내라는 선고를 받는다면 아마 점심 때쯤 죽은 시체로 발견되리라.

What was the asking! Books mean nothing to a woman of her kind; her own life seems to her to contain the thrills of hundred novels. Had she been condemned to spend a whole day shuy up in a liberary, she would have been found dead about noon.(213-4/146)

그런 니나가 세바스챤의 마지막 사랑이었을까? 사랑이었다니! 어쨌든 지금이라고 사정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무수한 니나들이여! 가련한 얼간이들이여! 돼먹잖은 천사들이여!



5.2. 세바스챤의 마지막 소설 <의심스러운 아스포델>은 죽어가는 한 남자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가 곧 책이다. 다른 건 그저 본문main subject에 딸린 주석commentary에 불과하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과 상념들의 조합이 이 소설의 기법이면서 장기이다. 그는 마침내 삶과 죽음에 관한 온갖 질문의 대답인 ‘절대적인 해결’을 발견하는 데 이른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야생의 시골도, 자연스런 현상의 우연한 종합도 아니고 이런 산과 숲, 들과 강을 한 문장으로 집약시킬 수 있는 책 속의 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여행자와 같은 것이었다.

[I]t was like a treaveller realizing that the wild country he surveys is not an accidential assembly of natural phenomena, but the page in a book where these mountains and forests, and fields, and rivers are disposed in such a way as to form a coherent sentence. (219/150)

이 깨달음은 단순하면서 아름답다. 그걸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는가? 이어지는 문장은 <의심스러운 아스포델> 전체에서, 그리고 이 <참인생>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적인 문장이다.

이제 수수께끼는 풀렸다. ‘그리고 모든 것의 의미가 그들의 형태를 통해서 빛나면 최상으로 중요한 것같이 보였던 여러 생각들과 사건들은 사소한 것조차 되지 못한다. 이제 아무것도 사소한 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한때는 중요성을 부정하기도 했던 다른 생각들과 사건들과 같은 크기로 축소된다.’ 그렇게 하여 과학, 예술, 혹은 종교와 같은 우리 뇌의 빛나는 업적들은 분류의 친근한 계보로부터 떨어져나오고 합세한 손들은 서로 혼합되어 즐겁게 하나가 된다. 버찌의 씨와 어느 낡은 벤치, 그 페인트칠한 나무토막 위에 놓여 있던 그것의 조그만 그림자, 혹은 찢어진 조그만 종이조각, 혹은 수천 수백만의 사소한 것에서 떨어져 나온 어떤 다른 사소한 것은 신기한 크기로 자란다. 다시 조형되고 재조립되어 둘 다 숨쉬듯 자연스럽게 세상은 영혼에 그 의미를 제공한다.

Now the puzzle was solved. ‘And as the meaning of all things shone through their shapes, many ideas and events, which had seemed of the utmost import!ance dwindled not to insignificance, for nothing could be import!ant now, but to the same size which other ideas and events, once denied any import!ance, now attained.’ Thus, such shining giants of our brain as science, art or religion fell out of the familiar scheme of their classification, and joining hands, were mixed and joyfully levelled. Thus, a cherry stone and its tiny shadow which lay on the painted wood of a tired bench, or a bit of torn paper, or any other such trifle out of millions and millions of trifles grew to a wonderful size. Remodelled and re-combined, the world yield its sense to the soul as naturally as both breathed.(219-20/150)

다소 길지만, 내용은 대단히 의미깊다. <참인생>과 같은 “뇌의 빛나는 업적”을 스스로 무화시키면서, 재조형되는 세계, 그래서 새롭게 의미가 생성되는 사소한 세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실, 브이가 세바스챤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또 세바스챤이 “상대방에게는 법칙들을 알려주지도 않고 계속 자기가 고안해낸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222)으면 또 어떤가. 문제는 우리의 고유성 너머에 자연스레 숨쉬면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또다른 세계이다. <참인생>에 지시되어 있지만, <참인생> 저편에 있는 어떤 세계, 책장 너머의 세계, 그리고 이 “뇌의 빛나는 업적들”이 이루어놓은 자질구레한 제도들과 그 틈바구니 너머의 세계, 아니 이런 언어 저편의 세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숨은 가벼워지는 것을.

브이는 <의심스러운 아스포델>을 세바스챤의 모든 책 가운데 가장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그 책 자체로서 그걸 좋아한다고. 그 책의 전모를 다 읽은 것은 아니니까 나로선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위의 대목 같은 부분은 그냥 그 자체로 좋아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제대로 왔든 거꾸로 왔든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면 이제 사다리는 버려도 좋다.



ENDING

E.1. 나는 무얼 얘기했는가? 예전만큼의 정(신)력이 안된다는 걸 자백했는가? 이 피로 속에서(엄살이다). 어쨌거나 나보코프에 대해 몇 마디 할 얘기가 있었고, 그걸 <참인생>을 빌미로 삼아 하고자 했지만, 구성상의 문제로 말미암아 제대로 다 털어놓은 것 같지는 않다. 굿맨과 브이의 전기를 비교하는 것, 세바스챤의 여자 관계를 추적하는 것 따위가 얼른 생각에 여기에 담겨지지 않은 부분들이다. 사소한 걸로 내버려두면 되는 것인지?... 이젠 다 잊어버리기로 한다.

E.2. 그렇다고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1장에서 “살갗을 따스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눈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펼쳐진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이 안겨주는 완벽한 사치. [T]he pure luxury of a cloudless sky designed not to warm the flesh, but solely to please the eye.”(10/5)라는 대목은 이 소설의 초점이 처음에는 시선(게임)의 측면에 있었음을 미리 말해준다. 그렇지만 이후의 전개과정에서 이 유희적 측면은 형이상학, 도덕적 측면에 너무 많은 걸 양보했고, 결국은 끝에 와서 죽음에 대한 성찰에까지 이르러버렸다. 이건 혹 작가 자신도 예기치 못한, 통제하지 못한 부분은 아니었을까(나는 “버찌 씨와 낡은 벤치”를 염두에 두고 있다).

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Соглядатай

나보코프 자신이 이 작품을 불완전하다고 본 것은 바로 그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추측을 나는 내 식으로 해본다. 육체(살갗)/시선(눈)의 대립구도가 막판까지 유지되지 않은 것이다. 나보코프에게서 ‘눈(시선)’은 한 인간의 분신으로서 기능할 만큼 중심적이다(그의 <스파이Eye> 같은 작품). 즉 고골의 ‘코’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나보코프의 ‘눈’이다. 또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시선(시각)은 주인공-인물에 대한 작가-화자의 지배-권력 자체이다. 작가는 시선의 지배권자이기에. 이런 걸 좀더 잘 말할 수 있는 날이 조만간 오길 바란다. 그리고 지금은 무엇보다도, 살갗을 따스하게 해주는 햇빛이 좀 있었으면! 오갈데 없는 비만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08.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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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3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3 08:57   좋아요 0 | URL
반성만은 저도 게으르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2008-02-13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3 09:26   좋아요 0 | URL
네,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원서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 거구요, 저는 보통 번역본을 읽다가 좀 불분명하다거나 중요한 대목이다 싶은 곳은 대조해서 봅니다. 장편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특별한 노하우는 없습니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읽기의 계속이다.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모르겠는데, 시간을 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싶다. 다루어야 할, 혹은 다루고 싶은 아이템들이 많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지다보면 대부분 사장되고 만다(하루에도 서너 가지의 아이템들이 떠오르는 것이니 어차피 모두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연휴가 지나면 사정이 더욱 나빠질 것 같아서 익사 직전의 아이템 몇 가지는 건져놓으려고 한다. 두 주 정도 미뤄진 이 페이퍼도 그 중 한 가지다.  

 

 

 

 

읽고자 하는 대목은 11장의 서두 부분이다. 일견 평이해보이지만 개인적으론 가장 '난해하게' 읽은 대목이다. 그건 국역본들의 번역이 중구난방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그러니까 나만 애를 먹은 건 아니겠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자면 상식적인 발언들인데 벤야민의 원문 자체가 약간 꼬여 있는 듯하다. 어제 차봉희 편역의 <현대사회와 예술>(문학과지성사, 1980)도 눈에 띄기에 학교에서 들고 왔는데, 첫 대목을 네 가지 국역본 버전으로 옮겨보면 이렇다.   

"영화촬영, 특히 유성영화의 촬영 장면을 보면 이전에는 결코 어디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볼 수 있다. 영화촬영은 연기 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어떤 입지점을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과정이다(물론 보는 사람의 눈동자가 촬영장치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최성만, 131쪽)

"영화, 특히 유성영화의 촬영은 지금까지 그 어느 곳 어느 시기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광경은 어떤 사건의 진행과정의 묘사인데, 여기에서는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스탭들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게 마련이다.(비록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반성완, 219쪽)

"영화촬영 특히 유성영화는 예전엔 도저히 생각조차 해 볼 수 없었던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영화촬영은 어떤 입장에도 해당될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볼 때 연출 과정 그 자체에는 소속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보조 제작진 등은 구경꾼의 시야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비록 구경꾼의 시점이 촬영기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할지라도)."(차봉희, 72쪽)

"영화, 그리고 특히 유성영화촬영은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그리고 어느 시기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보여준다. 영화는 더이상 어떤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하는데, 그것으로부터 보면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은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관객의 눈의 위치가 촬영기구의 위치와 일치하지 않으면.)"(강유원, 13쪽)

이 첫대목에서 얘기되고 있는 것은 영화촬영 장면의 독특성인데, 간단히 말하면 연기 과정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스탭들이 보는 사람(구경꾼)의 시야에 모두 다 들어오게 마련인 것이 그 독특성이다. 그렇잖은가? 촬영현장에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감독과 촬영, 조명 등의 스태프들, 그리고 갖가지 기구들이 잔뜩 모여있는 것이니 말이다. 곧이어 언급이 되지만 이러한 '광경'이 깔끔한 연극무대와는 전혀 다른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다.

반성완본에서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은 '연기진행에 속하지 않는' 정도로 교정되어야 한다(현장에서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이해하기엔 가장 편안한 문장이 되는데, 벤야민의 원문은 좀 꼬여 있고 이것을 그대로 옮긴 것인 최성만본이다. "영화촬영은 연기 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어떤 입지점을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과정이다." 

이해가 되시는지? 오역은 아니다. 다만 아주 여러번 읽어야 한다('보는 사람'을 '구경꾼'으로 읽으면 조금 이해가 용이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는 촬영현장을 '보는 사람'이니까). 요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즉, 그런 걸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차봉희본은 "영화촬영은 어떤 입장에도 해당될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볼 때 연출 과정 그 자체에는 소속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보조 제작진 등은 구경꾼의 시야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라고 옮겼는데 전혀 엉뚱한 요령부득의 번역이다. 80년대에나 통용됐을 법한. 강유원본은 "영화는 더이상 어떤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하는데, 그것으로부터 보면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은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옮겼는데, 논리적으론 오역이 아니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하기 어렵다. 가령 "영화는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이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어떠한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한다."라고 재구성해놓으면 '직역'한 꼴은 되지만 우리말 문장은 아닌 것이다.

괄호안에 덧붙여진 내용도 최성만본을 제외하면 모두 오역이다. 반성완본에서 "비록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는 거꾸로 옮긴 것이다. "물론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이라고 옮겨야 한다. 카메라와 동일한 시점에서 연기 장면을 본다면 촬영이나 조명장치, 스태프 등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만약에 보인다면 NG인 것이고). 차봉희본과 강유원본도 말뜻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다만 최성만본의 "물론 보는 사람의 눈동자가 촬영장치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에서도 '눈동자'는 오독을 유발하기 쉽다. 대개는 "보는 사람의 눈동자와 촬영장치의 시점이 일치하는 경우"를 둘이 마주치는 경우로 이해할 터이기 때문이다(나부터도 그랬다). '시점'이라고 해야 가장 명료해지는 게 아닌가 한다. 이제 이어지는 대목이다.

"다른 어떤 상황도 아닌 바로 이런 상황이 영화제작소에서의 장면과 연극무대 위에서의 장면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하찮은 유사성으로 만든다. 연극에는 원칙적으로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함부로 환영적인 것으로서 꿰뚫어볼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영화의 촬영 장면의 경우에는 이러한 지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영화의 환영적 성격은 2차적 성격이다. 즉, 그것은 편집의 결과이다."(최성만)

"바로 이러한 면이 그 어떠한 다른 면보다도 영화제작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위에서의 한 장면 사이의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만든다. 연극무대의 경우, 우리는 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곧 바로 환상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영화장면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이는 환상적인 성격은 이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편집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반성완)

"그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황이, 영화촬영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유사성을 피상적이며 중요치 않은 것으로 만든다. 연극에서는 원칙적으로, 무대 위의 사건을 별 어려움 없이 그냥 환상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영화의 촬영장면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없다. 영화가 지닌 환상적인 성격은 제 2단계의 것이다. 즉 그것은 편집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차봉희) 

"이러한 상황은 어떤 다른 상황보다도 영화제작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위에서의 장면 사이에 성립하는 이른바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만든다. [연극]무대는 원칙적으로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이 즉시 허상으로 간파될 수 없는 장소임을 알고 있다. 이에 반해서 영화에서의 촬영장면에는 이러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허상적인 본질은 2차적 [후속 작업에서 생겨난] 본질이다; 그것은 편집의 산물이다."(강유원)

첫문장의 요점은 앞에서 묘사한 영화촬영장(스튜디오)의 특징이 연극무대와의 큰 차이점이라는 것. 그에 비하면 같은 '연기 장면'이라는 공통점(유사성)은 피상적이며 사소하다. 문제는 그 다음 문장. '연극적 환상'과 '영화적 환상'을 대비하고 있는 대목인데, 이때 '환상'이란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을 '현실'로서 인지하는 걸 말한다(이런 장면들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거나 흥분한다거나 하는 모든 정서적 반응은 그러한 환영적 효과의 산물인 것이고). 때문에 번역문들을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벤야민의 논점은 연극무대에서는 원칙적으로 그러한 '환상'이 유지될 수 있음에 반해서 영화촬영 장면에서는 전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영화촬영을 '보는 사람'은 카메라와 배우를 동시에 보게 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배우와 상황에 대한 전적인 몰입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연극무대에는 (현실이라는) 환상이 있고 영화촬영에는 (현실이라는) 환상이 없다(물론 연극적 환상을 폭로하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예외이겠다). 영화적 환상은 편집의 결과로서 얻게 되는 이차적 성격의 산물이다. 번역은 이러한 요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될 것이다(통상적인 환상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대목의 '환상'은 '현실이라는 환상'으로 풀어서 이해하는 게 좋겠다). '영화의 환영적 성격'이란 "영화속 이미지들을 정말로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주는 성격"을 가리킨다...

08.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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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8-02-1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해설을 읽어보니 사실 별것 아닌 내용인데..번역문만 놓고 본다면 오해의 소지가 많았을 만한 내용이네요. 덕분에 벤야민 글 독해에 도움되는 유용한 팁 하나를 더 얻어갑니다. ^^

로쟈 2008-02-10 19:52   좋아요 0 | URL
뒷부분에도 복병들이 나오더군요. 요약정리는 간단하지만 읽기는 난감한 텍스트입니다.--;

느림보 2009-06-1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번역된 영화 관련 이론서적들을 읽다보면, 특히 동문선 책들이 그런 경우인데, 심하게 말하자면 그냥 번역기에 돌린걸 문맥 파악도 하지 않고 책으로 내 버린건 아닌가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영화 이론 서는 관련 지식도 좀 있고 현장이 기본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번역하는것이 좋겠지만, 또 그렇게 모두를 아우르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번역까지 가능한 경우는 희귀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감수자를 통해서 내용을 점검하던가 하는 절차도 필요할 텐데, 그런식으로 책임있는 책만들기가 진행된 경우는 별로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괜히 짧은 영어 실력에 원서를 읽어 볼까 생각이 드는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로쟈님께서 친절히 지적해주신 부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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