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원 신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자서전 특집기사의 한 꼭지로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8)에 대해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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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대학원신문(161호) 나비의 변태를 거친 기억의 아상블라주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는 제목만 따라가자면 프루스트와 함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는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입증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이토록 정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을까라는 경탄을 자아내는 ‘기억의 예술가’ 나보코프! 하지만 그의 ‘기억’은 ‘기예’가 아니다. 나보코프는 서문의 첫 문장에서 “이 작품은 개인적인 기억의 단편들을 그러모아 상호연관된 조직을 이루도록 조립해놓은 아상블라주”라고 규정해놓았다. ‘개인적인 기억의 단편들’이야 물론 작가이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나보코프의 고유한 자산이겠지만 자서전은 그러한 단편적 자산들의 모음이 아니다. 그것들의 체계적인 아상블라주, 곧 배치이고 구성이다. 그리고 이 작업의 작업반장은 기억력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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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는 한 비평가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기억력이 형편없는 열렬한 메모리스트”라고 말한 적이 있다. ‘메모리스트’는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보코프의 기억력은 ‘형편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메모리스트’가 되는가? 그가 에세이집 <강한 의견>에서 털어놓는 바에 따르면 “상상력이란 기억력의 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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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가 보기에, 생생한 기억에 대한 예찬은 기억에 단편들을 저장해두었다가 나중에 창조적 상상력이 회상과 창작을 결합하여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에 대한 예찬이다. 그가 자서전의 영국판 제목을 원래는 ‘말하라, 므네모시네’라고 지으려고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발음이 어렵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기억의 여신’은 기억력과 상상력을 포괄한다. 이 둘은 서로 형제다. 그리고 기억과 상상이 하는 일이 모두 ‘시간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동업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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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에게서 기억과 상상이 한 통속이며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는 점은 그의 자서전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전체 15장으로 이루어진 이 자서전에서 프랑스어로 가장 먼저 씌어진 5장 ‘마드무아젤 오’는 나중에 영어로 번역되어 단편집에 수록되었고 7장 ‘콜레트’ 또한 ‘첫사랑’이란 제목의 단편소설로 발표되었다. 이 자서전 자체는 ‘비소설’로 분류되지만 ‘소설’과 ‘비소설’의 경계가 나보코프에게서는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모든 사건의 객관적 존재 자체가 하나의 ‘불순한 상상’의 형식이며 창조적 상상력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니 ‘순수한 객관적 현실’이나 ‘순수한 기억’이란 개념이야말로 오히려 ‘픽션’일 따름이다. 따라서 진실은 언제나 기억과 상상의 창조적인 합성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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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가 이 자서전의 글들을 잡지에 연재하기 직전에 발표한 최초의 영어소설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1938)에서 주인공 브이는 러시아 태생의 영국작가인 자신의 이복형 세바스챤 나잇의 전기가 결함투성이인 것을 발견하고 형의 ‘참인생’이 무엇이었는지 직접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혼이란 오직 존재의 방식에 불과하며, 한 영혼의 맥박을 발견하여 그대로 따라간다면 어떤 영혼도 당신의 것이 될 거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은 브이 자신이 곧 세바스챤 나잇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두 명의 ‘작가’가 등장하여 각각 기억과 상상을 통해서 자신의 진실을 찾아가는 <말하라, 기억이여> 또한 마찬가지의 도식을 보여준다. 이때 두 작가란 자서전의 주인공으로서의 ‘나’와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나’를 가리킨다. 가령, 출발점이 된 ‘마드무아젤 오’ 이야기에서 나보코프는 어린시절 늙은 여가정교사 마드무아젤 오의 매력이 ‘소설가 나보코프’가 다른 작품에서 그려낸 초상에서는 사라져버린 것을 애석해한다. 그에게 자서전은 “가련한 마드무아젤에 대한 남은 이야기를 살려보려 하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그 노력을 통해서 복원/창조해내고자 하는 것은 어떤 사건과 인물의 유기적 진실이다. 그것은 시인이 발견하고 창조해내는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시간을 정지시키는, 그리하여 무력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얻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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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문학관이라 할 만한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자들은 공간의 한 지점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살피는 반면에 시인들은 시간의 한 지점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느낀다.” 11장의 ‘첫 시’에 나오는 이 대목을 그는 자신의 철학적 친구 비비안 블러드마크의 말이라고 인용하지만, ‘비비안 블러드마크’는 <롤리타>에 등장하는 ‘비비안 다크블룸’과 마찬가지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나그램이다. 즉, 철자들을 재배열하여 만든 이름이다. 그러니 비비언 블러드마크는 나보코프의 철학자 분신이겠다. 이 ‘두 사람’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시의 의의란 이런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시는 위치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의식으로 포용하는 세계에 관련하여 한 사람의 자리를 나타내고자 함은 태곳적부터 있어 온 충동이다.”
![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Другие берега Conclusive Evidence](http://www.ozon.ru/multimedia/books_covers/1000100058.jpg)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는 바로 그러한 ‘태곳적 충동’에 따라 자신의 위치(자리)를 표시하려는 작가의 ‘필사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자서전은 그의 망명작가로서의 이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자서전’답다. 그는 연재한 글들을 1951년 <결정적 증거>라는 제목으로 출간한다(자신의 존재에 대한 결정적 증거!). 첫 번째 영어판이다. 그리고 1954년 아내의 도움을 받아 많은 단락들을 수정하고 보완한 러시아어판 <피안>을 낸다. 최종판으로서 <말하라, 기억이여>(1966)는 이 러시아어판을 다시 영어로 바꾼 ‘악마적인 작업’의 소산이다. 마치 “나비들에게 친숙한 몇 겹의 변태 과정”을 닮은 이러한 작업은 나보코프의 자부대로, 다른 어떤 인간들에 의해서도 시도된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도 이 자서전은 나보코프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08. 06. 22.
P.S. 나보코프의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 읽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190373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