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스펠마이어의 <인문학의 즐거움>(Human & Books, 2008)에 대한 소개기사를 챙겨둔다. 다른 몇 개의 기사도 대동소이하다. 책은 'Arts of Living'이 원제이고 '21세기 인문학의 재창조를 위하여'(Reinventing the Humanities for the Twenty-First Century)가 부제다. 저자는 생소한데, 러트거스대학의 영문학 교수라고. 아래 기사에서 지적하듯이 "저자의 주장에 새로운 것은 없다"손 치더라도 방대한 자료와 유려한 논증을 통해서 인문학이 변화해야 하며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는 주장을 입증한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 이후에 인문학의 변화와 갱신을 촉구하는 가장 '자극적인' 책이 아닌가 한다.

문화일보(08. 04. 04) 인문학, 세상과 어울려라

국내에서도 논란이 많은 ‘인문학의 위기’를 분석하고 그 돌파구를 찾아보는 책이다. 미국 러트거스대 영문학 교수인 저자는, 우리로 치면 대학의 인문·이공계를 아우르는 교양과정에서 작문 프로그램을 통해 인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연구와 교육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저자가 인문학 위기의 대안 중 하나로 제시하는 방안도 이같은 인문학 전공자에만 국한되지 않는 작문 과정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저자가 미국인으로 영미권 철학의 대표격인 ‘실용주의’ 철학자라는 점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영미권과 프랑스 독일 등 소위 ‘대륙권’에서의 체감이 적지 않게 차이가 난다. 대륙에선 좌파적 지성이 여전히 강하고, 영미권에서는 ‘실용주의’로 대표되는 체제 내적 학풍이 주도해오고 있는 차이로 볼 수 있다. 한국은 물론 영미권의 영향 아래 있다.

예컨대 저자는 지난 20년 동안 인문학을 지배해온 프랑스 철학자들-데리다, 푸코, 라캉, 들뢰즈 등-에 대해 ‘세상에서 고립돼 있는 순수사상가’로 부르면서, 그들의 이론을 ‘판매용으로 포장된 분석체계’라고 폄훼한다. 그는 “실용주의자인 나는 이론이 순수성찰의 입장을 내세우는 것을 액면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론은 어쨌거나 실용적인 목적에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문학자들이 시장체계를 아무리 혐오한다 하더라도 시장체계의 승리가 있기 전의 상황을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이론의 승리가 우리에게 뭔가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안의 고갈과 진정 새로운 것을 꿈꾸는 능력의 상실이다.”

저자는 19세기 미국을 사례로, 지역사회가 무너지고 거대한 행정정부가 등장하면서 지식을 많이, 빠르게 습득하는 자와 적게, 늦게 습득하는 자의 편 가르기가 시작된다고 본다. 지식과 무지의 간극이 커지면서 인문학은 의학과 법학, 과학을 모델로 더욱 전문화의 길을 걷게 됐다. 사회 또는 생활과 동떨어진 이론이 부상하면서 인문학은 텍스트에 더 몰두하게 되고, 이는 인문학과 그 종사자에게 특권을 부여해준 대신 인문학의 고립이라는 대가를 치른다. 인문학이 소외된 결정적 이유는 이처럼 ‘학자들만을 위한 학문’에 갇혀 스스로 대중들과 멀어지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의 본질은 텍스트의 비평이 아니라 일상 생활과 연결된 ‘경험으로서의 예술적 활동’이 돼야 하며, 그러기 위해 인문학자들은 다른 학문들과, 세상과 벽을 허물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의학 인문학’, ‘법 인문학’,‘경제 인문학’,‘미디어 인문학’ 등이 등장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한마디로 세상과, 사람에게 ‘실용적인’ 인문학이 돼야 인문학이 소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에 새로운 것은 없다. 이 정도는 ‘인문학의 위기’를 외쳐온 우리 대학의 인문학자들도 해온 얘기다. 그것은 저자가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의 외부, 곧 ‘체제 밖’은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결론이란 우리나 거기나 차이가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말해 ‘배치’의 문제라는 것은 한국 학자들도 지금은 이의를 달 사람이 많지 않다.(엄주엽기자)

08. 04. 05.

P.S. 국내에서도 비슷한 주장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만한 규모의 보고서/제안서는 보지 못했다. 기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건 이 책이 놓여있는 맥락인데, 그것은 90년대 이후 '지난 15년 동안' 벌어진 '문화전쟁'이다(소위 '과학전쟁'과 짝지을 만하다).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강단 좌파와 우파의 '전쟁'을 말하는데, 이에 대한 스펠마이어의 평가는 냉정하다.

"지난 15년 동안 인문학은 보수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의 충돌을 겪어왔으며, 이는 상당히 공론화된 문화전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문화형성에 있어서 폭넓은 민주적 참여를 끌어내는 데 전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전쟁'은 오히려 경쟁적인 두 엘리트 집단의 소규모 전쟁으로 볼 수도 있다. 매슈 아널드와 엘리엇, 혹은 마르크스의 제자들이건 추종자들이건 간에 대부분의 학계 인문학자들은 아직도 문화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며, 혹은 그래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21쪽)

저자가 문제삼고 있는 건 이 '공통적인' 전제이다. 그에 비하면 '문화전쟁'을 낳은 보수/진보 인문학자들의 의견차이라는 건 오히려 사소하다는 것. 어떤 차이였던가?

"보수주의자들은 위대한 서적들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으며, 급진주의자들 역시 위대한 서적들을 - 신성한 우상으로라기보다 가혹한 '심문'의 대상으로 -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같은 문화전쟁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의 위기는 어떤 책은 가르치고 혹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어려움에 처한 것은 더 넓은 사회의 삶으로부터 점자 고립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실 20세기 전반에 걸쳐 인문학은 또다시 고립의 길을 택해왔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13쪽)

이것이 이 책의 진단이자 기본 전제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사히는 것이 문화형성에의 개입 혹은 참여이다. "문화형성에의 직접적인 개입, 이것이야말로 과거의 인문학은 이루어내지 못했던 것이며 새로운 인문학이 미래를 기대하려면 반드시 책임지고 노력해야 할 일이다."(19쪽) 저자의 진단에 공감한다면 그가 제안하는 대안들에도 눈길을 줄 만하다.

한편 책의 뒷갈피에는 추천사들이 적혀 있는데, 일리노이대학의 한 교수의 코멘트는 이 책의 계보를 지적한 것이어서 유익하다. "이 책은 로버트 스콜스의 <영문학의 부상과 몰락(The Rise and Fall of English)>, 앨런 블룸의 <미국적 정신의 종말(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제럴드 그래프의 <문학의 공언(Professing Literature)>에 이르는 다양한 지적 전통에 속한다."

스콜스의 <영문학의 부상과 몰락>(1999)은 부제가 한 분과학문으로서 영어의 재구축(Reconstructing English As a Discipline)'이다. 스펠마이어도 지적하는 것이지만 미국의 경우에 인문학이 대학에서 전문직 형태로 갖춰진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19세기 종반까지만 해도 인문학의 핵심분야는 수사학과 고전학이었지 영문학이나 역사학이 아니었다. 스콜스의 거명한 책은 이러한 '학문사' 내지는 '학문제도사'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주겠다. 참고로 '스콜스'는 국내에 '스콜즈' 혹은 '숄즈'로 소개됐으며 <서사의 본질>, <문학과 구조주의> 등이 대표적인 저작이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로 미국 보수주의의 거물인 앨런 블룸의 <미국적 정신의 종말>(1987)은 <미국 정신의 종말>(범양사, 1989/1997)로 번역돼 있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집문당, 1982)도 그의 책인데, 근작을 보니 <셰익스피어의 사랑과 우정론>도 눈에 띈다. 

그리고 제럴드 그래프는 국내에 '제럴드 그라프'로 소개돼 있으며 <자신의 적이 되어가는 문학>(현대미학사, 1997), <시의 진술과 비평적 도그마>(현대미학사, 1999)가 그의 책들이다. 'Professing Literature'를 '문학을 공언하기'로 옮겼는데, 잘못 옮긴 것이고 <문학을 직업으로 가르치기> 정도의 뜻이어야 한다. 대학에서의 '문학 전공'의 역사를 더듬어보는 책이다.

저자인 스펠마이어는 한 각주에서 블룸의 <미국 정신의 종말>이 '문화전쟁'의 분수령이 된 책이었다고 언급하며 해럴드 블룸의 <서구의 정전>과 자크 바전의 <우리가 존중하는 문화(The Culture We Deserve)>(1989), 그리고 이들과 반대편에 섰던 로저 킴볼의 <정교수 급진주의자(Tenured Radicals: How Politics has Corrupted Higher Education)>(1990) 등도 주요한 책으로 거명한다. 그는 이 두 입장에 비판적이며 <문화전쟁을 넘어서(Beyond Culture Wars: How Teaching the Conflicts Can Revitalize American Education)>(1992)를 쓴 제럴드 그라프, <미국 정신의 개막(The Opening of the American Mind: Canons, Culture, and History)>(1996)을 쓴 로렌스 레바인 등의 입장에 공감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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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8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4-08 16:55   좋아요 0 | URL
네, 기대한 것보다 좋은 책입니다.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는. 더불어 '충격'씩이나요?^^;

소경 2008-04-10 10:17   좋아요 0 | URL
맨날 안이한 생각 가지고 살고 있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