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트허르 브레흐만의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김영사)을 읽는 중이다. 러시아혁명사 책들과 함께. 1장을 읽었을 뿐이지만 여러 추천사가 입증하듯 매우 잘 쓰인 책이다(원저도 주문했다). 요지는 기본소득에 대한 강력한 주장으로 보이는데 번역도 막힘이 없어서 원저의 속도감을 잘 전달한다(원저보다 번역본의 분량이 짧은 건 이례적이다).

‘유토피아‘에 대한 긍정적 제안을 오랜만에 접하다 보니 몇권의 관련서도 떠오른다. 이미 절판된 책으로 러셀 자코비의 <유토피아의 종말>과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 등(내가 읽은 책들도 이제 절판본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유토피아‘도 만만찮은 규모의 주제인지라 최대한 한정해서 다룰 수밖에 없고 그게 포인트다. 브레흐만의 책에서도 나의 관심사 중 하나는 그가 주제를 어떻게 제한해서 다루는가 하는 점이다. ‘새롭게 떠오르는 유럽의 젊은 사상가‘라고 소개되는 브레흐만은 네덜란드가 국적이고 1988년생이다. 이제 우리 나이로 서른이고 만 29세다. 말 그대로 ‘젊은피‘다.

젊은 세대 저자들이 등장할 때면 나이와 세대를 한번씩 생각해보게 된다. 알라디너 내지 블로거로서의 활동도 기한이 있는 건 아닌가 싶고(알라딘마을의 ‘젊은피‘는 어디에 있는가?). 2-3년후면 20년차로 접어들텐데 서평 블로그로서는 이미 정점을 찍었고 내리막만 남아있는 상태다. 내가 서평가로서 그렇듯이(차세대는 누구인가?).

‘강의서평책‘이 내년쯤에 나올텐데 일종의 변신이 될지 백조의 노래가 될지 점치기 어렵다. ‘리얼리스트를 위한‘이란 수식어 때문에 현실을 직시해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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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미널에 가까스로 도착해 인천공항행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나를 포함해 승객은 모두 여섯 명. 여행 성수기가 아니라는 걸 알겠다(중간 경유지에서 더 탄다 하더라도).

여행가방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넣은 책은 체코 작가들의 엔솔로지 <프라하>(행복한책읽기)다. 어젯밤에 책장에서 꺼내와 펼쳐드니 프라하를 공통 배경으로 한 이 소설집에 카프카의 작품으론 ‘어느 투쟁의 기록‘이 수록돼 있다. 책을 3년전 프라하 여행시에 구해놓고 아직 읽지 않았던 것. 그때 신고다녔던 운동화를 3년만에 신고 나선 것 비슷하게 챙길 수밖에 없었다.

20대 초반 대학시절에 쓴 ‘어느 투쟁의 기록‘은 다른 카프카 작품집 두 권에도 실려있다. 전집판 1권 <변신>(솔)과 <어느 투쟁의 기록>(범우사)이다. 휴대성을 고려해 <프라하>를 선택한 것. ‘어느 투쟁의 기록‘은 습작기 작품이지만(카프카는 1912년에 ‘선고‘와 ‘변신‘ 등 주요 작품을 집필하고 <관찰>이라는 첫 작품집도 발표한다. 두번 약혼하게 되는 펠리체 바우어를 만난 것도 그 여름의 일이다. 카프카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1912년 이전을 나는 ‘습작기‘로 부른다), 유명한 카프카 동상이 이 작품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유명하기에 카프카 문학기행에서도 찾아가게 된다. 기억에는 주택가의 작은 광장에 세워져 있었다. 머리 없는 인물상 어깨에 카프카가 걸터앉은 모습이다).

카프카 문학에서 ‘투쟁‘은 키워드 가운데 하나다. 그를 읽는 독자에게는 카프카가 투쟁의 대상이 될는지도. 그 카프카를 만나러 한번 더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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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문학기행의 첫 기착지는 오스트리아 빈이다. 카프카와의 몇 가지 연고 때문에 들르긴 하지만 빈의 몇몇 명소도 방문하게 된다(짧은 경유 일정이라 아마도 눈도장만 찍게 될 듯싶다). 유럽문화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으로 빈은 다른 많은 명사들의 도시이기도 하다. 지난여름에 오스트리아 문학을 강의하면서 다룬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슈테판 츠바이크도 빈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은 작가들이다.

 

 

 

강의에선 다루지 않았지만(강의에서는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초조한 마음>을 읽었다) 츠바이크의 <이별여행>(이숲에올빼미, 2011)이 서가에서 눈에 띄기에 펼쳤는데, 뜻밖에도 상세한 작가론이 실려 있다. 이사벨 오쎄의 '슈테판 츠바이크의 생애와 작품'이란 해설인데, 한국어판 역자들이 작품해설을 대신하여 옮겨놓은 것. 47쪽 분량이라 내가 읽은 범위 안에서는 가장 상세하다.

 

츠바이크가 살았던 시대 오스트리아의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를 설명해주는 대목이 유익한데, 동시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말이 인상적이다.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도시로 활기찬 도시였던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 진보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아주 보수적이고 갑갑한 도시였다고. 이를 비꼬면서 말러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가 종말을 맞게 될 때, 나는 빈으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20년 늦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말러의 교향곡을 들어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오늘밤에는 잠들기 전에 좀 들어보면서 빈 입성 준비를 해야겠다.

 

 

 

빈에서는 프로이트 박물관도 들를 예정인데, 카프카 문학과 그의 시대를 이해하는 데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넣은 일정이다. 하긴 빈은 프로이트의 도시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츠바이크는 물론 말러와도 다 개인적인 인연을 갖고 있다. 그런 행적들을 자세히 짚어주는 책을 찾아봐야겠다. 나중에...

 

17. 09.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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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0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 기획한 '트랜스내셔널인문학총서' 가운데 <식민주의 역사학과 제국>(책과함께, 2016)을 훑어보다가 정준영 교수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식민지 의학 교육과 헤게모니 경쟁'이란 논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관심을 상기하게 되었다. 경성제국대학에 대한 관심이다. 1926년에 설립된, 식민지 조선의 이 대표적 고등교육 기관이 어떤 의미를 지녔고,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관심을 갖는다는 게 이상할 건 없다. 식민지 조선시대애 관심을 갖는다면 말이다.

 

 

게다가, 아직 구하진 못했지만 기본 자료 구실을 해줄 만한 책으로 <식민권력과 근대지식: 경성제국대학 연구>(서울대출판문화원, 2011)가 나와 있다. 내가 몇년 전에 우연히 백화점 중고매장에서 <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푸른사상, 2013)을 구한 것도 <식민권력과 근대지식>에 촉발된 관심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공저자로 참여한 정준영 교수의 박사학위논문이 <경성제국대학과 식민지 헤게모니>(서울대, 2009)다. 단행본으로 나오면 좋겠다 싶다.

 

 

경성제국대학 관련서는 많지 않다. 정선이의 <경성제국대학 연구>(문음사, 2002)는 학위논문에 바탕한 걸로 보이는데, 일종의 개관이고, 경성제국대학 위생조사부에서 펴낸 <토막민의 생활과 위생>(민속원, 2010)이나 법문학부의 조선어조선문학전공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루의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동국대출판부, 2010) 등이 자료적 의미를 갖는 책들이다.

 

경성제국대학이란 무엇이었던가. 정준영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근대적 지식 체계의 생산(연구)과 배분(교육)에서 독보적인 권위를 학보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인들 사이에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납득시키고자 했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경성제대를 식민 당국의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일종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식민주의 역사학과 제국>, 296쪽)

 

물론 '있지 않을까?' 정도로는 부족하고, 좀더 구체적으로 그 의미와 역할이 규명되어야 한다. 아직은 초입 단계로 보이지만 경성제국대학과 식민지 지식장에 대한 연구가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지면 좋겠다. 언제든 읽을 준비가 돼 있다...

 

16.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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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에 읽은 책 중 하나는 <한나 아렌트의 말>(마음산책, 2016)이다. 번스타인의 <악의 남용>(울력, 2016), 모린 코리건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책세상, 2016) 등과 같이 읽기 시작했으나 아무래도 분량상 가장 먼저 완독했다. 읽기 전에는 가장 좋은 아렌트 입문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적었으나, 일단 그런 입문서로는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는 게 독후감이다. 아렌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예비 지식을 가진 독자에게 더 유익할 듯하기에. 가령 작년에 나온 소개서 가운데 나카마사 마사키의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갈라파고스, 2015)나 권정우, 하승우의 <아렌트의 정치>(한티재, 2015) 등을 예비적으로 읽어두는 게 좋겠다. 전체적인 조감도를 갖고서 인터뷰를 읽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다.  

 

 

생각해보니 아렌트의 인터뷰는 처음 읽은 게 되는데, 글보다는 역시 수월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명료하게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말은 말대로의 모호함을 갖고 있는데다가 아렌트의 어법은 다소 독특해서다(좀 익숙해지면 나아질지도). 그래서 생각만큼 편안한 독서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세계' 개념에 대해서, 그리고 평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성과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열네 살에 칸트를 읽었다는 애기, 자신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는 토로 등이 그에 대한 이해를 더 보강해주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읽으면서 손이 근질거렸던 책은 엘리자베스 영-브륄의 방대한 평전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인데, 이 책의 부제가 바로 '세계 사랑을 위하여'다. 그리고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집도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인간사랑, 2009)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기도 하다. 영-브륄의 책은 원서와 번역본을 모두 갖고 있지만 아마도 서고에 있는 모양으로 책장에서 찾을 수 없었다. '도음이 안돼!'라고 투덜거리는 걸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그런데 아렌트에게서 '세계 사랑'이란 어떤 의미인가? 인터뷰의 한 대목.

가우스: 당신은 '세계'라는 단어를 정치를 위한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아렌트: 맞아요. 세계는 정치를 위한 공간이에요.(59쪽)

군말이 필요없는 대목이다. 아렌트 철학, 아니 아렌트 정치사상의 핵심은 바로 '정치를 위한 공간'으로서 세계를 예찬하고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좀 유감스러운 것은 옮긴이의 말이었다.

정치는 혐오스럽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정치는 쉴 새 없이 곰팡이가 슬고 먼지가 쌓이는, 불결하고 악취 나는 안방과 비슷하다. 안방이 그렇다는 이유로 넓은 안방을 버려두고 비좁은 골방에 웅크린 채 구시렁거리며 사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상황이 그렇다면 먼지와 때를 묻힐 각오를 하고는 두 팔 걷고 안방에 들어가 곰팡이와 먼지를 제거해서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옳은 일 아니겠는가. 아렌트가 강조한 정치적 사유와 행위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198쪽)

그런 취지에서 옮긴이 말의 제목도 '정치는 안방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라고 붙여졌는데, 나로선 이런 '정치관'이 아렌트에 대한 오해로 여겨진다. 아렌트에게 혐오스러운 건 정치의 실종, 내지는 유사 정치이지 결코 정치 자체가 아니다. 

 

아무려나 그런 생각으로 아렌트의 말을 옮겼다고 하니까 좀 찜찜한 기분이 되는데, 결국 몇몇 대목에서는 불만도 갖게 되었다. 아렌트의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을 원어까지 병기하면서 '대중의 행복'(114쪽)이라고 옮긴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대중의 행복이란, 사람은 공적인 생활(public life)에 참여했을 때, 그러지 않았다면 그에게 닫힌 채로 남았을 인간적 체험의 차원을 혼자 힘으로 열어젖힌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여러 면에서 완전한 '행복'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뜻해요."(114쪽)라는 대목이다. 다른 모든 곳에서 'public'는 '공적' 혹은 '공공'이라고 옮겨놓고 이 대목에서만 '대중'이라고 옮긴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더구나 '공적 행복'이란 말은 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해제를 쓴 아렌트 전공자 김선욱 교수도 "가끔씩 대담의 생생함에 초점을 맞추려다 보니 일부 문장의 번역이 치밀하지 못한 부분들이 보이긴 하지만"(14쪽)이라고 지적하지만, '공적'을 '대중의'로 옮긴 건 '대담의 생생함'과도 무관해 보인다. 덧붙여, 내가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몇 대목을 적어둔다.

"그런데 내가 20대였을 때 그 질문은 어머니가 20대였을 때보다 당연히 훨씬 더 중요했어요."(35쪽)

원문은 "But the question was naturally much more important in the twenties, when I was young, than it was for my mother."(13쪽)이다. 여기서 '20대'로 옮긴 'in the twenties'는 '20년대에는'이다. 아렌트는 1906년생이므로 1920년에 열네 살이었고, 1926년에야 스무 살이 된다. 어렸을 때라는 건 20년대 초반을 뜻하는 것. "(그리고) 내가 철이 들었을 때"라는 말이 이어지는데, 그와 견주더라도 언급되는 시점은 20대 때가 아니라, 10대 때여야 한다.  

 

'정치와 혁명에 관한 사유'를 주제로 한 세번째 인터뷰에서 한 대목.

"오늘날 주요하게 대비되는 나라들은 사회주의국가 대 자본주의국가가 아니라,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들, 예컨대 스웨덴 대 미국이거나, 그렇지 않은 나라들, 예컨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대 소련이죠."(131쪽)

이 부분도 부정확하게 옮겨졌는데, 번역문만 보면 '스웨덴 대 미국'과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대 소련'이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것처럼 읽힌다. 핵심은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 대 그렇지 않은 나라'의 대비다. 그리고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에 스웨덴과 미국이 속하고, 그렇지 않은 나라에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소련이 속한다. 다만 스웨덴과 미국은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의 스펙트럼에서 두 축을 구성하고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소련이 '그렇지 않은 나라들'의 두 축이다. 원문은 "The chief distinction today is not between socialist and capitalist countries but between countries that respect these rights, as, for instance, Sweden on one side, the United States on the other, and those that do not, as, for instance, Franco's Spain on one side, Soviet Russia on the other."(84쪽)

 

이런 대목에서도 아렌트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본질적으로 사회주의는 그냥 계속 지속돼왔고, 극단적인 곳까지 치달아 자본주의가 시작된 지점에 도달했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 체제가 자본주의의 해결책이어야 하나요?"(131쪽)

원문은 "In essence, socialism has simply continued, and driven to its extreme, what capitalism began. Why should it be the remedy?"(84쪽) 역자는 이 문장을 연속적으로 해석했는데, 내가 보기에 'what capitalism began'은 has continued와 (has) driven이란 두 동사의 (공통) 목적절이다. 다시 옮기면 "본질적으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시작한 것을 그냥 지속해서 그 극단으로까지 몰고 갔다." 곧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극단화된 형태일 뿐이므로 결코 대안적 사회체제가 아니라는 얘기다(자본주의가 시작된 지점에 사회주의가 도달하다니?).

 

번역은 불가불 오역을 수반할 수밖에 없지만 평이한 문장에서까지 엉뚱한 실수가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옥에 티라고 하면 할 수 없지만, '대중의 행복'이란 말이 납득하기 어려워서 독후감에다 번역에 대한 불평도 같이 적었다...

 

16.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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