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 읽은 책 중 하나는 <한나 아렌트의 말>(마음산책, 2016)이다. 번스타인의 <악의 남용>(울력, 2016), 모린 코리건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책세상, 2016) 등과 같이 읽기 시작했으나 아무래도 분량상 가장 먼저 완독했다. 읽기 전에는 가장 좋은 아렌트 입문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적었으나, 일단 그런 입문서로는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는 게 독후감이다. 아렌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예비 지식을 가진 독자에게 더 유익할 듯하기에. 가령 작년에 나온 소개서 가운데 나카마사 마사키의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갈라파고스, 2015)나 권정우, 하승우의 <아렌트의 정치>(한티재, 2015) 등을 예비적으로 읽어두는 게 좋겠다. 전체적인 조감도를 갖고서 인터뷰를 읽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다.  

 

 

생각해보니 아렌트의 인터뷰는 처음 읽은 게 되는데, 글보다는 역시 수월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명료하게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말은 말대로의 모호함을 갖고 있는데다가 아렌트의 어법은 다소 독특해서다(좀 익숙해지면 나아질지도). 그래서 생각만큼 편안한 독서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세계' 개념에 대해서, 그리고 평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성과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열네 살에 칸트를 읽었다는 애기, 자신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는 토로 등이 그에 대한 이해를 더 보강해주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읽으면서 손이 근질거렸던 책은 엘리자베스 영-브륄의 방대한 평전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인데, 이 책의 부제가 바로 '세계 사랑을 위하여'다. 그리고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집도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인간사랑, 2009)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기도 하다. 영-브륄의 책은 원서와 번역본을 모두 갖고 있지만 아마도 서고에 있는 모양으로 책장에서 찾을 수 없었다. '도음이 안돼!'라고 투덜거리는 걸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그런데 아렌트에게서 '세계 사랑'이란 어떤 의미인가? 인터뷰의 한 대목.

가우스: 당신은 '세계'라는 단어를 정치를 위한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아렌트: 맞아요. 세계는 정치를 위한 공간이에요.(59쪽)

군말이 필요없는 대목이다. 아렌트 철학, 아니 아렌트 정치사상의 핵심은 바로 '정치를 위한 공간'으로서 세계를 예찬하고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좀 유감스러운 것은 옮긴이의 말이었다.

정치는 혐오스럽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정치는 쉴 새 없이 곰팡이가 슬고 먼지가 쌓이는, 불결하고 악취 나는 안방과 비슷하다. 안방이 그렇다는 이유로 넓은 안방을 버려두고 비좁은 골방에 웅크린 채 구시렁거리며 사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상황이 그렇다면 먼지와 때를 묻힐 각오를 하고는 두 팔 걷고 안방에 들어가 곰팡이와 먼지를 제거해서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옳은 일 아니겠는가. 아렌트가 강조한 정치적 사유와 행위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198쪽)

그런 취지에서 옮긴이 말의 제목도 '정치는 안방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라고 붙여졌는데, 나로선 이런 '정치관'이 아렌트에 대한 오해로 여겨진다. 아렌트에게 혐오스러운 건 정치의 실종, 내지는 유사 정치이지 결코 정치 자체가 아니다. 

 

아무려나 그런 생각으로 아렌트의 말을 옮겼다고 하니까 좀 찜찜한 기분이 되는데, 결국 몇몇 대목에서는 불만도 갖게 되었다. 아렌트의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을 원어까지 병기하면서 '대중의 행복'(114쪽)이라고 옮긴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대중의 행복이란, 사람은 공적인 생활(public life)에 참여했을 때, 그러지 않았다면 그에게 닫힌 채로 남았을 인간적 체험의 차원을 혼자 힘으로 열어젖힌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여러 면에서 완전한 '행복'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뜻해요."(114쪽)라는 대목이다. 다른 모든 곳에서 'public'는 '공적' 혹은 '공공'이라고 옮겨놓고 이 대목에서만 '대중'이라고 옮긴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더구나 '공적 행복'이란 말은 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해제를 쓴 아렌트 전공자 김선욱 교수도 "가끔씩 대담의 생생함에 초점을 맞추려다 보니 일부 문장의 번역이 치밀하지 못한 부분들이 보이긴 하지만"(14쪽)이라고 지적하지만, '공적'을 '대중의'로 옮긴 건 '대담의 생생함'과도 무관해 보인다. 덧붙여, 내가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몇 대목을 적어둔다.

"그런데 내가 20대였을 때 그 질문은 어머니가 20대였을 때보다 당연히 훨씬 더 중요했어요."(35쪽)

원문은 "But the question was naturally much more important in the twenties, when I was young, than it was for my mother."(13쪽)이다. 여기서 '20대'로 옮긴 'in the twenties'는 '20년대에는'이다. 아렌트는 1906년생이므로 1920년에 열네 살이었고, 1926년에야 스무 살이 된다. 어렸을 때라는 건 20년대 초반을 뜻하는 것. "(그리고) 내가 철이 들었을 때"라는 말이 이어지는데, 그와 견주더라도 언급되는 시점은 20대 때가 아니라, 10대 때여야 한다.  

 

'정치와 혁명에 관한 사유'를 주제로 한 세번째 인터뷰에서 한 대목.

"오늘날 주요하게 대비되는 나라들은 사회주의국가 대 자본주의국가가 아니라,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들, 예컨대 스웨덴 대 미국이거나, 그렇지 않은 나라들, 예컨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대 소련이죠."(131쪽)

이 부분도 부정확하게 옮겨졌는데, 번역문만 보면 '스웨덴 대 미국'과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대 소련'이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것처럼 읽힌다. 핵심은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 대 그렇지 않은 나라'의 대비다. 그리고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에 스웨덴과 미국이 속하고, 그렇지 않은 나라에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소련이 속한다. 다만 스웨덴과 미국은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의 스펙트럼에서 두 축을 구성하고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소련이 '그렇지 않은 나라들'의 두 축이다. 원문은 "The chief distinction today is not between socialist and capitalist countries but between countries that respect these rights, as, for instance, Sweden on one side, the United States on the other, and those that do not, as, for instance, Franco's Spain on one side, Soviet Russia on the other."(84쪽)

 

이런 대목에서도 아렌트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본질적으로 사회주의는 그냥 계속 지속돼왔고, 극단적인 곳까지 치달아 자본주의가 시작된 지점에 도달했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 체제가 자본주의의 해결책이어야 하나요?"(131쪽)

원문은 "In essence, socialism has simply continued, and driven to its extreme, what capitalism began. Why should it be the remedy?"(84쪽) 역자는 이 문장을 연속적으로 해석했는데, 내가 보기에 'what capitalism began'은 has continued와 (has) driven이란 두 동사의 (공통) 목적절이다. 다시 옮기면 "본질적으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시작한 것을 그냥 지속해서 그 극단으로까지 몰고 갔다." 곧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극단화된 형태일 뿐이므로 결코 대안적 사회체제가 아니라는 얘기다(자본주의가 시작된 지점에 사회주의가 도달하다니?).

 

번역은 불가불 오역을 수반할 수밖에 없지만 평이한 문장에서까지 엉뚱한 실수가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옥에 티라고 하면 할 수 없지만, '대중의 행복'이란 말이 납득하기 어려워서 독후감에다 번역에 대한 불평도 같이 적었다...

 

16.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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