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근대문학 강의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의 <라쇼몬>을 읽었다. ‘라쇼몬‘은 1915년작으로 그의 문학적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다. 이전에 쓴 작품들이 다수 있지만 아쿠타가와 자신이 습작으로 간주했고 1917년에 펴낸 첫 작품집 제목을 ‘라쇼몬‘이라고 붙인 데서도 이 작품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비록 그의 이름이 문단에 알려지는 건 그 이듬해에 쓴 단편 ‘코‘가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으면서부터이지만(‘라쇼몬‘은 의외로 발표 당시엔 박한 평가를 받았다).
아쿠타가와의 전작을 살펴본 건 아니어서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나는 ‘라쇼몬‘이 그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 소설에 속하는 ‘지옥변‘(1918)이 화려한 작품이긴 하지만 ‘라쇼몬‘에 등장하는 하인(도적)의 도발적인 부도덕 선언에 비하면 현실과의 대결에서 퇴보한 느낌을 준다.
‘라쇼몬‘이 유쾌하다면(‘코‘와 함께 ‘라쇼몬‘을 아쿠타가와는 ‘유쾌한 소설‘로 분류했다) ‘지옥변‘은 비장하다. 하인(도적)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게 ‘라쇼몬‘의 결말인데 반해서 ‘지옥변‘의 결말은 주인공인 화가 요시히데가 딸을 먼저 보낸 자책감으로 자살하는 것이다. 권력자인 대신과 대범하게 맞서는 장면도 보여주지만 그의 삶은 비극으로 마감된다.
‘도적‘에서 ‘예술가‘로의 이행이 현실 응전력이란 면에서 퇴행이라면 단편 ‘갓파‘(1927)의 ‘광인‘은 그 최종단계다. ˝어느 정신병원 환자, 제23호가 아무한테나 하는 이야기˝로 설정된 이야기가 ‘갓파‘다. 설정 자체가 현실에서의 패배를 승인, 수용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유작 ‘어느 바보의 일생‘까지는 한 걸음에 불과하다.
내가 궁금한 건 ‘지옥변‘에서 ‘갓파‘ 사이에 반전의 계기가 없었던가 하는 점. 연보상으로는 ‘가을‘(1920)이나 ‘다이도지 신스케의 반생‘(1925) 같은 작품이 징검다리에 해당한다. 아쿠타가와 전집까지 훑어야 할까(범우사판까지 참조하면 대략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데 책을 못 찾고 있다). 당장은 그러한 이행을 가설적으로 제시하는 데 만족하려 한다. 다음주에는 시가 나오야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