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국문학 강의에서 요즘은 계속 줄리언 반스를 다루는데 오늘 읽은 건 2016년작 <시대의 소음>(다산책방)이다. 정확한 집필 배경은 알 수 없으나 주제상으로는 맨부커상 수상작인 전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2011)와 이어지는 것으로 읽었다. 둘다 시간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인데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내면을 다룬 전기소설로 이오시프 만델슈탐의 시집에서 제목을 따온 <시대의 소음>에도 시간/시대(time)는 핵심 화두다. 다만 전작과는 전혀 다르게 시간/시대에 맞서서 책임적 주체가 되는 것과는 다른 선택지를 탐색한다.

쇼스타코비치가 보여주는 건 그런 책임으로부터의 후퇴이고 주체성의 포기다(그는 스탈린 사후 최고 권력자가 된 흐루쇼프에 견주면 자신은 ‘벌레‘라고 말한다). 그는 작곡가로서 자존심은 유지하지만 부당한 권력의 간섭이나 탄압에 항거하지 않는다. 그에게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굴종적 주체다. 이 굴종적 주체라는 표현도 아이러니인데 내면과 외양 사이의 간극과 불일치를 표시하는 아이러니가 쇼스타코비치의 처세술이자 생존법이다. 그는 그를 통해서 ‘겁쟁이‘로서 스탈린시대의 숙청을 피해가며 노년까지 목숨을 부지한다. 반스가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에서 잘 보여주는 건 그런 겁쟁이의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내면이다(이 소설은 아이러니에 대한 탐구로서 훌륭하다).

반스가 참고한 책들 가운데 엘리자베스 윌슨이 쓴 쇼스타코비치의 평전은 강의가 끝나고 주문했다. 매강의가 끝날 때마다 그 보상으로 책을 구입하는데 주로 이런 류의 평전이거나 관련서다. 스탈린 시대 예술가 탄압을 다룬 책이라면 <시대의 소음>이 다른 책들에 비해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가령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상> 같은 책과 비교해보라). 대신 반스의 주안점은 다른 데 있고 나는 그것이 아이러니와 함께 예술(음악)의 존재 목적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음악은 인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음악 자체로 존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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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2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산책방)을 강의에서 다룬 김에 간단히 적었다(분량상 더 자세히 적지 못했다). 반스의 책은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 프랭크 커모드의 책과 원제가 같다. 지금은 절판된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문학과지성사)인데, 강의에서도 그와 관련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책으로는 반스의 에세이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다산책방)도 같이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주간경향(19. 04. 29) 시간의 파괴적인 힘 앞에 선 나약한 인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2011년에 ‘너무 늦었다’는 평을 들으며 줄리언 반스에게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안겨다준 작품이다. 앞서 세 차례나 최종심에 올랐으면서도 매번 고배를 마신 반스는 수상작 발표 전에 어떤 예감을 가졌을지 궁금하다. 물론 제목의 ‘예감’은 문학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원제를 그대로 옮기면 ‘종말의 예감’ 정도라서다.

종말은 시간이라는 지평에서의 사건이다. 곧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주어지는 불가피한 조건이다. 이 소설이 시간에 대한 성찰로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고 운을 뗀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의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는 문장을 향해 간다. 종말로 향하는 시간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무력화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시간 속에서 모든 인간은 늙어가며 삶의 성취는 마모되고 그 의미는 변질되어 간다. 세상을 ‘거대한 혼란’으로 몰고가는 시간의 파괴적인 힘 앞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패배자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반스가 제시하는 것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토니 웹스터의 사례다. 아직 본격적인 인생이 시작되기 전 학창시절에 토니의 패거리는 셋이었다. 그들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손목시계를 손목 안쪽으로 돌려서 차고 다녔다. 허세이긴 했지만 시간에 대한 저항의 상징성도 갖는다. 시간을 사적이면서 내밀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 사이에 전학생 에이드리언 핀이 끼어든다. 명민한 수재로 수업시간에 교사들과 당당하게 논쟁하는 능력자다. 카뮈와 니체를 읽은 에이드리언은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는 카뮈의 말을 복창하고 “역사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역사 허무주의적 견해를 제시한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회의주의적 견해는 얼마나 정당하며 어디까지 방어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재검토하게 만드는 것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다. 대학에 진학한 토니는 베로니카라는 여학생을 사귀다 헤어지는데, 베로니카는 다시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고 에이드리언은 토니에게 둘이 데이트를 해도 좋은지 묻는 편지를 보낸다. 토니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엽서와는 별개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악담과 저주를 담은 답장을 보내고 장기간의 미국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러고는 40년의 세월이 지난다. 

이제 60대가 된 토니는 그 사이에 결혼해 자녀를 두었지만 아내와 이혼했고 직장에서도 은퇴한 뒤 노후를 보내는 중이다. 그가 뜻밖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는 일이 이야기의 출발점인데, 그 유품은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500파운드의 돈과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다. 토니는 뒤늦게서야 에이드리언의 자살에 자신도 연관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건네받은 에이드리언의 일기 일부에서 에이드리언은 ‘축적’이란 용어를 써서 자신의 상황을 수학공식으로 표현하는데, 축적이란 토니의 표현으로는 ‘책임’에 해당한다. 자신의 과거를 잊거나 부인하던 토니는 비로소 충격적인 진실과 대면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자각한다. 기억의 서사로서 ‘종말의 예감’이 책임의 서사로 전화되는데, 이 책임이 파괴적 시간에 맞서는 인간적 대응이다. 


19. 0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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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5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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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5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녹색평론‘의 발행인 겸 편집인 김종철 선생의 새책이 나왔다. 뜻밖에도(너무 오랜만이어서) 문학평론집이다. ‘녹색평론‘ 이전의 문학평론가 김종철을 기억하는 독자에게는 (저자만큼은 아니겠지만) 감회를 갖게 한다(지난 세월을 같이 보냈다는 감회인가?). 무려 20년만에 새로 펴낸 문학평론집이니. 그럼에도 <대지의 상상력>이란 제목과 부제 ‘삶-생명의 옹호자들에 관한 에세이‘는 그대로 ‘김종철표‘ 평론집이란 걸 말해준다.

문학평론집으로는 이번이 세번째인데 앞서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과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1999)을 펴냈었다. 내가 기억하는 책들이기도 한데, 내가 알기로 김종철은 블레이크의 시를 전공한 영문학 연구자이기도 했다. 블레이크의 시를 번역했고 이번 평론집에도 블레이크론이 들어가 있다. 거기에 추가하자면 대중문학론에도 기여했다. ‘산업화시대의 대중문학‘인가 하는 제목의 평론이 내가 기억하는 대표 평론이다.

이번 평론집도 주로 영미문학 작가와 비평가들을 다루고 있는데, 디킨스나 리처드 라이트 등 강의에서 다룬 작가들이 포함돼 있어서 나로선 관심을 갖게 된다. 한국문학에 대한 글은 그간에 더는 쓰지 않은 것인지(가라타니 고진의 표현을 따르면, 문학을 떠난 것인지) 궁금하다. 삶과 생명을 옹호한 작가들의 계보는 더 이어질 것이기에(박경리 선생이 대표적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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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3 1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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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6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책이 새로 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소설이 아니라 요리책이다.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다산책방). 부제는 점잖게도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이다. 요즘 반스의 작품들을 강의하고 있어서(못 찾아서 다시 주문한 책들도 있다) 더 주목하게 된다(요리책이라면 하루키 스타일 아닌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시대의 지성, 줄리언 반스의 요리에 대한 에세이. 어려서 요리를 배울 기회가 충분치 않았던 줄리언 반스가 중년이 되어 뒤늦게 낯선 영역이던 부엌에 들어서서 ‘요리를 책으로 배우며‘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요리책을 낸 한국작가도 몇 있었던 듯하다(음식에 관한 책이라면 적지 않고). 반스 자신의 책들과 묶자면 앞서 나온 에세이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와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등이다. 반스의 소설들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도움이 되는데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도 그러한지 궁금하다.

PS. 오늘 핸드폰을 교체하고 처음 써본 페이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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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오늘 지방강의를 마치고 귀가중이다. 이번 한주만 지나면 이번 시즌도 하반기로 접어든다. 대학이라면 중간시험 끝나고 축제기간으로 들어가려나. 연휴가 껴 있기에 한숨 돌릴 수는 있겠다. 강의도 강의지만 강의 뒤풀이(보완)도 많이 밀려 있기에. 영국문학 강의와 관련해서도 디킨스의 책 몇권과 주문해놓은 새커리 평전 등을 읽어봐야 한다. 부분적으로라도.

게다가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도. 영국문학기행에서 그의 고향 스트랫포드(어폰에이번)를 방문하기에 관련하여 읽을 책들이 많다(아무리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정도로 관련서가 많긴 하다). 이번에 강의차 황광수 선생의 <셰익스피어>(아르테)를 읽었는데(공을 많이 들인 책이다), 책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파크 호넌의 <셰익스피어 평전>(삼인)이 다시 나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2003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이 지난해에 15년만에 나왔다(예전판보다는 표지와 장정이 나아보인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훑어본 책으로 특별히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그건 대부분의 셰익스피어 평전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다. 불확실한 대목이 많은 작가의 생애를 추정과 상상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게 셰익스피어 평전이니까. 그보다 나중에 나온 그린블랫의 평전 <세계를 향한 의지>(민음사)와 같이 읽어보는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영어판으로는 단권짜리 셰익스피어 전집도 저렴하게 나와있는데 이 참에 구입할까 망설이는 중이다. 1300쪽이 넘기에 분명 들고다닐 수도 없는 책이어서다. 그래도 1623년에 나왔던 전집 대신으로 꽂아놓는다면 의미가 없지는 않겠다. 더불어 몇 권의 관련서를 더 주문하려다 보니 대체 셰익스피어도 어디까지 읽어야 하는지 고민스럽다. 책은 많고 인생은 짧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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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한스 2019-04-2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00쪽 영어판은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건가요

로쟈 2019-04-24 00:51   좋아요 0 | URL
옥스포드대출판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