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공지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로쟈의 세계문학: 노벨문학상 수상작 읽기' 시즌1 강의가 지난주에 끝났다(http://blog.aladin.co.kr/mramor/6713174 참고). 시즌2는 4월과 5월에 8주간 진행되는데(매주 화요일 저녁 7:30-9:30이고, 석탄일인 5월 6일은 휴강이다), 이번엔 1968년부터 1983년까지의 수장작가 가운데 여덟 명의 대표작을 읽는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8&tolclass=0002&lessclass=0003&subj=F91496&gryear=2014&subjseq=0001&booking=). 세계문학 읽기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구체적 일정은 아래와 같다.

 

로쟈의 세계문학클럽 : 노벨문학상 수상작 읽기 2(1968~1983)

 

1강 4월 1일_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 1968(일본)

 

 

2강 4월 8일_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 1969(아일랜드)

 

 

3강 4월 15일_ 하인리히 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1972(독일)

 

 

4강 4월 22일_ 솔 벨로, <오기 마치의 모험> - 1976(미국)

 

 

5강 4월 29일_ 아이작 싱어, <원수들, 사랑이야기> - 1978(미국)

 

 

6강 5월 13일_ 엘리아스 카네티, <현혹> - 1981(불가리아)

 

 

7강 5월 20일_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 1982(콜롬비아)

 

 

 

8강 5월 27일_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 1983(영국)

 

 

14. 03. 02.

 

P.S. 한편, 이미 한 차례 공지한 바 있지만, 푸른역사아카데미의 월요강좌에서는 이달에 '로쟈의 러시아문학 특강: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진행한다(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144). 강의는 3월 10일부터 31일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7:30-9:3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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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민음사, 2003)를 다뤘는데, 번역본은 <내가 누워 죽어갈 때>(부북스, 2013)란 제목으로도 나와 있다(번역은 둘다 교정돼야 할 부분들이 있다). <소리와 분노>(문학동네, 2013)에 뒤이어 읽거나 앞서 읽으면 좋은 작품이다. <내가 죽워 누워 있을 때>는 작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개봉까진 아니더라도 DVD판 정도는 출시되길 기대한다.   

 

 

 

한겨레(13. 02. 24) 포크너의 미국 남부 가난한 집안 얘기

 

미국 현대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꼽히는 윌리엄 포크너의 대표작은 <소리와 분노>(1929)이지만 그가 연이어 발표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1930)도 ‘명불허전’에 속한다. 고투 끝에 완성한 <소리와 분노>와는 달리 포크너가 불과 6주 만에 단숨에 쓴 작품이기도 하다. <소리와 분노>의 난해함에 당혹했던 독자라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만만하지만은 않다. 15명의 등장인물이 들려주는 59개의 독백이라는 형식 자체가 독서의 긴장을 늦춰주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소리와 분노>가 미국 남부의 귀족 콤슨 가문의 몰락을 다뤘다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빈곤한 번드런 집안 얘기다. 이야기는 오남매의 어머니 애디 번드런이 병상에 누워 있고 목수이기도 한 장남 캐시는 마당에서 어머니의 관을 짜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둘째 아들 달과 셋째 아들 주얼은 자칫 어머니의 임종을 못 할 걸 알면서도 3달러를 벌기 위해 길을 나서고 아버지 앤스는 이를 만류하지 않는다. 앤스는 젊을 적에 바깥에서 일하다 한번 병을 얻은 적이 있다. 그 뒤에는 땀을 흘리게 되면 죽을 거라고 믿는 위인이다. 가장이 힘들여 일하지 않기에 모든 일은 아내 애디와 자녀들의 몫이 된다.

 

작품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독백에서 병상의 애디는 앤스와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회고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이 사는 이유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늘 주입했던 그녀의 아버지가 불행의 시작이었다. 애디는 고독에 갇혀 살았다. 남편 앤스도 그 고독을 깨뜨려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애디는 앤스가 말하는 사랑이 공허한 말의 껍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앤스에게 아이들을 낳아 주지만 자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믿는다. 그녀에게 남편 앤스는 이미 죽은 존재다. 매질을 하면서도 다른 가족 몰래 더 아낀 셋째 아들 주얼은 혼외관계로 얻은 자식이다. 그녀는 속죄의 의미로 앤스에게 딸 듀이 델과 늦둥이 막내아들 바더만을 낳아준다.

 

 

원하지 않은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애디는 자신이 죽으면 4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친정의 가족묘지에 묻어달라고 미리 약속을 받아낸다. 남편에 대한 애디식 복수다. 번드런 가의 가족묘지가 가까이에 있었지만 최소한 죽어서는 ‘번드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런 애디가 세상을 뜨자 남은 가족, 즉 남편과 자식들의 여정이 시작된다. 더운 여름날 애디의 관을 마차에 싣고 묘지가 있는 읍내까지 가는 열흘간의 간단치 않은 여정이다. 홍수가 난 강을 건너다가 큰 곤경을 치르고 착란을 일으킨 아들 달이 헛간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관이 불타버릴 뻔한다.

 

무모한 여정의 끝에 다리를 다친 캐시는 불구가 되고 달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정작 삽도 챙겨오지 않았던 아버지 앤스는 아내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번듯하게 의치를 해 넣고 ‘오리같이 생긴 여자’를 데려와 새엄마로 아이들에게 소개한다. 자식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봉변만 당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모든 걸 얻는다. “내겐 시련의 연속이군”이라는 그의 입버릇이 무색하다. <소리와 분노>에서와 마찬가지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도 아버지의 무능력, 어머니의 무관심과 편애가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고 불행으로 이끈다. 그게 인생이야, 라고 말하기엔 너무 부조리한 불행으로.

 

13.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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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월요일 아시아경제 지면에 실린 '리더의 서재에서'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일부 부정확하게 녹취된 부분이 있다). 인터뷰어는 윤승용 논설고문이었다. 서평 블로거란 직함으로 소개됐는데, 지면에는 누적 방문자가 3,200만명이라고 나가서 놀랐다. 아직 그 1/10인 320만명 정도다(일일 방문자도 2000명선까지 갔다가 지금은 1500명 정도다). 더 분발하라는 채찍 같기도 하다. 그리고 소개에서 '김현 이후 이론과 감성을 제대로 교직한 아름다운 문체의 문예비평가로도 평가받는'다는 대목은 멋쩍게도 필자가 신형철 평론가와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 인터뷰와 함께 추천도서 다섯 권이 소개됐는데, 몇 권은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코너에서 골랐던 책들과 겹치지 않도록 골랐다.  

 

 

 

아시아경제(14. 02. 10) [리더의 서재에서] 서평 블로거 로쟈 이현우

 

한국사회에서 나름 책을 좀 알거나, 독서인이나 인문교양인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로쟈’라는 이름은 이제 하나의 아이콘이자 전설이다. 책에 대해 궁금하거든  ‘로쟈에게 물어보라’라는 문구가 인터넷 검색어에 등장할 정도로 로쟈 이현우는 최근들어 인문학과 교양학계의 친절한 가이드이자 바지런한 멘토로 자리잡았다. 

 

서울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2004)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전문서평꾼으로 활동하는 바람에 강단학자의 길을 사실상 포기했지만 그는 넓디넓은 인문대중, 호모부커스의 숲에서 인문학의 향기를 전파하는 전도사역할을 기꺼이 해내고 있다. 그의 필명 로쟈가 근대 여성 공산혁명가 로자(Rosa) 룩셈부르크가 아닌 러시아 문호 표도르 도스토에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로쟈(Rodya)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은 이제 인터넷에선 상식이다. 그의 서평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은 요즘 매일 방문객 2,000여명, 현재까지의 누적 방문객이 320만명이나 될 정도로 그는 온라인상 최고의 파워블로거이기도 하다.

 

요즘도 책읽기와 강의, 서평쓰기로 하루하루를 숨가쁘게 살아가는 로쟈,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 인문학계에 요절한 평론가 김현 이후 이론과 감성을 제대로 교직한 아름다운 문체의 문예비평가로도 평가받는 로쟈를 아시아경제 도서실에서 만났다.

 

-어릴적부터 책읽기에 익숙했나?

▲아버님이 가난한 직업군인이었지만 책을 좋아하셨다. 집에는 세계문학전집 등이 있었는데 자연스레 이를 가까이 하게 됐다.

 

-중학시절엔 잠깐 과학자를 꿈꾸기도 했다던데?
▲중학교 2학년때 새로 부임하신 과학선생님이 암기식 공부가 아니라 실험실습을 강조한 열정있는 분이셨다. 그래서 한때 학교에 과학공부 붐이 분 적이 있었다. 나중에 수학에는 크게 소질이 없다는 걸 알고 포기했다.

 

-필명 로쟈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을 것 같다.
▲이현우라는 이름이 워낙 흔해서 필명을 고민하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죄와 벌>의 고민하는 청춘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 로쟈에서 따왔다. 그런데 어떤 아나운서는 저를 '노자(老子)'로 소개하는가 하면 근대 여성 공산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로자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는 어떤 글에선 '로자' 룩셈부르크를 '로쟈'로 쓴 경우도 봤다.

 

-최근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를 펴내는 등 러시아 문학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던데 러시아 문학의 매력이라면?
▲러시아에는 톨스토이, 도스토에프스키 등 이른바 대문호라할 큰 작가가 많다.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의 경우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훨씬 컸고, 실제로 그 기대에 부응한 측면이 많다. 이른바 문학극대주의현상이 러시아에서는 통했다. 

 

-현재 서평을 기고하는 매체는 몇 개나 되고 출강하는 곳은?

▲시사주간지 ‘시사인’, 한겨레,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서평지 ‘책&’ 등에 정기기고중이다. 기타 계간지 등에서 부정기적으로 청탁을 받아 글을 쓴다. 강의는 대학 강의를 비롯 전국 곳곳에 특강이 많다.

 

-어떤 계기로 서평가가 됐나.

▲2000년대 초반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서평을 쓴 게 시작이다. 당시 '이주의 리뷰'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여기에 서평이 뽑히면 상금 5만원이 나왔다. 책 살 돈이 필요한 나로서는 그 코너에 뽑히는 게 중요했다. 거기서 열심히 하다보니 팬이 생겼고 다음에 인터넷 카페 ‘비평고원’에 책 이야기를 썼다. 그러다 내 독자적인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2007년 한 일간지에서 나를  ‘인터넷 서평꾼’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뒤 서평꾼으로 알려지게 됐다. 

 

-서평은 비평과 어떻게 다른가.

▲비평은 독자들이 같은 책을 두 번 읽게, 다시 읽게끔 하는 것이다. 서평은 읽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는 자료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비평은 어떤 책을 이미 읽은 독자를 상대로 한다. 서평은 읽지 않은 독자를 상대로 한다. 넓게 보면 서평은 비평에 포함된다. 그런데 요즘엔 책을 읽은 독자들이 적어 비평을 읽는 독자들이 실종됐다. 상대적으로 서평의 역할은 커졌다.

 

- 서평의 역할은 무엇인가?

▲서평은 어떤 책을 읽고 싶도록 하거나, 읽은 척하게 하거나, 안 읽어도 되도록 해준다. 정보홍수 시대에 양서에 대한 일종의 감별사, 도선사 역할이다.

 

-서평을 쓸 때 원칙은.

▲내 주관을 적게 넣는다. 이건 지면 사정과 관련이 있는데 대개 서평 분량이 원고지 9~10장이다. 책 내용을 정리하고 나면 주관적인 판단을 섞는다고 해봐야 한두 문장이다. 다른 필자들은 주관적 느낌을 내용보다 더 중심적으로 다루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독자들이 책 내용을 느끼게 해주는데 주력한다. 개성이 없다거나 호오가 분명하지 않다거나 하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서평은 어떤 책을 골랐다는 것 자체가 유익한 정보다. 비평은 다르다. 어떤 책을 비평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는 정보가 안된다.

 

-독자들에 대한 영향력은 어느 정도라고 평가하나.

▲한 10부를 더 나가는 데는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웃음) 출판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면 서평이나 지면 책광고의 영향력은 많이 줄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고를 때 서평을 참고하려는 독자들의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독자들이 정보를 얻는 출처가 분산됐을 뿐이다. 내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 방문자는 여전히 하루 2000명 정도 된다.

 

-그 많은 서평을 쓰려면 엄청난 독서를 해야 할 텐데, 도대체 책을 얼마나 읽는지?

▲사실 책 읽을 시간이 많진 않다. 다만 강의하고 서평 쓰고 잠 자는 걸 빼면 책 검색, 책읽기, 서평 쓸 책을 고르는 일이 내 일상의 전부나 다름없다. 다행이 내가 주량이 적어 사교활동에 빼앗기는 시간이 적다. 

 

-책은 어떻게 읽나? 겹쳐읽기라는방식을 주장하던데?

▲책의 종류에 따라 읽는 방식이 여러가지다. 목차만 읽는 경우도 있고, 이동 중 차속에서 가볍게 읽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관심있는 분야의 경우는 관련 서적 수십권을 나란히 펼쳐놓고 읽는 이른바 '겹쳐읽기''병렬독서'라는 걸 할 수 밖에 없다. 즉 책을 읽다 새로운 개념이나 이론이 나오면 관련 책을 찾아보고 하는 식이다.

 

-책 사는데 상당한 비용이 들것 같은데?

▲무명시절에는 책값이 엄청나게 들어갔다. 아마 아파트 한채 값이 넘을 것이다. 요즘의 경우 출판사 등에서 참고하라고 매주 20~30권씩 우송돼 오는데 이밖에 개인적으로도 그만큼씩 사기도 한다. 내가 사는 책과 받는 책을 합하면 연간 2000권쯤 될 것이다. 책값만 월 200만원 이상이 들고, 재작년엔가 연말정산 할 때 보니 교보(*알라딘)에서 구입한 책값만 3,000여만원이더라.

 

-잘못된 번역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이 화제던데.

▲번역의 오류는 지적인 범죄나 마찬가지다. 저자의 본 뜻을 왜곡전달하기 때문이다. 여러 곳에서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다 송사에 휘말린 적이 있다.

 

-대학교수로서의 길은 포기한 건가?

▲처음에는 이른바 '곁다리 인문학자'라 할 서평을 한시적으로 할 계획이었다. 60대 서평가는 이상하지 않나. 3년 복무라고 생각했는데 2007년부터 잡으면 이미 3년을 초과해 장기복무하는 셈이 됐다. 좋은 후계자가 나타나면 전역하고 싶은데, 잘 안되고있다. 그리고 의무적인 학술논문 생산작업에 몰두해야하는 강단학자의 길도 내게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은.

▲제대로 된 비평을 해보고 싶다. 책을 자세히 음미하며 읽고 싶다. 그리고 서평 독자들을 어느 정도 규모로 만든 뒤 이 독자들과 함께 더 깊이 읽는 독서문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그런 독자들이 5천여명 이상 된다면 재미있을 뿐 아니라 인문독서 확산운동 차원에서 의미있을 것 같다.

 

<추천도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표도르 스토예프스키/민음사>
고교시절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은 게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계기였다면, 그의 이 대표작은 ‘내 인생을 바꾼 책’ 가운데 하나다. 누군가 그를 가리켜 ‘정신병동의 셰익스피어’라고 부른 것에 전적으로 동감. 인간이란 수수께끼에 대해서, 인간은 무엇으로 고통 받는가에 대해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웠다. 그에게 빚이 있다. 

 

◆영혼의 절규<바슬라프 니진스키/푸른숲>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용수 니진스키가 정신요양원에서 쓴 일기. 결국 그는 완전히 정신을 놓게 된다. 토리노 광장에서 학대받는 말을 끌어안고 울다가 결국 정신을 놓은 니체의 어떤 구절들과 함께 니진스키의 마지막 말들은 언제나 슬픔과 함께 고양된 감동을 안겨준다.

 

 

◆정본 백석 시집<백석/문학동네>
중고등학교 때 배운 국어 교과서에 백석은 없었지만 그를 읽은 뒤에 그가 없는 한국 근대시사를 상상하기 어렵다. 있더라도 아주 가난해보일 것이다. 시선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나왔을 때,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엔 눈이 푹푹 나린다”는 첫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울어도 좋을 뻔했다. 

 

◆백가쟁명<이중톈/에버리치홀딩스>

중국의 명강사 인문학자 이중톈의 많은 책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 중국 선진(先秦) 시대 제자백가의 사상에 대해서, 특히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등 네 가지 핵심 조류에 대해서 저자는 족집게 선생처럼 정리해준다. 두꺼운 분량임에도 아껴가면서 읽은 기억이 있다.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을유문화사>

대학시절 읽은 교양과학서 가운데 가장 압권은 역시나 도킨스의 책이었다. 진화생물학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면서, 다윈주의 세계관에 대한 입문서로도 읽을 수 있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다는 사실에 가끔 감동하는 건 이 책에 힘입은 바 크다.

 

14. 0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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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문화진흥원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 '독서인'의 독서에세이 코너 '독서카페'를 1년간 맡게 됐다. 이달에는 이덕일의 <정도전과 그의 시대>(옥당, 2014)를 읽은 소감을 적었다. 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되고 있지만(시청한 일은 없어서 조재현이 정도전 역을 맡았다는 것만 안다), 이덕일의 이 '역사특강' 자체가 드라마의 제작진과 출연진을 위한 특강이었다.

 

 

 

독서인(14년 2월호) 정도전과 그의 시대

 

역사란 무엇인가. <정도전과 그의 시대>(옥당)에서 역사저술가 이덕일은 ‘반성의 도구’라고 말한다. 새로운 말은 아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현재를 잘 살피기 위함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가 판이하게 다르다면 과거를 거울로 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란 반문도 가능하다. 어제의 경험이 오늘의 새로운 문제를 사고하거나 해결하는 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다. 역사는 언제, 어떻게 소용이 되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새롭고도 새롭지 않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시간이고 새로운 날들이지만, 또 한편으론 어제와 같은 일상의 반복이기도 하다. 반복은 교훈을 낳는다. 앞서 간 수레바퀴 자국을 가리키는 전철(前轍)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된다. 잘못된 길을 가다 엎어진 수레의 흔적은 우리에게 방향을 재조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반복적인 경험과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현명함이다. 반대로 똑같이 잘못된 길을 가다가 또다시 엎어짐으로써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이런 현명함과 어리석음도 역사 속에서 반복돼 왔던가.


이솝 우화에 전하는 얘기가 떠오른다. 전갈과 개구리 얘기다. 어느 날 전갈이 개구리에게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개구리는 전갈이 독침으로 자기를 찌를까봐 두려워하는데, 전갈은 만약 내가 널 찌르면 나도 물에 빠져 죽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킨다. 설마 자살과 같은 행위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믿고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태운다. 하지만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전갈은 개구리를 찌르고 결국 둘 다 죽게 된다. 죽어가던 개구리가 왜 찔렀느냐고 묻자 전갈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갈이야. 그게 내 본성이라고.”


이 우화의 교훈은 무엇인가. ‘타고난 본성은 어쩔 수 없다’ 정도로 정리될 수 있겠지만, 전갈의 ‘인지 부조화’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명 전갈의 이성은 개구리를 찌르는 행위가 자신의 죽음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안다. 문제는 그의 이성이 본성을 통제할 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개구리뿐만 아니라 전갈 자신도 죽음에 이르게 했으므로 이 부조화는 극복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방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성의 힘을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본성의 힘을 직시했다면 애초에 전갈은 개구리에게 강을 건너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대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기대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성의 힘을 더 키우는 것이다. 가령 본성을 제어하기 어렵다면 필요한 경우 독침에 보호대라도 씌워서 파국을 막는 것도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전갈과 개구리의 우화를 우리의 역사인식과 성찰에도 적용해봄직하다. 과거에 대한 인식과 성찰로서의 역사의식은 과연 우리의 타성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역사의식조차도 결국 반복되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인 것으로 보아야 할까. <정도전과 그의 시대>를 읽으며 줄곧 머릿속으로 헤아려보았다. 저자가 보기에 ‘왕도정치를 꿈꾼 비운의 혁명가’ 정도전과 그가 살았던 쉰여섯 해는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로 부족함이 없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그렇다. 외적으로 고려말은 대륙의 주인이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던 시기였고, 내적으로 고려사회는 극심한 빈부격차, 즉 사회적 양극화로 백성의 삶이 파탄에 이르고 있었다. 소수의 권문세족이 나라의 모든 재화를 독차지하고 있었기에 토지개혁 상소문에서 조준은 “불쌍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개천과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고 적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려왕들의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선왕과 충숙왕이 시도한 개혁정치가 실패하자 사정은 더 악화된다.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 공민왕이 등장해 망해가는 고려를 되살리기 위한 최후의 시도를 모색한다. 그는 ‘농토문제와 백성들의 억울함을 분별해 잘못을 바로잡는 기관’이라는 뜻의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지만, 개혁대상인 친원파의 반발로 실패한다. 이후 공민왕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신돈을 앞세우게 되는데, 신돈은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도록 하는 혁신적인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며 민심을 얻는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민심이 오히려 신돈의 앞을 가로막는다. 신돈은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 양쪽으로부터 공격받았고, 그가 백성들로부터 ‘성인’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자 기분이 틀어진 공민왕은 신돈을 내친다. 저자는 공민왕이 신돈을 제거한 것이 가장 큰 과오이며, 이로써 고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고 평한다. 신돈의 실패는 고려왕들이 중심이 돼 시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끝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개혁이 실패한다면 무엇이 남는가. 혁명이다. 신흥사대부는 고려 왕실의 처리와 토지개혁 방법론을 두고 온건개혁파와 역성혁명파로 나뉘게 되는데, 온건개혁파의 거두가 이색이었다면 정도전과 조준이 역성혁명파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조선이라는 새 왕조의 건국 과정은 혁명적인 개혁사상을 품고 있던 정도전이 변방의 무장 이성계를 찾아가 의기투합함으로써 첫발을 내딛게 된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결합, 그것을 저자는 “극심한 양극화에 시달리던 고려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가진 지식인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무장의 만남”으로 규정한다. 정도전의 혁명사상이 이성계의 군사력과 만나게 된 셈인데, 이때가 1383년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10년 뒤 고려는 패망하고 조선이 들어선다.


고려말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극심한 양극화는 소수가 부를 독점하고 있어서 빚어진다. 고려말의 권문세족은 정치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를 등에 업고 사익 추구에 몰입하여 경제권력 또한 장악한다. 소수의 권문세족이 정치, 경제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이에 따라 자영농의 대부분이 몰락해간 것이 고려사회를 붕괴로 내몬 당시 상황이었다. 저자는 “한 사회가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체제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정도전의 일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메시지라고 말한다. 이것이 전철이다. 우리는 우리가 끄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잘못된 길에서 제때 돌릴 수 있을까.

 

14. 02. 13.

 

 

P.S. 정도전 관련서가 여럿 나오고 있는데, 조유식 알라딘 대표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휴머니스트, 2014; 푸른역사, 1997)이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고, 김탁환 작가도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전2권, 민음사, 2014)을 선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조선 건국 내지 개창 과정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최근에 구해서 본 건 김당택 교수의 <조선왕조 개창>(전남대출판부, 2012)이다. 학계의 주류적 시각과는 다른 입장을 내놓고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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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껜가 부산 인디고서원에서 '로쟈와 함께 읽는 인문학'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다(확인해보니 봄이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과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를 빌미로 삼은 자리였는데, 강연에서 얘기했던 내용과 질의응답이 정리돼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계간 <인디고잉>(39호)에 실린 걸로 돼 있다. 지면에서는 확인하지 못해서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겠다. <인디고잉>은 최근에 41호까지 나왔다. 품이 많이 드는 게 잡지인데, 대단한 열정이자 지속성이다!..

 

 

 

인디고잉(13년 여름) 청년들이여, 망상하라 
 
우리가 초청한 작가는 ‘로쟈’라는 이름으로 서평을 쓰시는 이현우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국내에 지젝을 소개한 첫 번째 책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쓰셨으며, 이는 선생님을 초청하기로 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함께 읽어오기로 한 책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외에도 선생님의 학문적인 전공이신 러시아문학 및 세계 문학에 대한 책인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등이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만남의 장은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지젝 독자로서의 지젝 철학과의 만남에 대해 들려주셨다. 국내에 지젝이 소개된 시기인 90년대에는 문화이론 입문이 대학가에서 많이 읽히던 분위기였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선생님도 주요 문화이론이나 철학에 두루 견문을 넓히셨다. 공부를 해나가던 중에, 라캉이나 헤겔 철학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2000년대 초반 지젝의 철학을 접하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셨다. 선생님이 지젝에 관심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라캉과 헤겔을 읽게 해준다는 데서 지젝 철학의 의의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젝의 철학 작업은 그러하다. 지젝의 저서 읽기는 선생님에게 삶의 변화를 가져다준 책읽기 중의 하나였다고 하신다. 


선생님은 겸손하거나 소심한 작가의 문학보다는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과대망상증 환자 같은 작가들의 문학,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하기 위해 애쓰는 문학을 좋아하신다고 하셨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청년들은 ‘잉여’라 스스로를 칭하고 자조하며,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나는 될 수 있는 것이 없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 청년세대에게 선생님은 ‘망상’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돈키호테의 경우, 제정신을 차리며 현실을 자인하는 순간, 삶의 의미가 없어지고, 왜소해지는 반면, 망상을 가지고 나설 때 무언가를 하게 되고, 무언가가 되어간다. 물론 현실에서 패배하고 좌절할 수도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차원을 넘어서서 더 고양된 존재로 만들어가는 에너지는 망상에서 나온다. 

 

망상은 주체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좌표가 정해져 있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반면 ‘주체’로서의 삶은 실체를 비우고, 모든 가능성에 열려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체로서의 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피곤하면 자야한다. 반면 ‘주체로서의 나’는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피곤함을 모르며, 러시아의 어떤 소설에서는   그러한 인간을 ‘특별한 인간’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적 이상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네오’와 같이 우리가 새로운 세계의 구원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주어진 몫이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이념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인간은 어찌 보면 미친 인간이지만, 미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젝은 우리의 자기와 실체로서의 우리 자신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기에 ‘틈새’가 있는 것이며, 그것의 이름을 ‘주체’라고 말한다. 인간이 틈새를 가진 것은 필연적이고, 운명적이다. 우리시대 청년들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실체로서 뿐만이 아니라 주체로서도 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하며, 우리 안의 광기와 계속해서 화해해나가야 할 것이다.

 

 

Q 지젝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 시대에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과학이 발달한 시대의 윤리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의 윤리는 원시적 도덕 감정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인데 그것도 변형될 필요가 있어요. 새로운 기술, 새로운 과학, 새로운 앎은 항상 우리의 윤리적인 반응, 태도를 거기에 맞게끔 변형할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화한 상황은 우리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마이클 센델의 책에서 등장하는 화차문제도 마찬가지죠. 그 문제를 접한 사람들은 한 명보다는 다섯 명의 목숨을 살리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직접 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져요. 그 한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리는 생각을 할 때 본능적인 저항감이 있어요.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스위치를 누른다거나 선로를 바꾸는 방식으로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 대해서는 별로 저항감이 없어요. 원시시대에는 그런 식으로 사람이 죽질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는 도덕적 본능이 작동하질 않아요.하지만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피터 싱어의 주요한 주장은 도덕적 직관을 신뢰하지 말라는 겁니다. 도덕적 추론을 따르라고 말하죠. 저는 그것도 어떤 새로운 문제에 대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적응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사일 버튼 하나를 눌러서 수천 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시대에 우리는 거기에 맞는 거부감, 거리낌 같은 것 대신 이성으로 제어를 해야 하고, 그렇게 제어하도록 훈련을 받거나 해야 합니다.

 

 

 
Q 선생님은 세계문학이 단순히 어떤 ‘책’이 아니라 ‘운동’이며, 민족적인 것을 극복하고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글이 끝날 때, 아직까지 세계문학은 이념으로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어째서 그러한지,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그것이 실현된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지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A  괴테가 얘기한 세계문학은 국민문학의 지양으로서의 세계문학입니다. 이념형의 중간단계, 혹은 빈약한 중간단계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세계문학은 앞으로 도래할 어떤 것이라고 얘기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세계문학’이라고 용어를 사용하다보니 혼동의 여지가 좀 있죠. 세계문학운동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가 현재 서로 경합하는 국민국가의 단계에서 세계국가나 세계 공화국을 지향하듯이, 세계문학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어떤 단계이고, 우리가 그 단계로 애써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계문학운동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성을 보여주거나 그런 요소들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있는 것이고, 그런 작품들이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거죠.

 

또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 공간을 비유적인 의미로 사막이라고 얘기했는데요, 이런 공간이 달성되려면 우리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소속이란 게 분명히 있죠. 그것과 거리를 두면서 존재할 때, 우리 안에서 사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교통공간이죠. 한국인이긴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이고, 저쪽도 일본인이지만 일본인이 아니어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저는 그 공간이 우리가 상상만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그런 만남이라던가 정체성 같은 게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Q 저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저를 자극하거나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망상들을 하며 저를 토닥이기도 했는데요. 어떻게 보면 망상이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망상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 괴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A  돈키호테 얘기를 좀 하자면, ‘맘부리노의 투구’라는 게 있습니다. 저는 이게 좀 특이한 광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일반적인 광기라면 저것은 그냥 이발사의 세숫대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게 어떻게 세숫대야냐. 저건 맘부리노의 투구다. 너는 눈이 삔 것이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할 텐데 돈키호테는 좀 다릅니다. 그 상대성을 인정하죠. “너에게는 세숫대야로 보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투구로 보인다”는 거죠. 저는 ‘망상’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미친다고 할 때,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찮은 존재로 보일 거라는 걸 다 알지만 나는 이런 망상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거죠.  
 
Q 책에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우리다”라는 말을 우리가 의존해야할 대타자는 없다는 말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조금 풀어서 설명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 그래서 구체적으로 청년들이 사회적 상징계의 좌표를 옮기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실천적인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A  대타자의 경우는 하수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도 하나의 대타자인데요. 과거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대의’라는 대타자의 수행자를 자임했어요. 대문자로 역사라고 쓰는 것, 역사의 수행자라는 거죠. 그래서 잔혹한 고문이나 숙청 같은 것도 다 대타자의, 역사의 명령이라며 했습니다. 지젝은 역설적이지만 그 형식 자체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대타자가 있고, 우리는 하수인이라는 형식은 보존하되, 대타자만 지우는 거예요. 자끄 데리다가 말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같은 겁니다. 신이 존재하는 선행은 나중에 보상 같은 것도 있죠. 천국에 가면 정산을 해주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 없이도 우리가 똑같이 선행을 할 수 있어요. 마치 누가 시켜서 하는 것처럼요. 다만 그 자체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공산주의 이념이 가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는 겁니다. 돈키호테에서도 ‘나는 저 세숫대야가 맘부리노의 투구로 보인다. 그렇게 믿겠다’라고 믿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징계의 좌표를 바꾼다는 것은 경계선을 다시 긋는 것입니다. 보편성의 발견이지요. 그 말은 다르게는 ‘보편적 적대’를 다시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 보편적 적대에서 다른 여타의 적대는 무효화 되는 것이죠. 그런 식의 선을 다시 긋는 게 실천입니다. 그런 것을 요구하는 거죠. 지젝의 경우는 소수자 운동이나 정체성 운동 같은 것에 반대합니다. 보편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 내부의 더 세분화 된, 더 협소한 어떤 정체성을 고집하기 때문인데요, 지젝은 그게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천이라는 건 여러 가지가 가능합니다. 어떤 체제나 움직임을 중단시킨다는 것 자체도 좌표를 바꾸는 일이에요. 닉슨시대의 중소수교 같은 것도 돌파라고 볼 수 있죠. 남북 간에도 가능하죠. 개성공단이 그런 제스쳐에요. 다르게는 인터뷰집 제목이기도 하지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죠. 기존의 좌표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을 옮기고, 가능성의 좌표를 바꾸는 겁니다. 그러면 바뀌는 거예요.

 

행위의 또 다른 모델로 바틀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바틀비는 어느 날 변호사가 시키는 일을 거부하죠. 나중엔 변호사가 이사를 가도 사무실에 계속 머무르다가 부랑자 구치소 같은 데로 사람들이 데려가죠. 거기서 먹는 것도 거부해서 굶어죽습니다. 이 ‘바틀비적 제스처’라는 표현을 지젝이 씁니다. 바틀비는 자본주의의 수혜자 밑에서 일을 하고 그 세계 안에 종속되는 것에 대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빠져나오죠. 단지 거부하고 물러나는 겁니다. 그런 게 일종의 행위의 모습이 될 수 있죠.

 

바꾼다는 게 반드시 눈에 보이는 뭔가를 동원하고, 힘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들도 가능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내지는 비폭력 무저항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가능해요. 유명 대학교를 공개적으로 자퇴한 학생이 한명 있었죠? 그것도 일종의 바틀비적 제스쳐입니다.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겠다는 거죠. 

 
Q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무리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사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의 몸(생계)과 이성의 간극 속에서 삶으로 그 중요성을 연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시몬 베이유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전체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유하며 자본주의 속에서 타자성을 회복한 진정한 주체로서 스스로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A  분명히 현실적인 제약이라는 게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모든 가능성을 다 폐쇄시킨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요즘은 여간해선 굶어 죽지 않죠. 우리가 바틀비처럼 전면적인 거부 제스쳐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거예요. 다만 그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저는 거기에 대타자의 카운슬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몬 베이유가 될 수 있냐고 물으셨죠? 우리 안에는 성자가 있고, 그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해요. 인간에겐 어떤 비속한 동물성 같은 것도 있지만 특이하게도 성자성도 있어요. 우리는 자신보다 더 지체가 낮은 사람의 발에 키스하거나, 종교 의식에서 발을 씻어주는 그런 거룩한 행동을 할 수도 있어요. 그게 불가능한가요? 그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문제죠. 그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해요. 어쨌든 저는 그게 우리의 선택과 결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그 결단의 자유, 권리는 축소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라캉 식으로 얘기하면, 모든 욕망은 다 타자의 욕망입니다. 나의 본원적 욕망이라는 건 사실 넌센스죠. 본원적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모방이 가능해요. 성자의 욕망을 모방하면 성자가 되고, 거지의 욕망을 모방하면 거지처럼 되는 거죠. 내 안에는 뭔가 있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들여다보면 공백 같은 겁니다. 뇌 과학에서도 불교에서도 얘기하는 거지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텅 빈 공허에요. 주체로서의 자기발견이란 그런 겁니다. 진정한 뭔가가 자기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Q 선생님께서 과연 어떤 작품이 세계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러시아문학을 전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학자나 사상가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문학만이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시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문학 극대주의자’ 입니다. 문학은 전체에 관한,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앎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관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문학전공자가 왜 철학에도 관심을 갖느냐는 질문 자체가 어떤 특이한 견해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철학사 책을 보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철학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중요한 인생의 문제를 다루면 철학자입니다. 수단은 상관없어요. 반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그리스 기원의 철학 개념은 어떤 논변을 갖고 있는 걸 철학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사소해도 상관없어요. 관점이 다르죠. 그러니까 철학, 문학이 서로 구분되고, 영역이 구분되기 때문에 침범하면 안 된다는 건 한 가지 견해 혹은 편견이라는 거죠.

 

그 다음으로 어떤 문학이 세계문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번역문학이어야 해요. 가령 영어로 써졌다면, 영어가 아닌 언어로 번역 됐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세계문학 공간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면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언어가 서로 호환되는 공간, 내지는 그 두 언어 사이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어떤 간극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번역문학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계문학이라는 건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그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죠. 심지어는 우리가 세계문학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을 하고, 의미부여를 하는 과정이 소통의 과정이고, 소통이 좌절되는 과정이기도 한데, 그 사이에서 세계문학에 대한 경험이라는 게 만들어 진다고 생각해요.

 

또 세계문학의 공간은 아직까지는 도래하지 않은 공간이기도 해요. 실제 우리가 접하게 되는 건 조금 부실한, 많은 부분이 훼손된 그런 공간인데, 그런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게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셰익스피어 햄릿만 하더라도 수십 종의 번역본이 있어요. 각각을 보면 또 놀랄 정도로 많이 다르게 되어있어요. 셰익스피어는 좀 심한 경우에요. 그래서 여러 종류를 읽어보시기를 권하는데, 굉장히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관적으로 개입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어쩌면 세계문학을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문학이라고도 생각해요.(출처 [인디고잉 39호] 인디고 정원에서_청년 참여형 강의|작성자 인디고잉)

 

14.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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