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에 실린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이번주에 나온 브룩 원렌스키 랜포드의 <에덴 추적자들>(푸른지식, 2013)이 리뷰감이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이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려고 했던 여러 학자, 지식인, 혁명가 등을 소개하고 있는 책으로 광범위한 자료조사와 재기 넘치는 필체가 결합된 수준 있는 논픽션이다.

 

  

 

중앙일보(13. 09. 28) 에덴은 있다! 낙원을 향한 그들의 열망

 

이 책은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이 실재한다고 믿고 찾아 나선 각양각색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이다. 책을 읽다가 에덴동산에 대한 ‘상식’은 뭔지 궁금했다. 마침 최근에 나온 크리스틴 스웬슨의 『가장 오래된 교양』이 생각나 펼쳐봤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다는 에덴이 지구 어디에 있었는지는 예로부터 적잖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중 일부의 사람들은 발 벗고 찾아 나서기까지 했다. 바로 ‘에덴 추적자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GPS로 찾을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닌 이상 에덴의 위치에 대해선 정확히 알기 어렵다. 『가장 오래된 교양』의 저자는 그럼에도 “성서 본문에 있는 잘 알려진 지명들을 근거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덴이 오늘의 이라크에 있었다고 믿는다.”

‘에덴 추적자들’은 그 정도 추정에는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일단 창세기의 묘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모호하다.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나와 그 동산을 적신 다음 네 줄기로 갈라졌다”라며 네 강줄기의 이름으로 비손과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를 차례로 거명한다. 오늘날에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은 터키에서 시작해 이라크를 지나 페르시아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문제는 오늘날엔 존재하지 않는 비손강과 기혼강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사 이미지

 

여기서 크게 두 파가 나뉜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기혼강과 비손강도 그 근처에 있다고 믿는다. 강이 아니라 샘이나 운하가 아니었을까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비손강과 기혼강에 더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강 이름도 바뀌었을 것이기에 성서에 나오는 이름에 집착하면 안 된다고 본다. 창세기에 나오는 강 이름이 그저 ‘세상에서 가장 큰 네 강’을 가리킬 뿐이라는 1세기 로마시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말을 좇게 되면 에덴은 반드시 중동에 있을 필요가 없다.

비손강은 갠지스강으로, 기혼강은 나일강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면, 에덴은 말 그대로 지상 어딘가에 있는 곳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지어 에덴이 실제 장소일 수도 있고 은유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난감한 일이지만 에덴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이런 에덴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많은 흥미로운 사례 가운데 저자는 감리교 목사이면서 보스턴대 학장이었던 윌리엄 워런을 먼저 소개한다. 1859년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인간이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는 충격적인 주장에 맞서고자 각오를 단단히 한다. 강연 때마다 서두에 “혹시라도 모인 사람 중에 자신을 동물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동물이 사람이 될 때까지 토론을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일침을 놓던 워런도 그런 투사였다. 비교신화학을 전공했지만 진화론자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워런은 과학의 언어를 배워서 창세기의 내용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가 주장한 에덴 후보지는 북극이었다. 당시 북극은 탐험가들의 손길이 닿지 않아 아직 미지의 지역이었고 워런의 ‘에덴 북극설’은 대중의 북극 환상에 편승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1985년에 펴낸 『낙원을 찾다!』에는 북극을 중심에 놓은 고대 세계의 지도까지 수록했고 많은 독자들이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북극이 정복되고 북극 열병이 사그라지면서 그의 에덴 북극설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워런보다 좀더 신빙성 있는 주장을 내놓은 학자들도 물론 있었다. 『낙원을 찾다!』에 추천서를 써주기도 한 영국 옥스퍼드의 아시리아학 교수 아치볼드 세이스도 그 중 한 명이다. 어학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그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쐐기문자에 대한 독해를 바탕으로 에덴이 ‘좋음’이란 뜻의 고대 도시 에리두 근처에 세워진 동산으로 추정했다.

플랜테이션 농장 비슷한 곳으로 농장 가운데 특별한 나무가 있었다고 하며, 세이스는 이에 근거해 성서에 나오는 지식의 나무는 소나무, 생명의 나무는 야자과식물이라고 주장했다. 기혼강과 비손강은 고대의 인공 운하였을 거라는 게 그의 견해다. 그는 노아의 홍수가 실제로 있었던 재앙이며, 에덴동산 이야기도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로 믿었다.

에덴 찾기는 기본적으로 진화론과 과학의 도전에 맞서 신의 창조론을 방어를 위한 성격을 띤다. 1991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47%가 여전히 지구와 사람을 신께서 아주 특별하게 창조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창세기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믿음은 신앙의 지표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 속에서 화해를 모색한 한 과학교사의 말은 왜 여전히 에덴이 관심사가 되고 있는지 시사해준다.

진화론을 안 믿는다는 건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는 신앙이 아이들을 망치는 게 아니라 삶에 아름다움을 더해준다고 믿는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독자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과 함께 사색의 정원으로 인도하는 책이다. 아, 파라다이스란 말은 원래 페르시아어로 담이 둘러진 정원을 뜻한다고 한다.

 

13. 09. 28.

 

 

P.S. 에덴에 대한 가장 자세하면서도 강력한 문학적 묘사는 물론 밀턴의 <실낙원>에서 읽을 수 있다. 조신권, 이창배 교수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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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끝나는 다음주 목요일부터 노원평생학습관에서 '로쟈와 만나는 고전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노원에서는 매년 한두 차례씩 강의를 맡아 많은 분들과 '구면'이 됐다('재회'가 기대된다). 일정 안내 포스터를 옮겨놓는다.

 

 

13.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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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공지다. 10월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7:00-9:00에 이진아기념도서관에서 독서문화특강 프로그램 ‘책을 알고 문화를 배우는 生生 특강’이 진행된다(http://www.sdmljalib.or.kr/community/community_01_view.asp?board_seq=notice&srt=0&seq=15335&page=1&search_word=&search_string= 참조). 그 첫 강의를 맡았는데(카뮈 강의 이후에는 '독서와 사회', '니체 철학'을 주제로 한 강의가 이어진다) 일정은 아래와 같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1. 10월 2일_ <이방인>

 

 

2. 10월 16일_ <시지프 신화>

 

 

3. 10월 23일_ <페스트>

 

 

4. 10월 30일_ <전락> 

 

 

13. 0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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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22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애초에는 감정이란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려고 했지만, 분량상 경제와 협상에서 감정의 문제를 다룬 몇 권의 책을 살펴보는 데 그쳤다. 더 넓게 다루자면, <감정의 인문학>(봄아필, 2013) 같은 책이 더 보태질 수 있다...

 

 

 

책&(13년 9월호) 감정과 행동

 

무엇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개인적 차원은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도 우리가 더 나은 판단과 의사결정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흔히 어떤 상황에서 인간이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경제적 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대한 가정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과 일상 경험은 많은 경우 우리를 지배하는 건 이성이 아닌 비이성, 혹은 감정이라는 걸 알려준다. 이 감정은 합리적 사고와 객관적 인식을 왜곡시키는 장애물일까? 감정을 배제하고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9월에는 행동의 동인으로서 감정(비이성)이 어떤 역할을 하며, 이에 대한 대처법은 무엇인지 경제와 협상 관련서 몇 권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행동경제학은 경제학에 심리학을 접목시킨 새로운 연구영역으로 주류 경제학과는 달리 인간이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걸 전제한다. 행동경제학의 대략적인 윤곽을 소개해주는 책이 댄 애리얼리의 <경제심리학>(청림출판, 2011)이다. 우리가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장기적인 목표보다는 단기적인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가령 어떤 병에 걸렸을 때 의사의 처방이 채소를 많이 먹고, 물을 많이 마시고, 하루에 몇 킬로미터씩 걸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게 행동하면 분명 건강이 나아질 거라는 건 모두가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장은 안락과 편의를 선택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만약 우리가 그만큼 이성적인 존재라면 수백만 장의 헬스클럽 회원권이 사용되지 않은 채 만기를 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습관이나 데이트 상대의 선택, 동기의식, 기부 행위, 애착행동과 복수욕 등 다양한 비이성적 행동을 검토한 뒤에 저자가 얻어내는 교훈은 두 가지다. 우리는 비이성적인 성향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과 이러한 비이성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 그에 따라 저자는 직관을 맹신하지 말고 우리의 사고와 논리의 한계를 인식하고서 그에 맞게 대응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이성적인 특성이 보통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기에 예측가능하다는 점이다.


댄 애리얼리의 베스트셀러 <상식 밖의 경제학>(청림출판, 2008)은 바로 그러한 비이성적 행동의 패턴과 함정을 다룬다. 한 대학에서 이루어진 실험을 보자. 컴퓨터 화면 왼쪽에 있는 원을 마우스를 이용해서 오른쪽의 네모상자에 포개놓는 일을 참가자들에게 주문하면서 각기 다른 시장규칙을 적용했다. 5분 동안 이 따분한 일을 하는 대가로 첫 번째 그룹에는 5달러를, 두 번째 그룹에는 50센트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에는 물질적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저 시간을 좀 내달라고만 부탁했다. 결과는? 5달러를 받은 참가자들은 평균 159개의 원을 끌어다놓았고, 50센트를 받은 참가자들은 평균 101개의 원을 끌어다놓았다. 반면,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은 참가자들은 가장 열심히 작업을 해서 평균 168개의 원을 끌어다놓았다. 돈이 아니라 명분이 오히려 더 효과적인 행동의 원인으로 작용한 사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이 인센티브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계산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희망적인 부분이다.

 

 

 

월스트리트의 ‘멘탈 트레이너’ 로버트 코펠의 <투자와 비이성적 마인드>(비즈니스북스, 2013)은 금융 거래에서 우리의 비이성성을 어떻게 극복한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이익은 내고 손실은 줄이고 자본을 늘려라’라는 게 투자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합리적 투자에서도 비이성적 행동과 그러한 행동을 유발하는 뇌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한 대학에서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돈을 벌 때 두뇌가 경험하는 감정은 사랑에 빠졌을 때 갖는 감정과 똑같다고 한다. 참가자들에게 종이 지폐를 세게 하고 두뇌를 촬영한 결과 사랑에 빠졌을 때 반응이 오는 부분과 똑같은 곳이 활성화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이 사랑이라는 또 다른 고통 완화제의 대체재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실험 결론 이상의 암시를 던져준다고 할까.


하버드대학교 협상연구소의 저자들이 펴낸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감정을 흔들어라>(한국경제신문, 2013)도 어떤 종류에서의 협상에서건 감정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유용한 감정을 자극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감정은 관심사를 돌려놓거나 관계를 악화시키는 등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협상에서 위대한 자산이 될 수도 있다. 협상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을 높여주고 상호관계를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인정, 친밀감, 자율성, 지위, 역할 등 5가지 핵심관심에 집중함으로써 긍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최철규, 김한솔의 <협상은 감정이다>(쌤앤파커스, 2013)는 내 것을 많이 챙기는 것을 목표로 한 분배적 협상(협상1.0)과 공정하게 나누는 것을 지향하는 통합적 협상(협상2.0)을 넘어서 상대의 감정과 심리적 만족감을 극대화하는 가치 중심의 협상을 ‘협상3.0’이라고 명명한다. 요컨대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감정도 만족도도 만족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13.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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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프레시안 books'에 실린 '3인 1책 수다'를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906183704§ion=03 참조). 화제의 만화, 윤태호의 <미생>(위즈덤하우스, 2012-13)을 읽고 좌담을 나눴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미생>은 9권으로 완결되었다(나는 7권까지 읽었다). 마저 읽어볼 참이다...

 

  

 

프레시안(13. 09. 06) '설국열차' 남궁민수는 알고 '미생' 장그래는 몰랐던 것?

 

(...)

 

김용언 : 전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갈등이 튀어나올 때마다 굉장히 공감하면서 읽다가도 언뜻언뜻 '아 이건 픽션이지'라고 거리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어요. 영업3팀 같은 경우 팀원들의 사생활을 절대 안 보여줘요. 정확하게는 사생활이 없지요. 다른 팀의 사원들 같은 경우 근무 중 트위터를 한다든가 애인과 통화하며 영화 약속을 잡는 장면이 조금 부정적으로 다뤄지잖아요. 장그래가 "난 그런 거 할 시간 없는데"라고 한 마디를 던진다든가. 그럴 때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게 되더라고요. (웃음) 사실 그처럼 짬짬이 딴 짓하고 한숨 돌리는 게 직장생활의 일상인데, 장그래 이 녀석은 왜 딴죽을 거는 거지! 하면서요.

물론 영업3팀의 특성상 늘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야 하고 심지어 '리세터'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매우 바쁩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렇게 지나치게 과로하면서 사생활을 가질 자유도 없는 삶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잖아요. 왜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 앞에서, <미생>은 사실 침묵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며 그 모든 과정에 성심을 다해 내 시간을 바친다는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그걸 당연시하는 어조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있었습니다.

 

 


이권우 : 또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로는 여성 직원인 선차장이 있지요. 맞벌이 부부 중 아내가 느낄 수밖에 없는 고충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요. 퇴근 후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순번을 정하는 것 때문에 남편과 다투고, 남편이 승진하면서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하다'며 선차장의 퇴직을 요구하는 부분들이요. 직장 생활의 가장 내밀한 고충을 솔직하게 묘사하지요. 윤태호 작가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작가로 유명한데, <미생>에서도 직장 여성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긍정적이고 우호적입니다. 안영이나 선차장도 그렇고, 재무팀의 깐깐한 여성 부장님도 그렇고요.

 

<미생>의 만화적 특성에 대해서도 첨언하고 싶어요. 사실 만화에서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게 아주 어려워요. 다른 유명 작가들의 만화를 보면 얼굴의 현실감이 별로 안 느껴지지만, 윤태호 작가의 만화에선 정말 사람 같거든요. 예를 들어 미국에서 온 스티브 부장 같은 경우, '프레시안 books'에도 글을 자주 쓰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의 이정모 관장이 모델인데, 보면 딱 알아볼 수 있어요.(웃음)

또 장면 묘사도 남다릅니다. 옛날 만화는 공간이 평면적인데, 여기선 카메라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입체적으로 묘사하지요. 만화가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은 단연 IT 영업팀 박 대리 부분입니다. 2권 37쪽에서 박대리 등에 날개가 돋는 장면은 압도적이죠. 소설 같았으면 이런 결정적 순간에 온갖 수사학을 동원했어야 할 텐데, 만화에서는 박 대리의 심리적 변화를 묘사할 때 이런 날개를 묘사하는 것만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남깁니다. 그렇게 곳곳에 뛰어난 만화적 기법이 돌출되기 때문에 독자들을 강하게 매료시키는 측면이 있어요. 다만 개인적인 불만이라면, 의성어를 너무 많이 쓴 게 아닌가 싶어요. 예능 프로 자막을 보는 느낌이 들거든요. '저벅저벅'하는 발소리는 지나치게 자주 나와요.

 



김용언 : 전 그런 발소리 자체는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큰 사무실에선 소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요. 사장님 어디 가냐, 옆 팀에서 뭐하냐 하는 정보들이 그런 소리들로 전달되니까요. '큰 인물'의 등장이라든가 어떤 사건 발생의 전조쯤으로 의성어를 강조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임원급 쯤 되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지요. 오히려 위압감을 주기 위해서라도 발소리나 말소리를 크게 내는 편입니다. 안영이의 경우, 또각또각 소리 나는 구두를 신고 다니다가 상사한테 꾸중을 듣고 바로 단화로 바꿔 신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전 2권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인턴 P.T 시험에 합격한 후배들에게 오차장이 검은 넥타이를 사준 다음, 시청 앞 쌍용차 해고자 복직 투쟁 텐트로 데려가 해고자의 영정 앞에서 인사를 시킵니다. 아주 뜻밖의 전개였고 그만큼 인상적이며 그 안에 담긴 의미도 분명하지요.

"근로자로 산다는 것. 버틴다는 것.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아가는 것…."

하지만 이 부분에서의 생경함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현우 : 작가적 개입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이후에 이 해고자들과 연관되는 장면도 없으니 상당히 이례적이긴 하죠. 전 <미생>을 보면서 상사맨들의 일상과 함께 상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처음 알았어요. (웃음) 동창 중에 상사에 다니는 친구들도 잘 못 만나거든요. 이젠 생각도 관점도 사용하는 용어도 다르니까 대화 자체가 힘들어지죠.

김용언 : 장그래가 무역 용어를 못 알아듣고 힘들어하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이현우 : 이게 직장인 독자들에게 어필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세계가 있는 거지요. 자신들만 이해할 수 있는 애로사항이 존재하는, 바깥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문턱이 존재하는 고유한 영역이요. '우리는 팀원,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는 팀워크의 정서가 존재하는 영역. 그걸 <미생>이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아쉬운 점은, 한 번도 원 인터내셔널 바깥의 시선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즌 2가 예고되었다고 하니 좀 성급한 의문일 수 있는데, 원 인터내셔널이 유일한 삶의 조건처럼 설정되어 있어요. 퇴사한 오차장의 선배들이 그러잖아요. 회사는 전쟁터지만 바깥은 지옥이라고, 회사 나올 생각 하지 말라고. 그 대사가 직장인들의 무의식을 건드린다고 생각하는데, 한편으론 그게 위험한 인식의 공유이기도 합니다.

이권우 : 오차장이 퇴사 결심할 때 바로 현실이 튀어나오죠. 지금껏 회사를 통해 아파트 융자금을 저리로 처리할 수 있는데 이제 높은 이자의 융자금 계정으로 바꿔야 합니다. 결국 부인이 직원가로 살 수 있는 가전 제품을 전부 사라고, 보너스 받는 다다음 달까지는 일하라고 말하잖아요.(웃음) 워낙 대기업 중심 사회다보니, 그곳에서 나가 자리 잡는 것도 대단히 어렵구요. 중소기업을 차렸더라도, 살아남기가 쉽지 않겠지요.

이현우 : 기업 사회라는 용어도 있지요. 자본주의의 속성상 어쩔 수 없겠지만, 한국 사회가 어느 순간부터 기업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기업 바깥에 사는 게 어려워졌어요. 바깥이 지옥이니까, 어떻게든 기업 내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아까 나온 쌍용차 분향소에 가는 에피소드가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기업 사회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바깥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아쉽습니다. 미생, 즉 생존 자체가 지상과제이며 '바깥은 없다'라는 구도 자체를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게 놀라운 겁니다.

이권우 : 자영업자들이 잠깐씩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의 실패가 좀 더 철저하게 그려졌다면 이들이 조직에 연연하게 되는 이유가 더 잘 설명될 텐데 말이죠.

이현우 : 외부가 차단되어 있으니까 직장 생활에 대한 성찰적 거리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거기서 살아남느냐, 탈락하느냐의 구도만이 지배하게 돼요. <미생>이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그 전제에 대한 불만인 건데요, <미생>이 그 부분까지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권우 : 윤태호 작가가 <미생> 시즌 2에서 '장그래, 설국 열차를 타다'를 그릴 수도 있지요.(웃음)

이현우 : 기업 사회를 비판적으로 다룬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기업을 아이스하키에 비유합니다. 그야말로 전쟁터에요. 아이스하키에는 반칙이 허용되는데, 반칙을 저지르면 몇 분간 퇴장당하는 페널티가 주어져요. 그 다음 다시 나올 수 있으니까, 경기 내에서 반칙이 권장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아이스하키 링크 바깥은 다른 세계잖아요. 거기엔 다른 규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거죠. 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 직장 내 문화가 바깥 세상으로까지 확산되는 그 상황 자체입니다. 하버마스를 흉내내자면 '생활세계의 기업화'라고 해야 하나, 아까 주인공들에게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주인공들의 사생활은 '준비'로만 보여줍니다. 출근 준비.

김용언 : 엑셀을 배우라는 말을 듣자마자 컴퓨터 학원을 끊고, 외국어가 필요하다고 하면 바로 영어학원을 끊지요. 물론 직장 생활에 필요한 스킬을 습득하는 건 직원의 당연한 의무지만 그 끊임없는 연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좀 힘들더라고요.

이현우 : 기업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 대한 비판 의식이 없다면, 직장인들의 애환을 위무하는 데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김용언 : 원 인터내셔널이 닫힌 생태계인데, 그 생태계가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죠.

이권우 : 시즌 1이 그 닫힌 생태계의 생리를 보여줬다면, 시즌 2는 아마 '지옥에서 살아남기'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

 

13.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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