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에 실린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의 <플루토크라트>(열린책들, 2013)를 다룬 것인데, '슈퍼 리치', 신흥 갑부들을 다룬 책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현단계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필수적인 책이다. 자본주의 이행기의 러시아를 다룬 저자의 전작, <세기의 세일: 러시아의 두번째 혁명 이야기>도 바로 주문했는데, 이 또한 소개되면 좋겠다.

 

 

 

중앙일보(13. 10. 12) 1대 99의 시대 ? 아니 0.1대 99.9의 시대

 

플루토크라트? 일단 제목부터 확인하자. 그리스어로 부(富)를 뜻하는 ‘플루토’와 권력을 의미하는 ‘크라토스’의 합성어로 ‘부와 권력을 다 가진 부유층’을 가리킨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승자로 부상한 0.1%의 신흥 갑부들이다.

이른바 ‘글로벌 수퍼리치’는 어떤 이들이고, 또 그들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움직이는가. 언론인이자 산업 전문가인 저자는 플루토크라트의 세계를 놀랄 만큼 생생하고 정밀하게 보여준다. 곧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구체적인 데이터이다”라는 주장에 충실하다.

지금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간단한 데이터를 보자. 2005년을 기준으로 빌 게이츠의 재산은 465억 달러이고, 워런 버핏은 440억 달러다. 두 사람의 재산 합계는 미국 전체 인구의 하위 40%에 해당하는 1억 2,000만 명의 재산 총계 950억 달러에 육박한다. 예외적인 억만장자들이라고만 치부할 순 없다. 그들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수퍼엘리트 계급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플루토크라트와 그 나머지’로 양분됐다.

새로운 플루토크라트의 등장 배경은 무엇인가. 레이건과 대처 시대의 부자 감세다. 레이건 행정부는 최상위 한계세율을 70%에서 28%로 삭감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은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더 가속화했다. 기술혁명과 세계화, 그리고 워싱턴 컨센서스의 등장이 세계경제를 변화시켰다.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본격 편입되면서 이들 신흥 국가들이 첫 번째 도금시대(鍍金時代)를 겪는 동안 서구사회는 두 번째 도금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 쌍둥이 도금시대의 수혜를 최상층이 독점한 결과가 플루토크라트의 시대를 만들었다. 미국의 중산층이 차이나 신드롬에 밀려 점점 일자리를 잃어가는 동안에도 수퍼엘리트들은 천문학적인 소득을 올리며 부를 축적했다.

과거 부자들이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기에 부자였다면 오늘날 플루토크라트들은 ‘일하는 부자’다. 그들은 부를 소비하는 것뿐 아니라 창조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수퍼엘리트가 되기 위한 중요한 자질이 시차 적응이라고 할 만큼 그들은 전세계를 누비고 다닌다. “우리는 아내보다 비행기 승무원들을 더 잘 아는 그런 사람들이죠.”라고 말하는 부류다.

또한 자본주의를 일종의 해방신학으로 받아들여서 자유로운 시장이 곧 자유로운 인간의 조건이라고 믿는다. 더 이상 개별 국가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시민이고자 한다.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들이 글로벌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플루토크라트는 공익활동에도 열성적이어서 ‘박애 자본주의’의 실천자이기도 하다. 자본가는 선행을 실천해야 하고 선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진정한 자본가가 되어야 한다는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은 이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사실 빈부격차라면 원래 있었던 거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현재의 격차는 유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새롭다. 또 사정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미국의 경우, 1940~70년대 사이에는 부유층과 나머지 사이의 소득 격차가 줄어들었다. 상위 1%의 소득비중이 1940년에 16%였던 것이 70년에는 7% 아래로 떨어졌다. 빅3 자동차 기업과 노조와의 대타협으로 중산층의 소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중산층의 소득은 정체된 반면 최상층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1980년 미국 CEO의 평균소득이 근로자 소득의 42배였지만 2012년에는 380배로 치솟았다. 트리클 다운(Trickle Down·낙수효과)은 없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년밖에 지나지 않은 2010년에도 세계경제는 전체적으로 6%나 성장했지만, 이 기간 소득 증가분의 93%는 상위 1%가 차지했다. 파이는 커지더라도 많은 사람의 몫은 오히려 더 줄어드는, 말 그대로 승자독식사회다.

흥미로운 것은 그 상위 1%도 분화돼 있다는 점. 부의 독점과 빈부격차의 확대에 대한 문제제기가 월가 점령시위의 이슈이기도 했던 ‘1 대 99 사회’이지만, 저자는 그 1% 내에서도 0.1%의 갑부들과 그 아래 0.9%의 부자들은 차원이 다르다고 말한다. 83년과 2000년 사이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부자 목록에서도 상위 25%는 4.3배 더 부유해진 반면에 하위 75%는 2.1배 부유해지는 데 그쳤다. 5천만 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진 ‘초고액 순자산 보유자’는 2011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 8만4700명이 있는데, 그 중 2700명은 5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최상층과 중상층의 분리와 격차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백만장자들이 스스로 억만장자의 뒤를 따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있어야, 슈퍼엘리트들이 민주주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믿음이 무너진다면? 계급전쟁은 1% 대 99% 사이에서가 아니라 0.1%(억만장자) 대 0.9%(백만장자) 사이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전망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99%는 이 계급전쟁의 구경꾼에 불과한 것인가.

플루토크라트를 대놓고 비판하진 않지만, 부의 차이가 문화적 차이를 낳고 사회적 연대를 가로막는다는 저자의 지적은 온당하다. 사회적 분열과 적대 속에서도 과연 플루토크라트는 그들의 부와 힘을 유지할 수 있을까. 현단계 자본주의가 어디까지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 ‘나머지’들이 탐독할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13. 10. 12.

 

 

 

P.S. <플루토크라트>의 번역은 막힘이 없지만, 적어도 한 곳은 오역 같다. "보수적인 세계관을 가진 젊은이를 뜻하는 'young fogey'라는 표현도 <스펙테이터>가 1984년에 만들어낸 신조어다."(99쪽)에서 '1984년에 만들어낸 신조어'는 '<1984>식의 신어'가 아닐까. 소설 <1984>에 나오는 '뉴스피크(New Speak)' 말이다. 한편, 슈퍼리치를 다룬 책들은 이미 여럿 소개돼 있다. <플루토크라트>에다 더 얹어서 읽어볼 수 있겠다.

 

 

 

동시에 유례 없는 경제적 불평등이 지불해야 할 대가에 대한 책들도 필독해볼 만하다. 래리 바텔스의 <불평등 민주주의>(21세기북스, 2012), 원제가 '승자독식의 정치학'인  제이콥 해커와 폴 피어슨의 <부자들은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21세기북스, 2012), 그리고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열린채들, 2013) 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시안의 '3인 1책 수다'를 발췌해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1011140448§ion=03). 매달 진행해온 '수다'의 마지막 차례였는데,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유행의 시대>(오월의봄,2013)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동녘, 2013), 두 권을 거리로 삼았다. 바우만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2002년 <자유>(문성원 옮김, 이후 펴냄)가 처음 출간된 이래 꾸준히 주요 저작들이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사회학자다. 그는 1925년 유대인으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직접 체험한 뒤 홀로코스트, 마르크스주의, 현대성 등의 주제에 천착하며 깊이 있는 사유를 발전시켰다. 야만의 시대인 20세기를 관통한 뒤 예측 불가능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자의 통찰력은, 인간을 규정하는 조건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일깨운다. 

 

 

프레시안(13. 10. 11) 가난은 '차이'일 뿐? 문제는 '지식'이야, 바보야!

 

(...)

 

이현우 : 바우만은 포스트모더니티나 포스트모던이라는 시대 규정 용어 대신, 자신이 만든 '유동하는 근대(리퀴드 모더니티)'라는 신조어를 사용합니다. 이 시리즈의 책을 많이 펴냈고, 국내에도 <액체근대>(이일수 옮김, 강 펴냄), <유동하는 공포>(함규진 옮김, 산책자 펴냄), <리퀴드 러브>(조형준·권태우 옮김, 새물결 펴냄) 등 다수가 소개됐어요. 포스트모던이라 통칭되는 시대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 사회학적인 공로가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단어가 한국어 상으로는 '모더니티 이후' 정도의 의미 말고는 말해주는 게 별로 없는데, '리퀴드 모더니티'는 이미지로 강력하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잖아요.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사는지에 대한 그림이나 조감도를 갖고자 할 때, 유력하게 참고할 만한 사회학적 통찰 아닌가 싶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말고 국내에 이만큼 지속적으로 소개된 사회학자들이 거의 생각나질 않아요. 개인적인 독서 경험으로는 리처드 세넷 정도입니다. <뉴캐피털리즘>(유병선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유강은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장인>(김홍식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투게더>(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 등이 출간됐죠. 바우만과 세넷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비슷한 시기를 각자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건데, 이 두 사람이 자주 소개되고 읽힌다는 건 그만큼 잘 읽히게끔 쓴다는 뜻일 것이고, 저자의 문제의식이 우리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있다는 거겠죠.

이권우 : 포스트모던에 대한 기존 해설들이 체제의 연장이나 성숙을 강조했다면, 바우만은 '거대한 전환'이라는 강한 이미지를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쪽인 듯합니다. 그래서 '유동하는 근대'가 좋은 개념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를 특징짓는 개념어를 찾으려 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잖아요. 바우만의 '유동하는 근대'는 신자유주의의 단말마적 비명이 체제 종결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우리에겐 다른 낙수 효과가 필요하다

이권우 : 그나저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제목이 참 좋습니다.(웃음)

김용언 : 부제도 강력해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이현우 : 이 책 서두에도 실린 성경 구절에서 따온 부제죠.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복음 13장 12절)

사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 나오는 불평등의 현실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 같지만, 통계로 다시 확인했을 때 여전히 놀랍습니다. 1대 99도 미화된 겁니다. 0.1대 99.9의 사회라고 봐야 하죠. 바우만도 초반에 통계를 인용하고 있지만, 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부를 합하면 가난한 25억 명의 재산을 전부 합친 것의 두 배에 달합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시대가 없었어요. 통상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불평등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자각이 우리에게 부족하지 않은가 싶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통계상의 조작까진 아니더라도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표현 중에, 상위 20퍼센트와 하위 20퍼센트 등의 문구를 떠올렸습니다. 그 문구 속에서 상위 20퍼센트 내의 차이가 지워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내부에서도 엄청난 빈부의 격차가 존재하니까요. 아주 극소수의 과두 재벌과 일반적인 부유층과의 낙차마저도 상당히 커요.

이권우 : 이번에 정부가 증세개편안을 처음 내놨을 때 난리가 났죠. 연봉 5000만 원부터 증세하려 했던가요?

이현우 : 처음엔 3450만 원부터였어요. 그 정도 소득을 중산층으로 분류하려는 것 같은데 실질적으로는 생계유지에 가까운 층이죠.

김용언 : 방금 말씀하신 상위 20퍼센트 내의 낙차 때문에 생기는 기이한 분위기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보기엔 충분히 많이 번다고 느끼는 사람들조차 <조선일보> 등의 매체를 통해 "먹고 살기 힘들다", "교육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등의 발언을 서슴지 않아요. 그 발언을 읽는 '중산층', 즉 3450만 원의 연봉을 받는 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이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엔 집 한 채 있으면 나는 중산층이라고 믿었고. 한국에선 부동산을 통한 인생역전이 가능했기 때문에 언젠가 '위쪽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다 사라졌어요. 상위 20퍼센트 사람들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는 마당에, 자신이 결코 '중산층'이 아니며 99.9퍼센트 저 아래쪽에 속해 있다는 것을, 그 현실과 꿈의 괴리를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권우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22쪽에 흥미로운 문장이 나옵니다. 바우만이 <설국열차>를 본 걸까요?(웃음)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이 시대가 얼마나 강고하게 불평등의 구조를 체제화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현우 : 바우만의 첫 번째 문제의식은 유례없는 불평등, 부의 편차이며,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입니다. 바우만은 '거짓 믿음'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유포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지요. 우리도 많이 속아 넘어간 이데올로기인데, MB정부 때의 '낙수 효과' 주장이 틀렸다는 걸 지난 5년 동안 배웠잖아요. 기업의 이윤이 늘어나고 부유층의 소득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중산층과 서민에게까지 그 효과가 재분배될 것이라 주장했지만, 그 같은 경제학적 이론이나 예측이 통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49쪽에 보면, 바우만은 "아무런 증거가 없이도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암묵적 전제들' 네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경제성장'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죠. 지금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로, 키워드만 창조경제로 바꾼 채 '성장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용언 : '착한 성장'이라는 말도 나오더군요.(웃음)

이권우 : 암묵적 전제 두 번째가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입니다. 즉 '소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리라'죠.

이현우 : 세 번째는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네 번째가 "경쟁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입니다.


 

(...)

 

이현우 : 개인적으로 이 정도 수준의 책은 고등학생들도 읽고 토론하는 단계까지 가야 뭔가 변화의 계기가 마련될 것 강습니다.

이권우 : 결국 낙수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낙수'시킬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해야겠네요.

이현우 : 비판적인 인식의 낙수 효과, 성장신화의 낙수 효과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의 낙수 효과가 필요하지요.

이권우 : 이런 상황에서 대안적 세력이 시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명백한 자료, 낙수 효과의 허위에 대한 통계 자료를 보여주어도 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건, 우리의 광범위한 대안적 세력들이 게으르거나 설득력이 부족하거나 둘 중 하나겠죠.

이현우 :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적들의 관리가 뛰어나요. <유행의 시대> 65쪽에 보면 그와 연결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다투면 부자들이 신이 나서 손을 비벼댈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이 문장 바로 위쪽, 리처드 로티의 <미국 만들기>(임옥희 옮김, 동문선 펴냄)에서 바우만이 인용한 부분을 볼까요.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게 목표이다. 미국인의 하위 75퍼센트와 전 세계 인구의 하위 95퍼센트가 민족적, 종교적 적개심, 성적인 관습에 관한 논쟁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것이다. 가끔 일어나는 짧은 유혈 전쟁을 포함하여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의사사건(pseudo-events)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주의를 자신들의 절망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은 별로 두려울 일이 없을 것이다."

빈부의 차이, 제도 불평등에 대한 인식에 대한 관심으로 옆으로 돌리는 것. 한국 사회의 경우 지역주의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과거 기득권층의 최대 발명품이 지역주의라고 봐요. 여전히 여론 시장을 장악해요. 상징적인 게 지역주의 아이콘이었던 분이 지금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고 계시잖아요. '우리가 남이가'주의가 여전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게 우리사회의 불편한 진실 같습니다. 이 역시 가난한 사람들끼리 다투도록 만드는 조작의 일종이죠.

이권우 : 지역주의에 명백하게 덧붙일 다른 요소는 남북간 적대적 공존이지요.

이현우 :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내부식민지'가 그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문화주의'의 아름다운 허상

이권우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소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리라'라는 맹목적인 믿음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바우만이, <유행의 시대>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취하는지 살펴볼까요.

이현우 : <유행의 시대> 41쪽에 비슷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오늘날의 문화는 사람들이 셔츠를 갈아입거나 양말을 갈아 신는 것만큼이나 자주, 빨리, 능숙하게 자신의 정체성(또는 최소한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을 바꾸는 능력을 습득하도록 요구한다."

당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무언가를 소비한다면. 이런 식의 소비주의가 말하자면 유동하는 자기 정체성이며, 경제적 논리와 완벽하게 부합하게 됩니다.

이권우 : 경제성장을 촉진하려면 소비가 당연히 이뤄져야 합니다. 둘은 쌍생아 격인데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75쪽을 인용하겠습니다.

"행복 추구는 곧 쇼핑이라는 것, 행복은 상점 진열대에서 찾아야 하고 상품 진열대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오늘날 이것은 자명한 공리이다."

그리고 바로 옆 페이지 74쪽을 보면, "그러한 믿음들은 현재의 소비자와 장차 소비자가 될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화려한 상품들(행복한 삶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는 보상들)의 향연에 매일 초대받지만 결국은 매일 같이 배제되고 참석을 거부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와 원한이 생겨나고 쌓이는 것을 막지는 못 한다."

그런데 이 자체의 흐름을 왜 거부하지 못할까요. 자신들이 배제되고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쌓이는 분노와 원한이 왜 지금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할까요.

(...)

 

13. 10. 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시사IN(317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궁리, 2013)를 '오래 두고 읽는 책'으로 골랐다. 오래전에 구한 원서를 방치해두고 있었는데, 조만간 먼지를 털어봐야겠다. <시적 정의>는 국내에 먼저 소개된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누스바움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게 해준다.

 

 

 

시사IN(13. 10. 12) 공무원이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얼마 전 지방도시에 내려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러시아문학 고전에 대한 강의를 했다. 통상 그런 연수 프로그램에는 독서의 효용이나 방법에 대한 강의가 포함되곤 하지만, 러시아문학에 대한 강의 요청은 의외였다. <죄와 벌>이나 <안나 카레니나>를 진지하게 읽는 공무원이라고 하면 좀 특이하게 생각하는 게 우리 사회의 통념 아닐까.

 

 

그런 강의의 서두에 인용했더라면 좋았을 책이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궁리)다.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이 부제니까 더할 나위 없다. 미국의 저명한 고전학자이자 법철학자인 저자는 ‘공적인 시’가 필요하다는 월트 휘트먼의 말에 공감하며 우리의 공적 삶에 문학적 상상력이 개입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옹호의 근거는 간명하다. 직역하면, “그것이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러한 상상력을 함양하지 않는다면 사회정의로 이어지는 필수적인 가교를 잃게 될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카고대학의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을 강의한 경험에 토대를 둔 이 책에서 누스바움은 주로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을 사례로 활용한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교장선생님 그래드그라인드는 교육자이자 경제학자로서 계산만을 중요시하고 감정과 상상력 따위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문학은 인간의 복잡한 삶을 ‘도표 형식’으로 나타내려고 애쓰는 정치경제학의 적이다. ‘쓸데없는' 이야기책은 사람들은 공상에 빠뜨리고 비합리적 행동으로 내몰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경제적 합리성이란 관점에서 볼 때 문학과 문학적 상상력은 무용하고 위험하다.


하지만 그래드그라인드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누스바움은 이야기책이 공적 합리성 교육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공적 영역이란 무엇인가. 재판관이 판결이 내리고 입법자가 법을 제정하며 행정부에서는 다양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공간이다. 소설에서는 특이한 인물로 비치는 그래드그라인드식의 공리주의적 관점과 경제적 비용편익 분석이 이 공적 영역에서는 오히려 표준화돼 있다. 국책사업 대부분이 점수화된 사업타당성 조사를 통해 결정되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문학이 이런 영역에서 과연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핵심은 그래그라인드식 시각이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 보게 해준다는 데 있다. 공리주의적 계산과 경제학적 사유는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내면적 깊이, 그리고 희망, 사랑, 두려움 따위를 보지 못한다. 의미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반면에 문학, 특히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과 관계를 맺게 하고, 그들의 계획과 희망, 공포를 공유하면서 삶의 복잡한 일들을 풀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에 동참하게끔 한다. 그래그그라인드의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이 ‘형편없는 경제학’이라면, 소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래드그라인드식의 경제학은 ‘형편없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내가 속한 사회적 계급의 구성원만이 아닌 다른 동등한 인간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며, 노동자들도 복잡한 사랑의 감정과 소망 그리고 풍부한 내적 세계를 가진 사려 깊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놓치는 과학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대단히 미흡하며 부적절한 과학일 수밖에 없다. 숫자와 도표로 채워진 보고서만 읽고 판단하는 대신에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소설을 읽는 공무원들을 응원한다.

 

13. 10. 09.

 

P.S.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공무원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소설을 읽어야 한다. 되도록 '저명한 작가의 문학작품'이면 더 좋겠다. 최근 뉴스기사에 따르면 문학 독서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데이트나 입사 면접에 가기 전에 뭘 하는 게 좋을까. 체호프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의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과학저널 <사이언스> 최신호에는 어떤 글을 읽는 것이 공감과 사회적 지각 능력, 감성지능을 발달시키는 데 좋은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미국 뉴욕 뉴스쿨의 심리학자들인 에마누엘레 카스타노 박사와 데이비드 키드 연구원은 18~75살의 독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각각 저명한 작가의 문학작품, 베스트셀러에 오른 대중소설, 그리고 진지한 논픽션의 일부를 읽게 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의 얼굴 표정을 담은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지 등을 구별해내는 5개 테스트를 받도록 했다. 실험 결과 문학작품을 읽은 그룹의 점수가 다른 두 그룹에 견줘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중소설을 읽게 한 그룹은 아무것도 읽지 않은 사람들과 비슷한 점수를 기록했다. 대중소설은 주로 사람들의 이기심이나 욕망을 다루는데다 작가가 흥미로움을 더하려고 작품의 전개 과정을 특정 방향으로 통제하고 있어 독자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반면에 등장인물의 삶에 대해 섬세하고 길게 탐구하는 문학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해당 인물의 처지에 서서 생각하게 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력이 높아진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한겨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한겨레 북리뷰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간추렸다. 천병희 선생과 박종현 선생의 번역본을 참고했는데, 정암학당의 플라톤전집판으로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연구서로는 양승태 교수의 <소크라테스의 앎과 잘남>(이화여대출판부, 2013)이 유익하다.

 

 

 

한겨레(13. 10. 07) 네 자신을 알라? 너의 무지를 알라!

 

고대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단연 소크라테스의 재판일 것이다. 제자 플라톤을 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인 만큼 ‘바로 이 한 장면’으로 꼽아도 무리가 아니다. 아테네 시민 세 사람에 고발당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가 펼친 변론을 기록한 것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어떤 죄목이고,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자신을 방어하는가.

말투에는 개의치 말고 자기가 하는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만 유의해 달라고 배심원단에 당부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고발에 대한 변론을 전개한다. 직접적으로 그를 법정에 서게 만든 이들이 ‘나중의 고발인들’이라면 그보다 먼저 자신을 고발한 이들은 ‘최초의 고발인들’이다. 이 최초의 고발인들은 그를 모함한 불특정 다수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하늘에 있는 것들을 사색하고 지하에 있는 것들을 탐구하며 사론(邪論)을 정론(正論)으로 만든다”고 비난해왔다. 하지만 그런 비난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아테네에서 지혜로운 자로 명성을 얻은 소크라테스이지만, 그 지혜란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의 무지에 대한 앎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한 친구가 델포이의 신전에 가서 물은즉, 아테네에는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가 없다고 하기에, 소크라테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자 정치가와 시인과 장인들을 찾아 나선다.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들은 모두 지혜롭지 못했다. 단지 지혜로워 보일 뿐이었다. 그는 가장 지혜로운 자란 “지혜에 관한 한 자신이 진실로 무가치한 자라는 것을 깨달은 자”라는 걸 깨닫는다. 바로 소크라테스 자신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의 경구는 실상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의미다. 철학이란 바로 이 무지에 대한 앎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삶은 온전히 신탁에 바쳐진 삶이다. 인간의 지혜란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게 신탁의 메시지이기에, 지혜롭다는 평판을 듣는 이라면 누구든지 찾아가서 그의 무지를 일깨워주었다. 그렇듯 신에 대한 봉사로 분주하여 소크라테스는 나라 일이나 집안일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나중의 고발인들에 따르면 그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하지만, 젊은이들이 그를 흉내 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캐묻고 다니는 바람에 죄를 덮어쓴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신을 아예 믿지 않는다고까지 고발당하지만 신에 대한 봉사에서 소크라테스를 넘어설 자도 드물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는 대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믿음으로써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고소는 근거가 없다.

여기까지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나름대로 전략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소크라테스도 불법을 저지르지 않은 만큼 긴 변론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사람들의 편견과 시샘 때문일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데 그런 생각이 그에게 어깃장을 놓게 만든다. 그는 배심원단을 구성하고 있는 시민들을 향하여 “나는 여러분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여러분보다는 신에게 복종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한다. 심지어 아테네에는 자신의 봉사보다 더 큰 축복이 내린 적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따라서 사형에 처하는 대신에 무료로 식사를 제공해 마땅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배심원단은 그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13. 10. 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귀갓길에 우편함에서 <월간 에세이>(10월호)를 들고 왔다. 지난 여름에 '에세이'를 청탁받고 쓴 글이 이달에 실렸기 때문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대해 짧게 적은 글을 찾아서 옮겨놓는다.

 

 

 

월간 에세이(13년 10월호) 좋은 에세이, 좋은 시도

 

에세이란 말의 출처는 프랑스어 ‘엣세’다. 흔히 <수상록>으로 번역된 몽테뉴의 책 <엣세>가 내가 알기론 ‘에세이’의 기원이다. 고유명사가 장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전환됐다고 할까. ‘엣세이에’(시도하다)란 동사에 근원을 두고 있는 말이어서 내게 ‘에세이’는 뭔가를 시도한 결과물을 떠올려준다. 이 ‘시도’는 책임으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내 식대로 구별하면 그게 ‘기획’과의 차이다. ‘시도’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다하지도 않는다. 주사위를 던져서 원하는 숫자가 나올 확률이라고 해도 좋겠다. 반복해서 던지면 분명 한번은 원하는 숫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개 시도는 시도 자체에서 의의를 찾는다. “좋은 시도였어!”라는 격려의 말이 보통 그런 뜻을 함축한다.


프랑스어에 기원을 두어서인지는 몰라도 에세이란 장르에서 내가 연상하는 책은 몇 권의  프랑스 책이다. 프랑스인 저자가 쓴 책들 말이다. 중학교 때 라디오방송에서 들은 몇 가지 내용이 흥미로워서 처음 구입했던 <수상록>을 제쳐놓으면 내가 읽은 에세이의 서두에 오는 건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다. 짐작엔 대학 1학년 때 읽은 책이다. ‘에세이’란 말이 자주 ‘수필’이란 한국어로도 번역되지만 <시지프 신화>를 수필로 부르긴 어려울 것이다. 수필이란 말이 연상시키는 부드러움과는 전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우리말 대응어를 찾자면 이 경우 에세이는 시론(試論)에 가깝다. ‘시험 삼아 해본 주장’이라고 해야 할까.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이 시론을 철학과도 구별한다. 자신은 부조리의 감수성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지 이 책이 ‘부조리의 철학’은 아니라고 미리 일러준다. 물론 그런 철학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하니까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아마도 카뮈가 철학이란 말로 염두에 둔 것은 제대로 된 규모의 논증이 아닐까 싶다. 시론은 그러한 규모나 엄밀성에서 자유롭다.

 

사실 <시지프 신화>의 전체적인 구성이 잘 짜여 있다기보다는 적당히 구색을 맞췄다는 인상을 준다. 얼핏 체계적인 듯 보이지만 필연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체계적이기도 하다. 가령 첫 번째 파트인 ‘부조리의 추론’이 비교적 정연한 데 비하면 ‘부조리한 인간’과 ‘부조리한 창조’라는 나머지 두 파트는 엉성하다. ‘부조리한 인간’의 세 절이 각각 ‘돈후안주의’와 ‘연극’, 그리고 ‘정복’인 것은 말 그대로 부조리한 조합이다. 부조리란 테마를 부조리한 방식으로 다룬다고 하면 역설적이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 카뮈의 에세이는 시지프 신화에 대한 재해석으로 마무리된다. 카뮈는 자살이 부조리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 뭔가? 반항이다. ‘긍정’이란 이름을 가진 특이한 반항이다. 그 반항의 모델이 바로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이다. 거대한 바위를 산정까지 굴려 올리는 무용한 노동을 무한히 반복하는 게 신들이 시지프에게 내린 형벌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노동이 아니다. 카뮈의 관심을 끄는 건 정상에서 굴러떨어진 바위를 다시 밀어올리기 위해 터벅터벅 내려오는 시지프의 걸음이다. 잠시 동안의 휴식은 시지프에게 ‘의식의 시간’이다. 무얼 의식하는가. 자신의 노동과 그 결과 사이의 부조리이다. 이 부조리를 의식하되 긍정하고 다시금 바위에 몸을 밀착하는 것이 시지프의 반항이다.

 

그러니 시지프에게 감동적인 것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그 무용성에 대한 의식이다. 바로 그럴 때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라고 카뮈는 적었다. 나는 이 문장을 쓸 때 카뮈가 의기양양했으리라고 상상한다. 말 그대로 좋은 에세이, 좋은 시도다.

 

13. 09. 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